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펌) 기독교의 탈을 쓴 악마? 삽시간에 퍼진 책 본문
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편집자말] |
"여사님 그만 앉으세요." "저는 괜찮아요." 안쓰러워하는 조화순 목사의 말에 집주인 공덕귀 여사(윤보선의 아내)의 대꾸였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전국의 도시산업선교와 특수선교 실무자들을 초대했다. 정부와 중앙정보부의 탄압에 시달리던 조지송, 조화순, 권호경, 정진동 등 사회선교 관계자들은 이날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윤보선은 유신시대 말기인 1978년 1월 4일 자신의 집에 사회선교 실무자들을 불러 위로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저녁을 먹고 자리를 파한 이들이 권호경 목사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밤늦게 이야기꽃을 피운 이들은 단잠을 잤다.
기업가들에게 복음서 같았던 그 책
그렇게 윤보선 전 대통령의 초대로 기운을 낸 이들이 다시 모임을 가진 것은 불과 사흘 만이었다. 회의실에 모인 이들의 테이블에는 신문이 한 부씩 있었다. 1면 하단에 대문짝만한 책 광고가 눈에 띄었다. 광고를 본 이들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산업선교는 무엇을 노리나?> 홍지영이 지은 이 책은 도시산업선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기업가들에게는 복음서나 다름 없었다. "산업선교 때문에 골치를 앓고 계시는 기업주는 속히 이 책을 읽어보세요"라는 문구에 이어 도시산업선교를 악마화했다.
"생산력을 마비시키고 노사 간의 대립을 조장시키며 계급투쟁의 격화를 노리는 맹랑한 일들이 나라 안팎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바로 '산업선교'라는 간판을 내세운 일부 목사·신부들의 의식화 작업이 곧 그것입니다."
▲책 광고홍지영 책 <산업선교는 무엇을 노리나?> 광고 ⓒ 주간 시민관련사진보기
홍지영은 이 책에서 도시산업선교회와 공산당을 등치시켰다. 결론적으로 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들을 악마로 묘사했다. 금란출판사에서 1977년 11월에 펴낸 이 책은 정가 600원이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전국 주요 일간지에 대문짝만한 광고를 실었다.
단체주문이 쇄도했다. 단체주문은 주로 국가기관과 기업체에서 했다. 이 책의 출판 과정에서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가 깊숙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은 여기저기서 제기됐다.
전 KCIA(중앙정보부) 직원으로 알려진 홍지영은 <산업선교는 무엇을 노리나?>에서 "산업선교란 공산당 간접침투 전략으로서 KGB(국가보안위원회)를 통해 WCC(세계교회협의회)를 매개로~ 산업선교회는 공산당 전략에 따라 노동 사회에 침투한 용공 세력"이라고 규정했다.
사실 이 책은 유상판매된 것이 아니라 수십만 부를 무상으로 배포했다. 이 책은 정부의 적극적인 권장으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경상남도 조병규 지사가 1978년 3월에 도내 주요 단체에 보낸 '안내 말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산업선교는 무엇을 노리나?>는 숙독하여 본즉 들은 것보다 훨씬 좋은 책입니다. 산업선교라는 괴물이 여러분과 근로자들의 틈새를 스며드는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하겠으며...."
홍지영의 글은 한국노총을 통해 노동계에도 조직적으로 배포됐다. 1978년 4월 20일, 전국금속노동조합이 각급 지부장에게 보낸 공문에는 "본 노조 산하에도 과거 일부 사업장에 종교 세력이 침투해 혼란을 야기시켰으나 (중략)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홍지영 <이것이 산업선교다>라는 책자를 전 조합원이 구독, 종교단체가 과연 어떤 단체인가를 인식시켜 사전 침투 방지에 대비코저 합니다"라고 적혔다(영등포산업선교회 40년사 기획위원회, <영등포산업선교회 40년사>).
유신 시대 말기인 1978년 새해가 밝았지만 한반도 땅은 꽁꽁 얼어붙었다. 그런 와중에도 민중들의 '인간 선언'은 꿈틀거렸다.
환풍기조차 없는 화장실
▲농성장에서 발언하는 신흥제분 노동자. ⓒ 청주도시산업선교회관련사진보기
버스에서 내린 김병하는 청주고등학교 교문 옆의 부동산 간판을 발견했다. '아! 저기구나' 반가움이 왈칵 밀려왔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어서 오세요" 정진동의 인사에 마음이 따듯해졌다. 그곳에는 먼저 온 손님들이 있었다.
신흥제분 노동자들이었다. 퇴직금을 받지 못한 그들의 하소연을 들으니 동병상련의 마음이 들었다. 연탄난로 위의 노란 주전자에서는 보리차가 '쉭쉭'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다.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신 김병하는 얼어붙은 마음속 응어리들을 정진동에게 풀어냈다.
당시 서부교회에 다녔던 김병하는 주일예배 보는 것이 가장 큰 고역이었다. 회사 조광피혁에 휴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실한 크리스찬이었던 그는 주일예배를 빠질 수 없었다. 그러자 사측에서는 그에게 강한 질책을 했다.
"왜 일요일에 출근하지 않는 거요!" "일요일은 당연히 쉬는 거 아닙니까?" "대한민국에 그런 법이 어딨어!" "근로기준법에 있습니다." 말이 막힌 관리자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근로기준법을 운운하는 김병하에게 대꾸는 하지 못했지만 '이놈 두고 보자'며 앙심을 품었다.
회사 측에 찍힌(?) 김병하는 그날 이후 관리자들의 집중적인 감시를 받았다.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1966년 설립된 조광피혁은 모피 및 가죽 생산 제조업체다. 조광피혁의 노동환경은 청주공단에서 가장 열악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가죽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공해는 숨쉬기가 힘들고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대부분의 노동자가 만성두통으로 고통받았다. 하다못해 조광피혁 인근을 지나가는 이들조차도 숨을 쉬지 못하고 구토를 할 정도였다. 주변의 공장 노동자들도 민원을 놓기 일쑤였다. 그러니 정작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남들에게는 이야기조차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도 있었다. 김병하가 변소(화장실)에 갔을 때다. 당시 재래식이었던 변소에는 구더기가 꼬물꼬물 기어 다녔다. 큰일을 보다 보면 어느새 천장에 있던 구더기가 떨어져 머리와 입에 달라붙기도 했다.
김병하와 동료들은 화장실에 환풍기 설치를 요구했다. 관리자는 '픽' 웃으며 대꾸조차 안 했다. 결국 김병하가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조광피혁 변소에는 환풍기가 설치되지 않았다. 1970년대 청계천 피복공장에 환풍기가 설치되지 않았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그 후 김병하는 경기도로 부당 전출됐다.
밥을 끊다
▲동일방직 똥물 사건회사측 구사대가 여성 노동자들한테 똥물을 뿌린 사진 ⓒ 동일방직노조관련사진보기
"똥을 먹고 살 수는 없다." 1978년 2월 21일 쟁의 중인 조합원들에게 일명 구사대(求社隊)가 똥물을 뿌렸다. 구사대는 고무장갑을 끼고 양동이에 똥물을 담아 노동조합으로 향했다.
똥물을 들고 간 불청객들은 노조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여성 노동자들에게 똥물을 뿌렸다. 심지어 고무장갑으로 똥을 움켜쥐어 여성 노동자의 얼굴과 옷에 칠하기도 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노동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은 철면피 같은 행동이었다.
1978년 민주노조운동 탄압의 상징적인 사건인 인천 동일방직 '똥물 사건'이었다. 전국의 도시산업선교 실무자들이 모였다. "올해 노동절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치릅시다." 전국에서 동일방직 사건을 알리고, 자본가의 반인륜적 행태를 고발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홍지영의 책을 빌미로 도시산업선교회를 탄압하려는 정부와 중앙정보부의 행태를 폭로하려는 뜻도 포함됐다.
서울집회에 이어 3월 14일 대전에서 노동절대회가 열렸다. 3월 17일 청주고등학교 옆에 있는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사무실에서 노동절대회가 열렸다. 이날의 강연자는 문동환 목사였다. 문익환 목사의 친동생인 문동환(1921년생)은 당시 한신대학교 교수였다.
문동환은 "민중이 이 땅의 주인입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정당합니다. 하나님은 늘 여러분 편에 계십니다"라는 강연을 했다. 기업주의 큰소리에 주눅 들어있던 신흥제분 노동자들과 조광피혁 김병하가 어깨를 죽 폈다.
노동절 집회 후 청주산선 정진동과 조순형, 조광피혁 김병하, 신흥제분 노동자 5명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벽에는 세로로 쓴 벽보가 내걸렸다.
"조광피혁은 부당전출시킨 김병하를 즉각 복직시켜라" "반사회적 신흥제분은 평생 일한 근로자들의 퇴직금을 즉각 지급하라" "노동청과 수사기관은 근로자들의 원한을 속시원히 해결하라" 그렇게 시작된 단식농성이 150일이나 지속될 줄은 당시에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농성장은 만원(滿員)
▲농성참에 참여한 여성들. 앞줄 가운데가 농민 박창우 아내. ⓒ 청주도시산업선교회관련사진보기
농성장에 세 번째 합류한 이는 농민 한천동(1943년생)이었다. 방서동에 사는 그는 국유지인 땅을 불하받아 3년간 농사를 지었다. 등기를 내고 경지정리 분담금까지 낸 상태였다. 한천동이 불하받은 땅은 문전옥답이 아니라 청원군 남일면 평촌리 무심천 변의 모래 자갈땅 약 10마지기(2013평, 6642㎡)였다. 그런데 누군가의 모함으로 불하(拂下)가 취소됐다.
그냥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골재채취를 한 것이 문제가 됐다. 그 땅에 흑심을 품은 이가 "한천동이 불하받은 땅에서 농사를 짓지 않고 골재 채취한 모래와 자갈을 팔았다"며 민원을 제기했다. 즉 농사 대신 골재채취를 통해 이득을 취했다고 청주시 관계부서에 고발한 것. 땅을 빼앗긴 한천동이 소송을 제기해 대법원까지 갔지만 끝내 패소했다. 나라로부터 땅을 빼앗긴 한천동이 청주산선 농성장에 합류한 것은 3월 18일이었다.
농성장에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감시하는 경찰병력도 늘어났다. 새카만 제복을 입은 전투경찰과 점퍼를 입은 사복형사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사무실 입구까지 빽빽하게 서 있는 경찰들로 인해 시민들 접근이 어려웠다.
목마른 이가 우물을 판다고, 억울한 사연이 있는 이들은 경찰의 철통같은 경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둘 농성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이번에 찾아온 이는 몸빼바지를 입은 여성과 분노에 찬 남성이었다. "형수님. 여기 앉으세요." 형수와 같이 온 시동생은 청주 남일면에서 왔다. 이들이 풀어 논 이야기 보따리에도 기가 막힌 사연이 있었다.
몸빼바지를 입은 여성의 남편 장월룡은 청주 가덕면의 신아무개로부터 당 3마지기(600평, 1980㎡)를 구매했다. 그런데 신씨는 등기를 내주지 않았다. 장월룡은 가덕면 인차리로 새벽에 신씨 집을 찾아갔다. 땅 등기를 내달라고 했다. 하지만 언쟁 과정에서 장월룡은 신씨로부터 몰매를 맞아 죽임을 당했다.
하루아침에 가장을 잃은 장씨 가족들은 청주경찰서에 고발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황당했다. "빨리 장례식 치르지 않으면 모두 구속시키겠다!"는 협박. 신씨의 집안에 막대한 권력을 가진 이가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도둑장가 가듯 장례를 치른 장씨 가족의 가슴앓이는 시간이 갈수록 악화했다.
그런 마음의 병을 간직한 채 장월룡의 딸 장순자와 가족들이 단식농성에 합류한 것은 3월 23일이었다. 이들 이외에도 가슴에 한이 맺힌 이들이 농성장에 합류했다. 대성여객 버스에서 하차하다 안내양의 실수로 사고를 당한 박성세와 사촌에게 땅을 빼앗긴 박창우다.
▲농성에 참여한 정진동 장인(앞줄 오른쪽 한복 입은 이).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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