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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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일생 . 차윤 cpr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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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일생
우리 어머니는 1906년 11월 20일에 마산시 중성동 145번지에서 홍두영 장로의 장녀로 출생하셨다.
1920년 4월 마산공립고등여학교 시절 급우들과 함께
어머니는 유년시절을 마산문창교회 유년주일학교에서 보냈다. 1912년 4월부터 1915년 3월까지 마산의신여학교에서 수학하신 후 그 해 4월부터 1918년 3월까지 동교고등과를 마치셨다. 이때 어머니 나이는 13살이었다. 1920년 4월에 마산공립고등여학교에 입학하여 1923년 3월에 동교를 졸업하셨는데 한국인 학생으로서는 제1회 졸업생이된다. 수학 중 교내 영어 웅변 대회에서 입상하여 일본 관동지역을 여행하는 특전을 누린바 있다.
마산의신(義信)여학교 교사로
1923년 4월에 마산의신(義信)여학교 교사로 임명 받아 1926년 3월까지 근무하셨고 당시 제자 중에는 시인 모윤숙(毛允淑) 선생도 포함되어 있다. 동료 교사 중에는 당시 한국의 시조 작가이며 ‘가고파’, ‘고향 생각’등을 작사하며 마산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널리 알림으로써 ‘민족 시인’이라고까지 불린 노산 이은상(李殷相) 시인과 독립 운동가이며 제2,3,4대 민의원, 제6,7대 국회의원으로써 당시 민주당 대표로도 활동한 바 있는 박순천(朴順天) 여사도 포함되어있다.
마산의신여학교 교사시절
(후열 좌 첫번째)
어머니 자신으로부터 확답을 받은 바는 없지만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마산의신여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어머니는 동료 교사 이은상 선생으로부터 구혼(求婚) 고백을 받은바 있었다고 하며, 이를 받아드릴 수 없어 교사직을 예정보다 일찍이 그만두고 1930년 10월에 서울동양선교회소속 성서학원에 입학하여 31년 3월 18일까지 신학을 연수하셨다.
7남매 중 장녀 홍순기 (의신여중교사)
이 과정에서 1929년 11월 9일 함경남도 안변의 차봉식의 차남 차창선 목사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마산에서 이름난 집안의 장녀이고 좋은 학교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아 당시 일제하에서 한국 여성으로서 획득하기 어려운 출세의 길이 열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유혹과 주변의 호의적인 권유를 무릎 쓰고 가난하고 고독한 이북 출신 외톨이 청년 목사를 생의 동반자로 선택한 어머니의 결단에 가족이 다 반대한 것은 물론 친정 부모는 아예 모든 인연을 끊고 앞으로 어떠한 고난에 직면하더라도 본가로부터의 도움을 기대하지 말라는 경고까지 받았다고 한다.
가난하고 고독한 이북 출신 외톨이 청년 목사와 결혼
그래도 서울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는 생활에 위협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1932년 1월에 장남 차윤이가 서울 제부동에서 태어나고 다음해에 누이동생 혜실이가 연이어 태어났다.
1929년 어머니 신혼 시절 (신랑 차창선 목사)
서울에서 원주로 원주에서 김해로 교회를 옮기면서 성격이 곧고 융통성 없기로 유명한 목사 남편 밑에서 사모로서 겪어야만 했던 어머니의 고난의 역사를 여기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떠한 고난보다도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시기는 아버지가 ‘신사참배를 거절하고 일본 천황을 경배하는 것을 우선하지 않는 예배를 강행하며, 불온서적을 소장하고 있다.’는 죄목으로 1943년부터 1945년 해방되는 날까지 한 두번의 병보석을 제외하고는 내내 감옥 생활을 해왔을 때 어머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감당해야 했다.
해방될 때까지 투옥돼 고문당했던 아버지
남편 차 목사는 성격이 강직하여 불의에 대해서는 생명을 걸고 싸우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감옥 생활도 남다르게 고생을 많이 하였다. 하루는 어머니가 딸 (차혜옥, 현재 마산 진주 지방교도소 담당 목사)을 업고 감옥으로 남편 면회를 갔다. 한참 동안 기다린 후에 차 목사가 기어서 나오는데 무릎에 구멍이 나있고 찢어진 무릎 뼈 조각이 피와 엉켜 붙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옆에 있는 딸을 보라고 하니 눈동자가 돌아가 초점을 잃고 있었다고 한다. 심한 고문의 결과였다. 흐르는 눈물과 쏟아지는 땀방울이 비오 듯하였다. 가지고 간 수박과 감자를 조금이라도 먹게 하려고 수박을 갈라 놓았지만 혓바닥으로 핥지도 못하더라고 한다. 그리고 손을 보니 뼈와 가죽만 남아있고 그 손에서 퀘퀘한 냄새가 났다. 알고보니 그 손으로 변기 옆에 앉아서 구더기가 변기 바깥으로 기어나오면 다시 집어 넣는 일을 하였단다. 왜경이 “네 발로 기어 다니며 개 짖는 흉내를 내라”고 하기에 “사탄아, 물러가라”고 죽을 힘을 다하여 소리쳤더니 왜경이 기가 꺾여 물러가면서 ‘호랑이 목사’라면서 무서워했다고 한다 (최정원 목사의 증원, 전 임마누엘 신학교 창설자).
또 한번은 큰 아들 차윤(필자)이가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보리밥 도시락의 뚜껑을 여는 순간 감옥의 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대로 다시 싸서 들고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형무소에 달려가 담당 간수에게 아버지에게 이 도시락을 넣어달라고 애걸을 하였으나 욕설과 발길에 차여 쫓겨 나왔다. 그때에 어린 가슴에 나라 없는 민족이 얼마나 비참한가 생각하며 나라와 아버지의 석방을 위하여 울면서 기도하였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홍순기 사모는 병아리를 키워 생계를 이어갔으며 다섯 명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초근목피로 근근이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루가 천년 같은 고통의 나날을 살면서도 어머니는 하나님이 살아있음을 믿었기에 소망만은 잃지 않고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을 어머니는 1945년 8월 13일로 기억하신다. 뜨거운 여름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이었다. 앞 마당에 흐트러져있는 벼 뭉치에 남아있는 이삭을 주어 담고 있는 어머니 앞에 피골이 상접한 아버지가 귀신처럼 나타난 것이다. 그 때의 어머니의 놀라움을 어떻게 표현하랴. 웬일인가고 했더니, 형무소 소장이 “사흘을 줄 테니 마지막으로 가족을 만나고 8월 15일 저녁 8시까지 돌아오라”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그 ‘마지막’이라는 말이 어머니의 가슴을 찔렀다. 어머니는 더 묻지도 않았다. 시간이 아까웠다. 죽은 듯이 잠자는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이틀 동안, 밤에는 예배와 기도, 낮에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도와서 벼 이삭을 훌트는 기계를 돌렸다. 들어가 쉬기나 하라는 어머니의 강권을 무시하고 어머니 옆을 기어이 떠나지 않았다.
형무소로 귀대하는 날이 다가왔다. 1945년 8월 15일, 어머니는 아버지가 입고 돌아갈 속옷과 ‘국민복’ (국방색 유니폼)을 보따리에 챙겨 넣고 있었다. 흘러가는 시간을 증어하면서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목사의 사모로서 결코 약한 모습, 불신앙적 작태를 보이지 않으리라 결단하지만, 한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해가 중천에 떠서 따갑게 쪼이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천둥 같은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미공군(美空軍) 폭격기의 공습을 예고하는 경보이겠지 생각하고 정말일 경우에는 연습한데로 뒷마당에 파놓은 동굴 대피소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만 하면 된다. 아직은 거기까지 간 일은 없었다. 그런데 사이렌이 멎지를 않았다. 한번, 두번, 세번, 네번…… 어머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담 너머로 동네 구장 구서방이 “해방이오, 해방이요!”, “일본이 항복했소!”, “해방이요, 해방이요.”하고 소리치면서 동네 집집마다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는 게 아닌가. 어느덧 동네사람들이 구장집 마당에 다 모였다. 처음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모여들었으나,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일본 천황(天皇)이 방송으로 미국에 항복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이제 망하게 됐으며 조선에 있는 모든 일본 사람들이 일본 본국으로 쫓겨가게 됐다는 말들이 퍼지게 되자 구장집 마당은 흥분의 도가니로 변해갔다.
36년 동안의 일제하에서의 민족의 설움이 컸던 만큼 해방의 기쁨이 홍수같이 밀려오는 이 동네 마당에 논에서 밭에서 새까맣게 타버린 얼굴로 모여든 동네사람들, 손에 호미와 행주치마를 벗어 들고 춤을 춘다. “꿈이거든 깨지나 마소, 쾌지나 칭칭나네”하면서 껑충껑충 뛰며 얼싸안고 기뻐하는 동네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홍순기 사모는 죽기직전에 살아서 돌아온 남편 차창선 목사와 함께, 이 놀라운 기적을 이 민족에게 베푸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와 찬양을 드렸다.
며칠 후 수감 중에 있던 몇 신도들을 통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차창선 목사는 8월 18일에 사형될 예정인 몇 명의 목사와 신도들의 명단 속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개척교회 열고 상이군인과 피난민 도와
힘든 살림에 오랫동안 감옥 생활로 고문당한 온몸의 상처와 피골이 상접해서 송장같이 되어버린 남편을 이끌고 어머니는 친정이 있는 마산으로 이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정에서는 귀한 딸을 그렇게나 고생시킨 목사 사위에 대한 감정이 아주 사라지지도 않았지만 친정 부모가 그리워 가까이 와서 살겠다는 큰 딸이 측은하고 불쌍해서 용마산 산기슭 (지금의 산호동)에 허름한 집 한 채를 마련해 주셨다. 어머니는 거기서 마신 갈릴리성결교회를 개척하고 마산지구의 선교사업과 6.25 전쟁으로 부상당한 상이군인들과 피난민을 돕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개척교회를 하다 보니 어려운 일도 많았다. 더구나 신도들이라고는 거의 모두가 피난민이요. 고아요. 상이군인이다 보니 헌금을 낼 수 없는 처지이고 오히려 교회에서 먹이고 재워줘야 할 형편이기에 우리 가족의 살림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동생들이 학교 월사금(수업료)를 내지 못하여 들에서 헤매다가 집으로 울며 되돌아 오는 일은 차라리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 보다는 배가 곯아 견딜 수가 없었다. 상황이 급해질 때면 어머니는 그때서야 외갓집에 찾아가서 밥을 얻어 가지고 와서 8남매 자식들을 먹여 살려내곤 했다.
이런 때에도 아버지 차 목사는 자식들 앞에서 유약함을 보이지 않았다. 먹을 것이 없으면, “오늘부터 금식이다” 일괄하고 온 식구가 금식에 들어갔다. 한번은 차 목사가 집회에 다녀오는데 뒤에 쌀을 한 가마를 지고 오는 것을 동생들이 보았다. 부흥회를 한 교회에서 감사조로 특별히 보내주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오늘 저녁에는 모처럼 쌀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나 보다 생각하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풀어보지도 않고 짐꾼을 시켜 시장에 내다가 팔고는 대신 고구마, 보리쌀, 감자 등을 사다가 수십 명의 상이군인, 고아, 걸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렇게 힘겨운 삶을 살면서도 우리 어머니의 말과 표정에서 낙심이나 비관이나 좌절을 본 일이 없다. 기가 막힌 고난의 생을 다 살아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에게는 사는 것이 재미가 있고 감사할 뿐이었다. 소박한 동네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서 유머를 발견하고 하루 종일 웃기를 멈추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그는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내 몸빼는 어디갔노”
둘째 딸 혜옥이는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친구들간에 인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데, 늘 마음에 거슬리는 것은 어머니가 너무 헐고 누추한 옷을 입고 있어서 누가 보면 집의 일하는 사람으로 알지 그 자랑스러운 어머니로 소개하기가 부끄러웠던 모양이었다. 특별히 엄마가 즐겨 입고 있는 그 시꺼먼 ‘몸빼바지’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갈아 입을 만 한 바지가 없는 것도 아니기에 손님이 오는 날만이라도 좀 깨끗한 걸로 바꿔 입기를 애원했지만 엄마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것 같다. 동생은 참지 못하고 어느 날 그 ‘몸빼’를 불살라 버렸다. 엄마가 바깥에서 돌아와 그 몸빼를 찾는데, 있어야지…… “내 몸빼는 어디갔노”하면서 하도 안타깝게 찾으시기에 동생이 참아볼 수 없어 이실직고 했더니, 어머니가 “아이구 우짜끼나, 와 그랬노…… 그것이 내게 얼마나 귀중한 옷인 줄 우째 몰라주노, 이 가스나야”하시면서 “이 동네에 어울리는 옷인데……그 아까운 옷을……”하면서 애석해 하시더라고 한다. 가난한 동네 사람들하고 어울리기 위해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사는 일에 마음 쓰신 어머니가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우리 어머니의 가장 두드러진 성품은 그의 대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다. 어느 때나 어디서나 주변을 둘러보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발견하고 “아, 참 좋구나!”, “아, 참 아름답구나”를 혼자 중얼거리거나 노래하신다. 자식들하고 길을 같이 가더라도 “야야, 저것 좀 봐라…… 이것 좀 봐라……”, “재밌째, 신통하제……”를 연발하시는 바람에 서둘러서 어디를 가지를 못하겠다고 불평하는 때도 있었다.
이 말을 하다 보니까 생각나는 일이 있다. 1953년 마산여자고등학교에서 어머니 앞으로 통지서가 왔다. 동교 동창회에서 어머니를 동창회 회장으로 모시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학교 개교기념일을 맞이하여 학교동창들과 학교교직원들과 학생들이 다 모여서 축하하는 행사에 마여고 제1대 동창회 회장으로 오셔서 기념사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당시의 어머니의 처지로서는 동창회 회장직을 떠맡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일뿐더러 가난과 싸우며 겨우겨우 살아가는 8남매의 어머니의 그 모습으로는 아무데도 갈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당장 입고 갈 옷도 없었다. 그래도 가야 할 명분은 단지 어머니가 마여고 제1회 졸업생이라는 것과 몇 안 되는 동창들 중에서도 아직도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는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가시기로 결심하고 어머니의 유일한 외출복인 ‘모시적삼’과 흰 치마를 다려 입고, 마여교에 재학중인 큰 딸의 손에 이끌려 2천여 명이 모인 기념식장에 나타났다.
마산여자고등학교 동창회 제1대회장 홍순기
아무리 그래도 마여고 동창회회장이라면 적어도 파마 머리에 화장도 하고 안경도 쓰고 사치하지는 않더라도 화사한 투피스에 구두라도 신고 나올 것을 예상했던지 마중 나와 안내하는 교장선생, 교감선생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고 한다. 왜나면 거기에 나타난 동창회 회장은 아주 작은 키에 농사 짓느라고 햇빛에 거슬린 얼굴에 화장은 고사하고 분도 안 바르고 자줏빛 모시 치마 저고리에 큼직한 검은색 핸드백을 들고 흰 고무신을 신은 전형적인 농촌 할머니였기 때문이었다.
동창회장이 된 고무신 신은 시골 할머니
(여기서부터는 당시 그 자리에 참석했던 큰 딸, 어머니의 여동생, 몇몇 참석자들의 증언을 모아 간략히 요약한 것이다.)
교장선생님의 불안한 어조로 소개가 끝나고 사회자의 마이크 높이 조정에 이어 마여고 제1대 동창회 홍순기 회장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사랑하는 마여고 선생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후배 여러분,
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동창회 회장으로 뽑아주시고 존경하는 선생님들과 젊고 아름다운 후배들을 만날 수 있는 기쁨을 주신 것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중략)
제가 여기 서서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지식이나 고상한 말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또 드릴 수 잇는 것은 제가 33년 전 이 아름다운 학교에 첫발을 디뎠을 때 그 때 제가 받은 감격과 감동을 여러분에게 다시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지금, 고개를 돌려 오른편에 내다보이는 합포 바다를 바라보십시오. 저기 저 섬들과 그 사이로 지나가는 배들과 끝없이 펼쳐있는 수평선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여러분 온 세계에 나가있는 우리 동포들이 조국이 그리울 때마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 합포 바다를 노래한 ‘가고파’를 부리며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하면서 얼마나 많은 한국의 혼들이 이 바다를 자기네 고향처럼 가슴에 품고 눈물을 흘리며 노래하는지 아세요. 이제 여러분 고개를 돌려 왼쪽에 솟은 저 우리의 무학산을 한번 바라보세요. 얼마나 수려합니까. 수려하기만 합니까. 잘 보세요. 살아있는 학이 춤추듯이 저 큰 날개를 펴서 바야흐로 비상하려는 저 모습 여러분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중략)
저도 그 동안 험한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많은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저의 가슴속에 아직도 변치 않고 남아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여고에 입학해서 저 아름다운 바다와 저 수려한 무학산을 바라보며 느낀 그 큰 감동, 그 감동은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어 나의 자랑과 위로와 힘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공부하시렵니까. 여러분에게 무엇이 진정으로 귀한 것 입니까. 세상의 지식도 살아가는 방법도 다 배워야겠지만, 조물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아름다운 대자연속에서 배울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여러분, 아침 저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저 아름다운 합포바다와 저 수려한 무학산을 한번 다시 바라보면서 제가 느꼈던 그 감동, 그 사랑, 그 감사, 그 행복을 여러분들도 느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생님이 서있는 쪽에서 누군가가 박수를 쳤다. 그 박수는 물결을 타듯이 학생들 쪽으로 퍼져나가더니 나중에는 마여고 운동장을 뒤엎듯이 울려 퍼졌다. 어머니가 단에 서기 전만 하더라도 불안하고 어정쩡했던 교장 선생, 교감 선생, 그리고 동창회 간부들의 몸놀림이 확 달라졌다. 단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어머니를 맞이하면서 무슨 죄 지은 사람들처럼 거의 90도로 절을 하며 야단들이다. ‘사람 잘못 보았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뜻임이 분명하였다. 이로부터 어머니는 5년간을 마여고 동창회 회장직을 연달아 역임할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밭매기
아주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큰 아들인 나와의 관계는 각별하였다.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가 하는 말이나 생각이 늘 마음에 들고 존경스러웠다. 어떻게 해서든지 어머니를 놀라게 하고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나의 생의 목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어머니를 놀라게 하기 전에 어머니가 먼저 나를 항상 놀라게 하는 일이 많았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고 생각된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의례 양덕에 있는 ‘반넷들’에 가서 해 떨어지기 전에 몇 골이라도 밭을 매고 돌아오는 것이 나의 일과처럼 되어있었다. 내게는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어느 더운 여름날 하교에서 돌아와서 밭 매로 가려고 하고 있는데 동생이 “엄마가 아침부터 ‘반넷들’에 가 계신다.”고 했다. 그 먼 길을 얼마나 빨리 뛰었는지 도착하니까 땀에 쫄딱 젖어 있었다.
어머니하고 같이 오순도순 이야기 하면서 밭을 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어머니도 나하고 같이 밭 매는 것이 즐거워 보였다.
그 날도 어머니는 내가 항상 듣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유년 시절, 학창시절을 이야기 하시다가 어느 대목에 와서 그 때 외국인 음악 선생님에게 배운 노래라면서 콧노래를 부르는데 얼마나 듣기 좋던지 가르쳐 달라고 졸랐더니 가르쳐주신 노래가 “Gone are the days when my heart was young and gay: Gone are my friends from the cotton fields away..”라는 노래와 “It's a long long to Tipperary, It's a long way to go..”라는 노래였다. 그 따가운 햇빛아래 계속 흘러내리는 땀을 흙 묻은 손으로 닦으시며 옛날을 회상하시면서 내게 영어 노래를 한 소절, 한 소절 가르쳐 주시던 어머니가 얼마나 아름답고, 놀랍고, 존경스러웠는지 지금도 어머니의 그 모습이 내 가슴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 때에 받은 충격과 감동이 내 일생을 좌우하는 꿈과 행복과 영감이 되어 내 마음속에 영원토록 남아있게 될 것이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어머니
어머니는 또한 나에게 있어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1950년 6월, 6.25가 터져서 이북의 공산군이 한 때 경상남도 함안까지 쳐내려 와서 이제 마산을 점령하려고 밤낮으로 포 사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미국 해병대 1개 연대가 마산에 주둔하면서 이 지역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피난민으로 가장한 적색파괴분자들이 들끓고 잇던 때라 삼엄한 경비에 적지 않은 민간인들이 착오로 희생되는 사례가 많았다.
새벽기도모임에 빠지지 않고 다니시는 어머니가 새벽시간에 길을 잘못 들어 미국부대 경비초소 근처를 헤매고 있었다. 무심코 지나가는 어머니를 바로 옆에서 갑자기 총기를 든 미국 병사가 불쑥 나타나더니 큰 소리로 “Who’s it?” 고함을 질렸다. 어머니는 너무 놀라서 정신을 잃고 주저 앉을 뻔하였다. 정신을 가다듬고 뭐라고 답을 해야겠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에 그 병사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Who is it?” 틀림없이 누구냐고 묻는 말일 텐데 무엇이라고 말해야할지 몰랐다. 어머니는 잠시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리고 순간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어머니는 큰 소리로 “아이∙엠∙크리스챤∙아이∙고∙투∙쳐어-치 (I AM CHRISTIAN. I GO TO CHURCH)라고 천천히 힘껏 소리 질렀다. 그 흑인 병사가 알아 들은 모양이다. 겨누고 있던 총을 내려 쥐고 가까이 다가와서 확인하더니 하얀이를 보이며 웃으면서 “So you are Christian. You go to church, uh?” 하더니 친절히 교회로 가는 길로 안내까지 해주더라고 어머니는 말하였다.
나는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듣고 또 한번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가 영어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해 보았다. 여학교 시절에 영어웅변대회에 나가서 우승하셨다고는 듣고 알고 있었지만 그건 35년 전일이다. 그 후 한번도 영어로 말해본 일이 없는 우리 어머니가 그와 같이 위급한 상황하에서 어떻게 그렇게 필요 충분한 두 마디 영어 말을 분명하게 말함으로써 일촉즉발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기가 막혀 할말을 잃었다. 만일 내가 어머니 입장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만 해도 진땀이 난다. 놀라서 정신을 잃고 우물거리다가 또는 쓸데없는 말만 많이 늘어 놓다가 세 번째 수하(誰何)마져 놓치고 총에 맞을 가능성이 높다. 그 후 나는 이렇게 기도하게 됐다. “하나님, 저에게 많은 지식보다 어머니에게 허락하셨던 그런 지혜를 주시옵소서.”
1975년 어머니는 마산시로부터 「훌륭한 어머니」상을 수상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1984년 4월 16일 오전 2시 50분 마산갈릴리성결교회자택에서 사랑하는 큰아들 차윤이가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천사의 얼굴로 소천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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