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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경남신문 > 사회 마산 오동동 아케이드 역사 속으로기사입력 : 2011-08-10 01:00:00 옛 마산시 원도심의 중심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아케이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창원시는 9일 지난해 10월부터 시작된 오동동 아케이드 철거 작업을 8일 최종 완료했다고 밝혔다. 아케이드가 사라진 자리는 정비 공사를 거쳐 생태하천으로 재탄생,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된다. 시는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6월까지 공동주택과 점포가 있던 건물 1동을 철거한 데 이어 336개의 점포가 있던 건물 2동 철거를 마무리했다. 시는 오는 10월부터 복개 구조물 철거와 동시에 정비 공사를 실시, 회원천 3km 구간을 생태하천으로 꾸밀 예정이다. 281억 5000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이..
일본 신사(神社)가 우리 민족을 정신적으로 위압했다면, 물리력으로 우리를 억누른 것은 일본의 군대와 경찰이었습니다.일본군대의 마산진출은 1905년 마산선 철도가 건설될 때 쯤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진출은 1909년 7월 일본육군의 중포병대대(重砲兵大隊)가 진해에서 마산 월영동(현 월영동아파트단지)로 이전한 것과 같은 해 12월 대구헌병분유소(大邱憲兵分遺所)을 신마산에 설립한 일입니다.이 글은 월영동에 주둔했던 「육군중포병대대」에 대한 내용입니다.러시아와의 각축기에 일제는 율구미와 자복포 일대(현, 월영동 아파트 단지 및 구 한국철강 부근 일대)를 그들의 전관거류지로 확정했다가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을사조약이 체결될 즈음 이 지역은 군용지로 바뀌었습니다.그러다가 1908년부터 본격적인 병..
개항 당시 각국거류지에는 러·일 영사관 건물 외에 러시아와 일본 민간인의 건물 몇 채만 있었을 뿐, 일본인 대부분은 한인거주지인 마산포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1899년에 건축한 러시아 영사관 건물입니다.마산이사청과 함께 지은 마산 최초의 2층 건물로 조계지 언덕에 걸터 앉은 모습이 위용 당당합니다. 경남대 평생교육원(구 창원군청) 옆에 있었습니다. 조계지 내에서 경제활동을 했던 러시아인들은 조계지내의 대지주이면서 무역업과 러시아군함에 대한 잡화용달업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함석이나 기와로 된 주택을 직접 지어 살았습니다. 1900년 연말 현재 조계지 내 러시아인 건물은 모두 6동이었으며 그 중 한 채는 건평 80평으로 호텔업을 목적으로 건축 중이었는데 조계지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위치는 조계지..
한국 원자력산업의 공장 ‘두산중공업’APR-1400 원자로로 세계 시장 공략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입력2006-12-15 16:23:00 창원이 박정희의 꿈이 어린 땅이라면, 귀곡단지는 정인영의 야망이 서린 땅이다. 어렵게 출범한 기계공업의 메카에서 어떻게 원자력산업이 꽃피게 됐을까. 원자로와 증기발생기를 제작하는 두산중공업은 미국과 중국 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다.쫀득쫀득한 강철이 방사선에 잘 견딘다. 그러한 강철을 만들려면 담금질 과정이 필요하다. 두산중공업의 단조공장.경남 창원시 귀곡동에 있는 두산중공업을 찾아가는 길은 묘하다. 창원 시내를 벗어나 진해 쪽으로 잠시 차를 달리다 장복터널 못미처 오른쪽으로 빠지면 두산중공업 입구가 나타난다. 창원에서 진해로 가는 길도 ..
2003년 조기 은퇴를 했던 두산 중공업 중제관 공장 홍보물 1981년 첫 직장이였던 한국 중공업 모음 ( 2020년 재 편집 올림 ) 떠돌아 다니는 동영상과 함께 모아 봤습니다. 내 나이 스물 여섯. 군복무를 마치고 독립적 삶을 살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만나야 했던 직장 . 그 첫 직장이 창원 한국 중공업 원자력 생산부 현장이였습니다 . 박봉에 힘든 일이였지만 미래 가정을 위해 피할 수 없는 선택이였습니다 . 그 후 결혼하고 정착한 곳이 마산 산호동이였고 두산 중공업으로 상호가 바뀌며 중제관공장 산업과에 편성되어 25여 년을 지내야 했습니다. 한 직장에 이십 여년을 한 직종에 삼십 여년을 살게 했던 것은 가정과 가족 . 신앙 생활이였지 않나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