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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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고난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일어서는 이들은 있다
살다 보면 인생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410년 전인 1614년 12월, 마닐라만에 낯선 일본 배가 도착한다.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이 이끄는 배였다. 영지를 다스리던 다이묘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일본 내 기독교 금지령이 발표되자 영지와 권력을 포기하고 추종자 300명과 함께 마닐라의 스페인 총독에게 망명을 요청한다. 국제적인 사건이었다.
일행 가운데 조선인이 두 명 있었으니 박 마리나(1573~1636)와 가이오(Caius)라는 세례명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갔다가 기독교 신자가 되었는데 다시 망망대해를 건너 필리핀까지 오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다. 다카야마가 사망하자 가이오는 일본으로 돌아가 조선인 최초로 예수회 수사가 된 뒤 나가사키에서 순교하며 박 마리나는 마닐라에서 수녀로 일생을 마감한다.
두 사람의 자취를 따라 마닐라의 원도심 인트라무로스에 있는 총독궁을 지나 마닐라 대성당까지 걷는다. 첫날 종교의식이 거행된 곳이다. 어디선가 울리는 종소리, 종교가 없는 글로생활자이지만 낯선 땅에서 다시 시작하는 두 사람의 비장한 마음처럼 들린다. 마닐라는 바스크족이 세운 도시다. 인트라무로스 부근 녹지에는 두 바스크족 인물을 기리는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칼을 쥔 사람은 레가스피, 스페인 탐험대를 이끌고 1571년 마닐라 지역을 침공해 성채를 건설한 뒤 초대 필리핀 총독이 되었다. 그 옆에 십자가를 든 이는 우르다네타. 레가스피의 사촌으로 태평양 해로를 발견한 항해사이자 가톨릭 수사였다.
바스크족은 스페인 북쪽 피레네산맥과 바닷가에 사는 변방 민족으로 고유 언어가 있지만 농경지가 부족해 먼바다에서 살길을 찾았다. 찰스 만의 명저 ‘1493′에 의하면, 포토시 등 중남미 은광 개척도 바스크족이 주도하였다. 신대륙에서 가져온 은과 중국에서 싣고 온 도자기, 비단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마닐라에 세계 최초로 차이나타운이 생긴다.
세월이 흘러 1802년 11월, 필리핀 해안가에 또 다른 조선인이 표류해 온다. 주인공은 문순득, 흑산도에서 홍어를 산 뒤 강진과 해남에서 쌀과 교환하던 상인이다. 삭풍이 몰아쳐서 해난 사고가 빈번하여도 홍어잡이 배들은 겨울철에 출항하였다. “동지 후부터 어기(漁期)가 시작되어 입춘 전후하여 맛이 가장 좋다”고 흑산도 유배인 정약전이 ‘자산어보’에 기록한 것을 보면 겨울 바다는 위험이 큰 만큼 수익도 큰 시장이었다.
그해 1월 문순득이 탄 배가 폭풍을 만나 11일간 죽음과 싸우다가 유구(오키나와)에 도착한다. 8개월 체류한 뒤 중국으로 가는 배를 얻어 타지만 또다시 폭풍을 만나 난파하게 되니 불운의 연속이었다. 정약전의 또 다른 책 ‘표해시말’은 문순득을 인터뷰한 것으로 “여송(呂宋·필리핀)의 말리라(末利羅·마닐라)에는 복건인 3000호가 산다”고 적고 있다. 푸젠성 중심의 차이나타운이 번성했다는 뜻인데 지금도 화교 파워가 막강하다.
최성환의 ‘문순득 표류연구’에 따르면, 주로 체류한 곳은 비간. 마닐라에서 자동차로 7시간이 걸릴 정도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식민지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신묘(神廟)가 비할 곳 없이 크고 아름다웠다”고 묘사한 곳은 성 바오로 성당. 중국인 3세와 수도사의 도움을 받고 끈을 꼬아 팔아서 용돈을 마련했다. 일간삼지(一幹三枝·포크)를 사용하는 홍모(紅毛·서양인), 중국인, 안남(베트남)인, 필리핀 사람이 함께 어울려 장사하는 광경은 상업이 천시되던 조선 출신 상인에게 부럽기 짝이 없었다. 그의 화폐 체험은 정약용의 ‘경세유표’에 인용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마카오를 거쳐 청나라 수도 북경에서 조선 사신단에 인도되어 3년여 만에 고향 우이도에 돌아온다. 4국을 거치는 험난한 과정에서도 필리핀, 유구어를 기록해 두었다. 덕분에 제주도에 표류한 이방인이 필리핀 출신이라는 것을 밝혀내 돌려보낼 수 있었다.
문순득은 조선의 하멜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직원 하멜이 스물세 살에 제주도에 표착한 것처럼 문순득도 스물네 살에 생업을 위해 탄 배가 난파했다. 정식 교육은 못 받았어도 뛰어난 관찰력에다 기록 정신, 상업 감각, 회복 탄력성까지 비슷하다.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는 문순득의 가치를 한마디로 요약한다. “함께 표류했던 나머지 5명도 만나보았으나 다른 나라에 대해 한 가지도 아는 바가 없었으나 유독 문순득만 자세하게 구술하였다.” 그가 들려준 세상 소식에 조선 지도층은 흥미를 느끼지 않았던 반면 유배인 정약전·정약용 형제와 제자는 큰 호기심을 보였다. 변방 아웃사이더의 촉수가 더 예민한 걸까. 정약전은 문순득에게 ‘천초(天初)’라는 별호를 지어주었는데 라틴어로 표현하면 ‘테라 인코그니타’, 미지의 세상을 처음 경험했다는 뜻이다.
노력하는 한, 인간은 길을 잃고 방황하기 마련이라고 괴테는 말했다. 표류의 길을 따라가는 동안, 이 시대의 길 잃은 인생들을 적지 않게 만났다. 돈, 직업, 애정 등 이유는 다양했다. 불운이 닥치면 대개 운명을 원망하지만, 고난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하고 일어서는 이들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문순득이 돌아와 아들을 낳았을 때 필리핀에서 귀환했다는 의미로 ‘여환(呂還)’이라 작명해 준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던지는 영감의 메시지였는지 모른다. 정약용도 18년의 고독한 유배를 이겨내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갔다. 살아남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결국 살아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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