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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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정치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교회의 분열과 비민주성이 정치참여를 가로막아
- 기자명 황규학
- 승인 2006.04.17 18:00
5월 지방선거가 목전의 현실로 다가옴에 따라 정치권에 다시 선거바람이 불고 국민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선진국일수록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낮아진다는 통설에 따르면, 아직 우리나라는 선진국 문턱에 이르지 못한 것 같다. 정치에 대한 관심은 양면성을 띄고 있다. 하나는 정치 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이요, 다른 하나는 정치를 통한 사회개혁에 대한 기대감이다.
사실 우리 사회는 ‘총체적 위기’ 내지는 ‘구조적 부패’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 살기가 힘든 사회가 아닌가? 이념 갈등으로 국론은 분열되고, 경제 위기로 청년 실업은 날로 늘어나고, 부동산 투기로 인해 빈부격차의 골은 깊어지고, 사교육비 증가로 출산율은 떨어지고, 부정부패로 정치에 대한 신뢰감은 사라지고, 성폭력 등 범죄는 여전하니 어찌 총체적 위기 사회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세상 구원은 그리스도인의 사명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우리 사회에 대해 울분을 토하면서 개혁되기를 한결같이 바란다. 기독교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개혁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모두를 동의하지만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일부에서는 부패의 근본 원인은 우리 마음이니까 회개운동을 역설한다. 또 국가의 위정자를 위해 기도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또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교회 내’ 운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와 기도만으로 이 사회를 바꿔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참여를 요구하신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동역자로 ‘교회 밖’의 사회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 세상 구원 역시 영혼 구원 못지않게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특히 총체적 위기의 핵심 고리가 정치이기 때문에 ‘정치권 복음화’가 절실히 필요하다. ‘정치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서기’ 때문이다. 정치는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에, 정치를 더러운 손에 방치할 수 없다. 오늘날 영적 전쟁이 가장 치열한 전쟁터는 바로 정치이다. 사탄의 세력 역시 정치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정치에 참여하여, 정치영역을 하나님의 주권에 돌려드리는 정치권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즉 정치권 복음화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그 한 가지 대안이 기독교 정당의 창당이다. 실제로 지난 2004년 총선을 얼마 앞두고 개신교의 보수적인 목회자 모임인 ‘정치권 복음화 후원회’는 정치권 복음화의 당위성을 외치면서 ‘한국기독당’을 창당하여 총선에 참여한 바 있다.
지난 총선 때 한국기독당 참패
하지만 그 결과는 참패였다. 기독당은 전국구 9명과 비례대표 12명을 후보를 냈지만, 국회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실패하였다. 기독당은 적어도 3%의 득표율로 최소한 1석을 획득하고자 하였지만, 유효 득표수의 1.1%인 20여 만 표밖에 얻지 못하여, 정당법에 의하여 정당등록이 자동 취소되고 말았다. 기독당이 한국사회에 뿌리를 내리기를 소망하는 자에게 이는 충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의 김준곤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 등 명망 있는 목회자들이 기독당에 적극 참여하여 150만 표를 호언장담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1.1%는 너무나 적은 수치이다. 한국의 기독교인의 수가 전 국민의 20% 이상이라는 사실과 비교하면 1.1%의 득표는 곧 기독교인의 5%만이 기독당에 투표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서울 경기 지역에서 총 득표수가 11여 만 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인이나 CCC 소속 청년들조차도 기독당에 투표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한마디로 기독당은 일반 국민은 물론이거니와 기독교인으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정치권 복음화’라는 거룩한 사명을 띠고 출발한 기독당은 왜 실패하였는가? 사실 기독교 정당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없다. 이미 독일의 경우 기독교민주당 등 기독교 정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한국 현실’에서 기독교 정당을 통한 정치권 복음화가 효율적인 방법인지는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현실적 여건이 맞지 않으면 모래 위의 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교회 밖의 사회적 여건이 어떠한가? 우리의 현실은 기독교 정당이 뿌리 내리고 있는 독일과 상황이 다르다. 국민의 80% 이상이 신·구 교회에 속해 있는 독일과 달리 우리는 다종교문화에 살고 있다. 기독교 정당이 국회에 교두보를 마련하면, 불교 등 다른 종교에서도 정당을 만들어 국회의사당이 ‘종교 전쟁터’가 되고, 국가 전체가 종교 분쟁이 휘말릴 위험이 있지 않는가?
교회의 분열과 비민주성이 정치참여를 가로막아
무엇보다 국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지 못하다는 현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정당은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기독교는 국민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지 않는가? 목회자의 세금 문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 세습, 유명 목사들의 불륜 등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아야 할 목회자가 개혁 대상 1순위로 부상하고 있다.
또 부정부패와 대형 사고에는 언제나 교회 장로나 교인이 연루되어 있지 않는가? 기독 정치인 역시 그동안 당리당략에 부화뇌동함으로 아무런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특히 이제까지 교회는 지나치게 친정부적인 성향을 갖고 정부의 불의에 대해 눈을 감아왔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국가조찬기도회를 통해 정통성이 결여한 정부마저 옹호해왔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이름이 들어간 정당에 국민들이 표를 주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불신의 근본 원인은 ‘교회 내 상황’이다. 즉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목회자가 목회자답지 못하고, 교인이 교인답지 못하기 때문에 빗어진 결과이다.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사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분열을 거듭하였다. 교파만 분열한 것이 아니라, 교회도 심심찮게 분열해왔다. 물론 교회가 아름답게 분립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최근의 광성교회를 비롯하여 일부 교회는 교회 내 갈등을 하나님 사랑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찢어지는 아픔을 낳고 있다.
심지어는 서로 ‘교회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몸싸움마저 벌인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기독교 정당이 국회에 교두보를 마련하면 몸싸움 하나는 끝내줄 것이라 기대한다. 왜냐하면 교회 내에서 이미 몸싸움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정치의 모델이 되기는커녕 거꾸로 교회가 정치판을 닮아가고 있다.
교회 당회, 정치판을 빼닮아
한국교회는 왜 이런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신앙을 민주주의로 성숙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복음의 본질이 아닌 물음에 대해서는 민주주의를 지향한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는 잘못된 모토 아래 한국교회는 비민주적으로 운영되어 왔다. 한 나라의 정치가 정당에 의해 좌우된다면, 한 교회의 정치는 당회에 의해 좌우된다.
교단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교회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에서 모든 사항을 결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회는 민주적으로 운영되기보다는 한두 사람에 의해 독재적으로 운영되고, 또 교회 재정은 투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비밀에 부쳐진다. 당회가 교인을 섬기기보다는 오히려 당회가 교인을 지배하고 있지 않는가?
민주주의가 꽃 피우자면 두 가지 전제가 성립되어야 한다. 하나는 다양성의 인정이요, 다른 하나는 회의 결과에 대한 복종이다. 그러나 교회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서로 다르게 창조하였음을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데도 교회 지도자들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의 의견에 따르라고 맹목적 순종을 강요한다. 자신의 사견을 하나님으로 이름으로 고집하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는 토론 문화가 부재하다.
토론시에는 서로 다른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토론 시에 자신과 다른 반대 의견을 개진하면 그 사람을 원수로 취급한다. 또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한 후 투표에 부쳐 어느 하나의 의견이 가결되면 그 결정된 의견에 모두 복종해야 민주주의가 성립되는데, 교인들은 이에 복종하지 않고 뒤에서 자신과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아 분파를 형성한다. 그러다가 아예 갈라선다. 한마디로 교회와 당회는 민주주의 학교가 되지 못하고 있다.
교회 복음화가 선행돼야
교회의 이러한 현실은 국민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기존 정당의 운영 형태를 빼닮지 않았는가?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이 있다. 교회의 실상이 이러한데, 이러한 사람들이 정당을 만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기존 정당과 다른 그 어떤 참신함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자화상을 반성하지도 않은 채 ‘정치권 복음화’라는 대의명분만 내세우고 한국기독당을 창당하여 총선에 참여하였다고 낭패를 본 꼴이 되고 말았다. 정말로 정치권 복음화를 원한다면, 우리 기독교인은 먼저 우리의 자화상을 직시해야 한다.
정치권 복음화에 앞서 ‘교회 복음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한다고 해서 교회 복음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처럼 입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몸으로 예수를 고백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결코 교회 복음화는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교회 인사와 재정 등 모든 결정권을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정치권 복음화의 지름길은 교회 복음화이다. ‘교회 복음화’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릴지 모른다. 우리 모두는 교회는 거룩한 곳이요, 하나님의 집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주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원칙이지 우리의 현실이 아니다. 교회 복음화란 교회가 하나님 말씀의 진리 터 위에 곧게 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또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는 교회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아직 우리 교회에는 이러한 진정한 복음화와 거리가 멀다. ‘교회 복음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정치권 복음화는 요원하다. 그래서 필자는 교회 복음화를 통한 정치권 복음화의 길을 제안하고 싶다.
‘기독 정치인’과 ‘교인 정치인’은 달라
그러면 이 대안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 첫 단계는 기독 정치인의 양성이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기독 정치인이라고 불릴 만한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기독 정치인이란 정치가로서의 역량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정체성을 자각하고 그에 따라 정치를 하는 인물을 말한다. 교회에 다니는 ‘장로 정치인’ ‘집사 정치인’은 많으나 그들은 단지 교회에 소속되어 있을 따름이지 예수님께 속해 있지 않다. 기독 정치인이 되려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갖고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하는 많은 정치인들이 일반 정치인과 똑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 표와 돈, 그리고 당리당략에 좌우되는 정치인은 그가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봉사를 하고 헌금을 많이 드려도 기독 정치인은 아니다. 기독 정치인은 교회에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영역인 정치를 성경적으로 감당해야 한다.
물론 이에 대해 정치판이 썩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갖고 정치계에 입문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오죽했으면 유머 사이트에서 이런 글이 올랐겠는가? “국회의원의 윤리 성적은 '가' 이다. 왜냐하면 배신 잘하고, 욕 잘하고, 싸움질 잘하고, 그리고 욕먹을 짓만 하기 때문이다.”
물론 국회의원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전체적인 윤리 수준은 정말로 ‘갗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 정치인은 이 세대를 본 받을 수 없다. 결코 목적의 선함이 수단의 부도덕성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교회는 직접 정치에 참여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기독 정치인을 길러야 한다.
기독 정치인의 정체성,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두 번째 단계는 기독 정치인이 일반 정당에 가입하여 공의로운 정치를 실제로 구현해야 한다. 정치는 기독교인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정치는 국민을 대상으로 하고, 국민 가운데는 기독교인이 소수이고 비기독교인이 다수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 정치인은 기독교인 및 비기독교인 양쪽 모두로부터 심판을 받아야 한다.
여기서 우선 기억해야 할 사항은 기독교인은 기독 정치인에게 무조건 투표해야 한다는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기독교인 역시 공과 사를 구별해야 한다. 도덕성도 실력도 갖추지 않았는데 단지 같은 교회에 다닌다는 한 가지 이유로 투표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비성경적인 태도이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일할 사람을 뽑기 때문이다.
또 기독 정치인은 정의롭게 정치를 해야 한다. 다시 말해, 기독 정치인이 기독교인이라고 편애해서는 안 되며, 또 교회에 우호적인 정책을 남발해서도 안 된다. 어디까지나 법 테두리 내에서 신앙 양심에 따라 정치를 하지 않으면 기독 정치인이라 해도 기독인 및 비기독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 정치인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혹은 지방자치단체장으로 선출되었다 해도, 그는 교회나 교인의 대변인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의 대변인으로 존재한다.
하나님은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 12만여 명이 있는 니느웨성을 사랑하심을 잊어서 안 된다. 물론 구약의 에스더의 경우 왕비의 직위를 이용하여 유대 백성을 구원하였다. 그러나 에스더는 어디까지나 불의에 대항하여 자신의 직위를 이용한 것이지 결코 불법적으로 유대 백성을 편애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왕비 지위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내걸었다. 기독 정치인이 불의에 대항하여 교회와 교인을 지키려면 자신의 지위와 목숨마저 내놓을 수 있는 헌신이 필요하다.
담임목사의 정당 참여는 곤란
기독교 정당은 기독 정치인이 배출되어 그들이 기존 정당에서 공의로운 정치를 펴, 국민들로부터 신망을 얻은 다음에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국민의 신임을 얻는 기독 정치인들이 모여 기독교 정당을 만들어야 정말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기독교 정당이 가능하자면 ‘교회 복음화’가 선행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교회가 복음화되지 않는 한, 결코 기독교 정당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교회 복음화를 바탕으로 기독교 정당이 열매를 맺어도 담임목사의 기독교 정당 가입은 자제해야 한다. 물론 담임목사 역시 국민으로서 피선거권을 지니지만, 현 한국사회에서 ‘담임목사=교회’라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기에, 담임목사의 정치참여는 교회의 정치참여라 아니 할 수 없다.
교회의 사회참여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이 명하신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봉사에 토대를 두어야 하는데, 정치참여를 봉사로 볼 수 있는가? 특히 담임목사가 교회가 아닌 세상에서 불법적인 혹은 비윤리적인 정치 활동을 할 경우, 그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목사의 문제요 교회의 문제로 비화될 수밖에 없다. 담임목사가 정치를 하고 싶으면, 담임목사직을 사임해야 한다. 담임목사는 직접 정당에 참여할 것이 아니라, 신앙과 실력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으로 무장한 성도를 훈련시켜, 그 성도로 하여금 정치를 하도록 간접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김상득 / 전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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