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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나는 왜 분노하지 않을 까? 본문

부르심의 축복/광야에서 거닐다 2010

나는 왜 분노하지 않을 까?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0. 9. 11. 08:53

20100911 (토) 나는 왜 분노하지 않을 까?

 

사도행전 17 : 16 ~ 34

17: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관찰) 아덴에서 전도하는 바울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하여 분노하며 진리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그들의 우상을 믿는 잘못 된 믿음을 지적함

 

말씀 듣기) 나는 어떠한가 ?

비교적 남도지방이 우상이 많다.

그런 가운데 바닷가 마을들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시인의 마을 이라고는 하지만 마산 역시 우상이 많이 둥지를 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들을 보는 나의 눈을 원만하다.

그들을 대하는 나의 마음은 무반응이다.

종교의 자유를 기록한 헌법과 조례를 배우며 자란 환경 탓으로 돌리기에는 뭔가 부족한 듯하다.

적어도 내가 성령 충만 하다면 그들을 측은하게 여김이 마땅한데....

그들의 영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들 영혼들의 문제로 고민해야함이 원칙이 아닌가?

그런데 나의 마음은 그들을 위해 몸부림 친 경험이 없다.

기껏 한다는 것이 몇 장의 전도지를 몇 명의 그들에게 건네줌으로서

나의 역할을 다 한듯 그들을 잊어버리곤 한다.

그렇다면 나 역시 성령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바울의 사역을 빌린다면 나는 죽은 자이고, 나는 거짓된 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실까? 묵상한다.

집회 때만 잠깐 갖는 성령의 초청, 때로는 이마저 감정의 산실로 남겨 버리는

얄팍한 믿음은 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라한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 아버지가 말씀하신다 간과하심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내가 주님을 위해 한 일이 없지만

이제 주님을 위해 주님의 사랑을 흘러 보내는 통로가 되기를 기대하신다.

이것까지 뿌리친다면 ... 나는 무엇으로 주님께 변명을 할꼬?

듣고 행하며 믿고 안 믿는 것은 그들의 몫이요, 주님의 축복을 누리는 것도 그들의 몫일진데

나는 다만 주님의 그 축복을 전하는 통로로 쓰임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나는 영적 전쟁에 나가는 주님의 총이고, 우리 교회성도들의 중보기도가 이 영적 전쟁의 총알들 인 것이다.

나 혼자 나가 싸운들 빈 총이 무엇을 한단 말인가?

나보다 더 필요한 성도님들의 기도의 능력을 힘입고 싶다.

이제는 분함보다 사랑으로 그들을 안아야 할 때인 것을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사랑의 총알을 지원하는 성도들이 되는 것이고

사랑을 전하는 총이 되는 것인데

이왕이면 총보다는 8인치 대포가 되고 싶다. ㅎ ㅎ

주님이 함께하신다면 못 이룰 일이 되겠는가?

 

적용) 주님이 점검하실 것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나를 살피는 하루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