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펌) 大秦景敎流行中國碑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본문
大秦景敎流行中國碑
大秦寺僧景淨述
粤若。常然眞寂。先先而无元。窅然靈虛。後後而妙有。總玄樞而造化。妙衆聖以元尊者。其唯我三一妙身。无元眞主阿羅訶歟。判十字以定四方。鼓元風而生二氣。暗空易而天地開。日月運而晝夜作。匠成萬物。然立初人。別賜良和。令鎮化海。渾元之性。虛而不盈。素蕩之心。本無希嗜。洎乎娑殫施妄。鈿飾純精。閒平大於此是之中。隟冥同于彼非之內。是以三百六十五種。肩隨結轍。竸織法羅。或指物以託宗。或空有以淪二。或禱祀以邀福。或伐善以矯人。智慮營營。恩情伇伇。茫然無得。煎迫轉燒。積昧亡途。久迷休復。于是我三一分身。景尊彌施訶。戢隱眞威。同人出代。神天宣慶。室女誕聖于大秦。景宿告祥。波斯覩耀以來貢。圓廿四聖有說之舊法。理家國于大猷。設三一淨風無言之新教。陶良用于正信。制八境之度。鍊塵成眞。啟三常之門。開生滅死。懸景日以破暗府。魔妄于是乎悉摧。棹慈航以登明宮。含靈于是乎旣濟。能事斯畢。亭午昇眞。經留廿七部。張元化以發靈關。法浴水風。滌浮華而潔虛白。印持十字。融四炤以合無抅。擊木震仁惠之音。東禮趣生榮之路。存鬚所以有外行。削頂所以無內情。不畜臧獲。均貴賤于人。不聚貨財。示罄遺于我。齋以伏識而成。戒以靜愼為固。七時禮讚。大庇存亡。七日一薦。洗心反素。眞常之道。妙而難名。功用昭彰。强稱景教。惟道非聖不弘。聖非道不大。道聖符契。天下文明。太宗文皇帝。光華啟運。明聖臨人。大秦國有上德。曰阿羅本。占青雲而載眞經。望風律以馳艱險。貞觀九祀。至于長安。帝使宰臣房公玄齡。總仗西郊。賓迎入內。翻經書殿。問道禁闈。深知正眞。特令傳授。貞觀十有二年。秋七月。詔曰。道無常名。聖無常體。隨方設教。密濟羣生。大秦國大德阿羅本。遠將經像。來獻上京。詳其教旨。玄妙無為。觀其元宗。生成立要。詞無繁說。理有忘筌。濟物利人。宜行天下所司。即于京義寕坊。造大秦寺一所。度僧廿一人。宗周德喪。青駕西昇。巨唐道光。景風東扇。旋令有司。將帝寫眞。轉摸寺壁。天姿汎彩。英朗景門。聖迹騰祥。永輝法界。案西域圖記。及漢魏史筞。大秦國南統珊瑚之海。北極衆寶之山。西望仙境花林。東接長風弱水。其土出火綄布。返魂香。明月珠。夜光璧。俗無祲盜。人有樂康。法非景不行。主非德不立。土宇廣闊。文物昌明。高宗大帝。克恭纘祖。潤色眞宗。而于諸州。各置景寺。仍崇阿羅本為鎮國大法主。法流十道。國富元休。寺滿百城。家殷景福。聖厯年。釋子用壯。騰口於東周。先天末。下士大笑。訕謗于西鎬。有若僧首羅含。大德及烈。並金方貴緒。物外高僧。共振玄綱。俱維絕紐。玄宗至道皇帝。令寕國等五王。親臨福宇。建立壇塲。法棟暫撓而更崇。道石時傾而復正。天寶初。令大將軍高力士。送五聖寫眞。寺內安置。賜絹百匹。奉慶睿圖。龍髯雖遠。弓劍可攀。日角舒光。天顏咫尺。三載。大秦國有僧佶和瞻星向化。望日朝尊。詔僧羅含。僧普論等。一七人。與大德佶和。于興慶宮修功德。于是天題寺牓額戴龍書。寶裝璀翠。灼爍丹霞。睿扎宏空。騰凌激日。寵賚比南山峻極。沛澤與東海齊深。道無不可。所可可名。聖無不作。所作可述。肅宗文明皇帝。於靈武等五郡。重立景寺。元善資而福祚開。大慶臨而皇業建。代宗文武皇帝。恢張聖運。從事無為。每于降誕之辰。錫天香以告成功。頒御饌以光景衆。且乾以美利。故能廣生。聖以體元。故能亭毒。我建中聖神文武皇帝。披八政以黜陟幽明。闡九疇以唯新景命。化通玄理。祝無愧心。至于方大而虛。專靜而恕。廣慈救衆苦。善貸被羣生者。我修行之大猷。汲引之階漸也。若使風雨時。天下靜。人能理。物能清。存能昌。沒能樂。念生響應。情發自誠者。我景力能事之功用也。大施主金紫光祿大夫。同朔方節度副使。試殿中監。賜紫袈裟僧伊斯。和而好惠。聞道勤行。遠自王舍之城。聿來中夏。術高三代。藝博十全。始効節于丹庭。乃筞名于王帳。中書令汾陽郡王。郭公子儀。初總戎于朔方也。肅宗俾之從邁。雖見親于臥內。不自異于行閒。為公爪牙。作軍耳目。能散祿賜。不積于家。獻臨恩之頗黎。布辭憩之金罽。或仍其舊寺。或重廣法堂。崇飾廊宇。如翬斯飛。更効景門。依仁施利。每歲集四寺僧徒。虔事精供。僃諸五旬。餒者來而飰之。寒者來而衣之。病者療而起之。死者塟而安之。清節達娑。未聞斯美。白衣景士。今見其人。願刻洪碑。以揚休烈。詞曰眞主无元。湛寂常然。權輿匠化。起地立天。分身出代。救度無邊。日昇暗滅。咸證眞玄。赫赫文皇。道冠前王。乘時撥亂。乾廓坤張。明明景教。言歸我唐。翻經建寺。存歿舟航。百福偕作。萬邦之康。高宗纂祖。更築精宇。和宮敞朗。遍滿中土。眞道宣明。式封法主。人有樂康。物無灾苦。玄宗啟聖。克修眞正。御牓揚輝。天書蔚映。皇圖璀璨。率土高敬。庶績咸熙。人賴其慶。肅宗來復。天威引駕。聖日舒晶。祥風掃夜。祚歸皇室。祅氛永謝。止沸定塵。造我區夏。代宗孝義。德合天地。開貸生成。物資美利。香以報功。仁以作施。暘谷來威。月窟畢萃。建中統極。聿修明德。武肅四溟。文清萬域。燭臨人隱。鏡觀物色。六合昭蘇。百蠻取則。道惟廣兮應惟密。强名言兮演三一。主能作兮臣能述。建豐碑兮頌元吉。
大唐建中二年歲在作噩太簇月七日大耀森文日建立 時法主僧寕恕知東方之景衆也
朝議郎前行台州司士叅軍呂秀巖書
* 아래 해석은 이장식 교수님의 책 '아시아 고대 기독교사'(기독교문사) 제 7장 당대의 경교 중 제2절 대진경교유행중국비 (PP.244-255)에서 전문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경교비 해석은 어차피 이제는 사어死語가 된 옛날 한문이 많아서 중국이나 일본의 석학들이 해석한 것을 많이 참조할 수 밖에 없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몇한자는 읽는 법이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중국어의 특징에 따라 어디에서 띠어읽느냐에 따라 해석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여지는데 이장식박사님의 해석이 가장 정통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panem)
< 해석> 大秦景敎流行中國碑 대진경교유행중국비
大秦寺僧景淨述 대진사승경정술
대진사 승 경정이 쓰다
* 이 글을 쓴 경교의 유능한 학자 경정景淨은 뛰어난 한문실력으로 보아 중국 본토인이라는 설과 시리아에서 온 아담(Adam)이라는 설이 있다. 또는 시리아에서 온 경교승 아버지 Yazdbozid의 아들 Adam이라면 (선교사의 아들로) 중국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한문 교육을 철저히 받았을 수 있다는 견해도 가능해보인다.
粤若월약。常然眞寂상연진적。先先而无元선선이무원。窅然靈虛요연령허。後後而妙有후후이묘유。總玄樞而造化총현추이조화。妙衆聖以元尊者묘중성이원존자。其唯我三一妙身기유아삼일묘신。无元眞主阿羅訶歟무원진주아라가여。
* 眞 主 참된 주 / 阿羅訶는 Eloh라는 시리아어의 화음으로 (알라, 또는 알로하라고 일컫는) 여호와의 이름
아! 항상 참이어서 불변하시며, 맨 처음이어서 만물의 원인이시며, 심원하시며, 보이지 않는 영으로서 맨 나중 되시는, 기묘한 존재이시며, 근본기초를 세워 만물을 지으시며, 衆聖을 초월하는 가장 지존하신 분, 이는 다만 삼위일체의 시작이 없는 참된 주 야훼가 아닌가?
判十字以定四方판십자이정사방。鼓元風而生二氣고원풍이생이기。暗空易而天地開암공역이천지개。日月運而晝夜作일월운이주야작。匠成萬物장성만물。然立初人연립초인。別賜良和별사량화。令鎮化海령진화해。
*元風의 風은 바람같은 聖靈을 상징함
* 化海화해- 만물에 가득찬 바다같은 세계
十字를 가지고 四方을 정하시고 元靈(원령)을 작동시켜 자연의 두 원리를 만들어 내시니 어둠의 하늘이 변하여 하늘과 땅이 열리고 해와 달리 움직여서 밤과 낮을 만들었으며, 만물을 지으신 후에 처음 사람을 만들어 세우고 특별히 좋은 성품(良和)을 주셨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渾元之性혼원지성。虛而不盈허이불영。素藻之心소조지심。本無希嗜본무희기。洎乎娑殫施妄계호사탄시망。鈿飾純精전식순정。閒平大於此是之中한평대어차시지중。隟冥同于彼非之內 隟명동우피비지내。
* 素는 白 藻는 無色
* 冥同 명은 악을 멀리하는 것, 同은 善에 일치하는 것
사람의 본성은 처음에는 순전하여 욕심으로 차지 않았고 희고 물들지 않아(素藻 소조) 본래 지나치게 좋아하거나 지나치게 탐내는 일이 없었으나, 급기야 사탄이 악한 생각을 부려서 사람의 순박한 마음에 꾸밈이 생겨서 옳은 일에서도 공평 정대성을 방해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릇된 일에서 악을 멀리하고 선으로 옮겨 가는 것을 막는다.
是以三百六十五種시이삼백륙십오종。肩隨結轍견수결철。竸織法羅 竸직법라。或指物以託宗혹지물이탁종。或空有以淪二혹공유이륜이。或禱祀以邀福혹도사이요복。或伐善以矯人혹벌선이교인。智慮營營지려영영。恩情伇伇은정역역。茫然無得망연무득。煎迫轉燒전박전소。積昧亡途적매망도。久迷休復구미휴복。
그리하여 365종의 다른 종자들이 있달아 나타나서 서로 다른 깊은 자국을 남기고 서로 다투어 법망을 만들어 서로를 그것으로 걸리게 하며, 더러는 물건을 가리켜서 그것을 숭배 게하고, 더러는 허무한 것과 참된 것 둘을 혼돈케 하며, 더러는 기도와 제사를 가지고 복을 구하고, 더러는 선을 과시하여 사람 앞에서 교만하며, 사람의 지식과 염려가 쉴 사이 없이 일하며, 생각과 느낌이 또한 끝이 없지만 막연할 뿐, 얻는 것이 없고 다만 초조하다가 끝내는 불타버리고 마음의 어둠이 쌓이고 갈 길이 어두워져서 영영 미로에 빠지고 말았다.
于是我三一分身우시아삼일분신。景尊彌施訶경존미시가。戢隱眞威집은진위。同人出代동인출대。神天宣慶신천선경。室女誕聖于大秦실녀탄성우대진。景宿告祥경숙고상。波斯覩耀以來貢파사도요이래공。
* 경교의 경전에서는 그리스도를 세존世尊이라고 호칭함
이 때 삼위일체 하느님의 한 분이신(三一分身), 경교景敎의 교주敎主(세존世尊)이신 메시아(彌施訶미시가)가 참된 위엄을 감추시고 사람과 같이 되셔서(同人) 세상에 오셨으니(出代) 천사가 기쁜 일을 외친대로 로마제국(大秦)에서 처녀가 성인을 낳으신 것인데, 밝은 별빛이 머물면서 자세하게 알려준 대로(景宿告祥) 파사인이 그 빛을 보고 예물을 가지고 와서 드린지라.
圓廿四聖有說之舊法원廿사성유설지구법。理家國于大猷리가국우대유。設三一淨風無言之新教설삼일정풍무언지신교。陶良用于正信도량용우정신。制八境之度제팔경지도。鍊塵成眞련진성진。啟三常之門계삼상지문。開生滅死개생멸사。懸景日以破暗府현경일이파암부。
*淨風은 성령의 희랍어 원어 프뉴마의 뜻을 따른 것, 경교의 미사소경(迷師所經)에서는 凉風(량풍)이라고도 표현했음
* 八境之度팔경지도를 八境之道로 읽고 이 단어를 죄백佐伯은 경교의 팔계급八階級 승직제도僧職制度로 해석하고 다른 서양학자들은 산상팔복의 계율이라고도 해석한다.
* 삼상지문三常之門은 불교의 삼문三門 또는 삼업三業 곧 신체 언어 및 사상의 청정허백淸淨虛白, Legge는 삼문을 믿음 소망 사랑으로 해석함, HUR는 삼덕三德으로만 해석함
24성인이 가르친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시고, 큰 道로써 가정과 나라를 다스리게 하시고 삼위일체의 성령(三一淨風)으로 무언(無言)의 새 종교를 세우셨고, 바른 신앙으로 양심을 도야케 하시고 八境之道를 세우셔서 티끌과 같은 인성을 연마하여 참된 인성이 되게 하시며 三常之門을 열어 생명을 펴주고 죽음을 멸하며, 큰 빛을 비춰서 음부(암부-暗府)를 부숴버렸다.
魔妄于是乎悉摧마망우시호실최。棹慈航以登明宮도자항이등명궁。含靈于是乎旣濟함령우시호기제。能事斯畢능사사필。亭午昇眞정오승진。經留廿七部경류廿칠부。張元化以發靈關장원화이발령관。法浴水風법욕수풍。滌浮華而潔虛白척부화이결허백。
* 원화元化는 덕화德化, 곧 구원
사탄(魔妄)이 여기서 모조리 타박을 당하고 자비로운 항해를 거쳐서 밝은 하늘의 궁전에 오르셨으니, 이로써 영靈을 가진 모든 인류가 완전히 구제(기제旣濟)되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정오에 승천하여 영원한 진리로 돌아가셨고, 경전 27부가 세상에 남아 있으며, 구원(元化)을 베풀어 구령求靈의 문을 열고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法浴水風), 헛된 영의 화를 씻어 버리고, 깨끗하게 되게 하셨다.
印持十字인지십자。融四炤以合無抅융사소이합무구。擊木震仁惠之音격목진인혜지음。東禮趣生榮之路동례취생영지로。存鬚所以有外行존수소이유외행。削頂所以無內情삭정소이무내정。不畜臧獲부축장획。均貴賤于人균귀천우인。不聚貨財부취화재。示罄遺于我시경유우아。齋以伏識而成재이복식이성。戒以靜愼為固계이정신위고。七時禮讚칠시례찬。大庇存亡대비존망。七日一薦칠일일천。洗心反素세심반소。
*무구無抅는 손잡을 데가 없는 것, 무의無衣, 무연無緣
표시물(印)인 십자가를 가지고 빛이 비취는 서방(사조)을 다 모아서 잃어버린 자를 구원(合)하며, 목종을 쳐서 은혜의 소식을 떨치며(擊木震仁惠之音)동쪽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고(동례) 생명의 번영의 길을 달리며, 수염을 기르는 이유는 이웃을 위한 나타나는 행함을 갖기 위함이며, 남녀 종을 두지 않는 까닭은 사람의 귀천을 없애기 위함이며, 재물을 획득하지 아니함은 가진 것을 모조리 남에게 주는 것을 나에게서 나타내기 위함이며, 지식을 굴복시켜 단식을 행하며, 신중하게 행하여 계율을 지키고, 하루 일곱 번 예배를 드리며(七時禮讚),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위하여 크게 위로하기 위하여 기도를 드리며, 칠일에 한번 성찬식을 가지며 마음을 씻고 본심으로 되돌아 온다.
眞常之道진상지도。妙而難名묘이난명。功用昭彰공용소창。强稱景教강칭경교。惟道非聖不弘유도비성부홍。聖非道不大성비도부대。道聖符契도성부계。天下文明천하문명。
불변의 진리의 도는 이름을 짓기 어려우나 그 교리의 공이 빛났으므로 景敎라고 부른다. 그러나 학리가 거룩하지 않으면 널리 퍼지지 않을 것이고 그 성인이 참도가 아니면 크지 못할 것이니, 도와 성자가 하나 되어 천하를 밝히나니라.
太宗文皇帝태종문황제。光華啟運광화계운。明聖臨人명성림인。大秦國有上德대진국유상덕。曰阿羅本왈아라본。占青雲而載眞經점청운이재진경。望風律以馳艱險망풍률이치간험。貞觀九祀정관구사。至于長安지우장안。帝使宰臣房公玄齡제사재신방공현령。總仗西郊총장서교。賓迎入內빈영입내。翻經書殿번경서전。問道禁闈문도금위。深知正眞심지정진。特令傳授특령전수。
태종황제는 나라를 빛내고 국운을 펴 명덕한 성인으로서 백성을 다스리게 되었을 때 로마제국의 대덕(대주교) 아라본이 푸른 구름길을 따라서 진리의 경전을 싣고 바람이 부는 대로 험한 길을 찾아와서 정관9년 드디어 장안에 이르렀을 때 황제가 제신 방현령을 의장대와 함께 보내서 그 내빈을 서문에서 환영하여 궁내에 들게 하였고, 경전을 성전에서 번역케 하였고, 황제가 내전에서 그 교리를 배워서 그 참된 진리를 깊이 이해하여 포교를 특령으로 허락하였다.
貞觀十有二年정관십유이년。秋七月추칠월。詔曰조왈。道無常名도무상명。聖無常體성무상체。隨方設教수방설교。密濟羣生밀제군생。大秦國大德阿羅本대진국대덕아라本。遠將經像원장경상。來獻上京래헌상경。詳其教旨상기교지。玄妙無為현묘무위。觀其元宗관기원종。生成立要생성립요。詞無繁說사무번설。理有忘筌리유망전。濟物利人제물리인。宜行天下의행천하。
정관 12년 가을 7월에 황제의 칙서에서 말하기를 道에는 고정된 常名이 없으며 聖에는 고정된 본체가 없다. 지역에 따라 종교를 만들어서 스스로 중생을 구원한다. 로마제국의 대덕 아라본이 멀리서부터 경전과 성상(經像)을 가지고 와서 수도에 바쳤는데 그 교리를 연구한 즉 극히 심오하며 정교한지라, 경교의 근본진리를 자세히 보니 완전하고 간결하며, 번거로운 說을 말하는 것이 없으며, 이치를 얻기가 쉬워 그 방편을 애써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이 도가 만물을 건지며 사람을 이롭게 하므로 온 천하에 퍼지게 하라.
所司소사。即于京義寕坊즉우경의寕방。造大秦寺一所조대진사일소。度僧廿一人도승廿일인。宗周德喪종주덕상。青駕西昇청가서승。巨唐道光거당도광。景風東扇경풍동선。旋令有司선령유사。將帝寫眞장제사진。轉摸寺壁전모사벽。天姿汎彩천자범채。英朗景門영랑경문。聖迹騰祥성적등상。永輝法界영휘법계。
관직자가 수도에 있는 의녕방이란 곳에다가 경교성당(大秦寺) 하나를 세웠는데 21인의 성직자가 취임하였고, 주공 공자의 도덕은 쇠퇴하였으며, 노자의 가마는 서쪽하늘에 올라가 버렸는데 대당의 세도가 빛나는 이 때 경교의 바람이 동쪽으로부터 와서 나라에 시원한 바람을 불어 넣으매, 관직자가 황제의 모습의 빛이 경교를 빛내었고 황제의 남긴 흔적이 길운이 되어서 영원히 경교의 법계에 빛났다.
案西域圖記안서역도기。及漢魏史筞급한위사筞。大秦國南統珊瑚之海대진국남통산호지해。北極衆寶之山북극중보지산。西望仙境花林서망선경화림。東接長風弱水동접장풍약수。其土出火綄布기토출화환포。返魂香반혼향。明月珠명월주。夜光璧야광벽。俗無祲盜속무침도。人有樂康인유악강。法非景不行법비경부행。主非德不立주비덕부립。土宇廣闊토우광활。文物昌明문물창명。
서양에 관한 서책과 한과 위의 역사책을 살펴보면 로마제국은 남쪽의 산호가 많이 나는 바다를 다스리며, 북쪽으로는 보물이 많이 나는 산까지 가지고 있고, 서쪽으로는 선경인 화림을 바라보며, 동쪽으로는 長風이 불어오고 잔잔한 물이 밀려오는 선경에 접하고 있고, 그 땅에서는 火綜布(불로서 세탁한다는 베)영혼을 회복하는 향과 진주와 다이아몬드를 생산하며, 도덕질의 풍속이 없고 사람들이 건강을 즐기며 경교가 아닌 종교는 믿지 않으며 군주는 덕이 되지 않는 것을 일삼지 않으며 국가의 영토는 넓고 문물은 번영하고 밝다.
高宗大帝고종대제。克恭纘祖극공찬조。潤色眞宗윤색진종。而于諸州이우제주。各置景寺각치경사。仍崇阿羅本為鎮國大法主잉숭아라본위진국대법주。法流十道법류십도。國富元休국부원휴。寺滿百城사만백성。家殷景福가은경복。
고종대제는 훌륭하게 선조를 계승하여 경교를 빛나게 하여 모든 주에 경교사원을 세웠고 아라본을 높혀서 鎭國大法主로 삼았고 경교의 교리가 당의 十道에 전파되어서 국가가 부유하고 태평하였으며 대진사가 모든 성읍에 찼고 경교의 축복으로 경교의 가정들이 번영하였다.
聖厯年성무년。釋子用壯석자용장。騰口於東周등구어동주。先天末선천말。下士大笑하사대소。訕謗于西鎬산방우서호。有若僧首羅含유약승수라함。大德及烈대덕급렬。並金方貴緒병금방귀서。物外高僧물외고승。共振玄綱공진현강。俱維絕紐구유절뉴。
측천황후의 치세(성력)에 불교도(석자)가 세력을 행사하여 동주에서 역설하여 (경교를 배격하고) 말년(서기 712년)에 하류인사들이 서호에서 경교를 비웃고 조소(訕謗)하였을 때 승수僧首 라함羅含(아브라함), 大德(대덕-경교의 주교), 及烈가브리엘과 서방(西方=金方)의 신사(紳士=貴緒로서 세속사에 간여하지 않는 물외 고승이 협력하여 경교의 교조(=玄綱)를 진흥시키고 다 같이 협력하여 끊어진 줄(絕紐)을 다시 잇듯이 교세를 부흥시켰다.
玄宗至道皇帝현종지도황제。令寕國等五王 령寕국등오왕。親臨福宇친림복우。建立壇塲건립단장。法棟暫撓而更崇법동잠요이경숭。道石時傾而復正도석시경이복정。
현종은 지도라는 호를 가진 분인데 영국과 그 밖의 서인의 친 형들에게 명하여 복된 집인 경교사원에 가서 제단을 세우게 하니 경교의 교리가 잠시 굽혔다가 다시 숭상을 받고 경교의 기초가 한때 기울어졌다가 다시 바르게 되었다.
天寶初천보초。令大將軍高力士령대장군고력사。送五聖寫眞송오성사진。寺內安置사내안치。賜絹百匹사견백필。奉慶睿圖봉경예도。龍髯雖遠룡염수원。弓劍可攀궁검가반。日角舒光일각서광。天顏咫尺천안지척。
현종은 천보 초년에 대장 고력사를 시켜 다섯 황제의 초상화를 보내서 경교사원 안에 안치케 하고 비단 백필을 하사하였고 비록 황제는 멀리 계시지만 초상화(=睿圖)에 걸린 그의 얼굴과 수염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고 그 초상화에 걸린 황제의 弓劍이 사람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고 일광(=일각)이 눈부시게 비춰서 황제의 얼굴이 지척 사이에도 보이게 되었다.
三載삼재。大秦國有僧佶和瞻星向化대진국유승길화첨성향화。望日朝尊망일조존。詔僧羅含조승라함。僧普論等승보론등。一七人일칠인。與大德佶和여대덕길화。于興慶宮修功德우흥경궁수공덕。于是天題寺牓額戴龍書우시천제사방액대룡서。寶裝璀翠보장최취。灼爍丹霞작삭단하。睿扎宏空예찰굉공。騰凌激日등릉격일。寵賚比南山峻極총뢰비남산준극。沛澤與東海齊深패택여동해제심。道無不可도무부가。所可可名소가가명。聖無不作성무부작。所作可述소작가술。
천보 삼년에 로마제국의 경교승 길화가 별을 보고 따라와서 기독교의 교화사업을 결심하고(=向化향화) 해가 뜨는 동방(=望日)으로 와서 황제를 알현하였다. 황제는 우두머리 승려 라함과 승 보론 등17인을 대덕 길화와 더불어 여경궁에서 경교 공덕을 계발하는 일을 명하였다. 그리고 황제가 경교사명을 친히 정하시고 그 사명을 친필로 써서 사문에 걸어서 전면에 나타났고, 그 사원은 보석으로 단장되어 옥과 같이 광택이 났으며 햇빛과 같이 밝은 빛이 났으며, 붉은 안개같이 빛났고 황제의 용안(=睿扎)이 높은 하늘에서 빛나 밝은 해를 능가하였다.(=騰凌) 황제의 하사품(=寵賚)이 남산의 높은 봉우리와 같았고 넓은 은택은 동해처럼 깊었다. 정도는 할 수 없는 일이 없고, 또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나 밝혀줄 수 있다. 황제는 불가능이란 것이 없고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은 다 옳은 일이다.
肅宗文明皇帝숙종문명황제。於靈武等五郡어령무등오군。重立景寺중립경사。元善資而福祚開원선자이복조개。大慶臨而皇業建대경림이황업건。
숙종황제는 영무 외 사군四郡에 경교사원을 짓고 큰 善이 바탕이 되어 축복받는 치세가 열리고 큰 경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황제의 대업이 확립되었다.
代宗文武皇帝대종문무황제。恢張聖運회장성운。從事無為종사무위。每于降誕之辰매우강탄지진。錫天香以告成功석천향이고성공。頒御饌以光景衆반어찬이광경중。且乾以美利차건이미리。故能廣生고능광생。聖以體元성이체원。故能亭毒고능정독。
대종황제는 왕위의 ᅟ권세를 크게 넓혔으나 매사를 평화롭게 다스렸고, 강탄일마다 향을 하사하여 공업을 이룩하였고 酒食을 차려서 나눠주어 경교도들을 빛내어 주었고, 하늘(乾)은 미리美利로써 축복하여 사람의 생활이 널리 펴이게 하고 황제는 근본 진리(體元)를 받아서 잘 되어 나갈 수 있다.(能亭毒-亭과毒은 다 育을 의미한다.)
我建中聖神文武皇帝아건중성신문무황제。披八政以黜陟幽明피팔정이출척유명。闡九疇以唯新景命천구주이유신경명。化通玄理화통현리。祝無愧心축무괴심。至于方大而虛지우방대이허。專靜而恕전정이서。廣慈救衆苦광자구중고。善貸被羣生者선대피군생자。我修行之大猷아수행지대유。汲引之階漸也급인지계점야。若使風雨時약사풍우시。天下靜천하정。人能理인능리。物能清물능청。存能昌존능창。沒能樂몰능악。念生響應념생향응。情發自誠者정발자성자。我景力能事之功用也아경력능사지공용야。
건중建中 곧 현재의 우리의 신성한 문무황제는 여덟가지 정사를 피력하시고 어두운 것들(幽明)을 물리쳤으며, 아홉가지 종류를 천명하여 그것으로 경교의 우명을 새롭혔으며, 심오한 진리를 이해하여 신을 예배하여 부끄러워 할 것이 없었다. 고귀하면서도 겸손하여, 전심으로 안정을 구하면서 과대하여 남을 용서하며, 광대한 자비로써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하여 주며 선한 일을 베풀어서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우리 경교도가 수행해야 할 대도(大猷)로서 이것을 점차 향상시키는 바이다. 만약바람과 비가 시절을 어기지 않으면 천하가 조용하게 되며 사람이 사리를 잘 구별하며 만물이 깨끗하여지며, 살아있는 자들이 잘 번창하며 죽은 자들이 극락을 누리며 가슴에 품는 생각(念生)이 남의 마음에 통하여 반응을 나타내며, 情이 발생하고 스스로 성실하게 된다면 이것은 우리 경교의 감화력이 능히 해내는 효용이다.
大施主金紫光祿大夫대시주금자광록대부。同朔方節度副使동삭방절도부사。試殿中監시전중감。賜紫袈裟僧伊斯사자가사승이사。和而好惠화이호혜。聞道勤行문도근행。遠自王舍之城원자왕사지성。聿來中夏율래중하。術高三代술고삼대。藝博十全예박십전。始効節于丹庭시효절우단정。乃筞名于王帳내筞명우왕장。中書令汾陽郡王중서령분양군왕。郭公子儀곽공자의。初總戎于朔方也초총융우삭방야。肅宗俾之從邁숙종비지종매。雖見親于臥內수견친우와내。不自異于行閒부자이우행한。為公爪牙위공조아。作軍耳目작군이목。能散祿賜능산록사。不積于家부적우가。獻臨恩之頗黎헌림은지파려。布辭憩之金罽포사게지금계。或仍其舊寺혹잉기구사。或重廣法堂혹중광법당。崇飾廊宇숭식랑우。如翬斯飛여휘사비。更効景門경효경문。依仁施利의인시리。每歲集四寺僧徒매세집사사승도。虔事精供건사정공。僃諸五旬 僃제오순。餒者來而飰之뇌자래이반지。寒者來而衣之한자래이의지。病者療而起之병자료이기지。死者塟而安之사자장이안지。清節達娑청절달사。未聞斯美미문사미。白衣景士백의경사。今見其人금견기인。願刻洪碑원각홍비。以揚休烈이양휴렬。
대 시주이며 금자광록대부이며 북방의 절도부사이며 시전중감이며 자색 승복을 하사받은 경교승 이사는 온화하며 자애심이 많았고 도를 듣고는 그것을 열심히 실행하였으며 멀리 왕사지성으로부터 와서 드디어 중국에 왔다. 그는 3대에 걸쳐 학술을 높히 과시하였고 예능의 지식도 넓어서 손색이 없었고 처음에는 단정, 곧 당 조정에서 충성으로 봉사하여 왕실의 기장에 이름이 기록되었고, 종서성장관이면 양군왕으로 봉함을 받은 곽자희가 처음으로 북방의 군사행동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을 때 숙종이 이사를 동행하도록 명하였다. 그는비록 곽공의 숙실을 드나들만큼 친근하였지만 스스로 전투장에서는 한 병사와 다르지 않게 행동하였다. 그는 곽공의 爪牙(조아 손톱과 어금니), 이목耳目과 같이 되어 잘 방어해주었고 모든 관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흩어버렸고 하사품을 자기 집에 쌓아주지 않았고 은승으로 받은 유리를 사원에 헌납하였고 사양했음에도 하사하여 주신 금모단도 사원에 바쳤고 혹은 고사원을 수축하고 혹은 법당을 넓히기도 하였고 곽우를 아름답게 장식하였고 기와와 처마를 아름다운 색깔로 칠해서 마치 오색의 꿩이 나르듯 하였다. 그가 경교에 귀의 한 후로 자기의 얻은 재물을 구제하는 일에 바쳤고 해마다 네 사원의 경교승들과 신도들을 모으고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며 정성들여서 헌물하기를 50일 동안 하였고 굶주린 사람이 오면 먹을 것을 주었고 헐벗은 사람이 오면 입을 것을 주었고 병자가 오면 일으켜주었고 죽은 자가 생기면 장사를 치러주었다. 청절한 달사라 할지라고 아직도 이러한 미행을 한 사람이 있음을 들어보지 못하였더., 그러나 우리는 지금 경교의 임의를 입은 선비에게서 그러한 사람을 볼 수 있다. 큰 비석을 세워서 거기에다가 선한 일들을 새겨서 칭송하고자 한다.
詞曰眞主无元사왈진주무원。湛寂常然담적상연。權輿匠化권여장화。起地立天기지립천。分身出代분신출대。救度無邊구도무변。日昇暗滅일승암멸。咸證眞玄함증진현。
참된 주는 만물의 근원이시며 정적속에 계시면서 불변하시며 천지를 조성하시고 화육하시며 땅을 일으키시고 하늘을 세우셨도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분이 강세하셔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진리가 무변하여 해가 떠울라 어둠이 없어짐같으며 참으로 오묘한 진리를 다 증거하셨다.
赫赫文皇혁혁문황。道冠前王도관전왕。乘時撥亂승시발란。乾廓坤張건곽곤장。明明景教명명경교。言歸我唐언귀아당。翻經建寺번경건사。存歿舟航존몰주항。百福偕作백복해작。萬邦之康만방지강。
혁혁한 업적을 쌓으신 태종황제는 도를 숭상한 것이 전대의 왕들을 능가하였으며 시운을 잘타고 난세를 바로 다스려서 하늘이 커지고 땅이 넓어졌고 밝고 밝은 경교, 경교의 교리가 우리 당(나라)에 들어와서 경전을 번역하고 사원을 세우며 산자와 죽은 자가 구원을 받고 온갖 축복이 다내려스 만방이 평강하여지다.
高宗纂祖고종찬조。更築精宇경축정우。和宮敞朗화궁창랑。遍滿中土편만중토。眞道宣明진도선명。式封法主식봉법주。人有樂康인유악강。物無灾苦물무재고。
고종은 부황을 이어서 신전들을 재건하였고 화평한 궁전의 영광이 중토에 편많여 진도가 선명하게 나타났고 그는 법주를 뽑아서 임명하였고 사람들은 평강을 즐겼고 만물에게는 재난의 고통이 없었다.
玄宗啟聖현종계성。克修眞正극수진정。御牓揚輝어방양휘。天書蔚映천서울영。皇圖璀璨황도최찬。率土高敬솔토고경。庶績咸熙서적함희。人賴其慶인뢰기경。
현종은 신성한 것을 계발하여 진정한 종교 경교를 닦아서 친필로 쓴 사패가 빛을 발하였고 황제의 글이 밝게 빛났고 황제의 초상화도 주옥같이 빛났고 비천한자가 높임을 받고 서민들이 하는 일들이 다 번영하였고 사람마다 기쁨을 누렸다.
肅宗來復숙종래복。天威引駕천위인가。聖日舒晶성일서정。祥風掃夜상풍소야。祚歸皇室조귀황실。祅氛永謝요분영사。止沸定塵지비정진。造我區夏조아구하。
숙종이 다시 당조의 왕으로 복귀하니 그의 천위가 왕가를 인도하여 그의 광채가 빛을 발하여 상풍이 불어 어둠을 쫓고 왕족들이 궁실로 돌아오고 재액이 영원히 물러갔고 소동을 멈추며 욕정을 가라앉혔으며 우리 나라를 크게 흥하게 하였다.
代宗孝義대종효의。德合天地덕합천지。開貸生成개대생성。物資美利물자미리。香以報功향이보공。仁以作施인이작시。暘谷來威양곡래위。月窟畢萃월굴필췌。
대종은 부모에게 효, 남에게는 의를 그의 덕은 천지와 화합하였고ㅛ 선을 관대하게 베풀어서 백성을 번영케하였고 물자를 잘 이용하였고 향은 신전에 바쳐서 은헤를 보답하고 인애를 가지고 자선을 행하고 해가 뜨는 동방과 같이 국운이 성하게 되었고 달이 머무는 집처럼 나라가 미관을 이루었다.
建中統極건중통극。聿修明德율수명덕。武肅四溟무숙사명。文清萬域문청만역。燭臨人隱촉림인은。鏡觀物色경관물색。六合昭蘇륙합소소。百蠻取則백만취칙。
덕종이 등극하여 통치하면서 스스로 명덕을 닦았으며 무술로서 사해를 진압하였고 그의 문치는 만성을 바로 잡았고 불을 밝게 켜서 사람의 어둠을 비췄고 거울을 비춰서 물색을 보여 주었으며 전치동서남북(육합)이 밝아지고 소생하고 모든 뒤진 나라들이 그의 정치를 본떴다.
道惟廣兮應惟密도유광혜응유밀。强名言兮演三一강명언혜연삼일。主能作兮臣能述주능작혜신능술。建豐碑兮頌元吉건풍비혜송원길。
도는 광대무변하고 또한 극히 자세하니 이것을 굳이 이름을 지어 말한다면 삼일이라고 칭할 수 있다. 주님은 능히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어서 신이 능히 말하여 큰 비를 세웠도다. 주님의 크신 축복을 송축하나이다.
大唐建中二年歲在作噩太簇月七日大耀森文日建立 대당건중이년세재작악태족월칠일대요삼문일건립 時法主僧寕恕知東方之景衆也 시법주승寕서지동방지경중야
大唐의 建中 二年 太簇月 七日 大耀森文日에 세움. 그 당시 法主가 되는 승僧 寕恕가 동방의 경교도들을 알고 있었다.
朝議郎前行 台州司士叅軍 呂秀巖 書
조의랑전행태주사사참군려수암서
국가 서기관(朝議郎前行-당나라의 6급 관료)이자 태주지역 토목공사부의 지휘관(台州司士叅軍)인 여수암이 (비문의 글씨를) 쓰다.
경교, 8세기경 통일신라에 전래됐었다
1625년 중국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서 커다란 비석 하나가 발견되었다. 예수회 소속 프랑스 선교사가 회교도의 집에서 발견했다는 이 비석은 높이(碑身)가 1.97m이고 머리까지 합치면 2.77m에 달하고, 폭 0.9m, 두께 0.3m, 무게는 거의 2t에 육박하는 커다란 비석이었다. 이 비석이 네스토리우스교, 곧 경교의 중국 전래를 입증하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였다. 이 비석은 635년 중국에 경교가 전래된 때부터 비문이 새겨진 781년까지 중국에서 기독교의 전파에 대한 유일한 자료인데, 중국에 전파된 경교는 845년 회창법란(會昌法亂)으로 외래 종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기까지 약 200년간 활발히 퍼져나갔다.
본래 경교란 네스토리우스(Nestorius·?∼451)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안디옥 근처 유프레피우스 수도원의 수도사였다. 안디옥학파의 데오도(Theodore of Mopsuestia) 밑에서 사숙한 그는 428년 동로마 제국의 총주교 데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3년 후인 431년 에베소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문제의 발단은 마리아를 신모(神母·theotokos)라고 부르는 것을 반대한 일에서 비롯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의 본성만 가졌다는 소위 일성론자(一性論者)들과 대항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신인양성(神人兩性), 곧 두 본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마치 그리스도가 두 인격을 가지고 있는 듯한 교의를 주장했다 하여 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Cyli·376∼444)의 공격을 받고 이단으로 규정된 것이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감독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를 따르던 무리는 별도의 교회를 형성하였고 박해를 피해 동방으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숱한 박해를 견디며 페르시아의 에데사(Edessa·현재 터키 동남부의 우르파)와 인도,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까지 전래되었는데 이때가 635년이었다. 중국에 전래된 네스토리우스교는 파사교(波斯敎), 메시아교(彌施訶敎) 등으로 불리다가 현종대(代)에 ‘태양처럼 빛나는 종교’라는 의미의 경교(景敎)로 불리게 된 것이다.
638년 7월에는 당태종의 칙령에 따라 당의 수도인 장안(長安)에 경교의 예배당인 대진사(大秦寺), 혹은 파사사(波斯寺)가 건립되기도 했다. 781년에는 경교의 중국 포교를 기념하여 당의 수도인 장안의 대진사 경내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세워졌다. 회교의 탄압으로 긴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이 비가 명나라 말기인 1625년 발견된 것이다. 이로써 놀라운 전파력으로 동방으로 전개된 기독교가 중국에까지 유입되었음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중국에 전래된 경교는 845년 탄압을 받기까지 200년간은 유지되었으나 황소(黃巢)의난(878) 등 일련의 소요에 휘말려 중원에서 거의 멸절되고, 잔존 세력이 몽골과 만주 등 변방지역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중국에 전파된 경교가 우리나라에까지 전파되었을까? 이 점을 언급하는 문헌 기록은 없으나 경교의 신라시대(羅代) 전래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제기되어 왔다.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의 여성 고고학자 고든(E A Gorden)이었다.
당나라에 경교가 활발하게 전파될 당시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초기였는데 통일신라는 친당(親唐)정책을 쓰면서 당의 문물제도를 수입하고 있었고, 신라인들이 당에 유학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해상 무역이 일본이나 중국의 범위를 넘어 서역까지 확대되었던 점, 그리고 한국불교 문화 속에 나타난 경교의 유입 영향을 근거로 당에서 유행하던 경교가 신라에까지 전래되었다고 믿었다. 이런 확신에서 고든 여사는 중국서 발견된 비와 동일한 모조비를 1906년 5월에 금강산 장안사 근처에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경교의 나대 전래의 가능성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고고학적 흔적이 1956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되었다. 그것이 석제(石製)십자가(Stone cross, 24.5×24×9㎝)와 2점의 십자문장식(十字文裝飾·Cross-based design, 5.8×5.6㎝, 2.4×3.2㎝), 그리고 마리아소상(塑像·Statue of virgin Mary, 7.2×3.8×2.8㎝)으로 추정되는 고고학적 자료였다. 이런 기독교적 흔적들이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던 경주에서 발견된 것은 신비롭기만 하다. 7∼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이 4점의 유물은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석제십자가는 좌우상하의 길이가 거의 대칭적이어서 그리스형 십자가로 불리는데 중국에서 발견된 형태와 동일하다.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은 부착용 장식품으로 추정되고, 성모 소상은 양각으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구도로 보아 마리아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양선은 석제 십자가의 발견을 통해서도 경교의 나대 전래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재일 교회사학자였던 오윤태는 경교의 나대 전래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확신하였고, 자신의 ‘한국기독교사, 경교사편’(혜선문화사, 1974)을 통해 이 점을 논증하였다.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면 적어도 8세기에 경교는 한국에 소개된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는 적어도 1200년 전 한반도에 자리를 펴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음이 분명하다.
이상규 (고신대· 역사신학)
한국에 온 첫 번째 경교인(景敎人)은 누구인가?
중국 당나라에 온 앗시리아교회의 사제는 알로펜(Alopen) 즉 아브라함 선교자입니다. 635년 당태종을 만나 포교의 허락을 받고 장안에 638년 대진사(大秦寺)를 건립하면서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경교가 100여 년 동안 크게 발전하면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수도 장안에 781년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석에 휘호를 쓴 이가 경교신학교 교장 려수암(呂秀岩) 대경존(大景尊, 혹은 대승가)입니다. 대경존은 원래 노자교도였지만 경교의 신실한 신자가 되면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경정(景淨) 아담과 함께 경교발전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경교가 신라의 오게 된 경위는 려수암의 후손인 한림학사 려어매(呂禦梅)가 당나라에서 일어난 황소(黃巢)의 난을 피하여 877년 신라 헌강왕(憲康王) 3년에 국적을 옮긴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려어매 한림학사가 신라에 귀화한 때가 바로 한국에 경교가 들어온 연대라고 추측할 수 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려어매를 종시조로 삼는 성산 려씨와 함양 려씨 가문이 신라와 백제 땅을 중심으로 하여 경북 성주성산과 경남 함양에 세거하면서 경교의 계대를 잇게된 애기도 있습니다. 그 후손들은 다양한 종교와 사상으로 한민족사회에 크게 공헌한 인물들을 수없이 배출한 족보를 지니고 있습니다.
해방 후 민족진영의 건국대표단중의 한 사람인 몽양 려운형 선생은 바로 려씨의 후손입니다. 그는 31 독립운 동에 참여했으며 상해임시정부수립에 참여했으며 해방 후 한국의 정부수립을 위한 민족진영의 대표로 활동하였습니다. 민족통일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하였으나 건국수립 유공자로 대한민국훈장을 받은 정치사상가입니다.
려씨 문중에서 현재 장손으로서 목사로 활동하고 있는 분이 려용덕(呂容悳) 법학과 문학박사입니다. 경교사를 쓴 오윤태목사에게 경교문헌을 제공하였고(현재 그 문헌은 동경대학교에 기증된 상태임), 한국교회신문을 발행하면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 대한 해설을 2000년2월부터 5월까지 11회 걸쳐 소개했고, 1970년경부터 극동방송국을 통하여 경교의 역사를 강의한바가 있습니다.
한국에 온 려씨 족보에 대한 이야기는 2012년 초 3회에 걸쳐 한국교회신문에 소개된바가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바라는 경교에 대한 연구는 범아시아 교회라는 테두리 속에서 다각도로 연구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경교역사연구원이 주최하는 ‘제3회국제경교연구한국학술대회’에서 경교연구의 성과 중 려용덕박사의 중국역사에 대한 논문이 큰 의미를 주리라 사료됩니다.
849호 특집 중국경교 7면 게재
제3회 국제경교연구한국학술대회 좌담회
사진
이경운 박사 정학봉 박사 박영규 박사 이인식 박사 려용덕 박사 여선암 편집국장
주 제 : 아시아교회의 정체성과 경교비연구
일 시 : 2012년 5월 9일(수) 오전 10시
장 소 : 한국교회신문사 편집국
참석자 : 이경운 목사, 정학봉 목사, 박영규 목사, 이인식 목사, 려용덕 목사,
사회자 : 여선암 편집국장(한국교회신문)
사회자: 안녕하십니까. 여선암 편집국장 인사드립니다.
학술대회 준비로 매우 바쁘신 줄 압니다. 본 좌담회를 위해 시간을 할애하여 왕림하신 이경운 목사님, 정학봉 목사님, 박영규 목사님, 이인식 목사님, 려용덕 목사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이경운 국제경교학술연구회 회장님,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이경운: 네, 저도 여 편집국장님을 처음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국제경교학술연구 한국측 학술위원님들을 모시고 좌담회를 갖도록 초청해 주시니 반갑고도 기쁩니다.
사회자: 범아시아기독교의 정체성이란 주제로 한국에서 제3회 국제경교연구한국학술대회를 개최하시는 것을 한국교회신문사 편집국장으로서 먼저 축하 합니다.
먼저 국제경교학술연구회가 결성되기까지의 역사를 간단히 소개 주시지요.
이경운: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금번 3회 국제경교연구회에서 범아시아 기독교의 정체성에 대하여 세미나를 열게 된 것을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먼저 제가 한국경교연구회를 1984년 12월 12일 창립을 했지요. 그 이후「한국경교역사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해 왔고, “아시아의 기독교 경교”라는 책도 발간했어요. 경교연구를 위한 일차 답사 시기는 1984년부터 1990년까지인데요. 우선 대만 홍콩 일본 등지를 방문했어요,
이차 답사 시기는 1990년 4월부터 중국 북경을 비롯하여 내몽고, 감숙성 돈황, 섬서성서안 등지를 답사하게 되었지요. 그 후 2012년 금년까지 근 50여 차례 중국을 방문하면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접하던 중 양주에서는 80여 년 전에 발견되었다가 그 동안 방치되었던 경교유물을 재발견하는 개가를 올리는 사건이 있었지요.
그렇게 열심을 가지고 연구해 오던 중 하나님의 축복으로 2009년도 3월 16일 사단법인 한국경교 역사연구원 승인을 얻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본 사단법인이 2009년도 10월 서울에서 제1회 경교연구학술발표대회를 국제적 행사로 가졌는데요. 아시아권에서는 최초가 아닌 가 생각됩니다.
사회자: 이때가 경교연구의 도약시기라고 말씀하실 수 있겠지요.
이경운: 네. 그렇습니다. 2010년 3월 13일 국제경교연구학술회를 저희 수원장로교회 당회장실에서 발족하게 됩니다. 제가 국제회장을 맡게 되었어요. 이인식 목사님이 한국 측 회장님으로, 가와구찌 목사님은 일본 측 회장님으로 수고하시게 되었지요. 학술고문으로는 정학봉 목사님을, 실행자문으로는 박영규 목사님을 각각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해 10월 일본 교토에서 제2회 국제경교연구발표회를 일본경교연구회 주최로 일, 한, 미 회원들이 참석해서 열게 되었지요.
사회자: 그러면 2011년 어떻게 활동하셨는지요? 박영규 박사님께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박영규: 네, 6월과 10월에는 국제경교연구 한국회 주최로 경교연구학술회 발표회를 두 차례나 개최한 일입니다. 특별히 2011년 10월 1일은 중국경교비 건립 1230주년을 맞아 엘리자베스 앤 골든 여사 일본 경교비 건립 100주년, 한국경교비 건립 96주년을 기리는 추모예배를 한소망교회에서 개최한 일입니다. 2012년 올해는 국제경교학술연구 활동이 전개하는 도약의 해인 것 같습니다. 먼저 정학봉 박사님 번역서 “아시아 교회, 그 사도성과 정통성” 출판기념축하 및 예배가 1월 10일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본 사단 주최로 성황리에 가질 수 있었지요. 제 3회 국제경교연구가 한국학술대회가 다음주 21일부터 24일까지 한, 미, 일 연구가 11명의 논문 발표가 있게 된 것입니다.
사회자: 경위를 소상하게 소게하셨는데요, 이 박사님, 연구원의 목적은 무엇인지요?
이경운: 본연구원은 초교파 비영리단체로서 한국고대종교 및 고대기독교사를 연구하고 개발하여 그 동안 숨겨져 내려온 고대종교 및 고대기독교 문화유산의 발굴과 육성 및 보존과 홍보로 한국고대기독교역사의 재조명과 선교역사를 위하여 첫째 선교교육을 위한 부수적인 사업, 둘째, 고대 종교 및 기독교경교문화 역사발굴의 연구보존, 셋째, 고대기독교(경교)에 대한 도서출판, 넷째, 국내외적인 범종교적 문화교류, 다섯째 국내외 선교정책에 관한 정보교환, 끝으로 국내외적 학술세미나 등의 사업을 경영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사회자: 박영규 준비위원장님, 금번 제3회 국제경교대회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박영규: 오는 5월 21일부터 24일까지 제3회 국제경교연구한국학술대회를 광명시 소하동에 있는 한소망교회에서 사단법인 한국경교역사연구원 주최로 “범아시아 기독교의 정체성” 라는 주제아래 한국대표 5명, 일본대표 5명, 미국대표 1명의 논문발표회로 모임을 가지게 됩니다.
사회자: 이번 학술대회를 위해 훌륭한 논문 발표 집을 출간하신 줄 압니다. 역편자 정학봉 박사님께서는 이번 논문집을 어떻게 구상하고 편집하셨는지요.
정학봉: 네, 금번논문집은 Nestorius와 아시아교회(The Church of the East)의 재평가라는 관점 하에서 다양한 학술논문을 1년 동안 한, 일, 미 3개국학술회원들의 연구업적을 총 망라하여 한, 일 양국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습니다.
사회자: 발표할 학자님들과 주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박영규: 네, 정학봉 박사님의 “아시아교회의 용어의 이해”, 하마지마 빈 교수님의 “신약성서 원어의 논의와 경교사”, 이경운 박사님의 “한국기독교와 경교와의 관계성”, 다나까 가즈히사 연구원의 “일본 기주지역내의 서복의 도래”, 려용덕 박사님의 “중국의 정치․ 종교․ 문학․ 예술 사략”, 가와구찌 박사님의 “경교의 삼일신론”, 브라드포드 하우디쉘 연구원의 “고대일본기독교의 실상과 이론”, 이인식 박사님의 “경교비 건립자는 누구였나?”, 산나다치호 연구원의 “고대기독교․ 경교의 하나시에의 영향”, 유자와 디르후사 일본총무님의 “교도의 하다씨연구”. 저의 논문 “경주 토함산 석불사의 아세아교회사적 이해” 등 11편입니다.
사회자: 금번 논문주제의 기본 틀은 경교역사와 특별히 경교비 해석에 따르는 연구에 그 초점이 있는 줄 압니다만, 중국에 전래된 경교에 대한 한구교회의 교회사적 인식은 어느 정도수준인 것 같습니까.
정학봉: 세계기독교역사는 서구 유럽기독교와 동방아시아기독교라는 양 갈래 역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기독교는 영어로 The Church of the East로 표기하며 학술적으로는 일명 네스토리우스교회라는 보통명사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중국에 전파된 경교역사에 관한 연구는 아마도 개인적인 학술연구수준에서 벗어났다고 보여요. 고대기독교 연구의 한 분야로 자리메김하면서 본격적으로 중요한 학술 논제로 각 신학교에서 활발하게 각광을 받고 있다는 여론이 일고 있어 다행합니다. 물론 경교에 대한 선구적인 학술 저서들이 1960년대 초부터 발표되었으나 1990년대 이후부터 세계교회역사연구의 도움을 받아 이제는 경교연구는 보편화의 대세로 나가고 있어 보이지요.
사회자: 경교역사에 대한 한국교회와 한국 신학계의 반응은 이제 일어나고 있다고 보아집니다만, 이인식 박사님의 논문 “경교비 건립자는 누구였나?”라는 이번 학술 발표 논문은 상당한 찬반 토론의 잇슈로 제기 될 것 같습니다만 이인식 박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인식: 네, 제가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금번 논문발표는 상당기간 동안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연구한 결과에서 나온 연구 성과를 간락하게 그 요점만 추려서 제시한 발표논문이라는 점을 알아주시면 합니다. 저의 논제는 “경교비 건립자는 결코 서구 네스토리안 교회가 아니라, 동양아시아교회인인 달사(達沙, TARSA) 교회”라는 주장입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학술적 근거를 경교비문 해석과 더불어 서구신학에 경도된 선구연구논문에 대한 비판적 연구의 잘못된 오해와 그 결과들을 총 정리하여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지요. 그 결과가 곧 정리된 연구 책자로 출간하게 될 것입니다.
사회자: 좀 더 구체적으로 논의된 바를 설명해 주시지요.
이인식: 저는 경교비에 대한 오명과 명예회복을 위해서 경교비는 전통을 가진 시리아 동양예수교의 달사들이 세운 것이라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결코 서구기독교에 속해 있던 네스토리안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동양 타르사이안들이 당 왕조에 세워 놓은 위대한 고대동양교회의 선교, 사적비라는 것입니다. 비문에 나타난 그들의 신앙과 교리는 예루살렘교회 전통을 계승한 동양교회의 신앙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혹 서구기독교의 시각으로 볼 때 서구기독교의 교리와 맞지 않는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서구기독교와의 교리적인 차이 일뿐이지 근본적인 복음과 진리의 차이는 아니라는 점과 또 고대시리아교회와의 차이도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비석이 서방교회의 이단자 네스토리안의 비석이라는 그 오해 때문에 그동안 받아온 천대와 멸시는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금번에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이 아니라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아시라아교회간의 공동기독론 선언문의 개재를 보면서 네스토리우스교회는 이단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진 사실에 대하여 진심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사회자: 이인식 박사님의 논제가 새로운 논구의 불씨가 되리라는 점에서 기대와 우려가 있겠지만 경교비 연구의 기폭제 역할이 되기 바랍니다.
이인식; 네, 감사합니다.
사회자: 주제를 바꿔서 려용덕 박사님께 질문할 내용은 과연 신라시대에 중국의 경교가 과연 한국에 전래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으신지요?
려용덕: 그동안 객관적으로 신라시대 때 경교가 한국에 전래되었다는 사실을 수십년전에 기회가 있는 대로 극동방송국과 기독교언론매체들을 통하여 밝혔으나, 이제 본인의 조상들이 경교도 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매우 조심스럽긴 하지만 말씀드리자면, 이사람 한강 려용덕 장로교목사의 조상인 당 정부 고위관리인 대경존 려수암은 경교신학교를 세우신 교장이지요. 하여 경교를 부흥시킨 사실과 려수암 대경존의 친필로 휘호하여 당시의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세우는 등 약 50여 년 간 경교발전의 최전성기를 이끌어 간 지도자였습니다.
황소난으로 인해 경교의 대경존 려수암의 후손 학림학사 려여매는 신라 헌강왕 3년에 신라로 국적을 옮겼으며, 그 후손들은 한반도에 머물면서 신라와 백제 땅을 중심으로 하여 경북 성주성산과 경남 함양에 세거하면서 경교의 계대를 잇게 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란 점을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경운: 려박사님, 말씀하시기 힘든 내용을 허심탄회하게 개진해주셔 감사합니다. 박사님께서 한국교회신문 <성씨방문> 연재에서 쓰신, ‘려씨방문’ 내용을 통하여 려씨의 전래 내력과 신라 입조, 성주 려씨의 본관지와 함양 려씨의 본관지 연혁과 주요 세거지 변천사를 통하여 한국의 정착된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귀중한 경교연구사에 빛나는 사실을 육성으로 듣게 된 것을 축하해야 할 것입니다.
려용덕: 오히려 송구스럽기만 하지요. 지난 주 한국교회신문에 게재한 서기 600년 아시아교회의 비문 해설논고를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록 학술적이라 말 할 수는 없는 이야기지만 경교의 뿌리와 전승적인 이야기라는 점에서 참고할 수 있겠습니다.
사회자: 정학봉 박사님께서 “범 아시아기독교의 정체성에 대한 관점”을 어떻게 규정하고 계시는지요?
정학봉: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살 때에, 더 역동정인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혈통적인 정체성 연구로 상당한 결과를 얻지만, 정신적이거나 영적인 정체성의 연구는 좀 더 깊이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영적인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그 신앙의 바탕인 아시아교회 즉 경교의 역사적인 흐름과 신앙적인 내용과 더불어 생활문화 등을 탐구하는 일로써 최근에는 아시아교회에 대한 연구가 세계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경교연구 사역자들이 2010년 3월 13일 수원장로교 이경운 목사님 교회에서 드디어 “국제경교학술연구회”를 결성하게 됩니다. 경교연구는 아직도 미개척분야가 많기 때문에 금번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논문의 내용은 발표자들의 개인적인 연구발표 성과이며 장차 이런 연구들을 종합 정리하여 아시아교회의 신학과 그 종교문화의 정체성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의 교회역사는 본질적인 신앙은 같았는데 언어표현의 양식의 차이로 431년 에베소공의회처럼 서로 배척하고 정죄하여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적인 흐름은 생활문화와 신앙양식이 다를지라도 서로 동의 할 수 있는 공통점을 찾아 협력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사회자: 이경운 박사님의 금번 한국기독교와 경교와의 관계성에 대한 내용이 주는 의미를 소개해 주시지요?
이경운: 경교에 대한 연구의 목적은 중국선교를 위한 것입니다. 경교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경교의 명칭이 부쳐진 경위와 사유를 교회사적으로 밝혔으며 경교라 불리기 전후의 명칭이 된 것과 현재의 명칭에 대해서 간략하게 서술하였습니다. 경교라 불리기전의 명칭은 섭사탈리, 아은구리용, 미시아교, 파사교, 대진교입니다. 경교라고 부른 후의 명칭은 아리가온, 야리가온, 이리극온, 이무르곤 입니다. 현재는 간단히 중국기독교, 공식적인 명칭은 중국기독교 3자 애국운동 위원회라 합니다. 중국은 교파가 없이 단일적으로 기독교란 이름만 있습니다.
사회자: 정박사님 일본 경교연구자들이 발표 중에서 관심이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일본 기주지역내의 서복의 도래“ 라는 발표의 내용은 무엇인지요?
정학봉: 중국역사에서 서복“전승에서 역사로” 진전된 것은 경교가 일본에서 “역사”로 인식되어지기 위하여 유익한 암시를 준다는 생각입니다. 중국 사기에서 서복에 대한 기록은 진시황제에 의하여 서복의 고향인 제나라가 망하자 많은 지식인들이 박해를 받던 중 박해와 폭정에 대한 분노로 안주할 수 있는 땅을 찾아 동쪽으로 가게 된 배경이 되었습니다. 서복집단을 구성하여 동쪽으로 간 이유는 동남동녀 500여명과 큰 배 85척을 요구하여 선단과 백공 오곡을 얻어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서복관련의 땅 경유지는 제주도와 부산이었으며, 일본에서는 서복관련의 땅 목적지는 시가현, 와까야마현, 미해켄구마노시의 서복 유적 등입니다. 220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일본 여러 곳에서 서복이 존경받아왔고, 서복을 기리는 제사가 행하여지는 것은 서복이 대한 전설이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로 1985년 인식되어 있다는 내용입니다.
사회자: 가와구찌 박사님의 “동방으로 돌아온 기독교 경교신학” 경교의 삼일신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정학봉: 경교도의 신관은 삼위일체 신을 믿으며 그 명칭으로서 에루하-, 에로힘, 야훼, 성령 등으로 표기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경교의 신관의 특징은 삼일신관입니다. 발표문의 내용은 삼일신 신조와 신앙고백의 일부 및 삼일신관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경교비의 창조관은 조화로써 조화는 만물을 창조한 것이나, 창조주가 피조물을 키우는 일이라는
창조화육의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사회자: 참으로 귀중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박영규 박사님이 발표하시는 “경주토함산석불사의 아시아 교회사적 이해”에 대해서 한 말씀해 주시지요?
박영규: 네, 제가 다룬 논문의 주요 골자는 기독교와 불교의 성상숭배와 석굴 예배실에 대한 비교종교학적인 연구로서 경주 토함산 석불사에 대한 아시아교회사적 이해입니다. 불교와 기독교가 지닌 공통점은 보이지 않는 신성한 예배의 대상으로 형상화한 종교적 의례로서 성상숭배를 창작한 것입니다. 조각미술과 조형미술로 상징화한 예배의 대상은 신성의 임재와 현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종교적 이미지와 상징은 주로 종교의 창시자가 태어나고 득도 한 장소나 유해와 성물이 묻힌 무덤을 자연스럽게 성역화 합니다.
사회자: 그러면, 이러한 현상 중에 외형화한 형태가 성당이나 불당이며 내밀화한 곳이 바로 석굴에 예배 실을 만든 행위가 되겠네요.
박영규: 네, 예루살렘의 성묘부활교회나 카타콤의 석굴 예배 실을 비롯하여 한적한 사막의 석산에 세워진 수많은 수도원 석굴이 세계도처에 산재하고 있지요. 경주 불국사와 가까운 토함산의 석굴암은 산 중 턱에 위치한 바위산에 석굴을 뚫고 만든 예불석굴입니다. 토함산 석굴암은 본래 석가여래상을 모시고 예불하는 석불사인 셈이지요. 서로 다른 종교의 합작사건은 흥미 있는 역사적 사건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 논문은 100년 전에 토함산 석불사를 답사했던 비교종교학자 골든 여사와 천문학자 루프스교수의 논문을 중심하여 석불사의 의미를 기독교의 메시아사상과 마니교의 석불사상과 연관하여 비교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사회자: 여러 가지 면으로 우리가 토의할 내용이 많겠지만 발표내용은 23일 9시부터 5시와 24일 9시부터 12시까지 발표 장소에서 듣기로 하고 귀중한 시간을 할애해주신 박사님들께 감사를 드리며 좌담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일동: 감사 합니다
제3장 당조의 경교
시리아의 에뎃사에서부터 그리스도교의 동양 선교가 시작된 이래로 시리아는 동양의 그리스도교 선교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페르샤의 사산왕조 때 박해를 받았고 또 그 후 이슬람교 아래에서 박해를 받았지만 동양 전역에 그리스도교는 계속 전파되었다.
인도 선교 이야기는 일찍부터 있었지만 중국 선교에 관한 이야기는 1623년 산시성 시안(西安)에서 우연히 땅 속에서 한 비석이 발견된 때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비석의 비문에는 당조 정관(貞觀) 9년에 시리아에서 아라본 대덕(阿羅本 大德)이 장안(長安)에 들어와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하였다고 새겨져 있는데 서기로는 638년이다. 즉 근 1천년 동안 중국 선교 역사가 땅 속에 묻혀 있었다는 말이다. 이 비석이 유명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인데 높이 10척, 폭 5척, 두께 1척이며, 경교의 역사에 관한 기록은 1,870여 문자로 새겨졌고 측면에는 시리아 문자로 경교 선교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경교 비문에 따라 당나라 때 경교가 전파된 역사의 발전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당조의 태종(太宗, 李世民)이 경교의 고승 아라본에게 경교(파사교)의 선교를 서기 635년, 정관(貞觀) 12년 7월에 허락하고 그리스도교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할 것을 명령하고 말하기를, ‘도무상명 성무상체(道無常名 聖無常態, 도가 한 가지 이름만이거나 거룩이 한 가지 모양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은 3년 후 국비를 가지고 파사사(波斯寺, 경교 교회)를 세우고 파사승 21명을 그곳에 배치하였다.
제3대 황제 고종(高宗)은 부친의 정책을 수용하여 13도 358주에 파사사 하나씩을 건립케 하였고 파사교(경교)의 고승에게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이것은 경교를 당조의 국교로 간주한 조처가 된다.
고종이 죽고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왕권을 잡고 나라 이름을 주(周)라고 부르고, 불교를 숭상하고 경교를 박해하여 경교사원들이 파괴되기도 하였다. 측천무후가 705년에 죽고 현종(玄宗)이 집권하여 경교를 박해하고 중국의 재래종교의 부흥을 도모하였다.
이때 마침 페르샤의 이슬람교가 세운 사라센 왕국의 사절단이 당조에 파견되었는데 그 사절단원 중 한 사람의 이름이 대덕 급열(大德 及烈)이라고 되어있는데, 大德은 중국어로는 法主이고 그리스도교에서는 대주교 또는 대감독이라고 번역하여 불리는 고위사제이다. 及烈이라는 이름은 중국어 발음으로는 키릴(Ki·lie)인데 아마도 가브리엘을 음독한 것 같다. 아무튼 이 이름은 그리스도교인의 이름인데 그가 당조에 와서 박해 아래 있던 경교가 박해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때 당조와 페르샤(파사)의 신흥 이슬람 왕국과 국교를 맺으려는 외교사절 단원으로 온 及烈은 동양교회의 고위 성직자 감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경교 비문에는 及烈의 이름 앞에 다른 한 인명인 승수 라함(僧首 羅含)이 나온다. 僧首는 사제의 우두머리라는 뜻이고 羅含은 아브라함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승수 아브라함과 대덕 가브리엘 두 사람이 페르샤의 국가 외교사절이 아니고 동양교회의 외교사절로서 당조에 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현종은 경교를 자유롭게 하였고 가브리엘은 궁전에 자유롭게 출입하고 중국어를 배워서 조정에 온 외교사절단의 통역자로도 일하였고, 태종의 초상을 비롯하여 당조 5대 황제들의 초상화를 경교 사원 벽에 걸게 하였는데 이것은 황실이 경교를 보호한다는 표시였다. 현종은 형제 5명을 경교 사원에 보내서 파괴된 사원을 재건하게 하였고, 장안에 와있던 경교를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교와 마니교와 구별짓기 위하여 천보 4년(서기 745년)에 칙령을 내려서 파사사를 대진사(大秦寺)로, 파사승을 대진승(大秦僧)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또 파사경교(?敎)를 고쳐서 경교(景敎)라고 부르게 하였다.
당시 당나라의 문화 발달은 절정에 이르렀다. 현종의 신뢰를 받던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곽자의(郭子儀) 장군의 부관으로 경교도 이사(伊斯-이삭)가 임명되었다. 이사는 이때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현종의 아들 숙종이 이사의 공을 크게 치하하고 경교를 후대하여 넷 고을에 경교 사원을 짓게 하였다.
숙종은 환관에게 시해되고 그의 아들 대종(代宗)이 집권하였을 때도 티베트군이 장안을 침략해 왔을 때 이사가 다시 한 번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대종이 경교도를 추대하여 자기의 생일 때마다 경교도를 불러서 연회를 열었다.
경교 비문에는 이사가 당조의 벼슬 제일품(第一品)의 고관이며, 부절도사(副節度使)가 되어 있고 황제가 그에게 승복을 주어서, 그를 이사승이라고 불렀다. 이사가 본래 동양교회의 사제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경교 비문에는 이사가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선한 일을 많이 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의 장례식도 치러주었다고 한다. 경교가 당조 때 사회사업을 많이 한 것을 언급하면서 마태복음을 인용하여 배고픈 자와 병든 자에게 자선을 베풀고 사회봉사에 힘쓴 것을 기록하였고, 오순(五旬)이라는 말을 한 것은 오순절을 뜻하는 것인데 경교도들이 이 절기에 금욕생활을 실천한 것을 일러주는 것이다.
경교 비석을 세우려는 의사는 이사의 상관 곽자의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곽자의는 본래 서방에서 온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한다. 그는 경교도가 숙종, 대종, 덕종 3대의 황제의 충신들이 되어서 나라를 지켜주고 백성을 위해서도 선한 일을 많이 한 것을 기념할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비문 말미에는 이 비석을 세울 때의 바그다드에 주재한 동양교회의 총대주교의 이름 하난-예수(Hanan-Isho)가 있고 이어서 이 비석을 세우는 일을 한 경교 사제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시리아 글자로 Yazedbouzid의 아들 집사, 또 이어서 시리아 글자로 Mar Sergius 신부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비석 좌측에는 시리아 인명이 새겨져 있는데 53명이고 우측에는 55명인데 모두 경교 성직자들인 듯하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보라, 영원불변하시고 참으로 고요하시며, 만유 이전에 존재하시되 시작이 없으시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묘연하시며(혹은 무한하시고) 초월하신, 만유의 끝이 되시되 끝없이 오묘하게 존재하시는도다.
(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혼돈을 빚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혹은 기묘한 권능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늘의 천사나 땅의 뛰어난 자들 모두 위에 유일하고 거룩하신 분으로 존재하시는 분은, 오직 우리의 삼위일체의 성부, 처음이 없으신 참 주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열 十자로 동서남북 사방을 확정하시고, 성령으로 하여금 음양의 두 氣를 일으키고, 어두움이 변하여 하늘과 땅이 모습을 드러내고, 태양과 달이 운행하여 낮과 밤이 시작되었다.(혹은 어두움이 움직여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고, 태양과 달이 운행하여 낮과 밤이 있게 되었다.)
뛰어난 솜씨로 만물을 창조한 후,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시었다. 사람에게 특별히 신령스러운 기운을 주고, 세상을 정복하도록 명하시었다.
최초부터 선한 본성은 겸허하고 교만하지 않으며, 순박하고 깨끗한 마음엔 원래 욕망이 없었다. 그러다가 사탄이 간계를 꾸며, 광명한 천사처럼 위장하고 나타났다. 선악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말씀을 좇으며, 에덴 동산에 살고 있는 시조에게(혹은 선악과가 있는 에덴동산에 사는) 하나님과 동등하게 선악을 알 수 있다는 삿된 생각을 시조에게 불어넣고,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혹은 욕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죄를 짓도록 시조에게 술수를 꾸몄다.
그러므로 수많은 이교(異敎)의 종파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내고, 다투어 사람들을 얽어매는 법망을 꾸며놓았다. 어떤 자는 사물을 의지하며 숭배하게 하고, 어떤 자는 만유가 다 허무(空)하다 하여 有와 無를 불분명하게 하고, 어떤 자는 기도하고 제사를 드림으로 복을 얻게 하였으며, 어떤 자는 자신의 선생을 으스대며 사람들을 속였다.
지략을 짜내고 궁리하느라 궁주하고, 마음과 감정이 쉼 없이 수고하지만, 망연할 뿐(혹은 헛되어 소득이 없고), 긴장되고 조급해지므로 마치 온 몸에서 열이 나는 듯 하였다. 짙은 어둠에(혹은 우매함과) 무지가 쌓여 길을 잃고 오랫동안 헤메어(혹은 방황하여)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우리 삼위일체의 성자, 크고 빛나신 메시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시었다. 천사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동정녀 마리아는 유대 나라(베들레헴)에서 성자 예수를 탄생하시었다. 밝고 큰 별이 나타나 기쁜 소식(혹은 사건)을 알리고, 페르시아에 몇몇 박사들이 별빛을 보고 나아와 예물을 바쳤다. (메시아는) 24 선지자가 말한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이루시어, 웅대한 계획(혹은 天道)에 의해 가정과 국가(혹은 교회)가 다스려지도록 하였다.
삼위일체의 제 3위격이신 성령의 무언의 가르침을 두시어(혹은 통하여), 바른 신앙에 이르도록 선한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시었다. 팔복의 법도를 제정하시어, 죄인들로 하여금 팔복의 내용에서 언급한 완전한 자가 될 수 있게 하시었으며, 믿음, 소망, 사랑과 문을 열어, 영생으로 나아가며 영원한 죽음을 면하게 하시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시고, 그의 영이 음부로 내려가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에게 전도함으로 음부가 무너지어, 마귀의 망령된 권세가 모두 파멸되었다. 구원의 방주를 저어 음부에서 천성(天城: 天宮)으로 오르는 것과 같이, 인간들이 구원받을 수 있게 하였다.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는, 한 낮에 하늘로 오르셨다. 『신약성경』 27권을 남기시고, 위대한 가르침이 전파되어 사람의 심령이 개도(開導)되기 하시었다. 세례는 물과 성령으로 베풀어져,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헛된 영화를 씻어내어 희고 깨끗해지게 하였다.
(이에 우리는) 십자가를 표(Sign, 印記)로 들고, 사방의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 아래 모여 서로 구속됨 없이 하나되도록 힘쓴다. 목판을 두드려 사랑과 은혜의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고, 동쪽을 향한 예배 가운데 영생복락의 길로 나아간다. (우리 경교 전도자들이) 수염을 기르는 것은 외적 행함이 있고자 함이요, 정수리를 깎는 것은 마음 속에 정욕이 없음을 나타낵자 함이다. (우리는) 노비를 거느리지 않고,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며, 재물을 쌓지 않고,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궁핍한 자들을 돕는다.
금식할 때에는 남이 알지 못하게 은밀히 함으로써 이루고, 조용히 행동을 삼가야 계율을 굳건히 지키게 된다. 매일 일곱 차례 예배와 찬송을 드림으로, 산 자와 죽은 자에게 크게 유익이 되게 하고, 주일에 한 번씩 성찬을 거행함으로, (주님의 대속의 공로로) 죄로 더럽혀진 마음이 깨끗이 씻어지고 다시 성결함을 회복한다.
진실하며 변치않는 진리(道)는 오묘하여 명명하기가 어렵지만, 효용이 현저하여 경교(景敎)라고 굳이 부르게 되었다.
해제
이 비는 현재 섬서성 서안(西安: 옛 장안)에 있는 비림(碑林)에 있는 유물 중 하나이다. 서방에서부터 전래된 네스토리우스파의 경교(景敎)가 전교된 과정을 적은 유물로, 고대 동서교류사의 귀중한 유물로 평가되는 중국의 국보급 유물이다. 당나라 건중(建中) 2년인 781년 2월 4일, 페르시아의 선교사였던 사즈드호지드(Yazdhozid, 중국명 이사伊斯)가 주체가 되어서 세웠던 것으로, 처음 만들었을 당시에는 경교(景敎)의 사원인 대진사(大秦寺)에 있었다. 전체 높이는 2.79m에 이르며, 비석의 머릿돌을 제외한 길이는 1.97m, 두께는 27cm이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예수의 신격과 인격을 구분하는 이성설(二性說)을 주장했던 고대 기독교의 일파인데, 431년 6월 22일에 열린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뜨거운 논쟁 끝에 네스토리우스파는 교리논쟁에서 패배, 이단으로 몰려서 파문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파의 가르침은 중동으로 뻗어나가서 마침내 7세기 경에는 당나라로 전파되었고, 일명 경교(景敎)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그러다가 당나라 무종(武宗: 814~846) 때의 법난(法亂) 때 불교 종파들과 함께 탄압당했다가, 하지만 원나라 때에 다시 한 번 융성함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경주 불국사에서 출토된 돌십자가, 경주에서 발굴된 마리아상, 그리고 발해에서도 십자모양 와당이 발견된 것으로 볼 때, 동서교류의 결과에 따라 네스토리우스파의 교리가 일부 들어왔던 것으로도 추측한다.
이 비문은 페르시아의 선교사이며 경교의 경전 약 30여 권을 번역했던 경정(景淨)이 지었고, 비문의 머릿돌은 조의랑전행 태주사참군인 여수암(呂秀岩)이 썼다. 정면에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 적혀있으며, 위쪽에는 해서체로 33행을, 행서체로 62자를 새겼고, 전체 1780자가 새겨져 있다. 명나라 천계(天啓) 3년(1623)에 다시 출토되었다. 이 때의 비문에서 대진(大秦)을 로마라고 보느냐, 아니면 페르시아로 보느냐에 따라서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이 네스토리우스교가 중국에 건너와 경교라는 이름으로 되기까지는 페르시아에서 건너왔다는 점이다.
해제
이 비는 현재 섬서성 서안(西安: 옛 장안)에 있는 비림(碑林)에 있는 유물 중 하나이다. 서방에서부터 전래된 네스토리우스파의 경교(景敎)가 전교된 과정을 적은 유물로, 고대 동서교류사의 귀중한 유물로 평가되는 중국의 국보급 유물이다. 당나라 건중(建中) 2년인 781년 2월 4일, 페르시아의 선교사였던 사즈드호지드(Yazdhozid, 중국명 이사伊斯)가 주체가 되어서 세웠던 것으로, 처음 만들었을 당시에는 경교(景敎)의 사원인 대진사(大秦寺)에 있었다. 전체 높이는 2.79m에 이르며, 비석의 머릿돌을 제외한 길이는 1.97m, 두께는 27cm이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예수의 신격과 인격을 구분하는 이성설(二性說)을 주장했던 고대 기독교의 일파인데, 431년 6월 22일에 열린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뜨거운 논쟁 끝에 네스토리우스파는 교리논쟁에서 패배, 이단으로 몰려서 파문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파의 가르침은 중동으로 뻗어나가서 마침내 7세기 경에는 당나라로 전파되었고, 일명 경교(景敎)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그러다가 당나라 무종(武宗: 814~846) 때의 법난(法亂) 때 불교 종파들과 함께 탄압당했다가, 하지만 원나라 때에 다시 한 번 융성함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경주 불국사에서 출토된 돌십자가, 경주에서 발굴된 마리아상, 그리고 발해에서도 십자모양 와당이 발견된 것으로 볼 때, 동서교류의 결과에 따라 네스토리우스파의 교리가 일부 들어왔던 것으로도 추측한다.
이 비문은 페르시아의 선교사이며 경교의 경전 약 30여 권을 번역했던 경정(景淨)이 지었고, 비문의 머릿돌은 조의랑전행 태주사참군인 여수암(呂秀岩)이 썼다. 정면에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 적혀있으며, 위쪽에는 해서체로 33행을, 행서체로 62자를 새겼고, 전체 1780자가 새겨져 있다. 명나라 천계(天啓) 3년(1623)에 다시 출토되었다. 이 때의 비문에서 대진(大秦)을 로마라고 보느냐, 아니면 페르시아로 보느냐에 따라서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이 네스토리우스교가 중국에 건너와 경교라는 이름으로 되기까지는 페르시아에서 건너왔다는 점이다.
2010/07/29 14:55
http://blog.naver.com/ahav_yeshua/50093233305
法流十道 國富元休 寺滿百城 家殷景福"
"법도가 전국에 퍼지고 국가는 부유하며
백성은 선미해졌고 교당이 각 성읍마다
충만하여 집집마다 큰 복이 번성하였다" 라고 고대 동방기독교는 전하고있다
고대 로마나 유럽이 아니라 중국대륙에 번창하던 경교의 역사기록인것이다. 파사교(페르시아교회)-대진교(로마교회)-야리가온(복된자)-밀교로 이어지는 고대 기독교의 역사는 우리에게 조상들의 열악한 환경속의 신앙생활을 생각하게하며 현재의 편안한 신앙생활이 가능한 우리들을 반성게한다.
- 중국 둔황 동굴에서 발견된 경교사의 세례식 장면 -
고대 동방기독교 경교의 관련역사
아시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Nestorius학파 일명 경교(Nestorianism)의 역사에 관하여 돌아보면 400년경 광개토대왕 이 후 동북아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고구려 장수왕시절 428년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 대주교이던 네스트로리우스 Nestrorius(381-451)는 당대 경쟁자인 카릴로스 Cril 의 제소로 430년 로마대회에서 종교관적 해석이 그리스도의 이인격설과 마리아의 신모설을 (성모마리아는 에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지만 신의 어머니는 아니라는 비성모설을 주장) 반대한다는 이유로 대립하게되자 교황 게레스티누스는 그의 사임을 요구하였다.
431년 동로마 황제 태오도시우스2세 서로마 발랜티니아누스 교황의 특사를 맞이하여 Nestorius에 동조하는 안티오키아의 요한을 추종하는 시리아주교단과 교황 첼레스티노1세의 대표자들의 참석을 기다리지 않고 에페소스 주교 엠논의 지지를받는 Nestorius의 반대파인 카릴로스가 그들이 도착 전에 에패소스 공의회(Council oF Ephesos)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Nestorius의 교설은 이단으로 확정되고 그의 해임과 추방이 결정되었다. 에패소스 공의회는 사도신앙을 거듭 확인하여 “니케아 신경”의 그리스도 양성론을 재확인하였다 당시 로마권력과 부를 가진 카릴로스 Cril의 아랙산드리아 Alexandria 교구세력에 중도입장인 아티오 Antio 학파도 이후 묵인으로 동조하였다 489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로마황제로부터 Nestorius학파는 로마 영토밖으로 이단으로 파문 추방되었다. 현재도 동방기독교는 이란에 밀교형태의 소수종교로 남아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 을 중심으로 그의 교설이 어느정도 인정되었으나 이미 로마교회와 단절되었으며 Nestorius학파는 시리아는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여 페르시아 에뎃사시에 작은 신학교를 세우고 동방의 전도사들을 양성했다. 당시 로마제국과 대립하던 페르시아(이란) 사산왕조는 로마교회에서 파면된 Nestorius학파 신인해줌으로 그 세력은 더욱 확장하여 498년Sauma 주교는 동방교회의 독립을 선포한다. 그러나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Nestorius학파는 페르시아의 전통종교인 조로아스터교와의 마찰과 이슬람문명과의 충돌로 인도 및 중앙아시아로 그 거점을 옮겨가게 된다.
중국의 경교역사를 보면 618년 수나라가 2차례에 걸쳐 무리한 고구려침략으로 멸망하고 이연이 당나라를 건국하고 남만과 토번, 중앙아시아 등지를 평정하나 북방의 돌궐족과 잦은 충돌로 635년 당태종은 동돌궐을 위무하기 위하여 서방에서 건너온 Nestorianism 파기경교(패르시아 기독교) 선교사 아라본(Alopen)등 12명을 후하게 맟이하고 장안성(서안)에 파사사를 건립하였다. 처음에는 패르시아종교로 오인하여 파사교로 불렀으나 이후 로마가 원류임을 알고 (대진국=로마) 로마교회라는 의미로 대진교 대진사로 바뀌어 불럿
다.
- 중국 서안 비림(비석)박물관 2관에 있는 경교비 -
대진사에서 유일신이 천지를 창조함을 강조하는 경교성서를 번역하고 전도하였고 이후 광명한 종교라 하여 경교라 불리었다. 당태종은 동돌궐과 기독교문화의 도입으로 동돌궐과 친교이후 서돌궐을 침략하여 복속하고 동돌궐마저 굴복하게 한뒤 마지막으로 서편의 최강자마져 꺽어 명실상부한 초강대국을 이루기 위해 645년 당태종은 친히 30만정병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략하지만 실패하고 돌아와 사망한다. 668년 고구려는 영웅인 대막리지 연개소문 아들들의 내분으로 자멸한다. 당고종은 아라본선교사에게 진국대법주라는 관직을 주고 10도와 385주에 경교사원을 설치하게 하였며 고대 기독교는 번창한다.
- 경교비석과 대진사터의 경교탑 -
인도고승 달마가 중국으로와 백마사를 창건하고 측천무후를 불교도로 개종시킨후 당태종의 며느리인 측천무후가 집권하여 분열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용문석굴의 불상을 만드는등 국가적인 지원으로 불교가 잠시 융성하고 경교에 대한 당황실의 지원도 잠시 주춤하지만 755년 당현종이 양귀비에 미쳐 나라를 10명의 병마절도사들에게 마끼고 정사를 돌보지 않는것을 구실로 3도병마절도사인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성을 함락시키는등 8년간의 전란중 757년 숙종때 경교도인 이사가 병마절도사 안사의난 진압에 큰공을 새웠으며 이후 대종때에도 이사가 토번의 침공을 물리치는데도 큰공헌을 하여 당황실로부터 더욱 보호를 받으며 크게 융성하였다.
781년 승려 경정이 경교비(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새웠고 백제계 일본천황인 성무천황때 당나라인 황보와 경교선교사 밀리스를 동반하여 천황을 알연하는등 기록이 전하며 신라 발해등 경교가 아시아전역에 전파되어 고대 동방기독교 경교는 그 절정으로 번창한다.
하지만 845년 중국의 고유종교인 도교신자인 당무종은 불교와 경교의 외세종교에 대한 견제인 종교금지정책인 회창금교정책으로 모든종교사원이 패쇄되었고 635년부터 210년역사의 경교도 사라져 밀교의 형태로 전해진다. 당시 탄압으로 경교승은 600-700명이 환속되었고 경교도는 40,000-70,000명이 개종하였다 879년 산동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인 황소의난으로 상대적으로 부유한 경교도인들 30,000명이 학살당하였으며 20만명정도 경교도는 붕괴되고 나머지 경교도인들도 도교나 불교로 유입되고 경교승려와 선교사들도 당나라 북부로 도망하여 유목민지역인 케레이트 나이만 웅그트족등을 개종시켜 전도하였고 후에 몽골에 흡수된다. 당나라의 핍박속에 고대 경교는 대승불교에 편입되어 밀교형태로 전승되어진다.
대진사터와 경교탑의 현재 상황
과거의 환란이 있은 후에 대진사(경교의 예배당)터에는 이름모를 괴승과 함께 사찰이 오래전부터 불법 침입해 있었다. 중국의 명절이 되면 불교인들의 참배로 끊이지 않고 있다. 그로인해 경교탑이 자기들의 탑인냥 소문을 내고 대외적으로 알리고 있다.
그들은 당나라의 경교탑을 이미 당나라 이전 수나라 때 만든 것이라고 말 하고 있지만 그러나 아무 물적 증거자료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면서도 경교탑 주변을 사찰의 물건들로 어지럽히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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