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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교회사를 통한 교훈 본문
태국교회사를 통한 교훈
Prepared by the Office of History
for the Korean Missionary Meeting
October 1995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시암(siam)에 도착한 것은 1828년이었다. 첫 번째 교회는 1837년에 창립되었으며 방콕지역을 벗어나 선교본부가 펫부리 장로교 시암선교부에 의해 설립된 것은 1861년 이었다. 개신교 선교는 1867년을 기점으로 태국의 북부 지방으로 진출하기에 이른다. 개신교 선교는 이 시점으로부터 제 2차 세계대전까지 지속적인 확장을 이루었다. 1960년대까지의 태국 내 개신교 선교사역은 대부분 미국장로교 선교부에 의한 것이었다. 분명히 다른 선교단체들 - 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the American Baptists, the British church of Christ, and 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 역시 전쟁 발발 전부터 사역을 했었다. 이외에도 많은 선교단체들이 1940년대 후반과 50년대를 걸쳐 태국 내 사역을 시작하였으나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사역은 훨씬 지배적인 것이었다.
이제 우리가 오늘 발표를 통해서 여러분과 나누기를 원하는 것은 미국 장로교의 경험적 교훈들의 일부이다. 특별히 우리가 반드시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요한 세 가지 교훈이 있다. 그 교훈들은 1) 태국 상황에 사역 적응 실패, 2) 태국교회에 대한 신뢰 결여, 3) 지역교회 갱신을 위한 토착적 방안 모색의 실패를 통한 것들이다.
무엇보다 먼저 개신교 선교사들이 태국에 중요하고 선한 많은 일들을 이루어놓았다는 것을 단언한다. 그들은 태국 내 기독교 전파를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했다. 그들은 학교와 병원과 교회들을 지었으며, 태국의 근대화를 이끌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선교사들의 일부는 태국 내에 상당히 오래 동안 거주했고, 태국을 아주 잘 이해하게 되었으며, 미국이 아닌 태국을 진정한 고향으로 생각하기까지 했다. 태국 C.C.T.(The Church of Christ in Thailand)는 그 실존이 있기까지 어느 다른 단체보다 장로교 선교단체에 큰 빚을 졌다. C.C.T.의 헌법은 처음에는 거의 장로교 문서였다. C.C.T.가 1934년에 창립되었을 때 거의 모든 C.C.T. 교회들이 미국 장로교 노회의 지원하에 두 개의 장로교회의 활동의 영향으로 세워진 것들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장로교 선교사들이 어떻게 태국교회를 약화시켰는가에 대해 세 가지 주요 쟁점들에 대해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그것들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 쟁점들이 아직도 태국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C.C.T.가 태국 내에 그리스도의 생명력 넘치는 사랑의 파수군의 역할을 감당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이 무제들을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
첫 번째 교훈 : 개선(적응) 실패
1880년 중반과 말기 펫부리시와 주변 3개의 교회가 아주 빠르게 성장했다. 얼마 안 되는 교인이 짧은 기간 안에 150명을 상회하는 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1890년대에는 1880년대의 고속 교회성장을 무색하게 할만큼 교인수가 빠르게 감소하였다. 결국 지방교회는 문을 닫어야했다. 활동적인 교인은 오직 선교사에게 고용된 몇 명뿐이었다.
장로교 선교사의 태국문화에 대한 사역 적응 실패는 교인 수 감소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태국 사회는 계급 사회이다. 19세기 태국 사회는 아직도 평민 보호자로서의 귀족중심사회(a patron-client society)였다. 아시아인으로서 우리가 이해하는 한 그런 사회는 개인적 관계를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필요를 채워주고 생활의 향상을 도와주는 보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초기의 태국 교회들은 선교사들과 시혜자-수혜자(a patron-client relationship)의 관계를 맺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선교사들은 상대적으로 월등히 부유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점유했다. 그들은 무상 약품 배급, 법적인 문제 해결, 그리고 노예를 위한 속전(續錢)지급 등 많은 도움을 기독교인들에게 베풀었다. 1880년대 중반과 말기의 펫부리 지역 담당의 선교사 둔랍목사는 이러한 형태의 선교를 계속해 나갔다. 그는 좋은 시혜자였다. 그는 호감이가고, 착하며, 잘 나누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펫부리 사람들이 존경하고 신뢰하고 그리고 의지할 수 있었던 바로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사랑과 친절은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다. 그의 지도아래 펫부리 교회는 활동적이고 잘 베푸는 교회였다. 둔랍목사의 동료 중 하나는 그의 사역에서 성령의 감화를 볼 수 있었다.
둔랍목사는 신병으로 펫부리 지역을 떠나야 했고, 1889년 윌리엄 멕클루어(William G. McClure)목사가 사역을 이어받았다. 새로 부임한 선교사 멕클루어는 둔랍목사를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둔랍목사가 그리스도인을 모음에 있어서 물질만능주의를 조장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펫부리의 교인들이 단지 세속적인 이익 때문에 회심했다고 단정했다. 그와 동료의 눈에 그들은 아직까지 이교도들이었다. 멕클루어는 무상 약품 배급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특별한 지원을 중단했다. 이러한 맥클루어 선교사의 조치에 대해 교인들은 강한 반응을 보였다. 일년이 지나지 않아 모든 구 교인들은 예배 참석을 중단했다. 교인들은 구가 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비난했으며 그가 교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반감을 품게 되었다. 멕클루어 선교사는 그후로도 약 16년 가까이 펫부리에 거주했으며, 교회는 아주 연약했다. 사람들은 거의 교회에 가지 않았으며 교회 역시 활동을 거의 멈춘 상태였다. 영적인 생명력이라곤 없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대부분의 시암선교부 사람들은 둔랍에 대한 멕클루어의 비난에 동의했으며 “깨끗한 교회”를 펫부리에 세우고자 하는 그의 시도를 지지했다.
펫부리의 경우는 고려해야할 많은 요인들이 있는 복잡한 경우이다. 그 중 하나는 “성품”이었다. 멕클루어는 둔랍목사가 보여주었던 사람의 마음을 끄는 사랑의 성품이 없었다. 성품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멕클루어와 교인들의 문화가 아주 달랐다는 것이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서로를 이기적이라고 힐난하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자신의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면 상대방이 분명히 이기적이었기 때문이다.
멕클루어와 같은 젊은 선교사들은 선교사가 교인들을 위한 시혜자가 되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은 기독교인은 반드시 자급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심자들은 그들의 죄로부터 진정하게 돌아섰으므로 기독교인다워야 했다. 선교사들은 교회를 같은 믿음을 가지고 활발하게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자발적 단체로 보았다. 교회는 전도와 영적인 삶의 단체이지 시혜와 수혜를 위한 사회제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교인들은 다르게 보았다. 그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회심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던 것은 둔랍목사의 사랑과 친절한 봉사였다. 그는 태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독교적 사랑을 베풀었다. 회심자들 중 몇몇은 물질적 유익 때문에 교회 출석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료 선교사들이 지적하는 것은 많은 다른 사람들이 진실하게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미국의 교회 교인들보다 더 자신을 나누는 사람들이었다. 펫부리의 사람들은 “자발적인 단체(voluntary associations)”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마치 태국인들은 왜 교리가 그리도 중요한 것인지 몰랐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개인적인 관계들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닌 영향력 있는 사람을 신뢰했다.
이것은 어느 문화가 다른 문화에 상대적으로 우월하거나 열등한 그런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어느 한 선교사가 태국인이 이해하는 방법으로 사랑의 선교를 했을 때 교회는 성장했고, 또 다른 선교사가 깨끗한 교회를 고집하면서, 교회 운영을 위해 훈련을 강조했을 때 교회는 소멸했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장로교선교부는 미국식 교회 운영을 수십 년 간 고수했다. 그들은 교회의 토착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사실 선교사들은 대부분의 태국 문화가 불교와 애니미즘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악하다고 믿었다. 펫부리 사건으로부터의 교훈은 기독교적 믿음을 태국인의 삶에 융화시키지 못한 실패가 태국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어렵게,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랑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는 기독교가 대부분의 태국인들에게 아직까지 하나의 외국 종교라는 사실을 보아 알 수 있다. 이 “낯설음-이질감(foreignness)”은 단지 우리가 예배하는 형식이나 교회 건축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그것보다 깊은 것이다. 선교사의 종교는 여전히 무의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강한 미국식 억양으로 좋은 소식-복음을 전했고,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었던 태국인은 드물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스스로 외국인이 되고자 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두 번째 실패 : 신뢰 실패
1990부터 1995년까지 5년 동안 역사연구소는 C.C.T.의 다섯 번째 치리구역인 난(Nan)에 대한 집중적인 역사적 고찰을 했다. ‘난’으로부터의 가장 강력한 교훈은 선교사들이 태국 교회 내부의 불신풍조를 조장했다는 것이다.
장로교 북부선교회와 북 라오스 선교회는 1895년에 ‘난’에 선교본부를 세웠다. 난교회는 1896년에 창립되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끈 것은 난에서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장로교선교부에서 채택한 선교전략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19세기 북부지방에서 사용하던 방법과 유사한 것이었다. 장로교선교부는 선교본부를 하나의 선교의 기본 단위로 삼았다. 본부(station)안에서는 다양한 기관들이 본부사역을 수행해 나갔다. 난에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첫 번째로 도시교회였다. 도시교회는 그 지방의 중심교회였다. 말하자면 그것은 농촌에 거주하는 신자들을 위한 하나의 “시범교회”인 셈이었다. (교회 주요 구성원으로는) 기숙학교에서 생활하면서 농촌 신자를 방문하는 학생들과 본부의 사역자들이 교회를 돌보면서 거기서 교회는 어떻게 운영되어야하는가를 배웠다. 두 번째 기관은 기숙학교들(the boarding schools)이었다. 기숙학교들은 기독교 교육의 매개였다. 어린 나이의 학생들이 농촌지역으로부터 공부를 하고자 왔다. 학생들은 읽기와 쓰기 외에도 찬송과 기도 방법과 성경 읽기를 배웠다. 선교본부 내부의 학교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도록 한 것이다. 세 번째 기관은 병원이었다. 병원은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먼저 병으로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사회봉사를 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더 중요한 기능으로 기독 병원과 모든 본부의 의료행위가 기독교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병원 사역은 복음 증거를 위한 것이었다. 네 번째 본부사역의 기관은 전도팀이었다. 그들은 농촌지역으로 여행하며 복음을 증거하며 또한 농촌지역의 교인들을 방문했다.
우리가 분명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시스템이 매우 중앙집중적 이었다는 점이다. 이 전략은 강한 농촌지역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무엇보다 먼저 강력한 구심점 확립이 필요로 했다. 구심점으로서의 선교본부(센타)는 강한 농촌교회를 세우기 위해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우리가 또한 주목해야할 것은 이러한 시스템의 중심이 다름 아닌 선교사들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계를 따라 인적 물적 자원과 프로그램 그리고 동원 가능한 모든 힘이 집중된 선교센타를 확립하고 센타를 통해서 농촌지역에 가장 효과적인 복음 전도와 원활한 농촌지역 교인 지원을 이루고자 했다.
얼른 보기에는 좋은 구조인 듯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선교사들과 도시에 근거를 두고 있는 전도자들에게 기후와 열악한 교통 여건은 많은 제약이 되었으며, 사역은 아주 느리게 진전되었다. 난(Nan)본부는 작은 규모의 본부였다. 1910년 이후 단 몇 해를 제외하고 본부는 사역을 감독할 선교사 인력의 부족으로 허덕였으며, 자원과 재정이 모두 빈약했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영역에서 아주 허약한 본부였다. 특별히 농촌 교인들을 돌아보는 일에는 더욱이 무력했다. 기독교 교육은 기숙학교들을 통해서 유지되어야 하지만 실제로 농촌 지역을 위한 기독교 교육의 혜택은 전무한 상태였다. 대부분의 농촌지역에 믿는 어린이들은 학교 출석을 해보지도 못했다. 이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성인과 어린이를 포함해서) 거의 기독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중앙 집중적 시스템으로는 교회가 예배를 드리는 일과 교회를 건축하는 것 외에 기독교 사역과 섬김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교인들에게 충분히 가르칠 수 없었다. 도시인들, 특히 선교사들이 바로 기독교 교육과 전도와 사회봉사와 교회들의 목양적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었다. 농촌지역 교인들은 자구적인 어떤 시도도 할 수 있는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어떤 실제적인 도움도 주질 못했다.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보고있는 대로 대부분의 농촌지역 교회와 소단위 모임은 영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허약한 채로 남아 있다. 그들은 거의 모든 부분을 도시 교회와 단체들에 의존하는 것을 배웠을 뿐이다.
선교사들에게 그들의 전략상 어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첫 번째로 전통적 북부 태국 사회는 계급적인 사회였으나 많은 부분 자치적 권한을 농촌 마을과 소도시들에게 부여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거점이 되는 도시에 대해 의존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인들은 각 교회의 필요에 대해 도시교회에 매우 의존적이었으며 기독교 교육과 목양의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선교사들은 교회 생활을 위한 토착적인 방안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 선교사들의 정책은 사실 방콕 정부가 정부통제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북부 태국지방에 사용했던 정책과 무척이나 유사한 것이었다. 두 번째로, 다른 접근을 한 선교사가 있었는데 그는 로버트 이르윈 목사였다. 그는 각 선교본부의 전도자들이 작은 마을에 거주하면서 기독교인 소그룹을 형성하고, 그 지역에 게속 거주하면서 그룹들을 돌아보는 지방분권적 선교제도(a de-centralized system)를 세우고자 노력했다. 그의 사역이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신병으로 난지방을 떠나야 했다. 그후 그 프로그램은 다른 선교사에 의해 진행되지 않았다. 그후 이르윈목사는 프래(Phrae)지방에서 다시금 각 교회가 자치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회를 격려하며 사역을 진행시켰으나 그는 동료 선교사들의 회의에 찬 태도와 비 협조에 부딪히고 말았다.
본부 중심적 제도는 장로교 선교부에 의해 전 태국에 걸쳐 시행되어졌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 제도를 선교 사역의 유일무이한 대안처럼 받아들였다. 그들은 지방분권적 전략이 실효를 거두리라는 사실을 부인했다. 왜였을까? 그 이유는 선교부가 농촌 소모임 혹은 태국인들이 그들의 조직을 잘 운영하리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순수성과 운영의 효능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들 스스로가 사역을 감독해야 한다고 믿었다. 1915년 북부지방의 선교사들은 북부지방의 태국인교회들이 오는 50-100년 안에는 자치적 능력을 배양하기 어렵다고 기술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태국교회가 자립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그 불신은 선교사들의 사역의 제도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솔직하게 말해서 선교사들의 불신은 태국 내의 사역 속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19세기 서구의 민족적 우월감에 기초한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들은 미국의 국가적 우월감을 고취시키는데 많은 학문적 공헌을 했으며, 미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선교사들을 포함한 거의 모든 미국인들이 서구의 문명이 최고의 문명이라 믿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방법과 조직이 태국인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믿었다는 것은 놀랄만한 사실이 아니다. 그들이 태국인들이 스스로를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말이다. 오늘날 C.C.T.가 안고 있는 문제는 불신의 산물인 교회에 대한 것이다. 교회들은 약하며, 사역을 하기에는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사역이 자신들의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연약함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으나 과거에 형성된 구조들이 불신의 기저로 하고 있다는 것이 하나의 요인이다.
세 번째 교훈 : 반복되는 같은 실수
세 번째 부분에서는 다른 문제들을 간단하게나마 논의하고 싶다. 이것은 선교사들에 의해 발생될 문제는 아니다. 태국교회에 내부의 연약함에 대해서이다. 태국인 학자들은 왜 태국인들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임에 있어 그토록 나약하고 무비판적인지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권위자와 연장자에 대한 존경을 토대로 태국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비판적인 성향이 없는 사회이다. 그래서 태국교회의 교인들은 선교사들이 옳다고 말하고 실행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받아들이려 해왔다. 싫은 것이 있다고 해도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교인들은 인내를 가지고 그것들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기독교를 떠났다. 이것이 모든 개인에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사실이다. 오래전 북부 지방의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이런 말을 쓰곤 했다. “lao ta pho kru(레오 떼 퍼 크루)” 말의 의미는 이렇다. “무엇이든지 선교사님이 원하면 하지요” 펫부리의 경우에서 본 것과 같이 교인들이 책임을 맡고 있는 선교사와 불화하게 되면 그들은 뭔가를 바꿔보려 하기보다는 단지 교회를 떠났다. 그것은 충돌과 대결을 극소화했다.
왜냐하면 태국 사회는 무엇이든지 맞서는 성격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선교사들에 의해 태국교회 내부에 세워진 제도와 태도들은 게속적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왔다. C.C.T.의 영적 부흥 운동(revivalism)의 역사가 바로 한 예이다. 근대적인 부흥운동은 1920년 중반에 시작되었다. 그것은 직접 미국으로부터 유입되었으며, 버마와 중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입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까지 선교사들에 의해 많은 약한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교회들은 새로워져야하고 소생되어야 했다. 태국교회는 서양과 중국의 부흥운동의 여러 형태를 교회의 재건의 방편으로 도입하였다. 1930년 존 송 박사의 부흥운동을 통해서는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C.C.T.교회들은 대단한 열심히 도전적인 전도활동을 펴기 시작했다. 2차 대전 후 C.C.T. 의장 푸앙 아카핀은 1950년대 수년동안 전국적인 부흥운동을 주도했다. 1959년에 얼크레시 박사에 의한 조사보고에 의하면 아직도 많은 수의 교회가 침체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이 약 30년여간의 집중적인 부흥운동 후의 상황이었다.
우리는 그 영적 부흥운동이 많은 점에서 선교사들의 사역과 유사한 성격이 있음을 발견한다. 먼저, 부흥운동은 태국의 상황에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부흥집회에서는 공개적으로 자기 감정 표현을 한다. 태국 사람들임은 분명하지만 일반적으로 태국 사람들은 자신의 가정이 조정되고 억제된 형태로 표현한다. 태국인 사회에서 강한 감정표시는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이며 격한 감정표현을 꺼려한다. 송(song)박사가 태국인들의 커다란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 냈던 것은 사실이나 그의 사역은 예외적으로 상당히 개인 지향적이었다. 송박사 이외에 아무도 이제까지 그런 정도의 영향을 태국 사회에 미칠 질 못했다. 북미의 선교사나 한국 선교사들은 종종 그들의 설교에 대한 태국인들의 반응에 실망한다. 청중은 조용하며 신사적이지만 감정적 반응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부흥운동이 지역교회나 소그룹으로부터 시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농촌교회의 부흥 집회는 항상 방콕이나 치앙마이 혹은 인접 대도시에서 온 외부인에 의해 치뤄졌다. 부흥 운동은 도시에서 시작되서 농촌지역으로 전파되어진 것이다. 어느 정도 부흥집회는 농촌 지역 교인들에게 일종의 흥미나 관심거리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일련의 활동은 결코 교회의 갱신을 가져오지 못했다. 교회들은 부흥운동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허약한 채로 남아 있다.
부흥 운동은 종래의 선교사 사역의 맹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결코 태국 상황이나 문화에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앙집중적인 활동들이었다. 농촌지역 교회는 일련의 부흥집회에 의해 새로워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교회는 그 부흥운동을 계획해 나갔다. 몇몇의 C.C.T.의 핵심 간부들이 이 사역을 이끌었다. 2차 대전 후의 선교사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왜 교회들은 그렇게 낡은 관념과 방법들을 추종해 나갔던가? 우리가 거론했던 것과 같이 부분적인 대답으로는 그것이 태국문화의 성격이라는 것이다. 태국인은 그들이 존경하는 것을 충분한 질문과 분석 없이 받아들인다. 태국인은 조직이나 신앙 교리보다도 사람에게 의존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 대부분의 C.C.T.교회 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초기 선교사 당대부터 전해진 전통과 체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한다. 태국인으로서 우리는 이 체계가 많은 힘과 더불어 이러한 연약함 또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태국인들은 개혁하거나 갱신을 원하지 않는다. 태국에서는 오래된 절을 보수하는 것보다 새로운 절을 짓는 것을 선호한다.
결론
우리가 태국교회의 미래를 볼 때, 이 세 가지 쟁점들이 모든 교회를 위해 중요한 것임을 안다. 첫째로, 태국기독교인들은 불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에게 지속적인 증거 사역을 해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태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바르게 전달해야할 것이다. 두 번째로, 태국인들은 진정으로 지역교회들을 강화할 수 있는 사역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지역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영광됨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끝으로, 태국인들은 자국민교회에 적합한 체계와 전통을 어떻게 바르게 창출해야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이 모든 일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단지 태국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우리 민족에게 증거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출처 : http://www.missionthailand.net/thaimission/thaimission1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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