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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불교의 개혁주의 운동 본문

선교 EH국/태국 선교

태국 불교의 개혁주의 운동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2. 10. 6. 11:54

태국 불교의 개혁주의 운동

 

       


      조 흥 국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동남아학과)




      1. 타이 사회와 불교


          태국은 인구의 약 90%가 불교도인 불교국가다. 13세기 첫 타이 왕조가 출현할 때부터 불교는 국가의 지배적 종교로서 발전해 왔다. 타이 사회의 구심점에 있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온 불교는 엘리트 사회의 이념적 정체성의 바탕을 형성해 왔을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지배해 왔다. 왕실의 후원은 물질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이념적 그리고 제도적으로도 나타나, 국왕은 불교의 수호자며 상가(僧伽)를 유지시키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인식이 고착되었다. 오늘날 태국의 헌법 중 “국왕은 불교도이며 종교들의 수호자다”란 조항은 이러한 인식의 지속성을 말해준다. 불교에 대한 왕실의 후원은 한편 국왕이 시주를 통해 공덕(功德)을 축적할 수 있다는 점과 왕권에 대한 불교계의 지지 즉 왕권의 정당화를 위한 사회적 바탕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왕권의 이해관계에도 걸리는 문제였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후원은 왕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공덕 축적은 사실 모든 불교신자들의 종교적 행위에서 핵심을 형성해 왔다. 왕, 귀족관료, 일반백성 모두 ‘탐분’(tham bun: "merit-making") 즉 공덕 쌓기에 정성을 바쳐 왔는데, 그것은 불교의 윤회사상에 입각하여 사후에 보다 나은 존재로 태어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절을 지어 헌납하고, 정기적으로 헌금하며 법당의 불상에 금박 종이를 붙이고 매일 아침 탁발나온 스님들에게 음식공양을 한다. 또한 우기가 끝나는 10월-11월초 사이에 행해지는 ‘까틴’(kathin) 축제에는 스님들에게 새로운 승복을 바친다. 남자들의 경우 만 20세가 되면 일시 출가하는 것도 이를 통해 그 후원자나 부모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후원체계로 인해 3만여개의 절과 50만의 비구 및 비구니들의 생활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밖에 출생, 결혼, 장례 등 모든 통과의례에서 스님들이 경문을 읊고 성수(聖水)를 뿌리는 등 불교는 타이인들의 일상생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불교는 타이 사회 전체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지배해 왔으며, 태국 문화를 형성해 온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타이인들의 정체성의 결정적인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불교 개혁주의 운동의 뿌리


          태국에서의 불교 개혁은 역사적으로 그 연원이 깊다. 태국의 왕조사에 있어서 여러 불교군주들은 불교가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판단했을 때 개혁을 시도했다. 예컨대 17세기의 나라이(Narai, 1656-1688) 왕은 평민들이 출가를 부역(賦役) 회피의 방편으로 삼으며 승려들이 공부를 게을리하자 비구의 자질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도입했다. 18세기말의 딱신(Taksin, 1767-1782) 왕은 승려들이 함부로 살생하고, 음행하고, 술마시고, 금은보화를 축적하는 등 가장 기본적인 계율을 범하는 지경에 이르자 비행(非行)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키는 등 상가의 정화를 단행했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방콕 왕조의 창건자인 라마(Rama) 1세(1782-1809)는 당시 불교의 전반적인 세속화에 대해 폭넓은 개혁을 추진했다. 사회의 도덕적 타락이 아유타야(Ayutthaya) 왕조(1351-1767)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보았던 그는 불교계의 질서 회복을 중시했다. 그리하여 시장을 배회하고 음악 및 연극 공연에 기웃거리며 도박을 하고 이단적인 주술행위에 탐닉해 있었던 승려들의 비행을 지적하고 불자(佛子)로서의 경건한 행동을 요구하는 불교법령들을 제정했다. 또한 1788년에는 결집(結集) 즉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내용적으로 통일되지 않았던 불경들을 개정하고 새로운 삼장(三藏)을 편찬했다.

          오늘날 태국 불교의 개혁주의 운동의 원천은 라마 1세의 손자인 라마 4세 몽꿋(Mongkut)의 불교개혁 운동이라고 본다. 몽꿋은 등위하기 전 1824년부터 1851년까지 불문(佛門)에 몸담고 있는 동안 팔리(Pali: 소승불교 경전언어)어로 쓰여진 불경 원전들을 광범위하게 연구함으로써 당시 태국 불교가 많은 부분에서 원시불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또한 카톨릭 신부들과 개신교 선교사들을 포함한 다양한 서양인들과 접촉하면서 그들로부터 라틴어와 영어 그리고 서양의 학문을 배웠다. 이를 통해 얻어진 서양의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은 그가 태국 불교에서 미신 및 주술 등 비불교적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한 것에서 반영되었다. 몽꿋의 불교개혁은 특히 비구의 수계식(受戒式)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몬(Mon) 종파의 수계식이 경전에 충실한 더욱 순수한 형태라고 간주한 몽꿋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수계식을 도입했는데, 이것은 당시 승려들의 계율적 정통성을 의문시한 행위였다. 그는 1830년대말에 ‘탐마윳’(Thammayut: “불법에 충실한 자”)이란 새로운 종파를 세웠다. 그 이름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는 기존의 마하니까이(Mahanikai) 종파에 비해 계율을 더욱 엄격히 지킬 것을 강조했다.

          흔히 경전주의(scriptualism), 지성주의(intellectualism), 합리주의(rationalism)의 특징들로써 설명되는 몽꿋의 불교개혁은 근대 태국 불교의 초석이라고 간주된다. 외형적인 의식(儀式)으로부터의 탈피를 강조하고 학문적 성찰을 중시한 탐마윳 종파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한 왕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발전했다. 탐마윳 운동은 1881년 몽꿋의 아들인 쭐라롱꼰(Chulalongkorn, 1868-1910) 왕의 시대에 독립적인 종파로서의 공식적인 지위를 획득했으며, 특히 쭐라롱꼰의 이복동생이자 1893년 탐마윳 종파의 종정(宗正)이 된 와치라얀(Wachirayan)의 지도하에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다. 1910년에는 와치라얀 종정이 태국 불교계의 수장인 상카랏(sangkharat; 팔리어 sangharāja) 즉 승왕(僧王)에 임명됨으로써 탐마윳 종파의 영향력은 절정에 달했다. 이로써 비록 전체 사원 및 승려의 숫자에서는 마하니까이 종파가 여전히 절대적으로 우세했지만, 왕실의 강력한 후원을 등에 업은 탐마윳 종파는 태국 불교의 엘리트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고 태국 불교에 개혁의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와치라얀은 탐마윳 정신에 입각하여 승려뿐만 아니라 재가신도(在家信徒)의 교육을 중시하고 상가 조직을 전국적으로 개편하는 등 불교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

          태국의 불교는 개인의 해탈을 중시하는 소승 계통의 테라바다(Theravāda)불교 즉 상좌부(上座部)불교이며, 이에 따라 아란냐바시(araññavāsī) 즉 삼림거주(森林居住) 수도승의 전통이 강하다. 이 아란냐바시 전통은 탐마윳 종파와 함께 오늘날 태국 불교의 개혁주의 운동의 정신적 온상이 되었다. 태국의 삼림거주 수도승들은 원래 계율에 대해서는 방만적이지만 초능력을 소유한 자들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920-30년대 활동을 전개한 아란냐바시 전통의 몇몇 승려들은 다른 수도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특히 아짠 사오(Achan Sao)와 그의 제자 아짠 문(Achan Mun)은 초능력을 중시하지 않으며 담마(dhamma) 즉 불법(佛法)과 비나야(vinaya) 즉 계율에 대한 탐마윳 종파의 교리해석을 수용하고 붓다고사(Buddhaghosa)가 쓴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으로부터 명상수행의 방식을 취했다. 이로써 그들은 19세기 테라바다불교의 두 가지 주요 개혁적 요소였던 계율의 철저한 준수와 엄격한 명상수련을 융합한 셈이었다. 특히 아짠 문(1870-1949)은 태국의 동북부 지방에서 탐마윳 종파의 유명한 명상수련 선생이 되어 많은 추종자들을 끌어들였다. 그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아짠 차(Achan Cha)는 동북부 지방의 우본(Ubon)에서 한 국제적 선원(禪院)의 주지로 있으며, 여기에 많은 서양 불교도들이 수련하고 있다. 단순한 생활과 금욕적 수도를 강조하는 아짠 문의 전통은 현대 태국 불교의 다양한 개혁주의 운동들에게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3. 풋타탓과 수언 목 운동


          아짠 문의 전통으로부터 영향받은 불교 개혁운동의 하나로 풋타탓(Buddhadasa)의 수언 목(Suan Mok: "해방의 정원“) 운동을 들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해석과 수많은 저술들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풋타탓은 1906년 남부 차이야(Chaiya)의 한 화교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20세에 출가한 그는 팔리어 경전해독시험에 불합격한 후 숲에 거주하면서 불경을 탐구하는 것이 담마의 실천에 더욱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1932년경 고향 차이야의 한 숲속에 왓 수언 목(Wat Suan Mok)을 설립했다. 아란냐바시 전통을 상기케하는 장소 선택과 관련하여 그는 “담마를 실습하는 장소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직접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숲에서의 명상수련과 경전연구에 열중한 그는 그러나 삼림거주의 수도승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수언 목 사원을 중심으로 담마를 실천에 옮기고 강연과 저술활동 등을 통해 담마를 대중화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아란냐바시 전통과 가마바시(gāmavāsī) 즉 촌락거주 수도승의 전통을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풋타탓은 그의 비판가들이 종종 지적하는 것처럼 대승불교와 선불교 등에서 중시하는 개념들을 차용하여 자신의 불교이해를 체계화한다. 예컨대 불교 해석에 있어서 그는 모든 존재의 형태란 비어있는 즉 실체가 아니라고 보는 대승불교의 공(空, 팔리 suññatā)의 개념을 인식의 한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그는 공(空), 무아(無我, anattā),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개념들의 바탕위에서 테라바다 불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인 비집착(非執着)을 설명한다. 풋타탓은 또한 “열반(涅槃, 팔리 nibbāna)은 상사라(saṃsāra) 즉 윤회(輪廻)속에 있다” 라고 말했는데, 그의 혁신적인 불교해석의 핵심에 속하는 이러한 인식 역시 대승불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여기서 풋타탓은 열반의 세계를 포함하는 초속계(超俗界, 팔리 lokuttara)와 속계(lokiya)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열반 즉 해탈은 사후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현생지향적 인식과 함께 그는 “해탈은 승려들만의 것이 아니라,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로써 그는 재가신도의 불교신앙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출가해야 된다고 믿는 통념에 대해 반박했다. 그에 의하면 니르바나 즉 해탈의 원칙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것인데, 그것은 비집착의 상태가 인간들의 원래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한 해탈을 위한 수도는 승려들에게 더욱 알맞다고 보는 관점에 대해, 속세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재가신도들이 승려들보다 더욱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고 설명함으로써 재가(在家)에서의 구도(求道)를 합리화한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출가승려만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엘리트주의적인 테라바다불교의 전통적인 인식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그의 비정통적인 불교 이해의 또 다른 측면은 ‘십이연기’(十二緣起) 혹은 ‘십이인연’(十二因緣) 등으로 알려져 있는 연기에 대한 해석에서 나타난다. 모든 존재는 상호 연관된 조건들의 결과로 생성된다는 연기론(緣起論)은 종래 주로 전생(前生)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카르마(karma) 즉 업(業)과 윤회의 법칙을 바탕으로한 연기의 사상은 현재의 높은 사회적 지위와 물질적 부를 전생에 쌓은 공덕(功德)의 결과로 정당화한다. 이에 비해 풋타탓은 연기론이 현생에서의 삶의 순간들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태국의 전통적인 계층인식에 의문을 던졌다.

          풋타탓은 언어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실재론적인 관념은 우주만물의 참된 모습인 제법실상(諸法實相)의 깊은 의미를 추구하는 데 방해만 될 뿐이라고 보는데, 이러한 인식이 제행무상(諸行無常, anicca)에 대한 그의 이해의 바탕을 형성한다. 그의 불교관의 독특한 측면은 이러한 그의 이해가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현실적인 차원에 적용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태국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준 그는 산업화로 인한 환경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자연에 대한 불교적 접근을 강조한다. 풋타탓은 또한 정치가 담마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고 보아, 비집착과 연기에 바탕을 둔 “영적인 정치”(spritual politics)를 제안한다. 여기서 그는, 그의 현생지향적 인식에 상응하여, 연기를 서로 연관되어 상호간 영향을 주고받는 부분들간의 조화로운 상태로 해석한다. 그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비집착의 마음으로 행할 때, 이것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절한 중용의 상태 즉 연기의 조화로운 상태를 낳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개인적 차원에서의 이러한 개념을 정치에 적용하면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간의 알맞는 조화를 추구하는, 전체와 개인의 이해관계를 모두 고려하는 “영적인 정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영적인 정치”와 관련하여 풋타탓은 정치적 행위는 담마의 통찰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직들의 모든 형태들은 그 자체의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영적인 목표에 봉사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는 “영적인 정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불교가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사물의 근본적인 상호관련성 즉 그들의 연기적(緣起的)인 속성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풋타탓은 비록 1993년 입적했지만, 그가 시작한 수언 목 운동과 그 정신은 그의 제자들과 그로부터 영향받은 태국의 많은 정신적인 지도자들에 의해 계속 유지되고 있다. 태국의 저명한 불교사회운동가들인 술락 시와락(Sulak Sivaraksa)과 쁘라웻 와시(Praves Wasi) 등은 모두 풋타탓의 팬으로서 불교의 담마에 대한 그의 근대주의적 해석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 왓 수언 목은 현재 50명 이상의 비구들을 위한 숙소와 재가불자들을 위한 기숙사를 갖고 있으며 국제적인 명상수련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 명상수련센터에는 매년 많은 서양인들이 찾아와 10일간의 명상훈련을 위한 특별프로그램에 참가한다. 풋타탓은 현대 태국이 낳은 가장 저명한 불교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혁신적인 생각들은 그 지적인 내용 때문에 일반 대중들에게는 쉽게 전달되지 못한다는 약점을 갖고 있다. 특히 담마에 대한 지나치게 자유적이고 급진적인 해석은 여전히 ‘탐분’의 공덕축적에 대한 관심이 그들의 불교신앙적 행위의 주내용을 이루는 대부분의 불교도들로서는 불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수언 목 운동의 추종자들이 주로 지식인들이나 중산층 가운데서도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자들에게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4. 산띠 아속 운동


          아짠 문의 금욕주의적 전통의 정신적 유산을 이어받은 또 다른 개혁주의 운동으로서 포티락(Phothirak)이 이끄는 산띠 아속(Santi Asok: “슬픔없는 평화”) 운동을 들 수 있다. 아란냐바시 전통을 부분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산띠 아속 운동은 포티락이 한 때 스스로 말한 것처럼 풋타탓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 운동의 창시자인 포티락은 1935년 동북부 지방의 시사껫(Si Saket)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는 기독교인으로 성장했다. 일찍 부모를 여읜 그는 동생들을 돌보다가 뒤에 방콕의 포창(Poh Chang) 예술전문학교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졸업한 후에는 태국의 한 TV회사에서 프로그램 제작자와 작곡가 및 가수로 일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그 후 36세에 직업을 그만 두고 늦게야 출가하게 되었는데, 포티락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 동기에는 1970년 1월 신비한 섬광을 체내에서 느끼고 이것을 영적인 계시로 받아들인 개종 체험이 있었다. 포티락은 처음에는 탐마윳 종파에 속한 왓 아속까람(Wat Asokaram)에서 수계했으나 이윽고 자신의 방식대로 불도에 임했다. 그는 왓 아속까람과 왓 마하탓(Wat Mahathat)에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이들을 ‘아속(Asok) 그룹’이라고 불렀다. 그는 곧 이들과 함께 방콕에서 서쪽으로 약 60km 떨어져 있는 나콘 빠톰(Nakhon Pathom)에 수도원을 세우고 이것을 ‘단 아속’(Dan Asok) 즉 아속의 영역이라고 명명했으며, 여기에 어느 종파건 상관없이 승려들과 재가신도 누구나 와서 불법을 닦도록 했다. 포티락은 그 후 그의 비정통주의적인 행동 때문에 탐마윳 종파로부터 쫓겨나자 1973년 마하니까이 종파에서 다시 수계했다. 그의 독립적인 수도 방식은 그러나 태국 상가의 지탄을 받았으며, ‘단 아속’을 해체하라는 명령이 되풀이되었다. 기존의 불교계의 이러한 비난에 대응하여 포티락은 1975년 180명의 승려들과 함께 태국 상가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공식적인 선언을 했다. 이 해는 산띠 아속 운동이 시작된 해라고 간주되고 있다.

          기존 불교계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산띠 아속은 지속적으로 팽창했다. 산띠 아속은 산하의 여러 출판사업들을 경영하기 위해 재단을 설립했으며, 승려들과 일반신자들이 금욕적 생활을 실천할 수 있는 4개의 ‘풋타 사탄’(phuttha sathan) 즉 불교센터를 세웠다. 공동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이 불교센터의 회원들은 나무로 지은 소박한 오두막집에서 살며 엄격한 도덕적 행위와 수행자로서의 절제가 요구된다. 그리하여 일반신자들의 경우 남자와 여자 모두 기본적인 계율인 오계(五戒) 또는 팔계(八戒)를 준수하고 채식 생활을 해야 한다. 출가한 자들의 경우 비구들은 227가지의 대계(大戒), 비구니들은 십계(十戒) 외에 다음에 열거된 산띠 아속의 독특한 ‘열 가지 계명’을 지켜야 한다. 첫째 육식을 삼갈 것, 둘째 하루에 한 끼 이상 먹지 말 것, 셋째 중독성 또는 습관성의 물질을 취하지 말 것, 넷째 낮시간(아침 5시-저녁 6시)에 잠자지 말 것, 다섯째 신발을 신지 말 것, 여섯째 가방과 양산을 사용하지 말 것, 일곱째 돈이나 그밖의 다른 불필요한 것을 소유하지 말 것, 여덟째 성수(聖水)를 만들지도 뿌리지도 말 것, 아홉째 불상이나 부적의 제작을 삼갈 것, 열째 불, 연기, 물 등의 사용을 포함하는 제사의식의 집행을 삼갈 것. 이상의 금지사항 가운데 마지막 세 가지는 불도에 전념하지 않고 세속인들의 주술적 요구에 응해 의식(儀式)을 행하며 불상 및 불교적 부적의 제작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기존의 승려들에 대한 비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위의 ‘열 가지 계명’은 전체적으로 볼 때 팔리어 경전에 나타나 있는 원래의 불교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산띠 아속의 근본적 취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초기 불교정신으로의 회귀를 중시하는 것과 관련하여 산띠 아속 운동은 다음의 두 가지 핵심으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산띠 아속은 농사를 생계의 바탕으로 삼는 단순한 생활로 돌아가야함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풋타 사탄’에 사는 모든 자들은 자신이 입을 옷의 천을 스스로 짜며, 쌀을 직접 빻고, 채소를 손수 기르고, 식수원을 자체적으로 마련한다. 그리고 모든 식품과 생활필수품들은 센터의 창고에서 공급받는다. 공산주의적인 이상적 공동체를 상기시키는 이러한 경제 구조를 가진 산띠 아속은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으로부터 비롯되는 자본주의적인 소비문화를 공격한다. 산띠 아속은 현재의 사회구조의 바탕에는 물질에 대한 탐욕, 감각적 쾌락의 추구, 나태 등으로 대표되는 인간심리의 “심층구조”(deep structure)가 놓여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물질만능주의를 버리고 “분 니욤”(bun niyom) 즉 “공덕주의”(功德主義)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친다. 이러한 주장은 산띠 아속의 유명한 슬로건인 “적게 먹고, 적게 쓰고, 많이 일하고, 사회를 위해 나머지를 모아두자”에 뚜렷이 나타난다. 둘째, 산띠 아속은 불교적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테라바다불교의 타이 사회에서는 불교도들의 모든 종교적 행위의 축에 상가를 두어 재가신도들의 공덕행위도 일단 비구를 거쳐야 유효한 것으로 간주한다. 승려 중심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재가신도들의 도덕적 책임의식을 크게 문제삼지 않아, 대부분의 태국 불교신자들은 술을 마시거나 거짓말을 하고 간음을 해도 심각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이에 대해 산띠 아속은 승려, 재가신도 모두 담마에 따라 도덕적 행동을 하는 불교적 공동체를 구상한 것이다.

          산띠 아속의 불교적 공동체는 그러나 ‘풋타 사탄’에서 연상될 수 있는 은둔주의자들의 공동체가 아니다. 산띠 아속은 오히려 사회적 개혁에 참여하지 않으며 재가신도들과 거의 접촉을 하지 않는 숲 속의 수도승들을 비판하면서, 세상의 일들에 대한 참여를 자신들의 사회적 책임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간주한다. 또한 타이 사회의 폭력, 마약, 섹스 등 비도덕성과 정부의 부패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충분한 역할을 하지 않는 전통적인 태국 불교를 비난한다. 심지어 사회적 문제들은 불교적 도덕의 쇠락이 그 원인이며, 이에 대한 책임은 나약하고 부패한 태국 상가가 져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적 행동주의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산띠 아속 운동의 여러 회원들이 특히 부패 문제 및 반체제적인 이슈와 관련하여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는 데 기여했다. 산띠 아속 운동의 사회개혁과 정치참여에 대한 강조와 관련하여 태국의 저명한 정치인인 짬롱 시므앙(Chamrong Srimuang)과 팔랑탐 당(Palang Dhamma Party)의 활동에 대해 일별할 필요가 있다. 짬롱은 산띠 아속의 엄격한 생활스타일과 불교적 공동체 그리고 도덕성에 대한 강조에 이끌리어 1978년 그 회원이 되었다. 그 후 이 운동의 정신이 짬롱의 정치적 활동에 끼친 영향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예컨대 총리처 비서실장으로 있었던 1980년 그는 지방을 다니면서 마을주민들에게 불교의 계율을 지키며 육식, 음주, 흡연을 삼갈 것을 촉구했다. 1985년에는 산띠 아속의 사회적 행동주의에 대한 강조에 부응하여 방콕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선거캠페인에서 기존 정치권에서의 정치권력의 남용과 만연하는 부패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짬롱의 도덕적 정치관은 “미스터 클린”(Mr. Clean), “반 속인, 반 승려”(half-man and half-monk) 등으로 불리는 그의 청교도적인 생활스타일로 더욱 강한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다. 헌신적이며 개혁적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를 보여준 그는 선거에서 압승했는데, 여기에는 한편 산띠 아속의 효율적인 선거운동이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산띠 아속 운동이 전국적으로 점차 많은 지지자를 획득하고 있다고 판단한 짬롱은 1988년 ‘담마(불법)의 힘’이라는 뜻을 지닌 팔랑탐 당을 설립했다. 당의 핵심멤버는 산띠 아속의 회원이었으며, 1988년 7월 총선시 팔랑탐 당의 300명 입후보자들중 반 이상이 산띠 아속 소속이었다.

          산띠 아속 운동은 철저한 계율 준수와 검소한 생활자세로 많은 타이인들에게 매력을 주었으며, 타이 사회 전반과 특히 상가에 대한 도덕적 비판으로 많은 호응을 받아왔다. 그러나 귀에 거슬릴 정도로 지나치게 격렬한 비판의 논조는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무엇보다도 상가의 권위에 대한 반항과 매우 급진적인 불교관은 기존의 불교계와의 심각한 갈등을 야기했다. 특히 포티락이 상가와의 모든 관계를 포기한다고 선언해 놓고 승려의 신분을 계속 유지해 온 것은 그가 합법적인 상가의 제도적 관할과 상관없이 나름대로의 종파를 이루어 독자적인 불교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새로운 승려들을 임의로 수계(授戒)함으로써 분명히 보여주었다. 태국 상가의 최고위원회는 마침내 포티락과 그의 산띠 아속 운동을 징벌하는 조처를 내리기로 결정하여 1989년 5월 포티락을 태국 상가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했다. 공식적인 혐의의 내용은 그가 상가의 재가없이 80명의 승려들에게 수계식을 행한 것과 또한 자신이 높은 수도의 경지에 도달한 자라고 스스로 주장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아리야뿍갈라’(ariya-puggala) 즉 초시공적(超時空的) 경지에 이미 도달한 자라고 선언했으며, 어떤 인터뷰에서는 ‘아리야뿍갈라’의 경지에서 자신은 니르바나에 이르기까지 최대한 일곱 번만 더 태어나면 되는 ‘소따빤나’(sotāpanna)의 단계를 거쳐 이제는 한 번만 더 태어나면 되는 ‘사까다가미’(sakadāgāmi)의 단계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1989년 6월 19일 포티락과 그를 추종하는 79명의 승려들은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그들은 곧 보석으로 풀려났다. 포티락에 대한 재판은 그 후 수 년간 계속되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포티락은 불교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승려의 신분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끝까지 버텼고, 결국 1995년 12월 29일 그가 집행유예선고를 받음으로써 재판은 일단락되었다. 이로써 산띠 아속에 불법이라는 낙인을 찍어 그 운동의 발전을 저지하려는 상가의 원래의 의도는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산띠 아속은 엄격한 도덕주의에 입각한 청교도적인 공동체 생활을 계속해서 옹호하고 있지만, 상가의 끊임없는 간섭과 통제를 감안해야 하는 산띠 아속의 장래는 불확실하다.



      5. 탐마까이 운동


          오늘날 태국에서 도시 대중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여러 불교 개혁주의 운동 가운데 외형적으로 가장 성공적이며 가장 빨리 성장하는 운동으로서 탐마까이(Thammakai; 팔리어 dhammakāya) 운동이 있다. 이 운동은 공식적으로는 대개 1970년에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그것은 이 해에 탐마차이요(Dhammachaiyo)가 그의 동료인 탓따치워(Thattachivo)와 함께 방콕 북쪽의 빠툼타니(Pathumthani) 지방에 현재 이 운동의 중심체인 왓 탐마까이(Wat Thammakai)를 설립했기 때문이다. 탐마까이 사원은 처음에는 약 75 에이커의 부지로부터 출발했으나 지금은 1,000 에이커를 넘는 대지를 갖고 있다. 여기에는 현재 웅장한 현대적인 법당 건물 외에 매주 주말과 주요 명절에 수천명씩 찾아오는 이 절의 후원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여러 부속건물들이 있다. 탐마까이 운동의 조직의 중앙에는 재가신도들이 경영하고 승려들이 감독하는 탐마까이 재단(Thammakai Foundation)이 있다. 1970년에 창설된 이 재단의 산하에는 행정사무국, 재가신도 협동 센터, 정보 센터, 시청각 센터, 교육 및 도덕훈련 센터, 사회봉사 센터 등등 다양한 분과가 있다.

          풋타탓의 수언 목 운동처럼 명상수련을 중시하는 탐마까이 운동은 정신적인 전통으로 볼 때 루엉 포 솟(Luang Pho Sot, 1884-1959)이라는 승려가 개발한 특별한 명상수련법에 그 바탕을 둔다. 톤부리(Thonburi)의 왓 빡남(Wat Paknam)의 주지로 있었으며 프라 몽콘 텝무니(Phra Mongkhon Thepmuni)의 이름으로도 알려진 그는, 전해진 바에 의하면, 어느 날 명상에 잠겨 있던 중 “탐마까이” 즉 ‘담마의 몸’을 관찰했다. 여기서 ‘탐마까이’는 붓다의 영원한 영적인 실체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루엉 포 솟은 붓다의 영적인 실체와 니르바나가 인간의 몸 속에 내재하며 이 영적인 실체는 올바른 명상의 통찰력을 통해 발견될 수 있다고 본다. 탐마차이요와 탓따치워는 모두 루엉 포 솟의 명상수련 전통을 계승한 자들로서, 이들은 1969년 왓 빡남에서 수계했다.

          오늘날 탐마까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명상수련자가 탐마까이의 명상법으로써 위의 통찰력을 획득할 수 있으며, 숙련된 탐마까이 명상수련자는 전생(前生)과 존재의 다른 차원들을 방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탐마까이 방식의 명상은 니르바나에의 도달을 더욱 빨리 촉진시킨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그들은 인간의 몸 속에 여러 층의 몸이 존재하며 그 중 가장 정교한 몸은 흰 연꽃으로 나타나는 불상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아홉번째 몸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를 니르바나로 이끄는 ‘탐마까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에 의하면, 붓다의 실체인 탐마까이에 도달하는 길은 명상수련 밖에 없으며, 이 길을 통해서만 니르바나에 이른다. 탐마까이를 니르바나에 이르는 길과 동일시하는 것은 비록 대부분의 불교 학자들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렵지만, 탐마까이 명상수련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교리문제의 타당성 여부에 신경쓰지 않는다. 이들이 관심두는 것은 탐마까이 방식에 따라 명상수련을 하고 그 과정에서 구체적인 영적 희열을 체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탐마까이측은 말하기를, 명상수련의 깊이에 따라 명상수련자가 관찰하는 불상의 크기가 변한다고 한다.

          탐마까이 사원은 명상수련자가 구체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일정 액수의 돈을 시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명상수련 참가자들은 왓 탐마까이에 올 때 마다 돈을 기부해야 한다. 탐마까이의 재정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왓 탐마까이는 탐마까이 테이프와 책, 탐마까이 연필과 공책, 탐마까이 가방과 양산, 탐마까이 명상의복, 탐마까이 저금통 등등 절에서 사용되는 물건들을 판다. 또한 여러 곳으로부터 대규모의 기부금을 받는다. 그밖에 탐마까이 재단은 제약회사, 분유회사, 출판사 및 인쇄소, 호텔, 토지, 관광사업, 석유회사 등에 투자하여 이익을 추구한다.

          고도의 자본주의적 이미지를 주는 탐마까이 운동은 그동안 타이 사회의 다양한 각도로부터 비판을 받아왔다. 어떤 자들은 예컨대 이 운동의 전략과 목표가 지나치게 세속적이라고 지적한다. 4천만 US$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고 공격적인 방법을 써서 신입회원을 끌어모으며 상업적인 자세로 포교에 임하는 이 운동에 심지어 “종교적인 소비자 중심주의”(religious consumerism)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레테르가 붙여졌다. 또한 탐마까이 운동은 경제적 및 정치적 지배엘리트에 의해 통제되어 왔으며, 태국의 증가하는 사회적 및 경제적 문제의 해결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다고 지적되었다. 그밖에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불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운동의 창시자의 영적인 능력을 과장되게 선전했다고 비난되었다. 탐마까이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자중의 한 사람인 전 총리 큭릿 쁘라못(Kukrit Pramoj)은 왓 탐마까이의 부주지인 탓따치워가 이 절이 차후 적어도 4만 에이커로 확대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예로 들면서 탐마까이의 상업성을 꼬집었다. 이와 함께 그는 왓 탐마까이가 마치 행복을 파는 오락시설이나 레저 공원처럼 실제로는 “종교적 즐거움”(religious pleasure)을 파는 사업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탐마까이 사원의 팽창은 이전에 절 부지에 살았거나 현재 절 근처에 살고 있는 농민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예컨대 1988년 4월 절 부근에 사는 마을주민이라고 여겨지는 일단의 무뢰한들이 법당안으로 난입하여 중앙불상의 양 손을 자르고 다른 부분들을 훼손했다. 같은 달에는 약 100명의 무리가 휘발유를 들고와 절을 불지르겠다고 위협했다. 치앙라이(Chiang Rai) 지방에서는 탐마까이 승려가 돌에 맞았다는 보고가 있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왓 탐마까이와 탐마까이 운동은 타이 사회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예컨대 1986년 까틴 축제에 전국 곳곳에서 1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와 탐마까이 사원의 인기를 입증해주었다. 탐마까이 운동은 또한 군부 및 정치 지도자들의 지지뿐만 아니라 왕실의 후원도 얻고 있다. 예컨대 현 국왕의 맏딸이며 태국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시린톤(Sririnthon) 공주는 1977년 왓 탐마까이의 불당을 위한 초석을 놓았으며 1981년 이래 매년 이 절에서 개최되는 대학생 하계방학 수계식에 참가하여 선발된 학생들에게 승복을 선물로 준다. 최근에는 현 총리인 차왈릿 용짜이윳(Chaovalit Yongchaiyut)과 아팃 깜랑엑(Arthit Kamlang-ek) 장군도 이 수계식에 참가했다. 그밖에 마하니까니 종파의 여러 원로 스님들을 비롯하여 기존 상가의 많은 승려들이 이 운동을 후원하고 있다.

       


      6. 종합적 관찰과 전망


          최근 태국 불교의 세속화에 관한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세속화의 위기는 비단 상가뿐 아니라 재가신도들까지도 포함한다. 위의 탐마까이의 경우에서 본 것처럼, 절들이 돈벌이 사업에 관심을 가져 신도들의 영적인 피난처가 되지 못하며, 승려들이 물질적 유혹에 빠져 정신적 역할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산띠 아속이 지적하는 것처럼, 신자들의 ‘탐분’ 행위의 동기도 불교신앙의 근본적 목적인 더욱 나은 내세를 위한 적선(積善)이 아니라 현세에서의 출세와 재물에 대한 기대 등 기복적(祈福的) 측면이 주를 이룬다는 것이다. ‘탐분’의 방식과 ‘탐분’과 관련된 의식도 변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아침공양을 이제는 더 이상 일상생활의 고정적인 일부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행하면 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심지어 음식을 사거나 만들어 공양하는 대신 현금을 드리는 경우도 나타난다. 바쁜 도시생활에서 설법을 듣는 것도 절에 직접 가서 하는 것이 아니라 테이프나 비디오 혹은 전파매체를 통해 한다. 최근 태국의 여러 유명 스님들의 설법 비디오와 테이프가 잘 팔리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가능하다. 특히 산업화, 도시화의 소산이라고 보여지는 이러한 현상은 무엇보다도 신흥 부유층 및 중산층이 사는 도시 근교의 새로운 주택단지들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이들의 주거문화에서는 절이 마을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전통적인 공간개념을 확인할 수 없다. 즉 이들의 주거공간은 절과의 직접적 관계가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도시의 교통난을 무릅쓰고 도심지의 절에 가서 정기적으로 참배하는 것은 소수의 독실한 불교신자들 외에는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배경에서 최근 신흥 주택단지에 절들이 들어서고 있다. 종교적 전통은 문화의 다른 요소들이 그러하듯이 정체적이지 않다. 종교적 전통은 그때마다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의 변화에 부응하여 역시 변하게 마련이다. 태국의 불교적 전통도 빠른 산업화와 더불어 일어나는 주거 공간의 변화와 주민들의 인식의 변화에 따라 변할 것이다. 종교의 개혁주의 운동이 이러한 변화하는 흐름을 정통지향적이든 현실지향적이든 미래지향적이든 바로 잡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때, 태국 불교의 개혁주의 운동은 이 글에서 살펴본 세 가지 운동말고도 앞으로 다른 형태와 방향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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