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 본문
20110219 (토요일) 두렵고 떨림으로 ...
고린도 후서 1 : 1 ~ 24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HNR)
1:2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HSN)
1:2 Grace and peace to you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NIV)
나는 은혜와 평강을 전하는가?
언제부터 인지 모르나 평강이라는 말씀이 내 마음을 적시기 시작하면서 귀한 말씀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여 이제는 모든 글을 쓸 때라든지 만남이 있을 때에는 평강이라든지 평안을 전하곤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임재하심을 고백하는 나의 믿음의 고백을 표현하는 언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새벽에 나눈 말씀이 와 닺습니다.
‘삼상4:13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
축복과 능력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두렵고 떨림을 받는다는 것은 임재하심을 잃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오는 두렵고 떨림과는 상황과 입장이 180도 다른 것입니다.
경외함이란 존경과 감사의 표현으로 창조주에 대한 친밀감의 극치를 말하는 것이라면
엘리 제사장의 두렵고 떨림은 절대자에 대한 진노와 책망에 대한 만나고 싶지 않은 소외감 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 항상 이 두 가지 입장을 갖게 됩니다.
물론 잘못한 부분에 대하여서는 영, 육적인 댓가를 지불되어야 함은 원칙입니다.
육적인 댓가를 마땅히 감수함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영을 소유한 창조물이기에 영적인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자신이 지어야 할 선악의 모든 댓가를 어찌 감당하느냐? 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먼저 선한 것에 대한 입장에서는 그 모든 댓가에 대한 영광은 마땅히 주님께 돌려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창조물이기에 피조물 되는 우리가 받을 영광은 없다는 것입니다.
비약적이긴 하지만 장남감을 만들거나 조립하여 가지고 논다면 누가 기뻐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장난감이 아니고 로봇으로 만들어 주지 않으셨기에 그 모든 것의 영광을
창조주 야훼 하나님께 돌릴 때,
주님은 그 기쁨으로 인하여 더 큰 잔치에 우리를 초청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악한 것에 대하여는 당연히 우리가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댓가라는 것이 영원한 죽음, 지옥의 권세에 눌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며, 창조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만드실 때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천사도 흠모할 만한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신 주님은 곤란한 난관에 부딪힌 것입니다.
정의를 내세우면 자신의 형상을 입은 사랑하고 극치의 걸작품인 인간을 죄의 댓가로 인하여 죽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내세워 모든 허물을 덮어 준다면 정의를 저버리기에 창조주 되시는 분으로서 입장이 난처함은 물론이고 역시 피조물인 볼품없는 사단의 조롱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독생자이며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중보자로 보내신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마땅하지만 그리스도 예수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하심으로 죄의 값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내가 받을 수치와 고난을 주님 예수가 대신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지으신 십자가와 그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내세우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나를 위해 주님이 지어주신 십자가를 묵상하는 하루를 열어 주십니다.
영광의 주님이 친히 나를 위하여 은혜와 평강을 나누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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