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96년에 인도네시아에 들어왔을 당시 환율은 달러당 약 2,300 루피아였다. 미국 중서부에서 하위 중산층으로 살아온 우리는 갑자기 백만장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린 우리의 위치를 즉각적으로 인식하진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인도네시아에선 상대적으로 부유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부에는 요구사항과 책임이 뒤따르게 된다. 사람들은 우리가 실제로 가진 돈보다 우릴 부유하게 봤고, 우리가 그 돈으로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들을 돕고 싶은 건 사실이었지만, 몇 가지 질문에 우린 사로잡혔다. 누구를 도와야 하는가? 어떻게 도와야 하는 것인가? 장기화된 정치-경제적 위기로 해가 갈수록 상황은 점점 어려워졌다. 환율이 달러 당 15,000 루피아까지 급락해버려, 우린 더 큰 부자가 되고 말았다. 우린 대도시에 살며, 인도네시아 팀과 동역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부부가 주도하는데, 도시 변두리 산업 지구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노동자들은 주변 마을 및 도시에서 직업을 구하고자 찾아온 이들이다. 이들은 공장에서 보통 일당 3달러 정도를 벌어 가난하지만, 대개 궁핍하진 않다. 도와줄 수 있는 기회는 충분한데, 특별히 질병이 닥쳤을 때나 누군가 실직을 당했을 때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우린 말씀을 살피고, 다른 이들에게 조언도 구하게 되었다. 우린 여러 상황에 맞부딪힐 때, 말씀에 기초한 원칙들을 개발하기 위해 이러한 문제들을 놓고 씨름했다. 다음에는 도움이 될 만한 원칙들을 모아봤다.
부를 나누는 10가지 원칙
1.모든 이들에게 선을 행하되, 특별히 믿음의 가정에 그리하라. (갈 6:9~10) 우리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싶다. 우린 영적인 도움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도움도 제공한다. 한 예로, 최근에 한 가족과 있었던 일을 소개하려 한다. 그 집 아기는 알레르기 증세가 있어 비싼 두유를 먹어야 했지만, 아빠가 실직자인 관계로 살 돈이 없었다. 이 때 우리는 계속적으로 돈만 대주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장기간 도와 줄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2.우리가 돕는 한계는 사랑이다. 마태복음 5:38~42에 따르면, 우린 도움을 구하는 자들에게나 그저 훔치는 자들에게나 모두 주어야 한다. 여기에서의 한도는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구하는 자가 그만큼 사랑스럽지 않으면, 우리는 주지 않는다. 우리가 도움으로써 욕심이나 의존성 등이 자라나게 된다면,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더 이상의 유익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한계를 핑계로 대며 뒤에 숨어 방관하고 있을 순 없다. 요한 일서 3:17~18의 명령은 분명하다. 우리가 세상의 부를 갖고 있으며 진정 도움이 필요한 형제를 보게 된다면, 우린 행함으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주는 것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바라서는 안된다. 우리가 위 마태복음의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누가 우리를 이용한다 해도 그것은 좋다는 것이다. 많은 국외 추방자들, 특별히 새로 쫓겨난 이들은 이용당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한다. 이러한 현상의 주원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원들의 선한 청지기가 되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재산이 많거나, 영리하거나 강함에 대한) 교만에 뿌리내리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어리석어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관대해지는 것이 우리의 권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시장에서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가능한 최저가로 깎아내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시가보다 더 낼 수도 있는 것이다. 사치스러울 필요는 없지만, 사랑으로 그리한다면 은혜를 끼치는 좋은 방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내어줄 만큼 사랑스럽지 못한 때에는 역시 망설임 없이 도움을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3.가난한 이들을 도울 때에는, 정말 곤경에 처한 이들에게 주라 도움을 받을 다른 길(가족, 친척들을 통한 도움, 비정규직 노동, 팔거나 담보 줄 수 있는 비필수 자산을 가지고 있는 경우)이 있는 이들은 그 쪽 길을 이용해야 한다. 디모데 전서 5:3~16을 보면 구체적으로 과부의 문제를 다루는데, 우리는 이를 좀 더 폭 넓게 적용할 것을 제안한다. 바울이 우려했던 것들 중 하나는, 물질적 도움이 계속되면 게으름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딤전 5:13) 그러므로 일을 할 수 있거나 돈을 구할 수 있는 합법적 출처가 있는 사람들은 도울 필요가 없다. 여기에는 '수입 창출이 안 되는' 자산을 파는 것도 포함될 수 있다. 예를 들면, TV나 보석, 고급 가구 등 말이다. 우리는 한 실직 남성이 자신의 오토바이를 팔아 자전거를 산 경우를 보았다. 그는 차액을 가지고 식료품점을 열었다. 또 다른 예로는, 나와 친한 이가 실직을 당해 시내에서 직업을 구할 수 없었던 경우가 있다. 그는 고향 마을로 돌아가 가족 소유 농장에서 일할 생각을 했다. 우리 팀은 그에게 돈을 주어 그가 도시에 머물러, 계속해서 우리와 진리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 하지만 결국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고, 그것은 위의 원칙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곳에서 그에게 진리를 보이시리라 믿는다.
4.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일을 하여 자활해야 한다. 바울은 이러한 모델을 교회에 제시했고(살후 3:6~12), 가능한 경우엔 자신도 그렇게 했다. (행 18) 우리는 위의 친구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함으로 이 원칙을 실천했다. 사람들에게 일을 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존엄성과 지탱력을 증진시킨다. 우린 의존성이 생기게 해선 안 된다. 윌리암 콘필드(1999)는 재정적 가부장제와 그에 따른 의존성을 "전세계 교회의 성장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요소 중 하나"로 지목했다. 다른 글(1991)에서 그는, 재정 악용, 질투, 다툼, 개인 왕국 건설, 성직자의 직업화, 지역교회에서의 독창력 부족 등 재정적 가부장제에서 파생한 문제들을 지적한다. 돈은 종종 주는 사람에게나 받는 사람에게나 분별력을 잃게 한다. 믿는 이들은 각자 하나님의 공급에 의지해야 한다. (빌 4:9) 우리는 또한 개인들이 자연적 정체성과, 후에 스스로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이들(가족, 친구, 이웃)과의 관계를 가지길 갈망해야 한다. 외국인에게 전적으로 후원을 받는 이들은 이러한 정체성을 확립하기가 어렵다.
5.4번째 원칙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외국인들은 노동원(源)이 되어선 안 된다. 우린 "국수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부류가 되어선 안된다. 이는 인도네시아에서 아주 인기 좋고, 값싼 즉석 국수를 따라 붙여진 이름인데, 우린 사람들이 물질적 이득을 위해 말로만 진리를 따르게 해서는 안된다. 사도행전 8:9~24에 등장하는 시몬은 그러한 사람이었다. 베드로는 옳게도 그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다. 우린 사람들이 우리를 따르거나, 우리의 일부가 되게 하려 베푸는 것을 피해야 한다. 또 다른 유혹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현지 믿는 이들을 고용하고 그들에게 물질 지원을 하여 사역을 바로 시작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수입이 적어 이주 노동자들을 일터로 보내는 것보다 돈이 훨씬 안드는 나라에서 빈번히 발생한다. 현지 성도들이 언어나 문화의 장벽이 없기 때문에 더 효과적으로 사역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잠정적 유익이 있다 해도, 우린 이러한 일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 이러한 선례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보통 오래 지속하기가 어렵고, 또한 이 고용된 현지인들이 사역하는 바로 그 대상들 사이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게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꾼들은 자신들이 접근하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찰한 바로는, 보통 그들은 컴퓨터 학교나 언어 학교를 운영하거나 작은 사업을 하는 등 위장술을 쓴다. 공동체의 성원들이 일반적으로 의문을 갖는 것은 이 정도 "위치"의 사람이 그런 생활을 유지할 만큼 돈을 도저히 벌 수 없다는 점이다. 공동체에서 이들이 다른 곳에서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공동체 사람들은 의심을 갖게 되고, 접근은 더욱 어려워진다. 현지인들을 고용하는 방법은 지속하기가 힘들다. 우리는 현지 노동자들이 (외국 출처의) 후원이 끊겨, 가족을 부양할 일거리를 찾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다양한 곳에서 보았다. 많은 경우에 이들이 세속의 직장을 구하기는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청춘을 사역에 바쳤고, 대부분의 일을 새로 배우기엔 늦었기 때문이다. 솜씨가 이미 녹슬었을지 모른다. 씁쓸함만 남을 것이다.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후원을 중단할 시기를 정해 놓음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방지할 수 있다. 어쩌면 애초에 후원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모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지만(눅 10:7, 딤전 5:17~18), 둘 다 지불의 책임이 멘토나 리더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역의 대상에게 있다고 하신 것 같다. 예수님은 70명의 제자를 보내시면서 아무 것도 주지 않으셨다. 바울 역시 디모데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이러한 예가 갈라디아서 6:6과 히브리서 13:16~17에 다시 나타난다. 바울이 개척에 힘쓸 때 다른 교회에서 후원을 받은 예가 고린도 후서 11:8에 나온다. 사실 그에겐 고린도 교회로부터 후원을 받을 권리가 있었으나, 의도적으로 그 길을 피했다. (고린도 전서 9:12) 사역을 통해 이득을 챙긴다는 오해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6.우리를 통해 후원 받는 성도들은 그것이 당연한 권리나 노력으로 번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은혜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이는 에베소서 2:1~10에 나타난 올바른 자화상을 뒷받침한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함(전에 죄로 인해 죽었으나, 이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으로 살게 됨)으로 여러 모양으로 보여진 그 분의 은혜를 이해하고 감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받는 자는, 선물을 기대하거나 요구해서는 안 되며, 받는 모든 것이 은혜이며 주는 자의 뜻에 달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는 쪽에서 주기를 그만두거나 형식을 변경하기로 해도, 화를 내거나 실망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우리 팀에게 도움을 받아 단기 비서직으로 일한 한 여자는, 기간이 끝나자 화를 내며 이사를 가 버렸다. 아마 그녀는 무한정 도움 받을 것을 기대했던 듯하다. 그녀는 우리 팀이 그녀에게 은혜를 끼친 것이며, 그것을 지속할 아무런 의무가 없음을 알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기한을 분명하게 정하여 통보하면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만족과 감사의 필요와 연관 지을 수 있다. 주요 관련 성구로는 빌립보서 4:10~12, 디모데 전서 4:1~4, 데살로니가 전서 5:16~18, 그리고 디모데전서 6:6~8이 있다. 성령께서 믿는 이들이 이 교훈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우리는 때를 따라 사람들을 말씀으로 이끌고, 그들이 진정 은혜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감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7.은혜를 입은 자들은 은혜를 끼쳐야 한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은혜를 입은 자들이 이제는 다른 이들에게 나눌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주는 것은 문자 그대로 '마음'의 문제이다. 우리는 믿는 이들에게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서 4:17에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간단히 얘기하면, 베푸는 것은 베푸는 자에게 유익이다. 또 다른 관련 구절로는 고린도후서 9:6~8의 즐겨 내는 원칙과 고린도후서 8장의 마게도냐 사람의 예(분에 넘치게 내어 준 가난한 이들)를 들 수가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경우를 우리 팀 리더와 그 가족들의 삶에서 볼 수가 있었다. 그는 인도네시아 기부자들의 전적인 후원을 받았지만, 불충분한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 그 가족은 대단히 관대하여, 사람들을 집에서 함께 지내게 하고, 무료로 차량 봉사도 했다.
8.외국의 자금은 믿을 만한 현지인들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 좋다. 사도행전 11:29~30에 보면, 안디옥 교회(대부분 성도가 이방인)가 예루살렘(대부분 유대인)에 선물을 보낼 때 바나바와 사울(안디옥 교회가 신뢰했던 유대인들)의 인편을 통했던 예를 볼 수 있다. 선물을 보낸 안디옥성도들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통해 전달되었으면 더 좋았으리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것을 가지고 교리를 정립할 필요는 없지만, 실용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우리가 보기에 인도네시아 성도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만나서 질문을 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유용하다. 때로는 실제적인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또는 우리 쪽에서 적정한 형식의 원조를 결정할 것이다. 원조가 결정되면, 우리가 직접 돈을 내주지 않고, 인도네시아 인들을 통해 내게 하고 우리가 갚아준다. 우리 사역 팀에는 긴급 상황에 도와주는 <러브 프로젝트>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인도네시아 인들이 이를 위한 재정에 함께 헌금하게 한다.
9.일반적으로, 대부는 사용하지 않는다 잠언 22:7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된다"는 것이다. 돈을 빌리는 경우, 빌린 사람이 관계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진리를 나누거나, 그 사람이 믿음 안에서 성장토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는 관계에 상처를 입히기 쉽다. 빚을 진 사람이 대부 조건에 따라 돈을 갚을 수가 없을 때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돈 갚기를 피함으로써 관계에서 발을 뺄 수도 있다. 우리가 살펴보고 경험하고, 또한 말씀으로 확증된 바는, 정말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돈을 빌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능력이 안되거나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줄 수 없는 경우라면, 재정적으로는 돕지를 말아야 한다. 로마서 13:8에 따르면, 가능하면 빚을 지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빚지게 해서도 안 되겠다.
10.현금보다는 물질로 베푸는 것이 좋다. 특별히 그 돈이 어떻게 쓰여질 지에 대한 우려에서 그렇다. 야고보서 2:15~16을 보면 이러한 베풂에 대한 예가 나오는데, 바로 의복이나 양식 등 기본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돕는 것이 보통 더 어려운 것은, 시간과 수고를 들여 물품을 구입하여 갖다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관계가 깊어지는 좋은 기회를 만들 수도 있다. 왜냐하면 수급자에게 물품을 전달할 때마다 반복해서 방문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은 근처 고아원의 아이들을 위해 물품을 구입하고, 포장하고, 전달하는 과정을 함께함으로 '주는 기쁨'을 깨달은 경우가 많았다. 현금을 주는 것이 쉽겠지만, 이러한 방문을 통해 더 관계가 탄탄해 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현금이 아닌 방법으로 돕는 또 다른 경우를 보자면, 영어를 가르치는 등 시간을 들이는 수가 있다. 우리는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주간 영어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수업 시간 중에 우리는 복음 증거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보통 영적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섬기고 관계를 깊이 쌓을 시간인 것이다. 시간을 투자하는 다른 방법으로는, 조언을 주거나 각자의 전문 분야에 대한 상담을 하는 것이 있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경제와 재정 관련 경력이 있어 돈을 다루거나 프로젝트를 사정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직접 금전적 원조를 하지 않고도 도와줄 수 있는 유용하고 값진 방법이다. 나는 모스크나 학교, 다른 지역 단체들에 종종 이런 일을 한다.
결론 우리 모두는 말씀을 놓고 하나님 앞에서 각각의 경우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지 결정해야만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원칙적 지침이 되고, 성령이 친히 이끌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내리는 결론은 다른 이들의 결론과 다를 수 있다. 말씀에 명시된 틀 안에서, 다른 이들을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어야 한다. 우린 이 원칙이 여러 경우에 유익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제안이 다소 이상적으로 비칠지 모르겠다. 많은 실수가 있었고, 계속 진행해 오며 새로운 것들을 배웠다. 또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구하며 다른 이들로부터 도움과 조언을 받았다. 우리의 원칙들이 실제적 필요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역자들이 훌륭한 청지기로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번역:고병현 님] 출처 : 바울선교 회지99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