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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이 곳까지 섬겨야 하리 - 일본 여행 본문

부르심의 축복/주의 동산 1994

이 곳까지 섬겨야 하리 - 일본 여행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09. 12. 26. 07:14

 

 

 

이 곳까지 섬겨야 하리 - 일본 여행 ( 주후 200457~ 11)

 

일본단기 선교 여행은 참으로 깊은 의미를 주었다

선교 예정일이 잡히고 모집할 때는 

회사일로 한번 다녀 온 일본국이고

기독교 역사를 읽는 중에 우리 나라보다 먼저 천주교와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였고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나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같은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있는가하면

정치와 권력의 시녀 노릇을 자행했던 모습들이 더 자극적으로 나를 감싸고 있던 터라 관심밖의 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일본어 반을 중심으로 파송하되 김치 바자회라는 명목이 있으니 음식 솜씨 좋은 성도들도 가능하다는 목사님 말씀에 보편적으로 (주관적일지도 ??) 김치 맛이 좋은 사랑하는 나의 ㅇ된 박신자 집사를 보내고 싶었다.

이유는  세가지였다. 같이 국내 여행을 하자는 제안을 거부하는 아내의말에 대한  나 혼자만의 국내 여행을 꿈꾸고 있었고, 둘째는 신앙적으로 살려고 하는 아내에게 또다른 면목의  넓은 세계를 보고 오라는 생각이였고, 세째는  내가 밟아본 땅을 밟아보게 하는 것이였다.

그래서 선교팀에게 합류할 것을 종용하자, 아내는 접수하고서는 몇일이 지난 후, 나에게 같이 갈것을 제안했다. 싫다고 말하자 그러면 자기도 않가겠노라고  이쁜 투정을 내세운다. 결국은 생각해 보자는 말로( 반 허락한 의미) 위기를 모면하고 가지 않을 방법을 모색했다.

환경과 조건은 주님의 뜻이 아닌 미혹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던가,  56일 출국한다는데 5710

40분에 지방 노동관서 실업 관리팀과의 미팅이 있는 날이였다. 미팅 날짜를 조정할려고 노력해보았으나

담당직원은 요지 부동이였다. 하는수 없이 포기해야겠다고 선교팀에 통보하자 7일 저녁에 3차로 출국하면 된다고 했다. 주님은 끈기지게 붙잡고 계시는거였다.  그리고 또 현재 내가 안고있는 가장  취약한 곳을 공격 당했다. 51일 김준이 집사와 새가족실 지붕 일을 하다가 중식을 마치고 임영규집사의 결혼식에 참석할려고 교회 앞 게단을 올라가는데 하반신 마비가 오는 것이였다. 옆에 조그려 앉아 주무르니 조금 나아지길래 급히 2층으로 올라가 30여분 동안 다시 주무르다가, 누워있다가하다 보니 거동할 정도가 되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에식에 참석했는데 디지탈 사진 촬영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다시 선교관으로 내려가 디카를 가져와 사진을 찍어주고,  힘들게 새가족실 지붕을 마무리하고 돌아와 샤워하고 누우니 좀 나은듯했다

다음날 주일 예배를 드리고 오후 여전도회 헌신예배를 드리다보니 또 허리 통증이 온다. 억지로 그러나 은혜롭게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으니 긴장이 풀린듯 온몸이 더 압박해 오는 것이였다.

그리고 3일을 힘들게 버티였다, 몸은 아팠으나 마음은 기뻤다 일본에 안갈 핑게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그런데 주님은 나를 놓아 주질 않았다. 아픈 틈에도 pc를 열고 뭐할꼬 하며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일본 선교사 싸이트에 마우스가 멈추었고  선교 보고 레포트를 읽어나가면서, "그래 일본선교는 세게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야

그런데 그 미운 일본에 뭐하러 가냐?" 라고 자신을 위로하였다. 그런데 누군가의 글에 밉고 보기도 싫은 일본이지만 우리가 선교해야 만 하고, 선교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이고 하나님의 듯이라는 것이였다, 우리나라 사람은 열정은 있으나  재정이 부족하고 세계적으로 미치지 못하는 땅이 많지만, 일본은 많은 경제인들이 모든 나라에 상주해 있고 물질도 풍부하기에 21세기 세계선교를 책임질 나라이고, 우리는 그 물꼬를 터 놓아야하는 임무를 맞은 나라로서 일본인들을 전도해야 할 사명을 받은 나라라는 고백을 읽었다.

그러나 내가 일본 가서 할 일이 없고, 일본어란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음을 기억하며, 다른 선교사의 글을 읽어 나가는데 바다 건너,  그것도 미국과 G7국가 외에는 모든 나라와 민족의 사람들을 약잡아보고 무시한다는 일본의 12천만 민족속에서 500~600여명밖에 안되는 한민족 선교사들의 외로움을 누가 함께 하겠느냐며, 단기선교 오는 성도들, 교우들이  그 아픔을 달래주는 하나님의 동역자임을 고백하며, 와서 있어만 주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파송한 선교사임을  시인해 주는 것 만으로도 저들 일본인의 멸시 천대는 물론이요, 자부심과 새힘을 얻노라고 고백하는 그분의 고백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는것  만으로도  선교사님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조건없이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으나   6일 선교팀을 배웅하고  나의 출국 시간을 확인하니 저녁에는 여객기가 없고 1050분 뿐이라는 한동진 집사의 말에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돌아와서  노동관청에 들려 사정을 하니,  무조건 안된다는 것이였다.

하는 수 없이 15일분의 급여를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다. 교회에 전화해서 윤간사보고 내일  먼저가서 비행기 표를 끊어 놓으라고 부탁하고, 송전도사님에게는  910분에 일 마치고 출발할 수 있으니 김해까지 같이 가자고 부탁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다하고 난 후,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려 보자고 혼자만의 독백속에 자신을 위로한 후 잠을 청했다

7일 아침 820분 송전도사님을 태우고 북마산으로 향했다.  가고 안가는건 주님의 마음이라는 생각속에

50분경 담당 창구에 갔으나 직원이 공석이다. 조급함에 옆 창구에 물으니 출근은 했다는 것이다. 9시가 되서야 나타나는 직원이 밉기도하고 두렵기도했다. 접수하자 내가 약속한 시간은 1040분이라고 서류를 접수하지 않는 것이다. 정해진 다른 사람들 것부터 해야 한단다. 야속한 마음 뿐이였다. 그때 뒤에서 아는 척 하는사람이 있어 돌아 보니 친구들이였다. 상황을 듣고 먼저 접수하기를 종용해서 "다들 동의하는데" 접수해 주길 요구하자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음부턴 안됩니다 하면서 접수를 받아서 몇몇가지 체크하고 잘 갔다 오라는 친구들의 인사를 뒤로 한 채 황급히 건물을 나오니98분이였다. 전도사님의 노련한 운전 솜씨로 10시경에 도착해서 10분경에 도착한 김 소년 집사님을 만나보고 출국할 수 있었다.

 

1.  57( 금요일 )

1050분 김해공항을 출발한 여객기는 2시간 여만에 일본 나리다 국제 공항에 도착했다. 늦게 나온 짐을 찾아 나와 입국장 주변을 한번 돌고 오니 전 선교사님과 한동진 집사님이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반가움으로 인사를 나누고 1시간정도 기다린 후 김소년 집사님과 박헤란 자매님을 만나 교회로 향하는 봉고 차안은 비교적 더웠다.

반기는 가포 식구들과 나리따 성도들에게 늦게 온 것이 미안했으나,  체험케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에 기뻤다.

연이어  가진 선교사님의 선교 보고 시간은 선교사님의  외로움과 고통의 열매들이였고, 보고한다는 의무감보다는 친정식구를 만난 새댁의 하소연과 자랑거리를 넘어 주님의 은혜요 사랑임을 간증하는 가슴 벅찬 시간으로 선교사님의 눈시울을 적시며 끝내는 선교사님의 우람한 체격에 어울리지않는 아름다운 진주 이슬을 수없이 많이  만들고 말았다.  보고서를 외면하며 한마디 한마디를 가슴에 새기며 기억하던 가포 식구들도 흐르는 눈물은 감출 수가 없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탓에 서둘러 기도하시고 마치려고 하다. 더 듣고 싶어하는 질문 공세에 이어지는 선교사님의 대답아닌 간증이 우리를 더 기쁘게 했다

늦어진 저녁을 마치고  내일 있을 김치 바자회를 점검해 본다.  금요일이라 심야 기도회가 있다는 말에 피곤도 할찐데  말없이 교회로 모여든 식구들과 일본 성도들...

찬양이 찬양으로 이어지고 주님의 은혜는 기쁨으로 함께하며, 소심하여 조용하게 찬송을 부르기에 박수치며 찬양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던 일본 성도들도 성령의 인도함에는 어쩔 수 없나보다, 일어나 성령의 춤을 추며, 부끄럼없이 가포 식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미리 경험하는 천국의 모습 같아 보였다.

말씀듣고, 기도하며, 그리스도 안에선 모든 이들이 형제 자매임을 느끼는 시간이였다

숙소인 선교관에 돌아오니 또 허리와 다리가 통증이 온다.

 

2.  58( 토요일 )

새벽 4시가되니 동이 터온다. 다른 분들이 깰까봐 이불 속에서 꼼지락 거리며 통증 물리치료 운동을 해본다. 경건 예배를 마치고  식사를 한 후 바자회 준비에 모두가 바쁜 몸놀림으로 부산하다.

교회에서 200 M 정도도 않되는 음식물 마켓  외부 한쪽켠을 빌려 자리를 잡고 식탁으로 자판을 만들어  어제 종일 만든 김치와 오징어 젓갈, 돌 김을 전시하고,  해물 전을 몇개 만들어 시식도 해본다.

생각보다 바람이 많이부는 것이 심상치는 않으나, 그것보다 1시간도 안 지났는데 허리부터 통증이 몰려온다.

마트벽을 짚고 운동을 해본다. 그러다가 틈틈이 교회로 가서 엎드려서,  누워서 허리 보강 체조를 하니까 조금은 덜 한것 같다. 그러나 하루 해도 다 채우지 못하고 교회로 와 버렸다.

열심히 해물전을 만드시는 권사님들에게, 물건을 파시느라고 정신 없는 집사님들에게, 한명의 고객을 더 모셔 올려고 애쓰는 젊은분들에게, 바자회를 찾는 모든이에게 주님의 이미지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의 식구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시간들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한가지를 찾았다. 송 전도사님이 부탁한  동영상을 만들려고 했으나 내 실력으론 무리한 일이였다. 하는 수 없이 디카로 직은 파일만 아동부 까페에 올리고 주일날 성도들에게 보여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도사님이 볼수있도록 메모를 남겼다. 그러나 까페 특성상 500 KB가 넘는 파일이 올려지질 않았다.  급하게 거의 파장이된 바자회 장소로 뛰어가 150 KB 규격으로 몇장을 촬영해다가 까페에 올렸다.( 나중에 확인한 결과 기념예배때 화질을 높이지 않고 그냥 찍어 엉망이 되었다. .)

바자회는 생각 이상으로 성공했다. 오징어 젓갈은 오전에,  해물전은 오후에 추가로 반죽해서 만들었는데 그것도 3시경, 김치도 6시경에 매진되서 예정했던 8시에서 2시간 정도 일찍 마칠수 있었고 추가 재료 구입한 영수증을 제외하고도 17만엔(170만원) 정도의 판매액을 올렸다. 환호성이 터지고, 감사의기도, 찬양이 나왔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내일 있을 특별 찬양 준비로 , 바자회 성공을 위한 축하로 음악의 밤을 갖었다

게속되는 통증은 나로 하여금 일본을 등지고 귀국하고 싶은 마음으로  나를 유도해 가는듯 했다.

냄새가 나서 식구들에겐 미안하긴해도  통증을 가라앉칠 욕심으로 찜질 파스를 붙이고 잠을 청했다

 

3.  59( 주일 )

아침 아동부 예배를 드리고, 평소엔 1부는 일본인 예배로,  2부는 한국인 예배로  주일예배를 드리던 것을 오늘은 연합으로 드렸다. 가포식구들이 찬양을 불렀고, 이항무 목사님이 멧세지를 전했다. 찬송하는 시간엔 모두가 기립해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하는 모습들은 우리가 따라야 할 좋은 모습인 듯 하다. 

예배후 온 교우가 같이 중식을 먹고,  창립 1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했다. 청소하는 분들, 정리하시는 분들, 안내하시는 분들, 그리고 교우들이 한가지씩 준비해온 음식들을 채려 멋과맛을 돋구는 분들, 각기 자기일에 열심을 다하는 모습들이 아름답다.

기념 예배를 드리고 김소년 집사님과 박혜란 자매님이 먼저 귀국한다고  이슬비가 내리는 길을 나선다. 무사히 귀국길이 되길 바라며 만찬회를 마친후 가까운 목욕탕을 찾아가 피로를 씻어내고 왔다.

 

4.  510( 월 요일 )

엊저녁 부터 내리던 비가  멈추지않고 계속된다.

부지런을 떨어 봉고차와 일본 성도님의 승용차로 태평양 바다쪽  죠오시 마을로 향했다. 점점  빗줄기가 거세진다. 왕복 2차선의 좁은 길을 50km제한 속도를유지하며 지나는 길가엔 마을 입구마다 보여지는 납골당과 사당들과는 달리 교회의 모습은 보이지않는 영혼의 척박한 모습들 뿐이였다. 빗속에 앞서간 승용차를 놓치고 먼저 죠오시 마을에 도착했다.

안개 주의보를 알리는 등대의 우렁찬 고동소리에 놀라며 백악기때 형성된 기암석들을 대충보고나니 다른 차들이 합류하였다.  파도치는 갯바위에서 기념 촬영하는 젊은 층들의 용감 무쌍한 기개에 힘입어 갯바위족으로 내려간 권사님들 역시 해 맑은 바닷물과 어우러진 바위틈에 숨어있는 고동 줏기에 정신없었다.

자욱한 안개 숲을 빠져 나오며 아쉬움과 허전함을 느끼며 기사 식당인 우동 전문집을 찾아다. 반찬은 별로 없고 우동만 나왔으며 모두가 맛있어 하나  글쎄 그케나 맛 있었을까나???? 돌아오는 길에 우동맛을 더 느끼려는 듯 간장 공장을 견학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일본 전역 판매율 20%를 장악한다는데, 어느 자매 왈 "간장공장은 왜 왔냐고요?????"

그리고 해안선이 교차하는 강한 바람이 부는 전망대를 지나 꽃시장을 거쳐 타코 은혜교회를 찾았다. 아직은 섬기는 성도 한명없이 여자 선교 전도사님과 남편, . 이렇게 셋이 지키고 있다고 한다. 타코지역에 전도의 문을 열기 위한 전초 기지로 삼은 셈이다. 지역민들의 경계심 탓으로 아직 십자가도 못 세우고 자그마한 집 두어평두 안되는 거실에 성구와 강대상만으로 치장한 예배실은 한달에 두번만 전 선교사님을 모시고 예배드리고 두번은 나리따 교회에서 예배 드린다고 한다.

 

 

5. 511( 화 요일 )

아침식사가 끝나자 짐을 정리하고 교회 청소를 깨끗이 한 후 간단한 선물을 사러 옆동네 슈퍼에 가는 도중 순복음 교회가 눈에 들어와 반가웠다. 보기 힘들었던 교회의 모습이 아니던가, 정말 대한민국은 하나님께 복받은 민족이였다. 이웃하여 들어서는 수많은 교회가 있고 영적으로 잘 먹이는 선각자들이 범람하지 않은가. 그리고 따스한 사랑의 교회 식구들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몇가지 물건을 사가지고 돌아와 재 파송 예배라고 명명한  예배를 드리고 나리따를 향해 달리는 차창가에 도 다른 십자가와 교회가 보이길래 반가워했으나 결혼식 만큼은 기독교식으로 하는 것을 일본인들이 좋아하기에 예식만 행하고 예배는 안드리는 영업용  결혼식 전문 교회라는 소리를 듣고 씁쓸해하는 사이에 공항에 도착했다. 선교사님과 선교 센터 식구들과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탑승을 했다.  구름 아래로 멀리 보이는 이국의 모습과 눈 덮힌 산은 아쉬움이었고  선교사님들의 수고하시는 모습은 하나님께 영광이며  바라본 나는 부끄러움 이었다.

6시경 마산에 도착하여 식사를 하며  단기 선교에 대한 평가회를 아울러 가졌다

그리고 교회로 이동하여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