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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우리가 잘 몰랐던 화력발전소 이야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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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우리가 잘 몰랐던 화력발전소 이야기]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24. 11. 11. 18:33

1960년 뜨거웠던 마산 민주화 경험한 시민들 비회 사태도 끝장봤다

  • 기자명정대훈 국사편찬위 편사연구사
  • 입력 2024.06.13 18:13
  • 수정 2024.06.16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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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몰랐던 화력발전소 이야기]
(3) 각성한 시민들

10년 전인 2014년 6월 11일 울산 신고리원전에서 이어지는 송전탑의 건설을 반대하는 농성장이 강제 철거되었다. 이 '밀양 행정대집행'은 전기(電氣) 생산에 따르는 부담이 특정한 지역과 계층에게 불평등하게 집중된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아주 비슷한 일이 과거 마산에도 있었다. 1956년 발전(發電)을 시작한 마산화력발전소다. 마산화력발전소는 가동 직후부터 '비회(飛灰)'라고 불린 매연이 크게 문제가 되었는데, 그 부담은 지역 주민이 오롯이 져야 했다. '밀양 행정대집행' 10년을 맞은 지금, 날로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 앞에서 불평등한 에너지 수급 구조를 돌아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70여 년 전 마산 시민들이 겪었던 매연 문제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까. 3회에 걸쳐 우리의 '오래된 미래'일지도 모르는 마산화력발전소 가동 초기의 공기오염 문제를 살펴본다.


 

마산화력발전소가 건설된 지역은 이른바 '신마산'으로 불리는 곳이다. 마산만의 서쪽인 이 지역은 마산만의 북쪽을 중심으로 성장한 마산의 옛 도심과 구분하여 '신마산'으로 불린다. 러일전쟁 시기에 일본군이 마산에 주둔한 이후 일본인이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확장된 도심이었다. 해방 직후에 6000여 명의 일본인이 떠난 후 일본에서 귀환한 2만여 명이 이 지역에 정착한 것을 비롯해 한국전쟁 시기의 피난민도 이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따라서 이 시기의 신마산은 사회적 발언력과 소득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곳이었다.

출처: 이은진, 2001, ‘1950년대 마산시 거주자의 인구학적 특성’ 15, 40, 56, 57쪽의 표를 일부 수정.

◇기득권이 주도했던 비회 항의운동 = 1958년 말 현재 마산시의 월남인 인구 분포를 정리한 <표>에서 비회의 피해를 입었다고 보도된 지역(짙게 표시)을 살펴보면 마산 내에서도 월남민의 비율이 높은 곳이 대부분이다. 이들 지역에 거주한 월남민은 총 2463명으로 마산시 전체 월남민 4258명의 58%에 해당한다. 이 지역의 전체인구가 마산시 전체인구의 40% 미만인 것을 염두에 두면 이 지역의 월남민 비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비회 문제를 계기로 정부에 대해 광범위한 불만이 신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누적되었다는 사실은 1960년의 3.15의거 및 4월 혁명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심장하다. 4월 혁명을 다룬 기존의 역사 연구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해방 이후의 귀환동포와 한국전쟁기의 피난민, 1950년대 농촌경제의 몰락에 따라 도시로 유입된 노동자층 등을 중심으로 한 반자유당 정서가 마산에서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는데, 이것은 3.15의거 및 4월 혁명의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배경에 더하여 마산화력발전소의 비회 문제가 3.15의거를 가능케 한 계기가 되었으리라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신마산 지역은 마산 내에서도 소득과 생활수준이 비교적 낮았기 때문에 이 지역 주민들은 지속적으로 항의운동에 전념하기는 어려웠다. 비회에 대한 항의행동이, 비회가 심각해지는 여름만 지나고 나면 절로 잦아드는 것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비회에 대한 항의행동은 온전히 해당 지역 주민의 힘에 의해 추동되기보다는 지역의 유력자들에 의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정작 마산의 유력자들은 비회 문제가 아닌 다른 쟁점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예컨대 1956년 7월 31일 무학국민학교에서 개최된 시민대회에는 중앙도매시장 설치 요구 구호도 함께 등장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항의운동을 주도한 마산의 유력자들이 비회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중앙도매시장 문제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이미 지역사회 내부에서부터 제기되었다. 실제로 중앙도매시장 문제가 일단락되는 1956년 9월 이후에는 지역의 유력자들이 운동에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이듬해 5월 13일 오후 2시 마산시의원실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마산화력발전소매연방지대책위원회 회의는 전체 위원 17명 중 3~4명만 참석하여 성회되지 못하기도 하였다.

연기를 내뿜는 마산화력발전소 굴뚝(출처 역광 모래같은 애향심) 마산일보, 1962년 9월 15일 자.

◇3.15의거 이후 달라진 시민의식 = 그런데 1960년 여름부터는 비회에 대한 항의행동 양상이 약간 달라졌다. 주민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항의운동에 나섰다. 1960년 6월 10일 오전 11시에 신마산 주민 300여 명이 가두시위를 벌였고, 7월 7일에는 마산화력발전소 주변 23개 동 동민대표 약 50명과 마산상공회의소 대표, 시의원 등이 참여하여 매연방지투쟁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시당국과 시의회, 시민이 공동으로 대책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1960년 들어 시민들의 항의운동이 좀 더 거세게 일어난 것은 3.15의거와 4월 혁명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3.15의거와 4.19혁명을 거치며 정치적으로 각성한 시민들은 더 이상 유력자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항의행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발전소 인근 지역의 741가구가 직접 연대서명하여 한국전력주식회사 대표취체역(대표이사) 박영준을 상대로 마산지법에 마산화력발전소 진회방지청구의 소를 제기한 것이다. 소를 제기한 원고는 청구 취지에서 1955년부터 발전소의 비회 때문에 일상생활과 재산상의 피해가 막심하므로 비회방지시설의 설치를 촉구하는 한편 이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지 않으면 손해배상까지 청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유력자 중심의 기존 조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행동에 나섰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움직임에 자극받아 그간 공식적인 입장을 자제했던 마산시의사회도 6년 만에, 발전소의 행태는 시민의 건강을 도외시한 것이므로 의사회도 매연대책 협의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시민 주도로 일궈낸 작은 성과 = 적극적인 항의행동 때문일까, 1960년 이후 비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추진된 저감장치의 신규 설치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1961년 8월 8일 상공부는 전기국 명의로, 1961년 하반기에 저감장치 설치를 발주하여 1962년에 설치를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저감장치의 신규 설치는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6월 6일에 국제 입찰을 마친 후 9월에 계약을 체결하고 1963년 2월에 착공하여 9월에 완공될 것으로 발표되었다. 이 장치가 완성되면 95% 이상의 비회가 제거될 것이라고 발전소 측은 밝혔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항의에 힘입어 저감장치는 1963년에 드디어 완성되었고 이후 비회 문제는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저감장치가 고장날 경우 비회가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여전히 잠재해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마산발전소의 비회 문제는 1960년대 중반 들어 정부가 에너지 정책의 중심을 석유로 전환하면서 재발의 여지가 없어질 수 있었다. 특히 1966년 연탄파동은 에너지 정책의 중심을 석탄에서 석유로 옮기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연탄파동 이후 정부는 벙커C유의 가격을 연달아 인하하였고 그 결과 화력발전용 연료는 석탄에서 석유로 대체되었다. 결국 마산발전소가 1966년 7월 발전연료를 벙커C유로 변경하면서 약 10년에 걸친 마산발전소의 비회 문제는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끝>

/정대훈 국사편찬위 편사연구사

신마산 화력 발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