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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 연구 : 태국 본문

선교 EH국/태국 선교

선교지 연구 : 태국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4. 6. 21. 21:00

< 선교지 연구 >
태 국 (Thailand) 지도는 복사해서 나눠드리겠습니다.



■ 개관
· 1. 공식 국명 : THE KINGDOM OF THAILAND 1)
· 2. 국명 통칭 : 태국, 타이, 타일랜드
· 3. 인구
1) 총 인구 : 5천 5백 7십만 2천 명('90), 5천 9백 4십만 명('93.1)
· 2) 종족별 분포
① 타이족(Thai): 77.7 %
② 중국계(Chinese): 12.1 %
③ 말 레이계(Malay): 4 %
④ 몽-크메르계(Hmong;Meo/Miao & Khmer): 3.7 %
⑤ 기타 타이: 0.6 %
⑥ 티벳-버마(Tibeto-Burman): 0.92 %
⑦ 기타 : 0.5% (Westerners, Burmese, Japanese, Pakistani, Vietnames)
⑧ 난민 : 캄보디아인들이 십만 명 정도 있는데 현재 감소 추세. 그외 Hmong 라오스인들과 미
얀마 출신의 카렌족이 있다.
- 연평균 인구 증가율 : 1.5 %
- 인구 밀도 : 115명/KM2 ('93.1)
· 4. 면적 : 5십 1만 4천 KM2 (한반도의 약 2.3 배)
-위치 : 북위 5.37 - 20.27도 (남단에서 북단까지 총길이 1,645KM)
동경 97.22 - 105.37도 (최대 폭넓이 785KM)
-인접국 : 미얀마(버마), 크메르(캄보디아), 라오스, 말레이지아
· 5. 수도 : 방콕(BANGKOK)
-수도 인구 : 5백 6십 7만 1천명 ('88)
-방콕은 태국의 행정,금융,산업 및 상업 센터임.
-농한기 농촌인구 유입등 계절적 요인에 따라 방콕 인구 크게 증가.
· 6. 언어 : 공용어(태국어), 상용어(영어)
-태국어는 SINO-TIBETAN어족에 속하고 매우 부드러운 脣音이 많으며 고유의 알파벳을 가지고 있음.
-소수 중국계의 경우 중국식 MANDARIN과 TEO CHEW를 사용함.
-동북부 국경 지방에서는 라오스어도 일부 사용됨.
· 7. 종교 : 불교가 國敎이며 외국 종교는 법으로 보호됨.
(소승 불교 90%, 무슬림 6%, 기독교 2%, 기타 2%)
· 8. 복음적인 그리스도인 : 인구의 0.3% (Operation World 1993년판에서는 전체 태국 인구의 0.3%에 해당하는 약 1,782,000명 정도가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으로 파악한다.)
■ 역사
타이족(Thai race)2)은 과거 몽고 근처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믿어 졌었다. 그러나 역사적인 발견에 근거한 새로운 이론들이 나타나면서 태국의 북부지방을 타이족의 발원지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후 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와 정착하였고 이런 복잡한 상황속에서 태국민들은 현대적인 생활 양식들을 흡수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적 전통을 형성해 갔는데, 바로 이런 여러 문화들의 융합과 이민이라는 배경이 태국을 신비의 나라로 자리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태국 역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Sukhothai 왕국의 성립에서 시작된다. Sukhothai 왕국은 약 1220년경 Khmer 왕국과의 투쟁 가운데 건국되었고, 곧 이어 타이족이 Haripunjaya의 Mon 국가를 패배시킨 후인 1296년에는 Chiangmai 왕국이 세워졌다. 이후 1350년에는 Ayutthaya의 타이 왕국이 15세기 초기까지 Sukhothai 왕국을 흡수하였으며 쇠약해가는 크메르 왕국을 멸절시켰다.
한편, 버마인들은 Ayutthaya 왕국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그래서 1569년에 그들은 아유타야 왕국을 패배시키고 그 수도를 점령했으며 15년동안 아유타야 왕국을 통치했다. 1767년에 버마인들은 다시 아유타야국 수도를 점령하고 멸망시켰다.
Chakkri Thai 왕조는 Chao Phraya 의 주도하에 1782년에 권력을 잡았으며, 왕조의 초기에 강을 가로질러 방콕으로 이주했다. Chakkri 통치자 Rama III (1824-51)는 말레이 반도를 따라 남쪽으로, 라오스의 북쪽으로, 그리고 캄보디아의 남동쪽으로 타이 제국을 확장했다.
Chulalongkorn 왕의 재임기간(1886-1910)동안은 서구식 내부 개혁 정책이 이루어졌고, 현대에 대한 근대적 연구를 위한 토대를 놓은 많은 학자들의 연구와 활동들이 있었다. “타이 역사와 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Damrong Rajanupab 왕자는 King Chulalongkorn의 이복 형제로서 내무장관으로 재임하면서 Ayuthya와 Bangkok 시기동안의 타이와 버마사이의 전쟁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War between Thailand and Burma(1958)를 썼는데, 이 책은 그 시대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역사적인 연구서로 간주된다. 그 이외에 태국의 역사에 대한 참고 도서로는 북부 태국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유용한 Phraya Prachakit Korachak의 History of the North(1955)와 Phraya Anuman Rajadhon이 타이 민족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쓴 Indochina in the Ancient Times (1954)가 있다.
서양과의 수교 이후 그들의 영향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커져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있는 封土를 프랑스에게 양도하기까지 이르렀다. 그 사이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1917년에 타이 왕국은 연합국 편에 서서 참전했다.
Prajadhipok왕의 재임 기간(1925-35)동안 쿠데타가 절대 군주제를 종식시키고 입헌 군주제를 채택했다. 1939년에 이 나라는 국명을 Siam대신에 Thailand로 공식적으로 개명했으며, 곧이어 발발한 제 2차 세계 대전에 태국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어쩔수 없이 일본의 동맹국이 되었다. 1932년부터 1980년까지 일련의 정부가 출범 했었지만 대부분 군사정부였고 민주 정부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마저도 26개의 쿠데타와 역쿠데타 등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1979년의 선거에서 타이의 가장 오래된 정당인 Democrat Party가 국회 301의석중 단지 32석만을 확보하는데 그쳤고, 1981년과 1985년에 수상 Prem Tinsulanond는 시도된 군사 쿠데타들을 진압했다.
■ 주요 종족 개관
1. 타이족 (Thai)
태국의 다수족을 차지하는 타이족들은 물질주의가 그들의 가치관으로 자리잡고 있는 미전도 종족이다. 이들의 마을은 보통 300명에서 3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타이족은 Theravada파 불교도들이며 많은 타이족의 마을에는 wat(복합적인 사원 혹은 수도원)가 있어서 사회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센타로서 기능한다. 또한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승려로서 일정 기간을 보낸다. 불교 전통을 따르는 타이족은 ‘불교와 정령숭배가 뒤섞인 신앙’의 양상을 보이며 祠堂은 일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귀신들에게 바쳐진다. 농촌의 타이족들은 벼농사를 주로 하며 고지대에서는 건조한 쌀을, 저지대에서는 습윤한 쌀을 재배하여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2. 타이 무슬림 (Thai Muslim)
타이 무슬림들의 중심 거주지는 남부 태국(최남단의 5개 지역: 말레이 반도 중앙부)이며 이슬람 수니(sunni)파로서 말레이족과 같은 혈통이다. 태국 전체 무슬림의 4/5 가량이 ‘캑따니’즉, 말레이족(Malay)으로 언어와 문화상 말레이와 더 친근하며 태국 남부의 4도(나라티왓 78.47%, 빠따니 77.53%, 싸뚠 65.99%, 얄라 62.79%)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크게 말레이 계와 비말레이 계로 구분되는데 4/5가량이 말레이계고 나머지는 비말레이계로 타이족, 파키스탄, 인도인, 중국인 등이며 전국적으로 약 26,000곳의 회교 사원과 520만명 가량의 신도가 있다. 이들 중 65%가 태국어를 모르며 40%정도가 문맹으로 말레이어도 쓸 줄 모른다. 이러한 무슬림에게는 자기가 태어난 나라인 태국이 자신들의 조국이라는 의식이 결여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남태 4도에 거주하는 타이 무슬림들은 빠따니에 대한 역사적 자존심이 대단히 강하고 이 지역 문화에 대한 인식이 높다. 지역적으로 볼 때 말레이지아의 바로 위쪽에 위치해 있는 빠따니(Pattani)지방은 과거 동남아 이슬람의 총본산이었다. 이러한 지역적 종교적 차이 외에 주민의 다수가 말레이족이면서 무슬림인 관계로 역사적으로 태국과의 갈등이 잦았으며 말레이와 合倂되기를 소망해 왔다.
이 지역의 말레이계 무슬림들은 주로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며 경제적으로 빈곤하다. 반면 인도계 무슬림들은 주로 시아파로 아유타야 왕국 시절부터 해상 무역에 종사하였고, 경제적으로 부유하다. 이들은 빡끌랏, 싸뭇쁘라깐(Samut Prakan)등 방콕의 남부 해안에 거주한다. 파키스탄계 무슬림은 전국에 걸쳐 거주하는데 주로 목축업에 종사하며 점차 상업에도 눈을 돌려 경제적으로 부유하다. 중국계 무슬림으로는 태국 북부에, 특히 치앙마이에 거주하는 허족이 대표적이다.
3. 중국계 (Chinese)
華僑는 비록 소수이지만, 방콕 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태국 경제의 85%를 지배하고 있다. 태국의 역사 기록에는 이미 13세기경부터 화교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수많은 중국인들이 19세기에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태국에 대거 이민을 온 후로 특유의 적응력과 부지런함을 바탕으로 원주민 사회에 급속도로 융화되었다.
외국에 거주하는 화교 중 태국에 온 이들은 다른 곳에 비해 원주민들과의 동화가 빨랐는데 이는 수백 년간 중국과 태국 사회가 지리·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외모와 용모, 피부색이 유사하여 원주민들에게 거부감이 적었으며, 종교 면에서 비록 종파는 달라도 불교를 위시하여 귀신이나 영험한 어떤 것들을 공통적으로 믿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교들은 이민 초기에는 중국 국적을 계속 고수하는 사람들과 태국 국적으로 전환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있었지만 점차로 태국인으로 동화되었다. 처음 중국인임을 고집했던 1세들과는 달리 태국에서 태어나 태국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2세 이후부터는 태국문화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본토 중국 문화가 오히려 異質的인 것이 되어 버렸다. 또한 태국 고위 관료의 庇護를 받아 기업을 발전시키고 태국의 관료와 국가 자본과 결탁하여 독점재벌 형태로 부와 산업을 장악한 화교들이 제 2차 세계 대전이후 공산화된 중국의 불안정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의 큰 모험이었다. 막연하게 본토에 대한 동경과 미련을 가지고 있던 화교들은 이러한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귀국을 포기하고 스스로 태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태국민으로서의 기반을 확고하게 굳혀 나갔다.3) 높은 교육열로 인해, 2세 이후부터는 점차 고등교육을 받은 화교의 숫자가 증가하게 되었고, 선거와 국가 시험 등을 통해 정계와 관계로 진출하였다. 현재 이민 3-4세들은 자신들이 중국인의 피를 이어 받았지만 스스로 태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매우 높으며 태국인과의 혼인이 성행하면서 태국 사회에 ‘한 사람의 태국인’으로서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4. 몽족 (Hmong : White Hmong & Blue Hmong)
몽족은 19세기경 중국에서 태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생각되며, 화이트 몽과 블루 몽이라는 2개의 종족이 있다. 돼지나 닭을 희생제물로 바치며 정령을 숭배하는 이들은 라오스와 미얀마 그리고 베트남과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7가지의 억양(tone)이 있는 시노-티베탄(Sino-Tibetan)계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은 화이트와 블루몽어가 서로 다르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한데, 몽족 중 많은 사람들이 몽어와 함께 타이(Thai)어를 말할 수 있으며 이들은 태국 내(북부 태국 13개 성의 산간지역)에 9만 2천명이 거주하고 있고 약 7백만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서 살고 있다.
몽족은 주로 대나무 가옥을 지어 살아왔는데 최근에는 함석이나 타일로 지붕을 한 목조건물도 만들고 있고, 시멘트 마루까지 갖춘 집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아궁이를 구비하여 밥을 지으며 창문이 없는 것이 또한 특색이다. 또한, 현관문과 마주하고 있는 벽에는 神主 단지가 놓여 있고, 새해에는 이 신주단지를 새롭게 바꾸는 축제를 열어 자기 집을 지키는 영들과 조상들을 위해 희생제물을 베풀고 집안에 憂患이 없도록 기원한다.
5. 크메르족 (Khmer)
정령을 숭배하는 불교도인 이들은 AD 1세기경 남부 인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언어는 인도어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산스크리트어(Sanskrit)와 팔리어(Pali)에 기초하고 있다. 크메르인의 82%가 캄보디아에 살고 있으며 태국에 사는 크메르족은 주로 난민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서로의 관계성을 중시하며 전통적으로 인류 평등 사상을 가지고 살아온 이들이지만 여러 해의 전쟁과 잔인한 살상으로 그러한 도덕적 기준과 신뢰성이 심하게 왜곡되어 가족제도 자체가 붕괴되고 있다. 너무도 일찍 독립하도록 강요되는 아이들은 부모의 권위에 대한 필요를 알지 못하며 여러 해 동안의 별거로 아내들은 남편들을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 지난 30년간 국경선 지역의 반란 전쟁, 자유주의 캄보디아와 공산주의 캄보디아간의 전쟁, 폴 포트 정권의 폭압과 학살 행위, 그리고 베트남의 점령 및 통치 기간 동안 이루어진 ‘전쟁과 대량학살’등에 의해 많은 과부와 고아들이 생겨났다.
■ 미전도 종족 연구
1. 혈통 및 종교별 분류
1) 불교 집단 (Buddhist Groups)
① 크메르 (Khmer) 4)
② 냐우 (Nyaw)
불교도로 알려진 Nyaw족은 정령 숭배자들이다. 지난 12년 동안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구약성경을 통해 연대기 수업을 실시함으로써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소수의 Nyaw 부족민들이 응답했지만 대다수는 그들 자신의 종교에 만족하고 있다.
③ 샨 (Shan)
Shan족의 인구는 대략 백 7십 5만 명으로 추정한다. 그 중 다수가 버마에 살고 태국에는 5만 6천명이 거주한다. 외부인들은 그들을 우호적이며, 대접을 잘하고, 훌륭한 상인들로 묘사한다. 제 2차 세계 대전동안 영국과 교류를 했기 때문에 유럽인들에게 특별한 好感을 보인다.
인도차이나 지역에 거주하는 다른 종족들처럼 Shan족도 精靈信仰와 祖上崇拜가 혼합된 불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還生을 강하게 믿고 있다. 그들은 죽음을 영원한 종말로써 두려워하지 않으며 지옥을 악을 행한데 대해 영혼이 잠시동안 고통받지만 결국 다시 풀려나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장례식은 축제의 시간이다. 이 종족은 밝은색의 옷을 입으며 사후 세계에 있는 죽은 이들이 덕을 보도록 귀신들과 정령들에게 재물을 바친다.
④ 루 (Lu)
남부 중국에는 약 9십만 명의 Lu족이 있고 태국에는 7만 명이 살고 있다. 이들은 언어적으로 볼 때 Lao-Tahi 계통의 종족이다. 중국인들은 중국에 사는 Lu족을 Thai족이라 부른다. 중국과 태국에 흩어져 살고있는 이들 Lu족 모두는 文盲이다. 그들의 사회 구조는 가족 단위로 이루어져 있고, 이전의 관습에 깊이 종속되어 있다. Lu족은 자신들을 불교도라고 자처하지만, 그들의 종교는 강한 精靈崇拜 요소들로 가득차 있다. 그들은 환생을 매우 강조하는데, 만일 자신이 선한 삶을 살면 높은 신분의 사람으로 환생하고 악하게 살면 천한 동물로 환생한다고 믿고 있다.
⑤ 몬 (Mon)
몽고족 계통인 Mon족은 현재 태국과 미얀마로 알려진 샴(Siam)인들과 버마인들의 거주지역에서 최초로 위대한 문명을 창조했다. 그들의 종교는 精靈崇拜와 소승불교(Theravada)가 혼합되어 있는데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비록 Mon족이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미얀마에 8십만 명이 살고 태국에 십만 명이 살고 있다. Mon족 승려들은 긴 황색 옷을 입고 매일 음식을 구걸하기 위해 절을 나선다. 그들은 그릇을 들고 집집마다 방문하여 그날 먹을 음식을 요청한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열반(nirvana)에 이르는 것인데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도 깊은 동정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모든 악을 극복했을 때 도달하게 된다고 믿는 열반(nirvana)에 이르고자 하는 利己的인 욕구 때문이다. Nirvana에 이르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오직 자신의 노력과 행위뿐이며, 다른 사람은 어느 누구도 도울 수 없다고 믿고 있다.
2) 무슬림(Muslim)
① 말레이 (Malay)5)
② 챰 (Cham)
1970년대에 캄보디아의 9만 명 Cham인들 가운데 수천 명이 Khmer Rouge의 소수 부족에 대한 비극적 대량학살을 피하기 위해 태국으로 피난했다. 태국의 방콕지역에서 그들은 다른 무슬림 부족 집단과 유사하다. 그들의 자녀들은 태국 공립 학교에 들어가고 Koran과 아랍어를 공부하기 위해 지방 모스크에 다닌다. 여전히 소수만이 Cham어를 사용하지만, 태국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2천명의 Cham인들 중 대부분은 태국어를 한다. 여성들은 여전히 비단을 직조하는 古代의 기술을 사용한다. 그러나 Cham족의 정체성은 Thai 문화에 계속 동화됨으로써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Cham족은 힌두교를 신봉하던 Champa 왕국이 2세기에 성립하여 번성했던 베트남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그들의 번창하던 해양 왕국이 붕괴한 후, 강력한 이슬람의 물결이 말레이지아와 인도네시아 상인들을 통하여 해안 지대로 유입되었다. 오늘날 이슬람을 믿는 Cham인들은 캄보디아와 베트남 그리고 태국에 살고 있다.
③ 호 (Ho)
태국에 있는 대부분의 중국인들과 같이 치앙마이에 살고 있는 Ho족은 아편 매매를 “깨끗치 못한” 사업이라 생각한다. Ho족은 중국의 윈난(Yunnan)지방 출신의 초기 이민자들이라 생각된다. 그들은 대부분 Sunni 무슬림이었으며 고산족들과 저지대 거주자들 사이의 상업을 중개하는 기능을 한 행상들이었다. 오늘날 치앙마이 외곽 지대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온 많은 Ho족 이민들은 쌀을 재배하거나 마을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다. 현재 이슬람이 2만 여명의 Ho족들에게 더욱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재정적으로도 번영하고 있고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듯 보인다.
3) 기타(정령숭배 등)
① 포-카렌 (Pwo Karen)
Pwo Karen족은 Karen족의 가장 큰 하위 집단가운데 하나로서 火田民이다. 이들은 서부 태국에서 가파른 능선에 집을 지으며 때때로 야생 동물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을 주위에 防壁을 설치한다. 과거 이들은 토양이 척박하게 될 때 그들의 촌락을 이동했다. 정부는 현재 이 화전식의 농업 방식을 통제하려 하고 있다.
精靈을 崇拜하는 이들의 종교적 배경 때문에 Pwo Karen족은 인간 外的인 힘이 사람들과 무생물 내에 존재하며 魔法을 통해 이 힘을 다룰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재난과 병을 정령들의 활동으로 보며 많은 재물을 바침으로써 정령들을 달래고자 한다.
카렌족이 가장 중요시하는 神은 땅과 물의 신이다. 풍년을 祈求하거나 마을의 평화를 비는 공동 제례는 마을 司祭(주술사)의 주재로 돼지나 물소를 제물로 해서 이루어진다. 카렌족은 마을 외곽에 특별한 제단을 만들고 그곳을 신성시한다. 이렇듯 카렌족의 생활은 신에 대한 믿음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마을에서 禁忌시하는 행동을 했을 경우 神으로부터 그들 말로 “차이”라고 하는 벌을 받거나 재앙을 만난다고 믿는다. 특히 부정행위를 한 남녀는 속죄의 제물을 마을 사제에게 바치고 마을을 떠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종교적 영향으로 인해 카렌족은 태국의 고산족 중에서 가장 엄격한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천년 뒤의 밝은 세상 도래”라는 생각 아래 지금의 어렵고 가난한 생활을 꿋꿋이 견뎌 내며 排他的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종족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애쓰고 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최초의 조상을 창조하여 동산에서 살게 한 창조주 Y'wa를 믿는 것도 포-카렌만의 독특한 문화적 요소라 할 수 있겠다.
② 크무 (Khmu)
약 3십만 명의 Khmu인들이 라오스에 있고 북부 태국에는 만 오천 명이 살고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Lao와 Thai족 사람들은 Khmu인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여 사회 계층에서 가장 천한 위치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종적 自尊意識이 결여된 Khmu인들은 많은 영역에서 패배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실패와 불완전함을 “단지 Khmu”인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오직 Khmu인이 Lao나 Thai인과 통혼할 때만 자신이 이러한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Khmu인은 또한 자신의 부족적 정체감을 잃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Lao나 Thai 문화 속에 동화되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③ 몽 (Hmong : White Hmong & Blue Hmong) 6)
2. 사회성층별 분류 및 분석
1) 중부 태국의 농부
전체적으로 높은 기온 분포를 보이는 중부 태국은 건조기, 우기 그리고 냉기의 3계절을 지닌 열대성 기후이다. 이 지역의 인구는 400만을 넘는데 이 속에서 논농사를 하며 살아가는 농부들은 자연 강우에 농사를 의지하고 있다. 대다수의 농부들과는 달리 이들은 2월과 5월 사이에 생활 속도가 완만해지다가 추수기를 맞이하게 되고 농번기에 들어가게 된다.
이들이 사용하는 주요 언어는 모든 학교에서 국가 공용어(Official Language)로 가르치고 있는 억양이 있는 타이어이다. 라오(Lao)어가 다양하게 사용되는 지역도 있다. 또한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는 있으나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
2) 방콕의 중산층
경제 성장으로 말미암아 백만 명의 중산층 전문가들이 安樂한 삶을 찾아서 방콕으로 왔다. 도시적인 배경 속에서 바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교육을 받고 돈을 벌 잠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물질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한편 가족이 解體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며 상처를 받고 있다.
3) 태국의 윤락녀들
아시아 죄악의 도시 Bangkok에서는 15세 이하의 8십만 명의 윤락녀들이 6만개의 매음굴에서 몸을 팔고 있다. 이 소녀들 중 많은 수가 가족들에 의해 팔려왔으며, 나머지는 납치되어 강제로 끌려온 아이들이다. 또한, 부패한 관료들에 의해 보호받는 2백만 이상의 사람들은 매춘업을 통해서 소득을 얻는다. 윤락은 불교의 3번째 교리를 위반하는 것이지만 매음굴 운영자와 매춘 업소로부터 뇌물 형태로 들어오는 정부의 이익 때문에 관료들의 모른 채 하고 있다. 난잡한 성교를 통해 이미 5십만 명 이상이 AIDS에 감염되었다. 한편 세계 보건 기구(WHO)는 AIDS가 2000년까지 세계 인구의 7%에 이르게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자유의 땅”을 의미하는 Thailand는 노예상태의 윤락녀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 지형/기후
태국은 북서쪽으로는 미얀마와 접하고 북동쪽으로는 라오스, 남동쪽으로는 캄보디아와 타이 灣 그리고 남쪽으로는 말레이지아 그리고 남서쪽으로는 앤다만 海와 접한다.
이 나라는 지리학 적으로 4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진다. 산악지대인 북부 지역은 일련의 평평하고도 높은 산맥(해수면에서 평균 고도가 1160M)들의 사이로 Ping,Wang,Yom 그리고 Nan 강이 흐르면서 깎아지를 듯 한 계곡들을 만들고 있다. 이 산에는 주로 값비싼 티크가 대다수인 열대 몬순(monsoon)의 숲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또한, 태국의 심장부를 형성하는 중앙부의 평야 지역은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지방이며 주로 Chao Phraya강 삼각주로 이루어져 있다. 매우 복잡한 운하와 소규모의 관개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비옥하고도 인구가 밀집된 중앙평야는 이 나라의 농업과 상업 그리고 공업 활동의 중심지이다. 북동부의 Khorat Plateau는 낮은 고도의 砂岩 지역으로서(평균 650ft) 토양은 메마르고 모래가 많으며 비가 거의 없다. 이곳은 대개 사바나(savanna) 형태의 풀과 관목들로 덮혀 있다. 말레이 반도 북부의 절반을 차지하는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진 남부 지방은 평평한 땅이 거의 없는 산지에 둘러싸여 있으며, 타이의 풍부한 광물과 고무 경작은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42,615평방 마일의 유역을 가진 Chao Phraya강은 - 그 지류들과 함께 - 타이 경제에 가장 중요하다.
태국은 온대와 열대의 기후를 모두 가지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무덥다. 여름은 3월에서 5월까지이며 평균 34℃를 유지한다. 그러나 어떤 지역은 40℃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여름 몬순은 따뜻한 온대기류층이 인도양에서 북쪽으로 불어올 때 시작하며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건조한 남서쪽에서 불어올 때인 가을에 끝이 난다. 우기는 6월부터 9월까지인데 온도는 27℃ 에서 32℃ 에 이른다. 강우량은 지형에 따라 다양한데, 북서부는 양이 적은 반면 남부는 여름동안 홍수가 난다. 태국을 방문할 만한 최적기는 10월부터 이듬해 2월 사이의 기간인 서늘한 시기(cool season)이다. 이때는 여름이나 우기만큼 무덥지 않다. Cool season 동안의 평균 기온은 18℃ 에서 32℃ 사이이며, 이 기간에는 북부가 매우 춥고 밤에는 온도가 7℃ 까지 떨어진다. 한편, 동부와 서부의 매년 강우량은 Khorat Plateau의 900 MM(35in.)에서 Chao Phraya 범람원에서는 40인치 이상이며 산악 지역에서는 120인치까지 내린다.
숲은 전체 국토의 3분의 1보다 적은 지역을 차지하며 주로 단단한 나무와 樹脂를 내는 나무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나무, 야자, 벵갈보리수 등나무 그리고 많은 종류의 양치류들을 볼 수 있다. 야생동물로는 코끼리, 긴팔원숭이, 호랑이, 표범, 멧돼지, 비단뱀, 킹 코브라, 녹색 거북, 그리고 악어가 있다. 또한 누에 재배는 고급 실크 산업을 위해 증가되고 있다.
태국의 가장 중요한 광물은 주석인데 1980년대 중반에 전세계 생산량의 약 9퍼센트를 차지했다. 이 나라에는 또한 풍부한 천연 가스가 매장되어 있다. 그 밖의 광물로는 텅스텐, 안티몬, 형석, 납, 아연, 구리, 철 그리고 망간鑛, 갈탄이 있으며 루비와 사파이어 같은 귀금속들도 생산된다.
■ 정치/행정/외교
태국의 정치적 특색을 들자면 군부와 민간정치세력간 균형, 군부의 지지를 배경으로 한 정치운영, 쿠데타 발생시 정치보복 지양, 그리고 태국고유의 왕정 민주주의에 있다. 즉, 태국의 국가 원수는 국왕이며 왕은 국민의 절대지지를 받고 있다.
1855년 Bowring 조약 체결로 문호 개방과 자유 무역주의로 무역 근대화를 이룬 이후, 1932년 진보적인 청년 장교단과 문관에 의해 전제군주체제가 무너졌고, 그해 6월 26일 태국 최초의 헌법을 선포하고 전제정을 입헌정치(내각 책임제)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정치 역사는 한마디로 쿠데타의 역사였다. 1973년 10월 대학생의 반정부 데모로 당시 타넘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군소정당이 亂立하면서 75년 1월 총선거를 실시, 쎄니 내각이 등장했으나 2주일만에 싸옹앗 장군의 쿠데타로 실각한다. 이후 등장한 타닌 내각이 성립되었으나 77년 끄리앙삭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다가 79년 총선거를 실시 민간인 수상으로 재집권 했으나 국가 경제 정책 운영의 실패로 1980년 2월 수상직을 사임했다. 그의 사임후 연립정당간 알력이 계속되다가 88년 총선에서 Chatichai 수상이 내각수반이 되었으나 91년 2월 23일 콩솜풍 군참모총장 및 육해공군 사령관이 이끄는 군부 쿠데타로 차티차이 민간 내각이 붕괴되면서 국가 평화유지위원회가 구성되고 3월 2일 군사 정부는 아난드 파냐라춘이 수상이 되었다. 그후 92년 5월 18일 수친다 총리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 그해 5월 18일 방콕일원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이때 시위대에 발포가 있었고 유혈 사태가 발생하여 적어도 52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2년 5월의 봉기가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었다.”라고 태국 외무장관 Prasong Soonsiri가 언급하듯이 이 봉기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운동의 결과로 이전의 군부1인자 였던 Suchinda Kraprayoon 수상이 실각하고 다음해인 93년 9월에 선거를 통해 완전한 문민정부를 구성했다.
現 수상으로 재직중인 Chuan Leekpai는 20년 이상 정계에서 활동한 베테랑으로서, 어두운 정치 역사에서 부패도 권위주의의 개입도 없는 가운데 수상으로 선출된 첫번째 수상이다. 민주주의를 고수하고자하는 국민의 열망을 성취시켜 줄 책임을 지니고 있지만 재임기간 첫 해부터 방향성의 不在로 여야 모두로부터 정치적인 압력을 받았다. 조용하게 말하는 스타일의 Chuan은 결단력인 없는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다양한 색깔을 지닌 여러 당과 지속적인 공조체제를 구축(構築)하는 것은 그에게 또 하나의 숙제로 남아있다.
불교를 신봉하는 국왕 King Bhumibol Adulyadej(Rama IX)는 46년 5월 5일 卽位했는데, 국민단결과 화합의 求心點으로서 국가적 위기시 조정자 역할을 하며 3권 및 국군의 최고 통수권자로서 내각 및 상원의 임명권을 가진다.
현 정부는 수상과 44 명 이내의 각료로 구성되어 있는데, 92년 9월 13일 총선후 Chuan Leekpai를 수상으로 선임하고 새 내각을 구성하였으며 93년 9월에는 내각 개편을 단행하였다. 또한 중앙행정 제도로써 내각수반인 수상실 산하에 13개 성이 있고, 지방행정제도는 우리나라와 같은 도,군,면,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총 73개의 도중 치앙마이가 가장 크다.
사법제도는 3심제이며 AD 1907년에 근대적 사법제도를 도입하였고 1932년에 사법권이 따로 독립하였다.
의회제도는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1932년에 청년 장교단의 무혈혁명으로 입헌 군주제가 도입된 이래 현재 상원의원은 민선제로 직선된 360명이 있으며 임기는 4년이다. 상원의원은 수상의 추천으로 국왕이 임명하며 임기는 6년이며 매 2년마다 1/3씩 교체하며 연임도 가능하다. 또한 상원의장이 상 하 양원 합동회의의 의장이 된다.
선거제도를 살펴보면 태국국적을 소유한 자나 태국국적으로 변경후 10년이상 된자로써 만 20세 이상이며 선거구에 이름이 登載된 자에 한해 선거권을 가지며, 상원의원으로 출마할 자격이 되려면 정당에 미소속된 자로서 35세 이상되어야 하며, 하원의원은 정당원으로 25세 이상되어야 한다.
태국은 이념을 초월하여 전세계 모든 국가와 개방 실리 외교의 정책을 취하고 동남 아시아 평화와 자유중립체제를 추구한다. 제 2차 세계대전후 반공 및 친서방 외교노선을 견지했었지만 70년대 중반부터 중립외교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이후 1975년 인도차이나가 공산화된 후부터는 중국과 인도차이나 3국 및 소련과 동부 유럽 여러 나라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등의 실리외교를 추구해 왔다. 또한 지역보호주의에 강력 대응하기 위하여 ASEAN을 통한 지역협력을 강화하는 등 탈 냉전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현재 남북한과는 동시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등거리 외교정책과 남북대립 상황을 이용하는 실리 외교노선을 추진하고 있으며, 북한보다 한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다. 그밖에 대외적인 외교 관계를 살펴보면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는 지역협력 유대체제로 결속을 강화하고 있고, 미국과는 1956년 우호조약을 맺은 이후 76년에 미군이 철수했지만 우호관계가 돈독하다. 제 2차 대전 중 동맹국가였던 일본과는 현재 통상 면에서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과는 75년7월에 수교를 맺은 후 93년에는 수상 등 대규모의 사절단이 파견되었고 경제 협력이 강화되는 추세에 있다. 러시아와는 1899년 우호조약을 체결하였고 1947년에 수교, 현재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인도차이나 3국(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과는 월남전후 수교하여 상호 외교사절을 교환하였다.
1967년에는 동남아시아 국가간의 평화와 안보 및 경제협력강화를 위하여 ASEAN을 창설하여 태국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소련과 동구가 붕괴하면서 NAFTA등 지역보호주의가 강화되자 1991년 1월 AFTA 창설을 역내국가에 강력하게 제안하여 93년 1월 1일부터 공식 출범하였다.
UR의 위기가 심화되었을 때도 태국은 교역 면에서 타격이 없었으며 오히려 GATT 회원국의 시장개방으로 태국의 주종품인 쌀 등의 농산물 수출증대를 기대하고 있다. 반면 지적재산권, 금융, 서비스 부문은 소극적 입장을 취하여 왔으나 미국의 GSP, 섬유쿼타를 무기로한 제제 등으로 점차 개방화 자세를 보이고 있다.
■ 경제-산업
태국은 주로 서비스업과 농업 그리고 경공업에 기초한 시장 경제를 가지고 있다. 외국 투자와 대부는 경제와 사회적 조건의 향상을 이루어 내었다. 국민 총생산은 1984년에 美貨로 40,628,200,000달러였고 1인당 국민 소득은 812달러로 인구보다 더 느린 성장을 했다. 농업은 GNP의 약 1/4을 차지하고 노동력의 2/3이상을 고용하고 있다. 이 나라는 소규모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중앙 평야 지방에서는 소작농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1976년에는 소작농들과 토지 차용인들에게 이롭게 만들어진 강력한 토지 개혁이 시행되었다. 주요 산물인 쌀의 생산과 수출은 정부가 가격을 낮게 책정함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옥수수(마이즈,maize)는 중앙 평야 주위의 高地에서 널리 재배된다. 카사바(열대 녹말), 고무, 사탕수수, 바나나, 파인애플 등은 주요한 換金 작물이다.
한편 소는 수 년동안 노동에 이용된 후 식용으로 도축된다. 태국의 고기와 우유 생산은 국내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어류는 주요한 단백질 획득원이며 1960년부터 저인망 어선이 도입되면서 어획량이 눈에 띄게 증가되었다. 나무가 기준치 이상으로 採伐되고 있으며 원목은 수입되고 있다.
광업은 주석의 생산과 수출이 主流를 이루고 있는데 태국은 세계의 주요한 주석산지 가운데 하나이다. 많은 양의 갈탄과 철광석, 그리고 망간광이 또한 採掘된다. 그리고 근해에서 생산되는 천연 가스의 소비가 증가로 석유의 수입이 감소하게 되었다.
제조업은 GNP의 1/5을 차지하고 전체 노동력의 1/10 이하를 차지하고 있다. 경공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Bankok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 대부분의 공장은 소규모이고 국내 원자재 공정을 중점적으로 취급한다. 주요 제조 물품들은 맥주와 정제된 설탕, 담배, 직물, 시멘트 그리고 화학류를 포함한다. 전기는 주로 수입된 원료와 국내 원료로 생산된다.
1993년을 시작하면서 주요 문제점들은 외적인 부분에서 왔다. 미국 경제가 여전히 침체일로에 있고 유럽과 일본의 경제가 하향곡선을 긋고 있는 시점에서 수출 신장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타이의 주요 생산품인 쌀, 설탕, 고무, 닭, 참새우 그리고 타피오카(식용 녹말류)의 가격 하락도 수출 저하에 한몫을 했다. 또한 주요 경쟁 상대국인 중국,인도네시아, 인디아, 스페인, 브라질, 멕시코 등과의 수출 위주의 경제 성장을 추진하는 국가들과의 경쟁이 더욱 심화되어 상황은 더욱 어려워져 갔다. 그러나, 4/4 분기에 태국은 복잡한 국제 환경에 잘 적응하여, 제조업 부문 수출에 있어서 93년 중반에 15% 성장율을 기록하였고, 93년 말에는 쌀과 닭과 같은 생산품의 가격이 다시 상승하여 수출에 활기를 띠게 되었다.
주식 시장에 유입되는 외국 자금은 하반기에 加速化되었고 관광 산업도 1992년의 침체에서 벗어나 활기를 되찾아 수입은 2 년 동안의 어려운 시기를 지나 증가 추세로 돌입하였다. 그러나 매 상반기동안 4% 이하의 경기침체를 경험하면서도, 경제학자들은 1994년 후반까지 심각한 물가 인상이 다시 도래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다.
■ 사회-문화
어느 문화나 제각기 독특성과 가치를 가지는 것처럼 태국에도 사회 전체를 조화롭게 하는 문화의 흐름이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태국은 90% 이상이 Theravada(소승) 불교신자로 불교가 일상 생활과 사회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Theravada 불교는 소승불교로서 태국은 물론 스리랑카,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지에 퍼져 있으며 민중전도에 대한 의식은 없고 오로지 자신의 解脫과 열반만을 수행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태국인은 일상 생활에서 불교의식대로 상호인사를 나누고 아침 기상후나 취침전 항상 각 가정에 모신 불상 앞에 拜禮하는 등 불교정신이 거의 완전히 생활철학화 되어있다. 또한 석가탄신일 배례는 물론 새해 배례나 가족생일기념 배례, 결혼식 배례, 장례식 배례, 신주택 구입 및 구주택 수리완성 배례 그리고 심지어는 국가적 주요행사 배례등에 각 가정이 승려를 동반하여 불상 앞에 배례한다.
현재 태국에서는 골프나 테니스 그리고 볼링등과 같은 현대 스포츠가 행해지고 있지만, 이 나라 전역에서는 여전히 킥 복싱과 같은 고유의 스포츠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태국의 주요한 문화적 관습으로는 다음과 같다.
1) 인내하기(Cool Heart)
태국인들은 문자적으로 “서늘한 가슴”이라 발음되는 ‘cai yen’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관용적으로 그 말은 ‘인내’에 사용되는 말로써 태국 문화속에 깊이 침투해 있다. “침착하다”, “조용하다”, “쇠약해 지다”, “불안해 하지 않는다”로 번역될 수 있다. 태국의 시간개념은 서양과는 달리 느리다. 파티나 특별 모임에 Thai 시간으로 왔다가 Western 시간으로 간다는 joke가 있듯이 태국인들의 시간 개념은 느리다. 시간과 인내를 제외하고도 그 속담은 나쁜 상황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식료품 상인이 표준 가격보다 50%를 더 올려 팔때, “cool heart”의 태도가 요구된다. 비록 값을 깎을 수는 없을지라도 당황하지는 않게 된다. 특별히 화가 나고 멸시 당했을때 가능하면 적대적인 감정을 나타내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강한 정서의 표출은 태국 문화에는 부적절한 행위이다.
한편, “mai pen rai” 라는 말은 “괜찮아요.”, “전혀 신경쓰지 마세요.”로 번역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cai yen”이 요구되는 상황속에서는 웃으면서 “mai pen rai”라고 말함으로써 상황을 가장 잘 이끌어 갈 수 있다. 만일 버스 운전사가 차를 세워주지 않았거나 전기가 나가서 2시간 동안 컴퓨터 작업을 하지 못했을 때 필요한 것이 바로 “mai pen rai!”이다.
2) 체면을 세워주기(Save Face)
당황한 사람들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은 태국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실수를 한 사람에게 冷笑的인 반응을 보여서는 안된다. 만일 비난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간접적으로 하여야 한다. 즉, 비판을 불가피하게 해야할 경우에는 好意와 激勵를 가지고 해야할 것이다.
비판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차원에서의 비난도 피해야 한다. 태국인들은 자국에 관한 비판에 대해 매우 민감하므로, 태국을 비판하는 말은 피하고 개인적으로나 공개적으로 자신을 자랑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
태국인은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건에 직면할 때 웃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단지 고통을 당한 사람의 체면을 세워주는(mai pen) 방법을 따름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3) 존경심을 표시하기(Showing Respect)
태국은 ‘존경’과 ‘경의’에 대한 개념과 표현이 대단히 중요하다. 또한 이것은 신분과 연령 그리고 종교로 결정되는 태국의 독특한 문화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태국에서 한 개인은 존경을 받거나 존경할 사람이 있다. 그래서 태국에서는 보통 처음 사람을 만날 때 “몇 살이시죠?”, “결혼 하셨어요?”, “자녀가 몇이세요?”, “돈은 얼마나 버세요?”와 같은 질문들을 한다. 이런 개인적인 질문들은 존경할 대상인지 받을 대상인지를 알고자 하는 노력이며 이런 시도를 통해서 그들은 상대방에게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즉, 대상자가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여러가지 물음을 통해 파악함으로써 각각의 경우에 다른 말을(혹은 다른 방식으로 말을) 사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태국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개인적인 물음”에 대하여 화를 내거나 언짢아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태국의 왕은 최고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태국 국민들에 의해 사랑받고 있다. 왕가는 태국의 다른 어떤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찬양의 대상이며, 존엄성은 어떤 방식으로든 더렵혀지지 않는다.
불교 승려들도 매우 존경을 받는데 여성들이 승려와 조금이라도 닿는 것은(touch) 피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여성들이 태국에서 복잡한 버스를 탈 경우 얼마나 주의를 해야할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부처상에 소위 부정하다고 생각되는 행위를 하는 것은 불교를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적대적 감정을 야기시키므로 피해야 할 것이다.
선생들은 지식을 가진 자로서 항상 존경받는다. 책 또한 지식을 담고 있으므로 여기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태국인들은 책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지도 않으며 깔고 앉지도 않는다. 또한 정부와 대학 관리들과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시하는데 인색해서는 안될 것이다. 반면에 태국인들이 존경을 해 올 때 비록 존경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될지라도 기꺼이 감사함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존경을 표시하는 문화적으로 적절한 방법은 “wai”라는 태국 인사이다. 태국의 인사는 상대방이 각자 서로 그들 자신의 손바닥을 정중하게 붙이고 난 뒤, 팔꿈치를 몸에다 밀착시킨 후 손가락의 위치를 코에 가깝도록 올리면서 동시에 가볍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을 더 많이 존경하면 할수록 행위자의 머리는 더욱 숙여진다. 나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머리를 곧게 세우고 엄지손가락은 가슴 부위에 오게 한 채로 젊은 사람이 자신에게 하는 인사에 대해 화답한다. 상대방보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리고 지위에 있어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연장자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시해야 한다. 만일 두 사람이 같은 지위와 나이라면 서로 같은 방식으로 인사를 하는데 보통 머리는 숙이지 않는다. 그들은 손바닥을 목까지 올린다.
4) 머리와 발에 관한 예절 (Head and Feet Etiquette)
태국 국민들은 ‘머리’에 대해 강한 존경심을 보인다. 만일 서로 절친한 친구가 아니라면 성인은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만진다든가, 심지어 어깨를 건드릴 경우에도 매우 공격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머리를 애정의 표시로 가볍게 두드릴 수 있다. 머리에 대한 태국인들의 존경심 때문에 어떤 물건을 집거나 열차의 화물칸에 물건을 올리거나 내리기 위해 누군가의 머리위로 팔을 뻗어야 할 경우 양해를 구하지 않고 해서는 안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누워 있을 때 머리맡을 지나 걸어가서는 안된다. 또한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사람의 앞을 지나칠 때는 죄송하다는 말을 하면서 겸손하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이것은 마루에 앉아있는 사람 뒤를 近接해서 지나갈 때도 적용되는 규칙이다.
가능하면 오른손으로 물건을 주고받아야 하며 좀더 예의바른 표현으로는 왼손으로 오른 팔뚝을 잡고 손을 내미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버스에 탈 경우에 물건을 오른손에 쥐고 있어서 어쩔수 없이 왼손을 사용하는 것은 이해된다.
발은 천한 부위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발로 다른 사람을 가리켜서는 안된다. 또한 태국의 가정을 방문할 때는 주인이 벗을 필요 없다고 말할지라도 신발을 벗어야 한다. 신발로 마루를 쿵쿵거리며 걷는 행위는 신발로 마루 주인의 침대를 짓밟는 것과 같다. 사원에 들어갈 때 신을 벗는 것은 의무적이지만 사원의 형상을 존경하는 몸짓은 반드시 요구되지는 않는다. 또한 신발이나 발과 관계되는 것들을 모두 머리 위나 침대 머리에 놓아서는 안된다. 태국 국민들은 심지어 침대 머리맡에 놓여질 침대보의 상한선을 표시해 놓는다. 한가지 더 주의할 점은 베개를 침대 발치나 마루에 두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례가 될만한 일을 하기 전에 미리 ‘죄송 혹은 실례합니다’ 라는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태국 사람들은 신체의 천한 부위를 언급하기 전에 보통 사과의 말을 하는 것을 기억하고 다리를 공식 석상에서 꼬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고 대화 중에 한 사람을 직접적으로 가리켜서는 안되며 공개적을 코를 ‘푸’하고 풀지 말고 단지 코를 닦기만 해야 한다.
5) 넌지시 둘러 말하기 (Beating Around the Bush)
태국인들은 주제에 대한 핵심을 분명하게 지적하지 않는 식으로 말을 하는데, 특히 어른들에게 어떤 요청을 할 때 이런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함축적이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비록 “넌지시 둘러서 말하는” 방식의 태국 스타일에 익숙해지기가 힘들겠지만, 직설적으로 제안하거나 비판하거나 요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방문자에게 쉴 틈도 주지 않고 용무를 물어보는 행위를 삼가고 그가 왜 왔는지를 자신이 대답하도록 시간을 주어야 한다. 이는 방문자가 방문하자마자 곧 바로 자신의 방문 목적을 이야기할 수 없는 태국의 관습 때문인데, 이런 상황이 바로 “cai yen(체면을 세워주는)” 태도인 것이다.
6) 식사 예절 (Eating)
입에 음식물을 가득히 넣거나 소리내어 씹어서는 안되며 다른 사람이 음식을 먹으려는 앞에서 머리를 빗어 넘겨서는 안된다. 또한 손가락을 핥거나 혀를 내밀어서도 안된다.
이빨 소제를 공개적으로 해서도 안된다. 만일 그렇게 해야 할 상황이라면, 한쪽 손으로 이빨을 쑤시는 동안에 다른 손으로 입을 가려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손으로 입을 가리는 행위는 입에서 뼈나 씨를 뱉을 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트림을 하는 것과, 걸으면서 동시에 음식을 먹는 것도 상대방에게 결례를 행하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 접시를 잡아서는 안되지만, 음식이 접시에 남은채로 두고 떠나는 것은 결례가 아니다.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을 때, 만일 위생 상태가 보통 정도일 경우에는 아무 말없이 그냥 먹는 것이 좋다. 음식을 먹기 전에 냅킨으로 식사 도구를 닦는 것은 괜찮다. 태국인의 가정에서 물 한잔을 대접받을 때는 먼저 공손하게 잔을 받아서 자기 양심의 정결 정도에 따라 물을 마시도록 되어있다.
7) 관리들과의 교제 (Association With Officials)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거나 이동할 때는 친한 친구 뿐 만 아니라 중요한 관리들을 반드시 방문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공식적인 회합에 초대받았을 경우에는 중요한 손님들이 떠나기 전에 먼저 가서는 안된다. 꼭 먼저 가야 될 상황에서는 최고위 관리나 주인을 찾아가서 떠나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작별인사를 해야한다.
8) 손님이 방문하였을때의 예절 (Guests)
손님이 방문하였을 때는 반드시 무언가 대접을 하여야 하는데 먼저 물을 대접하고 이후 茶와 커피 그리고 음료수 등을 대접하는 것이 예의이다. 또한 태국 손님을 환대할 때는 형편없이 준비한 태국 음식보다는 잘 요리된 외국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좋다. 손님이 떠날 때는 일정한 거리까지 그와 동행하여야 하는데 문에서 멀리까지 배웅할수록 손님을 그만큼 더 존경한다는 표시가 된다.
9) 선물에 대한 예절 (Gifts)
선물을 받았을 때 그것을 준 사람 앞에서 개봉하는 것은 결례이다. 이런 행위는 탐욕으로 간주되며 그 선물을 준 사람은 당신에게 너무 하찮고 볼품없는 선물을 주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당신 앞에서 당황하게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또한 아주 절친한 친구와 가족을 제외하고는 결혼 선물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 이들의 관습이다.
10) 이성간의 교제 (Association Between the Sexes)
남녀 사이의 우정은 피해야 한다. 즉, 태국인이나 외국인이 자가용이나 집에 남녀가 단둘이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비록 세태가 방콕에서부터 바뀌어가고 있지만, 커플사이의 공개적인 예정표시는 여전히 예절에 어긋나는 행위로 간주된다.
■ 언어
1) 타이문자의 기원
타이족의 최초 국가인 수코타이 왕조를 설립하고 람캄행 대왕에 이르러서 비로소 타이문자가 새로이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서기 1283년으로 람캄행 대왕의 비문에 의해서 증명된다.
2) 태국어의 특징
태국어는 대부분 단음절로 되어 있었으나 과학문명의 발달과 무역, 종교, 문화면에서 외국과 서로 교류하면서 학술용어의 필요성을 느껴 다음절어인 발리어, 산스크리트어, 영어등에서 차용한 신조어가 생성되었다. 태국어는 5성으로 되어 있어서 같은 글씨라도 소리의 높낮이에 의해서 그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동사등의 시제변화가 없고 단어의 품사는 일정하며 각 단어의 문법적인 역할은 문맥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나님 등 성경에 나오는 용어나 왕족, 승려, 부처 등에 쓰이는 경어가 따로 있어 태국에 온 선교사들은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물론 이 경어가 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교양과 품위 및 신분을 나타내 주는 특수 용어이므로 필히 습득해야 한다.
3) 태국어 회화
* 5성 표기 :
- 그냥 중간으로, ∨ 위에서 밑으로 했다가 다시 위로, \ 위에서 아래로,
/ 아래서 위로, ∧ 밑에서 위로 올라갔다 다시 아래로
① 안녕하십니까? sawatdii khrap 싸왇디이 크랍 <남자만> / kha 카 <여자만 사용>
② 감사합니다. khawpkhun khrap 컵쿤 크랍 <남> / kha <여>
③ 실례합니다. khaw-thawt 커 – 토옫
④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 khaw phuut cha-cha noi 푸욷 차-차 노이 크랍
⑤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폼 마아 짜악 쁘라테엗 까울리이 크랍 <남>
■ 종교
1) Buddhism
불교는 태국이 자리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데 중국, 한국 등지의 대승불교와 달리 태국 및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지배하는 불교는 소승불교이다. 소승불교는 산스크리트어로 hinayana인데, hina는 적다, 천하다, 비참하다는 것을, yana는 운반 기구, 혹은 바퀴를 뜻하며, 이를 영어로 직역할 때 little(or small) vehicle 가 되어 이 의미를 문자적으로 그대로 차용해서 우리는 이를 小乘불교라 부른다.
참선과 함께 핵심적인 덕목으로 자비를 강조하는 대승불교와는 달리 소승불교는 지혜를 핵심적인 덕목으로 잡고, 인간은 우주에서 자신밖에 없으며 자신의 노력으로 해탈에 이른다고 강조한다. 소승불교는 아소카와의 후원으로 스리랑카, 인도, 버마, 태국 등 동남아로 퍼졌는데, 대승불교와는 달리 각 나라에서 왕들과 귀족 및 부자들의 보호를 받음으로써 더욱 귀족화되었고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만이 중요하므로 자연히 이기적인 성향을 띨 수 밖에 없었다.
동남아시아에 널리 퍼진 유행어 중에 “승가가 없이는 불교가 없고, 규율이 없이는 승가가 없다.”는 말이 있었는데 후에 발전하여 “불교가 없이는 스리랑카와 버마와 태국은 없다.”는 것으로 발전한 것을 보면 불교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스리랑카, 버마, 태국, 라오스 등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소승불교를 국교로 삼게 되면서 부터 왕들이 승려를 정책적으로 보호하고 경제적으로 지원하자 사찰이 많은 토지와 재산을 소유함으로써 부패하게 되었다.
태국에서 신봉되는 불교의 기본 유형은 Lesser Vehicle의 불교라 불리기도 하는 Hinayana 인데 이는 본래 인도에서 유입되었다. 태국 불교는 이웃 Myanmar에서 신봉되는 것과 같은 유형이지만 크메르 사원 양식에다 중국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많은 차이점을 내포하는데, 이는 태국인들이 수세기동안 자신들의 체질에 맞는 그들 고유의 불교로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종교와는 별도로 불교는 특별히 여러 상황에 대해 반응하는 하나의 철학으로서도 태국인의 인격 형성에 심오한 역할을 해왔다.
2) Islam
'이슬람'이란 그들이 믿는 '알라’에 대해 절대 복종한다는 의미를 지니며 ‘무슬림’이란 절대 신 알라를 신봉하는 자들을 말한다.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이냐?”는 물음에 오직 “인 카나말리 타이빈. . .(내가 좋은 일을 했다면)” 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무슬림들은 사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 숙명론적 사고를 가지고 있으며 살아있는 동안 두려움 가운데 지낸다.
마호멧(Muhammad)’이 창시하여 코란과 칼로 전세계를 석권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진 그들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발하여 중앙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그 세력을 확장하고 이제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다.
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말레이지아는 대략 이슬람교 인구가 전체의 53%에 이르지만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태국 남부 ‘빠따니(Pattani)’의 거주민들이 말레이계로서 이슬람교를 신봉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들은 오랫동안 민족적 종교적 이유로 태국 정부 및 타이족과 갈등을 빚어 왔으며, 태국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무장 게릴라전도 서슴지 않고 있다. 현재 이 지역의 타이 무슬림들은 말레이지아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이슬람의 세력확장과 독립을 꿈꾸며 끊임없이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3) Animism (精靈崇拜)
정령숭배’란 흔히 말하는 Animism(Belief that all objects,for example trees,stones,the wind have souls:物活設)으로써 이는 인격적이고 비인격적인 힘의 존재를 믿으며 그러한 神적 존재가 우리 인간 사회의 삶 속에 깊이 관여하고 간섭한다고 믿는 사상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종교사상이다. 이는 아마 전세계적으로 이 사상이 침투되지 않은 지역이 없을 정도로 그 사상적 힘의 세력은 대단한 것이다. 특별히 동남아시아 지역인 중국, 일본, 대만, 태국, 필리핀, 말레이지아 등은 세계 그 어느 곳보다도 정령숭배적인 요소들이 사람들의 생각과 삶을 지배하는 靈的戰鬪의 최전방이라고 할 수 있다.
애니미즘 문화가 지배적인 지역에서는 귀신이 可視的인 방법으로 자신의 실제를 드러내어 통치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한 예로, 중부 태국의 다타고 마을에 사는 젊은 상인인 에트라는 사람은 귀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고 귀신이 산다고 하는 산으로 가서 사냥을 하게 되었는데 그 뒤로 그가 어떤 고생을 겪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두 주 동안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고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처방책으로 승려가 시키는 대로 술을 바치고 呪文을 외우자 그의 고통은 사라졌다고 한다. 이러한 정령숭배의 전통은 태국 전체적으로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데 도시보다는 농촌이나 산간지방에서 더 강하며, 소승불교와 혼합된 형태를 지니면서 태국인들의 삶을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태로 몰고가고 있다.
■ 疾病(AIDS를 중심으로)
AIDS가 창궐하고 있다. 동남아의 자유 국가이며 수려한 경치와 문화적 유산으로 세계적인 관광국으로 명성을 떨치던 태국이 이제는 AIDS의 공포에 떨고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목숨을 잃었고 현재 HIV 보균자들의 수도 상당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최근에 태국 정부는 불교 승려들 중에도 SEX업소 출입으로 에이즈에 감염된 사례가 많았다고 밝혀 충격을 주고 있다. 태국의 영자신문 The Nation 은 94년 9월 13일 교육부 종무국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여 “현재 에이즈를 유발하는 HIV에 감염된 승려는 전국적으로 1백 30명 이상이며 이중 상당수는 윤락여성과 성관계를 가진 후 보균자로 판명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보사부 통계는 이보다 더 많은 1백 70명에 이른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밝혀지지 않은 보균자의 수자는 실제로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같이 태국은 공무원, 회사원, 군인, 학생은 물론 스님들까지도 매음굴에서 에이즈에 감염되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데 더욱 비참한 것은 태국 정부가 AIDS에 대해 별다른 대책을 강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석해 보면 현재 태국은 관광으로 얻어지는 수익이 전체 국가 수입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에이즈의 공포와 확산에 대해 우려를 하면서도, 실제로는 과단성 있고도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모르는 척 눈감아 주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부는 외국인 에이즈 감염자들의 계속적인 입국에 대해 속수무책인 상태이며 감염된 윤락녀들에 대해 성병(AIDS)진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태국 전역에 골고루 산재한 매음굴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이 없음으로 해서 수많은 내국인들이 윤락녀들과 성관계를 가짐으로써 에이즈에 감염되는 내국인의 비율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 태국교회사
1) 기독교의 전래
태국에 최초의 복음은 AD 525에 경교신자(네스토리안 크리스챤)인 코스모스가 Ceylonth Cangesvalley Tonking에 전한 것으로 알려진다.7) 로빈슨의 선교 역사에서도 태국의 네스토리안 주교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기독교와 접촉한 것은 1511년 포르투칼의 사절단과 동행했던 카톨릭 신부에 의해서였고 실제로 태국에서 기독교가 포교활동을 한 것은 1555년 두명의 도미니칸 신부에 의해서인데 이 둘은 각각 1556년 1569년에 순교했다.8)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 카톨릭 선교가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린 것은 1660년 경 당시 나라이왕이 구라파 제국들 특히 프랑스와 수교를 맺고 외교의 문호를 개방하면서부터였다. 나라이왕은 프랑스 루이 14세와 사절을 교환하면서 영국과 조약을 맺고 활발하게 상호 교섭 정책을 펴나가자 구라파 제국들은 많은 선교사들을 태국에 파송하게 되었고 나라이 왕은 이들의 포교 활동을 허락할 뿐만 아니라 적극 협조까지 했다. 이러한 왕의 포용 정책과는 대조적으로 일반 대중들은 기독교에 대해 대단히 반항적이었으며 그 결과 1556년에 입국한 두 신부를 살해하게 되었다. 이의 주요 원인은 콘스탄틴 폴콘이라는 헬라 사람 때문이었다. 태국 황실에서 영국 사람으로 자처하며 무역에 탁월한 재주를 보여 왕의 신뢰를 받게 되자 그는 프랑스군의 힘을 빌려 황실을 정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태국의 민족주의 감정만 폭발하게 되었다. 나라이왕의 사망이후 카톨릭 선교사들과 프랑스 모든 군인들은 태국으로부터 축출당하게 되었고 카톨릭 신자들은 투옥, 사살되었으며 1688년 이같은 정변으로 카톨릭 선교는 140년간이나 태국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챠크리 왕조의 제4대 왕 몽굿에 의해서 다시 개방이 되었고 1832년 싱가폴에 있는 밀턴 선교사가 성경 번역에 착수했으며 태국어 사전을 편찬했다.
개신교 선교는 1828년 중국에서 선교하던 칼 구를라프와 영국 LMS선교회 소속인 제이콘 톰린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방콕에 거주하던 중국인들 사이에 일하도록 허락받았다. 그 당시에는 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매우 적었기에 사람들이 이들을 보기 위해 몰려왔으며 이들은 중국인 주민에게 강한 수용성을 보였다. 심지어는 이교도의 사제들까지도 기독교에 대해 알기를 원했다. 이들은 태국어를 배워 태국어로 중국 성서를 번역하고 영-태 사전을 만드는 등 문서 선교와 전도활동을 열정적으로 하였다.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극히 저조했는데 이는 이전 카톨릭 선교의 후유증과 서양인들에 의해 손상된 민족 감정 때문이었으며, 특히 18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미얀마의 속국 생활에서 개방되어 더욱 강한 민족주의가 그들의 불교를 중심으로 일어나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개신교가 실제로 생명력을 갖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1835년 브래들리 선교사가 입국하면서 부터였다. 그는 새로운 서양 의술과 인쇄술을 태국에 소개하면서 헌신적인 사역을 펼쳤으며 이로 인해 당시 몽꿋왕에게 호의를 얻어 자유롭게 선교사역을 전개할 수 있었다.
2) 교회 정착기 ( 1850 - 1914)
이 시기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선교 주둔지를 설정하여 교회를 확립시켰다. 선교사들은 재산을 얻고 선교부를 세우고 그 나라의 문화, 관습, 언어를 습득하여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시작했으며 병원, 학교, 고아원 등을 운영하여 이를 통해 복음을 전했다. 정치적으로는 라마 4세인 몽꿋왕이 즉위할 때부터 그의 아들 라마 5세 쫄라롱껀이 집권하던 시기로 외적으로는 서구의 압력과 내적으로는 봉건 사회가 끝나고 새로운 근대 사회로 전환되는 과도기였다.
▷ 제 1기(1850 - 1883)
라마 3세가 죽은 후 라마 4세 몽꿋왕이 즉위하면서 선교 사역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는 교육을 받은 자유롭고 아량이 있는 진보주의자로서 선교사와 매우 친밀하여 선교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68년에 즉위한 쫄라롱껀왕은 1878년에 종교의 자유를 공포하였다. 이로 인해 기독교 선교는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1883년까지 기독교 상황을 보면 55년 동안의 개신교 사역에 총 476명의 신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장로 교인이 326명으로 190명은 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자들이었고 136명이 북부 지역 거주자였으며, 침례교인은 100명이 중국인으로서 방콕 지역에 그리고 50명은 북부 산족 중 카렌 부족이 개종했다.
이 시기의 사역방법은 첫째로 의료 사역이었다. 1828년 외과 의사인 구츨라프에 의해 시작된 이래로 선교사들은 빈곤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태국인들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둘째 선교방법은 학교를 통해서였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젊은이들의 교육이 복음 전도의 큰 수단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학교를 설립해 어린이나 여성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주었다. 셋째로 인쇄업을 통한 문서 선교였다. 즉 성서와 문학작품을 인쇄해 배포하는 것이 초기 선교 여행을 통해서도 많은 결실을 얻었다.9)
▷ 제 2기 (1883 - 1914)
태국에서 가장 극적인 교회 성장은 1883년 - 1914년 사이에 일어났다. 이 성장은 주로 북부지역인 라오에 국한되었으나 남부 지역에서는 1884년 - 1904년에도 거의 성장하지 못하다가 나머지 10년 동안에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부지역의 교회성장이 더 빨랐다. 1902년에는 2,929명의 교인(남부지역 323명)으로 성장하였고 1914년에는 6,334명 (남부지역 821명)으로 성장했다. 이같은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맥길버리(Mc Gilvary) 선교사의 활동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교회를 설립하려는 목적으로 부지런히 순회선교를 하였고 교육과 의술을 통해 주민들과 가까이 할 수 있었다. 개종자가 어려움을 겪을 때 그들을 강력하게 돌보아 주었으며 교육을 통해 태국어를 가르치고 가족 단위의 개종에 관심을 가져 많은 결실을 맺었다. 또 다른 성장 이유는 지역적으로 편중되어 있는 강력한 민족주의와 불교의 영향을 들 수 있다. 대체적으로 사찰과 승려들은 중부와 남부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기독교를 서양종교라며 배척하였다. 반면에 북부의 주민들은 자신들을 라오인이라 지칭하며 소위 콘우왕(Khon Huang) 즉 북부인이라 부르며 중앙 타이를 중심한 민족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 선교사들은 특별히 나환자들에게 관심을 가졌는데 제임스 맥킨 박사는 이들을 치료하며 관심을 가지므로 나환자들이 쉽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1908년에는 창마이 통치자가 그에게 나환자를 위한 치료소와 160에이커의 땅을 주었으며 태국에서는 처음으로 나환자 진료소가 설립되었다.10)
3) 교회 시련기 (1914 - 1945)
1914년 이후 교회 성장은 계속 하락세를 보였다. 단지 나병환자 수용소와 칭마이 지역의 병원 선교, 중국계 피난민들에게서만 약간의 성장을 보였다. 이것은 1차 세계 대전에 태국이 참여하여 교회뿐만 아니라 선교사와 선교부에도 큰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 2차 세계 대전 때에는 일본이 태국을 점령함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다. 이때 수백명의 신자들이 불교로 돌아갔다. 둘째로 선교에 공헌한 인물들의 잇따른 죽음 때문이다. 기독교 선교사와 친분 관계를 유지하여 기독교 선교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쫄라롱껀왕이 1910년에 사망하였고 멕길버리 선교사와 조나단 윌슨 선교사 그리고 죤 캐링턴 선교사가 1911년, 1912년에 사망했다. 셋째로 강력한 두 차례의 민족주의 운동 때문이었다. 라마 6세인 워치라웃이 1910년에 즉위하면서 정치적으로 안고 있던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켰으며 1940년대에 이르러 피분 수상에 의하여 역시 외적으로 전쟁의 소용돌이와 내적인 불안정을 해결키 위해 불교를 중심한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켰다. 넷째는 선교정책의 문제이다. 당시 태국 선교의 주축을 이루었던 장로교가 전도와 교회 설립보다는 학교나 병원설립등과 같은 사회 복지 선교로 관심을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원주민 지도자들이 민족주의자들로부터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사회 사업쪽으로 점점 몰리게 되고 이로 인해 기존 교회 신자들이 지도자를 잃고 흩어지게 되었다. 또한 20세기 초 인간주의, 세속주의, 비판주의 사회복음신학, 자유주의의 출현으로 교회가 영향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사상이 선교사를 통해 태국교인들에게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4) 교회 부흥기
제 2차 대전 후 기독교는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1945년 8,000명이던 신자가 1960년에는 24,539명, 1978년에는 58,953명으로 성장했으며 1988년에는 110,000명으로 급성장하였다. 1970년대 이후 교회성장이 빨라진 이유는 복음이 전파된지 오래 되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리 전파되므로 태국인들이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또한 1973년과 1978년 사이에 선교사가 23%나 증가하고 사역을 하는 기독교 기관도 50%나 증가하는 등 복음전파에 대한 투자의 증가도 한 요인이다. 특히 1987, 1988년에는 태국 교회들이 제자활동 운동, 제자삼기 운동, 제자훈련학교 등을 세워서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좋은 결실을 내었다. 셋째로 선교단체의 초교파적인 연합 활동이 부흥의 원인이 되었다. 1934년에 장로교회와 침례 교회 그리고 독일 말버그 선교회, 그리스도의 제자회 등에 의해 태국기독교 총회(Church of Christ in Thailand)가 조직되어 기도 그룹을 통한 강한 영적 각성운동을 일으키고 칭마이에 태국 신학교를 설립하여 원주민 젊은이들을 훈련시켜서 큰 영향력을 끼쳤다. 또 하나의 중요 연합기관은 1971년 맥가브란 박사를 주축으로 하여 태국교회 성장 세미나를 가진데서부터 시작된 태국교회성장위원회(Thailand Church Growth Committee)이다. 이 위원회는 1976년 이후 세계적인 연합 활동을 전개해 나갔는데 성지 순례 등의 사업을 추진했으며 태국내에서의 연합대회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70년 또 하나의 기독교 연합단체가 생성되었는데 CCT의 에큐메니칼운동과는 대조적으로 독립적으로 복음적인 연합활동을 전개해 나가는 태국복음주의협회(Evangelical Fellowship of Thailand)이다. 40개의 단체와 227개의 태국 교회 그리고 여러개의 지역단체들이 EFT에 소속되어 선교활동을 전개해 가고 있다.
5) 현재 선교상황
선교사역은 비자의 수를 다소 제한하는 할당제(quota system)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자유롭다. 과거에는 사역의 중심이 의료와 교육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이를 통해 개종자들이 생겨나고 교회도 개척되었다. 현재는 도시와 농촌의 복음화와 교회 개척 그리고 성경 공부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현재 17개의 성경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지만, 졸업생들은 전임으로 교회개척이나 목회사역에 뛰어들기를 주저하고 있다. 그리고 적절하게 훈련받고 성숙한 지도자는 거의 없고 나이든 목사에 대한 맹종이 젊은 목사들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
한편, 태국 사회 중심부의 부패는 극히 심각하여 부패한 관리들이 대규모의 SEX 산업과 마약조직, 조직 폭력단을 비호해 왔으며 국토의 생태학적 파괴도 묵인하고 있다. 또한, 질병과 교통사고 그리고 폭동이 많은 선교사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으며 효율적인 사역을 위해서는 2개의 어려운 언어를 익혀야 하는 상황이다.
■ 기도제목
1. 지금까지 태국의 일부 관료들이 대규모의 SEX산업과 마약조직, 조직 폭력단을 비호하는 등 부패를 일삼아 왔다. 이들이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 깨끗한 정치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2. 현재 200만 명 이상이 SEX 산업으로 돈을 벌고 있고 많은 소녀들이 납치되어 매춘업소에 팔려가고 있으며 수많은 거리의 아이들이 매음굴에서 생을 마감하고 있다. 또한 이로 인한 AIDS의 범람으로 태국 전역이 신음하고 있다. 통계를 보면 1992년에 적어도 50만이 AIDS에 감염되었고 2000년까지 4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먼저 이런 비참한 직업에 종사하는 여인들을 돌보아 줄 적절한 수가 채워지도록 기도하고(의료 전문가, 빈민 구제 요원등), 이들을 위해 필요로 되어지는 재정(의약품등의 구입)을 위해서도 기도가 요구된다. 또한, 이제까지 방관만 하고있던 정부에서 구체적이고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고 전국민에게 보건 및 AIDS 교육을 실시하여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기도하자.
3. 중상류층-이들은 부유하고 잘 교육받은 데 비해 신비주의나 강신술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들에게도 복음이 효과적으로 증거될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하자.
4. 대학생 사역-현재 태국의 100만 명의 학생들 가운데 대다수가 복음화되지 않은 상태이다. CCC와 YFC, TCS(IFES),그리고 토착단체 Yuwakrit(유와크릿)등이 대학생을 위해 12개의 기독교 호스텔을 운영하여 학생을 훈련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앞으로 주님께로 나아오는 대학생들이 더욱 많아지고 이들을 훈련 할 캠퍼스 모임도 더욱 성장하도록 기도하자.
5. 인접국인 라오스와 캄보디아 그리고 베트남에서의 분쟁으로 말미암아 태국에는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있다. 이들은 주로 제3국으로 가는 임시처소와 보호시설에 수용되어 있는데 평화 분위기의 고조로 그 수는 점차 감소되고 있다. 현재는 흐몽 라오스인과 캄보디아人인데 이들 가운데 많은 교회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20만 명(1993년 추정)의 난민에 대한 계속적인 기독교 사역(YWAM, WV, CMA, SAO, 기타)을 위해 기도하고 존재하는 기독교 모임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 기도하자.
6. 비록 소수이지만 방콕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태국 경제의 85%를 지배하는 중국계들 가운데는 1993년 현재 69 개의 회중에 9150 명의 교인이 있다. 이 공동체가 역동성과 재정 능력을 발휘하여 태국 복음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7. 태국에 거주하는 250만의 타이 무슬림중 95%가 말레이족으로 최남단의 5도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지역은 1972년까지 공산주의자들과 회교 분리주의자들에 의해 정치적 긴장과 게릴라 활동이 계속되어 왔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무슬림들에게 복음이 열려있는 지역인 이곳에서 복음 사역이 활발히 이루어져 무슬림 선교의 전진기지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
8. 태국을 오랜 세월 지배해 온 소승불교는 정령숭배 신앙과 혼합되어 태국민들의 영혼을 억압하고 있으며 신비주의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서 복음을 증거하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태국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불교 신도들과 악령에게 고통받고 있는 정령숭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자.
9. 기독교 문서, 라디오, 영화, 드라마 그리고 카세트 테이프와 같은 대중매체를 통한 사역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효과적인 복음사역에 기여하도록 위해 기도하자.

이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