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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리움도 같이 흐르며 지워지지 않는 유산으로 남는것 같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까까머리 학창시절의 그 친구들은 ....
흔히들 마산을 두고 공기 좋고 물 맑아 인심이 후한 곳으로 일컬어져 왔다. 맞는 말이다. 온난한 해양성 기후를 접하고 살아가는 마산시민들은 잘모르지만 타지사람들이 마산에 오면 안온한 기후에다 살기 좋고 쾌적한 도시임을 실감한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일찍이 일제가 마산을 강제 개항시키고 나서 온난한 날씨에다 더 없이 맑은 물과 공기에 착안하여 거점도시의 기틀로 삼은 점을 눈여겨 봐야 할 것이다.먼저 기후부터 보자. 마산은 중위도 유라시아 대륙의 동안에서 길게 뻗은 한반도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기후의 특색을 보면 먼저 온대 몬순기후로 겨울철에 한랭 건조한 대륙성 극기단에서 발생하는 북서계절풍과 여름철엔 고온다습한 열대기단에서 불어오는 남동계절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기후 특색과 거의 ..
40년전 마산사람 연애 1번지 가포의 모습 기억 하시나요?‘소풍·연애장소 1번지’ ‘밤구미’라 불리던 ‘가포’[2015신년특집] 가포의 눈물- 장밋빛‘개발’의 이면기사입력 : 2015-01-08 00:00:00 1970년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마산 가포해수욕장 전경. 당시 마산지역 중·고생들의 소풍 장소, 청춘들의 연애 장소 1번지로 유명했다. /경남신문DB/대한민국은 여전히 ‘개발’ 중이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도시정비사업·조성사업·기반시설 확충’을 멈춘 적이 없다.여기에 갖가지 개발로 갈가리 찢긴 한 마을이 있다. 한때 ‘산장의 여인’이 살고 한갓진 유원지로 사랑받았던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이 작은 동네의 모습을 통해 ‘개발’이라는 장밋빛 전망 뒤에 숨은 아픈 이면을 들..
제일여고 터에 일본 신사가 있었다 일제가 우리 민족을 무력으로 위압한 것이 군대와 경찰이었다면 정신적으로 위압한 것은 신사(神社)였다. 마산 제일여고 터가 신사였다. > 지금은 제일여고 뒤에 큰 도로가 나있지만 신사의 뒤쪽은 산이었다. 바다에서 보면 산을 향해 일직선으로 급하게 상승하는 길의 끝이다. 길 양옆에는 벚꽃나무가 즐비했고 길바닥은 조약돌이 깔려 있었으며 신사의 신주문에 이르기까지 층층이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했다. 조선인이 거주했던 구마산 지역 산제당 가는 길의 꾸불꾸불하고 아기자기한 산길과는 몹시 대조적인 길이었다.신주문 앞의 왼켠 마당에는 큰 대포 하나가 있었는데, 그 대포도 신사와 함께 동향으로 서서 마산 시가지를 내려다 보았다. 마산시의 지붕에 일본의 식민정책을 상징하는 두 쌍벽이 ..
옛 마산 역사와 유산, 지우면 끝인가요기자명김훤주 기자입력 2014.08.06 00:29수정 2014.08.06 07:47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네이버밴드(으)로 기사보내기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바로가기글씨크기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 네이버밴드(으)로 기사보내기 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 이메일(으)로 기사보내기 기사스크랩하기[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7) 옛 마산마산은 역사가 오랜 고장이다. 가야 시대에는 포상팔국(浦上八國) 가운데 하나인 골포국(骨浦國)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신라 지배 아래 들어간 뒤로는 굴자군(屈自郡, 지금 창원)에 딸린 골포현이 됐다(676년, 문무왕 16). 757년(..
네온사인에 가려진 월영대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 김춘추 즉 태종 무열왕계의 왕권을 중심으로 전제 왕권을 수립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정치이념의 도구로 유학이 도입되고 6두품 계열의 지식인들은 국왕의 조력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강수, 설총 등이 그들이었다.그러나 혜공왕 말기부터 시작된 정치적 분규는 진골 귀족들 간의 왕위쟁탈전으로 신라 하대(下代)의 혼란을 가져왔고, 골품제도로 인한 6두품들의 정치 참여 또한 한계를 가지고 있어 이들은 정치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고 있었다.중앙의 진골 귀족들이 권력의 요직을 독점하였고, 지방의 유력자들이나 6두품의 정치적 진출은 차단되었다. 신라 사회에 불만을 품은 6두품 계열의 지식인들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심지어는 귀국을 포기한 채 당나라에 정착하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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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왜성 (馬山倭城)목차메뉴 접기정의내용참고문헌관련 정보관련 미디어 글자 크기 의견 제시URL 복사페이스북 공유트위터 공유마산왜성건축 유적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침입한 왜군이 축조한 성곽. 산성.이칭이칭용마산성(龍馬山城), 창원성(昌原城)•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접기/펼치기정의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침입한 왜군이 축조한 성곽. 산성.접기/펼치기내용용마산성(龍馬山城)·창원성(昌原城)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이 경상남도 해안지대에 쌓은 20여개 왜성(倭城) 중의 하나로 지금은 대부분..
경남신문 > 사회 마산 오동동 아케이드 역사 속으로기사입력 : 2011-08-10 01:00:00 옛 마산시 원도심의 중심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아케이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창원시는 9일 지난해 10월부터 시작된 오동동 아케이드 철거 작업을 8일 최종 완료했다고 밝혔다. 아케이드가 사라진 자리는 정비 공사를 거쳐 생태하천으로 재탄생,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된다. 시는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6월까지 공동주택과 점포가 있던 건물 1동을 철거한 데 이어 336개의 점포가 있던 건물 2동 철거를 마무리했다. 시는 오는 10월부터 복개 구조물 철거와 동시에 정비 공사를 실시, 회원천 3km 구간을 생태하천으로 꾸밀 예정이다. 281억 5000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이..
일본 신사(神社)가 우리 민족을 정신적으로 위압했다면, 물리력으로 우리를 억누른 것은 일본의 군대와 경찰이었습니다.일본군대의 마산진출은 1905년 마산선 철도가 건설될 때 쯤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진출은 1909년 7월 일본육군의 중포병대대(重砲兵大隊)가 진해에서 마산 월영동(현 월영동아파트단지)로 이전한 것과 같은 해 12월 대구헌병분유소(大邱憲兵分遺所)을 신마산에 설립한 일입니다.이 글은 월영동에 주둔했던 「육군중포병대대」에 대한 내용입니다.러시아와의 각축기에 일제는 율구미와 자복포 일대(현, 월영동 아파트 단지 및 구 한국철강 부근 일대)를 그들의 전관거류지로 확정했다가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을사조약이 체결될 즈음 이 지역은 군용지로 바뀌었습니다.그러다가 1908년부터 본격적인 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