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펌) 성경에 입각한 기독정치의 참여와 실제 본문

선교 한국/선교한국 @ 교회여 일어나라

펌) 성경에 입각한 기독정치의 참여와 실제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3. 11. 14. 22:50

 

 

성경에 입각한 기독정치의 참여와 실제

|   입력 : 2008.08.21 08:26
 

[장헌일 칼럼] 기독교인들의 정치참여에 대한 성서적 고찰 (1)

▲장헌일 박사

장헌일 박사는 20일 서울 높은뜻숭의교회 청어람에서 열린 제4회 개혁과부흥 컨퍼런스 강의안을 토대로 기독교인과 정치에 대한 내용의 칼럼을 보내왔다. 본지는 이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교회는 사회 속에 존재하는 공동체이며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교회 안과 밖의 모든 생활이 이미 정치환경 가운데 있어, 이중적이며 복합적으로 정치와 이미 관계를 맺고 있다. 교회 속에 이미 정치가 있고, 또 교회가 이미 정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정치에 참여해야 하느냐?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참여할 것이냐?’ 하는 방법상의 문제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를 위해 먼저 성서에서 말하는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를 살펴보고 기독정치인의 사명과 역할을 고찰 하고자 한다.

1.기독교인들과 정치참여에 대한 성서적 고찰

1)구약시대의 정치참여

기독교 역사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안에 행동하신다는 것, 구원의 정치를 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시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정치사업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 아담을 창조했고, 여자를 창조해 인간 사회, 즉 인간의 자연적 기본 사회와 정치적 기본 단위인 가정을 형성케 하셨는데 이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정치는 시작됐다.

창조언약에 따라 창조된 인간이 타락하자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시고 심판을 통해 저주를 내리셨고, 타락한 인간이 계속해서 악행을 저지르자 홍수를 일으켜 악한 인간은 이 세상에서 멸하시고 오직 선하고 착한 인간만을 구원하셨다(창 3, 6, 19장).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 해방의 대역사였다.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배경을 종교적인 것으로 만들고, 이스라엘 민족사를 고난과 해방의 역사로 승화시켰다. 애굽에서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되는 그 자체가 정치적·민족적인 것이었으며, 출애굽 과정은 모세라는 지도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구체적인 하나님의 정치,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님의 사업은 인간의 정치적 해방이었다. 즉 애굽이라는 정치 체제로부터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정치적으로 해방시킨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은 정치적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가져다줬다. 출애굽의 신앙은 바로 메시야 왕국의 완성과 직결됐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민족적, 정치적 자유와 해방과 분리시킬 수 없다(출3, 12장).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한 역사는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고, 정치적 자유, 신앙의 자유,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한 인류 역사에서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해방 사건은 우리에게 ①인간 생명의 존엄성 ②정의 ③자유 ④평등 ⑤평화 ⑥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기본권의 중요함을 가르쳐 준다.

이러한 모세가 통치하던 시대, 이스라엘에 역사상 첫 민주적 선거가 제도화 (BC1445년) 됐다.

히브리인들은 이미 부족·지역에 따라 70인의 장로들을 세워 국가적 업무들을 통치했다(출 3:16, 18).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구출해 냈으며, 그들을 미디안 땅으로 이끌었다. 모세의 장인이고 미디안 제사장이었던 이드로가 모세에게 지역과 지방을 다스릴 대표자(재판관) 들을 자유 선출하라고 충고했다(창 18:1, 12, 21-26, 신 1:13).

이스라엘에서 투표로 선출된 재판관(대표자)들과 관련, ‘그때에 내(모세)가 너희(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유망한 자를 택하라.(신1:9, 13)’ 라는 지도자의 덕목이 있다. 특히 나이 들어가는 장로는 부족을 대표하는 지도자이며 투표로 뽑은 사사는 인구분포를 상징하는 지도자다.

‘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 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어려운 일은 모세에게 베풀고 쉬운 일은 자단하더라(출18:21, 26)’

그러나 이스라엘은 성직자에 의해 통치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신정정치(하나님의 법 아래에 있는) 국가였으나, 이것은 제사장이나 종교 지도자들이 통치하는 교회왕국(Ecclesiocracy) 이 아니었다(신 17: 8-11, 민 3:6, 7, 10).

선출된 재판관(사사)과 민간 장로들이 통치하고 그들이 성직자로부터 성직자역할(희생제사 드림)을 빼앗는 것이 금지됐다. 성직자들이 민주적인 선거에서 백성들로부터 재판관으로 선출되는 것이 금지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신앙 때문에 통치할 권한이 전혀 없었다. 모세는 재판관이었으며, 제사장이 아니었다. 사무엘은 두 가지를 겸했다(대상 23:1-6, 26:20, 29). 즉 제사장이기 때문에 관리(재판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사는 재판관으로 정부 지도자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이지만, 장로와 사사가 다스렸다.

특히 모세는 이렇게 민주적 선거 제도를 통해 선출해야할 이스라엘 지도자 덕목(신 16장)과 왕의 덕목(신 17장)에 관해 중대한 선언을 한다.
(1) 지도자는 공의로 다스려야 한다.
(2) 지도자는 공정한 판단을 하여야 한다.
(3) 지도자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4) 지도자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도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거짓을 말하게 한다(출 23:7-8).
(5) 지도자는 오직 정의만을 따라 지켜야 한다.
(6) 지도자는 자신을 위하여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된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왕의 자격에 관해 중대한 선언을 했다. 모세가 지적한 왕이 될 수 있는 조건, 왕이 반드시 해야 할 일 등 10가지 조건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왕이 갖추어야 할 덕목과 별로 다르지 않다.
(1) 왕은 하나님 여호와가 택하신 자라야 한다.
(2) 왕은 다른 민족이 아닌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나와야 한다.
(3) 왕은 자신을 위하여 말을 많이 두지 말아야 한다.
(4) 왕은 아내를 많이 두어서는 안 된다.
(5) 왕은 은과 금을 자신을 위하여 쌓아두지 말아야 한다.
(6) 왕은 율법을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읽어야 한다.
(7) 왕은 항상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워야 한다.
(8) 왕은 율법의 모든 말과 규례를 지켜 행하여야 한다.
(9) 왕은 이상의 것을 지키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않게 된다. 즉 교만은 절대 안 된다.
(10) 왕은 이상의 것을 지키면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왕은 좌로나 우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

구약에서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은 오랜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데 그 존재 가치가 있으며, 국왕은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지고 하나님의 통제와 재판을 받는다는 정치 신학을 가능케 했다. 즉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민족을 다스린다는 것이며, 이스라엘 정치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말은 그만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윤리적 정치신학은 선지자적 신앙과 발언을 가능하게 했다. 이사야, 예레미야의 발언은 파멸을 앞두고 있는 부패한 이스라엘 왕권에 대한 진언이며 경고였다. 아모스와 호세아의 발언은 국내 정치와 경제, 사회 문제에 대한 도덕적 발언이었다. 이와 같은 선지자들의 발언은 하나님의 정치적 발언을 대행한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를 반역하는 불의한 정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고 사회적 불의와 부조리, 부정과 부패, 정치적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계명은 주 너희 여호와를 사랑하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두 번째 큰 계명은 한 백성끼리 양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고 너희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었으나, 가장 큰 계명을 지키지 않고 우상을 섬기다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됐고, 솔로몬왕 말엽에 두 나라로 갈라지면서 패망의 길(신 6,레 19)을 걷고 만다. 패망 후 2500여 년간(B.C. 586년 패망, A.D. 1948년 독립) 나라 없는 설움, 대량 살육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2) 신약시대의 정치참여

신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치 사업은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의 참된 자유와 해방을 위해 몸소 이 세상에 정치를 하러 오시는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백성의 구원이었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정치를 하려고 오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해방 정치는

첫째,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둘째,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에게 눈 뜨임을, 그리고 눌린 자들을 놓아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러 오신 것이다.
셋째, 예수가 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 왔다는 것은 단순한 지배를 위해서 왔다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구현에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이 가르친 가장 큰 첫째 계명은 주 여호와를 사랑하고,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마음과 영혼과, 네 모든 힘을 다하여 섬기라는 것이다. 여기서 첫째 계명은 그리스도인과 하나님과의 수직 관계, 즉 영적 생활에 관한 교훈이고, 둘째 계명은 이웃과의 수평 관계 즉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교훈이다. 이 두 계명은 다 같이 마음과 영혼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기독교인이 사회와 국가의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계명을 잘 지키는 것과 같다. 인간 사회 속에서 기독교인 해야 할 책임과 역할을 잘 하느냐 하는 문제는 인간 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정치 참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약시대 정치참여를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 선거제도다. 선거를 통한 사도들의 정치참여(주후 56년)가 신약시대에도 잘 나타나 있다.

고린도를 향한 바울의 서신은 그리스의 믿는 자들이 선거에서 거룩한 통치자를 선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고전 6:1-5).

바울의 동료 사역자 에라스투스는 고린도 정부 관직에 선출되는 모범을 보였다(롬 16:23). ‘이 도시의 재무장관 에라스도(에라스투스)는 당신을 환영한다.’ 이는 그 당시 정치 실무자로 선출됐던 사람들 중 한 명인 것이다.

또한 바울과 베드로의 정치적 가르침(주후 57년)도 동일하다 (벧전 2: 13, 14). 바울의 로마서는 정부는 악을 이기고 성결을 보호하는 것을 도와주는 일이 하나님의 극히 중대한 사역이라고 성도들에게 가르친다.

시민들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지도자에게 복종하고 그들을 지지해야 한다(롬 12:19, 21, 13:1-4).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3)AD 300년경 전후의 기독교의 역할

성서적 원칙의 지도자들은 유럽의 이교도 지도자들과 정치적으로 대처(A.D. 100-600년)했다.

텔레마커스와 같은 기독교인은 검투사 경기와 인신희생 제사와 같은 악에 대항해 이교도적 행위를 개혁했으며, 콘스탄틴 황제역시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시키고 종교적 자유를 승인(318년)했고, 비잔티움황제 유스티니안은 로마법을 기독교화했다(528년).

특히 성 패트릭과 아일랜드인·켈틱 기독교인(A.D. 400-500년)의 역할은 실천하는 신앙의 모범을 보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 패트릭은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켈틱교회로부터 아일랜드에 파송되었다(432년). 그는 모세의 율법을 사용해 도시의 지도자들을 제자로 삼았고, 교육제도를 시작(445년)했으며, 인신희생 제사를 폐지했고 노예를 취하는 것에 반대한 최초의 기독교인이었다. 그의 후임자 베닌은 ‘정의의 책’을 썼으며 경배와 율법에 대해서 가르치는 아일랜드 수도원과 학교를 시작했다.

이러한 아일랜드, 켈틱선교사들이 서유럽을 변혁시켰으며 알프레드 대왕과 잉글랜드의 법(600~900년)에 영향을 미쳤다.

알프레드 대왕은 아일랜드에서 공부를 마친 후 성 패트릭의 법을 토대로 앵글로색슨 법을 제정했고, 히브리 공화국을 기초로 하여 입법부를 선거로 구성하고 권력을 분산시킨 최초의 왕이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마그나카르타(대헌장)와 개인의 권리에 대한 기독교 사상(1100~1400년)이 반영됐다.

영국의 대주교 Stephen Langton은 마그나카르타를 기안하였고 1215년 John 왕이 이를 승인할 때 까지 귀족들의 저항을 이끌었다. 이 대헌장은 어떤 설명 없이 과세되지 않을 것, 재판 없이 투옥되지 않을 것, 여행의 재한을 두지 않을 것을 보증했다. 이때부터 아시아는 이슬람과 카톨릭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이상과 같이 대의 정치의 출발은 신약 시대에서 장로, 집사를 선출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러한 신약 시대에서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는 교회의 장로주의는 종교개혁 당시 칼빈의 사상에 의해 전 세계로 파급됐다. 스코틀랜드와 영국을 거쳐 신대륙으로 전파된 장로주의는 미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영국의 회중교회는 영국국교회가 감독을 임명하고 예배 의식까지 나라에서 통제하려고 하자 이에 반발하여 개교회가 완전한 독립 체제를 가지며 교회의 목사, 장로, 집사를 투표에 의해서 선출하는 독립 교회를 세우면서 민주주의 기초를 닦았다.

영국에서 처음으로 국교 제도에 반발하여 정치와 종교를 분리할 것을 제의한 사람은 1569년 장로교회를 세운 토마스 카트라이트이고, 회중교회는 1581년 카트라이트의 제자인 로버트 브라운이 교회를 세우면서 정치와 종교의 완전 분리를 주장한 것이 처음인데, 정교 분리의 원칙은 신약 성서의 교회 간부 선출 방법에 기초한 것이었다.

미국의 회중 교회는 1631년 로저 윌리암 목사가 식민지 각 주마다 영국의 국교와 비슷한 신권정치가 계속되는데 반발해 정교 분리를 주장했다. 이와 같이 정교 분리원칙은 종교개혁 때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돼 미국에서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면서 미국식 민주주의 국가 정치체제의 중요한 정책으로 발전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가 긴장과 갈등 관계를 유지해 오면서 기독교인의 정치참여 문제 역시 2천년간 교회가 고심해 온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다. 서양 역사 2천년 정치사는 교회와 국가 관계가 어떤 관계이었는가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았다. 대부분의 역사는 동방 카톨릭교회처럼 황제가 교황의 역할을 겸하는 황제 교황주의 정치 체제를 택했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황 황제주의를, 루터교회는 두 가지 통치설을, 영국 국교회 시대는 왕이 국가와 교회를 다스리는 국왕 교황주의를 택하려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를 신봉하는 유럽과 미국 교회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원칙을 채택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독립 이후 국교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삼았다. 토마스 제퍼슨의 미국헌법 수정 제1조(1791년 인준)에 표명돼 있는 정교분리의 원칙은 흔히 이해하는 것처럼 정치와 종교는 무관하다는 취지가 아니라, 특정 종교 혹은 종파를 국가 종교로 삼음으로써 다른 종파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약하지 않는 의지에서 설정된 것이었다. 따라서 종교가 정치에 영향력을 주거나, 정치가가 종교적 신념에 따라 행하는 것은 문제가 되질 않았다. 뿐만 아니라 미국 건국 과정에 기여한 청교도의 정신적 영향력으로 인해 미국 정치의 근본에는 기독교 개신교적 가치관이 일종의 정치적 점검장치의 역할을 하였다.

대한민국 현행헌법 제20조는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와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로 돼 있다. 이러한 정교분리 원칙의 헌법적 선언의 원조는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미국헌법 수정 제1조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교 분리 원칙이란 국가가 특정한 종교나 교파의 입장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즉 국가나 권력을 가진 자가 힘을 사용해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제한하는 제도는 반대한다는 뜻일 뿐이지, 국가와 종교가 완전히 별개로 나눠져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반적인 관계는 상호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부상조 보완하는 관계를 말한다. 즉 교회는 인간의 영적 생활에 관여하고, 국가는 세상적인 것을 다루는 기관인데, 영과 육을 나눌 수 없듯이 두 기관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은 물론 정치인들도 교회와 정치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4) 근대 기독교인들의 정치참여

1800년대 전 세계 인구 중 기독교인 비율은 1:50 이었다. 오늘날은 1:7로, 이러한 사실은 자유를 가능케 했다.

1860년대 미국 전쟁은 노예제도를 종식했고 유럽에서 농노제가 폐지되고 왕 대신 (국무)총리 제도가 정착되기 시작한다.

20세기,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과 성경의 영향을 받는 통치사상 채택 선언이 있었고, 인도네시아의 무슬림(Pancasila) 조차도 그랬다. 필리핀은 첫 번째 공화국, 한국은 모든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변혁된 국가다.

이교도적 사람들과 정부들의 마르크스주의, 파시즘, 국가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은 무너진다. 지금의 싸움은 세속적인 인본주의(사회, 자본주의 모두) 이슬람교 테러정치, 국가 환경 결정론과 대치한다.

세계의 민주주의적 개혁(1800~2000년)역사는 2000년 전 오직 한두 국가에만 진정한 자유가 있었다. 오늘날은 60개 이상의 국가가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런 대부분의 국가에는 성서 중심의 기독교가 자유롭게 퍼져 있다(기독교 외 다른 영향을 받은 경우도 있다).

5) 유럽의 국가변혁 과정

동유럽의 국가변혁 과정은 1990년대 공산주의 붕괴 이후 많은 복음전도 및 기도에 힘입어 복음주의 기독교인의 의미심장한 수적 증가 및 새로운 교회들이 다수 개척됐다.

1990년대 Providence 재단 등은 그 모든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국가변혁에 관한 러시아어 자료들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한편 서유럽의 국가변혁 과정을 보면 2003-2007년 까지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치 영역의 변화를 위해 연합하고 조직했다.

특히 라트비아는 러시아인 소수민족과 화해하고 새로운 정당이 정부를 이끌고 있으며, 우크라이나는 유럽 최대의 교회가 있고 2004년 11월 선거와 함께 기독 대통령인 Kiev시장(2006년)을 선임하고 2007년 7월에는 의회와 국무총리 모두 기독교 중심의 자문을 받고 있다.

/장 헌 일 박사
(사) 국가조찬기도회 사무총장
국회조찬기도회 협동총무
명지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