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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태국선교에 관한 서적 본문

선교 EH국/태국 선교

태국선교에 관한 서적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2. 10. 6. 11:48

 태국선교에 관한 서적 : 정승회


    제목 : 태국인의 위험과 (정승회선교사 태국선교 15년이야기)   저자 : 鄭勝會宣敎師

    책 전문임.


    목 차


    1. 태국선교에의 소명과 준비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이리북일교회 부임과 이임

    왕십리교회에서의 나의 선교사 준비

    63회 총회에서 선교사로 인준

    김준곤목사와 쏨디박사의 교섭

    태국기독교총회와의 선교사 파송 교섭

    태국교회진흥원의 선교사 초청

    위라전도사와의 태국어 교습

    여권만들기

    선교사 파송예배와 태국으로 출발


    2. 태국도착과 선교지에의 적응


    던므앙 국제공항 도착과 태국교회 지도자들의 환영

    C&MA 궤스트하우스에 여장을 풀고

    방콕한인연합교회에서 태국도착신고 설교

    태국교회진흥원 사무실 2층에 보금자리를 정하고

    ULS에서의 태국어 학습

    티라학장과 쿤머 헨리

    깐짜나의사의 식사 초대

    에어컨 버스를 휴식처 삼아

    줄줄 흘러내리는 냉장고

    뜨거운 바람만 불어대는 선풍기

    뚝깨소리, 귀신 소리

    호텔 같은 SC Court 그러나 피난민 수용소

    비자 문제로 10Kg쯤 빠지고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를 설립하고

    20명이요, 문교부 종무국의 기독교 단체 지도자 회의

    한달씩 중복되는 왕십리교회의 선교비 송금

    6개월만에 받은 선물, 자동차

    꾸웨이띠아오의 참맛

    11개월만에 태국어 국가고사 합격

    쿤 마나에서 아짠 차나 정으로

    진짜가 왔다 /태국교회 방문과 태국교회 이해

    수안푸루교회를 내 교회처럼

    짜장면이요

    태국음식이 한국음식보다 낫다


    3. 초기 선교 사역을 시작하며


    쁘라니와 가정부 전도 전략

    위라전도사의 준교회 개척 지원

    한인회관 2층에 까우타이교회를 개척하고

    새벽기도회와 쏨뻥전도사와 쁘라씻전도사

    국민학교 졸업생과 쭈라롱꼰대학교 전도

    찬송가를 1시간씩 불러 재키고

    가정부의 찬송 실력이 전도사보다 낫다

    가정부의 아버지는 여러번 죽어

    결혼식은 예배보다 중요해

    딸의 결혼식 주례는 아버지가 적격이고

    결혼식 때는 남의 신사복 빌려 입고

    쁘라차니뛕 국민주택내의 어린이 주일학교

    깐짜나의사의 새집에서 쁘라차니뛕교회 개척

    한국교회의 재현

    최초의 집사 임명

    귀신들린 여자

    삼낭코트에서 10년을

    방콕 경찰 비행단 관사내의 어린이 여름성경학교

    반 크렁부아 국민학교내의 어린이 여름성경학교

    장인 장모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이것이 태국 신학생들이다.

    싸롯전도사의 교회개척 훈련

    쏨뻥전도사의 사임

    아피씻전도사의 부임과 그의 부인

    아피씻전도사와 쌍옵전도사

    신학생들의 합숙 훈련

    학생부부의 집세를 빌려주기까지

    쁘라차니뛕교회 주변 학교전도

    무반 랏야오 전도

    어린이 여름성경학교 개최

    푼쑥 여전도사 사건

    정인희 음악선교사의 올갠학교

    타위싹전도사의 1주일 훈련

    에어컨속의 파란색 독사

    밥먹어라로 손님 대접

    13노회를 도왔기에

     

    4. 선교의 위기와 도약/중기 선교 사역에 돌입하며


    새로운 선교사의 초청/도움되는 것만은 아니다

    방콕한인연합교회의 분열과 불똥

    우리 총회의 태국기독교총회내의 6개월짜리 생명 사연

    태국인 동역자와의 동상이몽과 선교의 위기

    쁘라차니뛕교회를 떠나서 인터내셔널 처취를 다니면서

    너 이야기를 들으니 어떤 날강도 이야기를 듣는것 같다

    짜란박사부부의 격려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 고문단들이 울타리가 되고

    아피씻전도사의 응암옹완교회 개척과 결과

    제3회 태국대전도대회 운영위원으로 태국교회지도자 반렬에

    왕십리교회의 후퇴

    성현교회와 한국내 태국선교 후원회 구성


    5. 방콕목회대학원 설립과 목회자 재 훈련


    목회자 재 교육과 훈련의 필요를 느끼며

    목회자 재교육의 효시 방콕목회대학원의 개원

    방콕목회대학원 교실용 건물을 은행 융자로 구입

    최고의 교수진

    목회자 전문 훈련 과목

    디렉박사의 대지 헌납 그러나 역부족

    방콕목회대학원 졸업예정자 한국교회 목회 실습

    제1회 방콕목회대학원 학위수여식

    제2회 방콕목회대학원 학위수여식

    태국교회지도자들의 한국교회 방문 견학과 훈련

    신학생과 새벽기도회

    내가 네 아버지냐?/신학생과 헌금

     

    6. 태국장로교회 개척과 육성


    태국내 유일한 장로교회로 출발

    반 역사적인 사역이 될수도

    중태지방 단창교회 개척

    북태 씨삼롱교회 개척

    산족교회 개척(치앙라이도)

    북동부지역 교회개척(치앙칸/빡촘/쌍아우/반나번)

    깐타라위차이교회 개척

    탄프라폰교회

    끄라누언교회 개척

    레누나콘교회 개척

    파야맹라이교회 개척

    최초의 목사고시

    한국교회지도자들의 목사안수 대상자 인터뷰

    최초의 목사안수식


    7. 산족선교


    처음으로 산족을 방문하고 추워 죽을뻔한 사연

    말랭쌉이란 보약을

    산족들은 이미 서양선교사들의 먹고 남은 찌꺼기

    산족교회사역자 훈련원

    산족으로 가는 길은 철책선의 좁은길

    원숭이처럼된 사연

    교회당 건축

    라후족 정말로 한국인이라고 믿어도 좋은가?

    수찻전도사

    산족 음식이 좋았던 시절

     

    8. 라오스선교로 확대


    쏨낏장로를 통해온 마게도니아인의 환상

    라오스복음교회총회 요원들과 사무실을 지원하고

    10주년기념식에 참석한 라오스 교회 대표들

    더욱 멍청해 지는 라오스 선교사연

    라오스 교회사역자 15인 지원과 목회훈련

    라오스 난민촌내의 라오스교회사역자훈련원

    캄폰목사와 푸위앙장로

    닛따야목사를 라오스 선교사로 파송하고


    9.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 운영

     

    선교부의 설립과 등록

    20명의 선교사 비자를 거저 얻고

    서구교회 주도의 선교시대의 후퇴를 체험하며

    갖은자의 고충을 실감하고

    팀 사역은 불가능해 그러나 동역 선교사는 꼭 필요해

    운영비 없이 운영하는 사무실

    비자를 팔아먹는다고

    변해가는 태국복음주의연맹


    10. 선교 논설들


    선교사의 안식년 문제

    선교사의 선교보고 문제

    불교국인 태국 선교 전략

    태국교회를 도울때 고려해야 할 사항

    선교 현지 교단과의 협력사역의 장단점

    총회 태국선교지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타 문화권 교회개척론

    태국의 일반적 상황

    태국의 기독교 상황

    서구 선교사들의 태국선교

    한국 선교사들의 태국선교사역의 이모저모

    한국교회의 태국선교에 대한 비젼

    태국내 한인교회들

    해외 한인교회의 선교적 사명


    11. 선교적 설교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신앙의 기념비(막14:3-9)

    선교란 성령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

    날마다 성장하는 교회

    임마누엘의 복(마28:16-20/1:23)

    종교적인 태국인(행17:16-23)

    한국교회의 태국선교적 책임(행16:16-34)

    천국잔치 준비에의 초대(눅14:17-24)

    매수된 증인들(마28:11-15)

    바울과 아굴라부부(롬16:3-4)


    12. 그 밖의 이야기


    자녀교육

    집 장만하기

    태국어 능력 향상 비법

    자동차는 언어훈련중에나 필요하다

    비자 문제

    선교사의 보고서 문제

    선교사의 욕심과 죽음

    한국교회의 선교지 방문

    총회의 해외선교정책

     

     

     

     


    본문


    1 태국선교에의 소명과 준비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1977년 초여름 어느 날 나는 기독신보를 받아들고 여느 때와 같이 소식꺼리와 광고란을 흩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왕십리교회에서 게재한 태국선교사 모집광고에 눈이 멈추면서 돋보기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실 이 광고는 전에도 몇 차례 접한바가 있었으나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는데 오늘 새로운 것을 보는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나의 눈과 마음을 한동안 멈추게 하였다. 곧이어 내 마음속에 "주께서 나를 태국 선교사로 부르시는가?" 라는 의문과 함께 "설마 선교의 宣 자도 모르는 나를?" 이라고 단정하였지만 나의 두 눈과 마음은 종내 큰 글자로 보이는 선교사 모집광고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리고는 "만약에 나를 선교사로 부르신다면?"이란 마음으로 발전하였고 "나 자신이 선교사에 대한 관심을 둔적도 없고 훈련도 받아 본 일이 없는데?" 라는 생각과 함께 무거운 마음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간 이 선교사 모집 광고문을 몇차례나 읽었는지 모르며 몇분, 몇시간이 흘렀는지도 기억은 없다. 그러나 상당한 시간을 이 광고문에서 떠나지 않았고 " 혹시 하나님이 나를 태국 선교사로 부르실런지도 모른다" 는 생각과 함께 "나는 선교사로써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을 뿐아니라, 선교비를 마련할 수 있는 소질이 없지마는-지금도 그렇치만-하나님께서 선교사로써 훈련 시켜주시고 태국에서의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일에 모든 것을 다 책임져 주신다면 여부가 있겠는가?" 라는 믿음과 함께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시험해 보기로 작정하고 끝내 선교사 지원서류를 준비하여 왕십리교회에 송부는 했으나 그 교회가 나를 전혀 모르기에 별 기대는 갖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왕십리교회가 나를 선교사로 선발한다면 이는 분명히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기로 할 뿐 아니라 모든 약속을 지켜 주시겠다는 응답으로 믿기로 확정하고 조용히 기도하며 준비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후 약 1년쯤 지난 어느 토요일 밤에 전혀 생각지 않은 꿈을 꾸게 되었다. 그 꿈은 주일 아침 예배 전에 예배당에 오는 교인들을 영접하고 있는데 몇 사람의 부하들을 거느린 정장한 장군 한 분이 오시더니 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 분이 내가 1972년부터 3년간 철책선에서 군목으로 활동 할 당시 대대장을 비롯하여 중대장 4인과 사병 200여명에게 세례를 베푼 적이 있는데 그때 세례를 받은 대대장 김중령 이었다. 그가 말하기를"내가 이 지역 사령관으로 발령 받아 왔는데 목사님 소식을 든고 인사차 들렸다"고 하였다. 사실 군목을 마친 후 이 분의 소식을 들은 적이 전혀 없었기에 이 꿈은 뜻밖의 일이지만 이 꿈을 꾸고 선교에 대한 어떤 소식이 오겠다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 당시 나는 선교사에 대한 무지, 무능으로 상당한 부담과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은 나에게 과거에 있었던 성공적인 사역을 상기 시켜주시므로 선교사의 사역에 대한 확신을 주신 것으로 믿었기에 이 꿈은 장래의 나의 선교사역과 관련하여 큰 확신을 주는 꿈이었다. 그 꿈을 꾼 다음날은 주일이었다. 오후에 왕십리교회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승회목사님 이십니까? 왕십리교회 선교부장 서창영장로 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소식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직도 선교사로써의 헌신의 마음은 변하지 않으셨는지요?" 사실 나는 선교사 서류를 제출하고 그 달 마지막 주일에 당회가 열릴 것이니까 다음달 초에는 무슨 결과가 있겠지 라고 기대하고 있었으나 소식이 없어서 과연 선교사로 부른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오늘 받은 전화는 뜻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왕십리교회가 선교사로 부른다면 하나님이 나를 선교사로 부르신 줄로 믿겠다고 확정하였기에 "선교사로써의 헌신의 마음은 여전하다" 고 하면서 "그러나" 라고 말을 이으려니까 말을 즉시 받으면서 "그러면 되었습니다" 라고 말한 후 "오늘 우리교회 당회가 목사님을 선교사로 모시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라고 말하고 당시 부목사 이었던 장익목사님이 전화를 바꾸어 격려의 말을 한 후 전화를 끊었다. 선교사 서류를 제출하고 너무나도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서 잊어버린 상태에 있었기에 나는 한 동안 멍하여 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이상 따르는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마음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이리북일교회부임과 이임


    당시 나는 군목을 마친 후 1975년 이리북일교회의 청빙을 받아 담임목사로 3년째 목회하는 중에 하나님의 은혜로 100명에서 200명의 집회가 되는 교회로 부흥하였고, 3인의 장로를 피택하였고, 청소년 교육에 힘써 그 당시 청소년 중에서 신학교 지망생이 생기고, 낡은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하여 재정을 준비하여 후임으로 하여금 예배당을 짓고, 장로를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막상 선교사로 떠나려 하니 많은 교우들과 노회의 어른들이 교회의 장래를 염려하여 모든 일이 좀더 완성 될 때까지 더 시무 해 달라고 강력하게 말렸다. 교우들은 연판장을 돌려 강제로 막으려 했고 증경 총회장을 지나신 이기하목사님은 장로를 장립한 후에라도 떠나라고 권하였으며 복중에 있는 아이를 놓고 사내아이면 주님께 바치겠다고 기도하고 지금까지 뒷바라지 해주시던 모친 최공순 권사님은 나의 아내를 권하여 선교사로 가는 것을 막으시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대쪽같은 나는 하나님께 한번 약속한 것이기에 지켜야한다고 한 마디로 거절하였다. 사실 나는 이 교회를 목회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복을 받았다. 결혼한지 3년이 지났으나 아직까지 아기 소식이 없어서 부모님은 많이 염려하고 있었는데 이곳 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아내는 임신하였고 1년 후에 난산을 통해 첫딸을 낳았다.


    1978년 5월말 나는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날 교우들의 눈물을 보면서 왕십리교회로 이사하였고 약 1년간 선교사로써의 훈련을 받은 후 1979년 12월27일 3살반 짜리 딸과 1살반 짜리 아들을 데리고 태국으로 떠났다.






    김준곤목사와 쏨디박사의 교섭


     


    태국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총회도 이 일에는 속수무책이었고 태국 선교에 주름을 잡고 있던 선교단체는 같은 단체가 아니라고 냉대하였기에 길이 없어 보였다.


    마침 하나님은 한국대학생선교회의 대표이신 김준곤목사님을 통하여 태국의 쏨디박사(현재 태국성경공회 총무) 에게 부탁하여 태국선교의 길을 열게 되었는데 태국기독교총회(CCT)와의 교섭에는 기존 한국 선교단체의 활동으로 실패하고 태국복음주의연맹(EFT)에 정선교사를 소개하여 마침내 1979년 9월에 EFT 총회장 짜란박사의 초청장을 받게 되었다. 초청장에는 EFT는 선교사를 초청하는 직무가 없는 친교단체 이지만당신을 태국교회진흥원(Thailand Church Growth Committee)에서 사역할 선교사로 초청한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태국선교사로 파송받은 한국선교사들은 모두 CCT총회에 소속되어 있었고 한국교회는 1969년에 선교단체를 중심하여 조직되고 정부에 등록된 태국복음주의연맹(The Evangelical Fellowship of Thailand)에 대하여는 아는바가 없었다. 선교사 초청장을 받아들고 총회와 문공부 종무과, 외무부 여권과를 수 십차례 드나들면서 겨우 10개월 짜리 여권을 받아 들었으나 이는 가족을 동반 할 수 없는 여권이기에 재교섭을 벌리던 중 박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오히려 전보다는 쉽게 전 가족이 여권을 받았는데 "경유지 없음" "목적지 태국"으로 된 1년 짜리 단수 여권이었다. 이 과정은 마치 빗속을 빠져나가는 스릴 마져 느끼게 했다. 왕십리교회의 선교사 후보생으로 출발한지 1년 5개월 만인 1979년 12월16일 총회선교부 주관으로 파송예배를 드리고 모든 짐을 준비하여 12월 27일 태국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왕십리교회는 단독 지원하여 보내는 선교사를 배웅하기 위하여 김포공항에 모였고 당회장이신 서재신목사님의 설교와 기도, 그리고 교우들의 찬송은 김포공항을 왕십리교회 예배당으로 만들었다. 장시간에 걸쳐 작별 인사를 나눈 후 공항 여권 검사대로 향하였을 때 1살 반짜리 碩이가 자꾸 밖으로 도망치려 하였고 배웅객들은 "어린것이 얼마나 고국을 떠나기 싫었으면 저럴까?" 하고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그러나 더욱 애석한 것은 혹시 생의 마지막이 될런지도 모르는 공항 배웅을 위하여 이른 새벽 전주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달려온 작은누나가 조금 전에 동생이 공항에 들어갔다는 배웅객들의 말을 듣고 허망하여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라는 소식을 태국에서 들었을 때 공항 배웅시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내가 허망해 하고 있었을 누나와 큰아들을 이국으로 보내면서도 눈물을 감추고 계셨던 부모님과 형제들이 한 바탕 초상을 치룬 사람들처럼 되었을 것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된 것은 태국으로 출발하던 전날부터 몇 십년 만의 폭설이 있고 강추위가 갑자기 몰아 닥쳐서 도로가 온통 얼음 바다가 되었기에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설교시를 제외하고는 거의 눈물을 보인 일이 없으며 울고짜는 연속극도 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그때를 회상하면서 이 글을 쓰게 될 때 흐르는 눈물과 감정을 억제하기 위하여 수차례 화장실을 드나들었다.


    우리가 탄 비행기가 이륙한 것은 폭설로 인하여 예정시간 보다 약3시간쯤 지연된 후였다. 모든 승객이 비행기에 탑승한 후에도 비행기는 이륙하지를 않더니 종내 한 부부가 여러 자녀들을 둘러 업고, 손에 잡고 그 추운 겨울에 비지땀을 흘리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대만으로 떠나는 김홍초선교사와 가족들이었다. 그도 역시 대구에서 이른 새벽에 출발하였는데 폭설로 인하여 이렇게 늦게 도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탄 비행기의 경유지인 대만에 내리게 되어 선교지는 나 보다 먼저 도착하게 되었다.


    2.

    드디어 우리가 탄 비행기가 방콕 던므앙 국제공항에 저녁 11시 30분에 도착되었다. 아이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기에 흔들어 깨워서 들추어 메기도 하고 걸리기도 하여 모든 수속 절차를 마치고 대합실로 나오니 오밤중이었으나 우리를 초청한 태국교회진흥원의 원장 위치안박사, 태국복음주의연맹회장 짜란박사 부부, 방콕성서대학장 티라박사, 태국교회진흥원 간사 씰라뛕목사 등이 나와서 "푸앙말라이" 라고 부르는 꽃 목걸이를 각 사람의 목에 걸어 주면서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그러나 한 겨울인 한국에서 태국에 도착하니 태국도 겨울철이어서 시원한 때라고 했으나 섭씨 26도였고 온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말았다. 이들은 우리 일행을 C&MA궤스트 하우스로 안내 하였을 때는 태국시간이 2시간이 늦게가지만 12시가 넘어서였다. 이곳에 도착하니 정문에 있는 형광등 밑에는 산에서나 볼 수 있는 도마뱀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碩이는 이를 보고 무서워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떼를 쓰다가 끝내 한국에서 사귀고 이곳까지 동행한 위라전도사를 놓아주지 않아서 같은 방에서 우리 4식구와 위라 전도사가 함께 자게 되었다. 태국교회 지도자들은 너무도 민망하여 위라 전도사를 그 방에 들어가지 말라고 강권하였으나 우리의 형편이 그렇기에 그날 저녁만은 한 식구처럼 지나야 했다. 숙소가 정해지고 마음이 잠시라도 안정이 되니 아이들이 비행기에서 식사를 하지 못했기에 배가 고파서 무엇이든지 먹고자 했으나 시골 출신인 위라전도사는 자기 자신이 겁이 나기에 이 시간에는 아무 것도 살 수 없다고 하여 아이들을 달랜 후 우선 도착 감사 예배를 드리고 당회장 목사님께 안착 서신을 쓰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 다음날 우리는 김정웅선교사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KIM선교부 소속으로 방콕한인연합교회를 담임하면서 선교를 하고 있는 한국선교사로써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즉시 나에게 다음 주일 설교를 부탁하였고 태국을 전혀 모르는 우리는 반가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 인연으로 우리는 2개월간 방콕한인연합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한국인 선교사가 태국에 오면 그는 어느 교단이 되었던지 설교를 부탁하여 선교사와 한인교회가 친교를 나누도록 주선하곤 하였다. 후에 이런 풍조가 사라진 후 한인교회는 사분오열 되어 현재 방콕에 만도 5개 교회로 분립되었고 이런 상황이 한국교회의 실체이나 우리들의 수치스러운 곳을 태국교회에 보여 주고 있고 태국교회 지도자이 이에 대한 좋치않은 인상을 갖게 되었기에 태국 선교에 조그마한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서 한국교회나 선교사들이 개인의 사욕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역에 흠을 내지 않고 좀더 성숙한 사고와 사역이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3. 선풍기는 더운 바람만불어대고


    태국교회진흥원(TCGC)은 우리의 숙소를 방콕 제2교회 근처인 쌈얀지역의 나렛 도로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TCGC 사무실의 2층에 마련해 놓았기에 2일 후 우리는 궤스트 하우스에서 준비된 숙소로 옮겼으며 몸과 마음이 아직 안정을 찾지 못했지만 태국어를 속히 배워야 된다는 필사적인 각오로 방콕에 도착 된지 1주일 만인 80년 1월 3일 부터 선교사를 위한 태국어 학교인 Union Language School에 등록하고 언어공부에 임하였다. 태국어 학교는 한 달에 20일, 하루에 4시간씩 언어를 가르치고 수강료는 월$100정도였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 선교사 준비 기간에 태국에서 온 위라전도사를 통하여 태국어를 좀 배웠기에 이곳에 떨어졌을 때는 태국어를 조금을 구사하고 있었다. ULS는 선교사를 위해 세운 학교로 태국어 국가고사에 대비하여 읽기, 쓰기를 집중적으로 교육시켰으며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이 학교의 과정을 약 1년 정도 마치면 국가고사에 합격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 학교의 약점은 완벽한 발음훈련이 부족하여 태국어 발음이 분명하지 않는 반면 미국 공보원의 AUA는 발음을 중점적으로 훈련시키기에 열심있는 선교사는 AUA에 이중 등록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우리도 태국어를 속히 마스터 해야 한다는 일념에 가득차서 태국어 외엔 어떤 것도 관심 밖이었기에 사무실 관리인만 믿고 3살반, 1살반 짜리 아이들을 집에 버려둔채 아침 7시이면 도보로 20분 거리인 씰롬거리에 위치한 언어학교를 갔다가 12시 20분 정도이면 귀가하였는데 그 동안 어린아이들은 상거지가 되곤 하였다.


    이는 3살반 짜리 혜린이에게 1살반 짜리 석이를 맡겨 놓았기에 석이는 오줌과 흙, 먼지로 뒤범벅이 되었고 태국식 집에다가 주변에 잡초들이 많아 모기들이 물어뜯었고 가려워서 긁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이것이 잘못 되었다고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느꼈고 집에서는 태국어만 사용하기로 하고 새벽부터 알아듣지도 못하는 태국어 방송을 틀어 놓고 싸움이나 하는 것 같은 새벽 뉴스에 귀를 기울이곤 하였다. 이 열정은 지금도 버리고 싶지 않으나 15년 전의 일을 회상하면 귀엽게 성장해준 애들을 보면서 그들은 전혀 기억을 못하겠지만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한다. 그뿐 아니다 우리들은 태국에서 죽기로 작정한 몸이어서 불 같은 더위나 태국 고유의 음식 및 향불 냄새도 감내하며 오직 태국어 학습에만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한 달쯤 되었을때 우리는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떠나야 했다. 이 집은 태국식 2층 목조 건물로 태국인들에게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았으나 우리들에게는 좀 어렵다는 것을 겨우 깨닫기 시작한 것은 애들 뿐만 아니라 집사람마저도 더위와 모기의 공격에 시달려 아름다운 종아리를 다 버리게 되었고 온 몸에는 땀띠로 가득차서 견디지를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집은 서향집이어서 오후가 되면 그 뜨거운 킘빛을 직사광선으로 받았기에 불덩이 집이 되었고 눌자리 하나 찾기 어려웠으며 심지어 냉장고의 얼음이 녹아 내리기까지 하였다. 때문에 나는 오후 시간이면 쉴 곳을 찾지 못하여 지도를 펴들고 시내로 나가서 에어컨 버스를 타고 피서겸 거리를 익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저녁이면 낮에 달구어진 열기로 계속 더웠기에 선풍기를 밤새도록 틀었지만더운 바람만 불어댔고 모기의 공격을 피하려고 모기장을 치고 모기향을 피우는 등 각종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고통 당하는 것은 모기가 아닌 우리들이었다. 그래도 이북산 "모긔향" 은 이북 공산당 처럼 얼마나 독하든지 다른 모기향에 비하여 좀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그때의 우리의 상황을 알고 있는 신현교회 출신의 음상하 장로(현재 LA 포도나무교회 담임목사)는 후에 증언하기를 그때 애들을 보니 더위와 모기등으로 시달려 비정상적인 아이처럼 보였다고 말하였다.


    한달 후에 우리는 외국인들이 많은 수쿰윗 거리에서 멀지 않은 월세 $200정도의 방 한칸 짜리 아파트로 이사하였는데 응접실이 커서 애들이 자전거를 타고 즐기는데도 충분하였기에 한달간의 고생에 비하면 천국 같았으나 한인 사회에서는 피난민 수용소 같다고 했단다. 우리는 여기에서 태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태국어 학교는 썽태우라고 부르는 골목 버스와 대 도로를 달리는 시내 버스로 갈아타고 다녔으며 당시 한국에서는 귀한 그러나 이곳에서는 풍성한 바나나 만으로도 만족하고 살았다. 80년 3월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태국 적응 및 태국교회 이해를 위한 태국교회 순방을 시작하였다. 당시 방콕에는 예배당에 에어컨 시설이 되어 있는 교회는 거의 없었으며 교인들은 아주 자유스러운 복장으로 예배에 참석하였으나 나는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예배당에 갈 때는 항상 정장을 하였다. 태국어는 2개월 배웠기에 좀 대화가 되었기에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으나 예배시간의 찬송, 설교, 성경읽기, 기도 등은 거의 알아듣지를 못하여 배우려는 욕심으로 쉬지 않고 따라 부르고 한마디 말이라도 알아듣기 위하여 온 신경을 곤두세우니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한마디씩 배우는 재미와 한국교회의 성장을 아는 분들이 많아서 한국교회 이야기만 들었는데 진짜가 왔다고 가는 곳마다 귀빈 대우를 하였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인 선교사가 귀해서 한국인 선교사를 만나 본 사람이 많지 않았고 특별 복장을 하고 가니 손님 대접을 깍듯이 하였고 한국 이야기를 듣기 위하여 우리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어떤 교회는 축도를 부탁했는데 내가 태국말로 아직 못한다고 하니 한국말도 좋다고 하여 한국말로 축도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후 나는 후배들에게 태국에 도착하자 마자 태국말로 축도 정도는 암기하도록 주선하였다. 그리고 한국식으로 무엇을 판단하기에 앞서 태국교회를 순방하여 먼저 태국을 이해하고 난 후 태국을 위하여 일하는 선교사가 되도록 지도하기에 태국에 온지 3년 이내에는 아무 소리 말고 배우기만 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나와 집사람은 이런 노력을 통하여 11개월만인 80년 12월5일 태국어 국가고시에 응시하여 무난히 통과하였다. 그러나 이 정도의 태국어 실력을 가지고는 아직 선교 사역을 감당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되지도 않는 태국어로 되는 것 처럼 사용하였다.



    4


    가정부 전도전략


    아파트로 이사한 후 우리는 언어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우리 애들을 집에서 돌보아 주어야 할 가정부가 필요하여 위라 전도사에게 부탁하여 자기 고향 북쪽 치앙라이에서 장로 딸이라는 아이를 가정부로 데려왔다. 장로 집안의 아이라 장로 아들인 나는 그의 신앙에 큰 기대를 걸로 우리 아파트 내에 있는 전 가정부들의 복음화 전략(?)을 수립하고 정성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부터 실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주일 아침이면 꼭두새벽부터 교회에 나갔는데 어느 주일 오후에는 위라전도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쁘라니를 교회에 보내지 않았느냐?"는 것이며 몇 주일째 되었다고 하였다. 후에 알고 보니 주일마다 우리에게는 교회에 간다고 새벽부터 나가서는 친구들과 놀러 다녔던 것이다. 그 뿐아니다 우리들이 학교에 갔다 돌아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에 우리의 가정부 전도 전략을 실천한답시고 우리 냉장고에 있는 각종 음식 재료를 허가도 없이 사용하여 자기의 생일 잔치를 거창하게 배설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가 일을 그만 두고 돌아간 후에 그의 은혜를 입었던 다른 집 가정부들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차 실패한 가정부 선교전략을 잊지 못하고 그 다음에 들어온 가정부에게 또 정성을 쏟기 시작하였다. 매일 저녁 가정 예배시간에는 강제로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성경을 읽히고 찬송을 가르쳤는데 그는 다행히도 노래를 좋아하여 자발적으로 가정 예배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우리가 한인회관을 빌려서 예배를 시작하였을 때에는 전도사들 보다도 찬송을 잘 부를 정도였고 반 크렁부아 국민학교에서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여 가르칠 때는 자기도 선생을 하겠다고 달려드는 담대함이 있었다. 우리는 계속하여 다음에 들어온 가정부를 훈련 시켰는데 마침내 세례를 받기까지 성공하였으나 아파트내의 모든 가정부를 복음화 시키겠다는 고귀한 전략을 성취하지 못했으며 가정부가 누군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나온 바람직하지 않은 전략이었다. 이렇게 급한 마음을 먹고 아직 말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런 사역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한국교회의 선교사에 대한 과도한 선교 결과에 대한 기대에 있다. 나는 태국에 온지 약 6개월쯤 되었을 때에 어떤 열심있는 지원자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매일 새벽마다, 저녁마다, 철야하며, 금식하며 선교사님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한다" 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지금은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인데 몇 사람이나 결신하였고 세례를 주었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이에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는 그가 생각하는 것과 현지의 상황은 너무나도 판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의 현재 입장은 태국어 기초에 몰두하고 있어서 어떤 결과커녕 제반 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급한 마음을 먹는 사람에게는 급하게 일도 주시고 결과도 주시는 것을 발견 하기는 하였다. 지금도 한국에서 태국에 파송받아 와서 사역하는 한국인 선교사들이 누구나 이와같은 열심으로 가정부 복음화를 꾀하고 있으나 여기에서 파생되는 웃지 못할 일들이 허다하고 이런 계층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키려는 계획은 태국이 보이지 않는 계급 사회인 점을 감안하고 태어난 대로 살다가 그대로 가고져 하는 이들의 현실과 너무나도 이질적이어서 부정적인 전망이다. 하루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람캄행대학교 여학생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가 우리들에게 제안하기를 "내가 사람을 모아다 주면 얼마를 주겠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이게 무슨 말인지를 깨닫지를 못했다. 후에 알고 보니 다른 서양 선교사들이 누구든지 사람을 모아다 주면 사례금을 주는 예가 전부터 태국에서 활용되어 왔던 모양이었다.


    이 여학생은 우리가 선교사인 것을 알고 그런 방법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져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풋내기여서 그런 비법을 전혀 모르고 머리도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속으로 미쳤구만 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날도 태국선교가 어렵고 파송교회는 선교사에게 속한 선교 결과를 요구하기에 각종 희한한 선교 방법들이 활개를 치고 있어서 피선교지의 교회, 교인, 교역자들을 버려놓고 있는 선교사들을 자주 만나고 있다.


    파송교회들은 자기들이 파송한 선교사가 빠른 선교 결과와 보고를 했을때는 기뻐하기보다는 염려하고 선교 사역에 어떤 비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지 않는가? 선교 보고가 거짓되지는 않았는가? 하고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수십년 후에도 그 열매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태국 북동부 지역에서 있었다는 날강도 같은 태국인 사역자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미국으로 부터 선교비를 지원받아 그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는 사람인데 마침 미국 본부에서 선교지를 방문하게 되었기에 그 지역에 있는 사람에게 광고하기를 어느날 어느시에 서양 사람이 와서 쌀을 나누어 줄터인데 다 ?이라고 했다. 무얼 나누어 준다고 하니 그곳의 집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미국 대표들이 이 광경을 보니 과연 사역자의 보고대로 성공적이라고 우선 안심을 하였고 더욱 열심이 나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현지 사역자는 통역을 자기 소신껏 하였다. 그러나 설교가 끝나갈 즈음에 서양 사람들이 보통 하는 것처럼 청중들을 결신 시키려 하였다. 설교자는 "여러분들 중에서 이제 예수 믿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손을 들라" 고 하니 통역자는 "여러분 중에 돼지를 기르고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 하였다. 이때 수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미국 대표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나서 "조금 전에 손을 들었던 사람들은 앞으로 나와서 결신 기도를 드리자" 제안했을때 통역자는 "미국에 가보고 싶은 사람은 이 앞으로 나오라" 하였다. 물론 수 많은 사람들이 결신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앞으로 나왔을 때는 미국 대표단들은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이 태국의 사역자는 영웅 대접을 받았고 봉급의 인상은 물론 대폭적인 선교비의 지원을 약속하였다. 선교사를 돈으로만 보고 따르는 사람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증오한다. 나에게 이들의 요구를 만족 시켜줄 만한 선교비의 지원이 없는 원인도 있으나 나는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9:14)"는 신앙으로 태국선교에 임하고 지도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을 드려서라도 어떤 결과를 사야겠다는 선교 방법을 활용하는 사역자들을 지금도 선교지에서 간혹 만나기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5


    이 풍랑 인연하여서


    나는 처음부터 하나님께 대하여 배짱이 좋았다. 이는 내가 선교사로 갈려고 발버둥친게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선교사로 부르셨을때 "선교사 훈련과 제반 후원을 책임져 주신다면" 이란 단서를 부쳐서 출발하였기에 나는 선교비에 대해서는 풍부하던지 부족하던지 전혀 관여치 않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이 믿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금년 8월이면 큰딸 혜린이가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어바나 쌈페인)에 진학해야 하기에 년 약 2만불에 해당되는 등록금의 부담이 있지만 그저 태평함은 이런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껏 선교비 지원이 많아서 어려움 당해본 적도 없고 그렇다고 선교비가 쪼들려서 문제가 된 적도 없다고 말해야 한다. 사실 어느 때는 좀더 있었으면 태국선교를 보다 더 크게 전개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다. 한번은 자동차 기름을 넣을 돈이 없어서 다른 교통 수단을 이용한 적도 있으나 하나님은 내 능력만큼 일할 수 있도록 그때그때 주시는 것을 15년 동안 체험하면서 정말로 신실하게 약속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나는 처음 왕십리 교회를 통하여 파송을 받을 때에 교회로 부터 월$1천불을 약속 받고 그때의 상황에 맞추어 총회 지시대로 4개월분을 한꺼번에 가지고 태국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4개월째 되는 때에 다음 3개월분을 또 보내주었는데 월 $1,500이었다. 뿐 아니라 매번 3개월 분씩 보내되 한 달이 겹치게 보내주니까 내 통장에는 항상 1개월분의 선교비가 비축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나로 하여금 현지에서 가난하여 꾸러 다니는 선교사가 되지 않도록 하였던 것이다.


    나는 태국에서 한국인 선교사가 자주 선교비가 부족하여 꾸러다니는 것을 보았다. 사실 그가 선교비가 부족해서 만이 아니고 후원하는 교회가 한국에서 하는 것처럼 매달 때를 맞추어 선교비를 보내주기에 자연 현지에서는 그 선교비가 제때에 선교사 손에 도착되지 않아 거지 아닌 거지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만약에 교회나 총회가 현지 상황을 이해하고 선교비를 송금하되 1개월분씩 또는 3개월분씩 보낼 때 한달이 겹치도록 보내주면 현지의 선교사는 같은 액수의 선교비로 부족함이나 염려 없이 살면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태국에 온지 5개월쯤 되었을 때에 음상하 장로님이 잠시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나에게 왕십리교회의 선교부장을 소개시켜 달라고 하였다. 이유는 당신은 소위 총회 파송 선교사이고 나도 총회에 소속된 교회의 장로로써 태국선교 사역에 필요한 차랑이 없는 것이 딱하니 파송교회에 이 사실을 알려서 차량을 구해 주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선교사 준비 기간 동안에 당회장의 차랑이 너무 낡아도 이를 바꾸어 주지 못하는 형편을 보고 왔기에 선교지에 온지 얼마되지 않은 이때에 이런 청원이 시기 상조라고 생각하고 음장로님께 그런 청원을 하면 괜히 되지도 않을 일로 피차 마음만 상한다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는 만약에 왕십리교회가 차량을 구해 주지 않으면 내가 구해 주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나는 이 단호한 태도 때문에 반 강제로 소개 편지를 써 주게 되었다. 그는 서울에 도착하여 교회 선교부장 장로님을 만나서 태국선교 소식을 전하였다. 선교지 소식을 듣던 선교부장은 어떤 확신이 서게 되었는지 이번 주일 저녁이 제직회인데 장로님이 오셔서 지금 말씀해 주신대로 보고를 해 주실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음장로님도 쾌히 승락하였다. 드디어 제직회가 열렸고 선교부장의 보고 시간에 "태국에서 정승회 선교사님과 동역하여 선교사역을 돕고 계시는 신현교회의 음상하 장로님이 오셨는데 이 시간 잠시 태국선교 소식을 듣도록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제안하였고 당회장 목사님이 "허락입니까?" 라고 물으니 전 제직원이 일제히 "허락이요" 하여 음장로님은 태국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온 제직원들은 선교사를 파송해 놓고 아직 그 뜨거운 선교 열기가 있는 터이고 현지에서 자기들이 그렇게 아끼며 관심두고 기도하며 지원하는 선교사를 위하는 분이 오셔서 전하는 이야기들은 주옥과도 같았고 선교사를 직접 만나는 느낌마져 주는 생생한 보고였다. 때문에 소식을 전하고 있는 장로님이나 듣는 제직원들 모두가 은혜 충만함을 느꼈다. 이 소식을 듣는 동안 이곳 저곳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특별 기도를 하였으며 장로님의 제안대로 선교사에게 승용차 1대를 사 주기로 현장에서 결의를 하였다. 사실 당시의 왕십리교회는 재정이 풍부하지 못하였고 교우들도 어려운 분들이 많아서 선교사에게 차량을 사주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으나 선교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겁하게 되었을 때 자연 이런 결정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회의 형편을 고려하여 전 교인이 1차 헌금하고 부족하면 교회 재정에서 충당한다고 결정하였고 그렇게 실행되어 약600만원이 준비되었고 동시에 태국에서도 그 액수에 적당한 차량을 준비 시켜 주셨기에 즉시 차량을 구입하게 되었다. 이 일은 당시의 제반 상황을 고려하면 조그마한 이적으로 간주 할 수 있다. 나는 그때 모세와 아론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음을 체험했다. 나 자신과 능력은 그때에 차량을 지원 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모세에게 아론이 있어서 모세의 입을 대신한 것처럼 음장로님은 나의 입이 되셔서 이 일을 성취하게 하였다. 당시 우리 두 가정은 태국에서 한인교회의 일로 정말 원통함과 외로움을 느꼈고 주일저녁, 삼일저녁 예배를 함께 드리면서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라는 찬송으로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음장로님의 선교 보고는 생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체중이 10Kg이나 내려 갔었으나 이 일로 상당한 위로를 받았다. 그 차는 2년된 중고차 였지만 나는 10년을 사용하고 마지막에는 길거리에 이유 없이 정차하는 일이 잦던 차에 왕십리교회와 성현교회의 지원으로 현재의 새 차량으로 바꾸어 더욱 편리한 사역을 전개하고 있다. 선교지에서의 교통 수단은 선교 사역을 원활하게 전개하는 일에 큰 몫을 한다.


    후원교회가 만약에 파송 선교사의 차량에 대한 지원계획이 있다면 언어를 다 마치고 사역을 시작할 때 사주겠다는 계획보다는 언어를 배울 때 오히려 차량의 활용이 더 유용하다고 고백하고 싶고 한국에서부터 운전기술을 철저하게 연마하여 현지에서의 자동차 운전에 지장이 없도록 준비시켰으면 더욱 좋겠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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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선교의 막차를 탓지만


    한국 교회는 1956년 후반에 태국선교를 시작하여 94년 현재 38년째 되었으나 나만큼 태국 선교의 기반을 쉽게 그리고 굳게 놓을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처음부터 태국교회의 초 교파지도자들로 구성된 태국교회진흥원(TCGC)의 초청으로 입국하였기에 공항에서 부터 태국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의 영접을 받았고 이들을 통하여 태국의 문화와 풍습을 몸으로 배우고, 태국교회의 상황과 필요를 자연히 깨닫게 됨으로 쉽게 태국 적응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내가 누린 태국선교의 특권이었고 하나님이 나에게 약속하신 복이다. 그러나 나는 태국에 도착된지 3개월만에 비자 문제로 태국에서 쫓겨날 뻔하는 어려움을 당하였다. 이는 나의 비자 연장을 위한 책임을 맡은 위라전도사는 이런 일을 한번도 해본 경험이 없었기에 제반 서류 작성과 구비및 추진 과정에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를 못하였기 때문이다. 비자만기 2주쯤 남았을 때 종교성에서 이 사람의 서류는 무엇이 무언지를 몰라서 도무지 처리할 수 없다는 통보였다. 선교사가 비자를 얻으려면 우선 태국내의 3개 교단인 태국기독교총회(CCT),태국복음주의연맹(EFT), 태국남침례교연맹(S.Baptist)등에 소속되어야 하고 EFT는 각 선교단체에 소속된 선교사만이 종교성에 비자를 신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태국교회진흥원 소속이고 이 단체는 3개 교단이 연합하여 조직한 단체였으나 대 정부 관계에서는 비자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단체는 아니었기에 EFT내에 있는 한 선교단체의 일원으로 입적한 후 EFT를 통하여 종교성에 비자 연장을 위한 추천서를 받아야 이민국을 통해 매해 1년짜리 선교사 비자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위라전도사는 나의 소속을 TCGC, EFT, 그리고 비자를 주는 선교단체 이름을 언급하면서 서류를 작성하였기에 종교성에서 이 서류를 도무지 해득할 수가 없어서 가만히 가지고 있다가 서류를 처리하지 못하겠다고 통보해 온 것이다. 이때 나 뿐 아니라 EFT회장 짜란박사, TCGC원장 위치안박사는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한 선교사를 초청해 왔는데 비자 문제 하나 처리해 주지 못하여 쫓겨나게 생겼으니 태국교회 지도자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심각하게 기도할 뿐 아니라 종교성의 책임자를 만나서 이 일을 의논하기 시작하였는데 눈치를 살피니 나는 꼭 태국을 일단 나간 후 NON-IMM. 비자를 다시 받고 들어 와야 비자가 계속 주어질 수 있다는 일반적인 결론에 도달되었다. 때문에 짜란박사는 이 상황이 심각한 것을 깨닫고 EFT의 정기총회의 사회도 타인에게 맡긴채 종교성을 매일 드나들다 싶이하여 결국 종교성에서 EFT의 직속 선교사 쿼타를 허락받고 짜란박사가 직접 제반 서류를 작성하고 제출하여 쫓겨나기 하루 전에 추천서를 받게 되고 비자를 연장하게 되니 기쁘기도 하지만 난 어리둥절하기까지 하였다. 후에 알고 보니 위치안 박사는 이 일을 위해 금식기도까지 하였고 나는 초죽음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일로 선교사 비자 문제를 처리하는 행정 기술을 습득하여 지금껏 이 문제에 대하여는 자신이 생겨 선교단체를 운영하는 책임자로써의 훈련을 제대로 받은 것이 되었다. 태국교회 지도자들이 이렇게 자기일 처럼 정성껏 일을 도와주고 있을 때 KIM소속인 한인교회와 운영위원들은 내가 자기들 소속이 아니라고 따돌려 놓고는 가짜 목사가 태국에 왔다가 쫓겨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고 "너는 한국인이 아니냐? 왜 한인교회에 나오지 않는가? 너만 선교사이고 우리교회 목사님은 선교사가 아니냐?" 하고 비아냥거렸고, 한인교회의 영향권에 있는 대사관의 영사마져도 나의 제반 서류를 확인해 주는 일에 비협조적이었으나 얼마가지 않아서 사실을 바로 알고 우호적으로 대하였다.


    그러나 그때의 일을 회상하여 보면 현재 살아 남아 있는 것만도 감사할 따름이다. 이 일로 나는 태국화 되는 일에 큰 도움이 되었고 태국인만 상대하기에 태국어 실력이 크게 향상되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나로 하여금 주님을 굳게 의지하게 하였고 태국에 선교적 기반을 구축하는 일과 선교 사역을 전개하는 일에 타 선교단체 보다 앞서가는 복을 누리게 되는 전화위복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 1980년 중순 태국정부는 새로운 종교정책을 수립하고 외국선교 단체들에 대한 규제조치를 취하려 하였다. 하나님은 이때 나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 주셨다. 그간 나는 개인 자격으로 EFT를 통해 비자를 해결 받고 있었으나 선교단체를 등록시킬 최선의 기회임을 깨닫고 나를 초청한 태국교회진흥원과 협의한 결과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The Korea Presbyterian Mission in Thailand)를 조직하고 태국복음주의연맹을 통해 종교성에 등록하기에 이르렀다. 이때가 외국선교단체의 등록은 마지막 기회였기에 이후에 들어온 어떤 단체도 완전한 선교단체의 구실읕 하지 못하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종교성은 각 교단및 선교 단체장 회의를 열고 새로운 종교정책을 설명하였으며 동시에 각 단체가 보유한 선교사와 앞으로 들어올 선교사 수를 밝히라고 했을 때 나는 우리 선교부에 20명의 선교사를 청원하고 명단을 제출하여 허락을 받아 완벽한 선교단체를 만들고 한국교회의 믿음의 소신을 따라 자유스럽게 사역할 수 있는 한국인으로써는 유일한 선교단체의 기반을 구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단체를 통하여 한국인 뿐 아니라 아시아인, 유럽인, 북미주인 등 여러 종류의 선교사들을 도와 줄 수 있었던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도 20명 한도의 선교사를 자유스럽게 초청하여 올 수 있는데 음악, 어린이, 건축, 농촌개발 분야의 평신도 사역자와 목회 경험이 풍부한 목사 선교사, 깊은 신학 지식이 있는 교수 요원 선교사를 필요로 하고 있다. 태국에는 현재 60여 가정의 한국인 선교사가 주재하고 있고 이들의 비자 해결은 CCT소속 선교사는 자연 태국기독교총회에서 보유하고 있는 65석의 선교사 비자로 순서를 기다려서 해결 받고 있으나 EFT소속 선교사는 KPM 소속 선교사 전원과 므앙타이 교회 소속 선교사 2인만이 자체 비자를 사용하고 있고 다른 선교사는 타 선교단체의 비자를 빌려 사용 중에 있는 실정이다. 또한 많은 선교사들이 비자를 얻는 길을 알지 못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나 선교사들끼리 피차 협력하는 일이 없어서 비자문제로 태국인들에게 메어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그저 같은 동족 밑에 있지 않다는 기쁨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을 본다. 최근에는 태국기독교총회 밖에 있는 선교사들이 피차의 비자 문제를 해결해 주고 관리하겠다는 목적으로 또 하나의 단체를 조직하였으나 자기들의 비자도 임시인데 남의 어려움을 해결해 준다고 하니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후에 오는 선교사에게 불 이익을 초래하는데 악용 될 소지가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의 의도가 의심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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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KPM)


    1980년 10월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를 태국에 설립하고 20명의 선교사 비자를 활용하여 태국선교를 시작 할 때는 어느 누구도 이 선교단체에 대하여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이 선교단체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선교 정책에 의하여 태국에 설립하였고 총회의 태국선교를 성취시키기 위한 신령한 도구로 사용하려는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총회마저도 이를 깨닫지를 못하고 활용하기는커녕, 개 교회주의, 선교단체 위주의 소인들에 의하여 무참히 짓밟혀 결국 총회를 위해 순수하게 사용되어지지 못하게 된 것은 유감스러우나 이 선교단체를 통해 능력 껏 태국선교를 감당해 오는 가운데 40여개처의 교회로 태국장로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고 방콕목회대학원을 통하여 각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의 재교육을 통한 자질 향상에 기여하고 있어서 만족할 만한 선교 단체의 사명을 감당해 오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와 이를 위하여 처음부터 동역해준 왕십리교회와 부산 주례교회 그리고 전북지방의 삼례동부교회를 비롯한 태국선교후원회에 감사한다. KPM은 우리 한 가정의 선교사에 의하여 태국에서 자생한 단체이어서 우선 태국교회 지도자들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않되었기에 태국교회의 3개교단의 지도자들로 고문단을 조직하여 이사 및 운영에 관한 제반사를 관여하게 하였는데 짜란박사(EFT회장), 위치엔박사(TCGC원장), 분크렁목사(침례교 총회장), 티라박사(BBC학장), 씰라뛕 목사(TCGC간사), 쁘라차목사(침례교신학교장), 수라폰목사(방콕 왓타니교회 담임), 참난목사(치앙마이 다라 여학교교목), 간짜나의사(보건사회부 관리), 디렉박사(초대CCT대표), 쏨낏장로(CCT북동부지역 노회장), 파이툰박사(EFT부회장), 아누선장로(CCT방콕지역 노회장), 모리모또선교사(태국CEF이사장), 수난장로(방콕제4교회), 쏨찻박사(CCT증경부총회장), 쌈릿목사(CCT증경부총회장), 쏨디박사(태국성경공회 총무)등이 이 일을 담당해 주었다. 94년말로 선교부 15주년이 되는바 이를 위해 기존의 제한된 고문들을 더욱 폭넓게 개편하여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우리 선교부와 좋은 협력 관계를 갖어온 각 지역과 교단의 지도자들을 영입하여 태국선교의 최선한 길을 모색하고져 기존의 고문들 외에 캄행강도사(쏭크라교회 담임), 쌈란목사(북동부 우돈교회 담임), 완목사(롬끄라우교회 담임), 말라꼬목사(촌부리교회 담임), 타위차이목사(치앙마이중국교회 담임), 분씨목사(람빵 케랑판타낏교회 담임), 씨안목사(남태 오순절교회 총회장), 위라목사(제3노회장), 아룬목사(태국기독교총회 증경총회장), 다니엘목사(방콕 안디옥교회담임)등으로 15주년 행사를 준비 중에 있어서 태국선교 중반기에 접어든 KPM의 사역에 기대 되는 바가 크다. 우리의 팀 선교사들도 태국에 있는 10여개의 한국계 선교단체나 구룹들 중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팀을 구성하고 있는바 정승회. 김영숙(성현교회), 김정숙(성현교회), 김학영.이경숙(CCT/빌라델비아), 김성희.함옥자(내곡교회), 박경환.이순연(상계교회), 배종원.이은순(구미제일교회), 김재양.정금천(원동교회),김건용.김동숙(한가람교회), 송용자(의정부제일교회)등으로 정선교사는 선교 본부와 교회개척과 육성, 방콕목회대학원,할렐루야교회를 책임지고 있고, 김학영 선교사는 북태지방의 산족교회 개척과 육성 및 교역자 훈련을 담당하고 있으며, 김정숙선교사는 선교부의 간사 일과 함께 목회대학원과 각 교회들의 교회음악을 책임지고 있고, 김성희선교사는 농촌개발사업과 목회자훈련을 분담하고, 박경환선교사는 교회개척 사역을 시작하였고, 배종원선교사는 북동부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중에 있고, 김재양선교사는 라오스 선교를 담당하며, 김건용선교사는 어린이 사역과 함께 신학생 장학사업과 훈련을 담당하고 장차 선교본부의 사역을 하기 위해 준비 중에 있고, 송용자선교사는 교회개척을 시작하였다.


    KPM의 사역은 교회개척과 육성 사업을 주 사역으로 하고 이를 성취시키기 위한 제반 선교사역을 총 동원하여 활용하고 있는바 교회 개척은 할렐루야교회를 교회 개척의 실습장으로 활용하여 신학생, 목회대학원생, 교회개척 요원및 선교사들이 반드시 거쳐야하는 과정으로 삼고 있고, 교회음악의 보급을 위하여 은혜스러운 찬송을 번역하여 보급중에 약 50여곡에 이르고 있고 이 사업으로 인하여 한국산 찬송 2곡(사철에 봄바람 불어잇고, 부름받아 나선 이몸)이 태국찬송가 "프랭타이 나마싸깐"에 포함되는 역사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뿐아니라 태국교회가 예배 찬송에 대하여 상당히 무식한 중에 있어서 태국에 있는 두 종류의 찬송가를 VIDEO테잎에 담아 누구나 자력으로 찬송가를 배울 수 있도록 주선하고 있기에 곧 태국교회의 찬송가 애창 능력이 향상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목회자 양성과 훈련 사역은 태국내에 신학교가 20여곳이 넘으며 성경학교 수준이 대부분이어서 우리들의 교회 개척에 필요한 요원들을 획득하기 어려우나 신학교육기관의 난립과 저질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신학교육기관을 설립하는 일은 하지 않고 당분간 기존 교육기관 출신자들을 방콕목회대학원의 과정을 거치게 하여 장로교회의 사역자로 육성하여 활용하고 선교부에서 개척한 교회들을 중심하여 각 지역에 성경학교를 개설케 하고 평신도 지도자를 육성하면서 교역자 후보를 개발하여 장로교회의 교역자를 충당하는 방법을 활용하고 있어서 태국교회 지도자들이 이를 지지하기에 기쁜 마음으로 진행중이다. 태국교회 목회자들의 교회내의 지도력이 약하여 평신도 지도자들을 훈련시키지 않는한 목회자가 소신껏 사역할 수 없어서 태국교회지도자들을 위하여 한,태교회성장쎄미나를 격년으로 개최하고 한국교회를 방문하여 한국교회의 부흥을 보며 깨닫게 하고 있는바 적어도 4개처 교회에서 두르러지게 부흥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어서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태국 주변의 국가나 부족들을 위한 사역을 전개하여 태국내의 라후족과 아카족내의 교회 개척과 육성은 물론 라오스, 캄보디아 난민촌을 지원하여 간접적으로 주변국 선교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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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시간씩 불러 재킨 찬송


     


    태국에 도착한지 1년만에 나와 집사람은 태국어 공부를 마치고 본격적인 사역에 들어가기 위하여 교회개척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선 예배당 처소를 구하기 위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집 근처를 뒤지기 시작하였다. 다행히도 자질이 부족하여 마음에 들지는 않으나 태국인 전도사와 위라전도사가 나를 도와서 교회개척 준비에 도움이 되고 있었으나 교회를 개척 할 적당한 건물을 구하기 어려웠다. 당시에는 건축 붐이 오늘날처럼 활발하지 않았기에 적당한 집도 없고 있다면 예배 처소로는 임대해 주지 않았으며 조금 마음에 들면 임대료를 감당 할 수가 없어서 길을 찾지 못하던 차에 마침 나는 교민회의 교육이사로 추대를 받아 한인회관을 자주 방문하게 되어 한인회관 2층을 빌려서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의 태국어 실력을 동원하여 한국과 태국의 합작교회라는 뜻이라고 생각하여 "까우타이교회" 라고 간판을 걸고 교회개척을 시도하면서 주일 아침예배는 본토인 교회로 나가지만 주일저녁, 수요일저녁, 매일 새벽기도회는 개척한 장소에서 모였는데 예배 참석자는 우리 가족과 가정부 그리고 쏨뻥전도사 가족 뿐이었다. 후에 장학금을 받아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5-6인의 학생들이 합류하여 예배를 드리며 전도지를 뿌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태국어 실력이 부족하니까 주로 찬송가를 1시간씩 반복적으로 부름으로 힘을 얻고 성경은 전도사로 하여금 읽게하고 그 말씀의 뜻을 잘 되지도 않는 태국어로 나름대로는 열심히 가르치곤 하였다.


    당시에 부른 찬송가는 태국어 이지만 암기하여 어느 곳에 가든지 보지 않고 부를 수 있었다. 집에서도 가정 예배시 주로 찬송을 많이 불렀기에 가정부가 전도사들 보다 찬송을 더 많이 아는 이변을 낳기도 하였다. 우리는 전도지를 들고 태국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교인 쭈라롱꼰 대학교를 찾아가서 벤취에 앉아있는 대학생들에게 접근하여 전도지를 뿌리면서 전도를 시도하게 되었는데 함께간 전도사가 얼굴 색이 변하고 굳어지면서 이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였다. 나는 너무나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이 친구가 왜 전도하는 일에 이렇게 주저할까? 믿음이 없는가? 라고 의심을 하였으나 이 친구의 학력이 국민학교 4학년을 마친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태국 선교의 열정 때문에 소위 눈에 보이는게 없고 물,불을 가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대학생 전도를 포기하고 교회 주변 전도에 들어갔다. 교회 주변도 문이 굳게 닫혀진 큰 집들이 아니면 상가가 즐비한 거리였는데 우리의 전도의 결과는 큰 건물의 경비원들 몇사람과 길가의 꾸웨이띠아오 장사 몇 사람만 관심을 보일 뿐 전혀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 내에서는 열심이 넘치고 있었다. 우리의 열심을 본 깐짜나의사는 공항쪽의 새로 지은 자기 집을 소개해 주었는데 같은 동네에 서민 아파트가 있어서 우선 이곳의 전도를 위해 어린이 전도를 시작하면서 매주일 아침 예배를 동쪽의 까우타이교회에서 모인 후 점심을 급히 먹고 승용차에 탈수 있는 대로 10여명씩 타고 서쪽의 쁘라차니뛕 서민아파트로 가서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주일학교를 운영하는데 재미가 있었다. 아울러 람인트라지역에 있는 경찰비행단 관사내의 회관에서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어린이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여 120명씩 모이는 성과를 얻게 되었으나 자기 자녀들이 예수쟁이가 될 것을 염려한 경찰 비행단측의 거절로 계속하지 못하고 그 근처의 반 크렁부아국민학교에서 년2회씩 어린이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였고 전교생의 1/3이 매회 참석하여 좋은 결실을 얻었다. 사실은 이것이 계기가 되어 람인트라 서민 아파트에 람인트라 기도처를 개설했다가 현재의 할렐루야교회를 이 지역에 설립하게 된 것이다.


    결국 한인회관에서의 교회개척은 1년만에 포기하고 쁘라차니뛕 서민아파트의 어린이 모임을 따라 깐짜나의사 집을 임대하여 쁘라차니뛕교회를 1981년 12월초부터 개척하게 되었다. 우리가 수쿰윗 한인회관 2층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사역할 때 나는 한국에서 하던것 처럼 새벽 5시에 새벽기도회로 모였고 주일예배 시간에는 정장을 하였다. 쏨뻥전도사가 정장을 입지 않기에 옷이 없느냐고 물으니 신사복이 없다고 하였다. 결혼식 때는 어떻게 했느냐? 고 하니 친구 옷을 빌려 입고 결혼식을 했다고 하였다. 나는 돈을 빌려 줄테니 신사복을 맞추겠는가? 고 물었다. 그는 기쁘게 그렇게 하겠다고 하여 결국 그도 예배 시간에는 신사복을 입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 뿐 아니다. 주의 일을 제대로 하려면 기도가 필요하기에 새벽기도회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의 집이 교회당에서 8Km나 떨어져 있어 자전거를 필요로 하여 자전거를 사주어 매일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사실은 이것도 무리였으나, 쁘라차니뛕 지역의 어린이 사역을 위해 쁘라씻전도사에게 책임을 맡기고 나는 그 전도사도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새벽에 몇시에 일어나며 새벽기도는 하는가?고 물었다. 그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한다고 하였기에 그러면 이곳에 와서 우리와 같이 새벽기도회를 하자고 강권하였다. 이곳과 그곳은 약20Km나 떨어져 있었으나 그때는 이런 일이 과한 것 인줄도 모르고 당연하게 요구하였다. 만약에 그가 이를 거부했다면 믿음이 없다고 단죄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이를 받아 들였고 조금씩 늦게 도착하기는 하였으나 새벽기도회를 함께 드리게 되었기에 흡족하였다. 사실 내가 그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상식 이하의 처사이며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지를 모르는 나로써는 담대하기가 이를데 없었고 무식하기가 짝이 없는 일이지만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이렇게만 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의 이 간증을 읽을 후배 선교사들 중에 많은 사람이 지금도 나와 같은 실수를 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 속히 이를 깨우쳐 주어 죽을 짓을 하지 않고 소기의 선교적 목적을 성취하는 일에 좀더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해 본다. 왜냐하면 이런 열심이 자기를 망하게 하고 다른 한국 선교사의 사역에 간접적으로 나마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 할렐루야교회를 개척한 후에도 새벽기도회는 계속하고 있으나 방콕의 교통체증 때문에 시민들의 직장 출근 시간이 새벽기도 시간과 비슷하여 교인들은 참석하지 못하고 교역자들 끼리 모이기에 더 좋은 방법을 찾는 일에 고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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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쁘라차니뛕교회와 귀신들린 여자



    까우타이교회의 개척은 교회 개척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나 자신의 태국어 훈련기간 이었다고 말해야 옳다. 이 교회를 개척하기 전부터 쏨뻥전도사를 채용하여 나의 조수로 쓰면서 방콕 시내의 교회들을 방문하여 태국교회를 먼저 아는 일에 최선을 다 했었다. 언어 시험을 마친 후에도 각 교회를 순방하는 중에 어느 정도 태국교회 순방에 싫증이 나기 시작하여 교회를 정식으로 개척할 때가 된 줄로 알고 까우타이교회를 개척하였는데 1년도 되기 전에 이 계획은 무산되고 쁘라차니뛕교회를 개척 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도 그랬으나 두번째 시도하는 교회 개척도 역시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그저 열정 하나만 의지하여 시작하였다. 이 교회는 한 동네 속에 있었는데 어느 때는 나 자신도 이 예배처소를 제대로 찾지 못할 때가 있었다. 후에 태국인이 이곳을 방문한 후 조용히 이야기하기를 교회당이 이렇게 구석진데 있으면 안된다고 일러 주었으나 별 소리를 다한다고 비웃고 말았다. 태국에서의 교회 개척의 ABC도 모르고 교회를 개척하려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내가 신학을 마쳤고 당회장을 해본 경험이 있는데 어디에 교회를 개척하면 않되겠는가? 하면서 자신을 갖고 있었다. 다만 있는 열정을 다 쏟는 것만으로 만족하였다. 새벽이면 집에서 약15Km 떨어져 있는 교회당에 가서 새벽기도를 하였고 주말이면 신학생들이 오기에 강제로 새벽기도회에 참석시키었다. 주일아침과 저녁, 수요일 저녁 그리고 월1회 철야 기도회도 열었다. 깐짜나의사는 지방 출장등으로 바쁘지만 태국 사람 답지않게 주일은 본 교회로 돌아와서 예배를 드리곤 하여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의 남편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는 말 할 수 없으나 매주일 교회는 나왔다. 그는 경찰 비행기 조종사로 대령이었으나 성품이 순하여 깐짜나의사를 종처럼 뒷바라지 하였고 예배당이 자기 집 건물이니까 별 부담없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예배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어머니 주일에는 부모 공경에 대하여 설교를 하니 즉시 자기 부모를 찾아가 뵙는 순진한 사람이었으나 예수 믿는 일엔 결혼 초 부터 보이던 태도가 오늘까지 계속 되기만 하였지 결신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이런 상태로 상당기간 계속 되었으면 혹시 모를 일 이었으나 약 3년쯤 되었을때 우리 팀에 합류한 신임 선교사의 잘못된 처신으로 교회의 주동인 깐짜나 집사가 나에게서 마음이 떠난 것에 대하여 나는 마음의 큰 상처를 입은 후 그 교회를 현지인에게 맡기고 떠났으며 다시는 내 손으로 직접 개척교회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결국 깐짜나집사가 자기 집을 돌려 달라고 하여 현지인 사역자는 교회를 계속하지 못하고 막을 내렸기에 깐짜나집사의 남편의 믿음에 대한 모든 가능성은 거기에서 ?나고 말았다. 최근에는 깐짜나의사가 나에 대하여 우호적으로 대하는 것을 보면서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 그의 남편이 아직도 옛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아쉬움을 느낀다.


    당시 우리는 교회 부흥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매일 전도지를 가지고 동네에 뿌리고 어린이를 모아서 주일학교를 운영하였고 중, 고등학교를 방문하여 전도지를 뿌리고 발렌타인 데이를 기하여 청소년 집회를 개설하고 여름방학에는 동네에 나가서 어린이들을 모아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였다. 그러나 처음 3년 정도는 온 동네가 무반응이었다. 그러나 선교사, 한인교인, 신학생을 동원하여 전도에 열심이었고 주일 오후면 성가단을 동원하고 악기를 들고 찬송을 부르며 동네 전도를 하였다. 나는 교회에 매일 새벽부터 출근하여 하루 종일 교회의 제반 사역을 위하여 여러모로 애썼다.


    하루는 자기 발로 들어온 새 신자가 모든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여 상당한 기대를 하고 가꾸었는데 어느 주일 아침 성경 공부를 위해 집회를 막 시작하니 갑자기 일어나서 사회자를 향하여 찬송가를 집어던지고 발작 증세를 보였다. 20여명 모이는 이 집회가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젊은 신학생들에게 이 여자를 붙들라고 하여 여러 학생들이 달려들었으나 평소의 약질이었던 이 여인이 어디에서 힘이 생겼는지 이 젊은이들이 쉽게 이 약한 여자 하나를 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귀신이 들렸던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도 이런 일을 처리해 본 경험이 있어서 별 급한 마음을 먹지 않고 아피씻강도사에게 붙들고 기도하라 했다. 그러나 이 귀신은 아피씻강도사를 무서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결국 나는 그를 똑바로 쏘아보면서 기도를 하였다. 얼마 후 그는 힘을 잃고 죽은 것 같이 되었다가 다시 깨어나서 눈이 아프다고 했다. 그리고 성경공부는 잡쳤지만 예배를 드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이 일로 신학생들은 처음 당하는 일이기에 무서웠던지 하루종일 이 이야기만 계속하였다. 그는 그 후에도 가끔 이런 증세를 보였는데 그의 고백으로는 이런 증세는 과거에 생활하던 육체의 욕정을 따라 옛 생활에 빠지면 반드시 이런 발작 증세가 온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온 여인을 주님이 다루는 것처럼 옛 생활을 청산하고 조심하도록 하였으나 그는 옛 생활을 쉽게 청산하지 못하고 회개와 범죄의 사이를 수시로 넘나들었다. 어느 수요일 저녁때 우리는 예배 인도를 하기 위하여 차를 몰고 교회에 도착하여 내리려 하니 교회당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가만히 들으니 그 여인이 다시 발작한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화가 났다. 그렇게 타이르고 기도하여 귀신을 내 쫓아 주었는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시 귀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불쌍하기 보다는 화가 나서 오늘은 이 여인을 묶어 두어 고통을 좀 당하게 한 후 수요 기도회가 다 마치면 귀신을 몰아내 주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들어가서 띄를 가져다가 묶으려 했다. 귀신이 내 마음속의 생각을 갈파하고 승산이 없을 줄로 알았던지 내가 가서 눈을 부릅뜨고 묶으려하니 기도하기도 전인데 귀신을 나가겠다고 하고는 즉시 나가서 별 힘들이지 않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뿐 아니다 그가 집을 동쪽 끝으로 이사하여 결국 우리교회를 떠났는데 하루 주일 밤에는 그쪽 교회 담임교역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 우리교회를 다니던 그 귀신들린 여인이 그 교회를 나오는데 오늘 발작을 일으켰고 자기는 귀신을 내 쫓을 줄 모르는데 그 여인이 말하기를 "아짠 차나 정"이 잘 고치니 불러 달라는 것이었다. "차나"는 나의 태국 이름으로 태국 기독교 사회에는 익히 알려진 이름이었다. 나는 그에게 귀신을 내 좇는 일이 어느 특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모든 주의 종이 충분히 할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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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쁘라차니뛕 교회



    쁘라차니뛕교회 개척을 위하여 나는 심혈을 기울였다. 교회 같지도 않으나 나는 어느 교회보다도 아끼며 정성을 다 하였다.


    2월14일은 발렌타인 데이로 태국의 불신 사회도 떠들썩하다. 우리는 이 기회를 잡아 청소년 전도를 하기로 계획을 세운 후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지역에 있는 공업고등학교를 찾아갔다. 학교 정문이나 교정에서 휴식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전도지를 배포하고 발렌타인데이 행사를 홍보하려는 의도 였다. 태국이 불교국이기에 우리는 항상 조심스럽게 태국인에게 접근해야 하며 예의를 잘 갖추어야 하기에 학교 당국에 허락해 주기를 청원하였다. 우리는 뜻밖에도 각 교실을 방문하여 전도지를 뿌리고 간단한 소개를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 학교가 앞으로 다른 종교에 대하여 강의를 해야 하는데 우리가 필요할 때에 청하면 잘 협조해 달라고 부탁도 하였다. 우리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태국인 전도사들, 선교사들, 그리고 열심있는 한인 교인들은 너무도 감격하고 기뻐서 청소년 학생들에게 태국식으로 두손을 합장하고 인사를 하면서 전도지를 나누어주고 청소년 특별 모임에 청하였다. 각 교실을 방문하니 선생님들이 귀빈이 온 것처럼 특별 대우를 하고 강의시간을 내주어 소개를 하도록 하였다. 나는 서툰 태국어로 이들의 마음을 거슬리지 않고 기독교와 이번 모임에 대하여 소개하고 청하면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학생들의 관심은 대단하였기에 이번 모임에 너무나 많이 오면 어쩌나 하고 염려까지 미리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아시고 약 50여명을 보내주어 나름대로 성황을 이루는 모임이 되었다.


    3-5월은 태국의 긴 여름 방학이기에 우리는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어린이 여름성경학교를 계획하였다. 태국에서는 이런 모임이 많지 않아서 전도사들도 경험이 없기에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몰라서 아예 어린이 주일학교가 없는 곳이 태반이다. 때문에 우리는 반 크렁부아국민학교에 어린이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고 우리 전도사들을 훈련시키기도 했었다. 나는 이 계획을 세밀하게 세우고 설명을 하였고 찬송과 특별 순서들을 준비하고 풍선을 준비하여 동네로 나가서 노래를 부르고 어린이를 모았으며 특별순서를 하고 여름성경학교를 흥미있게 소개한 후 입학원서를 나누고 등록비를 10밧씩 받으면서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동네 모든 어린아이가 300명쯤 되었는데 99%는 등록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들을 이끌고 교회로 와서 즉시 개교 예배를 드리고 여름성경학교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경학교를 마칠 때는 100명도 채 안되었다. 많은 어린이들이 떨어져 나갔어도 마음은 흡족하였다. 사실 우리교회의 수용 인원이 콩나물 시루가 되게 해도 100명을 수용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번은 음상하 장로님이 우리교회를 평일 오전에 방문했다. 점심때가 되어서 식사를 하기 위해 평소 다니는 길가의 간이 음식점으로 아무 생각 없이 안내하여 평소에 내가 맛있게 먹는 음식을 주문하여 우리와 장로님은 들었다. 얼마가 지난후 장로님은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그때 점심식사를 위하여 안내 받은 식당(?)을 보니 길가의 큰 나무 밑에 주변에는 쓰레기와 파리 떼들이 우글거렸고 식탁은 거의 썩어가는 나무에 보건 위생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곳 이어서 도무지 식사 할 수 없었으나 선교사님이 아무 꺼리낌 없이 들기에 눈 딱감고 먹었다가 집에가서 배탈이 나서 오랫동안 혼났다고 하였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그제서야 정신이 들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는 태국 북동부 지역에서 온 쏨뻥 전도사와 함께 동역해 왔고 매일 아침과 점심식사는 그와 함께 이 식당을 이용하였으며 음식이 맛있다고 느꼈기에 무심코 이 식당으로 안내하였던 것이다.


    어떤 선교사들 중에는 고의로 후원교회에서 오면 고생스러운 것을 보이려고 평소에 하지 않는 짓을 하는 선교사들이 있다고 들은바는 있으나 나는 후원교회에서 선교지를 방문하면 한국에서 맛보지 못하는 귀한 음식과 잠자리가 되도록 안내하는 일에 능숙하고 이때를 기하여 내가 평소에 얻지 못하는 기회로 삼고 있어서 비록 가진 것은 없으나 가난하거나 비굴하게 보여서 자비심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는 전혀 없게 한다. 쏨뻥전도사는 북동부의 우돈 출신으로 그곳에서 국민학교를 마치고 우돈에 개설했던 교역자 훈련원을 나온 후 결혼하고 방콕에 올라와서 중, 고등학교 과정을 특별과정으로 마치고 나를 도와서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신학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방콕신학원에서 공부를 하도록 하면서 교회의 전도사 일을 보도록 하였다. 나는 여기서 또 다시 실수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를 신학교에 보낸 것은 교회사역에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나는 그의 이런 형편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부족한 신학공부를 시켜주니 감사하게 생각하여 교회일을 뼈가 상하도록 할 것으로 기대한 내가 잘못된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태국인들은 여러가지 일을 못하고 한가지 일 밖에 못한다는 것을 터득하였다. 결국 교회일과 신학공부의 2가지 일을 동시에 감당하지 못하여 신학공부를 포기하고 교회 사역에 충실하도록 하였다. 가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식모는 밥하는 일만, 청소부는 집안 청소하는 일만, 유모는 애기를 돌보는 일만 하는 것이지 한국에서처럼 한 사람이 10가지 일을 하는 사람은 어디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이 태국인을 사용할 때 바로 사용하지 못하여 욕만 먹고 일의 성과도 없고 자신의 성질도 버리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을 분업화라고 말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태국은 한국 보다 앞서있는 나라다. 선교사 뿐 아니다 태국에서 태국사람을 사용해야 하는 모든 한국 사람이 겪는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원리를 알고 바로 활용할 수 있게 되면 그는 태국에서 일할 자격을 구비한 사람이 된다. 사실 나는 지금도 태국인에 대하여 안다고 말하기가 부담스럽고 알면 알수록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민족임을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태국에서 사역해야 하는 선교사들이 이 일에 실망하지 않으면 태국선교는 성공적으로 감당하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이 일에 자신있는 선교사도 또한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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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주일학교가 쉽니다



    나는 어린이 주일학교 교사를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하였다. 역시 태국선교사로 온 후 태국의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태국교회의 약점이 어린이 주일학교에 대한 관심이 한국에 비하여 크게 떨어지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나는 어느 주일 방콕의 임마누엘교회를 방문하고 우리 애들을 어린이 주일학교에 보내려 하니 오늘은 쉰다고 하였다. 이상하여 물어보니 오늘은 주일학교 교사가 식사 당번이어서 어린이를 가르칠 교사가 없기 때문에 쉰다는 것이었다. 태국교회의 부흥과 발전이 느린 것, 교회의 허약성이 바로 이 어린이 교육이 없거나 있다해도 없는거나 마찬가지의 형편 때문인 것을 다른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확인하였다. 나는 우리 전도사들에게 어린이 교육에 대하여 강조하였더니 자기는 어린이 교육을 시킬줄 모른다고 했다. "나는 화가 나서 너는 어린이 시절이 없었는가? 너도 밥 먹을줄 아는가?"라고 호되게 책망을 하고 어린이 주일학교를 권장 하였다. 나는 이들에게 어린이 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하여 방콕 변두리 경찰 비행단 관사내의 강당을 이용하여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였고 그 뒷편에 있는 반 크렁부아 국민학교와 교섭하여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였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가난한 학생들의 점심식사 대용으로 우유를 공급해 주어 학교의 환심을 사고 있었기에 교장의 전적 지원으로 방콕 교육청의 허가를 받아 학교 건물을 전적으로 활용하여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고 하루 4시간씩 4일간 예배와 성경공부, 놀이, 운동, 율동등 한국교회에서 하는 것 같이 여름성경학교를 운영하였는데 매 회당 150명 정도 참석하였고 마지막날 예수 믿을 사람을 손을 들라하니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손을 들어 결신 하였다. 그들이 진정한 마음에서 손을 들었는지 아니면 체면을 생각하고 손을 들었는지 알수는 없으나 어린이들의 든 손이 어느 땐가는 결실을 얻을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어린이들의 모임이지만 질서와 정리 정돈을 우선으로 하였다. 이는 자유의 나라에 걸 맞지 않는 느낌이 있으나 훈련이란 의미와 기독교적인 모임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교육이 되어지려면 먼저 듣는 사람들의 자세가 제대로 준비되어야 하기에 학교와 같은 제도와 질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우렸는데 장소가 자기들이 배우는 학교였기에 별 물의는 없었으나 훈련 겸하여 교사가 된 교역자들은 갖은 이론을 앞세워 자기들의 본래 하던 자연스런 형태의 무질서한 모임이 어린이들에게 맞다고 고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줄을 맞추어 질서 정연하게 앉았는지를 확인한 후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임을 강조하고 예배를 드렸기에 예배시간 만은 질서 정연하게 앉아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교역자들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경찰 비행단내에서도 2회에 걸쳐서 어린이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였는데 부모들의 반발을 사지 않기 위하여 최대한의 주의를 기우려 자연스럽게 어린이로 하여금 믿음의 길로 이끌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였으나 이 아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말씀을 배우고 좋아했던지 결국 학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이 예수를 믿는 아이들이 될 것을 염려하여 더 이상 장소를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반 크렁부아 국민학교와 경찰비행단 관사 내에서 상당기간 어린이를 위한 여름성경학교를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태국선교 초기의 큰 경험이면서 어린이 교육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태국교회 부흥의 장애 요인중의 하나가 바로 교회의 기초가 약하다는 것이다. 교회의 골격을 이루는 신학의 기초가 약하여 교회의 분위기는 마치 부처의 제자들이 주님의 일을 다루는 것 같은 느낌을 자주 받고 있을뿐 아니라 어린이 주일학교가 있는 교회가 별로 없고, 있다해도 일반 유치원 운영하는 식으로 끝내 버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주님의 제자로 만드는 과정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어린이 교육이 없는 교회는 장년이 있다해도 기초가 약한 집처럼 되어서 각종 위험한 요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정상적인 교회 부흥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 부모들도 자기 자녀를 양육할때 식모의 손에서 자유스럽게 기르는 관계로 자녀가 교회를 가든지 안가든지 별로 관계를 하지 않고, 교회 지도자들도 이 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우선 재정을 쥐고 있는 어른들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는 실정에 있다. 때문에 한국에서 흔히 보는 주일학교 교사 교육이나 훈련은 별로 없고 개최한다고 해도 관심자및 헌신자가 없어서 성황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


    나는 85년도부터 태국어린이전도협회의 이사로 현재까지 활동해 오는데 이 활동마저 애용해 주는 교회나 교사가 너무도 적어서 겨우 연명하는 정도의 수준에 처해 있으며 이를 담당하고 있는 사역자들도 좀더 많은 그리고 효과적인 사역을 전개하는 일에 지혜를 짜내고 희생을 감수하기보다는 고유의 태국 스타일대로 그저 되는대로 무리없이 흘러가고 있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겨우 기독교학교의 성경공부 특별강사로 도와주던지, 신학교의 주교교사 강의로 도와주던지, 몇교회의 여름성경학교 강사로 나가서 도와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어서 한국 개교회의 주교교사 정도의 사역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이곳은 태국이어서 너무 깊이 관여하는 것은 실례가 되기에 나 마저도 무력하게 되어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어린이 교육을 제대로 감당하려고 여러가지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태국 아이들이 한국 아이들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과 부모들이 이들을 풀어주지 않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곤 한다. 그리하여 아직까지 이들을 위한 묘책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어서 답답한 중에 있다.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어린이 교육을 성공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어린이 전문 선교사가 속히 태국에 파송을 받아 태국선교의 키가 될 어린이 교육을 정상화 시키고 이를 통하여 태국교회의 부흥에 이바지 할 수 있는 기회가 속히 오기를 기도하며 간절히 소원한다.



    12


    꼭 줄을뻔 했는데



    나는 태국에서 사역한지 금년이 15년째인데 그간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 덕분에 미미한 감기 몸살 정도를 제외하고는 몸이 불편하여 병원에 입원한 적이 없었다. 현재는 내 자신이 느낄 만큼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속히 안식년을 취하여 건강을 돌보고저 하나 현지 사역의 욕심 때문에 96년에나 첫 번째 안식년을 취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을 뿐이다. 한번은 태국교회진흥원에서 개최하는 교회성장쎄미나의 강사로 방콕에서 약250Km떨어진 중태지방의 OMF 선교부 소속 "하앙나암" 수양관에 가야 하는데 바로 전 3일간 감기 몸살로 고생을 하였다. 강의가 있는 전날에는 좀 우선하여 차를 몰고 알지도 못하는 장소를 찾아서 가게 되었다. 사실 3일간 죽도록 아팠기에 좀 우선 하다고 차를 운전하여 가서 강의를 하겠다는 것은 무리요 욕심이었다. 그리고 이때 나는 꼭 줄을 뻔하였는데 이는 성경에 있는 대로 "욕심이 잉태하면..,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을 체험하였다. 방콕에서 출발하여 운전하여 가는데 별지장이 없었으나 2시간이상 운전하고 수양관이 있는 "차이낫"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푯말을 볼 때는 몸의 피곤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 비가 좀 내려 노면은 미끄러웠다. 순간 앞에 가던 봉고차가 갑자기 죄 회전하여 들어간다는 신호를 넣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브레이크를 밟았을 때 차는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로링하는 차를 바로 잡는다고 핸들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하니 차는 미친 것처럼 흔들어 댓고 나는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는데 가슴은 핸들에 밀착되어 있었고 차는 180도를 회전하여 방콕 쪽을 향하였고 길가 3m 낭떨어지 논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해서 죽는 모양이다 라고 느껴졌을 때는 차가 멈추었다. 그때 나는 아직 죽지 않은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한 동안 차 속에 그대로 앉은채 멍하니 있었다. 어디서 나의 차가 논으로 빠지는 것을 보았는지 태국인 한사람이 달려왔다. 그 제서야 나는 차안과 자신을 둘러보았다. 생각 밖에 아무 이상이 없고 차 속의 가방과 물건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와 차가 어떻게 빠져 있는지를 살펴보았으나 차도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을 갖었다. 이는 죽을 자리에서 멀쩡하게 되었기 때문이며 모세를 길가에서 치시려 했던 하나님을 생각하니 내가 아프고 난 후이기에 건강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 할 수는 있다해도 나에게 이런 경고를 주어야 될 필요가 있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런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럴 때 마다 즉시 하나님의 오묘한 뜻을 깨닫는 영적 감각이 있어 주님의 뜻대로 고치고 살며 일하는 나 자신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나는 우선 논 속으로는 빠지지 않았으나 3m 논가에 있는 차를 어떻게 끄집어 낼까하여 염려하다가 태국인에게 사례를 할테니 지나가는 차를 세워 내 차를 끄집어내 달라고 했다. 그때는 약 1시간 정도면 어두워질텐데 그 전에 차를 올려놓지 않으면 수양관에 제때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이 차는 여기에 버려두고 가야할 형편이었기에 급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겨우 트럭의 도움으로 차를 빼내어 놓고 보니 뒷 타이어 하나가 바람이 전혀 없었다. 우선 보조 바퀴로 갈아끼고 시동을 거니 걸리지 않아 트럭이 끌어주어 시동을 거니 모든게 정상이었다. 나의 전적 실수로 이 일이 발생했으나 수양관으로 계속 갈수 있게 된 것이 감사했다. 만약에 내 차가 180도 회전시 반대편에서 차가 오고 있었다면 나는 크게 부상을 입던지 아니면 죽었을 것이고, 논으로 빠질 때에 길가에 가로수가 있었다면 그 나무를 들어박고 큰 부상 이상의 상태에 처했을 것이고, 논으로 아주 빠져 버렸다면 일이 하루에 끝나지 않게 되어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나는 극히 위험한 일을 순식간에 당하면서 영화에서나 있는 것으로 알던 상황을 내가 직접 체험하고 보니 너무나도 쉬운 것임을 느꼈다. 이것은 내가 차를 운전한지 1년도 되기 전의 운전 미숙시의 사건 이지만 운전을 상당히 하게 되었던 어느날 시골교회를 방문하던 때 무의식 중에 행한 나의 무식한 운전으로 극히 위험한 일을 당할 뻔하였다.


    북동부 지방의 교회를 방문하고 북쪽 피싸누록을 통과하여 방콕으로 내려오는 산길에서 나는 옛날 군목시절 오토바이로 산길을 내려올 때 시동을 끄고 내려오던 때를 생각하고 차량의 시동을 껐다. 내려가는 길인데 기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는데 라는 무식한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시동을 켰기에 위험을 무의식중에 넘긴 것을 나중에 운전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태국교회 지도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나누다가 깨달았다. 그때 나는 차의 시동을 끄면 운전대가 고정되고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때문에 내가 차량의 시동을 끄고 계속 달렸으면 커브 길을 만났을 것이고 그 커브 길을 직선으로 달리고 브레이크는 듣지 않아 그 높은 낭떨어지로 떨어져 전 가족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계곡에서 썩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때문에 이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소름이 끼쳤는지 지금도 아찔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사실 태국내의 각종 교통 수단을 이용한 여행에는 항상 생명을 내 맡겨야 한다. 시골교회를 방문할 때 고속버스를 이용하는데 그때마다 현지에 내리면서 이번에도 죽지 않았구나! 하는 확인을 하게 된다.


    수코타이의 싸롯강도사가 들려 주는 이야기는 무서워 소름이 끼친다. 태국에서 교통사고가 나면 사람들이 몰려오는데 이유 중에 하나는 승객들이 소지하고 있는 돈과 귀중품을 가져가기 위해서라는 것이라고 했다. 때문에 교통 사고가 나고 생명은 아직 살아있다 해도 죽은체 하고 있을 것이며, 타인이나 자신의 소지품을 가져간다고 해도 죽은 것처럼 가만이 있어야 생명이라도 보존 한다고 했다. 이는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 살아있는 사람도 죽이고 또 증거도 없애기 위함이라 했다. 물질만능에 생명 경시 현상은 모든 생명을 동등하게 보는 불교의 가르침 때문에 사람의 생명도 파리 목슴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오류에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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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역자는 헌금시간에 열외



    처음 동역자였던 쏨뻥전도사는 태국의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런 것처럼 십일조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다. 나는 교역자가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의 가르치는 성경말씀이 정말 믿을 만한 말씀으로 받겠는가란 우려와 그 자신이 이 십일조 생활을 통하여 재정의 궁핍함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십일조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반 강제로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하였는데 몇달후 그는 나에게 특별 상담을 청하였다. 그것은 내가 말씀을 따라 십일조 생활을 하였는데 재정에 대하여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인가? 라는 질문이었다. 그의 생각에 성경에서 가르치기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드려... 그것으로 나는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했는데 몇 개월 동안 시험해 보았는데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기는커녕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묻기를 "교역자가 돈이 많아지는 것만이 복이라고 생각하는가?" "요사이에 병원에 자주가야 했는가?" "뜻하지 않던 돈을 허비해야 하는 일이 있었는가?" "그간 생활비에 대한 특별히 부족함을 느꼈는가?"라는 기본 질문들을 한 후 주의 종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축복은 그때그때 주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종은 육적인 복을 추구하기보다는 영적인 복을 추구해야 할 것을 설명하고 십일조 생활로 이번 달에 돈 몇푼이 더 수입되었다면 말씀의 성취이고 돈이 보이지 않으면 허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적인 지도자의 자세가 아니라고 주지시킨 후 내가 너의 몇 달간의 생활에 대하여 청취해 보니 하나님이 너에게 복을 내려 주신 것이 확실함을 느낀다고 말하면서 네가 두배가 되는 복을 받았다면 만족하겠느가? 라고 묻고 그렇게 받았다 할찌라도 몸이 아파서 병원비를 많이 지불했다면 그게 무슨 복인가? 라고 깨우쳐 주었다. 그는 현재 미비했던 학문을 다 마치고 홍콩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목사가 되었다. 분명히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받은 것이다.


    나는 태국에 온지 1년후 부터 신학생 장학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 3개처 신학교의 학생 5-6명이 우리의 장학금을 받으며 내가 개척하여 사역하고 있는 교회에서 목회 훈련에 임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헌금시간에 헌금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불쾌한 마음을 가지고 이들에게 "왜 헌금을 않느냐?"고 물으니 "돈이 없어서 못한다"고 하였다. 이 말도 맞는 말이다. 그들은 대부분 시골 태생으로 부모가 가난하여 일반 학교를 다닐 돈이 없던지, 실력이 부족하던지, 문제아이든지, 하여 일반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신학교에 오게 되었는데 통상 신학교는 어떤 경로를 통하든지 모든 신학생들이 훌 스칼라쉽을 받는 상황이어서 그저 맨몸으로 온 학생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고 용돈을 주었기 때문에 용돈을 아껴서 하나님 앞에 바치는 생활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소속교회에서 이런 신앙 훈련을 받지 않아서 감히 그런 신령한 생각은 하지 못하고 색다른 거지가 되어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어떤 이유가 있다해도 헌금을 걸러서는 않된다고 강조하였다. 그 다음 주일부터 이들은 아주 적은 액수의 헌금이지만 헌금을 하기 시작하여 마음속으로 얼마나 기쁘고 흐뭇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월말이 되니 용돈을 타게 될 때에 이들이 지난 4주간에 하나님 앞에 드린 헌금 액수를 지원해 달라고 청한 것을 보고 기절 할 뻔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헌금하였기에 기뻤던 마음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이들에게 "내가 네 아버지냐?" 하고 물었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 아이들이 교회에 갈 때 헌금을 준비해 주었기에 나에게 헌금을 청구한 이들의 태도가 너무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태국은 돈 있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을 자기 아들에게 하듯 자비를 베푸는 일을 해 오고 있어서 아마 이 들이 나를 이렇게 의지하고 도움을 받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태국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태국인들이 자립에 대하여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평생 은혜를 입으며 종 처럼 살려는 태도에도 문제는 있다. 이런 태도를 현재 동역하고 있는 교역자들에게 서도 보고 있기에 나에게는 미해결의 큰 숙제로 남고 있다.


    하루는 오순절 계열의 한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설교자가 상당히 강력한 어조로 교단 신학교를 위하여 헌금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헌금을 하게 되었는데 이 설교자는 가만히 앉아서 헌금을 하지 않았다. 나는 설마 그렇게 은혜스럽게 설교를 하고 자기는 헌금에 참여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고 생각했다. 다른 집회에서도 설교자나 지도자들이 헌금에 참여치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이 신학교를 다닐 때 내가 겪었던 신학생들 처럼 살아왔기에 이런 신앙을 소유한 지도자들이 되었을 것이라고 느꼈다. 후에 안 일이나 그 설교자는 한국의 여의도에 있는 대 교회의 선교사로 지원을 받았던 사람이고 자기 교회 교회당 건축할 때도 한국 교회의 지원을 받아서야 교회당을 완성할 수 있었던 지도자였다.


    나는 남부지방의 한 시골 교역자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어느 날 한국인 선교사가 그 교회를 방문하였는데 교회당은 허름하고 청소도 되어 있지 않았고 전구는 군데 군데 이가 빠져 있어 너무 민망하여 교회당 관리를 좀더 잘 하도록 가르쳤는데 그 교역자의 말이 교회가 약하여 자기의 생활비를 다 충당하지 못하기에 값이 나갈만한 교회 용품을 팔아서 배고픔을 겨우 연명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가 빠진 전구는 그걸 빼다가 팔아서 그렇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가롯 유다만 무엇을 팔아먹을 줄 안게 아니고 훈련되지 못한 태국의 교역자가 직, 간접적으로 주님을 헐값에 팔아 넘기고 있는 것 같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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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인의 위험과 선교사의 실망



    선교사로 사역하다 보면 간혹 본토인에게 서글픈 일, 외로운 일, 억울한 일, 위험한 일 등을 당하게 마련이다. 선교사의 생활이 어려운 점이 여기에 있는데 본토인들로 인하여 실망하지 않으면 일단 선교사의 사역은 성공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는 선교지를 버리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기에 소망은 있는 것이다. 나는 15년동안 태국에서 사역하는 동안에 본토인으로 부터 받은 실망으로 태국 선교를 벌써 그만 두었어야 한다. 그러나 선배 선교사와 태국교회지도자들의 격려와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까지 견디어 오면서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얼마만큼 오래 참고 견딜 수 있는가에 따라서 선교 사역의 성패와 결과가 좌우된다는 선교사의 철학을 갖게 되었다.


    나는 태국 선교를 시작한지 약 5년쯤 되었을 때에 태국선교를 포기하였다. 그리고 태국을 떠나려는 마음을 갖었다. 어디 갈데가 있어서 그런 유혹을 받은게 아니라 태국인들 특히 기성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을 조금씩 알게 된 후 이런 사람들로는 모든게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혼자서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런 요소로 간혹 곤욕을 당하고 있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마찬가지라고 보지만 이런 위기들을 넘기면서 안식년도 모른체 오늘까지 견디어 온 것은 하나의 이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뿐 아니라 이런 이들로 나의 마음의 각오가 달라진 것은 내가 태국에서 죽어서는 않된다는 마음과 내가 태국에서 죽더라도 태국에 나의 시체를 묻고 싶지는 않으며 태국 선교를 다 마치고 살아서 돌아간다 해도 태국의 사랑하는 형제들의 공항의 환송을 기대하지 않고 나 혼자서 태국 공항을 떠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이들을 사랑하며 인내로 나의 사명을 마치고져 한다.


    어느 날 나는 태국 선교에 실망을 느끼고 나의 가까이에 사역하는 OMF선교사이며 태국교회진흥원의 간사로 있는 알렉 스미스박사와 식사를 함께 나누며 나의 태국 선교에 대한 제반 이야기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소신껏 이야기하였다. 그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를 띄고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의 이야기를 들으니 꼭 날 강도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고 대답한 후 "나는 태국에 20년을 사역해 왔으나 너 처럼 선교의 결과를 쉽게 생각하지도 않고 속단하여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데 너는 이제 겨우 5년 정도 되었는데 이는 선교사 족보에 잉크도 채 마르기 전이라고 보야야 할 상황에 있는 선교사가 많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 태국인에 대하여 불가능 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니 이는 강도들이나 할 수 있는 생각이고 태도라고 느껴진다" 라고 호되게 책망하였다. 나는 이때 아멘으로 받았고 이것이 나로 하여금 그 위기를 넘기게 하였다. 이는 마치 한국교회 기도원에서 강사가 말씀증거시 말을 가리지 않고 욕을 퍼붇는 상황에서도 참석자들이 아멘을 연발하며 이런 욕을 먹고 큰 은혜를 체험하고 내려오는 모습과도 비슷함을 체험하였다.


    그뿐 아니다 나는 깐짜나의사의 집에서 그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교회를 개척하고 열심히 사역하고 있을 때 그가 다른 선교사로 인하여 나를 배반하고 얼굴을 돌렸을 때 나는 당황하였고 태국 선교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그때 그를 하나님처럼 의지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의 가장 가까이에서 사역하던 사람의 배반을 맛보니 이는 태국 선교의 실패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를 결정하기에 앞서 짜란박사와 사모에게 의논을 하였는데 그들은 나에게 "그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태국선교를 포기한단 말이냐" 고 충고하며 "태국에 있는 다른 선교사나 타 선교단체를 보아라 이만한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사람과 단체가 있는가?" 하였을 때 즉시 어리석은 생각을 고쳤다. 그렇기에 나의 오늘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 사역 중 타의에 의하여 선교지를 떠나지 않으면 않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경험적인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스스로 목메어 죽는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하기 때문인데 이런 상황에서 태국을 떠난 한국인 선교사만도 7인 이상이 되며 앞으로 더 많은 선교사들이 이런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니 피할 수 있는 길은 있으나 피하지 못하고 있기에 이들을 생각하면 무거운 마음을 갖게 된다.


    파송교회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는 한국인 선교사들은 준비가 되었든 미비하든 일단 파송을 받고 비행기를 타면 베테랑 선교사처럼 되어 버리는 것을 느낀다. 이로 인하여 선교지에 도착하면 선배의 사역이 우습게 보이고 더욱 자신만만하여 선배의 이야기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으며 필요를 느끼지도 않고 곧 놀랄만한 이적을 행하려는 욕망으로 가득차게 된다. 사실 선교사가 자기에게 주어진 사역하나 제대로 감당한다는 것조차 어려움을 느낄 때는 선교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때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욕심은 태국 선교사로 파송 받으면 태국 전체를 내가 책임져야 태국 선교사가 되는 것처럼 오해하기 일쑤이다.


    나는 네팔과 인도에서 사역하는 어떤 선교사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충고해 준 적이 있다. 그가 인도로 파송을 받아 갔으나 비자 관계로 네팔에 정착하고 인도와 네팔을 드나들면서 열심히 선교 사역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총회에서 그를 네팔 선교사로만 취급하였지 인도 선교사로는 취급해 주지 않았다. 그는 화가 나서 왜 내가 인도와 네팔 선교를 감당하고 있는데 인도와 네팔 선교사라고 하지 않고 네팔 선교사라고만 했느냐고 항의를 하니 총회 선교부 관계자가 하는 말이 둘 중에 하나만 책임지라고 하였다고 하면서 불쾌하게 말하였다. 나는 그에게 당신이 네팔에 살고 있으니 네팔 선교사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라고 하면서 욕심부리는 것은 무리라고 하였다.


    나도 처음에는 태국 전체가 나의 밥이라고 생각하고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게 없었다. 그러나 씨니어 선교사가 된 지금의 나를 돌이켜 보니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고 나의 지금의 사역은 교회개척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40여개의 교회가 되었기에 태국에서 40년 이상을 사역한 남침례선교부의 60여개처의 교회와 비교하면서 그들이 놀라는 것을 보면 한 우물만 판 사역의 당연한 결과라고 보지만 아직 만족한 상태는 아님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 후배 선교사들이 이런 잘못된 욕심에 가득차 있어서 일확천금을 얻는 결과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으나 태국어 실력과 재정의 능력이 부족하여 시간만 허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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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 적응훈련과 태국화



    나는 태국에 도착되어 맨 처음 시작한 것은 태국어 공부와 태국교회를 배우며 적응하는 훈련이었다. 이를 위해 태국어 공부를 시작한 후 국가고사에 응시 할 때까지는 하루도 쉬지 않고 태국어 공부를 계속하였다. 때문에 후배 선교사들이 태국어 공부를 하다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잠시 쉬는 것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았고, 더우기 태국어 공부 과정에서 낙제를 하였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많은 염려가 되었고, 또 태국어를 너무 오래 배우고 있는 것을 보면 언제나 일을 시작할 것인가 하고 조급해 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태국에서의 신분이 어느 누구의 감독 하에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앞으로도 이런 사태는 계속 될 것이나 별 묘책은 없다. 나는 태국어 공부와 함께 태국 적응 훈련과 태국화가 앞으로 나의 태국 선교의 성과를 좌우할 것으로 믿었기에 나는 누가 청하든 청하지 않든 교회든, 총회든, 부흥회든, 쎄미나든, 수련회든,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쫓아 다니는데 열심이었다. 때문에 당시 이런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과 좋은 교제를 나누게 되었을 뿐 아니라, 혹 어떤 사람들은 나를 모른다고 해도 나는 그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선교사에게 차량을 사 주려면 태국어를 배운 다음에 사주려는 계획보다는 태국에 오자마자 사주어 이런 훈련에 도움이 되도록 하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어 공부 중에 나는 주로"수안푸루교회"에 참석하였다. 이 교회는 쁘라냵교역자가 방콕성서대학(BBC)을 다니면서 BBC교수로 있는 OMF선교사인 헨리의사의 전적 지원으로 세운 교회인데 나는 이 교회가 한국교회 같은 열심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기에 이 교회의 교인처럼 정기적으로 출석하였고 언어 공부가 없는 날엔 이 교회의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였는데 이 교역자가 이미 한국교회를 방문한 바가 있어서 새벽기도회를 좋게 생각하고 새벽에 교회당 문을 열어 놓고 누구든지 나와서 새벽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예배가 없는 것이 좀 불만이었으나 이렇게 나마 새벽기도의 모임이 있다는 것도 천만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이 교회를 제외하고는 태국의 어느 교회도 새벽 기도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쁘라냵목사는 지금도 북동부지역의 개척전도를 위해 헌신하고 있으며 헨리박사도 계속 교회 개척하는 일에 전도로 협력하여 많은 교회를 세우고 부흥시키는데 도음을 주었으며 현재도 BBC에서 가르치면서도 매주 공원에 나가서 전도에 열심하는 선교사인데 그는 바울이라는 별명을 가진 철두철미한 사람이며 BBC를 세우는데 공헌을 한 주인과 같은 사람이다. 그는 60이 넘었으나 결혼하지 않았으며 생활이 김용기 장로와 같이 검소하고 철저한 면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인정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그를 존경하고 있다. 나도 태국에 도착된지 1주일도 안되어 BBC교장 티라박사의 초청을 받아 티라박사댁을 방문하였을 때 헨리박사를 처음 만났는데 그가 나와 우리 가족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갖고 여러가지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을 뿐 아니라 집으로 돌아갈 때는 택시를 잡아주면서 택시비를 지불해 준것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우선 외국인 선교사가 태국에서 사역을 하려면 먼저 태국에 적응되어야 하고 자신이 태국사람 처럼 되는 태국화가 자기 속에서 성취되어야 하기에 나는 후배 선교사들에게 태국의 적응을 위하여 한인과의 관계를 너무 자주 갖기보다는 태국인과 자주 그리고 깊이 사귀는 과정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태국화를 위하여 우선 태국을 파악하되 교회를 파악하기 위하여 태국어 공부를 시작한지 약 6개월쯤 되면 현지인 교회를 방문하여 이들과 교제를 나누며 태국교회의 현실을 깊게 파악하도록 하고 한국적인 사고를 태국적인 사고롤 전환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선교사의 사는 길이며 사역의 성과를 속히 거두도록 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나도 태국을 과도하게 좋아하고 속히 태국화 되어 태국인처럼 사역하고 싶어하는 욕심은 있었으나 나 자신을 부스러뜨리지 못하여 시간을 허비하고 많은 손해를 본 것을 느끼기에 우선 태국을 위하여 자신을 버리고 태국을 배우되 악한 것에서 자신은 지키면서 태국화를 성취하고 태국과 한 풀이 되어 태국에 유익한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면 그의 사역은 그가 태국을 떠난 후에도 길이 남게 되겠으나 급한 마음과 욕심으로 태국을 대하고 속한 결과를 위해 바른 길을 버리게 되면 자신의 명대로 살지 못할 것이며 태국을 떠난 후에는 그의 사역도 그의 이름도 그가 태국을 떠남과 동시에 살아지고 말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때문에 훌륭한 선생은 착실한 학생에게서 나온다는 속담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고 하겠다.


    또한 나는 태국의 음식을 배우기 위하여 태국교회 지도자들을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면서 태국의 제반 사항들을 배우고 이들의 사고를 파악하는 한편 이들이 주문하는 태국 음식중에 한국인의 입에 맞는 음식은 그 이름을 적어 두어 후에 우리들이 음식을 시킬 필요가 있을 때에 활용할 뿐 아니라 한국인들이 현지를 방문하게 될 때에 이 음식을 주문하게 됨으로 누구나 태국 음식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갖게 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한번은 미국에 계시는 한인 집사님들이 태국을 잠시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의 여행에 대한 편의와 조언을 부탁하여 이를 도와주었기에 하루 저녁식사를 대접해 주겠다고 하여 태국식사로 하자고 하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 아이들이 태국에 온 후 태국 음식을 먹지 못하여 어려운 중에 있으니 한국 음식으로 하자고 하였다. 나는 태국 음식이 그렇게 고약한 음식이 아닌데 하며 자신있게 이들을 태국 음식점으로 안내하고 한국인의 입에 맞는 음식들을 시켰는데 몇일 동안 전혀 먹지 못하고 먹을 생각 조차하지 않던 아이들이 얼마나 맛있게 음식을 먹든지 모두다 태국 음식에 대하여 새로운 인상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도 태국 적응 훈련시 음식에 대하여도 투자를 하여 태국 음식에 대한 주문 솜씨도 익혀 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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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생장학사업및목회훈련



    나는 태국에 도착한 후 태국교회진흥원의 소속 선교사로 출발하였기에 태국교회의 최고 지도자들과 함께 사무실을 중심하여 생활하였다. 이들을 통하여 태국을 익히고 이들의 생각과 사고 방식을 파악하였기에 태국화에 큰 도움이 되었고 그러면서도 태국인 중심하여 생활해 왔기에 태국어 습득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나의 한국적인 것이 조금씩 파괴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태국에 대하여 어느 정도 눈치를 챌수 있을 만한 정도가 되었을 때에 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이들을 훈련시키고 장차 교회 개척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우선 방콕성서대학(티라박사)과 복음훈련원(위치엔박사)에 부탁하여 신학생 장학금 수여 대상자를 선발하고 이들에게 전 장학금을 주면서 기회가 있는 대로 목회훈련을 시켰다. 후에 내가 교회를 개척하게 될때 이들은 교인겸 전도사로 활용하게 되었으며 이들과 함께 예배와 성경공부, 찬송연습, 그리고 전도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당시 나의 사고는 아직 한국적이었기에 태국인들에게 많은 부담을 주었을 것이나 나는 느끼지 못했다. 그때의 나의 신학생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여 월요일이면 방콕성서대학에 가서 이들을 훈련시켰으며 한국에서 하는 것처럼 전도단 띠를 두르고 전도지를 나누어주게 될 때에 부끄러워서 자원하여 하려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예배시간은 주로 찬송을 가르쳤고 새벽시간에는 강제로 새벽기도를 시켰으며 매주 토요일은 신학생 정기 교육을 실시하였다.


    태국인들은 이런 강한 훈련을 강제로 시키는 것을 보고 나에 대하여 너무 강한 인상을 받았기에 지금도 "아짠 차나 정"(나의 태국명)하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어서 좋치않은 면도 있으나 훈련시키는 교관이란 측면에서 보면 이런 인상도 상당히 유리한 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때문에 오늘까지 태국장로교회들을 지도해 오는 일에 있어서 어떤 문제에 부딛치면 해결사 역할을 하는데 큰 몫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정선교사가 군목 출신이라서 그런다고 하나 사실은 선천적인 것 같다. 당시 신학생 장학 사업에 대한 특별한 지원금이 있어서 한 것이 아니고 현지의 필요는 한국의 지원이 있던 없던 실행한 후 하나님의 지원을 기대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전개해 왔고 현재에도 마찬가지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어서 사업은 진행되고 있는데 사업비는 조달되지 않는 상황도 자주 만나게 된다. 현재에도 신학생 장학사업은 계속되고 이를 지원하는 교회는 절반도 되지 않고 있으나 새로 부임한 김건용선교사(한가람교회)가 이 분야를 내년부터 전담하기로 하고 벌써 일부 사역을 책임지고 있어서 선교부의 사역이 전문화되어 가고 있기에 내일 일을 전망하며 기쁘게 생각한다. 얼마전 93년 선교부 정기회의시 어떤 고문이 질문 하기를 "한국선교사들은 일군은 육성하지 않고 육성해 놓은 사람을 빼앗아가는데 왜 그러는가?" 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를 "아마 한국인들은 나중에 들어왔고 일은 해야겠는데 사람이 없으니 우선 육성된 지도자를 스카웃 할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있지 않겠는가?" 고 해명을 하면서 우리 스스로를 반성해 보기를 "일을 급히 시작하는게 중요하지 않고 남이 아닌 내 사람을 먼저 만든 후에야 제대로 일을 전개하는 것이 원리이며, 근본적으로 태국 교회가 일꾼이 부족한 상황이기에 다른 곳에서 사역하고 있는 사람에게 높은 급료를 제시하면 그들이 이 급료 때문에 우리에게 올 수는 있으나 이 일로 인하여 한국선교사는 일꾼은 육성하지 않고 있는 일꾼을 빼앗가 간다"고 한것 같았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반성하고 조심해야 될 문제가 있다. 태국복음주의연맹만 보아도 다른 곳에서 사역자를 스카웃하는 것을 절대 금하고 있어서 이를 어기면 단체나 선교사의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된다.


    나도 이를 경험한바 있는데 1981년말 수코타이에 있는 싸롯전도사가 그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와서 목회훈련을 받고 있었을 때 WEC선교부 대표가 나를 만나 의논 할 것이 있다고 하여 그를 만나니 그는 싸롯전도사를 자기들이 사역하는 수코타이, 깜팽펫, 딱에는 보내지 말라고 하면서 그 지역은 40년전부터 자기들의 고유한 선교지 이기에 이곳에서 교회를 개척하지 말하고 하였다. 우리는 원래 교회가 없는 곳에서만 교회를 개척하였고 씨삼롱에 교회를 개척하려는 것도 그 면소재지에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는 이런 상황에서 자기들의 허락을 받은 후에 가능하다고 하였고 나는 허락해 줄 수 있느냐? 고 하였지만 자기들의 지역에서는 않된다고 하면서 만약에 우리가 가서 교회를 개척하면 자기 단체 사역자들이 모두 나한테 관심을 가지고 주태한국장로교선교부와 함께 사역하려는 염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들이 나에게 온다고 해도 나는 그들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이를 믿지 못하였다. 결국 싸롯전도사는 훈련을 마치고 씨삼롱교회를 개척하게 되니 WEC선교부 대표는 나를 태국복음주의연맹에 고소하기를 자기 지역을 침범하였으니 처단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짜란박사와 이 문제를 의논하였더니 짜란박사는 지도하기를 WEC대표는 아일랜드 사람이어서 다투고 싸우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으니 대항하지 말고 가만히 있기만 하라고 하였다. 결국 그의 고소로 EFT운영위원회에 출두하니 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마저도 이곳은 태국 땅이고 외국 선교단체가 관활하는 태국 땅이 어디 있는가? 하고 동조하지 않으니 그는 결국 정선교사가 자기 사역자를 빼앗아 갔다고 죄목을 바꾸었다. 이유는 자기 지역이라는 개념이 통하지 않으니 그가 EFT의 운영위원 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정선교사를 처단하려고 계속 노력하였던 것이다. 마침 싸롯전도사가 현장에 와 있었기에 본인의 말을 들어보자고 제한하였으니 싸롯전도사는 WEC선교부 사람이 아니었기에 WEC대표는 이를 거부하고 EFT는 양쪽에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으니 EFT는 이 이상 관계하지 않겠으니 잘 합의하라고 하여 일은 그것으로 종결 지었다.


    나는 그때 작은 선교단체, 힘이 없는 선교단체의 서러움을 맛 보았으나 EFT에서 내가 징계를 받지 않은 것 만으로도 기뻐하였다. 오늘날 한국 선교사들 중에는 이런 질서를 모르고 기존 교회나 단체에서 사역하는 태국인 사역자를 높은 급료로 스카웃 하기에 사역자는 구할 수 있으나 이것이 태국 교계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염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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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인의 한국교회방문 훈련



    얼마 전 북태지방의 교회의 지도자인 분씨목사를 만났을 때 나는 한국에서부터 사귀던 위라전도사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그는 한국인 선교사에 의해서 한국교회에 보내져 1년이상 한국교회를 배우고 태국에 돌아와서 목회 일을 하다가 현재는 태국기독교총회 제3노회(람빵지역)의 사회개발부 간사로 활동 중에 있는데 그는 한국에서부터 나의 태국어 교사 겸 태국행 안내자 역할을 해준 태국인이다. 그는 이리 중앙교회의 재정지원을 받아 북태의 "준"이라고 부르는 면소재지에 교회를 개척하기도 하고 기성교회를 목회도 하였는데 몇년 전부터 람빵으로 옮겨 사역중이기에 분씨목사와 같은 노회에서 일하고 있다. 가끔 그의 생각이 나기에 분씨목사를 만난김에 위라전도사의 근황에 대하여 물으니 "왜 위라전도사는 한국 이야기만 나오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지 알수 없다" 고 말하여 깜짝 놀랐다.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 선교단체와 선교사 지망생들에게 당한 모욕도 다소 간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한국까지 다녀왔는데 오히려 한국 교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을때 마다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기에 친한파인 분씨목사에게 여간 방해되는 인물이 된것 같아 한국에서부터 관계를 맺어온 나로써는 이 이야기를 듣고 상당히 부담을 느꼈다. 후에 위라목사(그는 94년 10월중순 목사안수를 받았다)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 "아마 분씨목사의 사역에 동참하지 않기에 평소 자기를 좋게 생각지 않고 있는 데 아마 그런 관점에서 자기를 평가한 것 같다" 고 변명하기에 나는 다소간 안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지인의 한국내 연수나 연구및 방문 실습에 조심하지 않으면 현지 선교에 큰 문제가 되는 것임을 명심하지 않을 수 없다.


    기성총회에서 관계하는 방콕의 모 교회의 지도자는 선교사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나도 그가 공식 석상에서 선교사들을 모독하는 발언을 하는 것을 목격한바 있는데 기성 총회는 태국선교를 위하여 그를 극진히 대접하고 한국에까지 모셔다가 목사 안수까지 주었으나 최근 그들에게 파송한 한국인 선교사와 두 사람째 문제가 생겨 협력사역을 어둡게 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어떤 선교사가 산족교회 사역자를 너무 빨리 한국교회 견학에 참여시키는 것을 보고 너무 이르다고 충고 한일이 있었다. 태국에서의 준비와 현지 선교사에 대한 신뢰가 거의 완벽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들에게 한국 맛을 보게 하면 감사함으로 한국교회 이상의 희생과 충성이 있을 것을 기대하지만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보편적인 상황이다.


    나는 디렉박사의 이런 간증을 들었다. 그는 태국 남침례교연맹의 총애를 받아 미국 유학을 하였는데 유학을 마친 후 선교사들과 함께 사역하는 동안에 문제가 발생하여 그 선교부를 떠나고 마음은 있으나 지금까지도 주의 종으로써의 사역은 하지 않고 있는데 죽기 전에 주님의 일을 전적으로 감당하고 싶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태국 남침례교선교부는 태국인을 미국 유학시키는 일은 하지 않아서 모든 후배들이 선의의 피해를 입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이는 선교부와 이를 어긴 현지인에게 똑같이 문제가 있지마는 현지인을 선교사의 모국에 유학 또는 견학시키는 일 등을 조심하지 않으면 후한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1980년도부터 태국교회지도자들의 한국교회 견학과 교회성장쎄미나를 개최하는 사업에 참여하여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태국교회진흥원을 돕는 측면에서 한,태교회성장쎄미나를 후원하였으나 후에는 단독으로 이 사업을 현재까지 진행해 오고 있는데 이 쎄미나에 다녀온 사람들이 한국에 다녀온 몇개월은 한국교회의 열심을 유지하나 그후엔 다녀온 사람이나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많이 목격하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몇 교회에서는 많은 사람이 그룹적으로 한국교회를 방문한 후 이들이 힘을 합하여 한국교회의 모범을 계속 실천함으로 소속교회에 많은 유익을 주고 있는 것을 발견하며 이런 일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하고 있다.


    방콕의 쁘라차콤교회에서는 몇사람이 한국에 다녀온 후 성수주일에 대하여 배운바를 실천하기 위하여 주일에 자기들만의 구릅모임을 만들었더니 좋았다고 고백하였다. 태국교회는 성수주일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다. 그리하여 주일에 결혼식을 거행하는 예를 간혹 보게 되는바 이들의 지론은 복된 날 결혼식을 올리면 결혼식이 더욱 복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사실 태국의 주일은 별로 분주하지 않아서 이런 모임을 구상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쁘라차콤교회 교인들이 이날을 좀더 잘 지키려고 성경공부 모임과 전도, 심방을 함으로 주일성수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방콕 휄로우쉽교회에서는 구역장들이 여럿이 한국을 방문하고 구역모임에 대한 강의에 감동되어 이를 실천하였는데 자기 구역이 몇구역으로 분활 할 만큼 많은 결과를 얻었다고 고백하였고, 중태지방의 딱키리교회에서도 여러 교우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온후 전도및 구역 모임에 열심이 생겨 교회의 생활이 활기가 넘치고 있다고 고백하였으며, 우돈휄로우쉽교회에서도 10여명이 교역자와 함께 한국을 다녀온 후 새벽기도를 개설하여 기도에 열심이며 십일조 생활을 충실하게 하지 못하던 장로님 가정이 완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자고 왕십리기도원 뒷산에서 회개하고 결심한 후 실천하였는데 한국에서 돌아와 보니 십일조 결심만 하였는데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표를 즉시 보았다고 고백하기를 "자기는 양어장을 운영하는데 한국을 방문하기 위하여 3개 양어장의 고기를 팔고가지 않으면 한국방문 2주 후에는 고기들이 너무 자라서 가격이 폭락하게 되겠기에 한국방문을 포기하려고 까지 하였으나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손해가 나더라도 한국에 가기로 결심하고 그 전에 양어장의 고기를 매각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2개 양어장의 고기만 헐값으로 매각하였고 나머지 한 양어장의 고기는 기대하지 않고 한국을 방문하였다" 고 하였다. 한국 방문을 통하여 많은 것을 알고 확신을 가지면서 태국의 양어장 고기는 다 잊어버리고 이 은혜를 일본에 있는 자녀들에게 어떻게 전해 줄까하고 염려하고 있는 것을 한국에서 내가 들은바 있었다. 그후 태국에 돌아온 후 급한 일을 정리하고 버려둔 양어장의 고기를 매각하려고 상인을 불러와서 양어장의 고기를 잡기 시작하였는데 고기의 크기도 상인이 요구하는 크기로 잘 자라 있었고 그 작은 양어장에서 얼마나 많은 고기가 나오던지 물고기를 사러온 사람이 이게 귀신이 아니고 정말 고기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곳에서 나온 고기 때문에 한국 방문 전에 2개 양어장에서 얻은 돈 보다도 한국 방문 후 매각한 한 양어장의 고기 값이 배 이상이 되어 손해도 탕감하게 되어 감격해 하면서 하나님께 바르게 살려고 결심만 하여도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났다고 간증하여 태국장로교회 수련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더 큰 은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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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좀 빌려 주세요



    태국인들은 저금 통장을 별로 즐기지 않고 현금이 손에 잡히면 내일은 생각지 않고 오늘 잘 쓰고, 잘 먹고, 잘 즐기는 습관이 있다. 때문에 월말이면 쓸만한 음식점이 성황을 이루고 월말이 가까워지면 한가한 면을 볼 수 있다. 이런 생활 때문에 보통 태국인들은 생활비의 부족을 자주 겪게 되며 또 봉급을 탄 후에 무단 결근하는 것도 일반화 되어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떤 회사에서는 봉급을 월2회로 나누어서 지급하여 해결의 길을 찾고 있기도 한다고 한다. 이 문제는 교회 내의 교역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이들의 생활비가 적은 것도 사실이지만 주어진 생활비를 규모있게 사용하지 못하여 항상 돈의 노예처럼 사는 사람도 보았다. 있을 때는 부자처럼, 없을 때는 가난뱅이 처럼 되어 쩔쩔매는 사실을 쉽게 목격하게 된다. 여기에 현지인 교역자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한번은 우리 교역자 중에 한 사람이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였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확인해 보니 자기 숙소에서 교회에 올 차비가 없어서 참석하지 못하였다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의 어려운 생활에 대하여 불쌍한 생각도 들었으나 그 몇푼이 없어서 교회를 빠진 것이 못마땅하여 걸어서라도 참석하지 그랬는가? 라는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실 그 거리는 걸어서는 참석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뿐아니라 없는 사람은 가진게 있는 사람을 의지하고 그의 것을 자기것 사용하듯 하는데 만약에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이는 달라는 말이지 어느 땐 가는 돌려주어야 할 돈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때문에 빌려준 돈을 받으려는 사람도 무얼 모르는 사람 측에 끼게 된다.


    태국 사회의 풍습이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 대하여 자비심을 가지고 도와주고 주인이 종을 부리는 것 같이 대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어서 외국인이 노랭이 짓을 하면 인상이 흐려지고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되기에 선교사가 이런 면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인상을 구기게 된다.


    나와 처음 동역한 전도사가 어느 날 사임하겠다고 하기에 정말로 그런 줄로 알고 그러면 후임자를 구할 때까지 있으라고 달래고 후임자를 찾으니 그의 가까이 있는 방콕기독병원의 원목이 나에게 전화를 하여 그 전도사의 생활비가 충분한가? 라고 물어 왔을때에야 그 전도사가 정말로 그만 두려고 한말이 아니고 봉급을 올리려고 한 말인 줄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뿐 아니다. 이들 태국 동역자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나도 주의 종이고 당신도 주의 종인데 왜 당신과 나의 생활에 차이가 나게 생활비를 받아야 되느냐?" 고 비교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당신이 차가 있다면 나에게도 차를 사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며 당신이 받는 생활비 만큼 나도 그렇게 대접을 받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후 나는 본토인 동역자들이 우리 집에 자유롭게 방문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닌 줄을 깨닫고 현지인의 우리 집 방문에 대하여 상당히 조심하였으며 후배 선교사들에게도 주지시키기를 혹시 자기 자녀들에게 과자를 사준다 할 찌라도 현지인 동역자의 자녀들을 생각하여 지혜롭게 처리할 것을 당부하여 현지인들이 돈에 대하여 너는 부유하게 살고 우리는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로 시험에 들지 않케 하도록 조심시켰다.


    한번은 치앙마이를 방문하는 중에 신학교를 다니다가 중단하고 호텔에 근무하는 교인을 만난 적이 있었고 그때 나는 우리 집주소와 전화번화가 찍힌 명함을 준 적이 있는데 어느 날 그의 전화를 받았다. 급한 일이 생겼다는 것인데 차를 몰고 치앙마이에서 방콕에 내려왔는데 차가 고장이 나서 부속을 사서 고쳐야 하는데 돈이 없고 시간은 급하니 내가 택시를 타고 찾아갈테니 2,000밧을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알렉 스미스박사가 태국에는 택시를 타고 오는 거지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충고해 준 일이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사람이 바로 알렉박사가 말하던 종류의 거지인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알렉박사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속으로 비웃었다. 왜냐하면 거지가 택시를 타고 오면 내 주머니를 탐내는 거지인 줄을 누가 모르랴하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전화를 받고 알렉박사가 말하던 거지를 만나게 되었는데 어떻게 처리할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되지 않아서 그는 우리 집을 찾아왔고 2,000밧을 빌려주면 내일 바로 올라가서 즉시 돈을 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거절 할 수가 없어서 생각하다가 돈을 뗄려면 아예 돈을 깍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1,000밧을 빌려주었다. 물론 돌려 받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말한 대로 내일 올라가면 즉시 송금해 주겠다던 돈은 15년째 되는 지금도 도착되지 않고 있다. 그후 나는 명함에 집주소를 인쇄하지 않을뿐 아니라 명함을 함부로 누구에게 주지도 않았다.


    13년전 쁘라차니뛕교회를 개척할 당시 한 사람의 교인이 아쉬운 때였다. 교회 근처에 셋집에서 살면서 전문학교를 다니는 임시 부부 학생이 있었다. 그들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고 교회 집회에 충실하며 수세 교육에도 충실하였다. 나와 전도사는 정성을 다하여 양육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전도사가 이들이 집세를 내지 못하여 쫓겨나게 생겼는데 다음 주간 자기 집에 내려가면 그의 부모로부터 받아올 수 있어서 몇일만 빌려주면 집을 비워 주지 않고 교회 생활에도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교인을 생각하고 현재 그들이 교회에 충실한데 이들의 신앙의 결실을 위해서라도 빌려주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그들이 필요한 액수의 돈을 빌려주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일로 다시는 실수를 하지 않아야 겠다고 굳게 결심한 터이었으나 방법이 없어서 전도사에게 정말 믿을 만한가? 고 물었다. 그는 믿을만하다고 했고 나도 같은 값이면 한번 투자해 보자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액수를 내 돈에서 빌려주었던 것이다.


    그후 그들이 돈을 돌려 줄 수 있다던 날짜를 넘기고 얼마 가지 않아서 그들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 장사하시던 분의 장사 철학적인 고백이 생각났다. 아무리 친해도 물건을 외상으로 주면 손님 잃고 돈 떼인다던 말이다. 나도 이일로 돈도 잃고 교인도 두사람이나 잃고 말았다. 정말로 빌려간 돈을 돌려 받으려는 사람이 잘못 되었는지, 돌려주지 않는 사람이 잘못 되었는지 판단이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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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창교회와 쁘라파씨 성도



    방콕에서의 교회개척과 육성사역에 충실하고 있을때 중태지방의 수판부리도 단창면에 교회를 개척하고 싶다는 파야오성경학교 출신의 분깬전도사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의 교회 개척에 대한 제반 계획을 청취한 후 그와 함께 현지를 직접 방문하여 제반 상황을 살핌과 동시에 기존 신자를 만나 제반 사항도 의논하고 교회 개척을 즉시 착수하였다. 나는 분깬전도사가 그 지역 사람이고 단창면 소재지에는 아직 교회가 없으며 이미 기존 신자가 있는 것이 교회개척에 용이하다고 느꼈으며 거리도 방콕에서 북서쪽으로 200Km정도 떨어져 있어서 자주 방문하여 돌보기에도 용이한 제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되었기에 지체하지 않고 교회 개척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교회 개척의 시작이다. 그리고 단창교회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선교지 교회 개척의 한 원리를 수립하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이 원리를 따라 다른 지역에 교회를 개척할 때도 별 변동없이 적용하여 오고 있다. 나는 단창교회를 위해 월1회 정도는 방문하여 예배와 목회업무를 조력하였다. 때문에 년2회 정도의 세례와 성찬예식이 거행될 정도롤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방콕에서 이곳을 가려면 자동차를 운전하여 북쪽으로 잘 포장된 국도를 1시간반쯤 달리면 앙텅면이 나오고 그후 서쪽으로 1시간반 정도를 포장되었다고는 하나 다 부서진 시골길로 달리면 단창면에 도착한다. 1시간반 동안 자동차의 차체는 상당히 상하였으나 교회를 개척하는 재미로 자동차가 부서지는 것 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방문하곤 하였다.


    하나님은 이 교회를 위하여 북태 람빵 출신의 경찰 중령부인인 쁘라파씨를 붙여 주셨다. 그는 람빵에서 예수를 믿은 사람으로 그간 교회생활을 사실상 중단한 상태였는데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가진것도 있으며 아는 것도 있는 사람이었다. 남편의 정년 퇴직과 함께 현재의 집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인데 단창교회를 개척 할 당시 몸이 불편하여 옛 신앙을 찾아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는 우선 그 불편한 몸으로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자기 땅을 내놓아 교회당을 짓자고 제안하였다. 내가 그곳을 방문 할 때마다 자기 집에서 유숙하도록 하였고 극진히 대접하였다. 옛 신앙이 있어서 교회 일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가졌기에 교역자가 희생적이지 않은 것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해 하기도 하였다.


    여러해가 지난 후 어느 날 그가 무의식 상태로 수판부리의 병원에 입원중이라는 전갈이 왔다. 나와 집사람은 급히 차를 몰아 1시간쯤 달려서 병원에 도착하였는데 주치의는 그의 상태가 마지막인 것 같으니 모든 가족들에게 알리라고 했기에 우리에게도 급히 알려준 것이다. 우리는 그가 평소에 즐겨 부르던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들려주면서 우선 그를 고쳐주시기를 기도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소원하고 있는 교회당 건축의 뜻을 이루고 갈 수 있기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 3일씩이나 무의식 상태로 있던 그가 눈물을 흘렸기에 회복이 되는가? 라는 기대와 함께 더 열심히 찬송하고 기도하였다. 한편 그의 가족들은 그가 유언으로 남겨 놓은 자기 자신의 장례에 대한 이야기와 불신 남편의 기독교에로의 입신에 대한 것과 자기 생전에 예배당을 짓지 못하고 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우리는 이런 열심있는 성도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가게 되는 것에 대하여 너무도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아서 교회 사역에 희생적이지 않고 자기 일에만 열중하다가 바친 땅도 의미 없이 끝나게 될 런지 모를 상황을 보면서-태국의 대부분의 교역자가 그렇치만-분깬전도사가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이 성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못다 이룬 주님의 일을 생각하며 가족들과 담화하는 중에 밖으로 나온 그의 손을 이불 속에 넣어주니 다시 나왔고 다시 넣어주니 그가 나의 손을 잡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마지막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니 그 손을 뿌리칠 수가 없어서 찬송과 기도, 담화를 하는 가운데 저녁이 되었지만 그 자리를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있었으나 우리가 온 것과 우리의 기도, 찬송, 말씀, 제반 이야기들을 다 듣고 있었던 것 같았다. 우리는 그가 손을 놓을 때 까지 기다리다가 시간이 오밤중으로 접어들었다.


    그때 우리는 집에다 두고 온 어린아이들이 생각이 났다. 이 급한 전갈을 듣고 목회자들을 훈련시키다 말고 급히 이곳으로 왔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지연되다가 이제는 오밤중이 되어가고 있으니 자연 부모가 어디간 줄도 모르고 있는 아이들이 염려가 되었으나 쁘라파씨가 손을 놓아주지 않으니 얼른 그 자리를 뜰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더 지체할 수 없어서 그냥 손을 슬그머니 뿌리치고 내일 다시 오리라 다짐하고 깊은 밤에 1시간이상을 달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온 집안의 전기 불을 다 켜둔 어디간 줄도 모르고 부모를 기다리다가 지치고 두려워하다가 잠든 모습의 아이들을 보고 그나마 늦게라도 돌아와서 같이 자게 된 것을 감사하였다. 그날 저녁 쁘라파씨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식을 받게 되었을 때에야 그날 저녁 그가 우리의 타는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고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나마 교역자로써 마지막 할 일을 다 했다는 다행함에 조그마한 행복을 느꼈으며 불신 남편의 지원을 받아 주변 식구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기독교식으로 예식을 거행한 후 남편이 그를 대신 하여 노령에 예수를 믿고 단창교회의 기둥으로 성장하는 중에 있는 것을 보면서 쁘라파씨의 신앙이 우리 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후 단창교회는 서울양문교회(서공섭목사)의 지원으로 중태지방에서는 가장 큰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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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삼롱교회와 젬본군



    자기 고향인 고도 수코타이도의 씨삼롱면에 교회를 개척하기를 원하는 싸롯전도사가 나를 찾아왔다. 수코타이는 방콕에서 북쪽으로 600Km쯤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지역은 딱, 깜팽펫도와 함께 영국계 WEC선교부가 전적으로 전도활동을 전개해 온 지역이다. 나는 우선 교회개척에 결격 사유가 없는 줄 알고 먼저 그를 현지에 파송하기 전에 방콕에서 내가 사역하고 있는 쁘라차니뛕교회에서 실습하도록 한후 씨삼롱으로 파송 하였다. 나는 사역자를 얻는 기술도 없고, 선교비를 마련하는 재주도 없어 교회개척의 어떤 특별한 대책은 없었으나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대로 일꾼을 만나면 우선 교회를 개척하고 이에 소요되는 경비를 충당하곤 하였는데 별 큰 문제없이 지금까지 진행해오고 있다. 때문에 몇년도에는 몇개의 교회를 개척하여야 하겠다는 보기 좋은 계획은 없으나 기회가 되는대로 교회 없는 면소재지에 교회를 개척하고 육성하여 태국교회 연합운동으로 1957년에 사라진 장로교회를 재건하여야 하겠다는 조그마한 목표를 세우고 교회개척과 육성사업만을 위해 현재까지 15년째 사역해 오기에 태국교회 15개처, 산족교회 25개처가 되었고 우리가 힘쓴 정도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고 있다고 자평하며 이렇게 나아가면 태국장로교총회가 구성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느껴진다. 씨삼롱교회를 개척한 이후 나는 이 교회를 월1회씩 방문하여 사역을 도와왔는데 에어컨 버스를 타면 6시간이나 소요되지만 즐거움으로 힘썼다.


    한번은 부흥회를 개최하였는데 4×8m짜리 예배당이 터지도록 교인과 관심자들이 모였고 나는 힘을 내어 말씀을 전하였다. 저녁 부흥회가 끝나고 모든 교인들이 모두 돌아갔으나 "렁타우때"라고 부르는 스리퍼 신발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후에 알고 보니 이들은 평소에 신발을 싣지 않고 살다가 교회를 온다고 신발까지 갖추어 싣고는 왔으나 집에 돌아갈 때는 이를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고 돌아간 것이다. 현재도 어떤 시골에서는 국민학교 어린이들이 학교를 갈 때에 신발을 싣지 않고 맨발로 다니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그렇다고 태국이 그렇게 후진국은 아니다. 다만 빈부의 격차가 너무나도 심한 것뿐이다. 태국의 교역자중에는 적어도 2사람이 최신형 벤즈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 한 사람은 교회에서 목사님의 생신에 교인들이 선물로 사드린 것이고 또 한 사람은 자기 돈으로 사서 타고 다닌다. 그러나 많은 교역자들이 자기의 생활을 연명하기 위하여 교회와 일반 직장이라는 이중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씨삼롱교회는 싸롯 전도사가 병 고치는 은사가 있어서 병자 노인들이 주로 교인이다. 때문에 사역을 감당하는 느낌보다는 양로원이나 병원사역을 감당하는 느낌을 준다.


    한번은 열심있는 노인이 주일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 다음날인 월요일 아침 예배시간에 교회에 나왔다. 그는 너무도 연만하여 기억력이 부족한 원인도 있고 태국교회가 주일 오전예배 뿐인데 주일을 놓치고 월요일이 주일인지 알고 예배드리러 나왔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면 목회가 상당히 어렵지 않겠는가?


    나는 싸삼롱교회를 방문하면 싸롯전도사의 아들 젬본(제임스 본드)때문에 제반 낙심할 만한 가운데서도 힘을 얻곤하였다. 싸롯전도사와 전 가족은 찬송에 대하여는 음치이기에 사실 예배시간에는 찬송이 제대로 불러지지 않고 부정확한 사부이상의 찬송이 되기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아들 젬본의 기특한 교회 봉사에 하나님께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는 싸롯전도사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아이인데 주일에 교회를 가면 예배준비를 혼자 맡아서 한다. 한번은 그가 강대상을 닦고 있는 것이 그렇게 아름다워서 사진을 찍어놓기도 하였다.


    그가 이렇게 성장하기에는 그의 아버지 싸롯전도사가 신앙 교육과 훈련을 바르게 지도한 것에 기인한다. 싸롯전도사는 애들이 방학만 하면 성경읽기 성경암송을 비롯하여 성경으로 이들을 교육시켰으며 부모에게 절대 복종하도록 훈련시켰기에 예배시간이나 어른들에게 단정한 아이 착실한 아이로 귀여움을 받았다. 싸롯 전도사는 재정능력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이들이 학교에서도 공부를 잘해 장학금을 받기에 별 지장이 없이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러나 대학 진학에는 큰 부담이 되었기에 자기 고향 근처의 피싸누록 교육대학과 북쪽 치앙마이 대학에 지망하여 합격하였으나 학비 조달이 필요 없는 교육대학을 가려고 하였다. 마침 내가 그의 교회를 방문했을 때 이 소식을 듣고 이왕이면 치앙마이대학교에 진학하도록 하였다. 모든 수속을 마쳤을 때에 치앙마이 대학교에서는 이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학비 조달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뿐 아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그는 학교 당국의 주선으로 호주 자매 대학교(University 0f England)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현재는 호주에 가서 공부하는 중이다. 그는 평소에 모든 학업을 마친 후 주의 종이 되겠다고 주께 헌신한 아들이다. 그가 호주로 떠나기 전 나는 방콕의 할렐루야교회로 그를 불러 한 주일을 함께 예배드리게 하고 송별 파티도 열었다. 그에게 간증을 부탁하니 나는 호주에 가서 공부한 후 신학을 계속하여 주의 종이 되겠다고 간증하였고 이 간증을 듣는 모든 사람은 감격해 하였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나로써는 우리의 손길을 통해 진짜 우리 일꾼이 탄생되고 있기에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이때를 위해 마침 서울응암교회의 선교부장과 위원을 그 현장에 참석시키시고 응암교회를 통해 이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도록 한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계셨던 것이라고 느끼고 감격의 시간을 보내면서 호주로 보내 현재 정상적인 학업을 게속하고 있다. 평소에 나는 젬본을 설교의 예화로 자주 사용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머리가 좋아져 공부도 잘하게 되었다는 예화였다. 나는 젬본이 모든 학업을 마치고 주의 종이 되어 내가 자주 사용하던 예화의 주인공으로 그가 죽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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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콕목회대학원의 이적


    태국에는 모든 교회를 통 털어서 1,500교회로 보는데 80%정도는 미 자립 상태에 교역자도 변변치 않고 그나마 있지도 않은 곳이 태반이다. 목사는 겨우 250명 정도이고 이들도 모두 목회자로 사역하지는 않는다. 신학교육기관도 성경학교 수준이지만 20여개처에 100명을 상회하는 학교는 거의 없다. 숫자적으로는 북부 파야오성경학교가 100명이 좀 넘으나 교육적 배경이 없는 산족들이 대부분이고 방콕의 방콕성서대학및 신학교(EFT)와 방콕신학원(CCT)이 쌍벽을 이루나 정규학생(대부분 신학사과정)이 60명 선이다. 이런 상황에 있는 신학교육을 통하여 성장하는 교회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의 교역자를 구하기도 힘드니 어떻게 해야 할런지 엄두가 나지 않는게 오늘의 현실이다. 신학교를 지망하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전 장학금이 주어지게 된다. 사실 장학금을 주려는 외국 선교단체(60), 본토인 교회, 신학교 자체, 선교사 개인(800여명) 등 줄서 있으나 신학교 지망생은 별로 없다. 정규과정을 마친 후에도 정상적인 목회 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은 별로 기대하기 어렵다. 여기에 목회자를 존경하지 않는 원인도 있다. 그리고 한국처럼 목회자가 목회업무를 다 책임지지 않고 일부만 감당하는, 좋게 말하여 전문화, 세분화 된 목회사역을 감당한다. 예를 들어 담임 교역자가 월2번의 설교를 하면 되고 나머지는 외부강사를 청하여 별미를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태국인의 체질인것 같다.


    태국인들은 식당 출입이 보편화 되어 있는데 아무리 맛있는 음식점 일찌라도 어제 점심에 갔던 집은 몇일 후에나 다시가지 연속적으로 애용하는 일은 없다.


    나는 교회 개척을 주 사역으로 활동하기에 다른 선교사역 분야에는 별 관심이 없으나 교회개척과 육성사업을 완성시키기 위하여는 교역자의 재교육과 훈련의 절실함을 느꼈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4-5인의 동역자들을 훈련시켰는데 주로 교역자의 교회를 위한 전적희생과 목회업무의 전문화 그리고 신학의 확립에 주력하는 교육과 훈련을 시켰다. 이 사역은 태국교회 현실에 절실한 것이어서 태국교회 지도자들의 호응을 얻기가 쉬웠다. 때문에 실력있는 교수나 경험이 풍부한 목회자로 교수단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일에 용이하였다. 뿐아니다. 다른 교단이나 단체에도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기에 이들이 이런 교육을 원하여 1985년방콕목회대학원(Bangkok Graduate School of Pastoral Theology)이란 목회자 전문학교를 설립하고 3-4년의 목회학석사(M.Min.)과정을 운영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이 과정을 거쳐간 목회자들의 사역이 두드러짐에 따라 교회와 목회자, 교회지도자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킬 뿐 아니라 이런 류의 교육과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태국인과 한국 선교사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류의 프로젝트가 개인적이고 산발적이어서 크고 작은 문제는 있으나 태국교회를 위해 유익한 일이어서 모두다 기대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한편 치앙마이에 있는 소위 태국기독교총회의 신학교인 맥낄봐리신학교에서는 1995년부터 방콕목회대학원에서 개설하고 있는 목회학석사(B.Min./M.Min.)과정을 개설한다고 결정하였는데 이는 태국교회의 필요가 무엇이고 우리가 전개하는 사역이 태국선교에 얼마나 적절한가를 평가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런 사역을 영구화시키려고 목회대학원의 건물 확보에 노력하였으나 아직껏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 현지인을 안타깝게 하기에 미안한 마음이 있으나 전에도 계속 그랬던 것처럼 때가 되면 성취되겠지라고 자위하며 욕심부리지 않고 오늘에 충실하고 있을 따름이다. 현재 목회대학원에는 4-5기째 공부하는 중에 있고 1995년 1월에는 6기생을 위한 강의가 진행된다.


    그러나 목회대학원에 입학 할 자격이 없는 목회자적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주 입학을 원하고 있고 이것이 태국의 현실이어서 이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운영해 본 일도 있으나 목회대학원의 본질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어서 중단하고 있으나 이들을 구제할 방법이 있어야 할 형편이다.


    나는 목회대학원에 입학하고 3-4년간 충실하게 자신을 훈련하여 목회자의 자질을 향상시키며 제반 목회적 사명을 확실하게 하고 있는 이곳 교역자들에게 큰 기대를 한다. 한 인격체가 다른 인격체로 바뀐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닌 줄을 알지만 이들이 700Km.,1000Km.나 떨어진 북태, 남태, 북동부 지역에서 온 저녁 또는 하루반의 장시간동안 불편한 버스나 기차를 타고 목회대학원에 매달 어김없이 참석하는 것을 보면 현재 별로 보이는 것이 없다 해도 무엇이 되겠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그렇게 천천히 되어 가고 있는 목회자들을 보며 그들이 나를 잊어도 좋다 그러나 하나님이 필요로 하고 교회가 원하는 진정한 목회자가 되기를 기대하며 우선 "사람이 되도록 하고 종내 목회자가 되도록" 하는 각종 노력을 총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결과 1990년에 제1기생 4인, 93년에 제2기생 12인과 특별기 5인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나 이들의 사역을 보는 주변의 동역자들이 장로교회식으로 세뇌교육 시킨다고 욕하던 사람들이었으나 자진하여 입학하고 변화되는 것을 보면서 또 하나의 이적을 보는 것 같은 감동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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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역자 사모 훈련



    어느 날 주일 나는 방콕 근교에 개척한 교회를 방문하고 말씀을 증거하고 있었다. 어디선지 손톱깍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살펴보니 모두다 나의 설교 말씀을 듣고 있는데 맨 뒤에 앉아 있는 그 교회 교역자 사모가 예배시간임에도 개의치 않고 손톱을 깍고 있었다. 나는 그때 참은 것이 나로써는 이적을 행한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교역자 사모가 이렇게 저질인 사람은 만나 본 일이 없다. 다만 한국에서 어떤 철모르는 교역자 사모가 성찬예식에서 세례교인만이 참여하는 성찬 떡을 받아서 자기 아이 입에 넣어 주어 실망하였다는 어떤 장로의 하소연을 들어 본 일은 있었는데 막상 내가 이런 상황을 접하고 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태국에서의 교역자 사모는 교역자 사모가 아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남편이 주의 종인 것과 자신이 그 교역자의 아내이기에 그 남편을 도와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 하는 주의 종이라는 의식은 없다. 그러나 현재 우리와 함께 사역하고 있는 교역자 사모들은 이런 일반적인 교역자 사모상과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일반적으로 태국의 남자들은 자기 아내를 왕비로, 자기는 그의 신하로 수종드는 모습이다.


    나는 어느 수요일 저녁 모임을 인도하고 있었다. 한 동안 성경을 강해하고 있는데 전도사 아이들과 우리 집 아이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카텐을 사이에 두고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성경을 가르치면서 아내들이 이 아이들을 제재할 것을 기대하였으나 그냥 버려 두었기에 참지 못하고 성경을 가르치다 말고 장난치고 있는 아이들에게 쫓아가 큰소리로 제재한 후 제자리에 돌아와 여자들은 아이들을 잘 간수하라고 하면서 그 능력이 없으면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호령하였다. 그후 우리 전도사 사모는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나오지 않았고 말하기를 자기가 아이들을 잘 간수할 수 있을 때까지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사실은 그가 교회 출석을 중단한 것은 직접적으로는 수요일 날 저녁에 일어난 일로 나에게 항거하는 것이고 또 다른 면에서는 자기의 세상적인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자기 남편에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이 교역자가 방콕으로 온후 그의 아내는 이웃집의 상황을 들면서 자기들이 그들과 같이 호화롭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계속 불평하고 있어서 괴롭다고 고백하는 전도사의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다. 그는 아직 교역자의 아내가 아닌 세상의 사치와 향략을 꿈꾸는 일반적인 세상의 여인이었기에 현재의 자기 남편의 사역이나 재정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뿐아니다. 그는 교회에서의 어떤 봉사 활동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교회 내에서 성직을 수행하고 있는 남편에게 집에서와 같이 아이들이 달려들어 성직 수행을 방해해도 그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였다. 나는 북동부지역의 어떤 교회 교역자의 아내는 자기 아이가 강단에 올라가 그의 아버지와 동시에 설교를 해도 내 버려두고 있다고 분개하는 지도자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고, 강단에 오줌과 똥을 싸는 장면도 보았다고 분개하는 지도자의 이야기도 들은바가 있었으나, 막상 우리 전도사의 사모가 자기가 관리해야 할 아이들을 내박쳐 두기에 강단에 올라가 설교를 방해하고 교인들과의 식사와 교제시간에도 아이들은 남편에게 맡겨두고 자기는 편하게 식사하고 있는 사모, 저녁 예배시간이 끝나면 빨리 집에 가지 않는다고 아이들을 질질끌고 집으로 먼저 가는 것등을 많이 보아 오면서 마음의 분을 참아오다가 이날 저녁 모임에 어린아이들의 장난을 제재하지 않기에 몰아서 화를 낸 것이다. 나는 그의 이런 버릇을 고쳐주지 않으면 우리 전도사가 앞으로 사역하는데 문제가 된다고 믿었기에 그를 달래거나 어떤 방법으로 그의 마


    음을 돌리기보다는 변화되어야 한다고 믿고 버려 두면서 하나님이 고쳐 주시기를 기대하였다. 이 일로 우리 전도사는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약 6개월쯤 지나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헌신예배를 드릴 기회가 왔을 때 여전도회가 이 전도사의 아내를 방문하고 예배에 참석하도록 하여 그로 하여금 교회에 자연스럽게 돌아오는 기회로 삼았고 그후 그는 딴 사람처럼 달라진 모습으로 자기 남편을 도와서 교회 봉사를 1등으로 잘하는 사모가 되었다.


    또한 예배시간에 손톱을 깍던 전도사 사모도 계속 추문만 퍼트리다가 최근의 한 사건을 계기로 정신을 차리고 잘 해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사모들이 변화되어 가는 것은 교역자 훈련만을 가지고는 교역자 훈련을 성공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사모훈련을 년4회씩 실시하는 중에 때가 되어 조금씩 달라지면서 태국교회가 지금까지도 남편과 부인이 함께 사역하는 목회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 장로교회의 교역자들을 통하여 모범을 보이게 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행해 주신 이적인 줄 알고 감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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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교회와 찬송



    태국교회는 크게 3단체(CCT, EFT, S.BAPTIST)로 구분 할 수 있으나 찬송가는 2종류로 태국기독교총회(CCT)소속의 "프랭타이 나마싸까안(예배용 태국찬송가)"와 C&MA선교부가 발행한 태국복음주의연맹(EFT)과 태국남침례교연맹에서 주로 사용하는 "프랭행치윗 크리스띠엔(크리스챤의 노래)"가 있는데 한국교회의 찬송가 통일을 알고 있는 지도자들 중에는 한국처럼 하나의 찬송가를 갖고져 하는 욕망이 있으나 태국교회의 특징이 피차 협력하지 못하기에 누구도 이 일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앞장 설 인사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CCT찬송가는 예배를 위하여 제작되었고 태국인들은 하나님께는 왕가에서 사용하는 태국어를 사용하여야 하기에 일반인들에게 상당히 어렵게 느껴져 CCT내에 소속한 시골교회들 중에는 EFT계열의 쉬운말로 된 찬송가를 사용하는 교회도 상당수 있다. 우리는 EFT에 소속되어 있기에 EFT계열의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으나 이는 부흥 성가 중심이어서 장로교회적 예배를 위하여는 상당 부분에서 CCT찬송가를 겸하여 사용하고 있다.


    태국교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찬송가를 준비하여 예배와 일상생활에 사용하지 않고 각 교회가 준비해 놓고 있는 찬송가를 집회 시에만 사용하는 습관이 있어서 집회 시마다 찬송가를 준비해 놓든지 아니면 필요한 찬송가를 순서지에 인쇄해 놓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다. 때문에 태국교인들의 찬송가 가창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기에 한국인 선교사들이 가는 곳마다 아주 찬송을 잘 부른다는 칭찬을 듣고 있어서 흐뭇함을 느낀다.


    뿐 아니라 찬송가가 있다해도 무곡 찬송가 이어서 찬송을 바르게 부른다는 느낌을 갖기가 어렵고 목청 좋고 소리가 큰 사람이 항상 찬송을 바르게 부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때문에 예배시의 충만한 찬송소리는 기대하기 어렵기에 예배를 드린 후에도 충만한 기쁨이 없어서 오순절 계열은 정식 예배 시에도 복음송으로 예배 찬송을 대신 하여 활기있는 예배를 드리지 마는 간이 예배로 연속되고 이것이 태국식 예배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같이 태국교회의 찬송에 대한 빈약과 서양 음악에 대한 이해 부족은 예배에 큰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 교회 음악이나 악기는 키타 정도를 활용하는 수준이어서 이 분야 역시 상당한 개발이 요청되고 있는 선교사의 사역이라고 느껴진다.


    나는 이런 교회 음악에 대한 제 약점을 발견하고 이 분야를 도와주기 위하여 장, 단기 음악선교사를 청하여 반주자를 육성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고 우리가 개척한 장로교회들은 곡조 찬송가만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목회대학원을 통해 찬송가를 가르치고 교회음악을 가르치고 지휘법을 가르쳐 교역자들이 손수 찬송가를 가르칠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나 역시 교회에서 예배시작 전 30분간 매번 찬송을 가르쳐 찬송가 가창력을 길러 주었고 음악선교사(김정숙선교사)가 온 후에는 목회대학원에서 찬송가 전곡을 부르고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배양시키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또한 찬송들을 카셋테잎으로 만들어 각 교회가 자력으로 찬송을 배우도록 지원하고 있으며 매년 개최하는 장로교회 수련회시에 찬송가 경연대회를 개최하여 각 교회가 찬송을 애창하고 바르게 부르는 일에 관심을 고조시켜 찬송이 충만한 교회로 육성중에 있어서 멀지않아 찬송 때문에 예배가 방해받는 일이 점차 줄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태국교회는 교회마다 피아노나 올갠 대신 키타로 예배시 반주를 대신하기에 경건미를 상실하고 예배찬송을 저질화 시키는 상태에 있어서 이를 바로 잡기 위하여 반주자를 육성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음악선교사가 보강되지 않는한 어려운 중에 있다. 그간 우리는 교역자 사모들을 의무적으로 반주자 육성 프로그램에 참여시켜 훈련하였고 카시오 전자 올갠을 지원해 주어 교회 음악 육성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으나 이 사업의 성취를 위하여 반주를 전공한 선교사와 악기의 지원이 더 필요한 중에 있다.


    태국교회의 대부분이 예배시 찬양대를 운용하지 않고 찬양대는 성탄 때나 천사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상례였으나 할렐루야교회를 개척하고 음악선교사가 상주하면서 제반조건은 갖추어져 있지 않으나 성가대를 운영하여 이 성가대의 찬양을 듣는 태국사람들이 좋게 생각하여 현재에는 몇개처의 교회가 예배시에 성가대를 운용하고 있어서 앞으로 기대되는 바가 있으나 이 일을 돕기 위해서는 성가대 지휘자 출신의 선교사가 필요하고 이를 전공한 사람들이 틈틈이 지휘자 쎄미나를 인도해 주면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안다.


    나는 처음 태국에 와서 태국교회 찬송가 속에 일본산 찬송가가 수록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한국산 찬송이 한 곡도 수록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태국에 없는 찬송가를 번역하여 보급하기 시작하여 현재 30곡 이상을 보급중에 있고 여러 찬송이 태국교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찬송이 되었다. 그 중에도 "사철에 봄바람 불어잇고"등 2곡이 태국 CCT찬송가 개편시에 수록되어 한국교회의 태국선교 역사를 증거해 주고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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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앙칸교회와 수라판 목사



    내가 방콕에서 쁘라차니뛕 교회를 개척하고 사역 중일때 북동부지역의 러이도 도청 소재지내의 러이교회를 담임 목회하고 있는 아짠 수라뎃으로 부터 자기 동생이 오순절계 신학교를 가게 되는데 이를 맡아서 훈련을 시켜 달라는 부탁이 왔다. 그는 1979년에 태국교회진흥원을 통하여 한국교회성장을 보기 위해 한국에 다녀간 일이 있고 한국교회의 성장에 대하여 감동을 받았기에 그의 동생을 한국선교사인 나에게 맡겨서 한국교회의 성장을 실습하는 기회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수라판군 이었다. 그는 나 보다도 키가 큰 사람이지만 선천적으로 건강이 좋치 않은 청년이었으나 장형인 아짠 수라뎃의 개종과 함께 가족적으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고등학교를 마치자 마자 방콕에 있는 오순절계 신학교에 입학한 후 졸업 때까지 나와 줄곳 함께 있었다. 그가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그의 형은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며 신학을 마친 후 자기 부모들이 있는 고향 교회인 러이교회로 돌아갔고 얼마되지 않아서 그 교회는 태국 기독교 사회에 돌풍을 일으키고 성장하는 "쾀왕끄룽텝 교회" 로 적을 바꾸었기에 자연스럽게 수라판도 이들의 훈련을 다시 받고 치앙칸면에 파송을 받아 교회개척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교회 개척사역은 처음에는 좀 되는 것 같았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실패를 씹으며 그의 둘째형이 사역하고 있는 우리 선교부 소속교회인 방콕 응암옹완교회로 무작정 올라왔다.


    그가 이같이 오게된 것은 신학교 시절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에 무슨 길이 있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선교사가 너무 철두철미한 사람이어서 함께 사역한다는 것을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끼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자신의 형편이 어떤 방법을 찾을 수 없기에 자기 형이 목회하는 이곳으로 아무 계획 없이 오게 된 것이다. 그때 나는 한국을 방문중에 있었고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하겠다는 후원자가 있어서 누구를 통하여 교회를 개척해야 할까 염려하는 중에 있었다. 사실 태국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교역자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돈만 주면 교회는 개척되어 지는 줄로 알고 있어서 어떤 선교사들은 기성교회를 사든지 아니면 사지도 않고 자기 것처럼 보고하든지 아니면 다른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교역자를 보통 이상의 봉급을 약속하여 스카웃해 오기에 한 교회를 죽이고 또 하나의 교회를 개척하는 비 정상적인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어서 태국교회의 빈축을 사기도 한다. 이는 이를 지원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선교라는 미명으로 태국교회를 망치게 하는 일을 자행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최근 나는 우리 선교부의 선교사 비자를 이용하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사역하는 선교사의 회원권을 거둔바 있다. 마침 한국에서 돌아오니 뜻하지 않게 수라판전도사가 와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그를 교회 개척을 위해 보내주신 것으로 직감하고 연유를 물은 다음에 "어디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겠는가?" 라고 물었다. 그는 무심코 치앙칸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사실 그는 그곳에서 실패하고 왔기에 그곳에 다시 가서 교회를 개척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나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하였다고 후에 증언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은 후에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우리는 치앙칸에 교회를 개척하기로 하고 수라판 전도사를 우리 사역자로 훈련시킴과 동시에 교회개척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가 방콕에서의 장로교 사역자로써의 훈련을 받는 동안에 월1회 현지를 방문하게 하고 교회개척을 위한 전도와 제반 준비 작업을 조금씩 시작하였다. 마침내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어린이 성경학교를 개최하면서 교회개척의 문을 열기로 작정하고 수라판전도사 혼자서 현지에 갔다. 다행히도 이곳에는 라오스 난민촌에 사역하는 CAMA(C&MA)선교부의 지방 사무실이 있어서 여기에 근무하는 사무원들과 선교사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중에 나이가 10살이나 위인 노처녀는 수란판전도사를 남편처럼 도와서 식사와 교회 일을 잘 조력하였다.


    한번은 치앙칸교회를 방문하니 이 노처녀가 총각 교역자에 대한 조력이 보통이상 이어서 수라판전도사에게 이 노처녀의 조력이 보통이 아니라고 귀뜸을 했으나 그는 이 노처녀에 대한 관심이 없있었다. 그러나 그 처녀가 우리 전도사와 결혼하고져 하는 마음이 있는 것으로 보였기에 나는 우선 나이가 10살 위일찌라도 결혼이 가능한지에 대하여 다른 태국인에게 알아보는 동시에 집사람을 시켜 그 처녀가 수라판전도사와 결혼 할 의사가 있는지에 대하여 마음을 떠보도록 하였는데 그의 태도가 결혼할 마음이 있음을 표시하였다. 우리는 노처녀가 아래 동생과 같은 남자와 결혼하는 일에 의의가 없다면 수라판전도사의 목회에 도움이 될 이 처녀를 소개해 주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여 수라판전도사의 의중을 떠 보았으나 그는 이미 결혼을 약조한 여인이 있다고 했기에 신상을 알아보니 이쪽 처녀가 오히려 목회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이쪽으로 변경하면 어떨까 하고 권해 보았다. 그는 결혼하려는 처녀와 이미 어떤 관계를 맺었기에 변동할 수 없는게 아니고 이미 결심한 상태에서 결혼 상대를 바꾼다면 나의 인격에 흠이 간다고 말했다. 사실 나는 이 처녀의 조력에 감동되어 나이가 너 보다 많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으면 상대를 바꾸어 보는 것도 좋다고 말하였고 만약에 그 노처녀와 결혼 할 의사가 없다면 그의 호의를 받아서는 않된다고 충고해 주었다. 끝내 그는 그의 결심대로 결혼하였고 이 노처녀를 실망한 나머지 그 교회를 떠나는 아픔을 맛보았다. 그는 가정을 꾸민후 부인의 조력으로 더 힘을 얻어 치앙칸교회의 건축을 위한 대지를 사고 대구범어교회의 지원으로 2층짜리 예배당을 지어 교회 부흥에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94년 4월 26일 최초의 태국장로교회의 목사로 안수 받고 장로교회를 이끌어 갈 지도자로 성장하는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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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빡촘교회와 귀신들린 땅



    1982년말 아피씻전도사는 내가 방콕에 손수 개척한 쁘라차니뛕교회의 부교역자로 청빙을 받아와서 함께 사역하다가 문제가 발생하여 나는 그 교회를 아피씻전도사에게 맡기고 떠났으며 그는 최선을 다 하다가 결국 가까운 지역으로 이사하고 응암옹완교회를 개척하였으나 발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특별 금식기도를 하는 중에 자기 고향 근처의 빡촘면에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심하고 개척 준비를 반년쯤 하다가 1986년 중순 북동부 라오스 국경지역에 있는 빡촘면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나는 그가 방콕에서 실패한 후 그곳에 가서 다시 개척하기에 전 보다도 더 많은 주의를 주었고 준비를 철두철미하게 하도록 지도하였기에 이곳에서의 교회 개척은 상당히 순조롭게 진전되었다.


    이미 그곳에는 기독교 난민촌 선교사들과 태국인 기성교인들이 난민촌 사역을 위해 상주하고 있었으며, 그는 전에 이곳에서 태국선명회의 간사로 활동한 바도 있어서 주민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이며, 이미 방콕에서 나와 4-5년 동안 공동사역을 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기에 시골에서의 사역은 이들의 우위에서 사역하는 형편이 되어 상당히 순조로웠다. 우선 어린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집중 공략하여 40여명은 쉽게 모아졌고 기성 교인들과 난민촌 사역자들이 참석하면서 집회율도 만족할 만큼 불어났다. 나는 이 성장의 기회를 잡아 난민촌이 얼마가지 않으면 폐쇄되는데 그전에 교회의 기초를 닦아야 된다고 지도하면서 교회당을 지을 수 있는 땅을 속히 알아보도록 지도하였다.


    이는 나에게 무슨 재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교회의 성장에 따라 교회당을 자연히 건축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교회당 부지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교회성장에 장애요인이 된다고 판단하고 그나마 난민촌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와 기성교인들이 있을 때에 이 일이 성취되어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이곳에는 라오스 난민촌이 있어서 ICA나 CAMA, ZOA등 난민촌 사역 외국 단체들이 많이 있었고 이들을 돕는 태국인 기독교도들도 있었다. 얼마 후 아피씻 전도사는 값싸고 좋은 땅이 나왔다고 보고하여 가보니 250평 정도의 직사각형에 두면이 길을 끼고 있는 요지의 땅인데 값이 너무나도 싸서 빡촘교회가 책임지는데 별 부담이 없는 땅이었다. 이 땅의 내력은 바로 이러했다. 옛날에 이땅은 절터였고 지금은 폐허가 된 땅으로 태국인들은 귀신들린 땅으로 통하여 누구도 감히 이 땅을 사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마침 우리가 사겠다고 하니 주인이 내 버리는 심정으로 팔려고 한 것이다. 우리는 이 땅을 사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특별기도를 실시했다. 왜냐하면 땅이 귀신들린 상태이기에 분명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만세 전에(?) 준비해 놓은 것으로 확신하나 이 땅의 귀신과 싸워 이기지 않는한 교회의 성장은 기대할 수 없고 우리가 이를 이기기만 하면 주민들은 마음문을 열고 예수 믿는 권속들이 많이 일어나겠기에 우선 우리의 준비가 급하였다. 우리는 이를 위해 기도하며 헌금하였고 한국교회의 지원도 받아가면서 적은 돈이지만 온 힘을 다해 겨우 구입하는 일에 성공을 하였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처음으로 맛보는 믿음의 즐거움이었다.


    그후 이 땅에 예배당을 짓기 위하여 다시 특별기도를 하고 헌금을 시작하였다. 아울러 한국교회에 보고하여 이 교회를 도울 수 있는 지원교회를 찾았다. 성현교회 청년회에서 얼마를 보조하였고 교인들의 헌금을 가지고 교회당 건축을 착수하였다. 이때 우리는 또 하나의 문제에 봉착했다. 그것은 교회당 부지에 고목이 된 한 그루의 보리수나무가 있었는데 주민들은 이 나무를 성스런 나무로 받들고 있었다. 여기에 바로 이 땅의 귀신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나무를 가만히 두고 교회당을 지을 마음이 없는 우리는 이 나무를 자르기로 결심하고 있을 때 주민들은 우리가 이 땅을 살때부터 이 나무를 자를 것을 염려하고 있었던 터라 교회가 이 나무를 자른다고 결정하니 온 동네가 떠들썩하였다. 이들이 믿기를 이 나무를 베면 귀신이 해를 부려 주민 중에 한 사람이 죽게 된다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에게 청하기를 이 나무를 자르지 말 것을 요구했고 만약에 짜른다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 후에 자르라고 요구했다. 우리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우리가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자기들이라도 제사를 드리겠다고 청원했으나 우리는 우리가 이 나무를 자를찌라도 아무런 문제가 이 동네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타일렀지만 이들은 끝내 믿지를 못하였다. 우리는 이일로 주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하여 빡촘교회에 비상을 걸고 특별기도를 다시 시작하였다. 그리고 작정한 날에 온 동네 사람들의 염려 속에 이 몇십년 묵은 보리수나무는 잘려졌고 뿌리채 불살라 없애 버렸다. 그리고 온 동네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지나갔다. 우리의 믿음이 귀신의 세력을 꺾고 예배당 건축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후에 부족한 건축비도 신부산교회(이영수목사)의 지원으로 10m×20m. 단층건물을 완성하였다. 교회는 계속 성장하여 93년에는 5인의 서리집사를 임명하였고 94년 4월에 아피씻강도사는 제1회 태국장로교회 목사안수식에서 제1호 목사로 안수를 받았으며 이를 위한 목사 청빙 공동의회에서 재정이 아직 부족하나 완전 자립을 선언하고 이를 위해 힘쓰고 있는 중에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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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후족 선교


     


    태국 북부지방에는 30여부족에 551,144명(1988년)의 산지족이 살고 있다. 그 중에 카렌족(27만명), 몽족(8만명)에 이어 3번째로 큰 부족인 라후족(6만명)에 선교를 시작하게 된 것은 1982년이 부족 출신의 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면서 부터이다. 이들 산족들은 버마와 라오스를 통해 태국에 들어와 길게는 100년전부터 짧게는 20-30년전에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고유의 언어와 풍습을 따라 산속 고지에서 살면서 원시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태국 국적도 얻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1985년 어느 날 우리의 장학금을 받고 침례교신학을 졸업한 수찻전도사가 자기 부족에 대한 선교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동역해 주기를 청했다. 나는 이 일에 관심이 생겨 생면부지의 깊은 산속의 라후족을 찾아 그만 믿고 따라 나섰다. 12시간의 야간버스를 타고 최북단 치앙라이에 도착한후 전에 안면이 있는 깐짜나의사의 오빠 집을 방문하고 산족 방문 계획을 말하였을 때는 산족방문을 극구 만류하면서 이 전도사가 누구인줄 알고 위험한 곳을 따라가려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어째튼 방문하고저 하는 나의 의지를 알고는 음식을 준비해 주고 여러가지 주의를 주면서 다녀오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산족을 찾아 헤메이며 산족선교를 감당해 왔으나 머리털 한가닥 상하지 않고 아카족에게 까지 선교를 확대하면서 25개처 이상의 교회를 설립하고 육성하게 되었으며 1992년부터는 김학영선교사가 현지에 주재하면서 더욱 활발하게 선교사역을 전개하고 있어서 기대되는 바가 크다.


    맨 처음 나는 수찻전도사를 따라 이들을 방문하게 된 곳은 치앙라이 도청 소재지에서 시골버스로 1시간이상 달린 후 픽업차를 갈아타고 3시간을 길도 아닌 산길을 요동치듯 달려 도착한 곳은 그가 사역한다는 반야남교회 였다. 모든 집들은 대나무로 지었고 나뭇잎으로 지붕을 입혔다. 화장실은 준비 된게 없었고 식수는 자동차 엔진 오링 기름통에 담겨 있었으며 목욕을 위하여는 1Km산 아래 개울로 내려가야 했다. 식사는 소금 국물 같이 짠 고기국으로 고기는 비계덩이가 대부분이었으며 밥은 소위 산두벼 쌀밥인데 모래알 처럼 단단한 밥이었지만 까다롭기로 소문이 난 내 입도 체념했는지 그저 맛이 있다고 느껴졌다. 그때 나는 생전 처음 바퀴벌레 새끼로 요리된 식사(?)를 맛 보았는데 저녁 식사시간에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식사하였기에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 보약을 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집회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상하의 나라에서 처음으로 겪는 추위는 한국보다 춥다는 느낌을 받았다. 산족들의 집들은 대나무이어서 사면벽과 바닥과 지붕마져 통풍이 잘 되었고 산 위에 있어서 찬바람이 자유스럽게 드나들었기에 방콕에서는 미처 생각지 못한 추위 때문에 가져간 옷을 다 껴입고 양발까지 싣었으나 그날 저녁은 뜬 눈으로 새우다시피 했고 목 감기가 들었다. 그러나 헐벗은 산이지만 신선한 공기와 초가집과 닭, 외양간의 소 등 각종 가축소리로 시골의 한가한 정취에 취하니 어렸을 때의 고향에 온것 같았다.


    이런 정취에 취한 어떤 K라는 한국 사람은 "치앙마이"라는 소설을 쓰면서 이 라후족이 1300년전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의 후예들이라고 확신하고 "라후족은 우리 민족인가" 라는 글을 쓰면서 우리 조상의 풍속이 그대로 남아 있고 우리말과 이들의 말의 순서와 어원이 비슷하다고 주장하여 농학을 전공했다는 그가 산족에 대하여 오래 전부터 연구해온 역사가들의 이론을 뒤업으려는 시도를 보면서 희소를 금치 못하는바 그의 주장이며 근거가 너무나 빈약하다 못해 터무니 없는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그의 열정에는 찬사를 보낼 수 있지만 자신의 개인 감정에 얽매여 역사를 왜곡시키며 많은 사람을 오해케 하는 일을 보면서 라후족과 10여년 사역하여 그들을 알고 있는 나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였다. 더구나 이 일로 취재차 현지를 방문한 한국인 기자가 마라리아에 걸려 희생되었다는 소식과 라후족과 사역한다는 몇몇 한국인 선교사마저도 심사숙고하지 않고 이 이론을 추종하는 것을 보면서 같은 선교사로써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나는 라후족과 10여년 사역을 해 왔으나 이들이 우리 동족일 것이다 라는 생각은 가져 본 적이 없으며 더구나 K씨의 말처럼 라후족 자신들도 우리 민족과 같다는 이론에 대하여 전혀 동의하지 않고 있음을 밝혀둔다. 때문에 라후족에 대한 개인의 느낌을 소설 이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카렌족을 가리켜서 한국인과 성질과 열정과 모습이 비슷하다고 자주 말하는 것을 들은바가 있다. 또한 라후족을 말하려면 태국의 라후족이 아닌 버마나 중국 대륙에 있는 라후족을 대상으로 연구를 해야 옳다고 본다.


    나는 라후족에 이어 아카족(2만명)에게도 선교 할 수 있게 되어 사역을 확대하고 산족교회 사역자들이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훈련원을 설립하고 매달 2-3일씩 훈련시키면서 내실을 닦아왔고 그간도 대구대봉제일교회(이광호목사), 성은교회(김영흡목사), 성광교회(진운섭목사), 왕십리교회의 황영혜 권사등의 지원으로 아름다운 교회당을 5개처나 건축하게 된 것을 하나님과 후원교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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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오스 선교로 확대



    태국은 나라의 이름과 같이 참으로 자유의 나라다. 주변국가들이 모두 다 공산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붉은 물이 들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도 자신을 지킨 나라는 이 지역에서 유일하다. 사실 이들의 민족성은 공산당을 할 수 없는 독특한 민족임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들을 얕잡아 보지만 항상 당하는 쪽은 태국이 아니다. 이런 평화스런 나라의 국경지대는 자유를 찾아오는 버마,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의 난민들의 안식처가 되곤 한다. 특히 버마와 라오스에서는 부족들이 자기 땅을 잃고 태국 국경지대에 진을 치게 되었는데 이들이 태국의 산족들이다. 또한 태국의 북동부 지역은 라오스 사람과 같은 풍습과 언어를 가지고 있다. 사실 이들은 옛날에는 한나라 한민족이었으나 강대국들에 의하여 다른 나라가 된 것뿐이다. 현재에도 이들은 태국 화폐가 그대로 통용되고 태국 TV를 보며 태국의 핸드폰이 사용되고 있으니 태국의 영향권내에 있고 바다가 없어서 태국이나 주변국을 이용하여야 무역이 활발하게 되겠기에 태국을 떠나서는 이로울게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최근에는 태국의 넝카이와 라오스의 수도 위앙짠을 연결하는 대교가 매콩강에 완성되어 더욱 교류가 활발해 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나는 1989년 라오스와 교류가 있는 북동부지역 우돈에서 노회장으로 몇해째 사역하며 라오스 난민촌을 위하여 사역하고 있는 쏨낏장로(태국침례교신학교 교장 쁘라차?사 부친)를 통하여 라오스 교회 지도자들의 지원 청원서를 접수하고 이것이 우리가 협력해야 하는 확대 선교지로 확인한 후 공산당 밑에서 허물어진 라오스교회 재건 사업을 착수하였다.


    맨 처음 이들의 요청에 따라 라오스 복음주의교회 총회의 본부 사역자와 행정사무를 위해 월$400정도 지원하였다. 이로써 총회장, 부총회장및 여러 교역자들이 재정적인 부담이 없이 주님의 일을 전적으로 담당하여 라오스 교회는 눈에 보일 만큼 성장하였다. 때문에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 10주년 기념시에는 2인의 대표가 참석하여 감격스러운 보고를 하였고 이에 1991년에는 원동교회(김경엽목사)가 이 일에 참여하여 15인의 교역자의 경비를 더 지원하게 되고 이들의 훈련을 위해 라오스교회 사역자 훈련원을 개설하고 태국의 우돈과 라오스의 위앙짠에서 교육을 진행하다가 현지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1992년부터는 태국내 나포 난민촌 내에서 93년말까지 이 훈련을 계속하였으나 태국의 난민에 대한 정책에 따라 94년부터 자연 중단하고 닛따야목사를 라오스 현지에 선교사로 파송하여 이 사역을 계속하면서 원동교회에서 라오스에 파송한 김재양선교사가 이 사역들을 전담하기 위하여 김선교사와 원동교회가 제 방면에서 노력한 결과 94년 10월 현재 라오스에 입국하여 사역할 수 있는 완전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어서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를 통해 시작된 라오스 선교에 서광이 보이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현재 라오스 선교는 여러가지 문제를 앉고 있다.


    이는 우리가 라오스 선교를 시작한 후


    (1) 태국교회와 한국인 선교사들이 경쟁적으로 라오스 선교에 참여하기에 이에서 오는 부작용이 한국 선교사에 대한 인상을 흐리게 할 염려가 있고


    (2) 우리 총회 지도자들 마저도 라오스 선교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선교지의 제반 질서를 무시하는 정책적인 오류를 범하여 총회 사역을 방해하는 상황에 처하게 할 뿐 아니라


    (3) 라오스 교회 지도자들은 선교비의 지원만을 생각하여 선교협약도 무시한 채 선교 협약을 이중 삼중으로 맺고 있어서 선교적 혼선 뿐 아니라 신용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고 있고


    (4) 라오스 선교를 주선한 쏨낏장로가 누구든지 라오스 선교에 관심이 있으면 이들에게도 라오스 선교의 길을 열어 주면서 선교적 혼란을 야기 시킨데도 원인이 있다.


    이로 인하여 나는 라오스에 열심이 있는 원동교회에 라오스 선교를 맡기고 한 사람의 라오스 주재 선교사를 지원 받으면서 라오스 선교에서 손을 떼었으나 파송 받은 선교사에 의해 라오스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기 시작했다. 사실 라오스는 공산화 이전에 벌써 OMF, C&MA선교부등의 사역이 있었기에 처녀 선교지는 아니다. 그러나 공산화 이후 자유의 문이 열리기 시작함과 때를 맞추어 C&MA선교부등이 사회봉사 분야에서 이미 사역을 시작하여 현재 활발하게 사역을 진행하고 있으나 한국교회는 라오스 선교를 시작한지 5-6년이 되었지만 경쟁하는 소리만 요란하다가 최근 원동교회를 통하여 라오스 선교의 완벽한 진지를 구축하였기에 앞으로 기대 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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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콕할렐루야 교회개척



    나는 목회자 출신으로써 목회 사역 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1979년 태국에 파송 받아 입국한 후 11개월간의 언어훈련 후에 현지인 교회 개척을 시작하였으나 장소를 3번이나 옮기고 교회명을 3번이나 바꾸어 달면서 끝내 교회 개척을 실패(?)하고 "한국인 목자가 태국인 양떼를 거느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목회자 재훈련과 신학생 목회 훈련을 위한 훈련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1990년말 할렐루야교회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그간 교회 개척의 실패를 거울 삼아 우선 예배당은 100명이상 수용할 수 있는 장소에 외부인이 예배당으로 인식할 만한 장식과 교통이 편리하고 눈에 띄는 큰 길가로 정하고 임시가 아닌 반 영구적인 건물을 은행 융자를 얻어 장만하게 되었다. 여기에 능력있는 현지인 목회자 한 사람만 있으면 교회 성장을 위한 외적인 요건은 갖춘 것이된다.


    1989년 3월 나는 방콕 공항근처에 할렐루야교회를 개척하기 위하여 이제 건축을 시작하는 길가의 상가건물 3칸(12×14m. 3층짜리)을 예약하고 할부금을 넣기 시작하였다. 그 때만 해도 나는 돈이 없기에 9,000만원짜리 이 건물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CCC에서 큰 사역을 주관해 본 경험이 있는 김학영선교사는 이를 주저하지 않도록 격려하였기에 이 건물을 계약하고 1년반 동안 월부금을 지불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에도 재정에 대한 어려움은 많았었다.


    그러나 정작 건물이 완성되고 나머지 금액을 지불하고 건물을 인수해야 할 단계에는 은행 융자만 믿고 시작한 일이 은행에서 융자를 해주기 않겠다는 통보를 받은 후 전혀 길이 없었다. 급기야 건축회사는 잔금 지불 만기일이 지났다는 이유로 이 건물을 회수하려 한다는 눈치를 차리게 되었을 때는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었으나 하나님은 은행가에 근무하는 수난장로를 만나게 하여 그가 자기 일처럼 은행 융자를 위하여 애쓴 결과 년19%의 이자를 지불해야 하는 융자를 겨우 얻게 되었다. 또한 빌라델비아선교회와 목양교회(이광복목사)에서는 이 일을 위해 3,000만원을 헌금해 주어서 큰 위기를 모면하고 건물은 인수받았으나 월$1,000정도의 은행 이자를 지불하여야 했기에 이것 역시 나의 선교비에 큰 위협을 주었다. 나는 이렇게 4년간을 지났으며 이를 견디지 못하여 목회대학원 건축을 위해 저축하고 있는 선교비를 돌려서 은행 빚을 갚고 나머지를 이자가 싼 은행으로 옮겨서 재 융자를 받아 현재 이에 대한 이자와 월부금은 할렐루야교회가 담당하게 되었기에 하나님과 지원교회에 감사하고 있다. 교회는 건물을 인수하고 내부 장치가 끝나지 않았으나 1990년 12월초 입당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교인들에게 예배당을 위한 건축 헌금을 하자고 하였고 몇 명되지 않는 교인이지만 적은 액수의 건축 헌금을 하나님께 봉헌하였다.


    그때 나는 우리 애들이 그간 푼푼이 모아 놓은 저금 통장에 관심이 있어서 이들에게 건축 헌금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통장채 헌금해 주기를 바랐다. 혜린이는 쉽게 결정하였으나 석이는 10여년 동안 고스란히 모아둔 돈을 한푼도 남기지 않고 헌금하는 것이 무척 섭섭하였던지 좀 주저하면서 좀 남겨 놓으면 않되겠는가? 라고 물어 보았다. 사실 나 자신도 지금껏 이런 경험이 없었기에 그의 태도에 대하여 다른 생각은 없었으나 어째든 내 아들이 그렇게 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끝내 주님은 이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두 아이가 저금통장 전체를 바쳐 혜린이는 $425, 석이가 $550을 헌금하게 되었다. 이들의 믿음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고 아버지로써 이들에게 특별상을 주었다. 뿐만 아니다. 혜린이는 그후 학교에서 학생들의 미진한 공부를 지도하여 받은 돈에서 십일조를 드렸는데 생각보다 많은 액수이어서 물어보니 자기 나이가 14세이어서 14%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께 바쳤다고 대답하여 그의 믿음의 태도에 또 한번 놀라게 되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가 고 2때에는 학년의 회계로 피선되어 활동하게 되었고 이 활동으로 학년 전체 학생 중 한 명에게 주는 리더쉽상을 받게 되어 지난번 미국의 일리노이 대학교를 진학 할 때 좋은 평점으로 계산된 것으로 믿어지기에 그의 믿음에 만족하고 있다. 최근 그는 새로운 대학 생활의 적응에도 바쁘지만 교회의 성가대로 봉사하고 주2회의 성경공부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간 기쁘지 않고 내가 이곳에서 같이 살고 있는 만큼이나 안심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간 할렐루야교회는 길가에 위치한 잇점 때문에 교회를 찾아오는 교인들이 있어서 주일예배에 50-60명씩 회집되고 있으나 이들을 양육할 현지인 교역자가 없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나는 역시 다른 개척교회들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에 있고 설혹 전적으로 돌본다 해도 외국인이어서 이들에게 적당한 목회자 일 수 없기에 현지인 양성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자연 한국적인 목회자를 구하기에 이런 자격을 갖추고 있는 목회자를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이 없다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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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렐루야 교회와 파수 집사



    할렐루야교회는 태국에 개척한 한국교회의 모델로써 진정한 주님의 교회로 육성하는 한편 신학생과 목회자 훈련장이 되고 있으며 신임 선교사들의 안식처이자 실습지가 되고 있고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의 본부로 활용되고 있다.


    사실 이곳을 교회, 훈련원, 선교본부로 사용하기는 너무나도 협소하기에 인접해 있는 건물을 구입하여 훈련원과 선교 본부를 독립적으로 사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일을 추진하였으나 아직까지 별 진전이 없으며 태국 선교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어 선교부가 해결해야 하는 긴급한 사업 중에 하나로 남아 있다.


    여러가지 악 조건 밑에서도 할렐루야교회는 계속 성장하는 중에 있다. 특히 2년전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4-5인의 서리집사를 임명하게 되었고 장로교회 수련회시 집사교육을 별도로 실시하여 수준있는 집사가 되어지고 있는 것을 흡족하게 생각한다. 이 일을 위해 후원회장이신 성광교회의 진운섭목사님께서 오셔서 특별 강의를 해 주신 결과인 줄 알고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나는 집사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우선 집사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교회 앞에 소개하고 자신이 집사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나에게 신청하라고 했다. 교회의 집회에 빠지지 않는 충실한 성도 4인이 집사직을 신청해 왔으며 나 자신이 어느 정도 이들의 신실함을 인정하였기에 나는 이들을 집사로 임명하기 위하여 한 주간 특별 교육을 시켰다. 교육의 내용은 일반적인 집사의 자격과 사역이었는데 주로 주일을 비롯한 모든 집회의 충실한 참여와 철저한 십일조 생활과 성경탐독 및 기도 생활이었다. 이 교육은 이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줄만한 것이었으나 모두 다 기쁨으로 받았기에 1992년 12월말 주일에 서리 집사에 임명식을 거행하고 집사 일을 맡기었다. 이들의 생활과 사역은 만족스러웠고 영예스러웠기에 1993년 집사 임명에는 2인이 더 불어나게 되었고 집사 임명에 대한 방법이 희한하였으나 주님의 뜻을 찾는데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았다.


    1993년 중순에 우리는 지금껏 시행하지 못했던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도록 결정하였다. 이는 배종원선교사가 이 일을 제안하여 더 이상 기다려서는 안되는 줄 알고 즉시 결정하여 미국교회가 실시하는 11월 셋째주 목요일 저녁에 태국교회지도자도 초청하여 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적이었기에 감사절 예배는 자연 교회의 정기 행사로 정착되고 말았다. 현재 태국의 북부지역의 교회는 추수감사절 예배가 있으나 타 지역에서는 거의 지키지 않고 있다.


    1994년초 우리는 할렐루야교회의 여전도회를 조직하는 축복을 받았다. 전에도 교회 내에 여자들이 있었으나 감히 여전도회를 조직할 만한 여건이 조성되지 못하였으나 집사를 임명하고 성공적으로 나아가게 되었기에 여전도회를 구성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었다. 여전도회를 구성하기 전부터 이들을 교육하였기에 여전도회가 구성된 후 여인들의 교회 봉사가 두드러지게 되었고 헌신예배를 드릴 수 있을 만큼 성장해 갔다.


    나는 오래 전부터 교회의 일꾼을 세우기 위해서는 자격이 있는 일꾼을 만드는 일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교회 내에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집사, 장로및 평신도 지도자 훈련을 시키려고 계획하고 기도해 왔으나 몇년을 그저 보내고 말았다. 최근 더 이상 이 일을 미루어서는 않될줄로 알고 할렐루야 성경학교(Hallelujah Bible School)의 개교를 선언하고 토요일 오후2시-5시까지 3과목을 각 1시간씩 강의하여 4개월을 한 텀으로 5년에 신, 구약성경 전체와 교회 봉사에 필요한 과목을 강의하여 모든 과정을 마치도록 계획하였다. 강사진은 선교사와 교역자들로 구성하고 교회 내에서 학생을 모집하였는바 6인의 지도자 후보생들이 즉시 지원해 왔다.


    나는 이런 계획이 다른 교회에도 필요한 줄로 알기에 주변의 다른 교회에 연락을 하여 이 계획을 함께 추진하자고 제의하였다. 1994년 11월부터 이 성경학교의 강의가 시작되면서 더 많은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되고 교회가 굳건하게 서 가고 있기에 한결 마음이 가볍다.


    나는 현재 파수집사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다. 그는 모친의 신앙을 전수받은 사람으로 대학 재학시절에 세상으로 잠시 나갔다가 우리가 교회를 개척하면서 6-7년전부터 재 결신한 사람인데 일류대학을 나와 주택공사의 한지역 부책임자로 있는 정부관리이다. 그가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우리와 함께 신앙 생활을 시작하면서 태국인에게는 부담스런 한국적인 철저함에 많은 어려움을 당했으나 현재는 오히려 이런 신앙생활의 진미를 깨닫고 십일조 생활은 물론 집회에 충실하여 새벽기도회로 부터 시작하여 모든 집회에 빠지지 않고 교회의 집회시 사회와 음악 담당, 새신자 영접과 관리등 교회 제반면에서 나의 보조자로 활동하고 있는바 어쩌면 이 사람이 할렐루야교회의 장래 교역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속에 있다. 이는 그의 모친이 어렸을때 부터 이 아들이 교역자가 되기를 기도하였고 이 사실을 자신이 알고는 있어 항상 부?을 느끼고 있을뿐 아니라 제반 상황이 그로 하여금 교역자의 길로 가게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기에 마땅한 교역자를 구하기 어려운 현 상황에서 자연 그에 대한 나의 관심이 우연이 아닐 것이라고 믿어 지기에 이를 훈련 시키기 위하여 제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다. 금년초 부터 시작한 그의 새벽기도가 6개월쯤 되었을때 기독교인으로는 하나밖에 없는 그의 누나가 이를 기쁘게 보았던지 낡은 차를 새차로 교체할 수 있도록 재정을 지원해 준 것을 보면서 그의 믿음의 성장과 관계된 복으로 알고 기쁜 마음을 금할 길이 없기에 파수집사의 믿음이 할렐루야교회를 책임질 수 있기까지 성장하기


    를 기도하면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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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회태국 대전도대회중앙위원으로



    나의 태국선교사로써의 출발은 다른 선교사들에 비하여 색다른데가 있었다. 그것은 태국의 3개 교단의 대표들로 구성된 태국교회진흥원(Thailand Church Growth Committee)의 선교사로 출발함과 동시에 고문으로 사역하게 되었다.


    나의 사역은 주로 한국과의 관계에서 제반 사항에 협력하는 사역이었기에 태국인들이 한국의 교회를 방문 견학하는 경우 이를 코디네이팅하는 일과 아시아교회진흥원과 아세아연합신학대학에서 태국에 지원하고 있는 태국교회 개척사업을 지원하는 일 이었다. 때문에 1980년부터 한국교회를 방문하는 팀은 나의 조력이 필요했으며 ATCS에서 지원하는 태국교회 개척사업도 나의 조력의 대상이었다. 그 당시 나는 태국을 잘 알지 못하고 태국 말도 잘 되지 않아서 일을 했다고 말하기보다는 고문관(?)으로 지냈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약5년이 지난 후부터는 어느 정도 눈이 떠지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에 따라 말문이 열려서 회의 시간에는 몇 마디 제안을 할 수 도 있었다.


    1986년에는 2년 후 1988년 5월에 개최 할 제3회 태국 대 전도대회를 이끌어갈 30명의 중앙위원중의 한사람으로 태국교회 대표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는 내가 태국교회진흥원에 소속되어 있기에 태국교회진흥원이 주관하는 이 대회에 중앙위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이 대회에는 한국의 김장환목사님이 주 강사로 초청되었다.


    그러나 예의 없는 몇몇의 한국 선교사들은 태국교회의 손님을 자기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강사 쟁탈전을 벌리는 통에 태국교회지도자들의 강사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을 뿐 만아니라 눈총을 사는 추태를 벌렸기에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나는 낯이 뜨거워 어쩔줄 몰랐었다. 그후에도 이런 류의 넌쎈스는 계속되어 시니어선교사들은 수시로 태국 교회 지도자들의 염려와 충고 썩인 말을 자주 듣고 있으나 별 묘안이 없는 것처럼 보여 더욱 무거운 마음 뿐이다.


    나는 태국 사역에서 태국교회의 최고 지도자들과 함께 사역해온 관계로 이들의 사고와 예절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것이 선교부를 운영하는 일에 여간 도움이 된게 아니었고 이로 인하여 우리가 주관하는 행사에는 태국교회의 고급 지도자들로 가득 메워졌고 다른 단체에서는 우리의 행사에 무척 신경을 썼다. 왜냐하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지도자들이 모두 이쪽에 모이게 되어 있기에 자연 그들이 우리의 행사와 중복되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편 우리 선교부의 선교사들은 아직 태국 경험이 많치 않아 이런 행사에는 자리도 얻지 못하는 무명의 일군이 되어 다른 단체의 선교사가 행세하는 것 같은 입장에 놓이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태국 교회 지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서게 되면 자연 이들의 자리가 마련 될 것이니 다른 단체의 선교사들보다 더욱 각자가 자신의 자질 향상에 더욱 힘써야 할 상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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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장로교 목사 안수식



    나는 처음부터 한국교회와 같이 잘 훈련된 교역자 중심한 교회상을 구상하고 태국교회 개척을 시작하였기에 교역자의 자질 향상에 힘쓸 뿐아니라 이들을 목사로 안수 할 수 있기까지 교육과 훈련에 최선을 다했다.


    우선 태국의 상황이 또 하나의 신학교를 세우는 행위는 태국교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겠기에 신학교육기관의 설립은 앞으로 육성 될 현지 장로교 지도자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나는 각급 신학 교육기관을 졸업하고 나온 교역자를 영입하여 방콕목회대학원에서 재 교육을 시켜 장로교회의 사역자가 되게 하는 정책을 수립하고 방콕목회대학원의 교역자 재 창조 사역에 최선을 다해 왔다.


    때문에 "차나 정"의 사역에 대하여 태국교회지도자들은 별 이의가 없다. 오히려 그들의 필요한 부분을 담당해 주는 사역을 전개하고 있기에 그들의 협력을 얻기가 수월했었다.


    앞으로 장로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자체 신학교육기관이 필요 할 수 도 있겠기에 우선 각 교회별로 또는 각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가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평신도 교회지도자를 육성하는 일에 활용하면서 목회자 소명자를 발굴하는 이중 목적을 수행하여 기존 교회 중심한 노회로의 확장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교회 개척 당시부터 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자질에 이상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교회개척과 함께 매월 이들을 소집하여 교육을 정기적으로 실시하면서 각종 지도를 하였다.


    이런 방법은 교회 사역자나 선교단체 피차간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 왔다. 그리고 이 기간에 신학교육기관의 미비한 부분을 보충시켜 나갔다. 그 결과 이들의 자질과 목회자의 자세가 자연스럽게 향성되어 갔으며 외부의 지도자들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이들의 활동 범위를 확장시키면서 계속 성장하도록 지도하였다. 이 기간이 10년이나 걸렸다.


    드디어 1992년부터는 이들을 목사고시 대상자로 정하고 한국의 강도사 고시를 준비하는 방식으로 준비를 시켰으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의 목사 고시 문제를 출제하여 자기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많은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능력과 지식이 부족함을 깨닫고 이 고시를 포기하였고 아피씻강도사와 수라판 강도사 형제만이 남게 되었다. 이들 2사람만 10년만에 목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인 것이다. 나는 아직 목사의 자질이 부족한 사람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목사를 안수 할 마음이 없었기에 오히려 만족 할 수 있었다. 또한 최초의 목사 안수이며 태국장로교회의 창립 역군들의 자질이 우수하기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우리와 함께 사역하다가 나간 사람들은 벌써 목사가 되었기에 이들의 목사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은 장로교회의 목사되는 일이 어렵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상은 태국에 수준있는 장로교회를 설립하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은 것으로 평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이들이 목사가 되기 위하여 (1) 성경 각장에서 성경퀴즈 한 문제씩을 만들어내야 했고, (2) 성경 각장에서 설교초 1편씩을 준비해야 했고, (3) 벌콥의 기독교신학개론에 있는 익힘문제들의 답을 찾아 제출해야 했고, (4) 한국에 나와 있는 강도사 목사고시 문제집에 나와 있는 모든 문제들의 정답을 기록하여 제출해야 했고 (5) 우리 총회의 헌법과 웨스트민스터 정치문답조례의 특강을 듣고 강의안을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했으며 (6) 목회자의 1년간의 목회 계획을 작성하여(100페이지 이상) 제출한 후 한국의 강도사 고시같은 방식의 목사고시를 치르고 한국교회 대표와 태국교회 대표들의 면접을 끝으로 모든 고시를 마치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대표로는 최기채총회장님을 비롯하여 진운섭목사,윤석봉목사,이은익목사,김진곤목사,이영수목사,남은식목사,김경엽목사,이종영목사등이며 태국교회 대표로는 짜란박사(태국복음주의연맹 회장), 파이툰박사(동 부회장), 쏨찻박사(태국기독교총회 증경부총회장), 쌈릿목사(동 증경부총회장), 쏨디박사(태국성경공회총무)와 정승회선교사(선교부및 태국장로교회 대표), 김학영목사(산족교회대표)등이었다.


    한국대표들은 목사 안수식 전에 2사람의 안수 대상자와 사모를 심사하였는데 그 과정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던지 모든 위원들이 마지막 총회장의 기도로 모든 면접을 마치게 될 때에는 각자가 느낄 만큼 눈물이 보였으며 한국교회의 태국선교 38년 만에 처음 있는 역사적인 사건답게 만족함을 앉겨 주었다.


    1994년 4월 26일 저녁 8시 할렐루야교회당에서는 감격적인 장로교회의 최초의 목사 안수식이 거행되었다. 안수위원들은 한국인 9, 태국인 5, 선교사 2인이 등단되었다. 정승회선교사의 사회와 김정숙선교사가 이끄는 할렐루야교회 성가대의 주악에 맞추어 예배가 시작되었으며 김진곤목사와 쏨찻박사의 기도,김경엽목사의 성경봉독,최기채총회장의 설교,정명자집사의 바이오린 연주,김학영목사의 임직대상자 소개,정승회선교사의 임직서약, 진운섭목사와 짜란박사의 안수기도에 이어 윤석봉목사,이은익목사,쌈릿목사,쏨찻목사의 목사까운 착용, 안수위원들의 악수례, 정승회선교사의 공포에 이어 김덕자사모(김경엽목사)의 크로마하프 연주 찬양이 있은후 이영수목사,파이툰목사의 권면, 이종영목사의 축사, 한충렬장로의 예물증정등의 순서로 목사 안수식이 진행 되면서 우리는 위대한 한 역사를 창조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10년만에 아니 38년만에 한국인의 손으로 태국인 목사를 안수 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하신 복이었다. 이로써 태국 장로교회의 또 하나의 기반이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주여 주께서 허락하시면 새 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매일 가능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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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주년기념대회를 준비하며



    1994년 12월27일로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는 15주년이 되었다. 그간 나는 삶과 죽음을 수없이 넘나들면서도 여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15년을 견디었다. 이것만도 대단한 일이라고 고백하고 싶다. 15년을 어떻게 감사할까? 를 생각하다가 감사하는 예배와 함께 평소 태국교회의 찬송에 불만을 느꼈기에 한국교회에 충만한 찬송을 태국교회에 선보이는 기회로 삼기로 하고 이 일을 추진하게 되었다.


    우선 이 대회를 위해 태국 내에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그간 우리 사역에 직, 간접으로 관계가 있는 태국교회지도자들을 위원으로 초청하였는바 태국기독교총회에서 증경 총회장, 부총회장, 총무를 비롯하여 방콕지역과 북부지역의 노회장급의 교회지도자들과 태국복음주의연맹의 부총회장, 각 교단및 선교단체장들, 침례교와 오순절 계열의 교회및 교단 지도자들이 이일에 적극적으로 호응해와 30여명의 본토인 지도자들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고 쏨디박사(전 태국성서공회 총무)가 위원장으로, 부위원장에는 쏨찻박사(태국기독교총회 증경 부총회장)와 쌈릿목사(태국기독교총회 증경 부총회장)가 맡게 되었다. 여기에 우리가 개척하여 육성하는 태국장로교회 대표로 아피씻목사와 수라판 목사를 비롯하여 할렐루야교회를 대표하여 파수집사가 그리고 선교부의 모든 선교사가 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특히 기념 음악회에는 원동교회의 가브리엘 크로마하프 합창단(Gabriel Chroma Harp Choir/단장 김덕자사모)을 위시하여 김은애집사(성현교회),김정숙,김동숙선교사및 할렐루야교회 성가대와 KPM선교사들이 주역으로 뛰게 되었다. 또한 15주년 기념대회 준비위원들은 다음과 같다.


    티라박사(Bangkok Bible College & Theological Seminary교장)


    아룬목사(태국기독교총회 증경총회장,현 부총회장)


    파이툰박사(태국복음주의연맹 부회장)


    아누선장로(태국기독교총회 제6노회장/방콕,피싸누록)


    모리모또목사(태국어린이전도협회 이사장)


    쁘라차목사(태국침례교신학교 교수/태국스포츠선교회 회장)


    완목사(태국롬끄라우 오순절 교단 총회장)


    다니엘목사(방콕 안디옥교회목사)


    수난장로(방콕 제4교회)


    디렉박사(태국기독교선명회 이사)


    분씨목사(태국기독교총회 제2노회 증경노회장/람빵)


    분쏭목사(태국기독교총회 제2노회 부노회장/치앙라이)


    참난목사(태국기독교총회 제1노회장/치앙마이)


    깡완장로(태국기독교총회 제1노회 증경노회장/치앙라이)


    타위차이목사(북태 치앙마이 중국인교회 목사)


    위라목사(태국기독교총회 제3노회장/북태 람빵)


    쌈란목사(태국기독교총회 제13노회 부노회장/동북부 우돈)


    말라꼬목사(촌부리 중국인교회 담임)


    씨안목사(남태 오순절교단 총회장/라넝)


    캄행교역자(남태 쏭크라교회 담임)


    이 일은 태국에서 계획하고 여기에 소요되는 재정은 한국의 후원교회들이 지원해 주었는데 상임이사로 있는 이종영목사는 교회와 가정의 어려운 여건 때문에 대회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대회가 제대로 개최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이번 대회의 재정을 충당해 주어 기념대회가 차질없이 성황리에 준비를 마쳐가고 있으며 특히 기념 성가의 밤을 위해 아누선장로님이 제반 준비를 책임지고 추진해 주어 별 어려움없이 준비하게 된 것을 하나님과 이 일을 위해 수고한 여러분들에게 감사하여 마지않는다. 첫날 기념예배에는 태국교회지도자 300명정도가 모였고 둘째날 음악회에는 500-600명정도의 태국인들이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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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태국 사역들



    1년간의 태국어 학습이후에 시작된 나의 태국선교 사역은 현재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의 설립과 운영이며


    그 둘은 장로교회를 개척하여 태국장로교회를 재건하 는 사역이고


    그 셋은 방콕목회대학원을 설립하여 고급 목회자의 육 성이다.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 설립과 운영 분야는 1980년 10월에 20명의 선교사 비자를 획득하고 매년 정부의 육성자금을 지원받으면서 본격화 되었다. 이로써 선교사가 선교지에 굳건한 뿌리를 내리고 안정되고 주권적인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선교부의 운영은 선교사의 영입과 관장과 사역의 관리와 관계된 제반 행정적인 사무가 된다.


    현재 선교부의 비자를 사용하고 있는 선교사는 총회파송선교사 8가정과 한국대학생선교회및 빌라델비아선교회 파송 선교사 1가정,한국지구촌선교회 파송 선교사 1가정이며 나머지는 선교부의 팀사역에 관계되는 선교사를 초청하기 위하여 음악,어린이,건축,목회자, 교수요원등의 선교사 영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교회개척과 육성 사업 분야는 1957년 이후에 태국교단에서 사라진 장로교회의 재건이라는 큰 목표아래 태국 전 지역을 상대로 교회가 없는 지역이면 면 단위를 기본으로 하여 교회개척 사업을 현지인과 함께 전개해 오고 있으며 그 지역을 중심하여 노회가 되도록 확장 사업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다. 교회 지도자의 육성을 위하여는 각 교회나 지역별로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활용하도록 지도하고 있으며 교회개척과 육성은 수정된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사용하고있다. 수정 네비우스정책을 수립한 것은 진정한 네비우스방법을 성공시키기 위한 기술적인 적용에 불과하다.


    1993년말 현재 태국교회는 11개처에 10인의 교역자 437명의 교인을 보유하고 있고 산족교회중 아카족은 14개처에 14인의 교역자 833명의 교인을 보유하고 있으며 라후족은 14개처에 14인의 교역자 633명의 교인을 보유하고 있어 약 2,000명의 재적교인(어린이 포함)에 주일아침예배 출석교인이 1,500명에 이르고 있다.


    목회자 훈련 사역 분야는 태국교회를 위한 방콕목회대학원(Bangkok Graduate School of Pastoral Theology)의 운영과 산족교회를위한 산족교회사역자훈련원(The School of Thai-tribal Church Workers)을 북부 치앙라이에서 운영중에 있고 신학생장학사업과 조기 목회훈련을 년중 실시중이고 태국교회지도자를 위한 한태교회성장쎄미나(The Church Growth Seminar in Korea)를 매해 한국에서 개최하여 한국교회와 같은 교회 부흥을 꾀하고 있다.


    1994년말 현재 방콕목회대학원은 2회에 걸쳐 석사과정에서 7인, 학사과정에서 3인, 기타 7인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4,5,6기생 각 10여명씩 매달 1주간씩 쎄미나와 훈련을 받고 있으며, 교역자 사모훈련을 년4회 실시하여 교역자 훈련을 보완하고 있으며, 산족교회사역자훈련원은 아직 졸업생을 내지 않았으며 25인이 교육과 훈련에 임하고 있고, 신학생 장학사업과 목회훈련에는 3개 신학교육기관에 재학중인 15인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매주 또는 방학중에 집중 훈련중에 있다.


    그 외에도 찬송가 번역 보급사업, 방콕 할렐루야교회 목회 사역,목회자를 위한 도서 출판 보급 사업, 협력사업으로 태국어린이전도협회 이사(CEF), 기독교신문 크리스챤 월드(Christian World)고문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태국선교부 지부장으로 사역중이다.


    찬송가 보급은 한국어린이 찬송, 한국산 찬송, 외국산이나 태국에 보급되지 않은 예배용 찬송등이며, 도서 출판은 소요리문답서, 벌콥의 기독교신학개론, 로랜스의 장로직분론,을 비롯하여 대강절과 성탄절, 목회학, 전도학, 교회사역등의 교재가 출판을 준비중에 있다.


    이 사업에 따른 예산은 교회개척분야에 월약$5,000 방콕목회대학원에 월약$3,500 산족교회사역자훈련원에 월$1,500 신학생장학사업에 년$15,000 교회성장쎄미나에 년$10,000이 소요되며 선교부 운영에 관계된 예산은 선교사들이 담당하는 행정비 약간과 회비에 의존하고 있어 거의 예산이 없는 실정이다. 또한 도서 출판비는 그때그때 충당해야 하는바 100페이지 정도의 책 2,000부 출판비가 약$2,000 정도가 소요되고 있고 태국장로교회 정기수련회 경비가 $5,000정도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 정기회의비가 $4,500 정도 소요되고 있고 장로교회회보 발간비가 년$5,000정도가 소요되고 있어서 이의 대책이 요청되며


    특히 선교부 단독 사무실을 마련하는 일과 목회대학원의 단독건물을 구입하는 일, 산족교회사역자훈련원을 건축하는 사업, 장로교수양관을 건립하는 장기적인 사업이 있다.





    34


    태국주재 한국인 선교사들



    1956년부터 1994년 말까지 태국에 파송받아 사역하고 있는 한국인 선교사는 100여 가정에 이르며 현재 사역중인 선교사도 60가정이 되는바 다음과 같다.


    1950년대 최찬영(56*),김순일(56*),


    1960년대 송예근(64*),


    1970년대 신홍식(71),김정웅(76),정승회(79)


    1980년대 윤수길(80),박희성(81*),홍성철(81*),양병화(82),


    한준수(82*),송희천(82*),황윤수(84*),


    김성곤(84),김중식(85),박선진(85),이영기(86*), 조준형(87),강대흥(87),정석천(88),이교욱(88),


    이용우(88*),송용자(89),유인섭(89*),장병조(89),


    김종일(89),박윤식(89),김학영(89),


    1990년대 김정배(90*),김태민(90),정도연(90),방정렬(90),


    김성희(90),심태국(90),이제휴(90),김정숙(90),


    이양동(90),오세관(91),차대영(91),이대동(91),


    박문수(91),김경주(91),김문수(91),박경환(91),


    김선호(92),손승호(92),배종원(92),오필환(92),


    유홍태(92),김재양(92),김남현(92),권오혁(93),


    신영선(93),이반석(93),김건용(93),노동현(93),


    윤기영(93),강대현(93),


    * 표는 사역을 마치고 철수했던지 철수한 상태에 있는 선교사를 표시하며, 30명정도 되는 단기 사역자의 명단은 포함 시키지 않았다.



    위의 선교사를 전문 사역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 교회 개척을 주 사역으로 하는 선교사


    정승회(목회자훈련),양병화(제자육성),김중식,박선진,


    정석천(어린이),이교욱,송용자,장병조,김종일,김태민,


    심태국,오세관,차대영,박경환,손승호,오필환,유홍태,



    2. 신학교및 훈련 사업을 주 사역으로 하는 선교사


    신홍식(교회개척),김정웅,윤수길,김성곤(교회개척/사회 사업),조준형,강대흥,김정숙(음악),신영선,신동운,



    3. 산족선교를 주 사역으로 하는 선교사


    (황윤수),박윤식,김학영,정도연,방정렬,김성희,박문수,


    김선호,



    4. 한인교회 목회자


    김용식(방콕한인연합교회), 신홍식(태국한인장로교회)


    조현준(방콕한인감리교회),박상룡목사(방콕샬롬한인 교회), 박동준목사(방콕남포선교교회)


    이규식(촌부리태국임마누엘선교교회),


    공창락(파타야한인교회),


     


    5. 기타


    신광준(주변국),이양동(체육),이대동(체육),김경주(체 육),이반석(학원),


    위의 선교사의 사역 구분에 명단이 없는 선교사는 여러가지 사역으로 주 사역이 없거나 제반 사역에 협력하는 사역자이며 단기 선교사의 명단도 제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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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 비자



    태국은 선교사 비자(R-A)를 주는 선교적으로 상당히 자유스런 나라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 조직된 선교 단체는 선교제한 정책에 걸려 선교사 비자를 배정받지 못하고 있어서 이미 허락되어진 비자를 통해서만 선교사 비자를 얻어 비자를 연장 받을 수 있는바 태국복음주의연맹의 회원 선교단체로 자체 선교사 쿼타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의 비자 처리 과정과 단계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 단계는 태국의 선교단체가 종교성에 입국하려는 선교사의 비자를 위한 추천서를 청원하고, 이 추천서로 이민국에 선교사 비자를 신청하는 단계이다.


    선교사로 태국에 입국하려면 태국의 수용단체인 태국복음주의연맹내 회원 선교단체의 회원으로 신청하면 이 단체가 제반 서류를 작성하여 교육부 종무국에 선교사 비자 허락 추천서를 태국복음주의연맹을 통해 신청하고 약 3개월이면 이 사람에게 선교사 비자를 주도록 추천한다는 종교성 추천서가 나오고 이 추천서를 가지고 이민국 3층의 Non-Imm.담당관에게 선교사 비자(R-A)를 신청하면 약 1개월후에 허락이 나오며 이때 이민국에서 한국 주재 태국 대사관에 발송할 관보를 발급한다. 이 관보의 내용은 선교사에게는 선교사 비자(R-A)를, 가족에게는 비이민 비자중 가족비자(O)를 주라는 내용이다. 이것이 1단계로 태국에서 처리한 선교사 비자 발급을 위한 조치이다.


    그 다음 단계는 한국에 있는 선교사 후보가 현지 선교부의 지도를 받아 주한 태국 대사관에서 선교사 비자를 받는 단계이다.


    이때 선교사 후보와 가족은 여권과 사진 및 선교사 초청장등 제반 서류를 소지하고 태국 대사관의 영사과를 방문하여 소정용지를 사용하여 Non-Immigrant Visa중에 선교사 비자(R-A)를 신청하면(가족은 O) 3개월간 유효한 비자를 주게되는데 이는 태국 입국을 3개월내에 하면 된다는 말이다. 때문에 태국 입국 예정일이 2개월쯤 남아 있을때 비자를 받으면 된다. 여기에서 주의 할 것은 대부분의 대사관이 선교사 비자를 모르기에 관보 사본을 현지로 부터 받아서 함께 제출하는 것이 좋고 선교사 자신에게는 R-A,가족에게는 O 비자를 주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3번째 단계는 선교사와 가족이 태국 공항에 입국하는 단계이다. 태국공항 입국 시 먼저 이민국의 여권심사를 받는데 이때 선교사에게는 입국 일로 부터 1년, 가족에게는 입국 일로 부터 3개월의 비자를 허락 받게 된다. 그러나 이민국 직원 중에는 선교사 비자를 몰라 그냥 3개월짜리 보통비자를 줄 수 있기에 잘못 처리된 것은 현장에서 고쳐야 한다. 이는 처음 입국시 뿐만아니라 외국에 출장 후 입국 할 때 마다 확인해야한다. 만약에 이때에 즉시 시정하지 않으면 방콕의 수안푸루에 있는 이민국을 찾아가서 교정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게 된다.


    4번째 단계는 선교사가 현지에 도착한 후 즉시 노동허가를 신청하기 위해 종교성의 추천서 신청을 위한 제반 서류 준비를 하여 소속 선교부에서 태국복음주의연맹을 통해 종교성에 제출하는 단계이다. 이는 가족의 1년짜리 비자를 얻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이 서류를 종교성에 제출한 후 2개월 정도이면 추천서를 받게 되고 이어서 노동허가를 노동청에 신청한 후 이 접수증 사본을 첨부하여 가족의 비자를 선교사와 같이 1년이 되도록 방콕 이민국에서 연장하게 되는바 이로써 현지에 주재 할 수 있는 정식 비자가 가족까지 해결 된 것이다.


    위의 단계는 한국에서부터 선교사 비자를 받아가지고 오는 경우이지만 이런 비자가 없는 사람이나 급히 선교지에 입국해야하는 사람은 태국 대사관에서 Non-Imm. Visa(B)만 받아가지고 태국에 입국한 후 태국 현지에서 비어있는 비자를 찾아 태국복음주의연맹을 거쳐 종교성에 비자와 노동허가를 위한 추천서를 신청하면 약 3개월 내에 추천서를 받아 노동허가를 먼저 신청한 후 비자를 연장하여 주재하는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이런경우 선교사가 한국에서 부터 미리 준비해야하는 서류는 (1) 여권용사진 각각 5매이상 (2) 주민등록등본(한,영문) 2부 (3) 대학및 신학교 졸업및 성적증명서(한,영문) 2부 (4) 파송장 사본(한,영문) 2부 (5) 여권사본 각각 2부 (6) 파송단체 소개서 (7)선교 사역 계획서 (8) 국제 운전 면허증 (9) 각종 특기 면허증 (10) 이력서(본인과 가족) 등이다.



    태국내 선교사 수용단체인 태국복음주의연맹(EFT)과 태국기독교총회(CCT)의 주소와 한국인 선교사는 다음과 같다.



    The Evangelical Fellowship of Thailand(EFT)


    485/20 Silom Rd. Bangrak Bangkok 10500,Thailand


    Tel.(66-1)233-2866,235-2667,9917F.


    회장 짜란 박사


    정승회(KPM), 김중식(KGM#), 정도연(KRPCK#),


    김성곤(SWM#),신동운(므앙타이교회)을 비롯하여 30-40가정의 한국인 선교사가 여러 선교단체의 비자를 빌려 사용 중이며 선교부 중에도 #표가 있는 단체는 선교부 자체에는 선교사 비자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음을 표시한 것임.


     


    The Church of Christ in Thailand(CCT)


    14 Pramuan Rd. Silom Bangrak Bangkok 10500, Thailand


    Tel.236-0211-2, 6933-4, Fax. 238-3520,


    총회장 쌈란목사


    조준형(PCK),신홍식(WMP), 강대흥(KGAM) 을 비롯하여 10인의 한국인이 있고, 태국기독교내의 단체는 자체비자는 없으나 총회의 비자를 사용함.





    36


    선교지의 자녀 교육



    선교사의 자녀가 성장하여 중,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 선교사의 사역 못지 않게 자녀교육 문제가 크게 등장한다. 이 문제로 인하여 선교사를 그만둔 사람도 있고 이 일로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며 문제까지는 되지 않아도 항상 선교 사역의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선교사의 자녀가 태국인 학교 정규 학생이 되는 길이 없고 모두 다 외국인 학교를 다녀야 하기에 이에 소요되는 학비가 적지 않고 영어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장성한 자녀들은 외국인 학교에서 한 동안 언어 장애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한다. 현재 방콕에있는 외국인 학교는 ISB,NIST,BPS,RIS,ICS등이며 등록금등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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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명 장소 학제 등록금


    ---------------------------------------------------


    International 방콕북서쪽 미국학제 년$7972(등록금)


    School (공항쪽) 12학년 $2840(입학금)


    Bangkok(ISB) 40년전통 1800명 년$1080-1656(버스비)


    T583-5401 년$1600(기성회비)


    ---------------------------------------------------


    New 방콕중심부 유엔학제 년$7080(등록금)


    International (수쿰윗 15) 9학년 $3200(입학금)


    School of 1992년설립 750여명 년$1152(버스비)


    Thailand T251-6399 년$3000(기성회비)


    (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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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angkok 방콕동쪽 영국학제 년$8520(동록금)


    Patana (수쿰윗105) 11학년 $3400(입학금)


    School(BPS)T398-0200 1000여명 년$1176 (버스비)


    ---------------------------------------------------


    Ruamrudee방콕북동쪽 미국학제 년$5,200(등록금)


    International (민부리) 필립핀계 $2,400(입학금)


    School(RIS)T518-0320 12학년 년$268-520(버스비)


    천주교학교 2,150명


    ---------------------------------------------------


    International 방콕시내 미국계 년$3800(등록금)


    Community (싸톤로드) 기독교학교 년$200(잡비)


    School 1993년설립 9학년 년$2000(입학금)


    Bangkok(ICSB)T 287-4530 150-200명 년$1000(버스비)


    ---------------------------------------------------


    이 외에도 Traill Preparatory School(안식교 계열)이 있으나 정규과정으로 보기 어렵고 태국내 천주교 계열의 학교중에 외국인학교를 1994년부터 개설 한곳도 있고 북태 치앙마이와 동부 촌부리 방라뭉에 학교를 개설하였으며 북부 치앙라이에 곧 외국인 학교가 개설되게 된다. 자녀 교육을 염려한다면 방콕의 우수하고 전통있는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37


    태국 공항통과



    선교사의 준비가 선교사 비자까지 받았으면 이제 비행기를


    타고 방콕 던므앙 국제공항에 내려 태국 입국 수속을 밟게 되는바 이때의 서류 작성은 출입국 카드와 세관 신고서 작성이다.


    (1) 출입국 신고서 작성 요령


    선교사 비자를 한국에서 받아 가지고 입국하는 선교사의 태국입국에 관계된 서류 작성과 비자 획득이 보통 입국자들과는 좀 다르다. 특히 비자 관계부분의 기록이 있으며 이민국 직원이 비자를 공항에서 주었을 때에도 선교사 비자로 주었는지를 확인하여야 한다. 이는 이민국 직원의 실수가 잦기 때문이다.


    (2) 세관 신고서 작성 요령


    태국 공항의 세관은 신고 물품 소지자(빨간색)와 신고 물품이 없는 사람의 통과(파란색)가 한국 공항에서와 같이 동일하나 주로 세관 직원의 눈에 띄는 사람에 한하여 승객의 물건을 별도로 검사하고 있기에 짐이 과도하게 많거나 수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한 자유스럽게 세관을 통과 할 수 있다. 그러나 태국공항의 세관은 한국인을 잘 붙들어 조사하는 관습이 있으니 너무 당황하지 말고 묻는 말에 차분히 대답할 것이며 돈으로 해결하려는 한국인의 약점을 노출하지 말 것이다. 어느 공항이든 보이지 않는 물건은 통과되는 것 인줄 알고 준비를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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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15년만의 안식년계획



    15년이된 지금 나는 아직 안식년을 모르고 지나왔다. 우리 선배 선교사들 중에도 안식년을 별도로 취하지 않고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여렀이 있다. 나는 우리 총회의 태국 선교를 개척한 사람이어서 일반 선교사처럼 안식년을 제때에 취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해있지 않았다. 주어지지 않는 안식년의 기회를 고집하는 것도 현지 사역중심에서 볼 때는 무리라고 생각되어 적당한 때에 안식년을 취하기로 하고 일하는 재미로 지금껏 아무런 불만 없이 살아왔다. 그간 나는 기계를 너무나 무리하게 사용해오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갖게한다. 일에 파뭇쳐서 세월가는 줄 모르고 15년이 홱 지나간 것 뿐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나의 일하는 속도가 떨어지고 꾀가 생기고 철두철미한 모습이 퇴색하더니 건강이 문제로 등장하였다. 병원의 진찰도 특별한 병이 있다고 지적하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히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5살이나 위인 친구 목사의 "45세가 넘어보라 하루가 다르게 느껴진다"던 말이 실감나게 느껴지고 있다. 이로써 한가지 좋아진 것은 있다. 전 같으면 내가 다 해야 직성이 풀리지만 요즈음에는 할 수 있으면 내가 하지 않고 다른 선교 동역자나 현지인에게 일을 나누어주고져 하는 마음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쉬고 싶어지고, 안식년이 생각난다. 때가된 모양이다. 그래서 안식년 계획이 잡혀가고 있다. 그것이 바로 1996년 중순이다. 그러나 이 계획도 우리 막내 아들의 대학 진학을 기하여 쉬겠다는 계획을 수립하게 되는 것을 보니 진정한 안식년 계획이 아닌것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안식년에 꼭 한가지만 하고 싶은 것은 누구도 괴롭히지 않는 곳에서 잠이나 푹 자려는 계획이 있을 뿐이다.



    39


    나의 이력서



    나는 장로 아들로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 어머님도 어렵게 예수를 믿었기에 장로 아들이라는 한가지 이유로 우리 아버님과 선을 보지도 않고 결혼하셨다고 하셨다. 우리 장인 어른은 장로로써 내가 목사라는 것 때문에 나를 보지도 않고 우리들의 결혼을 허락하셨기에 내가 구걸 할 기회도 없었다. 우리 집안에서는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대우받는 상황이어서 목사인 나는 특별대우를 받고 있으며 이것은 어머니 태중에서 부터 어머님이 작정하신 목사의 길이었기에 어려서부터 이 대우를 받고 자랐다. 나는 전북 완주 봉동 은하리 3구 봉실매산이라고 불리우는 산밑의 바탕물이란 동내에서 태어나 아버님이 다니시던 교회가 너무 멀었기에 국민학교 5학년 1학기까지 서두교회와 제상교회의 어린이 주일학교에 다녔고 우리집이 삼례로 상업차(아스케익점) 이사하게 되어 국민학교 5학년 2학기부터 삼례 사람이 되었고 이리동중과 전주신흥고등학교를 기차로 통학한 소위 기차 통학생이었고 삼례동부교회의 허화준목사님의 신앙지도를 받으며 주교교사, 성가대원, 학생성가대 지휘, 교회 성경 퀴즈 대회팀과 중 고등부 학생회장을 거쳐 1965년 총신에 입학하여 1969년 12월 63회로 총신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삼례서부교회의 담임전도사와 전북노회직영 전주고등성경학교의 교무로 활동하는 중에 원광대학교에서 농학을 전공하고 전북노회 주일학교연합회 제10대 회장을 역임한 후 1972년 2월18일 목사안수를 받은후 군목으로 입대하여 3년간 연천의 대광리지역의 제20사단 63연대의 철책선에서와 가평 제3하사관학교및 수송교육대의 군목으로 사역하면서 연세대학교연합신학대학원의 에큐메니칼연구원을 수료하고, 1975년 전역한후 이리북일교회의 담임목사로 봉직하면서 전주 바울신학교 기독교교육과장과 전북신학교 강사로 사역하던 중 태국 선교사로 부름을 받아 왕십리교회 (서재신목사, 1978-9)의 선교사 후보로 준비하면서 197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63회 총회에서 태국선교사로 인준 받아 1979년 12월16일 총회 태국주재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1979년 12월27일에 태국 땅을 밟으면서 태국 선교사가 되었다.



    태국에서의 나의 이력은 누구보다도 화려해졌다.


    1980-88년까지 태국교회진흥원의 고문으로 한국과의 협력관계 에 협력했고(Thailand Church Growth Committee),


    1980년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 설립하고 대표로 봉직중이며,


    (The Korea Presbyterian Mission in Thailand)


    1981년에는 교회개척을 시작하였고, 방콕 람인트라 도로 변에 위치한 경찰비행단 관사에서 어린이 여름성경학교를 개 설하였고 이어서 반 크렁부아국교내에서 여름어린이성 경학교를 개설하여 3-4년간 운영하였고, 신학생장학사업 을 전개하여 오늘에 이르며, 쁘라차니뛕 서민 아파트촌 내 에 어린이 주일학교인 일요학교를 개설하여 운영하였고


    쁘라차니뛕교회를 설립한 후 단기 음악학교를 개설하였 고, 김영숙사모는 세계한국선교사친교회 부회장을 2년 간 역임하였고, 태국복음주의연맹내의 사회개발부 부회 장으로 캄보디아 난민촌 사역을 협력하고, 제2회 세계한국선교사친교회의 방콕대회 준비위원장으로 사역하였으며,


    1983년에는 태국기독교총회내 제13노회(우돈지역)의 초급교역자 과정을 설립하고 2년간 이들의 훈련과 교회개척사업을 지원하였으며, 아울러 라오스 난민촌 사역을 직, 간접으로 지원하였기에 이로 인하여 우리 총회를 태국기독교 총회에 연결하는 사역을 성공시켰으나 6개월만에 축출 당하였고, 기독교지체부자유자선교회를 창립하고 부회장으로 2년간 봉직하기도 하였다.


    1984년에는 산족교회(라후족) 개척에 착수하여 현재 아카족까지 확대하였으며 25개처가 되었고, 세계 한국선교사친교회 부회장으로 피선되어 2년간 활동하였고, 황윤수선교사와 김성곤선교사를 초청하여 선교사로 사역케 하였으 며,


    1985년에는 방콕목회대학원을 설립하고 원장에 취임하여 오늘 에 이르고 있고, 태국어린이전도협회 이사로 취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6년에는 태국복음주의연맹체 내의 외국선교단체협의회 실행위원과 제3회 태국 대 전도대회(1988년 5월 개최)의 준비및 중앙위원으로 2년간 활동하였고


    1987년에는 태국복음주의연맹내의 방콕교회협의회 위원과 전도및 부흥협의회 위원으로 2년간 활동 한바 있다.


    또한 KIM선교부를 떠나 새롭게 출발하는 한국지구촌선 교사 전원(김정웅,윤수길,양병화,박선진,김중식선교사)의 비자를 본 선교부의 쿼타로 해결해 주었다.


    1988년에는 제4회 한태교회성장쎄미나및 한국교회 견학(The Church Growth Seminar)사업을 웜선교회(총재 정문호목사/ 지회장 오광수목사)의 지원으로 격년으로 한국과 태국에서 개최하기 시작하였으며, 태국내 라오스 난민촌 선교를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2인의 사역자를 파송하고, 20인의 난민촌내 교회 사역자를 지원하였다.


    한편정석천(한국지구촌선교회),이교욱(아세아연합신학대학)선교사등을 초청하였으며


    1989년에는 한국내의 후원교회의 변화로 후원회를 조직하였고


    라오스 선교로 확대하여 라오스복음교회 교단(회장 비타 우목사)을 지원하여 라오스교회 재건 사업에 참여하면서 30여 교회를 재건하게 되었고, 총회아시아선교사협의회 부회장으로 봉직하였고,장병조(바울선교회),김학영(빌라델비아선교회/CCC)선교사등을 초청해 김학영목사는 현재까지 사역중에 있고,


    1990년에는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 10주년기념대회를 개최하고 기념예배(김창인목사),방콕목회대학원 제1회 학위수여식과 교사 건축 기공예배를 개최하였고, 교회성장쎄미나(강사 김창인목사,이종영목사,김경엽목사)와 기념부흥회 (강사 김창인목사)를 개최하였고 김정숙음악선교사(성현 교회)를 초청해와 현재까지 사역 중이다.


    1991년에는 태국복음주의연맹체내의 아시아선교사친교회 실행 위원으로 활동하고, 라오스 선교를 확대하여(원동교회지원) 15인의 교역자 생활비를 지원하면서 이들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태국 기독교신문"타이미쳔(Thai Mission)"의 고문으로 활동중이며. 박경환선교사(상계교회)를 초청해와 현재까지 사역중이고,


    1992년에는 배종원(구미제일교회),김재양(원동교회)선교사등초청해와 현재까지 사역 중이며 김선교사는 라오스 사역을 책임지고 있다.


    1993년에는 방콕목회대학원 제2회 학위 수여식을 거행하고 12 인의 교역자를 배출하였고 김건용선교사(한가람교회)를 초청해와 사역을 준비중에 있다.


    1994년에는 최초의 장로교 목사 안수식(2인)을 거행하여 한국 교회의 태국선교 38년만에 최초로 거행된 행사였으며 태국장로교 독노회와 총회로의 조직의 기반을 닦게 되었다. 12월27일에 선교부 15주년을 맞이하여 1995년 1월10-11일에 15주년 기념대회를 예배, 음악회, 선교쎄미나등으로 진행하기 위해 25인의 태국교회지도자들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추진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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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태국선교 후원자들



    바울에게는 눈이라도 빼줄려는 동역자인 아굴라와 브라스길라부부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오늘의 선교 사역에도 이런 후원과 동역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나 역시 이런 분들을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기억하며 감사하고 있는바 다음과 같다.


    성현교회(이종영목사),왕십리교회(오치용목사),성광교회(진운섭목사),성은교회(김영흡목사),대전중앙교회(최병남목사),황영혜권사(왕십리교회),응암교회(황칠수목사),삼례동부교회(이은익목사),전주영광교회(김형주목사),전주팔복교회(이선근목사),함백천일교회(이정원목사),이종영목사(성현교회),석관중앙교회(이학봉목사),동광교회(김희태목사),공주중앙교회(전갑재목사),하남교회(김무환목사),강서제일교회(남은식목사),서울공군기지교회,부산주례교회(이인건목사),대봉제일교회(이광호목사),양문교회(서공섭목사),상암교회(오광수목사),열린문교회(이재철목사),산돌중앙교회(신동우목사), 미주영락교회(조만옥목사),인천은석교회(김태진목사),상봉교회(조형기목사),강남중앙교회(윤석봉목사),예손교회여전도회(정문호목사),신도교회(김춘환목사),은천교회(정진환목사),영주동부교회(박재영목사),부산대청교회(최문길목사),바울선교회(이동휘목사),개령교회(김정호목사),산정현교회(박기형목사),잠실성현교회(백운형목사),발산교회(우종호목사),성산교회(남서울노회),김제세광교회(임근석목사),전주서광교회(장상봉목사),전주동명교회(권윤도목사),김제죽산교회(박석수목사),전주유상교회(이길우목사),북전주노회여전도회연합회,북전주노회,전주동부교회(강성찬목사),성내동제일교회(최성구목사),부산성동교회(옥치상목사),강서로교회(정은주목사),봉일교회(김광규목사),인천팔복교회(이칠우목사),원주중부교회(박원규목사),울릉양문교회(원용국목사),연무양문교회(이현주목사),연무성광교회(윤광길목사),원동교회(김경엽목사),목양교회(이광복목사),구미제일교회(김진곤목사),수원서부교회(손수호목사),대구서부교회제1청년회(남태섭목사),타코마중앙장로교회(정남식목사),정옥희전도사(광천교회),최종훈장로(삼례동부교회),김학천장로(전주동부교회),정화남장로(전주금암교회),김부래장로(함백천일교회)부산신평로교회(이규왕목사),시흥양문교회(이훈구목사),나성한인교회(김의환목사)등이나 개인과 자녀 교육비를 비롯하여 교회개척과 교역자양성사역등에 참여하고있다.


    특히 성현교회의 이종영목사님과 왕십리교회의 황권사님과 전주 안디옥교회는 교역자를 위한 도서 출판 사역을 위해 수시로 인쇄비 전액을 지원해 주셔서 교역자에게 필요한 서적을 발간하여 보급하면서 도와줄 수 있게 하고 있어서 상당한 유익을 주고 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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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실하신 나의 하나님



    1979년 12월 27일로 나의 태국사역은 15년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처음이나 나중이나 여전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 이시었다" 라는 결론과 함께 "그러나 나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였다."는 고백이 있을 뿐이다.


    생각컨데 하나님은 나의 선교 사역을 후원하시기 위하여 다른 선교사들보다 몇배나 힘드셨을 것이다. 이는 15년동안 한번도 태국 선교비를 위하여 애걸하며 청원하는 것을 보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로써 지원하던 교회들도 필요 없는 줄 알고 중단하기도 하고, 선교비를 제대로 보내지 않아도 왜 보내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나와 관계가 있어서 선교비를 지원 할 만한 입장에 있는 지방의 교회나 동창들도 나는 선교비가 넘쳐서 그런줄로 오해하고 지원하지 않아서 마침내 서먹한 관계가 되기까지 선교비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으로 처리해 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목사님은 칭찬하기를 "정선교사를 우리 교회 강단에 세우면 선교비 때문에 실갱이를 하지 않아서 부담이 없더라" 또 어떤 분은 "왜 설교시간에 선교비를 달라고 말하라니까 안했는냐?"는 핀잔도 들었고 "정선교사는 배가 불서서 선교비를 달라고 않는다" 라는 욕도 들었다. 나 자신도 필요한 때는 죽는소리를 해야 통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 자신이 그렇게 생겼으니 어떻하겠는가? 아마 내가 이렇게 돈에 대하여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에 나로 하여금 지금까지 태국에서 견딜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라고 오히려 자위하고 싶으니 하나님 뿐아니라 후원교회들 또한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 뿐 아니다. 적어도 앞으로 15년간은 또 이 지경일테니 말이다.


    한번은 응암옹완 지역에 3층자리 작은 연립 주택을 월세로 임대하여 목회대학원의 교실로 사용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집 주인이 찾아와서 이 집을 사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집를 살만한 돈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를 은행 빚을 얻게 해 줄테니 현재 지불하는 금액 정도만 매월 할부금으로 15년간 지불하면 당신 집이 된다고 하였기에 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았으나 마음은 있어서 모든 돈을 한국과 태국에서 총동원하여 집값의 30%를 마련한후 그 집을 매입하게 되었다. 태국에 온지 약6-7년만에 처음으로 4×8m짜리 3층 건물을 구입하여 목회대학원의 건물로 사용하게 되니 하늘의 별을 딴 기분이었다. 사실 이 건물도 얼마나 비좁았는지 모르지만 이런 것도 느끼지 못하고 만족하였다. 몇 년 후 우리는 할렐루야교회를 다른 지역에 개척하면서 큰 건물을 소유하게 되어 자연 이 건물을 관리할 수도 없고 버려둘 수도 없어서 염려 중에 매각하려고 매각 광고를 집 문 앞에 붙여 놓았는데 마침 하나님은 이 집을 사겠다는 사람을 보내 주셨기에 제발로 우리 집을 찾아와서 우리가 산 가격보다 배나 더 되게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사실 당시에는 은행 융자가 끊겨진 때 였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부동산 매매가 없는 때 일찌라도 이 사람을 보내시고 고액을 주어서 팔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은행 빚을 갚고 할렐루야교회당 근처에 그와 비슷한 집을 구할 수 있는 재정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이 일을 생각하면 우리가 그 사람에게 너무나 비싸게 판 것은 아니가? 그가 이 집을 산후 마음이 너무 아프지는 않았을까? 하는 염려와 함께 그러나 이 모든 되어진 상황을 살펴보건데 이 사람은 분명히 주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천사였다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이 집을 통하여 마련된 할렐루야교회당 근처의 집은 전도사의 사택겸 손님들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어서 얼마나 유용한지 모른다. 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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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에 도착 하면 우선...



    선교사가 태국에 도착하면 이곳에서의 정착과 삶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다음과 같으며 이에 따른 서류 처리 기술을 잘 알아두어야 태국에서의 삶에 실수도 없고 편리해지며 재미도 있게 된다.


    일차적인 것은 은행 통장을 개설하고 총회에 보고하여 선교비를 수령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는 일과 대사관및 한국 교민회 사무실을 방문하고 등록하는 일과 선배 선교사를 찾아보고 인사하는 일이다.


    (1) 은행 통장 개설은 여권과 대사관에서 발행하는 주재 증명서(대사관 소정 양식)를 지참하고 자신이 사용하기 가장 쉬운 지역에 있는 은행을 찾되 방콕은행(타나카안 끄룽쥜)이나 농민은행(타나카안 까씻꼰타이)이 좋을 것이며 즉시 ATM카드도 만든다.


    (2) 대사관 영사과(태국 국립문화회관앞,전화247-7534)를 방문하고 교민 신고를 하고, 교민회관을 방문하고(수쿰윗 쏘이 18, 전화258-1627)교민회 회원 가입을 신청한다. 이때 각각 사진을 지참해야 하고 교민회비는 년$40이다.


    (3) 태국에 도착하는 즉시 선배 선교사들에게 먼저 인사를 차리는 것을 잊지 말 것이다. 총회 파송 선교사는 지부장과 서기에게 제반 서류와 함께 부임 신고를 하고 환영 모임을 갖을수 있도록 해야하며 각 선교 단체장들에게 전화로 인사를 하면 되는데 태국 선교지의 선배 선교사와 단체장들은 다음과 같다.


    씨니어 선교사로는 신홍식(T398-7677,01-927-7121),


    김정웅(T01-323-0343),


    정승회(T522-2228,01-914-3082),


    윤수길(T01-915-6084)등을 들 수 있고


    각 단체별로는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KPM/정승회 T522-2740,F522-2237,)


    한국지구촌선교회(KGM/김중식T374-5035),


    개혁측 총회선교부(KRPM/정도연T01-510-1670),


    서문세계선교회(SWM/김성곤T375-9073),


    세계선교동역기구(WMP/신홍식T393-6223),


    한국총회선교회(KGAM/강대흥T286-1449),


    통합측 총회선교부(PCK/조준형T053-24-9507),


    기감총회선교부(KMM/신광준T391-5463),


    기성총회선교부(KEM/박윤식T053-24-2622),


    온누리제자선교회(ANDM/양병화T300-5022)등 이다.



    2차적으로는 태국어학교에 등록하는 일과 국제 운전면허증을 태국 운전면허증으로 교체하는 일과 일반 세간 살이를 준비하는 일이다.


    (1) 태국어학교(Union Languge School)에 등록하는 일은 태국에 입국할 구체적인 일정이 나오면 현지 선교사를 통해 언어학교 예비등록을 하여 놓는게 좋다. 간혹 자리가 없어서 제때에 공부를 시작 할 수 없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태국어 학교는 등록비가 CCT및,EFT소속 선교사와 일반인이 다르기에 이에 관계되는 서류가 첨부 되어야 할인 혜택이 있게 된다.(전화)


    (2) 태국운전면허증은 한국에서 운전면허를 획득한 사람이면 이를 국제 운전면허증으로 발급받아 가져오면 태국에서 태국운전면허증으로 발급받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본인이 직접 처리 할 수도 있고 현지인을 활용하면 더욱 쉽다.


    (3) 살림살이 구입은 한국에서 준비하기 보다 현지에서 구입하는 것이 경제적이며 현지 실정에 맞는다. 다만 겨울옷과 고유의 한국 용품만을 한국에서 구입하여 올 것이며 전자 제품은 전혀 가져올 필요가 없다. 한복,교회용품은 태국에서 구입 할 수 없음을 기억 할 것이며, 현지 선교사나 현지 교계 지도자에게 줄 선물은 한국에서 한국 것으로 준비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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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PM의 선교사로 동역하려면



    태국 내에서 KPM은 한국인 선교 단체 중에는 유일하게 역사가 길고 대 정부관계에서 선교사 비자를 20개나 획득하고 있고 태국정부의 선교단체 육성 자금을 지원 받고 있는 단체로 법적인 차원에서 확고하며 독보적이며 사역적인 면에서도 가장 선두를 달리고 있어서 어느 선교 단체보다 동역자가 많이 필요하고 선교사의 비자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데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의 신앙과 신학에 위배되지 않는 신앙과 신학을 소유하고 선교부의 선교정책에 순응 할 수 있는 자세와 신분및 파송 단체가 분명한 선교사에게는 회원 또는 준회원의 자격으로 20명 한도 내에서 회원 가입이 허락되며 제 방법으로 태국 선교에 동역 할 수 있다.


    회원으로 가입을 원하는 선교사 후보는 다음과 같은 서류를 구비하여 제출하면 제 절차를 거쳐 처리하게 된다. 우선 선교사로써의 일반적인 신분과 자격을 구비하고 파송단체가 확실하면 그 단체와 협의하여 회원으로 가입하여 동역 할 수 있다.


    (1) 회원 가입원서(선교부 소정 양식) 남,여 각 한통씩


    (2) 서약서(선교부 소정 양식) 1통


    (3) 선교사 파송장


    (4) 파송단체 소개서


    (5) 선교 사역 계획서


    (6) 신학교및 최종학교(대학및 대학원) 졸업 증명서(한,영문)


    (7) 한,영문 이력서(남,여)


    (8) 주민등록등본(한,영문)


    (9) 여권사본(전가족) 2통씩


    (10) 여권용 사진 각 가족 5매씩


     


    KPM및 산하기관 주소및 전화번호



    1. 정승회,김영숙선교사 직통


    전화 (001-662) 522-2228,2857, (001-661) 926-7876


    팩스 (001-662) 522-2237



    2. 선교부 사무실


    전화 (001-662) 522-2740,


    간사사택(001-662)



    3. 방콕할렐루야교회당


    전화 (001-662) 522-2145, 2742,



    4. 방콕목회대학원


    전화 (001-662) 522-2739



    5. 산족교회사역자훈련원(북태 치앙라이)


    전화 (001-66-53) 74-6401, 74-0324,


    팩스 (001-66-53) 74-5092



    10. 선교문제 논설들



    선교사와 안식년문제



    선교사가 자신의 능력을 따라 적당한 기간 동안 사역을 하다가 안식을 취하면서 그간의 사역을 점검하고 영 육간의 재 충전의 기회로 삼는 것은 하나님이 내신 원리임과 동시에 육체와 정신의 교정과 필요를 공급하는 일로 당연한 원리이다. 그러나 안식년을 어떻게 취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기에 이 문제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안식년 제도


    선교사의 안식년 제도도 성경의 안식년에 근거를 두고 사역의 종류와 지역의 사정을 고려하여 각인이나 단체의 합의에 의하여 결정되고 있어서 선교사의 안식년 제도는 가지각색이다. 때문에 6년 사역후 1년휴식의 성경에서 제시한 안식년제를 채택하고 있는가 하면 사역과 지역의 사정을 고려한 3년 또는 4년 사역에 1년 안식, 2년 사역에 6개월 안식등이 현재 활용중이다.


    1.1 최초의 안식년


    지역의 큰 어려움만 없다면 성경에서 보여주는 대로 6년 사역에 1년 안식의 제도를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1) 선교사의 열정으로 상당기간을 인내 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


    (2) 선교지의 위험을 아직 맛 보지 않았기에 용감한 사역을 전개 할 수 있다.


    (3) 한국인의 성질상 초반 사역에 많은 기간을 활용케 하는 것이 올다.


    (4) 초반에 많은 사역을 감당해 봄으로 많은 경험을 쌓게되어 다음단계의 사역을 좀더 효과적으로 감당 할 수 있게 된다.


    (5) 6년 정도의 기간이 소모되어야 1-2년의 언어및 현지 적응훈련을 포함하여 사역을 전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 제 2단계 안식년과 계속사역


    최초의 안식년과 달리 제 2단계 부터는 3-4년에 1년 또는 6개월이나 1-2개월씩 사역지의 상황을 고려하여 1회씩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최초의 안식년과 달리 휴식과 사역의 반성보다는 자신 의 제 능력을 개발하여 다음 사역에 도움이 되고 좀더 새로운 사역을 감당 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런 특별한 계획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겠다.


    (1) 현지 사역에 필요한 학문을 연구하는 일이다


    현지 사정에 따라 선교학,목회학,교육학,교회성장학,교회개척학,전도학,조직신학,교회음악,어린이지도등 다양하겠다. 그러나 한번의 안식년에 어떤 학위과정을 마스터하기 위하여 과도한 욕심을 부려서는 않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2) 1단계 사역을 깊이 반성하면서 새로운 선교 전략을 구상하는 것이 좋겠고 이를 위한 능력을 재 충전하는 기회로 삼을 일이다.


    (3) 안식년을 거칠 때마다 선교비의 지원 문제가 큰 문제로 등장하기 쉬운데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 할 일이며 후원하는 교회들의 옳바른 이해와 후원이 지속적으로 있어야 하겠다.


    2. 안식년의 유형


    안식년의 유형도 각 선교사와 사역지, 사역의 형태에 따라서 다를 수 밖에 없는데 다음과 같은 유형들이 있겠다.


    2.1 순수 안식형


    사역하는 동안의 감당하지 못하던 육체와 정신적, 영적인 방면의 재충전을 우선으로 하는 안식년 형태로 선교사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안식년의 형태가 되겠다. 순수한 안식의 형태이지만 과거의 사역에 대한 반성과 말씀을 연구하는 등의 기본적인 활동이 요청되며 제2단계 사역을 위한 구상이 필요하다.


    2.2 순회보고와 선교비 모금형


    선교를 지원하고 있는 교회를 방문하고 그간의 사역을 보고하는 것은 선교사의 기본 활동이다. 그러나 현지 사역에 충실한 나머지 후원자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염려가 있었기에 이들을 방문하고 자신의 사역을 진실되게 보고하고 이들의 이해를 돕는 것은 선교사와 후원자를 일체가 되게하여 현지 사역을 좀더 원활하게 진행하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겠다. 아울러 1단계의 사역이 준비기간의 성격이 있었기에 본격적으로 사역해야하는 2단계의 사업과 재정의 혼연일체는 특별히 주어진 안식년을 활용할 것이지 현지를 자주 떠나서 후원교회를 방문하는 비정상적인 선교사역이 되지 않도록 조심 할 일이다.


    2.3 선교문제 연구형


    동일 문화권내에 있는 타 선교지의 사역에 대하여 연구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사역을 좀더 효율적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이때 극히 비슷한 선교 현지의 또 다른 상항을 보게 됨으로 선교의 새로운 비젼을 받게 되고 사역에 대한 다소의 지혜를 습득하게 되며 동일 문화권내의 선교사와의 깊은 교제및 협력의 기반도 쌓게 되어 공동체재를 구축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불교권은 다른 불교권에서, 아시아는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 등등이다.


    이런 사역은 1단계보다는 2단계 이상의 안식년에 좋겠고 장기간보다는 단기간이어야 할 것이다. 때문에 제1,2의 안식년 형태를 취하면서도 가능할 것이다.


    2.4 언어훈련형


    한국선교사에게 항상 불편한 것이 세계적인 언어의 구사에 있다. 더구나 선교지에서 현지 언어를 중심하여 활동하던 선교사는 세계적인 언어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물론 현지어를 안식년 기간 중에 잊어버린다든지 손상을 입게 해서는 무었보다도 큰 손실이라고 생각하기에 이점에는 각별히 조심하여야 한다. 또한 단기간의 언어 연수를 위한다면 선교학 같은 학문을 연구하는 코스에 들어가서 선교지에서 온 선교사들과의 친교를 통해 얻어지는 경험을 쌓는 것이 선교 사역에 큰 도움이 되겠다. 언어 연수를 위한 정보는 밋션저널 94년 겨울호를 참조하기 바란다.


    2.5 선교학및 신학연구형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는 선교사는 안식년을 맞이하여 전문분야의 학문을 연구함으로 자신의 사역에 효과를 증진 시키는데 활용하는 것은 의의가 있다. 그러나 안식년에 모든 학문을 완성 시켜려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 연구를 위한 지역으로는 미국,영국,이스라엘등 자신에게 맞는곳을 택하면 된다.


    2.6 해외 한인교회 협력사역형


    선교사역을 통해 거의 상실할 수도 있는 목회자적인 자질을 휴식하는 동안 인접한 나라나 문화권이 동일한 나라에 있는 한인교회 또는 선교비 후원교회등에서 선교분야를 담당하면서 목회를 배우고 훈련받음으로 지친 영적 자신을 부흥케 하고 현지 교회에 유익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현대 목회를 실습하는 시간으로 활용하면 피차 유익할 것이다. 특히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담임목회의 경험이 없이 선교지에 파송 받아왔기에 목회분야에서 많은 약점을 지니고 있어서 피선교지 교회의 목회자를 돕는 사역에 상당한 물의를 일으켜 온 것이 선교지의 형편이었기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 분야를 보강하는 일은 선교사의 사역을 성숙하게 하고 선교지 교회에 더욱 필요한 인물이 되게 할 것이다.


    3. 안식년을 취할 지역


    선교사의 안식지는 한국이요, 파송한 교회가 가장 적합하다고 하겠으나 제 형편에 따라 본국을 비롯하여 선교 현지, 동일 문화권이나 연구를 위한 지역등이 되겠다.


    3.1 한국


    선교사의 안식에 가장 바람직한 곳은 본국이다. 그러나 제반 여건이 선교사로 하여금 본국에서의 안식년을 안식년답게 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게 현실이다. 이 문제의 해결은 선교사 자신과 파송교회의 제 형편에서 기인하기에 피차 노력하여 본국과 파송교회가 최적의 선교사 안식처가 되도록 개선하고 노력 할 일이다. 여기서 선교사가 안식년에 최적의 안식처로 원하는 여건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우선 선교사나 가족이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푹 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간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제반 건강의 위협을 받아왔다. 그리고 상당한 자유를 누리며 자기의 사역을 감당해 온 형편이어서 건강에 도움이 되는 안식년이 되어야함과 동시에 어떻한 제도적인 제재나 환경에서 오는 불편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되어 있어서 본국을 안식지로 꺼리게 되어 있다. 그러나 여건이 자신에게 편리하고 좋으면 누구나 본국에서 형제 자매들과 안식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런 여건과 관계된 제 문제는 교통이 편리하고 좀 넓은 공간이 있는 주택, 적당한 차량, 자녀가 한국어로 교육에 임 할 수 있는 여건등이다.


    (2) 안식년 연구에 적합한 여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간 선교사의 실력은 뒤져있게 마련이기에 이의 보충을 위한 필요한 연구지가 되어야 선교사의 안식지로 환영을 받게 되어있다. 현금 한국교회 내에는 이런 선교사의 실력 향상을 위한 교육기관이 드물고 선교에 대하여 폭 넓은 경험을 습득 할 수 있는 기관이 극히 부족한 형편이다. 이 또한 불리한 여건이다.


    (3) 자녀교육에 잇점이 있어야 한다.


    선교사의 자녀들은 한국어 보다는 영어나 현지어에 더 유창하기에 교육문제에서 한국보다는 외국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다. 사실 이는 선택이라기 보다는 그 길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이런 상황에 있는 자녀의 형편상부모의 안식지도 이들을 따라서 정해지는 상황에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면 안식년을 위한 안식지는 자연 본국이 될 것이다.


    3.2 선교 사역 현지


    안식년에 꼭 선교지를 떠나야만 안식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에 선교지를 떠나지 않고 선교지 내의 적당한 지역을 선택하여 안식년을 보낸다해도 상당히 유익한 안식년을 장식할 수 있을 것인데 후배 선교사들을 직접 지도하여 자신의 범한 실수를 피할 수 있게 하는 유익도 있고 자신의 사역에도 큰 공백을 초래하지 않게 되어 안식년이란 개념과 효과가 적을지는 모르나 상당한 의의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는 제2단계 계획 수립과 2단계 사역의 새로 시작하는 부작용이 덜하게 될 것이다.


    3.3 동일 문화권이나 인접 선교지


    안식년의 유형중 2.3의 경우의 실천으로 여행과 휴식 그리고 연구라는 잇점이 있어서 상당히 흥미있는 휴식이 될 것이다.


    3.4 성지순례 연구


    안식년을 이용하여 성지 연구의 기회로 삼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왜냐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안식년이 1년 정도이어서 어떤 학문을 완성 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기에 이스라엘이나 기타 성지를 방문하여 전문적인 연구와 함께 좋은 경험을 쌓는다면 산 지식을 소유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도움이 되겠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지역에(이스라엘, 이집트, 터키 등등) 한국인 선교사들이 파송받아 사역 중이어서 이들의 도움으로 연구와 경험의 축적을 자신의 것으로 이전해 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3.5 영국, 미국, 호주등


    영국에는 언어 훈련과 선교학 연구를 위한 기관들이 많이 있어서 1년정도의 기간을 통하여 WEC선교부의 선교사 오리엔테이션 코스(9개월)나 Bible College의 코스를 밟을 수도 있으며 생활비는 가족당 월$600-$1,000(US)쯤 소요되며 런던한인교회(김북경목사)에서도 선교사를 돕는 일을 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비자문제가 좀 까다로우나 필요한 사람은 길이 있어서 언어훈련 뿐아니라 선교학, 신학연구와 휴식에 이르기까지 유익한 안식년을 보넬 수 있는 여건이 구비되어있다. 특히 Fuller Theological Seminary(엘에이 소재)에는 태국의 최초 선교사였던 최찬영목사가 한국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어서 한국선교사가 제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며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시카고소재)은 풀러와 함께 한국인 선교사가 많이 찾는 곳이다.


    선교사의 안식년은 필요하나 선교사 각인의 제 형편에 의해 안식년이 결정되고 안식지나 안식년 기간중의 활동이 구체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여기에 기존 안식년에 관한 제반 원리와 규정들을 참조하면 보다 효과적인 안식년이 되겠다.








    피 선교지 교회와의 협력 사역



    서구교회들의 세계선교 역사에 비하면 한국교회의 세계 선교역사는 이제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선교지에 가보면 서구 선교사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보편화 되어 있어서 이제 출발하는 한국교회의 선교사들의 설땅마져 없는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의욕적인 선교사는 이제라도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본인과 한국교회의 선교적인 열정에 힘입어 정상적이든 비정상적이든 제 방법들을 가리지 않고 활용하여 이적적인(?) 선교 결과를 보여주기도 하나 현지 교회와 선교 동역자들에게 크고 적은 피해와 부담을 앉겨 주고 있는게 선교지 현실이다.


    그러나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하여야 하는 일은 그 선교지가 전혀 미 개척지라면 몰라도 선교지에 이미 복음이 들어가 있고 또 현지인 교회가 설립되어 있다면 자연 이 교회를 도와서 그들의 필요를 따라 사역하는 것이 선교사의 사역 원리이다. 그러나 현지 교회와 동반자가 되어 선교사역을 전개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며 한국인의 체질과도 거리가 있는게 사실이나 마지막 때의 세계선교의 주역이 된 그러면서도 이제 본격적인 사역을 전개하려는 한국교회의 세계선교 사역에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은 한국교회어와 선교사의 장래 승패를 결정 짓는 귀중한 과제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선교 현지에 이미 본토인 교회가 설립되어 있는 상황에서의 한국교회와 선교사가 사역할 때 고려해야할 사항이 무엇인지를 고찰해 보고져한다.


    1. 피 선교지에 대한 선교정책의 문제에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나 선교단체가 자기들이 수립한 선교지에 대한 선교정책에 의하여 선교현지의 상황은 거의 고려하지 않은채 일방적인 선교 사역을 수행해 오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로 인하여 선교하는 교회나 선교단체는 상당한 선교적 만족을 얻었다고 할찌라도 현지 교회에 앉겨준 유익은 선교단체가 획득한 결과에 미치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피해를 주기가 일수 였기에 감사보다는 반감을 갖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특히 태국의 경우는 자유제일주의가 체질화되어있기에 공식석상에서도 선교사들이 파송 단체의 선교정책을 태국에서 강요함으로 태국과는 이질적인 사역을 전개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고 이들 때문에 하나 되지 못하고 분렬하고 있다고 모든 책임을 선교사에게 돌려서 선교사가 165년간 현지 교회와 다투어온 느낌마져 들게 하고 있다.


    최근 태국 내에 한국인 선교사가 급증하면서 60여가정의 선교사가 제 방면에서 사역을 전개함으로 태국인의 눈에 두드러지게 되면서 한국교회와 한국인 선교사에 대한 불평이 급증하고 있어서 한국교회와 선교사가 함께 조심스런 사역을 전개해야 할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때문에 피 선교지에 대한 선교정책을 수립함에 있어서 먼저 선교지 상황을 고려하여 현지에 적당한 선교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수행해야 한다. 이는 주권을 소유한 한 국가에 들어가서 사역하는 사람들의 예의이며 선교적인 효과를 고려 할 때도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한국교회 선교사는 태국교회지도자들에게 너무 한국것을 고집한다는 평을 받고 있기에 아무리 한국교회가 세계적으로 성장에 모범을 보이는 교회일찌라도 선교 현지의 교회들과 동역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을 인정하고 이들의 부족함을 도와서 성경적이고도 태국에 수용 가능한 선교 정책의 수립과 수행이 수반 되어야 한다.


    간혹 한국교회가 선교지에 대하여 한국교회의 열심을 따라 무리한 요구를 강요하는 것이나. 선교사가 현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선교적 욕심에 억메여 선교지의 필요와는 동떨어진 사역을 수행하는 것, 아직 능력에 목미치는 사역을 계획하고 전개하는 일 등은 피차를 위하여 지양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선교본부의 선교지에 대한 인사문제, 행정문제,재정문제등을 현지 실정에 맞게 그리고 적법하게 관리하고 지도하고 지원해야 한다. 현재 우리 총회는 개 교회주의의 편만으로 이런 문제를 제대로 감당할 수 없어서 선교정책의 부재라는 말을 들을 뿐아니라 선교지에서도 이를 실감하고 있는바 태국의 경우 총회선교부가 가장 큰 그룹이 되어 사역 중에 있으나 한 총회라는 느낌은 선교사 자신들과 현지 교회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개교회주의, 이중회원권 문제, 선교사의 팀 사역에 대한 이해 부족등에서 기인한 것이다. 때문에 선교본부의 선교지에 대한 적절한 선교정책의 수립과 이의 수행은 선교 현지의 문제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최대의 선교적 효과를 거둘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이다.


    2. 선교사의 현지 사역의 문제에서


    선교사는 선교지의 주인이 아니고 임시 사역자에 불과하다. 때문에 선교사의 현지 사역은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겸손히 섬기는 봉사자의 자세가 요청된다. 한국인 선교사는 서구 선교사에게서 받은 선교사상 때문에 다른 사역자 보다 우위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기에 자연 현지에서의 사역 중에 무의식적으로 이런 자세가 나타나 현지인과의 관계에서 그들을 무시하는 경향을 갖게 되는 위험이 있다. 때문에 이를 바로 잡지 못하면 선교지에서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일에 실패하고 말 것이다.


    다음으로 선교사의 사역이 현지 교회나 지도자의 부족을 보완해 주고 감당하지 못하는 분야를 조력해 주는 분야에서 활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선교사의 선교적 영웅주의는 선교지에 필요한 사역에는 관심이 없고 불 필요하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제2차적인 사역에 재정과 힘을 소비하게 됨으로 피 선교지 교회의 신임을 잃게 되곤 한다.


    예를 들어 태국의 경우 급한 사역은 허약한 태국교회를 어떻게 도와서 강력한 교회로 육성하는냐에 있다.


    때문에 교회 목회자와 다른 교회 지도자들의 육성과 재 교육의 문제를 도와주는 일이 우선이라고 하겠다. 이 일을 위하여 태국교회에 필요로 하는 선교사는 목회 경험이 풍부한 목사 선교사로써 기존 연약한 교회를 도와 강력한 교회로 부흥시키는 사역에 적당한 사람과 이런 부흥에 기여할 평신도 선교사(음악,어린이 등)들이어야한다. 여기 목회자 양성과 훈련 분야의 사역이 태국의 기존 신학교의 약점을 보완해 주는 사역을 전개할 것이지 기존 신학교를 무시하고 모범적인 신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사고는 현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소치일 뿐만 아니라 신학교를 설립한다 해도 현재의 신학교의 수준을 능가할 만한 교수와 학생을 확보하는 데는 몇수십년이 걸리겠기에 결국 저질 신학교가 하나 더 생기는 결과 이상은 기대 할 수 없고 아울러 현지 교회 지도자들의 지탄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실수를 하여 선교 사역에 시행 착오를 일으키고 한국교회를 속이는 과오를 범해서는 않된다. 또한 태국 기존 교회를 무시한 나머지 내가 모범적인 교회를 개척해 보겠다는 생각도 올바른 판단인지 숙고해 보아야 한다. 간혹 선교사들이 나의 필요 때문에 현지의 상황은 별로 고려하지 않고 새로운 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실수가 있기도 한다. 또한 사회 사업과 같은 간접 선교 사역은 서구 선교사들이 165년간 전개해 왔으나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면 현 상황에서 아프리카나 다른 먹고 사는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나라에서와 같이 그렇게 중요하고 긴박하게 다루어야할 사업인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그 다음으로 선교비의 활용은 필요 적절하게 사용하되 현지 교회의 자립정신을 손상시키지 않는 방법과 범위내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돈이 필요한 현지인은 자연 선교비가 풍부한 선교사를 따르기 마련이며 선교비를 의지하는 현지인은 자립에 대하여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선교비가 중단되는 것에 대하여만 관심이 있고 재정을 지원하는 선교사는 그 재정에 대한 자세와 권력을 사용하게 되어있다. 이런 재정 사용 구조는 선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선교지에서 이런 선교 구조를 자주 접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선교가 성립되게 하기 위하여는 재정은 꼭 필요한 사역에 적당하게 그리고 현명한 방법을 통하여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여기서 선교비가 선교하게 하기 보다는 성령께서 선교하게 하는 방법을 구사하는 지혜가 필요하며 현지인도 선교비 때문에 일하게 하기 보다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충성하도록 지도하고 훈련하는 과정이 선교비로 결과를 강제로 얻어내는 구태의연한 방법을 과감하게 청산하여야 하겠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나 선교사가 선교 결과에 급급하지 말고 진정한 선교 사역을 전개하여 주님이 인정하시고 현지 교회에 유익한 선교사역이 되게 하여야한다. 이를 위해 우선 선교비를 최소한의로 사용하되 헌금의 방법으로 지원하고 기간은 단기간으로 하며 년차적으로 감소시키어야한다.


    그러나 선교비는 사용하지 않고 노동력과 기술과 방법을 제시하고 함께 실천해 보는 선교 방법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한국 선교사들이 파송 받아 선교하고 있는 선교지들은 이미 선교사를 알고 선교비에 맛을 들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선교비를 사용하지 않고 사역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선교비 투자에 듣메이지 않는 선교만이 바람직한 선교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사실은 사역을 마친 후에야 겨우 깨닫게 되겠기에 네비우스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선교 원리가 나의 선교 원리가 되게하기까지 부단히 힘쓰고 애쓰는 노력이 없는 한 진정한 선교는 나의 사역에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사실 선교비가 투자되면 투자되는 만큼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 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어있는 선교지는 선교비가 투자되지 않아도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옥토인 것이며, 정말로 부흥되지 않는 교회는 선교비를 억수 같이 투자해도 교회 성장은 나타나지 않는 박토인 것이다. 때문에 선교비로 어떤 선교적인 결과를 획득하겠다는 사고는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며 무슨 결과를 획득했다 해도 진정한 선교적 결과라고 말하기는 부끄러운 것이다.


    3. 피 선교지 교회내의 제 문제에서


    피 선교지 교회는 무조건 돈 없는 교회요, 인물이 없는 교회요,열심이 없는 교회요, 믿음이 없는 교회요, 성장하지 못하는 교회요,수준 이하의 교회라는 생각에 빠지면 큰 과오를 범하게 된다.


    피 선교지의 교회 중에 한국교회 보다 더 신앙과 열심이 있고 부흥과 성장이 있는 교회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피 선교지 교회의 약점들이 대부분 다음과 같다.


    (1) 교인의 부족에서 오는 목회자의 양적 부족


    (2) 신학교육의 미흡에서 오는 목회자의 질적 부족


    (3) 목회자의 질적 부족에서 오는 교인의 신앙 훈련 부족


    (4) 교인의 성경 지식의 부족


    (5) 교인수의 약소와 재정의 미자립


    (6) 교회의 미자립에서 오는 정규 예배에 대한 질적 미흡 등으로 정상적인 교회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어서 정상적인 교인 육성에 많은 장애를 받고 있다. 그러나 복음의 역사는 한국 교회 보다 더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 교회가 많고 우리 보다 더 모범적인 교회도 많다는 것이다. 이곳 태국에서는 태국교회 중에도 우리가 무시 못할 교회가 많지만 특히 중국계 교회들은 우리가 무시할 만한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선교사가 쉽게 접근 할 수 없고 선교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교회도 많다.


    또한 피 선교지 교회가 전혀 복음과의 접촉이 없었다면 선교사가 사역하기가 오히려 편하겠지만 나름대로의 전통이 있는 교회이기에 이들 교회와 함께 사역하는 데는 그만한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오히려 이들의 오랜 전통 속에는 우리가 배워야하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않된다. 때문에 이들을 얏잡아 보기 전에 우선 열심히 그들을 배우고 장, 단점을 파악한후 장점을 살려서 크게 성장시키는데 활용하고 단점은 시일을 두고 서서히 바로 잡아주는 활동을 전개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사역 역시 나 자신이 직접 감당하기보다는 본토인을 통하여 스스로가 그런 일을 해 나갈수 있도록 유도할 일이지 열정만을 가지고 좋은 일을 그릇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때문에 선교사는 항상 현지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현지의 필요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조력하되 새로운 방향의 제시와 잘못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한 경고와 처단을 겸해야 한다. 그러나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동안 현지 동역자에 대한 불신감의 팽대는 선교사 자신이 실망하는 병을 앓게 하고 끝내 회복하지 못하면 선교지를 떠나야 하는 실패를 초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4. 태국 현지 교회의 필요와 금기 사항


    4.1 선교적 측면에서 태국교회에 필요한 사역들


    (1) 교회개척과 육성 사업 지원


    (2) 미 자립교회 육성과 자립 지원


    (3) 목회자 육성과 훈련및 재교육 지원


    (4) 교회 지도자 교육의 철저


    (5) 신학교육기관의 질적 향상


    (6) 교회 음악의 향상


    (7) 주일학교 교육의 철저와 활성화


    4.2 지원 사역에 있어서의 금기 사항


    (1) 교회개척은 현지인을 육성하여 그로 하여금 개척 육성케하고 선교사는 조력자가 된다. 만약에 목회 경험이 부족하면 우선 목회 를 배우는 일에 충실할 것이다.


    (2) 미 자립교회의 영적 개발을 촉진시켜 스스로 자립하는 교회가 되도록 할 일이지 선교비를 의지하여 잠시 성장하는 것 같은 자립을 금한다.


    (3) 목회자 양성의 기본이 소명을 받은자들로 출발하게 하고 자질이 함양되도록 교육 ,훈련하며 재 교육을 실시하여 계속적인 질적 향상을 꾀하되 신학교육기관의 설립에는 신중을 기한다.


    (4) 교회 지도자들은 철저한 교육과 훈련을 거쳐서 교회 지도자가 되도록 하며 이를 위해 새 신자 교육과 훈련을 철저히 한다.


    (5) 주일학교 교육을 강화하여 신앙의 골격을 굳게 하되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에 중점을 둔다.


    (6) 교회 음악의 이론과 실제로 교회음악의 생활화와 질적 향상을 꾀한다.


    (7) 선교 행정은 한국교회의 요청을 고려하되 선교지 중심으로 처리한다.


    4.3 선교지 사역에서 자제해야 할 점


    (1) 동일한 사업에 대한 한국 선교사들 간의 과도한 경쟁


    (2) 한국 선교사들간의 현지인 쟁탈전


    (3) 한국 선교사들간의 피차 파괴 행위


    (4) 한국 선교사들간의 분파 분열 행위


    (5) 선교비의 과도한 사용과 전시 효과적인 사역


    (6) 내 것, 내 교단, 내 단체, 내 교회주의


    한국교회나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현지 교회들의 신임을 쌓고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서 사업을 전개해 나가되 현지 교회 중심적인 사역이 되도록 최선의 희생을 투자함으로 현지에서 선교사는 죽고 현지 교회는 살도록 노력한다면 주님이 인정하시고 동료 선교사가 인정하는 복된 선교 사역자가 될 것이다.




    현지 교단과의 협력사역의 장,단점



    한국교회의 선교사가 파송받아 사역하고 있는 피 선교지는 대부분 기독교 복음이 이미 전달되어 있을 뿐아니라 기독교 단체도 조직되어 있고 그렇치 않으면 교단을 대신하는 선교단체가 활동하고 있는 지역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선교지에 파송 받아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자연 기존 선교 단체나 기독교 교단에 소속되어 협력하는 선교사역을 전개하게 되는 것이 통례이다. 설혹 기존 교단이나 단체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 해도 이들을 무시한 채 독자적인 선교사역을 감당하기보다는 그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역하는 것이 원리이며 피선교지를 위하고 바른 선교사역을 감당케 되어 선교지에 필요한 선교사로 인정받게 되지만 이런 사역을 전개하지 못하게 되면 파송 단체의 영웅 대접은 받을 수 있으나 피 선교지를 해치고 동료 선교사에게 피해를 주며 자신도 결국에는 망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규결이다.


    1. 현지 교단과의 협력사역에 대한 의미


    먼저 협력사역에 대한 장, 단점을 논하기 전에 협력사역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야 한다.


    1.1 협력사역이란?


    선교사가 파송 받을 당시부터 현지 교단이나 기존 선교단체와의 협의를 거쳐 이들의 초청을 받아 선교지에 입국하여 그들의 일원이 되고 그들의 지도와 현지의 필요를 따라 선교사역을 담당하는 사역의 형태가 협력사역의 기본적인 형태라고 하겠다. 만약에 몇가지 점에서만 이들과 협력한다 해도 동일한 협력사역의 형태로 간주함이 떧다.


    1.2 독립사역이란?


    선교사가 현지 교단이나 기존 선교 단체와는 무관하게 파송받아 이들의 어떤 간섭이나 지도를 받지 않고 선교사의 소신을 따라 선교 현지에서 독자적으로 사역을 전개하는 사역의 형태가 독립 사역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선교사가 현지 교단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가 중요하기보다는 선교사의 사역과 사역의 결과가 현지 교단에 예속되어 있는 것인지 독립적인 것인지가 협력사역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중요한 키가된다.


    2. 현지 교단과의 협력 사역의 장점


    선교사가 현지 교단과의 협력 하에서 선교사역을 전개하는 것은 선교사역의 기본이며 극히 자연스런 사역의 형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선교사업이 하나님의 사업이며 현지를 위한 사역이란 측면에서 볼 때도 가장 적합한 사역의 형태라고 사료되며 독립적인 사역이 우리에게 주는 독특한 면이 있다해도 이런 장점을 다 카버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이 장점들은 다음과 같다.


    (1) 선교 현지에로의 입국,현지 적응과 정착등 선교사가 초기에 겪어야 하는 제반 어려움을 현지 수용단체인 교단이나 선교단체가 전적으로 담당해 주기에 순조롭게 정착하고 사역을 시작할 수 있다.


    (2) 선교 사역적 측면에서도 현지에 필요한 전문분야 한,두가지에 전력을 투자하게 되겠기에 의미없이 분주 할 필요가 없고 선교적인 결과도 쉽게 얻을 수 있게 된다.


    (3) 선교사역의 동역자인 현지 일군에 대한 조달이 순조롭기에 일군난을 어느 정도 면하게 된다


    (4) 전문 분야에 대한 기술과 노동력을 중심으로 사역하기에 과다한 선교비를 투자할 필요가 없다.


    (5) 사역의 책임 단체가 분명하기에 선교사의 실직은 전혀 없게 되며 안식년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는다.


    (6) 한국인 선교사들간의 과도한 경쟁과 선교비의 낭비를 피 할 수 있다.


    3. 현지 교단과의 협력사역의 단점


    선교사의 사역이 현지 중심적인 선교사역의 관점에서 볼때 현지 교단과의 협력사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파송단체나 교단 중심적인 측면에서 볼때는 현지 교단과의 협력사역에는 제 문제가 제기되고 따라서 이 문제가 협력사업의 단점으로 지적된다.


    (1) 파송 단체(교회),교단 그리고 선교사의 믿음의 소신껏 사역하는 일에 부자유스럽다.


    (2) 한국교회의 믿음과 열정과 적성에 맞기 어렵다


    (3) 선교사의 사역의 결과가 현지 교단의 것으로 남게 되기에 파송단체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렵다.


    또한 간접적으로 독립사역을 전개하였을 경우에 오는 어려움이 협력사역의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선교적인 기반을 조성하는 일에 어려움이 있고 많은 시간과 재정을 요하며 이 과정에서 현지 교단이나 선교단체와의 마찰이 있게 된다.


    (2) 피 선교지는 대부분 일군난이어서 동역자를 구하기가 심히 어렵고 지도자 육성에 장기간을 요한다.


    (3) 선교비의 투자가 막대하다.


    (4) 선교적인 전 분야에 대한 선교사가 필요하기에 팀 사역을 위한 선교요원이 충당되어야 한다.


    (5) 사역에 대한 선교 결과가 느리다.


    (6) 선교사가 실직할 염려가 있다.


    (7) 한국인 선교사들간의 치열한 경쟁에 휘말려 선교력을 손상케 된다.


    현지 교단과의 협력사역에 대한 장, 단점을 논하는 것은 현 선교지의 상황에서는 거의 필요 없는 일이고 오히려 어떻게 현지 교단과의 바람직한 선교 협력을 통하여 한국교회의 믿음의 소신껏 사역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논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본다. 왜냐면 현 선교지의 상황이 이미 서구 선교사들이 장기간 사역해 온 선교지인 점을 고려하면 어떻한 형태로든지 협력사역의 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고 혹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독자적인 개척사역을 전개한다 할찌라도 이의 성취를 위해서는 자연 다른 선진 선교사나 단체의 지도, 조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자연 다음과 같은 사역이 되어야 한다.


    (1) 선교사의 사역이 기존 현지 교단이나 선교단체와의 긴밀한 협력관계 속에서 전개되어야 하고


    (2) 파송기관의 일방적인 선교정책에 의한 선교사역을 전개하기 보다는 현지 상황에 적합하고 필요한 선교정책을 수립하고 수행 할 것이며


    (3) 선교비의 투자는 선교지의 자립정신을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사용 되도록 하고


    (4) 모든 사역의 결과는 선교지에 귀속시키는 일에 힘쓸 것이다.


    이렇게 사역한다면 현지 교단에 예속된다 해도 협력사역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최대한으로 극복하여 현지와 파송 단체 그리고 하나님께 만족하는 선교사역을 감당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권 선교전략(태국)



    불교국이라고 칭할 수 있는 나라는 불교를 국교로 하고 있든지, 불교 인구가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인구에 비하여 월등한 차이를 보이든지, 아니면 월등한 불교 인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을찌라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서 선교적인 측면에서 불교적인 상황에 대처할 선교전략을 수립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나라를 불교국이라고 규정한다.


    불교국은 모두 아시아에 위치하고 있고 많은 나라들이 공산국이거나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있어서 기독교 선교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복합적인 전략이 요청되고 있기도 한데 다음과 같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국가명 불교인구 기독교/천주교


    ---------------------------------------------------


    태국 87%국교화 1%


    라오스 75% 1.3% 공산주의


    캄보디아 97% 1% 공산주의


    미얀마 75% 3.5% 사회주의


    베트남 70% 8.4% 공산주의


    스리랑카 67% 7.8%


    한국 45% 25% (공산정권*)


    일본 83%(신도) 1.7%


    부탄 65%국교 ?


    몽고리아 ? 국교 ?


    중국 ? ? 공산주의


    ---------------------------------------------------


    1. 불교국 선교전략으로써의 태국


    태국은 모든 불교국 중에서 불교에 대한 열성이나 국력이나 지리적인 입장에서 불교국의 장자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또한 모든 종교에 대하여 자유를 허용하고 있어서 기독교 선교도 자유롭게 진행되고 둁끁는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내에는 불교 아닌게 없다. 따라서 태국의 사회, 문화, 경제, 정치를 비롯하여 전 분야에 불교의 영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어서 태국인은 모두 부처처럼 되어 있고 제반 윤리나 원리, 규정이 부다의 가르침에 입지해 있다. 뿐만아니라 불교보다 낫은 종교는 이 세상에 없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어서 기독교의 진의를 이들에게 내 보인다고 하는 것은 생각 밖에 어려운 전쟁일 뿐아니라 개종자에게서 불교적인 사고와 윤리를 기독교적으로 변화시키는 대에는 전도할 때의 어려움 이상의 어려운 사역이어서 많은 시간과 희생과 인내를 필요로 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국 선교 전략의 표본으로 태국 선교 전략을 연구함으로 불교국 선교 전략으로 대처 할 수 있을 것이다.


    2. 태국의 제반 상황


    2.1 민족과 국가적인 상황


    대체적으로 태국민의 유래에 대하여는 확실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을 뿐아니라 주변의 제 민족들과 동족처럼 지나오면서 민족적인 혼혈과 종교적인 혼합, 사고의 다양화 등으로 쉽게 다루기 어려운 민족중의 하나가 되고 있고 자민족을 보호하는 이들의 민족성은 새로운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성질로 타종교의 전래와 정착에 큰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고있고 불교의 가르침에 젖어있는 이들에게는 기독교의 전투적인 복음의 성격이 저금한 신앙과 교훈으로 인식되어 기독교 전파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2.2 사회및 문화적인 상황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인 태국은 주인과 종이 함께 기독교인이 되게 하는데 큰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고 25%의 문맹률과 냉냉한 교육열은 주인과 종의 계급화를 더욱 강화시키고 복음의 전파를 불교에 대한 맹종으로 말살시키고 있다. 또한 느슨한 사회구조는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여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의 전파와 성장을 거의 없도록 하고 있다.


    2.3 종교및 신앙적인 상황


    국가의 형태가 형성되기 전부터 신봉하던 미신, 애미니즘은 태국민의 종교심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불교에 자연 혼합되어 쁘라만교 등 제반 종교와 신앙의 혼합 현상을 보여 기독교의 전파를 더욱 복잡하게 하고 있다. 아울러 불교를 국교로 헌법에 규정하고 있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국교화되어 온 국민들이 불교를 이들의 국교로 신봉하고 있고 개종한 기독교인들도 불교의 가르침에 깊이 젖어 있어서 불교적인 기독교를 산출해 냈기에 진정한 기독교의 활동이 미약하여 기독교적인 신앙과 신학및 복음의 퇴색화로 무기력한 기독교로 신음하고 있다.


    2.4 태국의 기독교 상황


    태국의 기독교는 165년이나 되었지만 기독교 인구는 천주교를 포함하여 겨우 1%이며 그나마 불교적인 신앙, 자유주의 신앙,오순절적인 신앙등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어서 기독교의 혼란을 야기 시키고 있으며 불교적인 태국사회에 억눌려 있어서 담대함과 열심, 희생적인 교회 봉사와 활동이 교역자나 교인간에 공히 부족한 중에 있다. 여기에 교단 교파간의 갈등으로 협력사역이 어렵고 미 자립교회가 너무 많아 기독교 선교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교역자 양성기관의 저급으로 교회의 활성화에 큰 장애를 받고 있다. 현금 태국사회의 변화와 세계와의 호흡, 과학과 문명의 발달 등은 기존의 불교적 사회에 큰 위협이 되고 있으나 이것이 기독교의 선교 활동에 유리하게 작용 할 수도 있으나 전적으로 기독교에 유리한 것으로 작용하게 하기 위하여는 기독교의 진정한 기독교화에 있다 하겠다.


    3. 태국 선교 전략 수립에 고려되어야 할 사항


    3.1 태국과 태국인에 대하여


    (1) 유순하고 자비스러운 민족성에 적합한 전략


    (2) 느슨한 사회 성격에 부합하는 전략


    (3) 배타적인 민족성에 대한 대책


    (4) 자국민 보호적인 민족성에 대한 대책


    (5) 개인주의적인 사고에 대한 대책


    (6) 계급사회에 대한 대책


    (7) 교육열이 부족한 민족성에 대한 대책


    (8) 미신과 애미니즘, 소승불교에 대한 대책


    (9) 태국 정부의 불교 국교화에 대한 대책


    (10) 선교사 규제 조치에 대한 대책


    3.2 기독교및 선교사에 대하여


    (1) 태국민족의 충분한 이해


    (2) 태국인의 신앙 구조에 대한 이해


    (3) 기독교의 혼합 신앙에 대한 대책


    (4) 기존 선교 방법에서 오는 방해 요인 극복책


    (5) 교역자 전문훈련에 대한 연구


    (6) 성경 교육 방법 연구


    (7) 전도와 희생, 봉사적 기독교인 육성책


    (8) 태국 정부와 사회의 불교 중심적인 생활 원리 이해


    (9) 순수한 복음 전파를 위한 사역 개발책


    (10)선교단체, 선교사, 교파간의 협력 증진에 대한 대책


    (11)선교사의 목회적 경험이 풍부한 선교사의 자질 함양


    (12)선배 선교사와의 협력 할 수 있는 선교사 자질의 함양


    4. 태국선교전략 수립의 방향


    태국 선교 전략의 수립에 대한 방향은 간접 선교보다는 직접 선교 방법을 선교 전략으로 채택해야 하는바 이는 서구 선교사들이 165년간 태국에서 실시해온 간접 선교 방법의 만족하지 못한 결과 때문이다.


    4.1 교회 개척과 육성


    (1) 미 자립교회 지원 육성


    (2) 새로운 교회 개척과 육성


    (3) 목회 유 경험 선교사 파송


    4.2 전문 교역자 훈련


    (1) 목회자 후보생 발굴및 선별


    (2) 신학 교육기관의 진정한 목회자 양성 기관으로의 개선


    (3) 신학 교육기관의 교수요원 양성


    4.3 교회 음악 지도자 양성


    4.4 성경교사 양성


    4.5 30여 산족 선교 요원 양성


    4.6 주변 공산국 선교 요원(선교사) 양성


    5. 태국선교의 전망과 비젼


    5.1 태국선교의 전망


    태국선교의 결과만으로 태국 선교의 전망을 평가한다면 전망이 어렵다고 하겠으나 현지에서의 사역의 경험을 토대로 분석한다면 태국선교는 심는 대로 거둔다는 일반 원칙이 적용되고 있어서 복음을 가지고 직접 적인 선교 사역을 전개한다면 위 원칙 대로 사역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 만약에 165년간 실시해온 간접적인 선교 방법에 의존한다면 결과는 서구 선교사들이 획득한 결과만도 못한 선교 결과를 획득하겠기에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겠다. 그러나 현금에도 이런 구태의연한 선교 방법에 의존하는 사역이 계속되고 있어서 아쉬움이 있으나 직접적인 복음전파의 방법으로 정면 도전을 시도 할 때는 오히려 새로운 결과를 획득하게 되겠다.


    5.2 태국 선교의 비젼


    태국 주변국에는 불교국으로 둘러 쌓여 있고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웃하고 있다. 태국민의 민족성은 누구와도 친구로 사귈수 있기에 이들의 친구가 되고 복음을 전해주는 선교국이 될수 있는 소망이 보이고 있다. 태국의 복음화가 활성화된다면 자연 이들을 통해 이웃나라의 복음화로 연결되게 되어있다. 한국 교회의 태국 선교가 이렇게 연결될 수 있다면 한국교회의 기도처럼 공산국의 복음화를 간접적으로 성취케 되는 것이다.


    주님의 사역에는 불가능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무수한 불가능이 있다. 선교사와 이를 후원하는 교회는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 중심하여 사역자들이 하나되고 함께 동역 할 수만 있다면 주님의 사역을 더욱 쉽게 전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이렇게 된 선교지가 없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이 떨어지게 하고 있으나 나 자신부터 주님께 복종시키고 사역 할 선교지에 대하여 잘 준비한 후 조심스럽게 주어진 사역에 임하여 선배 동역자들과 협력한다면 주님의 일을 아주 쉽게 성취시킬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한국교회의 태국선교 전략수립을 위하여



    한국교회는 1956년 중반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태국에 2가정의 선교사를 태국에 파송하면서 태국선교의 문을 연후 1995년 현재 38년째 되었고 그간 태국에 파송받아 온 선교사는 100가정이 넘으며 현재 사역 중인 선교사도 60가정이 넘는다.


    그간의 역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선교사 시대(1956-1970년)


    이 시대는 태국선교의 문을 여는 시기로 최찬영,김순일,송예근선교사가 태국기독교총회(The Church of Christ in Thailand, CCT)에 파송되어 한국교회의 태국선교 기반을 놓았다.


    2. 국제선교협력기구 선교사 시대(1971-1980년)


    이 시대에는 장로교 선교사가 철수한 후 킴 선교부에서 파송한 신홍식, 김정웅선교사등 2인이 CCT를 통해 한인교회를 중심하여 교포선교에 주력한 시대이다.


    3. 한국선교사 전성시대(1981-현재)


    이 시대에는 1979년 12월 예장 합동총회의 파송을 받아 태국에 도착한 정승회선교사에 의해 태국복음주의연맹 (The Evangelical Fellowship of Thailand, EFT)과의 관계를 수립하면서 한국선교사 전성시대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는 1981- 1990년의 한국 선교사 전성시대의 기반을 닦는 시기와 1991년 이후의 한국 선교사 전성시대로 구분 할 수 있으나 전반부에는 그리 많은 선교사가 파송되어 오지 않았으나 후반부에는 우후 죽순처럼 많은 선교 단체와 선교사들이 태국에 파송받아 왔기에 한국 선교사 전성시대를 실감케 하였다. 때문에 1991년부터는 5년을 한 단위로 시대를 구분해야 할 단계에 놓여 있다.


    이 시대에 특기 할만한 사항은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The Korea Presbyterian Mission in Thailand)가 1980년에 완벽한 선교단체를 태국현지에 설립하여 한국교회의 태국선교의 기반을 굳게 놓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시대에 킴 선교부 (The Korea International Mission)가 태국 현지에서 산화되었고 이 여파로 많은 군소 단체가 자연 발생하여 한국 선교사 전성시대에 걸맞게 복잡한 선교 양상을 띄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복잡해지고 있는 한국교회의 태국 선교를 성공적으로 진행시키려면 이에 상응하는 선교 전략이 필요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교회는 교회개척과 육성에 특별한 달란트를 지니고 있기에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이 교회 개척과 육성 분야에 사역하게 되었는데 이 분야의 전략이 필요함으로 태국교회의 토착교회 설립을 위한 선교전략을 구상해 보기로 하겠다.


    1. 태국의 일반적인 배경


    1.1 태국의 일반적인 개괄


    태국의 역사와 민족, 사회와 문화, 종교와 신앙적인 배경을 고찰해 보면 태국민의 유래가 확실하지 않을 뿐아니라 적어도 몇 종족이 혼혈된 민족임을 즉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민족적인 면에서부터 기독교 선교전략의 다양성의 필요를 예시하고 있다.


    태국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13C의 수코타이 왕국()으로 부터 시작되어 아유타야 왕국()으로 이어진 후 톤부리 왕국()에 이어 현재의 랏따나꼬씬 왕국()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특히 태국인의 정신사를 지배해온 불교는 쁘라만교와 함께 태국 건국이전부터 이 민족의 유일한 신앙이었으며 4개의 왕국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강화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천주교는 아유타야 왕국시대에 태국에 전래되어 400년이 되었고 개신교는 랏따나꼬씬 왕국시대에 전래되어 165년이 되었다.


    태국의 사회 구조는 수팟뜨라교수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 느슨한 사회 (2) 변화가 적은 사회 (3) 농촌 사회 (4) 예절과 풍습을 기초로한 사회 (5) 저 교육 사회 (6) 고향지향적 사회 (7) 계층사회등의 구조이고


    태국인의 가치관은 (1) 개인 숭배 (2) 어른 공경 (3) 주인을 높이고 (4) 부모의 은공을 높이고 (5) 쾌락주의 (6) 편의주의 (7) 편안주의 (8) 물질주의 (9) 자유주의 (10) 개인주의 (11) 예식주의 (12) 중용주의 (13) 쉽게 잊음 등의 가치관에 의한 생활과 풍습을 이루고 있어서 기독교의 복음 전파에 장애물만 가득한 형편이다.


    태국의 종교적 상황은 불교 87.79%, 이스람교 4.345%, 기독교 0.965%,쁘라만-힌두교 5,000명정도와 약간의 씩크교도가 있으며 여기에 미신과 귀신등이 혼합 되어있어 제 종교가 혼합 종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태국에서의 15년의 세월을 회상하며



    1994년 2월 어느 날 기독신보사의 선교 간증문 게재의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이를 단번에 거절하였다. 내가 총회 내 태국 선교사중에서 선두주자인 것이 사실이지만 남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를 엮을 만한 재질이 없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독신보사의 설명을 들은 후 나의 사역의 실수를 후배들에게 들려줌으로 그들이 나와 같은 수고를 하지 않고 좀더 쉽게 그리고 바르게 사역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욕망이 생겼고, 후원회의 지원을 받아 태국 선교전략에 관한 논문을 몇년전에 쓸때에 논문에 다하지 못한 말도 있고 해서 그저 되는 대로 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후 7개월간 30회에 걸쳐 반 강제적으로 간증문을 마치면서 이런 강제적인 기회가 아니었으면 그나마 이런 글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을 생각하니 기독신보사에 감사한 생각이 앞선다.


    그리고 15년동안 생명을 다해 이곳 선교를 지원해주신 교회들에게 감사한 생각이 새롭다. 특히 최초의 파송교회인 왕십리교회(오치용목사)와 현재의 파송교회인 성현교회(이종영목사)를 비롯하여 100여 후원교회에 감사하며, 이의 뒷바라지를 위해 기도로 동역해주신 아버님 정영규장로님과 어머님 최공순 권사님의 후원, 그리고 누나 정정희집사, 동생 정회열집사의 희생적 후원에 특별히 감사하고 싶다.


    이 미숙한 간증들이 후배 선교사들과 우리 총회의 해외선교 전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을 뿐이다.


    끝으로 미숙한 나를 갑자기 부르셔서 선교사로 써주시고 이 만큼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책임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머지 15년간의 세월도 전적으로 주님께 맡김니다.


    1995년 1월


    선교사 정승회

     

     

    출처 : http://www.missionthailand.net/thaimission/thaimission2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