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펌) 주기철 목사 . 성지순례길 본문
[듣고 싶은 길] 주기철 목사 성지순례길
민족의 평화를 기원하다
- Editor. 월간경남
-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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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카카오스토리(으)로 기사보내기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다른 공유 찾기2016년 6월 조성된 주기철 목사 성지순례길은 항일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았던 주기철 목사의 정신이 남아 있는 길이다. 창원 진해구와 마산 합포구, 마산회원구에 펼쳐져 있는 순례길은 주 목사의 출생에서부터 평양 산정현교회로 떠나기 전까지의 삶이 담겨 있다. 다가오는 성탄절을 맞이해 주기철 목사 성지순례길 곳곳을 걸어봤다.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주현성 씨의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기복(基福)인데, ‘기독교 교리를 철저히 따르겠다’라는 의미를 담아 기철(基徹)로 개명했다. 호는 예수의 양이라는 뜻인 ‘소양’(蘇羊)이다.
주 목사는 독립운동가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에 진학해 민족의식을 배웠다. 오산학교 졸업 후 조선예수교대학교(연희전문학교의 전신) 상과에 진학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건강 문제로 학업을 중단했다. 학업 중단 후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청년운동, 계몽운동, 3·1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3·1운동에서는 지방 만세운동의 행동책으로 활동하다 구류 1개월을 살기도 했다. 주 목사는 물산장려운동과 신사참배반대운동으로 일제에 적극 저항했으며, 그 공로로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주기철 목사 기념관
기념관은 해방 70주년과 주 목사 순교 71주년을 맞아 2015년 3월 고향인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건립됐다. 기념관은 4,506㎡ 부지에 건축연면적 1,098㎡의 2층 건물로, 1층에는 면류관(제1전시실)과 영상실, 2층에는 나라사랑(제2전시실), 기획전시실 등으로 이뤄졌다.
전시실에는 주기철 목사가 1935년 12월 평양장로회신학교 사경회 때 전한 설교인 ‘일사각오’의 본문과 함께 항일운동의 일대기, 순교에 대한 자료를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주 목사가 받았던 고문에 대해 막내아들인 주광조 장로가 전한 증언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목회자 주기철
1922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목회자의 삶을 시작한 주기철 목사는 양산읍교회에서 조사(지금의 전도사)로, 부산 초량교회와 문창교회,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했다.
주 목사의 신앙은 1935년 12월 평양장로회신학교 사경회 강사로 초빙돼 전한 ‘일사각오’ 설교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일사각오를 <예수를 따라 일사각오>, <남을 위해 일사각오>, <부활 진리를 위해 일사각오>로 나눠 설명하며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은 것이요,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 “예수의 일생은 순전히 남을 위한 일생이다. 세상 사람은 남을 희생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지만 예수교는 자기를 희생해 남을 구원하는 것이다”, “부활 진리는 순교에 의해 여러분께 전해졌다. 부활의 복음을 위해 일사각오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 목사는 평양 산정현교회 부임 시절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앞장서 평양형무소에 수감됐으며, 일제의 고문으로 1944년 순교했다.
그는 아내와의 마지막 면회에서 “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이 먹고 싶소”라는 말을 남겼다. 주 목사의 육체는 잔혹한 고문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차갑게 식어 있었는데, 목을 축이고 속을 덥혀줄 따뜻한 숭늉을 간절히 원해 한 말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그가 평생 따랐던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남긴 말인 “내가 목마르다”와 닮았다.
웅천교회와 마산 문창교회
창원시 진해구에 위치한 웅천교회는 주기철 목사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고향교회다. 웅천교회는 1900년 성내리 김원수 씨 자택에서 시작됐다. 당시 웅천은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지역이었다. 주 목사는 맏형 주기원을 따라 1910년 성탄절부터 웅천교회를 다녔으며, 1920년 집사로 봉직하던 중 김익두 목사 부흥회의 영향을 받아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옛 웅천교회는 진해구 웅천중로 65번길 10에 있으며, 현 웅천교회는 웅천동로 49에 있다. 현 웅천교회 1층에는 주기철 목사의 순교신앙을 알리기 위한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마산 문창교회는 주 목사가 1931년 9월부터 1936년 7월까지 담임한 교회다. 주 목사는 초량교회에서 목회활동을 이어오다 문창교회가 내부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을 듣고 부임했다. 문창교회는 마산 지역 최초로 개척된 교회로 경남지방 어머니교회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8대 주기철 담임목사를 비롯해 대한민국 3대 부통령을 지낸 6대 함태영 담임목사, 독립군 출신 14대 김석찬 목사 등이 시무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가 문창교회 교인으로 김 대통령의 결혼식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무학산 십자바위
무학산 십자바위는 주기철 목사가 문창교회 담임목사 재직 시절. 나라와 민족, 교회를 위해 부르짖던 기도 장소다. 십자바위는 학봉(397m)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백운사 입구에서 0.67㎞를 등반해야 다다를 수 있다.
주 목사는 모두가 잠든 시간인 밤에 무학산을 올라 새벽까지 기도했다. 십자바위에 이르기 위해서는 돌길과 나무 사이의 좁은 길을 지나야 한다. 산을 오르는 동안 그는 마음을 정리했으며, 조국의 독립과 교회의 화목을 위해 기도했다.
십자바위 주변은 낙상사고의 위험이 높은 곳으로 산행 시 조심해야 한다. 특히 사진 촬영 시 시야가 제한되는 경우가 많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마산공원묘원 내 자리한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은 1889년경 경남 지역에서 활동한 호주 선교사들의 기록과 유품을 담은 선교전시관이다. 2010년 10월 건립됐으며, 호주 최초 한국 선교사인 조지프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를 비롯해 호주 선교사 126명의 유품을 보관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아무 연고가 없는 이 땅에 찾아와 모르는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이웃이 됐다. 굶주리고 아픈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배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학교를 건립해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보고 호흡하며 당시 시대상을 담은 기록을 남겼다.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성경책, 신앙서적, 한영사전, 선교 기록 등을 확인하는 시간은 세계열강이 한반도를 침략의 대상으로만 인식했던 것이 아닌 사랑의 대상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임명곤 회장(창원시기독교장로총연합회)은 “주기철 목사는 목회자이기 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3·1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을 펼친 애국자이며, 목회자로서는 신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순교자”라며 “자기를 돌보기보다 민족과 나라를 생각했던 주기철 목사를 묵상하며 순례길을 걷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주기철 목사 성지순례길 안내】
•묵상하길(4km, 도보 1시간 30분)
주기철 목사 기념관→웅천초등학교→옛 웅천교회→현 웅천교회
•헌신하길(33km, 차량 50분)
주기철 목사 기념관→현 웅천교회→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기억하길(16.4km, 차량 30분, 십자바위 왕복 1시간)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마산 문창교회→십자바위(무학산)
•사랑하길(19.5km 차량 35분)
마산 문창교회→손양원 목사 기념관&생가
ㆍ글 이주현 월간경남 기자
ㆍ사진 전강용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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