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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군사쿠데타: 본문

선교 EH국/태국 이야기

태국의 군사쿠데타: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2. 2. 17. 23:12

나비효과 | 조회 13 |추천 0 | 2008.12.04. 12:19


태국의 군사쿠데타:
자유주의와 독재가 위기를 심화시키다


질레스 지 웅파코른 (Giles Ji Ungpakorn)
태국 쭐라롱껀대학 정치학과

 

 

 

개 요

 

9∙19 쿠데타는 태국 지배계급의 현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로부터의 이탈이 아니었다. 그것은 민주화와 사회정의의 구현에서 자유시장, 자유주의, 그리고 중간계급이 진보적 세력이 아님을 다시 한번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사회운동이나 민중운동이다. 쿠데타는 정치적 위기를 악화시켰다. 민주주의적 공간은 심각하게 협소해졌으며, 소위 “개혁과정”은 후퇴일로에 있다. 극도로 신자유주의적인 정권 하에서 불평등과 사회정의의 부재가 심해지고 있다. 남부에서 계속되는 국가폭력은 불교공동체와 이슬람공동체 간의 전쟁을 야기할 위험이 있으며, 군사정권은 향후 군주체제의 불안정성을 초래할 근거를 제공했다.

 

태국민주주의와 1997년 제정된 헌법을 파괴한 9∙19 쿠데타는 태국의 정치적 위기를 연장시키고 격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태국 자유주의의 본질과 ‘민주주의를 위한 민중연대 (Peoples Alliance for Democracy, PAD)’로 불리우는 반 탁신(Thaksin) 운동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나아가 쿠데타로 인해, 향후 민주주의의 발전과 끊임없이 변하는 군주의 역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자유주의와 9월 19일 쿠데타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외피를 내세우려 노력해왔으며,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냉전의 종식 이후 더욱 그러했다. 또한 자유주의는 냉전종식 이래 태국 지배계급의 주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가장 좋은 예로는 1997년 제정된 헌법을 들 수 있다. 이에 더하여, 1980년대 중반 이래 역대 정부들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에서는 자유시장을 주창하는 자유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9∙19 쿠데타가 발생했고, 수많은 자유주의적 학자들과 정치인들이 이를 지지했다. 이것은 자유주의의 진정한 본질, 즉 비민주적 본질을 폭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탁신 정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2005년과 2006년에 유권자의 확실한 과반수가 탁신을 지지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게다가 그 선거에서 결과를 바꿀 만큼 심각한 부정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그러므로 쿠데타는 인구 과반수의 민주주의적 소망을 무시한 폭력적 행위였다.


9∙19 쿠데타의 주도세력은 군부 및 민간 엘리트 중 반민주적 집단들, 불만을 품은 재계 지도자들, 중간계급, 그리고 민주주의자당(Democrat Party) 소속의 신자유주의적 지식인과 정치인 등이었다. 민주주의자당의 부당수인 코른 차티카바니(Korn Chatikavanij)에 의하면, “탁신을 제거할 입헌적 방도가 없었다.” 또한 코른은 정치적 “안정성”을 수립하려 노력하는 군사정권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국왕 역시 쿠데타를 지지했다.


국왕과 주요 군부 및 관료 엘리트들이 민주주의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1991년 쿠데타가 발생하고 그로부터 1년 후인 1992년 군부를 전복시킨 대중운동이 일어난 이후, 군은 정치에서 철수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허나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군부 및 관료 엘리트들이 전적으로 독재에만 매달리는 것도 아니다. 탈냉전시대 태국 지배계급의 새로운 전략은, 만약 민주주의적 과정이 권력과 지위와 부를 잡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면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트층 내부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와 독재에 대한 지지 사이에 잠재적인 갈등이 존재하며, 이는 중간계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선두에는 언제나 중간계급이 아니라 사회운동과 민중운동이 있었다.


모든 쿠데타 지지집단들은 빈민층에 대한 경멸과 증오를 공유한다. 따라서 이것은 계급문제이다. 사회정의와 민주주의는 상호 분리될 수 없는데, 바로 이것이 엘리트들 사이에 민주주의와 독재 간의 갈등이 존재하는 근본이유이다. 엘리트층과 중간계급은 “지나친 민주주의”가 빈민층 유권자들에게 “지나친” 권력을 주고, 정부로 하여금 복지에 “과잉지출” 하도록 부추긴다고 생각한다. 탁신의 임기 전반에 걸쳐, 신자유주의적 학자들과 정치인들은 ‘타이 락 타이 (Thai Rak Thai) 당’이 이끄는 정부가 대중적인 사회적 지출에 관하여 “재정준칙 (fiscal discipline)”을 지키지 못한다고 항상 비판했다. 2007년 헌법의 초안에는 신자유주의적 문구인 “재정준칙”이 여기저기 세 차례나 언급되지만, 군비지출 증대의 필요성을 언급할 때에는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자유주의자들은 태국이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계몽된 중간계급 및 상류계급”과 “자신들의 표를 팔고 후원-수혜관계의 함정에 빠진 무지한 농촌 및 도시 빈민층”으로 분리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이다. 빈민층이야말로 민주주의가 노동권, 보다 나은 사회정의와 소득분배, 그리고 빈민층에 귀 기울이는 정부를 가져올 것임을 이해할 가능성이 더 높은 계층이다. 반면 중간계급과 엘리트층은 기꺼이 쿠데타를 지지하고 기득권층의 후원 네트워크, 즉 ‘센사이(Sen Sai)’ 체제로부터 수혜를 받는다. 국영기업의 이사들을 군부가 임명하는 관행은 그 한 예에 불과하다.


경제위기와 타이 락 타이 당의 창당 이전인 1995년, 아네크 라오타마타스(Anek Laothamathas)는 태국 민주사회 내의 주요 분열을 분석하고자『두 민주도시 이야기 (The Tale of Two Democratic Cities)』를 출판했다. 태국정치의 “두 민주도시”는 도시와 농촌이다. 이 책은 자유주의적 학자들의 “성서”가 되었다. 아네크에 따르면, 농촌유권자들은 대부분 소농이고 도시 유권자들은 “중간계급”이며, 농촌유권자들이 많은 선거구들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면서 정부 선출권을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선출한 정부들은 대개 부패했고 금권정치에 깊게 연루되었다. 아네크의 관점에서 보면, 농민들이 이러한 정치인들에게 표를 던진 이유는 그들이 지역공동체를 도왔던 경력으로 입증된 빈민층의 “후원자”였기 때문이다. 아네크는 농민들이 정책에 대한 “독립적 사고”에 따라 투표한 것이 아니라 후원자들에 대한 의무에 묶여 있다고 믿었다.


아네크는 교육수준이 높은 도시 중간계급이 독립적 사고와 강한 “정치적 도덕성”을 가지고 정부와 정치인들을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도시 중간계급은 여러 정당들의 정책에 대한 심사숙고 후에 투표에 임하며, 농촌빈민층이 선출한 정부가 부패하고 부도덕한 것으로 판명되었을 때 거리시위에 참여하여 부패한 정부를 타도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나쁜 상황에 대한 아네크의 해결책은 태국사회 내의 두 부분 간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 말은 국가가 농촌개발 프로젝트를 증대시켜서 농촌을 보다 도시처럼 만들고, 기술발전을 통해 농촌을 자본주의시장에 연결시켜야만 한다는 뜻이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정당들이 분명한 정책을 창출하고 새로운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일이다. 이러한 방법들이 합쳐진 결과, 후원-수혜관계가 약화되고 표를 파는 행위가 감소하리라는 것이 아네크의 주장이다. 타이 락 타이 당은 이 책이 태국정치의 발전을 위해 제시한 주요 제안들을 모두 열심히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AD가 탁신 정권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자유주의적 학자들과 일부 사회운동가들은 농촌빈민들이 민주주의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리석고, 타이 락 타이의 인민주의적 정책들을 통해 탁신의 신생 후원-수혜체제에 구속되었음을 “입증”하기 위해 아네크의 책을 종종 인용했다. 초창기에 도시 중간계급이 대대적으로 탁신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편리하게 잊혀졌다. 정치적 후원에 대한 정의는 너무나 왜곡되어서, 자유주의적 학자들은 대중적인 사회정책을 추진하는 모든 정부들은 후원-수혜체제를 구축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후원-수혜관계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민주주의”에 대한 대체적인 정의와 별반 다르지 않다. “후원-수혜체제”의 엄밀한 개념은 지방의 정치적 보스와 그의 선거구민들 사이의 개별적 관계를 지칭한다.


군사정권이 “현대자본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은 잘못된 관점이다. 실제로 신 군부가 임명한 내각은 신자유주의자들로 완전히 채워졌다. 첫 재무부장관이었던 프리디야토른 데바쿨(Pridiyathorn Devakul)은 “신자유주의 재정준칙”의 신봉자였다. 그는 공중보건에 대한 “지나친 지출”에 반대했다. 쿠데타 이후, 예산청은 타이 락 타이 당이 기획한 일반의료보험 예산을 23% 감축한 반면, 군비는 30% 인상했다. 그리고 이를 감추기 위해, 건강보험료 30바트를 삭감하고 의료보험체계를 무료로 만든다는 계획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의료의 질이 떨어질 것이고, 앞으로 신자유주의자들은 의료보험대상을 “극빈층”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요구할 것이다. 이후 프리디야토른은 사임했으나, 사임이유는 그의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군사정권과 대립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능력 때문이었다.


외교부장관과 상무부장관은 대중적 인기가 없었던 자유무역협정(FTA)을 지지했다. 군사정권은 일본과의 FTA를 공적 협의 없이 무리하게 밀어붙여 가결시켰다. 에너지장관은 마가렛 대처의 민영화 정책을 광적으로 추종했다. 전력과 철도의 민영화가 추가로 발표되었고, 연료비 지원이 삭감되었으며, 대학의 민영화(“자치”)를 위한 법안이 군부에 의해 임명된 의회에 상정되었다. 군사정권의 독재자들은 두둑한 봉급을 챙김으로써 배를 곯지 않을 것임을 확실히 했는데, 이 자금이 전임 정부의 빈곤층 지지정책 예산을 삭감함으로써 충당되었으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군사정권의 벗들인) 군 간부들은 국영기업 이사로 임명되었고, 이들은 동시에 여러 회사에서 상임이사에 해당하는 봉급을 받았다. 이들이 한 기업의 상임이사로서 받는 봉급은 최소임금의 20배가 넘었다.

 

 


“충족 (Sufficiency)”

 

정부는 한편으로는 자기 잇속을 챙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충족”과 비 탐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국왕의 철학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메시지는 군사정권의 지지자들이 아니라 빈곤층을 겨냥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충족 수준에 만족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오웰 식으로 표현하자면, 일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충족”하다. 국왕에게 “충족”이란 여러 채의 궁궐과 시암상업은행(Siam Commercial Bank)를 포함한 자본주의 대기업들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했다. 군사정권에게 충족이란 동시에 여러 기업에서 분에 넘치는 봉급을 받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가난한 농민에게 충족이란 농업에 대한 현대적 투자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재무부장관은 충족의 경제학이란 “너무 많지도 않고 너무 적지도 않은”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딱 필요한 만큼만 받는다는 뜻이다. 또한 충족의 경제학은 자유시장정책과 더불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도 설명했다. 폴 핸들리(Paul Handley)가 충족의 경제학은 “사이비 경제학”이라고 표현할 만했다. 더 나아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그것을 “국왕의 후원을 받는 뉴 에이지 와플 (new-age waffle)”이라고 불렀다. 이 잡지는 1달러 이하의 비용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30바트 건강보험제도, 빈곤의 급격한 감소, 공공부채의 삭감, 강력한 외환보유고, 그리고 거의 매해 정부잉여물품을 남겼던 탁신 정부의 5년에 걸친 경제실적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했다.


아네크 라오타마타스, 티라유트 분미(Thirayuth Boonmi), 그리고 1991년 집권한 군사정권 하에서 수상을 지냈던 신자유주의자 아난 파냐라춘(Anan Panyarachun) 등과 같은 자유주의적 학자들은 이제 쿠데타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아시아적 가치’라는 개념을 선전하고 있다. 그들에게 태국식 민주주의는 시대의 질서이다. 아네크는 태국에 필요한 것은 선출된 정부가 국왕과 권력을 공유하는 “혼합된” 제도이며, 타이 락 타이 당의 인민주의는 “제3의 길” 식의 사회복지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네크는 토니 블레어 영국수상의 정신적 지도자인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열렬한 찬양자이다. 제3의 길은 사회민주주의적 가치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속을 상징한다.

 

 


자유주의적 맥락에서의 탁신 정부에 대한 이해

 

탁신 쉬나와트(Thaksin Shinawat)는 1997년의 경제위기 이후 타이 락 타이 당을 설립했다. 이 당은 상당한 시간을 들여 실제로 정책을 수립했다는 측면에서, 근래 태국의 정치사에서 독특한 정당이다.  이들은 다양한 사회집단들과 회합을 갖고, 2001년 선거에서 처음 승리할 당시 진짜 정책들을 제시했다. 타이 락 타이는 국가의 돈을 지방프로젝트에 투입함으로써 빈곤층 지지정책을 실천하고 마을 단위에 케인즈주의적 경제발전을 촉진한 “인민주의” 정당이었다. 그 목적은 경제위기 이후 사회적 평화를 구축하여 정부가 태국의 경제적 경쟁력을 증대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대기업을 대변하는 타이 락 타이 당은 민영화나 FTA 지지와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들도 추진했다. 당은 이것을 “이중궤도 (dual track)” 정책이라 불렀다.


태국 유권자층의 압도적 과반수를 차지하는 빈민층은 타이 락 타이의 두 가지 주요정책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태국에서 최초로 시행된) 일반의료보험제도와 소규모 자영업을 권장하기 위해 각 마을에 대여되는1백만 바트 기금이 그것이었다. 당은 2005년 의회 다수당으로 재선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최대 야당인 민주주의자당이 의료보험제도와 기타 사회보장제도들을 4년 동안 줄기차게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야당은 정부정책이 “재정준칙”에 위배된다고 비판했고, 티라유트 분미나 암마르 시암왈라(Ammar Siamwalla)처럼 군사정권을 지지하는 저명한 자유주의적 학자들은 마가렛 대처를 모방하여 “의존성의 풍조 (climate of dependency)”를 언급했다. 그 이전에 경제위기 직후 집권했던 민주주의자당 정부는 재정체계를 지탱하기 위해 빈곤층이 납부한 세금을 사용했다. 은행들은 부유층의 엉뚱한 추측으로 인해 닥친 부실채권위기에 빠졌다.


물론 인민주의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탁신 정부에게는 매우 비열한 측면이 있었다. 첫 번째 집권기에 탁신은 이른바 “마약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재판조차 없이 총살에 처했다. 태국 최남단의 세 개 주에서, 정부는 이슬람교를 믿는 말레이족에 대한 폭력적 작전을 벌였으며, 탁바이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 끔찍한 예이다. 또한 정부는 남부출신 사람들을 변호하던 피고측 변호인 솜차이 닐라파이치트(Somchai Nilapaichit)가 경찰에 의해 살해된 사건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신을 몰락시킨 군사정권은 전임 정부가 저지른 3,000건이 넘는 비사법적 살인을 진지하게 다룬 적이 없으며, 남부에서의 폭력은 현재 더욱 악화된 상태이다.


2006년 초의 정치적 위기 이전에 탁신 정부가 의회 내에서 압도적 다수였던 까닭에, 타이 락 타이 당은 정치사회와 독립적 기관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탁신 소유의 기업도 언론사의 지분을 매입하고, 광고수주를 철회하겠다는 위협을 통해 언론이 정부를 지지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이것이 “의회적 독재”였다거나 탁신 치하에서 “민주주의가 전무”했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다. 탁신의 권력은 궁극적으로 선거에서 타이 락 타이 당에 표를 던진 빈민층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것은 오로지 총에 의존한 군부의 권력기반과 확실히 대조된다.


태국정치의 근본적인 문제는 빈민층에 대한 무시가 아니다. 그것은 부유층과 중간계급의 오만함, 그리고 정치적 대표체계에 거대한 단절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태국에는 대기업을 대표하는 인민주의 정당들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노조운동이나 소농운동을 대표하는 대중정당이 없다.

 

 


“탱크 자유주의자 (Tank Liberals)”

 

오늘날 태국에는 “탱크 자유주의자”라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수년간 자신들이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 속에서 시험에 처해지자, 이들은 빈민층 대신 군사쿠데타 세력 측에 섰다. 반면 사회주의자들은 ‘쿠데타에 반대하는 9월 19일 네트워크 (19th September Network Against the Coup)’의 활동이나 ‘타이사회포럼(Thai Social Forum)’의 진보적 운동을 통해 공개적으로 쿠데타에 반대했다. 이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탁신에 대한 반대와 쿠데타에 대한 반대는 양립 가능하다. 이 두 입장이 상호 배타적으로 되는 것은 빈민층의 편이 아니라 부유층과 현상유지의 편에 서고자 하는 경우뿐이다. 쿠데타는 빈민층의 의결권을 두려워하고 이 의결권을 타이 락 타이가 이용할 것이라 우려하는 엘리트들과 신자유주의 세력이 함께 뭉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군사정권이 임명한 의회의 안팎에서 군사정권과 결탁한 자유주의자들의 명단은 수치스러운 명단이다.

 

군경 간부들 및 고위 기업인들과 친하게 접촉하는 저명인사들은 다음과 같다:

암마르 시암왈라, 프라툼포른 우차라사티엔 (Pratumporn Wucharasatien),

코톰 아리야 (Kotom Ariya),

소폰 수파퐁 (Sopon Supapong),

차이-아난 사무트와니트 (Chai-anan Samutwanit),

바오른사크 우완노 (Bawornsak Uwanno),

우티퐁 프리아프제라와트(Wutipong Priapjeerawat),

위타야코른 치엥쿨 (Witayakorn Chiengkul),

숭시트 피리야룽산 (Sungsit Piriyarungsan),

수지트 분봉카른 (Sujit Boonbongkarn),

수라퐁 자이야르나름 (Surapong Jaiyarnarm),

수리차이 완케오 (Surichai Wankeaw).

 

기타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는 탈근대주의자인 차이얀 차이야포른(Chaiyan Chaiyaporn)과 빈민의회(Assembly of the Poor)의 학계 고문인 프라파르트 핀토프탱( Prapart Pintoptaeng)을 들 수 있다.


자유주의가 9∙19 쿠데타에서 배운 교훈은 명백하다. 타이 락 타이 정부의 인기 높은 케인즈주의적 사회복지정책을 전복시키기 위해서는 군사쿠데타가 필요했다. 따라서 자유주의와 자유시장은 군사주의 및 독재와 보조를 맞춰야 한다. 이에 대해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자유시장이 훼손시킨 것은 국가주권이 아니라 민주주의이다.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숨겨졌던 주먹이 미리 준비된 일을 시작한 것이다 …… 오늘날  기업의 세계화는 빈국에서 인기 없는 개혁을 억지로 밀어붙이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충직하고 부패한 권위주의 정부들의 국제적 연합을 필요로 한다.”


자유주의는 언제나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현실의 증거를 살펴보면, 대다수 빈민들에게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언제나 투표권의 문제였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많은 나라에서 그 권리는 오직 대중투쟁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의 일관된 주장은, 빈민들은 민주주의를 재산에 대한 도전수단으로 이용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직 민주주의를 위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중운동과 민주화

 

9∙19 쿠데타에 관해 흥미로운 점은 국왕의 지지를 얻었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적 이상에 기반한 합법성을 주장해야 했고 민중운동 주요부문의 지지에 의존해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시민사회 내의 사회운동과 “민중운동”의 역할은 대부분의 쿠데타 분석에서 누락되어 있다. PAD의 “환영”이 없었다면, 쿠데타를 창출한 반 탁신 대중운동은 권력을 잡을 자신감을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1970년대 군부통치시기 이후 태국은 변화해왔다. 민중운동은 정치적 결과를 결정하는 핵심요소이다. 따라서 이 운동의 정치적 지향은 민주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요인이다.

 

 


탁신 정부에 대한 민중운동의 반대

 

기업공동체와 달리, 민중운동은 탁신 집권기간 동안 정부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노동계급이 탁신 정부에 대항하여 벌였던 반정부운동 가운데 최대규모의 활동은 2004년 20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전력민영화 반대운동이었다. 그로 인해 민영화계획이 연기되었고 노동운동은 활성화되었다. 또한 치앙마이에서도 태국-미국간 FTA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있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정부정책에 대한 소규모 저항운동이 정기적으로 발생했다.


2005년 말에 이르러, 탁신 정부에 대한 새로운 대규모 반대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언론제왕인 손디 림통쿨(Sondhi Limtongkul, 군사정권의 수장인 손티(Sonthi) 장군과 구별할 것)이 이끄는 우익운동이었다. 손디 림통쿨은 예전에 탁신의 친구이자 동업자였으나, 이후 서로 증오하는 라이벌이 되었다. 이 운동은 정부의 부패를 비판하고 “국왕에게 권력을 반환”할 것을 요구하면서, 1997년 헌법 제7조에 의거하여 국왕에게 새로운 정부를 임명할 것을 강권했다.


불행하게도, 민중운동 우익의 자유주의적 부문이 이 반대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정하면서 PAD가 설립되었다. 이들은 민중운동이 독립적으로 활동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손디의 반대운동을 탁신을 몰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보았다. 이들은 어떠한 전제조건도 없이 이 범계급적 연합에 동참했다. 많은 반대자들이 “국왕”을 상징하는 노란색 셔츠를 입었다. PAD의 정치활동이 군사쿠데타로 가는 길을 닦았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쿠데타 공모자들은 PAD와 이를 지지하는 도시 중간계급이 자신들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가 정점으로 치달았을 때, 탁신은 의회를 해산시키고 2006년 4월 선거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다. “국민에게 권력을 반환”하자는 그의 주장은 “국왕에게 권력을 반환”하자는 PAD의 주장과 대비된다. 그러나 투표소에서 탁신과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잡는 대신, PAD와 우익야당들은 선거를 보이코트했다. 선거는 정부에 대한 단순 국민투표로 대체되었다. 결국 1,600만 명의 국민들이 타이 락 타이 당에 찬성했고, 1,000만 명은 정부에 대한 투표에서 “기권”했다.

 

 


왜 자유주의적 정치가 민중운동에 영향을 끼쳤는가

 

왜 태국 민중운동이 우익의 자유주의적 정치의 영향력에 노출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80년대 초반에 붕괴된 태국공산당(Communist Party of Thailand, CPT)까지 역사를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1960~70년대 내내 스탈린주의-모택동주의 노선을 따랐던CPT는 민중운동에 대해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다. 세계 각국의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태국의 활동가들도 CPT의 몰락에 대해 그것이 실패라는 점과 그것의 본질이 권위주의적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대응했다. CPT의 부정적 유산 때문에 자치주의, 탈근대주의, 그리고 제3의 길 개혁론이 태국 민중운동을 지배하게 되었다. 자치주의는 정당조직을 거부했다. 또한 자치주의와 탈근대주의는 권위주의적인 CPT 내에서 “위로부터 지시”되는 것으로 보였던 정치일반론의 수립을 거부했다. 제3의 길 개혁론은 과거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따라 자본주의 개혁을 신봉했던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에 항복했음을 뜻했다. 이들의 논리는 “공산주의” 몰락 이후 “더 이상 자유시장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론들은 모두 자유시장 및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쪽으로 귀착되었다. 운동이 대안적 “이론”이나 “거대담론”을 수립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자유시장을 지향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겨난 비정치(non-politics)의 공백 속에서, 자유주의가 운동을 지배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 전반적인 결과물은 탈정치화되고 단일문제의 해결에 집중하는 운동이었다. 민중운동이 독립적 이론(또는 이론들)의 필요성을 거부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와 농민의 정당을 수립할 필요성도 거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6년 10월 개최된 태국사회포럼에서 타이 락 타이와 쿠데타를 지원하는 보수적 엘리트들에 대한 명확한 정치적 대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는 사실은 상황이 변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의 쿠데타 지지는 두 가지 모순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편으로는, “탁신에 대한 민주주의적 대안의 부재”를 수용한 민중운동의 일부가 군사정권이 수립한 기관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을 제외한 민중운동의 많은 부문이 자유주의자들을 이전보다 훨씬 더 적대시하고 경계하게 되었다. 이 두 번째 효과의 구체적 결과는 태국사회포럼의 논의에서 시작된 민중의 독립적인 정치개혁과정, 그리고 군사정권의 헌법초안을 거부하는 운동으로 나타났다.

 

 


PAD의 정치

 

PAD는 탁신 정부에 반대하는 인민전선운동으로서, 사업가 손디 림통쿨과 연합한23개 민중조직들로 구성되었다. 그 주된 대중기반은 방콕의 중간계급이었다. PAD는 2006년 2월에서 4월에 걸쳐 탁신 정부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들을 조직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집회에는 10만 명이 참석했다. PAD의 지도자는 다음의 다섯 명이었다: 손디 림통쿨, 참롱 시무앙 (Chamlong Simuang), 솜사크 코사이수크 (Somsak Kosaisuk), 피포프 통차이 (Pipop Tongchai), 솜키아트 퐁파이분 (Somkiat Pongpaiboon). PAD의 대변인은 수리야사이 타카실라(Suriyasai Takasila)였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사업가 손디 림통쿨이 자신의 언론매체를 통해 운동에 필요한 자금과 홍보를 제공했다. 따라서 그가 PAD 의 정치활동을 지시했고, 다른 네 명의 지도자들은 집회에 지지자들을 동원하는 일을 도왔다. 이것은 이제는 없어진 CPT를 포함하여, 과거 스탈린주의 및 모택동주의를 지향하는 좌파들이 종종 선호했던 “범계급적 인민전선”의 고전적인 사례이다. 이는 필리핀의 반 아로요 운동과 비슷한 경우이다. 모택동주의를 따르는 필리핀공산당은 노동자와 농민의 운동을 건설하자는 라반 응 마사(Laban ng Masa)의 주장 대신, 소위 “진보적 부르주아”와 함께 PAD와 유사한 연합을 형성하기로 선택했다. 태국에서는 솜사크 코사이수크와 솜키아트 퐁파이분이 CPT 에서 비롯한 스탈린주의 이념의 영향을 받았다.


PAD의 경우, 민중운동과 NGO 및 다양한 사회운동단체들의 최고부문들이 손디와 손을 잡음으로써 만들어졌다. 이들은 독립적인 계급적 토대에 기반하여 탁신 반대운동을 동원하기에는 민중운동이 너무 취약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또한 많은 활동가들은 거대한 언론매체를 소유한 손디와 협력하는 것이 현명한 전술이라고 믿었다.


민중운동이 단일문제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파편화되고 어떠한 통일된 정치이론이나 정당도 무정부주의적으로 거부한 점을 고려할 때, 운동세력이 독립적으로 활동하기에 너무 취약하다는 관점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특히 탁신 시기 계급운동의 현실을 간과하는 것 또한 심한 과장이다. 운동을 취약한 것으로 보는 문제에서 중요한 측면은 PAD 내의 민중운동 대표들이 진정한 대중기반을 결여했다는 점이다. 솜사크, 피포프, 솜키아트 등이 좋은 예이다. 이들이 대표하는 운동단체들은 대중동원을 위해 다른 조직들에 의존하고 있다. 솜키아트는 탁신 정부가 권좌에 오른 이후 줄곧 자신과 다른 활동가들이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농민들을 동원할 수 없었다고 오랫동안 불평해왔다. PAD 내에서 솜사크가 취약한 입지와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동원하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PAD 운동이 노동계급 및 빈민층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들을 얘기하는 대신 중간계급 및 기업가계급의 문제인 탁신의 부패에만 전적으로 집중했다는 사실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탁신의 부패문제와 이익갈등은 탁신 집단이 부의 떡고물을 나눠먹는 과정에서 제외된 기업인들에게는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다. 부패에 대한 문제제기에 얼마나 진정성이 결여되었는지는 타이 락 타이 당 소속 전직의원이자 부패정치인인 사노 티엔통(Sanoh Tientong)이 PAD 집회에서 영웅처럼 환영 받았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반 탁신 운동이 민영화된 산업이나 언론을 감독하는 각종 기관과 같은 소위 “독립적 기관들”에 대한 탁신의 지배를 호들갑스럽게 비판한 이유는, 이러한 기관들이 전체 인구를 (즉 노동자와 농민을 제외한 인구를) 대표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탁신이 라이벌 관계에 있는 자본가 이익집단들을 배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PAD의 진정한 대중기반은 민중운동이 아니라 중간계급이었다.


PAD가 이용한 범계급적 전략의 비극은 정치적 리더쉽을 손디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은 PAD 요구의 본질 때문에 민중운동 내에서 자신들의 대중기반을 더욱 약화시켰고, 점점 더 도시 중간계급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종국에는 군부에까지 의존하게 되었다. PAD 지도부는 빈민층이 “정보의 부재,” 즉 어리석음 때문에 탁신을 뽑았다고 비판하면서 빈민층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고전적인 신자유주의적 방식으로 탁신의 빈민층 지지정책을 “국가재정에 나쁜” 것으로 묘사했으며, 이른바 ‘빈민단 (Caravan of the Poor)’의 일원으로 탁신을 지지하기 위해 방콕에 온 빈민들이 단지 “돈으로 동원된 폭도”에 불과하다고 중상모략했다. 타이 락 타이 당이 이 빈농들에게 여행경비를 지불했을 수도 있으나, 손디 역시 PAD의 시위비용을 지불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양쪽 경우 모두, 참여자들이 진정으로 믿음을 가진 자원봉사자들이 아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협소해지는 민주주의적 공간과 계속되는 정치적 위기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은 소위 “의회”를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채웠다. 임명된 의원들 중 1/3은 군부 및 경찰 출신이었고, 과거 민중운동에 속했던 자유주의적 학자들과 일부 변절자들이 이에 합류했다. 언론과 인터넷에 대한 정부검열은 광범위하게 확대되었다. 군사정권은 친구들과 아첨꾼들을 골라서 소위 “헌법기안위원회”를 구성했다. 새로운 군사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과정은 대중적 참여를 통해 이루어진 1997년 헌법의 제정과정과 명백하게 비교되었다. 헌법기안위원회의 100명에 이르는 위원들 가운데 거의 절반이 공무원이나 기업가 겸 정치인들이었고, 20%는 대기업 총수들이었으며, 나머지는 학자나 언론인들이었다. 사회운동이나 노조 또는 NGO 대표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AD 및 ‘대중민주주의운동(Campaign for Popular Democracy)’ 출신의  수리야사이 카타실라는 <방콕 포스트 (Bangkok Post)>와의 인터뷰에서, 위원회에는 사회 각 부문이 “공평하게 대표”되었기 때문에 “낙관적”이라고 말했다.


1997년 헌법의 주된 결점은 자유시장을 지지하고, 강력한 행정부를 권장하며, 거대정당을 선호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타이 락 타이 당이 의회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 하나 받아들일 수 없는 조항은 노동자와 농민의 선거권을 박탈한 것이었다. 도시 노동자들이 농촌 선거구까지 가서 투표하는 방식을 선택한 탓에 노동계급의 투표권이 희석되었으며, 투명성과 책임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운동 대신 엘리트들이 임명된 독립적 기관들에 의존한 것도 문제였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관심은 오직 타이 락 타이 당이 향후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4월에 공개된 2007년 헌법의 초안에 명백하게 반영되어 있다.

 

 


군사정권의 2007년 헌법 초안

 

군사정권의 헌법초안은 2007년 4월에 공개되었다. 이것은 군부와 엘리트와 대기업을 위한 헌법이다. 민주주의적 공간을 축소시키고 “태국식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내용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초안에 의하면, 상원의원은 기존에 선출되었으나 이제 엘리트를 임명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사법부와 고위 공무원들의 역할은 증대되었고, 군의 지위도 두 개의 특수조항에 의해 향상되었다. 그 중 한 조항은 군비지출을 항상적으로 확대할 “필요성”을 신성시했고, 다른 조항은 9∙19 쿠데타를 정당화시켰다. “충족의 경제”와 더불어 자유시장정책 또한 신성시되었다. “재정준칙”은 사회적 지출과 관련된 부분에서 세 차례나 언급되었고, 민영화와 FTA도 보장되었다. 반면 노조와 사회운동의 협상력은 억제되었다.


군사정권의 헌법은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가득하다. 지방자치의 가능성이나 다른 문화, 종교, 언어에 대한 존중을 제안하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 사회정의를 구현할 방도도 없다. 이 헌법은 태국 남부지역에 평화를 가져오는데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태국 남부의 폭력과 민주주의 결핍

 

쿠데타 이후, 남부지역의 폭력사태는 가중되었다. 이것은 태국사회의 심각한 위기이고, 이 지역에 대한 존중의 부재, 체계화된 국가폭력, 그리고 민주주의의 결핍 때문에 발생했다. 이 모든 원인은 지난 200년간 국가가 만들어낸 것이다. 자유주의는 지방자치에 대한 여지를 두지 않고, 민족국가의 강압적 권력을 유의미할 만큼 감소시키지도 않는다.


역대 태국정부들은 남부지역의 소요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적 수단을 사용해왔다. 이 지역의 태국 국가에 대한 저항은 많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지역여론은 분리주의부터 사회정의에 대한 요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지난 1970년대에는 명백한 분리주의운동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태국 및 말레이시아 공산당과 협력하여 태국 국가에 대한 투쟁을 벌였다. 1963년 ‘바리산 민족혁명 (Barisan Revolusi Nasiona, BRN)’이 결성되었고, 이어서 1968년 ‘파타니 해방조직연맹 (Pattani United Liberation Organisation, PULO)’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PULO는 주로 망명한 중년 활동가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통제할 입장에 있지 않다.


1984년 BRN은 세 개의 조직으로 분할되었다. 그 중 하나가 ‘바리산 민족혁명연합 (Barisan Revolusi Nasional-Koordinasi, BRN-C)’이다. 2005년에 이르러서는 전투적인 ‘룬다 쿰풀란 케실 (Runda Kumpulan Kecil, RKK)’이 반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2004년 탁신 정부가 탁바이에서 행한 대량학살이 주된 이유였다. RKK는 인도네시아에서 훈련된 BRN-C 조직원들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상기한 단체들과 힘을 합쳐 활동하는 조직들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저항은 폭탄을 설치하고 공무원에게 총을 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있다. 공동체들은 항상적으로 주민들을 납치하고 살해하는 안보요원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연합하여 활동한다. 여성과 어린이는 군인이나 경찰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길을 막는다. 2005년 9월 4일 이들은 나라티와트의 반 라한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고, 주지사에게 그와 군인들은 마을에서 환영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2주일 후, 마을주민들은 타뇽 리모 쪽으로 가는 길을 봉쇄했다. 그 이전에는 해병대원 두 명이 주민들에게 붙잡힌 이후 신원미상의 민병대원들에게 살해당했다. 주민들은 그 해병대원들이 주민들을 죽이기 위해 파견된 살인부대원이라고 의심했다. 주민들은 관계기관을 겨냥하여 다음과 같이 쓴 포스터를 내걸었다: “당신들이야말로 진짜 테러리스트다.” 쿠데타가 발생한지 6주가 지난 2006년 11월, 주민들은 얄라의 한 학교에 모여서 군부대가 이 지역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며 항의했다. 그들이 내건 포스터 중 하나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너희 사악한 군인들 모두 …… 우리 마을에서 나가라. 너희들은 여기 와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우리 마을을 파괴한다. 나가라!” 이와 같은 대중의 저항이 2007년까지 계속되었다. 여성들을 대규모 동원하는 동일한 전술은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에서도 활용되었다.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은 소위 “지역 불교도들”에게 도로를 가로막는 이슬람 주민들에 대해 항의하라고 부추겨왔다. 동시에 군사정권은 불교를 “공식적인 국가” 종교로 만들고 이를 헌법으로 보장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는데, 이는 불장난이나 마찬가지이다. 태국 국가는 이슬람공동체와 불교공동체 간의 유혈전쟁을 야기할 위험이 있다.


평화를 구축하는 유일한 길은 이 지역에서 군경세력을 철수시키고, 현 국가구조나 태국국경의 유지에 관한 어떠한 전제조건도 없이 남부 시민사회 전체가 참여한 가운데 정치적 토론을 시작하는 것뿐이다.

 

 


군주제

 

9∙19 쿠데타의 지도부는 자신들의 쿠데타가 처음부터 “국왕의 지원”을 받았다고 선언했다. 대다수의 태국인들은 실제로 국왕이 추밀원의 대리인들을 통해 쿠데타를 계획하고 지시했다고 믿었다. 탁신을 지지했던 1,600만 명의 빈민들이 이러한 “국왕의 지원”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리하여 쿠데타는 실로 오랜 만에 군주제를 태국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시켰다. 엘리트들이 당면한 문제는 이러한 개입으로 인해 현 국왕이 노쇠하면 체제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는 위험이다.


태국사회 내에는 현 군주제의 진정한 역할과 관련하여 네 개의 상호중복되는 이론들이 있다. 이들이 “상호중복”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의 이론만으로는 현실의 총체성을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론들의 결합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군주제는 1932년 혁명 이후 실제로 권력을 잃은 적이 없거나, 아주 일시적으로만 잃어버렸던 오래된 “전제주의적 제도”이다. 그러므로 태국에서 가장 강력한 제도이다. 태국정치에서 국왕의 승인이 없으면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


탁신 수상 재임 당시, “군주의 네트워크”와 “탁신의 네트워크” 사이에 논쟁이 발생했다. 국왕은 “구 태국”을 대표한 반면, 탁신은 “근대 태국 자본가들”을 대표했다.


유럽이나 일본에서와 유사하게, 군주제는 헌법에 의거하여 현대적 제도로 발전하고 있다.


국왕은 나약하고 시류에 편승하며, 현재 권력을 가진 분파라면 누구든 지지한다. 또한 군부독재와 일하는 것을 더욱 편하게 여긴다.

 

1번과 2번 이론은 국왕의 권력을 강조하는 반면, 3번과 4번 이론은 매우 영향력이 큰 공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국왕을 취약한 존재로 보고 있다.


지난 150년간 군주제는 모든 상황에서 괄목할 만한 적응력을 보여왔으며, 군부독재에서 선출된 정부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집단과 연합을 형성함으로써 능력을 인정받았다. “전통적인 전제주의적 군주”라는 이미지는 창조된 전통에 불과하다. 사실, 역사적으로 전제주의적 군주가 존재했던 것은 1870년부터1932년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뿐이었고, 군주제의 안정성은5대 국왕의 치세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1932년 혁명 이후 왕정주의자들은 재빨리 전제주의로의 복귀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대신에 헌법에 의거하여 군주의 역할을 증대시키는 안을 지지하는 편을 선택했다.


“군주의 네트워크 (Network Monarchy)”라는 던컨 맥카고(Duncan McCargo)의 개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군주는 이 네트워크의 전지전능한 지도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거꾸로, 군주는 이 보수적 네트워크의 명목상의 대표일 뿐이고, 실질적인 권력은 네트워크의 다양한 구성원들에게 분산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아마도 후자가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군주의 네트워크”를 “구 태국” 또는 반 세계화 내지 반 근대자본주의와 연관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러한 관점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스탈린주의-모택동주의적 분석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미완의 자본주의혁명”이 진행중이다. 때때로 이 자본주의혁명은 “민주주의 혁명”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그 함의는 태국이 아직 완전히 자본주의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말도 되지 않는다. 태국사회에 잔존하는 봉건적인 정치경제적 관계는 없다. 그러한 관계들은 1870년대에 전제주의적 군주제가 수립되면서 모두 파괴되었다. 탁신과 군주 사이에 소위 “충돌”이 발생했다는 믿음에 대해 말하자면, 전세계적으로 가장 마지막에 발생한 대충돌은 1848년 이전에 자본가계급과 봉건군주들 사이에 발생한 충돌임을 역사가 말해준다. 이 시기 이후, 봉건군주들과 자본가들은 새로운 세계자본주의체제 하에서 서로 절충했다.

 

 새로이 혁신된 군주들은 군주제를 위기에 처했을 때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는 보수적 제도로 만듦으로써 자본가들에게 봉사했다. 태국에서 세계자본주의체제와의 절충은 군주제를 자본주의적 전제주의 제도로 전환시킨 라마 5세에 의해 수행되었다.


현 국왕은 탁신 정부를 가볍게 비판했을지는 몰라도 탁신의 마약에 대한 전쟁을 칭송했으며,  탁신 역시 국왕과 왕세자에 대한 충성을 항상 강조했다. 국왕 소유의 시암상업은행은 탁신이 자신의 회사인 ‘신 코포레이션(Shin Corporation)’을 테마섹 홀딩스에게 매각할 때 자금을 제공했으며, 군주자산국(Crown Property Bureau, CPB)이 탁신의 사업에 투자하기도 했다. 게다가 탁신 집권기에 정부의 특별정책은 CPB가 경제위기에서 회생할 수 있도록 도왔다.


“군주의 네트워크” 이론을 군주가 아닌 엘리트 구성원들이 관계 및 재계의 강력한 동맹자들과 협력하는 방식으로 보는 편이 더욱 유용하다. 이렇게 보면, 군주는 군부의 보다 강력한 세력들에 의해 쿠데타에 끌려들어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군주제를 보다 서구식에 가까운 제도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미심장한 움직임도 있었다. 2006년 4월, PAD가 헌법 제7조에 의거하여 국왕에게 새로운 수상을 임명하라고 수 차례 요청한 이후, 국왕은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짐은 제7조가 군주에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무제한적 권력을 부여한다는 의미가 아님을 재천명하고자 한다 …… 제7조는 군주가 모든 것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규정하지 않았다 …… 만약 그러했다면, 사람들은 군주가 자신의 임무에서 도를 넘었다고 말할 것이다. 짐은 이것을 요청한 적도 없거니와 짐의 임무에서 도를 넘은 적도 없다. 만약 그랬다면, 민주주의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위기가 입헌적 방법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고 재천명하는, 서구식 입헌군주의 전형적인 연설이다. 그러나 9월 이후, 그리고 12월에 이르러서는 분명히, 국왕은 공개적으로 쿠데타를 지지했다. 따라서 태국 군주제가 정치를 초월한 현대적 제도가 될 필요성과 군주의 쿠데타 및 정치에 대한 직접적 관여 사이에는 심각한 모순이 존재한다. 이것은 군주제의 불안정성을 야기하는 원인이 될 뿐이다.


현대 태국의 정치적 위기 속에서, 어떠한 종류의 국가수장이 합당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토론하는 일은 극히 중요하다. 국가수장의 역할에 대해 논의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는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은 정치개혁의 걸림돌이며, 이는 통치구조의 투명성과 책임성이라는 이름으로 반드시 배척되어야만 한다. 만일 태국이 민주주의국가가 되어야만 한다면 – 그리고 저자는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 국가수장의 역할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보호하는 것이 되어야만 하지 않는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2006년 9월 19월 발생한 쿠데타에 관하여 물어보아야 할 중요한 질문들이 있다. 태국의 국가수장은 1997년 헌법을 파괴한 군사쿠데타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노력했는가? 국가수장은 군사정권을 지지하도록 강제되었는가? 혹은 자발적으로 쿠데타세력을 지지했는가? 태국 국민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할 용기가 있는 국가수장을 원하는가, 아니면 민주주의의 파괴를 지지하는 나약한 국가수장을 원하는가? 투명성을 확보하고 시민사회가 모든 공적 기관들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되기 위하여, 우리는 진실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군주제를 비판할 권리를 가져야만 하고, 국가수장이 자신의 임무를 적절히 수행할 수 있도록 제안을 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공화국을 선택할 것인지 고려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이와 같은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적절하고 투명한 논의 없이, 우리는 태국에서 영구적이고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수립할 수 없을 것이다.

 

 


결 론

 

 9∙19 쿠데타는 자유시장과 엘리트권력에게 유리한 쿠데타였다. 그것은 태국 지배계급의 현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로부터의 이탈이 아니었다. 그것은 민주화와 사회정의의 구현에서 자유시장, 자유주의, 그리고 중간계급이 진보적 세력이 아님을 다시 한번 입증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적 공간을 확장시키는 동시에 사회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시민사회 내의 사회운동 또는 민중운동이다. 그러나 민중운동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적 개념의 지배를 떨쳐버리고 자신의 독립적인 정치조직과 정치이론을 창조해야만 한다. 쿠데타는 태국 정치사회를 위기에 빠뜨렸던 중요한 문제들 중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실제로 위기는 더욱 악화되었다. 민주주의적 공간은 심각하게 협소해졌으며, 소위 “개혁과정”은 거꾸로 후퇴하고 있다. 반면 극도로 신자유주의적인 정권 하에서 불평등과 사회정의의 부재가 심해지고 있다. 남부지역에서 계속되는 국가폭력은 불교공동체와 이슬람공동체 간의 전쟁을 야기할 위험이 있으며, 군사정권은 향후 군주제의 불안정성을 초래할 근거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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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목련꽃이 질때 원문보기   글쓴이 : 어린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