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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Thailand) : 역사 본문

선교 EH국/태국 이야기

태국 (Thailand) : 역사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2. 10. 6. 12:08

태국 (Thailand) : 역사


 ■ 태국의 역사(歷史)


      1. 타이족 및 태국의 기원


      기원전 4천년경부터 타이족은 원주민의 쌀농사를 중심으로 한 최소한의 자급경제를 유지하면서 중국의 남부 및 서남부 지역에 거주하였다. 한편 6세기 경 지금의 캄보디아 및 태국, 말레이 반도를 지배하던 푸난(Fuan) 왕국의 몰락으로 현재 미얀마 남부의 몬(Mon)왕국 및 메콩강 유역의 크메르(Khmer)왕국이 이 지역의 강대국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강력한 부족연맹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10세기경부터 중국 남부지역에 거주하던 타이족들은 한족의 세력이 증대하자 남쪽으로 이동 지금의 태국북부, 미얀마 북동부, 라오스북부 및 베트남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부분적으로 소국가를 형성하며 정착하기 시작했 . 그중 일족은 라오스를 형성하고 다른 일족은 더 남하하여 오늘날의 태국지역인 짜오프라야 강 유역에 정착해서 오늘날의 태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2. 쑤코타이(Sukhothai) 왕조 (1238~1378)


      10세기경부터 타이족들이 점차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태국의 광대한 평야에 정하게 되자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3세기에 타이족은 선주민인 몬족과 크메르족이 쇠퇴하자 치앙마이를 수도로 정한 태국북부의 란나타이 왕국(타이유언족), 쑤코타이를 수도로 정한 태국 중부의 쑤코타이 왕국(샴족), 라오스와 동북 타이의 랑싼 왕국(라오족) 등 태국계 민족의 소왕국이 각지에 생겼다.


      이와같이 13세기에 출현한 타이족의 여러 소왕국중 가장 번성함과 동시에 태국사상 처음으로 독립된 왕조의 기틀을 형성한 쑤코타이 왕국은 태국 역사상 정통 왕조로 1238년 타이족 일파의 수장 퍼쿤 방끌랑타우와 퍼쿤 파므엉이 크메르 왕국의 쇠퇴를 틈 타 북서부의 주요 거점인 쑤코타이를 정복하여 건국한 나라이다. 쑤코타이 왕조는 제 3대 람캄행(Ramkhamhaeng)왕(재위 1277~ 1317) 때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람캄행왕은 크메르 문자를 변형시켜 타이문자를 발명하고 스리랑카로부터 소승불교를 도입하였다. 또한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 안정적으로 주변국가를 복속 현재 태국과 거의 같은 크기까지 영토를 확대하였다. 람캄행왕의 사후 14세기 중반부터 쑤코타이 왕국은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1378년 아유타야 왕조에게 멸망하였다.


      3. 아유타야(Ayuthaya) 왕조(1350~1767)


      쑤코타이 왕조가 점차 쇠퇴해가자 주변의 속국들이 모두 독립, 강대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중 가장 강력한 나라가 아유타야 왕국이었다. 아유타야 왕국은 우텅(=라마티버디 1세)이 롭부리 지역에 1350년 건국한 나라이다. 14세기 말 주변국가를 복속시켜 왕국의 기반을 조성하고 1378년에는 쑤코타이 왕국을 정복하였다.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아유타야 왕조는 무역이 번창하여 서양 제국 및 중국, 일본 등과 교역하였다. 9대 뜨라이록까낫 왕 때에는 말레이 반도와 벵갈만까지 통치영역을 확대하기도 했다. 한편 16세기부터 융성하기 시작한 인근의 미얀마와 잦은 전쟁으로 쇠약해지던 아유타야는 마침내 1569년 3년간의 미얀마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수도를 점령당하고 미얀마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나레쑤언 왕은 1600년까지 미얀마군 완전히 축출하고 아유타야 왕국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다시 아유타야 왕조의 내부 혼란을 틈타 미얀마 군이 1765년 침공하여 아유타야 왕국은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

      아유타야 왕국의 멸망으로 태국은 정치적 분열 및 혼란기를 겪었지만 Taksin 톤부리 왕국을 세우고 미얀마를 축출 타이왕국을 재통일했다.


      4. 톤부리(Thon Buri) 왕조(1767~1782)


      아유타야 왕조가 망하고 미얀마 군의 공격 속에서 딱 지방의 성주이던 프라야 딱씬이 짜오프라야강 하구 서안 톤부리에 도읍을 세우고 잃었던 아유타야의 영토를 회복하면서 미얀마군을 축출했다. 딱씬왕은 이전의 아유타야 왕국의 정치제도나 사회신분을 그대로 세습하고 치앙마이를 정복하는 등 타이제국의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딱씬왕은 정신이상으로 왕위에서 쫓겨나는 비극을 맞게되고 딱씬왕 1대로 톤부리 왕조는 종말을 맞이하였다.

      대신 딱씬의 부하 장수였던 짝끄리 장군이 왕으로 추대되어 방콕으로 천도하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짝끄리 왕조(랏따나꼬신 왕조)가 그 뒤를 잇게 되었다.


      5. 랏따나꼬신 왕조(1782~현재)1782년


      딱씬 왕의 부하였던 짝끄리 장군이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던 왕을 처형하고 도읍을 현재의 방콕으로 옮기면서 현재까지 왕조가 지속되고 있다. 라마 3세때(재위 1824~51) 남동쪽으로 캄보디아 북으로 라오스까지 영토를 넓혔다. 19세기 들어 군주들이 유럽 국가들에 이권을 주고 그들과 정치적 관계를 맺게 됨에 따라 태국에 대한 서구의 영향력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에 태국은 그 동안 유지해오던 쇄국정책을 버리고 영국(1855년 보우링조약), 미국(1856), 프랑스(1856) 등 몇몇 서구열강과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교를 세우고 해외유학을 장려하였으며 도로건설에 노력을 기울이는 등 근대화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쭐라롱껀 왕(라마 5세 재위 1868~1910)은 랏따나꼬신 왕조(짝끄리 왕조)는 사회변혁뿐만 아니 왕권을 더욱더 강화하여 절대주의 국가를 만드는데 정성을 쏟았으며 사법, 행정제도 개혁과 함께 근대화를 실행하였다. 또한 자국의 영토를 서구열강의 지배 속에 놓이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그들의 집요한 침략정책에 의하여 상당한 영토를 빼앗긴 상태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을 이용하여 독립국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해 나가게 되었다. 1867년 캄보디아에 대한 권리를 프랑스에 양도했으며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지방에 있던 속국을 프랑스에게 양도했다. 1917년에는 연합국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라마 5세부터 추진된 국왕에 의한 근대화는 마침내 진보적 사상을 지닌 많은 관료와 군인을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진보파 그룹은 자신들을 길러준 왕의 권력을 부정할 만큼 세력이 강해지고 왕족 전제에 의한 정치적 부패에 불만이 높아져 1932년 6월 24일 무혈혁명을 일으켰다.


      무혈혁명이후(1932년)

      인민당이 주도한 이 혁명에 의하여 태국은 절대군주제에서 벗어나 12월 10일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고 입헌군주제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왕은 새로이 입헌군주로서 국가 통합의 상징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열강의 진출로 아시아 각국이 식민지화된 가운데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하였으며 1939년에는 국호를 샴에서 타이로 변경하였다. 태국은 마지못해 2차 세계대전에 일본의 동맹국으로 참전했다. 1942년 피분 총리 정권하에서 태국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일본과 공수동맹을 체결하고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전황이 일본에 불리해지자 1944년 8월 일본과의 전시협정을 파기했다. 1945년 8월 16일 대영․미 선전포고는 일본의 무력강압에 의한 것으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태국내의 친일파를 제거하기 시작했고 영국과 프랑스에 자신해서 손해배상을 해주기도 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도움으로 1946년 12월에는 유엔에 가입하였다.


      현재의 국왕 : 라마 9세(푸미폰 아둔야뎃 왕)

      1946년 6월 10일 등극한 지금의 라마 9세(푸미폰 아둔야뎃 왕)는 정치적 실권을 가지지 않고 있으나 계속되는 쿠데타에 의해 권력의 헤게모니가 바뀌는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서 자리잡고 있다. 태국의 정치적 혼란은 태국이 입헌군주제 수립후 지금까지 17차례의 쿠테타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권력을 둘러싼 분쟁이 심하였다. 전후에는 항일자유타이운동을 지도하던 쁘리디, 아파이웡 등이 정권을 장악했다. 1947년에는 피분파가 쿠데타로 쁘리디 등을 추방하고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으나, 군부내에서 경찰세력인 파오와 육군세력인 싸릿파의 대립이 심해졌다. 1957년 9월 싸릿은 다시 쿠데타로 피분과 파오를 밀어내고 다음해 10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싸릿이 죽은 후 정권을 인계받은 타넘은 1968년 민정으로 이양하였으나 1971년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군정으로 환원시켰다. 1973년 10월 학생데모로 타넘 군사정권이 무너진 후 싼야가 총리로 임명되어 헌법을 제정하고 농지개혁법을 재정하는 등 의욕적인 정책을 폈지만 좌우의 대립과 빈발하는 파업 등 국민적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1975년 반정부 폭동으로 물러났다.


      반정부 폭동이후 (1975년)

      그 후 1976년 2월 총선거를 실시하여 쎄니 내각이 재등장했으나 같은해 10월 쌍앗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타닌을 총리로 하는 새로운 내각이 성립하였다. 1977년 10월 당시 국방장관 겸 최고사령관이던 끄리앙싹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타닌을 축출하고 1979년 4월 총선거를 실시하여 끄리앙싹이 민간인 총리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끄리앙싹이 경제정책의 실패로 총리직을 사퇴하고 당시 국방장관이던 쁘렘 띤쑬라논이 정권을 이양받았다. 그 후 쁘렘 내각이 계속되다가 1988년 8월 찻차이가 12년만에 민선총리로 정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1991년 2월 군부를 비난한 각료의 중용에 불만을 품은 군장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찻차이 총리의 내각이 붕괴되고 약 1년간 아난 과도내각이 수립되었다. 1992년 3월 22일 총선결과 전년도 쿠데타를 주동했던 쑤찐다 전육군 사령관을 총리로 하는 쑤찐다 내각이 1992년 4월 21일 수립됐다. 그러나 쑤찐다를 반대하는 민주화 물결과 유혈 진압사태 결과 쑤찐다는 총리직을 사임하고 총선거 실시를 위한 제 2차 아난 과도내각이 수립되었다. 1992년 9월 13일의 총선거에서 민주당 등 반군부 4개 야당이 과반수를 차지하며 연립정부를 구성 새총리에 추언 릭파이 민주당 당수가 취임하였다. 1995년 5월 토지개혁부정의혹을 이유로 연정에서 제 3당이던 팔랑탐당이 탈퇴하자 하원이 해산되면서 같은 해 7월 2일 총선거가 실시됐다. 이 결과 보수계 야당이던 찻타이당(태국국민당)이 제1당이 되었고 총리로 임명된 반한 씰라빠아차는 7당으로 구성된 연립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반한 총리가 각종 부정부패 및 비리에 연루되어 집권 14개월만에 총리직을 사임하고 1995년 7월 2일 총선거가 실시됐다. 총선결과 보수계 야당인 찻타이당이 제1당으로 약진하고 총리에 반한 총리가 7당연립정권을 발족시켰다. 그러나 반한 총리는 각종 부정부패와 탈세, 석사학위표절, 국적조작 등으로 지탄을 받아오다 집권 14개월만에 사임하고 1996년 11월 17일 총선거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제1당으로 차왈릿 용짜이윳 부총리 겸 국방장관이 이끄는 신희망당이 6개 정당을 통해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 태국 약사(略史)


        ▲ 10세기 경

           중국 서남부 지역에 거주하던 타이족 남쪽으로 이동. 현 태국 북부 및 라오스 북부, 미얀마 북동부에 걸쳐 소국가 형성.

        ▲ 1238년  타이족 일파의 두 수장 퍼쿤 방끌랑타우와 퍼쿤 화므엉이 크메르 왕국을 물리치고 태국 최초의 독립왕국 쑤코타이 건설.

        ▲ 1350년  타이족 일파의 우텅(라마티버디1세)이 아유타야 왕국 건설.

        ▲ 1569년  미얀마와의 3년간의 전쟁에 패배, 1595년까지 미얀마 속국이 됨.

        ▲ 1600년  나레쑤언왕, 미얀마군을 완전 축출하고 독립쟁취, 아유타야 왕국 재건.

        ▲ 1767년  미얀마 군의 침공으로 아유타야 왕국 멸망.

        ▲ 1767년~1782년

           딱 지방의 성주이던 씬(일명 : 딱씬)이 아유타야 부흥을 외치며 톤부리 왕국 세우고 미얀마 군에 대항하며 1768년말까지 아유타야 왕국의 영토 회복. 1766년까지 딱씬은 타이왕국을 재통일하였으나 부하들의 반란으로 타도되어 처형당함.

        ▲ 1782년  딱씬 휘하의 짝끄리 장군이 왕으로 추대 되어 랏따나꼬씬 왕국(일명 : 짝끄리 왕조) 시대 개막.

        ▲ 1855년  영국과 보우링조약 채결, 자유무역항, 치외법권 승인.

        ▲ 1867년  캄보디아에 대한 권리를 프랑스에 양도.

        ▲ 1893년  프랑스의 무력에 굴복, 메콩강 좌안을 프랑스에 양도.

        ▲ 1896년  영․불, 동남아지역 식민지쟁탈에서 태국(일명 : 샴)을 완충지대화 하는데 합의.

        ▲ 1917년  연합국으로 1차대전 참전, 전승국의 일원으로 국제적 위상 제고와 불평등 조약 타파의 계기 마련.

        ▲ 1932년  12월 인민당에 의한 무혈쿠데타로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 성립.

        ▲ 1939년  국호를 샴(싸얌)에서 타일랜드(타이)로 바꿈.

        ▲ 1942년  태국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일본과 공수동맹을 체결, 대영․미 선전포고.

        ▲ 1945년  8월 16일 대영․미 선전포고는 일본의 무력강압에 의한 임을 선언하고 친일파 제거.영국과 프랑스 양국에 자진해서 손해배상을 하고 미국의 지원에 의해 패전국 대우를 면함.

        ▲ 1946년  현 국왕 푸미폰 아둔야뎃 왕자가 짝끄리 왕조의 9대왕으로 즉위.

        ▲ 1973년  10월 학생시위로 타넘 군사정권이 무너진 후 군소정당 난립.

        ▲ 1975년  1월 총선거 실시로 쎄니 내각이 성립되었으나 2주만에 와해되고 큭크릿 연립내각 등장.

        ▲ 1976년  2월 총선거 실시로 쎄니 내각이 재등장.   10월 쌍앗 장군의 쿠테타로 타닌 내각 성립.

        ▲ 1977년  10월 군사쿠테타로 끄리앙싹 장군 집권.

        ▲ 1979년  4월 총선거로 끄리앙싹이 민간인 총리로 취임.

        ▲ 1980년  2월 끄리앙싹이 경제정책 실패로 총리직을 사임, 당시 국방장관이던 쁘렘 띤쑬라논 장군이 정권을 이양 받음.

        ▲ 1981년 및 1984년  군사쿠테타 실패.

        ▲ 1986년  8월 연립여당내의 알력으로 총선 실시하여 5차 쁘렘 내각 출범.

        ▲ 1988년  8월 총선 후 민주화 바람으로 쁘렘이 퇴진하고 찻차이 추한이 민선총리로 취임.

        ▲ 1992년  쑤찐다 육군사령관이 총리에 취임하자 쑤찐다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 전국적으로 발생, 비상사태 선포.9월 수친다를 퇴진시키고 총선에서 하원을 선출한 후 추언 릭파이가 총리에 취임

        ▲ 1995년  5월 연립정권의 제3당이던 팔랑탐(불법의 힘)당 연정탈퇴, 하원해산.

        ▲ 1995년  7월 2일 총선거 실시로 태국국민당이 제1당으로 약진. 반한 씰라빠아차를 총리로 한 7당 연립정부 출범.

        ▲ 1996년  11월 17일 총선거 결과 제1당으로 차왈릿 용짜이윳 부총리 겸 국방장관이 이끄는 신희망당이 6개정당을 통해 연립정부 구성.

       

       

       

      (태국 근대사중 한토막)

       

       

      1991년에 수친다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구가 이끄는 국가 평화 유지 협의회 성향의 의원들로 국회가 새로 구성되었다. 이듬해 1992년 3월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국가 평화유지협의회 계열의 싸막키탐당이 집권당이 되었다. 나롱웡완이 총리에 올랐다. 그러나 총리는 곧 수친다로 바뀌었다. 1992년 4월부터 왕궁 앞 싸남루앙 광장에는 수만의 시민이 모여 수친다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진리의 힘 당의 잠롱과 신희망 당의 차왈릿 등이 주축이 된 이 시위는 총선에도 참여하지않은 수친다가 총리에 오른 것에 대해 분개해 일어난 것이었다.특히 전 방콕시장이었던 잠롱은 태국 정치의 말살자 수친다가 사임할 때까지 단식 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선언하고 국회 의사당 앞에서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연일 수만의 학생과 시민은 수친다의 사임과 국회 해산을 요구하며 잠롱에 대한지지 시위를 벌였다. 5월이 되면서 시위대는 20만에 가깝게 늘어났다. 5월 11일 4개 야당 당수와 학생 지도자 등은 정부측과 헌법 개정 합의와 푸미폰 국왕의 중재에 따라 일단 1주간 휴전에 들어갔다. 5월 17일 정부의 조치가 없자 2차시위가 발발했다. 5월 18일 수친다는 시위현장에 군 병력을 투입했다. 군인들은 방콕의 민주 기념탑 부근에서 시위중이던 시위대에게 바로하여 50여명에 가까운 학생과 시민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당했다.

      군부의 온건파는 수친다를 제거하기위해 방콕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며, 친 수친다계 군부에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방콕으로 통하는 도로를 막았다.

      푸미폰 국왕은 수친다를 불러 태국 국민의 위대한 타협 정신에 따라 총리직을 사임하고 태국을 떠나라는 권유를 했다.

      5월 23일 수친다는 스웨덴으로 망명길에 오리고 태국판 5.18 민주항쟁은 끝을 맺었다, 과도정부의 총리는 아난 전총리가 맡았다.

      그해 9월 총선이 실시되고 민주당, 신희망당, 진리의 힘당 등으로 연정이 구성되었다.


      이 시위에서 국왕은 군부의 수친다 총리와 야권의 잠롱 시장을 불러들여 무릎을 꿇어 앉히고 질책하는 모습은 국민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결국 수친다는 국외 망명길에 올랐으며 태국의 민주화는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푸미폰 국왕은 왕비 라자웡 씨리낏과 결혼하여 네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장녀 우본 라따나 51년생, 장남 와찌라롱껀 52년생, 차녀 씨린돈 55년생, 삼녀 쭐라본 57년생이 그들이다.

      장녀 우본 라따나 공주는 미국인과 결혼하여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했으나 현재는 복권한 상태이다. 왕실 근위대장이자 황태자인 와찌라롱껀 왕자는 결혼을 두 번하는 등 사생활이 문란하고, 복권조작에 연루되어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출처 : http://www.missionthailand.net/thai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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