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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갈등의 재현 본문
태국 남부 이슬람지역의 유혈 사태 :
종교 갈등의 재현?(1)
이 병 도
한국외대 교수
외국학종합연구센터 연구부장
<byung001@hanafos.com>
동남아시아에서 최근에 발생하고 있는 유혈 사태는 이슬람교도들의 저항운동이 격화되면서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충돌에 이어 ‘아시아 내 이슬람 대 비이슬람’의 충돌이 벌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일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종교 갈등 재연 조짐
전 세계 이슬람교도 13억명 중 절반 이상인 6억 7,000여만명이 아시아 지역에 살고 있다. 3억 2,000만명의 아프리카나 1억 3,200만명의 중동보다 훨씬 많은 숫자이지만 이들은 그동안 비교적 평온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십자군식 대 테러 전쟁은 무슬림들에게 이슬람권의 민족의식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을 비호, 지원해 줄 이슬람 인구가 많은 동남아시아가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매력적인 곳으로 부상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2004년 4월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간 유혈사태로 20여명이 숨지고 150여명이 부상하는 등 ‘국지적 내전’으로 치닫는 양상을 보여 1999-2001년 9,0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가까스로 무마된 말루쿠(maluku)섬의 종교분쟁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또한 필리핀에서는 1969년 이슬람분리주의 단체인 모로민족해방전선(MNLF: Moro National Liberation Front)이 결성돼 그동안 무력 충돌로 5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 단체는 알카에다에 테러리스트들의 훈련장도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불교 국가인 태국에서는 무슬림들의 거주지역이 많은 남부에서 2004년초부터 크고 작은 유혈 폭력사태가 잇따라 왔다. 1월 27일 군과 경찰 시설이 괴한의 공격을 받아 6명의 군인이 살해되었으며, 학교와 관공서 등에서 동시다발적인 방화 사건이 일어나고 승려 3명이 살해되는 등 치안 상황이 악화되자 태국 정부는 이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 병력을 투입하였다. 그러나 이후 4월 28일 이슬람 무장세력이 경찰서와 군 검문소 등 15곳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 최소한 112명이 사망했으며, 10월 26일에는 무슬림 시위대와 진압군 간에 유혈 충돌이 일어나 6명이 죽고 2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체포된 78명의 무슬림들이 후송 차량 안에서 모두 질식사하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와 같이 동남아시아에서 최근에 발생하고 있는 유혈 사태는 이슬람교도들의 저항운동이 격화되면서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충돌에 이어 ‘아시아 내 이슬람 대 비이슬람’의 충돌이 벌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글에서는 태국의 경우를 사례로 최근 남부 무슬림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유혈 사태의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태국에서 종교적 갈등이 재현될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태국의 이슬람 문제를 진단해 보기로 하겠다.
불교국가인 태국에 무슬림?
동남아시아 내륙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태국은 전체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상좌불교(Theravada Buddhism)를 신봉하고 있는 불교국가로 잘 알려져 있다. 불교는 태국인의 정신적 지주이자 종교적 차원을 넘어선 하나의 생활철학으로서 태국인의 의식구조 및 생활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따라서 불교문화는 곧 태국인의 생활문화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태국인과 불교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태국에서 인구분포 상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타이족은 본래 중국 양자강 하류 운남성(雲南省)에서 7세기경에 난짜오(Nanchao)왕국을 건설하여 존속해 왔다. 그 후 몽고의 침략으로 점차적으로 남하하다가 현재의 땅으로 정착하여 13세기초 북부지역에 최초의 통일 왕국인 쑤코타이왕국(A.D.1238-1438년)을 건설하였다.
타이족이 인도차이나반도의 현 지역으로 정착하기 이전에 이 지역은 이미 크메르문화 및 먼(Mon)문화를 비롯한 여러 종족의 문화가 혼재하였던 곳이었다. 현재는 타이족 외에 중국인, 무슬림, 인도인, 라오인, 그리고 여러 갈래의 고산족 등 다양한 종족들이 각기 고유의 언어, 문화, 풍습을 유지하면서 태국 내 각 지역에 산재하여 거주하고 있다.
따라서 태국에는 불교 외에도 이슬람교, 기독교 그리고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고, 그 외 다양한 민간신앙들이 태국인의 생활과 직․간접적으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그 중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은 태국 전체인구 6,400만 중 약 4퍼센트인 250만명을 차지하여 불교도 다음으로 많은 종족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은 태국 내 40여개 도(道)에 고루 분포되어 있다. 태국인들은 이들을 통칭하여?타이무슬림’(Thai Muslim)이라고 부른다.
타이무슬림은 한 종족이 아니라 말레이무슬림, 인도무슬림, 파키스탄무슬림, 방글라데시무슬림, 중국무슬림 등의 서로 다른 종족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 말레이계 무슬림이 가장 큰 단일 종족집단을 이루어 타이무슬림 전체의 약 6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은 빳따니(Pattani), 얄라(Yala), 나라티왓(Naratiwat), 싸뚠(Satun) 등 주로 말레이시아와 국경에 인접한 태국의 남부 4개 도(道)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따라서 태국인보다 무슬림의 인구가 더 많아 무슬림이 다수종족을 형성하고 있고, 도처에 회교 사원이 널려 있으며, 또한 불교도와 다른 종교, 문화, 관습을 고수하고 있는 등 이들이 태국 내에 거주하는 소수종족의 하나로 비쳐지고 있어 이 지역을 여행하면 마치 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와 있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타이무슬림은 타 지역에서 현재의 태국의 땅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던 여타 종족과는 달리 타이족이 인도차이나반도에 정착하기 시작한 13세기 이전부터 이미 태국 남부지역에서 찬란한 문화와 문명을 누리며 살았던 토착민족이다. 그 후 이들 중 일부는 태국의 중부지역으로 진출하여 말레이반도로 경유하는 무역을 전담하면서 서서히 태국사회에 동화되어 갔다.
그러나 남부지역에서 왕국을 건설하고 정착해 살던 말레이계 무슬림들은 지리적으로 말레이시아와 인접해 있고, 역사적으로 말레이문화와 지속적인 접촉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말레이문화에 더 익숙해 있으며, 언어 또한 일상생활에서 태국어가 아닌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 언어 그리고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진 채 태국사회에서 이슬람이라는 신앙을 매개로 한 집단들로 구성된 소수종족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이와 같이 언어, 민족, 그리고 문화적으로 말레이세계의 일부라 할 수 있는 태국의 남부지역이 상좌불교 국가인 태국에 속해 있는 것은 과거 수 백년에 걸친 태국인들의 팽창주의적인 정복과 1909년에 체결된 태국과 영국간의 말레이반도 국경조약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토는 태국에 속해 있지만 역사, 문화, 언어 등의 정체성에 있어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태국불교도와 타이무슬림 간의 상호이질감은 결국 종족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래서 타이무슬림들은 오랫동안 태국으로부터 분리하여 독립적인 이슬람국가를 건설하려는 분리주의운동을 전개하면서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에 대해 초기에 태국정부는 강압적인 방법으로 타이무슬림을 태국사회로 흡수하려는 정책을 취했지만 오히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1980년대 이후부터 정부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무슬림사회에 어느 정도의 종교 활동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면서 교육정책을 중심으로 한 꾸준한 동화정책을 시도함으로써 무슬림과의 갈등을 줄이는데 상당한 효과를 보여 왔다.
태국의 이슬람 전파과정
태국 남부 4개 도의 국경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불충분하지만, 아유타야왕국(Ayuthaya, A.D.1350-1767년) 말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고대에 이 지역은 크게 두 지역 즉,?빳따니’(현재 태국의 빳따니도, 얄라도 나라티왓도)와?싸이부리’(현재 말레이시아 케다(Kedah)주 일부와 태국의 싸뚠도)로 나뉘어졌다.
빳따니의 경우, 역사학자들은 7세기경 말레이반도에 랑까쑤까(Langkasuka)왕국이 세워졌다고 하며 이 왕국이 빳따니의 전신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랑까쑤까왕국은 인도문명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와 브라만교를 믿었고, 랑까쑤까만(灣)은 지정학적으로 무역선들이 몬순계절풍을 피할 수 있는 대피처이자 중요 중계 무역항으로써 중국을 비롯하여 서양과 중동상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 후 랑까쑤까왕국이 멸망하고 씨위차이(Srivichai) 왕국(A.D. 7-13세기)이 들어서 영토를 빳따니, 말레이반도, 자바, 그리고 수마트라까지 확장하여 통치하게 됨에 따라 불교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 크게 확대되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이 불교왕국이 수마트라 남부에서 발흥하여 말라카 해협을 장악했던 스리비자야(Srivijaya) 불교왕국으로 이해하고 있다.
한편, 이슬람교가 13세기경 아랍상인에 의해 말라카 무역왕국을 경유하여 동남아에 전파되었다. 14세기 경 빳따니왕국의 건국과 때를 같이 하여 이슬람은 태국에 영향력을 뻗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빳따니왕국은 태국 이슬람의 총 본산이자 남부지역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빳따니왕국 역사에 의하면 왕국을 창건한 뚜낙파(Tu Nak Pa)왕이 심한 병이 들었을 때 차약 싸잇(Sheikh sa-id)이라는 무슬림이 왕을 완치시켰다고 한다. 그 후 그를 초빙하여 왕 자신은 물론 왕족과 귀족들에게 이슬람교를 가르치게 했고, 이에 국민들도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빳따니일대의 말레이반도지역이 태국의 영향력 하에 들어온 것은 쑤코타이왕국의 람캄행대왕(King Ramkamhaeng, 재위:1279-1298년) 때로 13세기말 람캄행대왕이 남부의 나컨씨탐마랏을 정벌하러 갔을 때 말라카해협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는 이미 이슬람이 전파되어 있었다. 당시 나컨씨탐마랏은 말레이반도와 싱가포르까지 영토를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빳따니지역은 쑤코타이왕국부터 태국에 예속되었고, 따라서 이슬람교는 쑤코타이왕국부터 태국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실 태국에 이슬람교가 언제 전파되었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랑까쑤까왕국의 건설과 때를 같이 하여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슬람은 태국에 두 개의 갈래로 전파되었다. 하나는 쑤코타이와 아유타야시대 태국에 무역을 목적으로 들어온 아랍상인이 소개하였다. 이들 중 몇몇은 관직에 등용되어 태국왕실로부터 이슬람사원의 건립, 종교활동 등의 보장을 받기도 했다.
또 하나의 다른 주장은 아랍국가와 인도를 통해서 이슬람이 전파되었던 자바, 쑤마트라, 그리고 말레이반도의 인접국가의 국민들과 태국 남부 지역주민들과의 접촉을 통해서였다. 어쨌든 이슬람교가 그 영향력을 확장하여 태국에 뿌리를 내리고 불교 다음으로 제 2의 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질적인 문화나 문명을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을 갖지 않고 자신들의 문화와 절충적으로 상호공존하는 태국인의 가치관 때문인 것으로 보여 진다.
한편, 쑤코타이왕국은 남부지역을 속국에 포함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빳따니는 쑤코타이왕국에게 3년에 한번씩 공물을 받쳐야 했지만, 대내적인 행정이나 통치는 술탄(sultan)이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쑤코타이왕국에 이어 아유타야왕국의 영향력도 말레이반도로부터 싱가포르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던 까닭에 빳따니는 물론 말라카도 한동안 아유타야왕국에 예속되었다. 그 후 아유타야가 타이만에만 무역을 독점하고 남부지역에는 소홀한 틈을 이용해 말라카왕국은 1460년부터 1511년까지 빳따니를 일시적으로 합병하기도 했다. 그러나 말라카가 1511년 포르투칼의 점령으로 식민지가 되자 빳따니는 다시 아유타야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아유타야왕국 때 빳따니는 쑤코타이왕국 때와 마찬가지로 속국의 위치에 있었지만 중앙정부와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간섭과 견제를 덜 받았다. 또한 당시 속국에 대한 통례적인 지배방식대로 대내적인 행정이나 통치는 술탄에게 맡겨 스스로 통치하는 자치권은 인정받고 있었으므로 빳따니는 고유의 역사, 문화, 종교, 풍습 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종주국인 태국과는 달리 문화적으로 불교가 아닌 이슬람교의 영향이 지속되었고 종족이 같은 말레이족이었기 때문에 자연 모든 면에서 말레이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767년 아유타야왕국이 버마에 의해 몰락되자 빳따니는 다른 남부지역의 여러 도시들과 함께 독립을 선언하였고, 태국정부는 버마와의 전쟁에 휘말려 한동안 빳따니를 비롯한 남부의 여러 지역들을 평정할 기회가 없었다.
이후 현 랏따나꼬씬왕국(1782년-현재)의 라마 1세(재위:1782-1809년)때인 1786년에 군대를 보내어 빳따니를 정복하여 쏭클라도의 관할을 직접 받도록 함으로써 태국정부가 직접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빳따니의 영주들이 수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키며 쏭클라도를 공격하는 등 통치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빳따니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남부지역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라마 2세(재위:1809-1824년)는 1809년에 빳따니를 7개의 소주(小州)로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이들 7개의 소주들은 쏭클라도의 관할 하에 통치되었고, 통치자는 태국인 관료가 아닌 태국정부에 충성하는 술탄이나 라자(Raja)를 임명하여 통치하게 함으로써 준자치권을 인정받아 내정 상 종주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어느 정도 독립을 누렸다.
그러나 라마 5세(재위:1868-1910년)때 태국은 각 지방을 효과적으로 중앙정부의 통제하에 두려는 행정개혁을 단행하여 지방의 영주가 절대권력을 가졌던 과거의 통치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이 몬톤제(Monthon: 管區制)를 설치함으로써 중앙집권화된 관료체제를 확립했다. 이 개혁의 일환으로 남부지역에 대해서 1902년?7개 소주지역 통치에 관한 법’ 을 공표하여 종전의 지방 왕족이나 영주들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켰다. 이에 실권을 빼앗긴 ‘라자’ 중심의 왕족들은 자치권 회복문제를 들고 나와 자신들의 움직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이에 동조하는 타이무슬림들과 함께 태국정부에 대항하였다.
* 이 글은 4개월 연재 시리즈로 게재될 예정임, 이번 호는 그 첫 번째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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