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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비석의 숲 비림, 서구로부터 지켜낸 ‘경교비’ 본문

도움 글/펌 ) 성서 한국을 기도하며

펌) 비석의 숲 비림, 서구로부터 지켜낸 ‘경교비’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24. 9. 18. 16:33
비석의 숲 비림, 서구로부터 지켜낸 ‘경교비’

 

 

 

당나라 때 이미 중국에 기독교 교파가 들어왔음을 증명해주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서구인들은 이 경교비를 서구세계로 가져가고자 했다. 비석의 무게가 2톤이나 나가지 않았다면, 중국인이 그를 경계하지 않았다면, 경교비는 비림이 아닌 서구 열강의 어느 박물관에 있게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비림(碑林), 비석의 숲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수많은 비석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우세남·저수량·구양순·장욱·안진경 등 내로라하는 서예 대가의 친필 석각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이곳, 한나라 때의 비석부터 소장돼 있으니 무려 2000년 세월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문화의 보고다. 비림이 조성된 건 북송 철종 때 공부낭중(工部郞中)이자 섬서전운부사(陝西轉運副使)였던 여대충(呂大忠)의 공로다. 그는 당나라 말 이후 전란 탓에 방치돼 있던 개성석경(開成石經)과 석대효경(石臺孝經)을 경조부학(京兆府學)의 북쪽(현재의 비림이 위치한 곳)으로 옮기도록 했고, 이를 계기로 역대 비석들이 이곳에 한데 모이게 됐다. 이때가 1087년, 비림이 탄생한 연도다.

유가 경전 최고 권위의 판본
개성석경과 석대효경, 대체 얼마나 중요하기에 비림 탄생의 계기가 되었을까? 개성석경은 유가의 12경, 즉 <주역> <상서> <시경> <주례> <의례> <예기>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논어> <효경> <이아>를 새겨 놓은 비석이다. <맹자>를 보충해서 13경이 된 건 청나라 건륭 연간에 이르러서다. 830년 당나라 문종이 국자감 좨주 정담(鄭覃)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만들기 시작해 개성 2년(837)에 완성한 개성석경은 114개의 비석으로 이뤄져 있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는 65만252자에 이른다. 엄청난 자원이 투입된 이 작업의 목적은 무엇일까? 과거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던 당나라, 과거시험과 직결된 유가 경전의 수요가 많았다. 그런데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이라 경전을 베껴 쓰는 방식이다 보니 오류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경전의 권위와 정확성을 보증하기 위한 문화 프로젝트, 그 결과물이 개성석경이다. 장안성 국자감 안에 세워진 개성석경은 유가 경전의 최고 권위를 지닌 판본이 됐다. 그 당시 지식인에게 과거시험의 필독서였던 셈이다. 비림의 7개 전시실 가운데 제1전시실에서 개성석경을 만날 수 있다.

 

 

석대효경이 있는 효경정

당 현종의 친필로 새긴 석대효경
비림의 대문을 들어선 뒤 7개의 전시실이 있는 곳까지 걷다 보면 이곳이 공자의 사당인 문묘(文廟)임을 실감할 수 있다. 1103년에 문묘가 현재 위치로 옮겨오면서 문묘와 비림이 한자리에 있게 됐다. 문묘의 핵심인 대성전(大成殿)은 불타 없어졌지만, 양무를 비롯해 극문(戟門)·영성문(楹星門)·반수교(泮水橋)·태화원기방(太和元氣坊)·비정(碑亭) 등은 잘 보존돼 있다. 이 가운데 제1전시실 앞에 자리한, 처마가 높게 들린 비정이 바로 석대효경이 있는 효경정(孝經亭)이다. 석대효경의 높이는 6m나 되는데, 개성석경의 높이가 약 2m임을 감안하면 그 압도적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효경>을 새긴 이 비석은 3층으로 이뤄진 돌 밑받침 위에 세워져 있다. 석대효경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했다.

석대효경은 당 현종의 친필로 유명하다. 유가의 효제(孝悌) 사상을 치국 이념으로 삼고자 했던 현종은 <효경>의 서문과 주석까지 직접 써서 석대효경에 담았다. 이때가 천보 4년(745), 공교롭게도 양옥환(楊玉環)이 귀비로 책봉된 해이다. 전해지는 비화에 따르면, 아들 수왕(壽王)의 아내에게 마음을 뺏긴 현종에게 환관 고역사(高力士)가 건의하길 황자들에게 <효경>을 공부하게 하라고 한다. 이렇게 하면 수왕이 양옥환을 내놓으리라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부모가 원하는 것을 해드리는 게 효 아닌가. 고역사는 양옥환을 도교의 도사가 되게 하는 계책까지 내놓는다. 도사가 되면 속세의 인연은 깔끔히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보 4년에 현종은 석대효경을 세웠고, 위소훈(韋昭訓)의 딸을 수왕의 비로 책봉했으며, 양옥환을 환속시켜 자신의 귀비로 책봉했다. 수왕이 양옥환을 아내로 맞이했던 게 꼭 10년 전이다. 자신의 아내를 아버지에게 뺏긴 그가 과연 효를 다했다고 만족했을까. 현종은 정말 아들의 여자를 뺏기 위해 석대효경을 세운 것일까. 그토록 야비하고 비루하게 이용될 수 있는 ‘효’의 실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머리 부분

이제 이야기는 클라이맥스를 향한다. 제2전시실에 전시돼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 담긴 파란만장한 사연. 그 시작은 431년 에게해 연안의 에페소에서 열린 공의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언한 공의회의 결정에 반대했다. 그는 마리아를 ‘테오토코스(하느님을 낳은 어머니)’라 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리스도토코스(그리스도를 낳은 어머니)’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 마리아가 신의 어머니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은 완전한 신인 동시에 인간인 예수의 신격과 인격을 분리하는 것으로 오해받아 결국 이단으로 몰렸다. 네스토리우스는 파면되고 이집트 북부로 유배됐다. 그를 지지하던 이들은 페르시아에 독자적인 교회를 세웠고, 이후 점차 동쪽으로 교세가 확장되면서 마침내 중국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비석 제목 위에 새겨진 십자가 문양

당 태종 정관(貞觀) 9년(635), 알로펜(Alo pen)을 비롯한 네스토리우스교 선교사들이 장안에 도착한다. 태종은 재상 방현령(房玄齡)을 시켜 의장 행렬을 갖추고 그들을 영접한다. 3년 뒤에는 의녕방에 네스토리우스교 교회당인 대진사(大秦寺)가 들어서게 된다. 이렇게 네스토리우스교는 중국에 착실히 뿌리를 내려갔다. 이러한 사실은 덕종 건중(建中) 2년(781)에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이하 ‘경교비’)를 통해 알 수 있다. ‘대진’은 로마, ‘경교’는 네스토리우스교를 의미한다. 비문에는 예수가 “빛나고 큰 태양의 빛으로 흑암의 음부를 파괴했다”고 나오는데, 빛나고 크다는 의미로 쓴 글자가 바로 경교의 ‘경(景)’이다. 즉 경교는 ‘태양처럼 빛나는 종교’를 의미한다.

선교사들의 탁본으로 유럽 관심 일으켜
경교비의 앞부분은 여호와의 천지창조, 사탄에 의한 인간의 타락, 예수의 탄생, 예수에 의한 인간의 구원에 관한 내용이다. 이어서 경교가 중국에 들어와 유행하게 된 상황과 태종 이하 고종·현종·숙종·대종·덕종에 대한 칭송이 앞의 서너 배 분량으로 서술돼 있다. 이렇듯 중국에서 ‘유행’했던 경교가 자취를 감추게 된 건 도교를 숭상한 무종 때문이다. 회창(會昌) 5년(845), 무종은 불교 사원을 없애고 승려를 환속시키는 등 폐불(廢佛) 정책을 단행했다. 이때 불교뿐 아니라 현교(조로아스터교)와 경교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선종이 즉위하면서 불교는 부흥했지만 경교는 이미 불씨가 꺼진 상태였다.

경교와 더불어 경교비가 자취를 감춘 지 800년쯤 지난 어느 날,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농부들이 경교비를 발굴하게 된다. 이때가 명 희종(熹宗) 천계(天啓) 3년(1623)이다. 비석에 관한 소문은 금세 퍼져나갔다. 당나라 때 이미 중국에 기독교 교파가 들어왔음을 증명해주는 비문에 그 당시 천주교도들이 얼마나 고무됐겠는가. 예수회 선교사 니콜라스 트리고(Nicolas Trigault)와 알바로 세메도(Alvaro Semedo)를 비롯해 서양의 많은 선교사가 비문을 탁본하고 번역해 본국으로 보냈다. 라틴어·프랑스어·포르투갈어·이탈리아어·영어 등으로 번역된 경교비는 유럽 각국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다시 세상으로 나온 경교비에 또 시련이 닥친다. 경교비가 금승사(金勝寺)에 보관돼 있던 중에 청나라 시기의 전란으로 절이 불타 없어지면서 방치된 것이다. 프랑스의 동양학자 샤반(Edouard Emmanuel Chavannes)이 1907년에 촬영한 금승사 사진에는 비정조차 없이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돼 있는 경교비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즈음에는 급기야 서양인들 사이에서 비석을 유럽으로 옮겨서 보관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됐다.

금승사 경내에 방치되어 있던 대진경교유행중국비(오른쪽에서 두 번째).

덴마크인 프리츠 홀름(Frits Holm)은 실제로 경교비를 서구세계로 가져가고자 시도했다. 1907년 5월에 시안을 찾은 그는 금승사 주지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한편 인부를 고용해 경교비와 완전히 똑같은 복제본을 만든다. 홀름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섬서순무(陝西巡撫) 조홍훈(曹鴻勛)은 경교비를 비림으로 옮기도록 조치했다. 이렇게 해서 1907년 10월 2일, 경교비가 최종적으로 비림에 자리잡게 된다. 홀름은 복제본이라도 가져가야 했다. 그런데 무려 2톤이나 나가는 비석을 운반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간신히 상하이까지 운반한 뒤 그가 선택한 최종 행선지는 뉴욕. 1908년 6월 16일 뉴욕에 도착한 복제 비석은 1916년까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임대 전시된다. 그사이에 홀름은 석고로 이 복제 비석을 떠서 10여국의 박물관과 대학에 보냈고,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경교비와 관련된 강연을 했다. 시안에서 가져온 복제 비석은 1917년에 뉴욕의 돈 많은 가톨릭교도가 구입해 바티칸에 기증했다. 홀름은 이 일로 교황으로부터 상까지 받는다.

그는 경교비와 관련된 자신의 여정을 책(My Nestorian Adventure in China)으로 펴낸다. 책에 실린 요하난(Yohannan, 뉴욕 컬럼비아대학 동양어학부 교수)의 추천사에 사용된 표현을 보면 홀름의 행위에 대한 서구세계의 평가를 짐작할 수 있다. 현명한 조사(enlightened researches), 훌륭한 연구(wonderful industry), 위대한 업적(great achievement), 위대한 탐험(great expedition). 홀름은 누군가 오리지널 경교비를 영국 박물관에 가져갈 수 있다면, 로제타석(Rosetta Stone)처럼 매우 훌륭한 보살핌을 받으리라 믿었다. 비석의 무게가 2톤이나 나가지 않았다면, 중국인이 그를 경계하지 않았다면, 경교비는 비림이 아닌 서구 열강의 어느 박물관에 있게 됐을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세계 4대 명비(名碑) 가운데 아즈텍 달력 석판(Aztec Calendar Stone)만이 약탈의 위기 없이 멕시코에 보존돼 있다. 1970년에 발굴된 덕분일 것이다. 19세기나 20세기 초였다면 영락없이 서구 열강에게 빼앗겼을 터이니. 로제타석은 영국 박물관에 있고, 모압 석비(Moabite Stone)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지 않은가. 경교비 역시 서구 열강에서 눈독을 들이지 않았던가.

비림은 비석뿐 아니라 나무도 많고 모기도 많다. 여름이 한창일 때 들렀던 비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모기다. 몇 시간 둘러보는 동안 모기의 공세에 속수무책이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모기약을 잔뜩 바르고 한 방울의 피도 내주지 않았을 텐데. 억울하게 뺏기지 말자. 비림에서의 교훈에 딱 들어맞는 중국 속담이 있다. “남을 해치려는 마음은 있으면 안 되지만, 남을 경계하는 마음은 없어서는 안 된다.(害人之心不可有, 防人之心不可無.)”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