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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펌) 40년전 마산사람 연애 1번지 가포의 모습 기억 하시나요? 본문

부르심의 축복/동행 in Masan 1981

펌) 40년전 마산사람 연애 1번지 가포의 모습 기억 하시나요?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5. 7. 18. 22:05

40년전 마산사람 연애 1번지 가포의 모습 기억 하시나요?

‘소풍·연애장소 1번지’ ‘밤구미’라 불리던 ‘가포’
[2015신년특집] 가포의 눈물- 장밋빛‘개발’의 이면

  • 기사입력 : 2015-01-08 00:00:00
  •   

  • 1970년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마산 가포해수욕장 전경. 당시 마산지역 중·고생들의 소풍 장소, 청춘들의 연애 장소 1번지로 유명했다. /경남신문DB/
    대한민국은 여전히 ‘개발’ 중이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도시정비사업·조성사업·기반시설 확충’을 멈춘 적이 없다.

    여기에 갖가지 개발로 갈가리 찢긴 한 마을이 있다. 한때 ‘산장의 여인’이 살고 한갓진 유원지로 사랑받았던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

    이 작은 동네의 모습을 통해 ‘개발’이라는 장밋빛 전망 뒤에 숨은 아픈 이면을 들여다본다.


    ‘밤구미’에서 ‘해양신도시’로

    2003년 9월. 태풍 ‘매미’가 몰려왔다. 서항부두에 적재돼 있던 목재 더미가 율구만에 둥둥 떴고 풍랑에 떠밀린 고기잡이배들이 방파제를 타고 넘어 횟집을 습격했다. 그리고 2015년 1월, 10년 만에 다시 찾은 가포동은 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거기엔 태풍이 불어도 배가 떠밀려올 ‘바다’가 없었다.

    밤나무가 많아 ‘밤구미’로 불리던 3·4통 일대와 율구만은 산업단지가 들어설 ‘해양신도시’로 변해 있었다. 매립과 함께 10여 곳에 이르던 장어집과 횟집은 태반이 문을 닫거나 이주했고, 현재 장어집 3곳만이 ‘장어구이 골목’을 지키며 영업 중이다.

    30년째 장어구이 골목에서 ‘가포영도장어구이’를 운영하고 있는 김수하 (66)씨를 만난 건 지난달 중순 가포동 주민자치센터에서 열린 한 설명회 자리에서였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절대 안 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주민들도 일제히 “안 된다”고 외쳤다. 대체 뭐가 ‘안 된다’는 말일까?


    흐지부지 무산된 협약

    가포동 가운데 자리 잡은 국립마산병원은 현재 ‘현대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숙원사업이었던 노후시설 개선을 위한 신축 사업으로, 지난 8월부터 기존 건물에 대한 철거에 들어갔다. 하지만 새 병동이 들어설 장소를 두고 주민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별관 자리 (가포동 512-1 일원)로 부지를 옮기기를 바라는 주민들과, 현 부지에 병동을 증축하겠다는 병원 측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주민들은 “지난 60년간 말없이 기피시설인 결핵병원을 보듬었는데, 왜 약속을 어기느냐”고 강분한다. 지난 2007년, 옛 마산시는 가포고개를 가로지르는 2차선 도로를 직선화하고, 이 도로를 기점으로 별관 쪽으로 국립마산병원을 이전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병원 신축 비용은 국고 부담으로 하고, 이전 후 남는 병원부지는 시가 매입해 택지로 조성하는 도시개발사업도 실시협약에 포함했다.

    하지만 2010년, 마산시는 통합 창원시가 됐고 옛 마산시가 추진하던 ‘역점사업’이었던 이 계획은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장기 재검토사업’으로 강등됐다. 사업이 흐지부지 무산되자 국립마산병원은 병원 신축 방식을 민간투자방식(BTL)으로 변경, 2011년 12월 국회의 예산 승인을 얻어 현 부지에 병원을 증축하는 현대화 사업을 추진했다.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던 주민들은 분개했다. 가포주민대책위원회를 만들었고 ‘신축 반대’ 문구를 넣은 플래카드를 곳곳에 내걸었다. 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수하씨는 “별관 부지로 병동을 옮겨가지 않을 거면 가포를 떠나라”고 못을 박는다.

    국립마산병원 측은 ‘우리도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병원 관계자는 “통합만 아니었다면 도로 직선화와 병원 이전, 택지 개발 모두 원만하게 이뤄졌을 텐데 사업 이행 주체인 마산시가 없어지자 모두 물거품이 됐다”며 “그렇다고 10년 이상 끌어온 병원 노후시설 개선사업을 멈출 수는 없어 현 부지에 병원 신축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개발 부작용이 가포를 덮치다

    가포는 마산만과 청량산, 갈마봉이 어우러져 만드는 맑은 공기와 수려한 경관으로 일제강점기엔 상이군인요양소가, 1946년엔 국립마산병원이 세워졌다. 1960~70년대엔 해수욕장이 개장돼 인산인해를 이뤘다. 박정희 대통령이 수영을 하고 가포횟집에서 막걸리를 마셨다는 일화는 가포 주민이면 다 아는 ‘좋은 시절 이야기’다. 당시 마산 중·고생들의 소풍 장소, 청춘들의 연애 장소 1번지는 ‘가포’였다.

    하지만 갖가지 ‘개발’의 부작용들이 가포를 덮쳤다. 한일합섬, 한국철강, 마산자유수출지역에서 배출되는 오·폐수에 오염된 해수욕장은 악화일로를 걷다가 1976년 완전히 폐쇄된다.

    김수하씨도 이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당시 해수욕장 앞바다에 홍합 양식을 크게 했습니다. 물이 자꾸 오염되니까 죽겠더라고요. 버티다 버티다 결국 양식장을 진동으로 옮겨갔지요.”

    해수욕장이 사라진 가포는 유원지로 바뀌었다가 1999년 창원 가음정지구 택지개발사업에 의해 산림이 훼손되고 2009년 가포지구 매립으로 유원지 기능마저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도내서 가장 인구 작은 동(洞)

    한때 4000명 가까운 주민이 거주했던 가포동엔 2015년 1월 현재 648가구, 1440명이 거주하고 있다. 도내에서 가장 인구수가 적은 행정동이다.

    가포동은 본동이라 불리는 1·2통, 가포고등학교와 결핵병원이 있는 3통, 장어구이 골목을 포함하는 4통, 한국철강 터와 맞닿은 5·6통 이렇게 6통으로 이뤄져 있다. 이 여섯 동네 어느 곳도 ‘개발’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 없다.

    가장 먼저 주민들이 밀려난 곳은 3통이었다. 유원지가 폐쇄되자 즐비하던 횟집들이 모두 문을 닫았고, 해양신도시(가포지구) 매립이 시작되면서 보상을 받아 이주한 집도 많다. 지금은 35가구가 남았다.

    4통은 오는 12일 개장하는 가포신항과 해안도로를 잇는 가포신항 배후도로의 일부인 터널공사(터널길이 960m)를 앞두고 있다.

    1962년 갈마봉 자락에 이뤄졌던 사방사업으로 마을이 형성된 5·6통은 (주)부영이 946가구를 공급하는 공공임대 아파트 단지 조성 예정지인 옛 한국철강 터와 가포1대대 터와 맞닿아 있다.

    가포고등학교 입구에 설치된 가포해수욕장 옛 추억의 터.
    ◇ 가포동 연대표
    1900년 러시아 단독 조차지 설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창원군으로 편입
    1941년 조선총독부 산하 ‘상이군인요양소’ 설치
    1943년 창원군 구산면 가포리에서
    마산부로 편입
    1946년 국립마산결핵요양소 개원(국립마산결핵병원-국립마산병원으로 개칭)
    1949년 마산시로 개칭
    1969년 마산교육대학(창원대학교 전신) 설립
    (현 가포고교 자리)
    1971년 가포동사무소 신축
    1976년 가포해수욕장 폐쇄
    1983년 마산교육대학 창원으로 이전
    1989년 출장소 설치에 따라 합포출장소에 속함
    1997년 사천~김해 해월 송전탑 착공
    (높이 208m 국내 최대)
    1999년 ‘가포동유적’ 발견
    (국내 최초 청동기 매납(埋納) 유적)
    2004년 마산기상대 신축 이전
    육군39사 가포대대 내서읍으로 이전
    2008년 가포동 관통하는 마창대교 개통
    2009년 가포매립지 조성사업으로
    가포유원지 폐장
    2010년 해양신도시 착공
    통합으로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
    2015년 1월 가포신항 개장

    찢어진 가포본동, 황폐한 마음

    여섯 마을 중 국립마산병원 신축문제에 가장 냉담한 반응을 보인 곳은 1·2통 주민들이었다. 주민들은 “가포에서 일어나는 일, 우리랑은 상관없다”고 말한다.

    이곳은 2005년부터 ‘가포본동 보금자리 주택사업’이 추진돼 온 곳이다. 일부 주민은 보상을 받고 이주했고 일부는 보상액에 만족하지 못해 이의신청을 한 상태로, 남은 주민 300여명도 3월 말까지 모두 이주를 마쳐야 한다. 마을 곳곳에는 ‘공공주택 지구 내 소재한 분묘를 3월 31일까지 이장하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주민들이 내건 ‘할매 할배들 어데로 가라꼬?’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도 눈에 띈다. 이 일대는 약 300년 전부터 안동 김씨와 분성 배씨, 전주 이씨가 터를 잡은 집성촌으로 대대로 물려받은 선산에 조상을 모시고 전답을 일구며 살아왔다. 하지만 ‘보금자리 사업’에 의해 일가붙이들이 ‘보금자리’를 떠나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주민들은 말했다. “떠나는 마당에 신도시가 들어오건 병원이 들어오건 상관없다. LH에 보상비 많이 달라고 쓸 거 아니면 기사 쓰지 마라!”


    개발과 개발, 그리고 또 개발

    한 주민은 말했다. “안 그래도 해양신도시, 보금자리 주택 때문에 동네가 황폐화될 대로 황폐화됐는데 병원도 그 자리에 그대로, 더 크게 짓는다고? 안 된다!” 현재 가포동 주민들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한 말일 것이다.

    한 시 관계자는 “재산권 행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산 것도 억울한데, 통합에 의해 무산된 사업에서 느끼는 소외감, 최근엔 생활 근거지까지 잃어버린 것에 대한 분노가 국립마산병원 신축문제에 의해 표면화된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거기엔 또 다른 층위의 ‘본질적인 문제’가 하나 더 있다. 가포의 본모습이 훼손되고 공동체가 해체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주민들이 있는 반면, 일부 주민들은 역설적이게도 ‘또 다른 개발’을 꿈꾸고 있다는 점이다. 개발의 힘을 입어 더 윤택하게 살고 싶은 욕망. 그들이 뿜어내는 ‘개발에 대한 분노’에는 ‘개발에 대한 욕구’가 숨어 있다.

    2007년 보도됐던 한 기사에 이런 문구가 있다. ‘국립마산병원 이전에 따른 택지 개발, 해양신도시, 보금자리 주택사업을 통해 가포동 일대는 마산시의 신흥 주거지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머잖아 가포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고즈넉한 해안가 마을이 아니라 공단과 아파트가 즐비한 최첨단 신도시로 떠오를 것이 분명해 보인다.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 '결핵문학의 산실' 국립마산병원 시련의 역사90년대 이후- 도시개발 장애물 전락


    한국전쟁 직후 남한 인구 약 2000만명 중 무려 130만명이나 결핵을 앓았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60년대 이후에도 결핵 환자는 여전히 많았고, 환자들은 요양을 하기 위해 가포를 찾았다.

    결핵에 대한 변변한 치료약이 없었던 시절에는 맑은 공기에서 요양을 하는 것이 최고로 손꼽혔기 때문이다.

    가포에 결핵치료 시설이 들어선 것은 조선총독부 산하 ‘상이군인요양소’가 세워진 1941년 일제강점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광복 이듬해인 1946년 6월 기존 요양소 건물을 보수하고, 일부는 신축해 200개 병상을 갖춘 ‘국립마산결핵요양소’가 문을 열었다. 국립마산결핵요양소는 이름을 바꿔가며 한국 결핵 치료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글쟁이들의 직업병’이라 불릴 만큼 많은 문인들이 결핵을 앓았고, 마산을 찾았다. ‘벙어리 삼룡이’의 작가 나도향은 1920년대 마산에서 요양을 했고, 마산결핵요양소가 세워진 이후에는 김대규 시인 등 요양소에 있던 환자들이 결핵잡지 ‘요우’와 요양문학 동인지 ‘청포도’, ‘무화과’를 펴내기도 해 마산에는 ‘결핵문학’이라는 독특한 문학적 흐름이 형성됐다.

    하지만 정작 결핵문학의 근거지였던 국립마산병원은 ‘시련의 역사’를 겪어 왔다.

    도시개발이 본격화되던 1990년대 후반, 가포동 일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개발택지가 부족해지자 도시개발에 장애가 된다는 여론에 따라 국립마산병원의 이전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2000년대 초 옛 마산시는 국립마산병원을 진전면 국군마산병원이 있는 외곽으로 이전하기로 하고, 국군마산병원은 당시 진해시 현동 해군해양의료원과 통합한다는 구체적인 방안을 내놨다. 그러나 이전 예정지인 진전면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하며 나섰고 결국 무산됐다.

    제자리걸음을 걷던 병원 이전 문제는 2004년 제2병동(가포동 산 14번지)이 있는 곳으로 이전을 추진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2007년 5월 옛 마산시와 보건복지부는 국립마산병원을 현 부지(가포동 512)에서 맞은편인 별관부지(가포동 512-1) 일원에 500병상 규모의 현대식 건물을 신축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MOU를 체결했다. 이전 부지를 시가 매입해 신축해 주는 대신 현재의 부지를 받아 차액을 정산하는 소위 환지(換地)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2009년 체결한 실시협약이 ‘신축’이 아닌 현 부지에 ‘재건축’을 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관련법상 정부와 기초지자체 간 토지를 양여할 수 없고, 차액이 4분의 3이상 발생하는 재산에 대한 교환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현재 국립마산병원은 노후 시설 개선과 결핵 치료에 대한 종합적·전문적 의료서비스 제공을 목적으로 현 부지(약 2만9000㎡)에 지하 1층, 지상 7층 건물(병상수 354병상)을 새로 짓는 ‘국립마산병원 현대화사업(BTL)’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행정이 당초 약속했던 이전을 추진하라”며 재건축을 강하게 반대해 ‘기피시설’인 국립마산병원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글·사진= 김언진 기자
  • 50·60년대- 한국 결핵치료 중심지

  • 가포동 국립마산병원이 지난해 8월부터 기존 건물에 대한 철거에 들어갔다.

  •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 해양신도시 가포지구. 1960~70년대 인산인해를 이룬 해수욕장이 사라진 가포는 유원지로 바뀌었다가 현재 가포신항 배후시설이 들어서 있다./전강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