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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남부 이슬람지역의 유혈 사태 본문

선교 태국/펌) Deep South thai

태국 남부 이슬람지역의 유혈 사태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07. 3. 25. 11:12

2007.01.14. 02:53

 

태국 남부 이슬람지역의 유혈 사태 :

종교 갈등의 재현?(2)

이 병 도

한국외대 교수

외국학종합연구센터 연구부장

(byung001@hanafos.com)

동남아시아에서 최근에 발생하고 있는 유혈 사태는 이슬람교도들의 저항운동이 격화되면서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충돌에 이어 ‘아시아 내 이슬람 대 비이슬람’의 충돌이 벌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일고 있다

사실 1902년의 행정개혁은 타이무슬림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이유로는 첫째, 타이무슬림사회에서 전통적으로 권한을 행사하던 정치적, 종교적 엘리트그룹이 태국인 관료나 태국정부에 복종하고 충성하는 무슬림으로 대치되어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따라서 행정적, 재정적으로도 그들의 지위가 크게 위축되었다. 둘째, 타이무슬림에 대해 불교적인 가치관과 문화를 강요함으로써 태국인과 무슬림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러한 행정개혁은 타이무슬림에게 태국으로부터 분리하여 그들 자신의 독립된 자치정부를 세우려는 열망을 갖게 하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몬톤제는 태국에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다음해인 1933년에 폐지되어 몬톤은 짱왓(道)으로 변경되어 빳따니몬톤은 빳따니도, 얄라도, 나라티왓도로 분리됨으로써 태국정부의 직접 관할을 받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남부 4개 도 중의 다른 하나인 싸뚠도의 경우 원래 싸이부리(Saiburi)에 속해 있었는데 랏따나꼬씬왕국의 라마 3세 때부터 태국정부에 대해 자주 반란을 일으키자 싸이부리를 싸이부리, 꾸방까쑤, 뻐릿, 싸뚠으로 분할하여 각 도시마다 태국정부에 충성하는 말레이 영주의 후예들을 임명하여 나컨씨탐마랏주의 관할 하에 두었다. 그 후 1859년 꾸방까쑤는 싸이부리에 합병되었고, 1897년 라마 5세 때 ‘몬톤제’ 하에서 이들 지역들이 싸이부리몬톤으로 전부 합병되었다. 이어 1909년 영국과의 국경조정 과정에서 싸이부리와 뻐릿을 영국에게 양도하였고 싸뚠만 남겨 태국의 푸껫주의 관할하에 두었으며, 이후 1933년에 현재의 싸뚠도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타이무슬림의 사회․경제․문화적 상황

현재 타이무슬림의 대부분은 말레이계 무슬림으로 태국 내 다른 혈통의 무슬림이 대부분 태국사회에 동화된 것과는 달리 말레이계 무슬림은 현재에도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 문화, 전통을 고수하며 태국사회에서 특색 있는 소수종족의 하나로 남아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언급하는 타이무슬림은 말레이계 무슬림을 지칭함을 미리 밝혀둔다.

일반적으로 태국 남부의 국경지역이라 함은 빳따니, 얄라, 나라티왓, 싸뚠 그리고 쏭클라의 5개도(道)를 포함하는 북부 말레이시아와의 국경지방을 통칭한다. 이 중 쏭클라도는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남부 4개 도?라 지칭할 때 포함이 되지 않는다.

한편, 싸뚠도의 경우는 다른 3개 도와는 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른 3개 도의 주민들보다 월등히 높고 태국식 교육체제를 많이 수용하여 비교적 교육수준이 높은데 이는 그만큼 역사적으로 말레이문화의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다른 도의 타이무슬림보다는 말레이족으로서의 민족의식이 그다지 강하지 않다.   

이들 4개 도를 합하여 태국인들은 ‘씨짱왓팍따이’1)라고 부르며 인구분포상 불교도보다 무슬림이 더 많고 동일한 역사와 문화 및 전통과 관습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태국어가 아닌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있고, 그리고 과거 절대군주시대에 태국의 속국으로서 통치에 자율성을 가졌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남부 4개 도 무슬림의 인구분포

도(道)

면적(평방㎢)

총인구(명)

무슬림(%)

빳따니

2,041.42

1,133,577

77

나라티왓

4,502.43

1,209,382

78

얄 라

4,521.12

692,828

60

싸 뚠

2,478.97

419,269

64

출 처 : 태국 내무부, 행정국, 2005

이들 4개 도 중 빳따니도를 제외한 나머지 3개 도가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4개 도의 총 인구는 1999년 현재 약 340여만 명으로 주민의 약 70퍼센트가 이슬람교를 신봉하며, 이들 중 대다수가 태국어를 읽거나 쓸 줄을 모르며 또한 말할 줄도 모른다. 즉 일상생활에서 태국어가 아닌 말레이어를 쓰는데 야위(Jawi)라 칭하며 말레이시아 끌란딴(Kelantan)주에서 많이 사용하는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을 타이무슬림이라 부르며 이들의 언어는 물론 신앙, 풍습, 복장, 음식 등 불교를 믿고 있는 태국인들과 생활상의 차이점이 뚜렷하고, 지리적으로도 인접한 말레이시아사회와 더 밀접한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타이무슬림이라는 어휘를 거부하고 스스로 말레이무슬림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태국의 다른 종족의 하나인 중국인과 태국의 중부지역으로 진출한 무슬림들이 태국사회에 거의 동화된 것과는 달리 이들은 태국에서 태어나 태국인의 국적을 갖고 있으면서 태국사회로 동화하기를 거부한 채 자신들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며 이슬람에 대한 높은 긍지를 가지고 있다.  

4개 도의 총 면적은 약 13,600평방k㎡이며, 일반적인 지형적 특성은 평지 및 산, 구릉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거리상의 관계도 있지만 항로, 수로, 육로 등 교통이 말레이시아와의 접촉이 편리하게 되어 있다 이로 인해서 중앙정부나 다른 도보다도 말레이시아와 접촉이 잦고, 말레이시아로부터 문화영역과 생활영역에서 자연스런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으로 태국에 속해 있는 남부의 4개 도는 모든 면에서 태국보다는 말레이시아와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에 말레이세계의 일부라 할 수 있다. 이 지역의 무슬림이 일상생활에서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종교, 언어, 풍습 등의 면에서 말레이시아와 비슷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태국인이라는 의식보다는 말레이시아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타이무슬림 사회 역시 태국사회와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태국의 다른 농촌사회처럼 대가족제도를 형성하고 있고, 윗사람에 대한 공경심이 높으며, 가족구성원끼리 서로 협력하여 생계를 꾸려간다. 이들에게 이슬람교는 거의 절대적이어서 모든 생활이 이슬람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거의 드물다. 만약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결혼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배우자가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결혼한다. 무슬림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여 결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들은 아직도 결혼이나 유산상속 등은 꾸란의 계율에 따라 이루어지고 부인을 4명까지 둘 수 있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고 있다. 또한 술과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다른 국가의 무슬림 사회와 같다. 

이들은 촌락형태로 집단을 이루며 살고 있는데 대부분 태국불교도와 따로 떨어져 무슬림들끼리 살고 있다. 그 이유는 이들의 강한 배타성 때문으로 불교도들이 사는 마을에 무슬림들이 소수로 같이 사는 경우는 있어도 무슬림들이 사는 마을에 불교도들이 소수로 사는 경우는 드물다. 어떤 부락에서는 태국불교도와 무슬림들이 함께 촌락을 이루어 살고 있으나 상호교류는 흔하지 않다.

그러나 태국사회의 일부 촌락에서는 불교도와 무슬림들이 각기 군집(群集)하여 나름대로의 생활패턴을 고수하고 있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사회적 동질성을 위한 각종 의식을 통하여 좋은 유대관계를 갖기도 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이질적인 문화 또는 문명을 적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태국인의 성격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지만 남부 4개 도의 태국불교도와 무슬림 간 에는 전통, 종교, 신앙, 언어 및 역사적 의식에 있어 차이가 있게 됨에 따라 상호 몰이해(沒理解)와 더불어 사회적인 문제를 유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한편,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지역은 말라카(Malacca)해협과 끄라(Kra)협곡의 중요성이 특히 부각되었던 곳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인구도 많았고, 아시아무역의 중요한 항구로서 유럽과 중동 그리고 중국의 상인들이 많이 왕래하며 교역을 하였던 곳으로 경제적 부(富)를 누리던 이슬람왕국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현재는 태국에서 매우 낙후되어 있는 지역의 하나로 상권은 대부분 중국계 태국인이 장악하고 있다.

태국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남부 무슬림 지역은 여름과 우기의 두 계절만 있으며, 몬순계절풍의 영향으로 일년 내내 덥고 비가 자주 온다. 타이무슬림들은 대부분 촌락단위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지역이나 해안가에 거주하며, 주로 농업을 위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특히 고무재배가 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주업이며, 그 밖에도 소규모의 벼농사나 상업, 과수원, 커피재배, 광업, 그리고 고기잡이나 태국인 혹은 태국인들이 경영하는 공장의 고용인으로 종사하고 있다.

고무재배는 대부분 소규모인데 빳따니도에서는 벼농사 다음으로, 그리고 나머지 3개 도에서는 타이무슬림들이 가장 많이 종사하고 있는 생계수단이다. 따라서 고무가격의 변동이 이들의 수입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벼농사는 경작지가 매우 적어 자체수급이 어려운 실정이다.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접한 관계로 말레이시아와의 무역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어 고무, 주석, 망간, 과일 등을 말레이시아로 수출하고, 말레이시아로부터는 기계류, 소비재, 건설장비, 밀가루, 우유 등을 수입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규모 무역은 중국계 태국인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타이무슬림들은 단지 일상생활용품을 팔고 사는 정도의 소규모 장사를 하고 있어 경제적 수준이 매우 열악한 상태에 있다.

교육제도

일반적으로 타이무슬림들의 교육수준은 매우 낮고 문맹률도 70퍼센트 정도로 매우 높은 편이다. 이들에게는 말레이어가 모국어로 간주되며 일상생활에서도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태국어는 배울 필요성도 없다고 느끼고 있다. 이들이 사용하는 말레이어는 태국 쑤코타이왕국의 3대왕인 람캄행대왕이 태국문자를 창제하기 이전에 태국 남부지역에서 뿌리를 내린 언어이다.

타이무슬림들은 말레이어를 통해서 이슬람에 관한 교리와 지식을 배우기 때문에 말레이어를 이슬람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말레이어를 잃는 것은 그들의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타이무슬림의 약 30퍼센트 정도만이 태국어를 읽거나 쓸 줄 안다. 이들이 구사하는 말레이어는 말만 있고 문자가 없다. 이 때문에 야위라 칭하는 아랍문자로 표시하며 말레이어로 일상생활이나 종교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타이무슬림들은 어릴 때부터 뻐너(pondok)라는 전통적인 이슬람학교에서 이슬람에 관한 기본적인 교리와 교육, 수행방법 그리고 철학, 역사, 아랍어 및 기타과목 등을 배운다.뻐너에는 또크루(To' Guru, Tok Guru)라는 전통 이슬람교사와 우스따즈(Ustaz)라는 일반 이슬람교사가 모든 교육을 담당하며 이들은 이슬람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지도자들이다.

태국어로 뻐너는 ‘끄라텀’이라고 번역되며, 이는 초가집이란 뜻으로 무슬림을 교육시키는 학교를 의미하는데 우리나라의 옛날 서당(書堂)과 비슷하다. 이슬람교사가 각 가정을 다니며 개인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비효율적이자 대개 또크루의 집 주위에 작은 초가집을 세워 꾸란과 이슬람에 관련된 각종 관습을 가르쳤던 것에서 연유되었다.

뻐너라는 말은 이집트에서 처음 생겨나 말레이반도를 거쳐 태국에 들어왔으며, 남부 국경지역과 무슬림 거주지역에 처음 설치되었다. 뻐너가 없었을 때 타이무슬림들은 마을의 어느 일정한 집에서 한 명의 교사로 부터 꾸란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꾸란에 대한 교육은 번역이 없이 단지 암기만 하도록 했는데 그 이유는 꾸란에 쓰여진 언어가 아랍어였기 때문이다.

태국의 첫 뻐너는 아유타야왕국 때 빳따니에 설치되었고 이 때부터 또크루에 의한 교육이 실시되었다. 무슬림들은 또크루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갖고 자녀들을 뻐너에 보냈으며, 학생의 수가 많고 적은가는 전적으로 마을 주민들의 선호도에 달려 있었다. 뻐너의 학생들은 아랍어로 ‘빠께’라고 부르며 연령의 제한이 없이 입학할 수 있다. 또한 뻐너는 등록금이 없는 무상교육이며 교육에 소요되는 각종 경비는 ‘싸깟’이라 부르는 마을 주민들이 기부한 재산2)으로 충당한다.

타이무슬림 거주지역에 뻐너가 설치된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종교적 측면으로 무슬림에게 있어 꾸란은 ‘삶의 법전’이며 무슬림의 사상과 생활, 가치관, 행동방향 등을 정하는 지침이다. 따라서 뻐너에서의 교육을 통하여 이슬람사상과 이슬람교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것은 무슬림의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며,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마을 공동체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사회적 가치관의 측면으로 타이무슬림은 자녀들이나 자신이 돌보아야 하는 사람에게 꾸란에 규정되어 있는 이슬람교리를 올바로 지키고 수행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고자 한다. 무슬림사회에서 명예와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타이무슬림들의 최우선의 의무이자 가치관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 무슬림공동체에서 뻐너의 설립이 촉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경제적인 측면으로 뻐너는 무상형태의 교육방식이고 또크루는 강사료를 요구하지 않지만 모든 주민들의 존경과 칭송을 받으며 ‘싸깓’이라는 기부재산을 헌납받는다. 따라서 또크루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는 같은 공동체의 일반 주민들보다 높을 수밖에 없으며 이 점 역시 이들에 의한 뻐너의 설립을 촉진시킨 또 다른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초기에 설치된 뻐너는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뻐너에서의 강의는 말레이어와 아랍어만 사용하고 태국어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으며, 교육기간도 8년 내지 15년으로 일정치 않았고, 또한 교과과정, 교재, 교육계획 등에서 확실한 규정이 없이 교육에 관한 모든 것이 전적으로 또크루 개인에 달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뻐너에서의 교육은 교육내용이 꾸란의 교리와 일치하여 올바른 이슬람교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타이무슬림들의 선호도는 매우 높았다.   

타이무슬림의 자녀들은 의무적으로 태국식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는 하지만 교과과정이 이슬람교상의 교리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여러가지 규제를 받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대개 중도에 그만둔다. 또한 이슬람식 교육을 받는 것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고 체면이 선다는 가치관 때문이기도하다.

따라서 타이무슬림들이 뻐너에서 공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슬람식 풍습과 문화가 그들 사회의 행동방향을 정하는 지침이 되고 있고, 또한 자신들의 역사, 종교, 그리고 언어적인 특성을 지키고 이슬람을 통해 그들의 생존과 단결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이외에도 태국의 정규학교에서 교육시키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들고 수업시간이 자유로와 자유선호의식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타이무슬림의 성격과도 부합되고, 또한 일상생활에서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굳이 어려운 태국어를 배울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지 않다.

즉, 태국어를 잘 할 경우 그 자녀들이 이슬람의 전통적인 문화와 지식에 관심을 갖지 않고 태국화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일부사람들은 말레이어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의 언어인 것과 마찬가지로 태국어가 불교도의 언어라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태국어를 사용하면 불교도로 동화되고 이는 곧 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와 함께 종교적 이점을 얻는다는 부모들의 가치관은 많은 무슬림 자녀들을 뻐너에 보내 꾸란과 말레이어에 대한 공부를 더욱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타이무슬림사회에서는 뻐너출신의 졸업생을 더 선호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칭송하고 있다. 따라서 타이무슬림들이 이러한 뻐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교육을 고수하고 중요시했으므로 이들이 태국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갖거나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기 힘들었을 것은 자명하며 이러한 것은 대략 197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같이 타이무슬림은 어릴 때부터 뻐너 중심의 교육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신적,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언어적 특성을 가지고 그들의 생존을 위해 그리고 무슬림의 단결을 유도하기 위해 이슬람을 내세우며 태국사회에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율법 학습을 통해서 이슬람 근본 원리사상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만일 이슬람을 믿지 않거나 교리를 지키지 않으면 이슬람사회가 발전할 수도 또한 자신들이 생존할 수도 없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