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펌) 6.25 사변과 마산 전투 본문
방어선을 구축한 미군 전차와 병력들. 창원시 마산회원구 중리역 인근으로 추정된다.[1]# 옆의 하천은 광려천으로 제방 공사를 하기 전에는 저런 모습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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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시기에 마산의 북쪽에서 벌어진 다부동 전투와 학도병의 활약 등을 소재로 몇 번 영화화되어서[3] 인지도가 있는 포항, 영천 방면 전선에 비해서, 비교적 국지적이었고 덜 알려졌지만 못지 않은 중요성을 지녔던 전투이다. 마산과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생각해보면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북한군 제6사단의 우회기동을 놓친 미 8군은 마산 일대에 방어 병력을 배치해 놓지 않았다가 뒤늦게 6사단의 기도를 파악하고 나서야 달성군 일대 전선에서 미 25사단을 빼내 부랴부랴 마산 방면으로 전환했는데, 당시에는 도로망이 정비된 현재와 다르게 대구로 일단 집결한 후 철도로 밀양을 거쳐 삼랑진의 낙동강철교를 통해 우회해야 했다. 5번 국도는 당시에도 존재했으나 비포장 우마차로였던데다가, 낙동강 도하지점인 창녕군 남지읍에는 백사장만 펼쳐져 있고 다리가 없어서 나룻배로 건너는 곳이었기에 대규모 병력과 물자 이동은 불가능했다. 특히 전쟁 발발 직후 한반도에 급속 전개된 주일미군은 대규모 도하작전이 가능한 장비도 그다지 없었다.[4] 이 때문에 미 25사단이 아슬아슬하게 마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령부 안팎으로 낙동강 방어선이 그대로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기도 했다.
북한군은 서울 점령 이후에 퇴각하며 지연전을 벌이는 국군과 미군을 상대로 가열찬 추격전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방호산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6사단(제1 · 13 · 15연대)은 1개 모터사이클연대(제83모터싸이클연대)와 함께 서해 방면의 국군을 계속 추격하면서 목포 · 여수를 점령하고 마산을 점령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한편 미 제8군은 7월부터의 후퇴 과정 도중, 북한군 제4사단과 제6사단, 2개 사단의 행방을 놓친 상태였다. 미군은 7월 31일에서야 포로 심문과 감청을 통해 6사단의 마산 점령 기도를 포착했다. 마산 전투를 통틀어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미 8군은 마산으로의 우회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당장 마산에 투입할 예비대가 없어 전선에서 병력을 빼와야 할 판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북한군 6사단이 여수와 목포를 점령하느라 2일을 지체했다는 점이었다. 워커 장군이 말했듯이 "만일 북한군 제6사단이 호남의 항구를 점령하는 우회공격을 선택하지 않고 모든 전력을 집중해 부산을 향해 쇄도해 왔다면 아마 나는 이 적을 저지하기 위한 병력을 투입할 시간적인 여유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마산에는 미 제24사단 예하 제19연대, 제29연대, 제25사단 예하 제27연대 등 3개 연대의 미군 병력과 국군 민기식 대령, 김성은 중령이 이끄는 민 부대와 김 부대[7]들이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전력이 약화된 상태라서 6사단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되었다. 실제로 이들 중 2개 연대는 예하에 2개 대대씩만을 보유했을 정도로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어쨌든 미 제24사단 등은 25사단이 마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마산 방어를 맡아야 했다.
이 전투 이후에도 북한군은 괘방산을 점령하고 미 제19연대 1대대와 국군 제7보병사단(민기식 부대 일명 민 부대) 사이로 침투하여 박격포진지를 공격했다. 공군기의 오폭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백병전이 펼쳐졌지만, 19연대 1대대는 괘방산의 북한군을 몰아내어서 우측방의 위협을 제거했다. 또한 연대 예비였던 2대대가 침투한 북한군에 대한 역습을 감행하여 이들을 격퇴시켰다. 8월 2일 오후가 되면서 북한군의 공격은 중단되었다.
한편 길버트 체크(Gilbert Check) 중령이 대대장으로 있던 미 제25사단 예하 제27연대 예하 1대대에도 위력정찰 명령이 내려졌다. 셔먼 전차 4대와 1개 포대(제8야전포병대대 A포대)를 증원받은 1대대는 8월 2일 04시에 정찰을 개시했다. 이들은 무촌리[9] 인근 노변에서 잠자던 약 30명의 북한군을 기습했고 대부분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09시가 지났을 때 정찰대는 무촌리를 지났는데, 정찰기로부터 적 차량이 진주고개에서 철수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찰대는 진주고개에서 전차를 앞세우고 국도를 따라 공격했지만, 대전차포 사격으로 2대의 전차가 돈좌되었다. 이에 증원받은 포대로 대전차포를 침묵시켰고, 그 와중에 19연대를 우회하여 내려온 북한군이 후방에서 사격을 개시했다.
미 제27연대장 존 H. 마이켈리스(John H. Michaelis) 대령[10]은 다른 곳에서도 들어온 보고들을 종합하여 북한군 제6사단은 장군대산 고개에 있으며, 체크 대대를 공격하려 한다고 판단했으며, 17시에 제27연대 1대대에게 위력정찰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니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철수 명령을 받은 1대대 정찰대는 항공기의 엄호와 포병의 지원 하에 돈좌된 전차들을 견인하여 3일 새벽 1시에 27연대 본부가 있는 진동초등학교에 도착했다. 대대장 체크 중령은 이 전공으로 십자훈장을 수훈했다.[11]
미 제25사단 27연대장 존 H. 마이켈리스 대령은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사격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태연히 A중대장에게 북한군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중화기의 엄호사격 하에 A중대는 북한군을 격퇴 했다. 또 인근 고지 정상에서 미군은 차량에서 하차하는 대규모의 북한군을 발견했는데 이들은 마산으로 진격하려던 북 제6사단 1연대 소속의 1대대였다. 미 제8포병대대가 이들에게 포격을 가해서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체크 대대는 이 전투로 13명이 전사하고 40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확인된 북한군의 사체는 600여구에 달했다.
진동초등학교 전투 상황은 27연대에서 종군하다 직접 전투를 경험한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의 비망록 'War in Korea'(8장 'STAND OR DIE')에 생생하게 기술되어 있다.
김성은 부대는 8월 3일, 경남 진동리 서쪽 고사리에서 전진해오는 적 대대 규모 병력을 공격하여 전차 2대 트럭 4대 등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무전기 고장으로 사령관에게 보고는 하지 못했고, 진동리를 차단한 것으로 판단한 부대장은 함안으로 출발하여 8월 4일 13시 40분에 도착했다.
이 전공으로 김성은 부대는 8월 5일부로 국군 사상 세번째로 부대 장병 전원이 1계급 특진을 하였다.#[12]
8월 6일, 김성은 부대는 미 제25사단 제27연대에 배속되었고 야반산[13]을 공격하여 탈취했다. 다음날 마산으로 이동하여 집결하였다.
전투 이후 다시 진동리 지역으로 이동하여 방어임무를 수행했다.[14]
한편 북한군 제6사단도 제105전차여단 예하 제83모터사이클연대를 증원 받았다.
8월 6일, 25사단장 킨 소장의 이름을 딴 킨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Kean)가 편성되었는데, 이 임무대에는 미 제25사단에 제5연대전투단, 제1해병여단, 제89中전차대대, 해병 제1전차대대가 배속되었다. 임무대의 목표는 마산에서 출발하여 진주로 향하는 3개 도로를 타고 진격하여 진주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미 제25사단 35연대가 북쪽 도로를 타고 공격하며, 제5연대전투단이 진주고개를 공격하고, 제1해병여단이 진주 남동쪽을, 미 제25사단 24연대(민기식 부대 · 김성은 부대 · 경찰 배속)는 함안 도로를 확보하는 계획이었다. 워커 중장은 이를 위해 8월 5일부터 이틀간 항공력을 마산 일대에 집중할 것을 요청했다.
킨 임무대는 8월 7일 06시 30분에 공격을 개시했다. 미 제25사단 35연대는 항공 지원을 등에 업고 괘방산 일대의 북한군을 대파했다. 제5연대전투단은 진동리 도로를 따라 고성 방향으로 진출 했지만, 야반산에서 예하의 2대대가 포위 공격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고지를 점령한 해병 2대대는 식수를 공수 받았지만 극심한 더위로 인해 일사병 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이들은 하루 뒤인 8월 8일에 항공 지원하에 공격을 개시하여 북한군을 밀어냈다.
한편 해병 제3대대와 제24연대 제2대대는 진동리 일대의 감제고지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으나 별 진전이 없다가 3일째인 8월 9일에서야 진동리의 북한군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저항은 점차 거세지고 있었고, 35연대는 5연대전투단의 진출을 기다리기로 했다. 중앙도로를 따라 전진하던 5연대전투단은 8월 10일 야간에 기습을 받고, 11일 새벽에 공군의 도움을 받아 적을 격퇴했다. 5연대전투단은 35연대와 합류했고, 함께 진주고개로 진격했다.
8월 12일 당시 제5연대전투단은 봉암리 계곡[15]에 있었다. 철수 명령을 받은 5연대의 예하 2대대는 이미 계곡 바깥으로 물러난 뒤였지만 연대 본부와 3개 포병대대들은 아직 계곡 안에 있었다. 8월 12일 자정이 지나면서 사방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고, 5연대장은 연대가 포위 되었다고 판단하고 야간을 이용하여 후퇴를 결심했다. 연대 본부는 계곡을 빠져나왔지만 포병들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에 노출되었고, 이들은 악전고투 끝에 근접항공지원을 받고 새벽에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계곡 밖에 있던 2대대가 지원 요청을 받고 정오경에 도착 했지만 이미 전투는 끝난 뒤였다. 5연대를 증원하기로 되어 있던 24연대 3대대도 적의 공격을 받아서 이들을 지원하지 못했다. 결국 이 전투에서, 계곡에 있던 제555포병대대는 180명의 사상자와 105mm 포 8문을 상실했고, 제90포병대대 역시 190명의 사상자와 155mm 포 6문을 상실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봉암리는 이로 인해 ‘포병의 무덤’으로 일컬어졌다.
제5연대전투단과 제1해병여단이 군 예비대가 되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킨 임무대는 8월 16일에 해체되었다. 킨 임무대는 진주 탈환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임무대의 공격으로 북한군은 4,000명 이상의 병력을 손실했고 전차 13대를 상실했다.
한편 북한군은 예비 사단인 제7사단(제51연대 · 제52연대)을 8월 15일에 진주에 집결시키고 일부 병력은 통영과 여수에도 진출하였다. 또한 북 제6사단은 징집병 2,000명을 보충 받고, 마산 정면의 각 고지들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미 35연대, 24연대에 대해 각각 북 13연대와 북 15연대가 동원되었다. 35연대에 대한 공격은, 북한군이 야간 기습으로 진지를 돌파하면 포격과 폭격을 바탕으로 한 미군의 역습에 밀려나는 양상을 보였다. 며칠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13연대는 결국 8월 23일에 후퇴했다. 미 24연대는 북한군 15연대의 공격을 받았다. 15연대는 서북산 정상을 장악하고 둔덕탄광을 요새화하여 폭격에 의한 피해를 줄이는 한편 미군측의 보급로를 감제하고 후방지역도 관측했다. 수 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고, 미 24연대는 서북산을 상실하고 전투산[16]북부 일부마저 잃었다가, 미 전폭기의 집중지원으로 전투산을 수복했고, 미 제5연대가 서북산 탈환을 위한 반격에 나서서 서북산 정상을 점령했다. 양측의 집중 포격과 돌격이 반복된 결과, 서북산 정상의 주인은 8월 말까지 19차례나 바뀌었다.
최종적으로 미 제25사단은 마산 정면의 고지들을 지켜내어서 전체 작전에 큰 공헌을 했다. 8월 30일에는 군 예비로 차출 되었던 제27연대가 25사단으로 복귀 했고, 제5연대전투단이 제24사단에 배속 되었다.
북한군은 마산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면서 전차를 증원받고 제104치안연대와 제7사단을 추가 동원했다. 제105전차사단의 전차 20대와 제16기갑여단의 전차 43대를 지원 받은 6사단은 진주에 집결하여 부대 정비 및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고, 7사단은 의령 일대에 집결해 있었다. 북한군은 UN 공군의 폭격에도 남강에 수중교를 부설했고, 6사단과 7사단은 2개 도로를 따라 공세를 수행하기로 했다. 즉 6사단은 미 제35연대 1대대를 돌파하여 진주-마산도로를 따라 중리로 진출할 계획이었고, 7사단은 제35연대 2대대를 돌파하여 남지리-마산 간의 도로를 차단할 계획이었다.
8월 31일 23시 30분, 북한군은 2개 사단으로 총공격을 개시했다. 9월 1일에 북한군 7사단은 남강을 도하하여 35연대를 공격했다. 미군은 공군 지원과 VT신관을 사용하는 포격 지원을 받아 북한군을 저지 했으나, 미군 35연대 1대대와 2대대 사이의 간격이 뚫리면서 북한군의 대규모 병력이 후방 지역으로 침투했다. 35연대 1대대는 북한군의 정면 공격을 3차의 전투 끝에 저지했고, 북한군 제6사단 제13연대장 한일동 대좌가 여기서 사망했다.
한편 북한군의 공격 첫 날, 미 제25사단장 킨 소장은 워커 중장에게 8군 예비대인 27연대 2대대의 투입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킨 소장은 독단으로 마산에 있던 27연대 2대대로 하여금 35연대의 후방으로 침투한 북한군을 공격하도록 했다(후에 워커 중장은 이를 묵인했다). 이들은 폭우와 탄약 부족으로 고전하기도 했지만 9월 4일에는 침투한 북한군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특히 공중지원이 큰 역할을 했는데, 킨 소장도 “근접항공지원이 사단을 구했다”고 평했다. 25사단은 9월 1일부터 7일까지 후방지역에서만 북한군 사체 2,000여구를 매장했다. 한편 9월 8일과 9일에 쏟아진 폭우로 강의 수위가 2m나 높아짐에 따라 북한군 도하가 어려워지자, 25사단은 한 숨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25사단의 중앙을 방어했던 24연대는 방어선이 뚫리고 9월 1일에 함안을 상실했다. 공중지원을 받은 27연대 1대대가 반격을 실시하여 최초 진지를 수복하여 9월 4일에 24연대에 인계했으나 24연대는 5일 아침에 소규모 공격을 받고 다시 철수 했다. 킨 소장은 24연대의 빈번한 철수로 인해 작전에 큰 차질이 초래되었다고 24연대의 교체를 건의했지만 워커 중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군 6사단과 7사단은 해안선 일대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전투산, 서북산 일대에 포격을 집중시켰다. 9월 7일에 전투산이 북한군에게 점령되어, 킨 소장은 함안을 탈환했던 27연대 3대대에게 전투산 탈환을 명령했지만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후 24연대장 코리 중령은 공격을 일시 중단하고 집중적인 화력의 운용으로 적의 소모를 강요한 뒤 전투산을 탈환했다. 북한군은 9월 14일에 전투산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고, 24연대는 병력 소모가 심해서 철수했다.
이 공격 이후에 공세의 한계에 다다른 북한군은 공격을 자제하고 수세로 전환했다. 미 제25사단은 전투 내내 공세적인 방어로 북한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부산으로 향하는 서부 관문인 마산을 지켜냈다.
미군의 피해도 컸다. 전력이 감소된 제24사단 29연대는 임무대 편성 과정에서 해체되었다. 상술된 포병 피해를 포함해 1천여 명의 전사자와 3천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20명이 실종되었다.
당시 마산을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해군과 해병대의 중심지인 진해가 인접해 있었다는 점이 꼽히고 있다. 진해에서 이들을 빠르고 적극적으로 증편하여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이 문서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김성은 부대도 해병대다.)
상술한 바와 같이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8월 초에는 함안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는데, 서북산 루트로 탈출하지 못한 피난민 중 상당수는 의령 쪽으로 진로를 돌렸다가 8월 18일 발진한 미군 해군항공대 함재기의 기총소사에 참변을 당했다.[18] 이 곳은 "남산벌"이라고 불렸으며, 현재의 군북면 안도리 일대(위 지도의 A/29라 적힌 부분)인데 이 때문에 7월, 8월은 1980년대말까지도 군북 장터가 상당히 북적거렸다. 8월 초순에는 인민군한테 끌려갔다 생사불명이 된 사람들 집이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내고, 8월 중순에는 미군한테 포격과 폭격으로 죽은 사람들 집이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제사 준비를 하느라 장터가 북적거렸던 것이다.
특히 여항산 밑의 오곡리(새마을, 골마을) 및 사촌리 등의 골짜기 마을에는, 이 한날 한시에 제사 지내는 집이 많다. 후퇴하는 조선인민군 제6사단이 미처 피난가지 못한 장정들을 징발하여 전투에 투입하거나 노역에 동원했고, 이에 폭격에 죽거나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패잔병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어떤 주민도[19] 피난가던 도중 인민군에게 징발되어 군북에서 여항까지 노역에 시달리다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몇 몇과 함께 탈출했는데, 탈출한 사람들 외에는 모두, 전투 중 포격에 휘말려 죽었다고 한다. 일부 피난민이 명관리 뒤쪽(소어석터널쪽) 깊은 산중으로 피난갔지만 하필 그곳은 상술한 인민군 6사단 전익이 포진했던 방어산의 우측 날개 쪽으로, 이 쪽에는 인민군이 임시 보급기지를 지어놓았기 때문에 미군의 전략폭격 대상이 되었고 폭격에 휩쓸리고 말았다. 관련 증언 채집록 및 미군 문서를 살펴보면 여기 증언들이 모두 교차검증됨을 알 수 있다.
치열한 전투의 여파로 이 일대에는 불발탄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1980년대 말까지도 국민학교 방학 주의사항으로 항상 '불발탄 만지지 말고 발견하면 경찰이나 군 부대에 신고할 것'이란 내용이 따라붙었다. 실제로 1960년대 초반 군북초등학교 재학 중인 동네 아이들이 사촌리 상데미산 기슭까지 소 먹이러 갔다가, 산기슭에서 불발탄을 주운 후 폭사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포탄인 줄도 모르고 쇳덩이를 벗겨내 동네 엿장수에게 갖다주려고 무덤 상석에다 고폭탄을 두들겨댔다는 것이다.[20] 이외에도 일반인들이 나무를 하다 불발탄 뇌관을 잘못 건드려 폭사하거나 불구가 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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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면 봉암리 일대가 미군에게 워낙 출혈을 안겨주다 보니 아예 주요 전장이었던 서북산, 여항산 일대의 별명은 '각대미산'이 되어버렸다. 영어의 '갓 댐 잇[22]'이 몬데그린화된 것이다. 다만 '데미'리는 게 경남 사투리로 바위란 뜻이기 때문에 어원 자체는 확실치 않은데, 각대미산은 인근의 상데미산 이름이 미군에 의해 "저기 산 이름이 상데미라고? 갓뎀이다"라는 식으로 와전된 것으로도 여겨진다. 현재도 상데미산(661고지)의 이명으로 미군이 붙여준 이름인 '전투산(Mount of battle)'이란 이름이라든가, 사촌리와 오곡리 사이의 산 능선 이름은 '피바위능선'이라고 불리는 등 전쟁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는 지명이 많다.
현 군북역 앞에서 바라본 마산 전투의 주요 전장. 군북에서 정남방을 보면 상데미산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 모양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이게 피바위다. 앞에 보이는 동네는 동촌리(새동네)이며, 골새미산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널따란 오곡리 골짜기가 숨겨져 있다. 이 천혜의 감제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한미연합군과 북한군은 45일간 혈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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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마산회원구 무학산 정상부에는 산꼭대기부터 서마지기, 봉화산까지 능선부를 따라 교통호가 반쯤 무너진 채 남아 있는데, 이 당시 미 제24사단과 국군 해병대 등이 방어선을 쳤던 부분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교통호는 한국전쟁과 관련된 구조물은 아니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1989년 여름 당시 육군 최고위층의 지시로 후방에도 전방 수준의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공사로 진행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공사를 담당한 부대는 구 마산통합병원(현 월영마을 부지)에 위치한 39사단 예하 8358부대 1대대가 예비군과 함께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1950년 당시 이 교통호 능선 부분에서 촬영한 사진이 현재도 남아 있다. 부산독일문화원 원장 Jens-Olaf Walter 씨가 마산 전투 당시 마산에 주둔하던 미군이 찍은 사진을 기증했는데, 촬영자는 당시 미 25사단 소속 Donald L. Grovom 일병(PFC)이다.[23]
좌측 사진 정중앙에 보이는 부분이 구 일본 조선주차군의 병영 자리로, 이후 일본 육군 조선군 제20사단이 쓰다가 해방 후 국군 제15연대가 창설되었다. 1954년에는 국군의무사령부가 이 곳에서 발족했으며 1990년대까지 국군지구마산병원(마통)이 주둔하다가 현재는 월영마을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이 부대 시설은 6.25가 터지자 미 육군 24, 25사단도 사용했고 1950년대 말까지 미군이 주둔해서 구 일본인 거류지가 있던 두월동에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시장'이 생기는 배경이 됐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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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항목의 진동리 전투가 벌어진 곳에는 현재 위령비가 세워져 있으며, '진동리 전적지'라고 해서 시 당국과 해병대가 매년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해병대 블로그 기사 해당 전적비 앞으로 삼진의거대로가 지나간다.[25] 창원시 시내버스 73-1번, 75(-1)번, 76번, 77(-1)번 및 마산남부시외버스터미널 출발 진주, 통영 방면 국도경유 노선이 전적비 앞을 경유하여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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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0년대 마산에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정신의학과 전문 병원이었던 배신경정신과 병원장 배대균 선생은 현재 은퇴 후 마산 전투에 대한 미군 기록을 찾아내어 정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기사보기), 기념사업회장도 맡고 있다. 2021년 초에는 단행본으로 자료 일부를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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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년 6월 6일 현충일, 이 날 취재가 YTN에도 보도되었는데 상술한 배대균 선생의 인터뷰도 포함되었다. #YTN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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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시기에 마산의 북쪽에서 벌어진 다부동 전투와 학도병의 활약 등을 소재로 몇 번 영화화되어서[3] 인지도가 있는 포항, 영천 방면 전선에 비해서, 비교적 국지적이었고 덜 알려졌지만 못지 않은 중요성을 지녔던 전투이다. 마산과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생각해보면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북한군 제6사단의 우회기동을 놓친 미 8군은 마산 일대에 방어 병력을 배치해 놓지 않았다가 뒤늦게 6사단의 기도를 파악하고 나서야 달성군 일대 전선에서 미 25사단을 빼내 부랴부랴 마산 방면으로 전환했는데, 당시에는 도로망이 정비된 현재와 다르게 대구로 일단 집결한 후 철도로 밀양을 거쳐 삼랑진의 낙동강철교를 통해 우회해야 했다. 5번 국도는 당시에도 존재했으나 비포장 우마차로였던데다가, 낙동강 도하지점인 창녕군 남지읍에는 백사장만 펼쳐져 있고 다리가 없어서 나룻배로 건너는 곳이었기에 대규모 병력과 물자 이동은 불가능했다. 특히 전쟁 발발 직후 한반도에 급속 전개된 주일미군은 대규모 도하작전이 가능한 장비도 그다지 없었다.[4] 이 때문에 미 25사단이 아슬아슬하게 마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령부 안팎으로 낙동강 방어선이 그대로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기도 했다.
북한군은 서울 점령 이후에 퇴각하며 지연전을 벌이는 국군과 미군을 상대로 가열찬 추격전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방호산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6사단(제1 · 13 · 15연대)은 1개 모터사이클연대(제83모터싸이클연대)와 함께 서해 방면의 국군을 계속 추격하면서 목포 · 여수를 점령하고 마산을 점령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한편 미 제8군은 7월부터의 후퇴 과정 도중, 북한군 제4사단과 제6사단, 2개 사단의 행방을 놓친 상태였다. 미군은 7월 31일에서야 포로 심문과 감청을 통해 6사단의 마산 점령 기도를 포착했다. 마산 전투를 통틀어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미 8군은 마산으로의 우회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당장 마산에 투입할 예비대가 없어 전선에서 병력을 빼와야 할 판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북한군 6사단이 여수와 목포를 점령하느라 2일을 지체했다는 점이었다. 워커 장군이 말했듯이 "만일 북한군 제6사단이 호남의 항구를 점령하는 우회공격을 선택하지 않고 모든 전력을 집중해 부산을 향해 쇄도해 왔다면 아마 나는 이 적을 저지하기 위한 병력을 투입할 시간적인 여유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마산에는 미 제24사단 예하 제19연대, 제29연대, 제25사단 예하 제27연대 등 3개 연대의 미군 병력과 국군 민기식 대령, 김성은 중령이 이끄는 민 부대와 김 부대[7]들이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전력이 약화된 상태라서 6사단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되었다. 실제로 이들 중 2개 연대는 예하에 2개 대대씩만을 보유했을 정도로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어쨌든 미 제24사단 등은 25사단이 마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마산 방어를 맡아야 했다.
이 전투 이후에도 북한군은 괘방산을 점령하고 미 제19연대 1대대와 국군 제7보병사단(민기식 부대 일명 민 부대) 사이로 침투하여 박격포진지를 공격했다. 공군기의 오폭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백병전이 펼쳐졌지만, 19연대 1대대는 괘방산의 북한군을 몰아내어서 우측방의 위협을 제거했다. 또한 연대 예비였던 2대대가 침투한 북한군에 대한 역습을 감행하여 이들을 격퇴시켰다. 8월 2일 오후가 되면서 북한군의 공격은 중단되었다.
한편 길버트 체크(Gilbert Check) 중령이 대대장으로 있던 미 제25사단 예하 제27연대 예하 1대대에도 위력정찰 명령이 내려졌다. 셔먼 전차 4대와 1개 포대(제8야전포병대대 A포대)를 증원받은 1대대는 8월 2일 04시에 정찰을 개시했다. 이들은 무촌리[9] 인근 노변에서 잠자던 약 30명의 북한군을 기습했고 대부분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09시가 지났을 때 정찰대는 무촌리를 지났는데, 정찰기로부터 적 차량이 진주고개에서 철수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찰대는 진주고개에서 전차를 앞세우고 국도를 따라 공격했지만, 대전차포 사격으로 2대의 전차가 돈좌되었다. 이에 증원받은 포대로 대전차포를 침묵시켰고, 그 와중에 19연대를 우회하여 내려온 북한군이 후방에서 사격을 개시했다.
미 제27연대장 존 H. 마이켈리스(John H. Michaelis) 대령[10]은 다른 곳에서도 들어온 보고들을 종합하여 북한군 제6사단은 장군대산 고개에 있으며, 체크 대대를 공격하려 한다고 판단했으며, 17시에 제27연대 1대대에게 위력정찰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니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철수 명령을 받은 1대대 정찰대는 항공기의 엄호와 포병의 지원 하에 돈좌된 전차들을 견인하여 3일 새벽 1시에 27연대 본부가 있는 진동초등학교에 도착했다. 대대장 체크 중령은 이 전공으로 십자훈장을 수훈했다.[11]
미 제25사단 27연대장 존 H. 마이켈리스 대령은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사격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태연히 A중대장에게 북한군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중화기의 엄호사격 하에 A중대는 북한군을 격퇴 했다. 또 인근 고지 정상에서 미군은 차량에서 하차하는 대규모의 북한군을 발견했는데 이들은 마산으로 진격하려던 북 제6사단 1연대 소속의 1대대였다. 미 제8포병대대가 이들에게 포격을 가해서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체크 대대는 이 전투로 13명이 전사하고 40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확인된 북한군의 사체는 600여구에 달했다.
진동초등학교 전투 상황은 27연대에서 종군하다 직접 전투를 경험한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의 비망록 'War in Korea'(8장 'STAND OR DIE')에 생생하게 기술되어 있다.
김성은 부대는 8월 3일, 경남 진동리 서쪽 고사리에서 전진해오는 적 대대 규모 병력을 공격하여 전차 2대 트럭 4대 등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무전기 고장으로 사령관에게 보고는 하지 못했고, 진동리를 차단한 것으로 판단한 부대장은 함안으로 출발하여 8월 4일 13시 40분에 도착했다.
이 전공으로 김성은 부대는 8월 5일부로 국군 사상 세번째로 부대 장병 전원이 1계급 특진을 하였다.#[12]
8월 6일, 김성은 부대는 미 제25사단 제27연대에 배속되었고 야반산[13]을 공격하여 탈취했다. 다음날 마산으로 이동하여 집결하였다.
전투 이후 다시 진동리 지역으로 이동하여 방어임무를 수행했다.[14]
한편 북한군 제6사단도 제105전차여단 예하 제83모터사이클연대를 증원 받았다.
8월 6일, 25사단장 킨 소장의 이름을 딴 킨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Kean)가 편성되었는데, 이 임무대에는 미 제25사단에 제5연대전투단, 제1해병여단, 제89中전차대대, 해병 제1전차대대가 배속되었다. 임무대의 목표는 마산에서 출발하여 진주로 향하는 3개 도로를 타고 진격하여 진주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미 제25사단 35연대가 북쪽 도로를 타고 공격하며, 제5연대전투단이 진주고개를 공격하고, 제1해병여단이 진주 남동쪽을, 미 제25사단 24연대(민기식 부대 · 김성은 부대 · 경찰 배속)는 함안 도로를 확보하는 계획이었다. 워커 중장은 이를 위해 8월 5일부터 이틀간 항공력을 마산 일대에 집중할 것을 요청했다.
킨 임무대는 8월 7일 06시 30분에 공격을 개시했다. 미 제25사단 35연대는 항공 지원을 등에 업고 괘방산 일대의 북한군을 대파했다. 제5연대전투단은 진동리 도로를 따라 고성 방향으로 진출 했지만, 야반산에서 예하의 2대대가 포위 공격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고지를 점령한 해병 2대대는 식수를 공수 받았지만 극심한 더위로 인해 일사병 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이들은 하루 뒤인 8월 8일에 항공 지원하에 공격을 개시하여 북한군을 밀어냈다.
한편 해병 제3대대와 제24연대 제2대대는 진동리 일대의 감제고지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으나 별 진전이 없다가 3일째인 8월 9일에서야 진동리의 북한군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저항은 점차 거세지고 있었고, 35연대는 5연대전투단의 진출을 기다리기로 했다. 중앙도로를 따라 전진하던 5연대전투단은 8월 10일 야간에 기습을 받고, 11일 새벽에 공군의 도움을 받아 적을 격퇴했다. 5연대전투단은 35연대와 합류했고, 함께 진주고개로 진격했다.
8월 12일 당시 제5연대전투단은 봉암리 계곡[15]에 있었다. 철수 명령을 받은 5연대의 예하 2대대는 이미 계곡 바깥으로 물러난 뒤였지만 연대 본부와 3개 포병대대들은 아직 계곡 안에 있었다. 8월 12일 자정이 지나면서 사방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고, 5연대장은 연대가 포위 되었다고 판단하고 야간을 이용하여 후퇴를 결심했다. 연대 본부는 계곡을 빠져나왔지만 포병들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에 노출되었고, 이들은 악전고투 끝에 근접항공지원을 받고 새벽에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계곡 밖에 있던 2대대가 지원 요청을 받고 정오경에 도착 했지만 이미 전투는 끝난 뒤였다. 5연대를 증원하기로 되어 있던 24연대 3대대도 적의 공격을 받아서 이들을 지원하지 못했다. 결국 이 전투에서, 계곡에 있던 제555포병대대는 180명의 사상자와 105mm 포 8문을 상실했고, 제90포병대대 역시 190명의 사상자와 155mm 포 6문을 상실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봉암리는 이로 인해 ‘포병의 무덤’으로 일컬어졌다.
제5연대전투단과 제1해병여단이 군 예비대가 되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킨 임무대는 8월 16일에 해체되었다. 킨 임무대는 진주 탈환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임무대의 공격으로 북한군은 4,000명 이상의 병력을 손실했고 전차 13대를 상실했다.
한편 북한군은 예비 사단인 제7사단(제51연대 · 제52연대)을 8월 15일에 진주에 집결시키고 일부 병력은 통영과 여수에도 진출하였다. 또한 북 제6사단은 징집병 2,000명을 보충 받고, 마산 정면의 각 고지들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미 35연대, 24연대에 대해 각각 북 13연대와 북 15연대가 동원되었다. 35연대에 대한 공격은, 북한군이 야간 기습으로 진지를 돌파하면 포격과 폭격을 바탕으로 한 미군의 역습에 밀려나는 양상을 보였다. 며칠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13연대는 결국 8월 23일에 후퇴했다. 미 24연대는 북한군 15연대의 공격을 받았다. 15연대는 서북산 정상을 장악하고 둔덕탄광을 요새화하여 폭격에 의한 피해를 줄이는 한편 미군측의 보급로를 감제하고 후방지역도 관측했다. 수 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고, 미 24연대는 서북산을 상실하고 전투산[16]북부 일부마저 잃었다가, 미 전폭기의 집중지원으로 전투산을 수복했고, 미 제5연대가 서북산 탈환을 위한 반격에 나서서 서북산 정상을 점령했다. 양측의 집중 포격과 돌격이 반복된 결과, 서북산 정상의 주인은 8월 말까지 19차례나 바뀌었다.
최종적으로 미 제25사단은 마산 정면의 고지들을 지켜내어서 전체 작전에 큰 공헌을 했다. 8월 30일에는 군 예비로 차출 되었던 제27연대가 25사단으로 복귀 했고, 제5연대전투단이 제24사단에 배속 되었다.
북한군은 마산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면서 전차를 증원받고 제104치안연대와 제7사단을 추가 동원했다. 제105전차사단의 전차 20대와 제16기갑여단의 전차 43대를 지원 받은 6사단은 진주에 집결하여 부대 정비 및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고, 7사단은 의령 일대에 집결해 있었다. 북한군은 UN 공군의 폭격에도 남강에 수중교를 부설했고, 6사단과 7사단은 2개 도로를 따라 공세를 수행하기로 했다. 즉 6사단은 미 제35연대 1대대를 돌파하여 진주-마산도로를 따라 중리로 진출할 계획이었고, 7사단은 제35연대 2대대를 돌파하여 남지리-마산 간의 도로를 차단할 계획이었다.
8월 31일 23시 30분, 북한군은 2개 사단으로 총공격을 개시했다. 9월 1일에 북한군 7사단은 남강을 도하하여 35연대를 공격했다. 미군은 공군 지원과 VT신관을 사용하는 포격 지원을 받아 북한군을 저지 했으나, 미군 35연대 1대대와 2대대 사이의 간격이 뚫리면서 북한군의 대규모 병력이 후방 지역으로 침투했다. 35연대 1대대는 북한군의 정면 공격을 3차의 전투 끝에 저지했고, 북한군 제6사단 제13연대장 한일동 대좌가 여기서 사망했다.
한편 북한군의 공격 첫 날, 미 제25사단장 킨 소장은 워커 중장에게 8군 예비대인 27연대 2대대의 투입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킨 소장은 독단으로 마산에 있던 27연대 2대대로 하여금 35연대의 후방으로 침투한 북한군을 공격하도록 했다(후에 워커 중장은 이를 묵인했다). 이들은 폭우와 탄약 부족으로 고전하기도 했지만 9월 4일에는 침투한 북한군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특히 공중지원이 큰 역할을 했는데, 킨 소장도 “근접항공지원이 사단을 구했다”고 평했다. 25사단은 9월 1일부터 7일까지 후방지역에서만 북한군 사체 2,000여구를 매장했다. 한편 9월 8일과 9일에 쏟아진 폭우로 강의 수위가 2m나 높아짐에 따라 북한군 도하가 어려워지자, 25사단은 한 숨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25사단의 중앙을 방어했던 24연대는 방어선이 뚫리고 9월 1일에 함안을 상실했다. 공중지원을 받은 27연대 1대대가 반격을 실시하여 최초 진지를 수복하여 9월 4일에 24연대에 인계했으나 24연대는 5일 아침에 소규모 공격을 받고 다시 철수 했다. 킨 소장은 24연대의 빈번한 철수로 인해 작전에 큰 차질이 초래되었다고 24연대의 교체를 건의했지만 워커 중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군 6사단과 7사단은 해안선 일대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전투산, 서북산 일대에 포격을 집중시켰다. 9월 7일에 전투산이 북한군에게 점령되어, 킨 소장은 함안을 탈환했던 27연대 3대대에게 전투산 탈환을 명령했지만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후 24연대장 코리 중령은 공격을 일시 중단하고 집중적인 화력의 운용으로 적의 소모를 강요한 뒤 전투산을 탈환했다. 북한군은 9월 14일에 전투산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고, 24연대는 병력 소모가 심해서 철수했다.
이 공격 이후에 공세의 한계에 다다른 북한군은 공격을 자제하고 수세로 전환했다. 미 제25사단은 전투 내내 공세적인 방어로 북한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부산으로 향하는 서부 관문인 마산을 지켜냈다.
미군의 피해도 컸다. 전력이 감소된 제24사단 29연대는 임무대 편성 과정에서 해체되었다. 상술된 포병 피해를 포함해 1천여 명의 전사자와 3천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20명이 실종되었다.
당시 마산을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해군과 해병대의 중심지인 진해가 인접해 있었다는 점이 꼽히고 있다. 진해에서 이들을 빠르고 적극적으로 증편하여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이 문서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김성은 부대도 해병대다.)
상술한 바와 같이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8월 초에는 함안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는데, 서북산 루트로 탈출하지 못한 피난민 중 상당수는 의령 쪽으로 진로를 돌렸다가 8월 18일 발진한 미군 해군항공대 함재기의 기총소사에 참변을 당했다.[18] 이 곳은 "남산벌"이라고 불렸으며, 현재의 군북면 안도리 일대(위 지도의 A/29라 적힌 부분)인데 이 때문에 7월, 8월은 1980년대말까지도 군북 장터가 상당히 북적거렸다. 8월 초순에는 인민군한테 끌려갔다 생사불명이 된 사람들 집이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내고, 8월 중순에는 미군한테 포격과 폭격으로 죽은 사람들 집이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제사 준비를 하느라 장터가 북적거렸던 것이다.
특히 여항산 밑의 오곡리(새마을, 골마을) 및 사촌리 등의 골짜기 마을에는, 이 한날 한시에 제사 지내는 집이 많다. 후퇴하는 조선인민군 제6사단이 미처 피난가지 못한 장정들을 징발하여 전투에 투입하거나 노역에 동원했고, 이에 폭격에 죽거나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패잔병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어떤 주민도[19] 피난가던 도중 인민군에게 징발되어 군북에서 여항까지 노역에 시달리다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몇 몇과 함께 탈출했는데, 탈출한 사람들 외에는 모두, 전투 중 포격에 휘말려 죽었다고 한다. 일부 피난민이 명관리 뒤쪽(소어석터널쪽) 깊은 산중으로 피난갔지만 하필 그곳은 상술한 인민군 6사단 전익이 포진했던 방어산의 우측 날개 쪽으로, 이 쪽에는 인민군이 임시 보급기지를 지어놓았기 때문에 미군의 전략폭격 대상이 되었고 폭격에 휩쓸리고 말았다. 관련 증언 채집록 및 미군 문서를 살펴보면 여기 증언들이 모두 교차검증됨을 알 수 있다.
치열한 전투의 여파로 이 일대에는 불발탄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1980년대 말까지도 국민학교 방학 주의사항으로 항상 '불발탄 만지지 말고 발견하면 경찰이나 군 부대에 신고할 것'이란 내용이 따라붙었다. 실제로 1960년대 초반 군북초등학교 재학 중인 동네 아이들이 사촌리 상데미산 기슭까지 소 먹이러 갔다가, 산기슭에서 불발탄을 주운 후 폭사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포탄인 줄도 모르고 쇳덩이를 벗겨내 동네 엿장수에게 갖다주려고 무덤 상석에다 고폭탄을 두들겨댔다는 것이다.[20] 이외에도 일반인들이 나무를 하다 불발탄 뇌관을 잘못 건드려 폭사하거나 불구가 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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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면 봉암리 일대가 미군에게 워낙 출혈을 안겨주다 보니 아예 주요 전장이었던 서북산, 여항산 일대의 별명은 '각대미산'이 되어버렸다. 영어의 '갓 댐 잇[22]'이 몬데그린화된 것이다. 다만 '데미'리는 게 경남 사투리로 바위란 뜻이기 때문에 어원 자체는 확실치 않은데, 각대미산은 인근의 상데미산 이름이 미군에 의해 "저기 산 이름이 상데미라고? 갓뎀이다"라는 식으로 와전된 것으로도 여겨진다. 현재도 상데미산(661고지)의 이명으로 미군이 붙여준 이름인 '전투산(Mount of battle)'이란 이름이라든가, 사촌리와 오곡리 사이의 산 능선 이름은 '피바위능선'이라고 불리는 등 전쟁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는 지명이 많다.
현 군북역 앞에서 바라본 마산 전투의 주요 전장. 군북에서 정남방을 보면 상데미산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 모양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이게 피바위다. 앞에 보이는 동네는 동촌리(새동네)이며, 골새미산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널따란 오곡리 골짜기가 숨겨져 있다. 이 천혜의 감제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한미연합군과 북한군은 45일간 혈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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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마산회원구 무학산 정상부에는 산꼭대기부터 서마지기, 봉화산까지 능선부를 따라 교통호가 반쯤 무너진 채 남아 있는데, 이 당시 미 제24사단과 국군 해병대 등이 방어선을 쳤던 부분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교통호는 한국전쟁과 관련된 구조물은 아니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1989년 여름 당시 육군 최고위층의 지시로 후방에도 전방 수준의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공사로 진행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공사를 담당한 부대는 구 마산통합병원(현 월영마을 부지)에 위치한 39사단 예하 8358부대 1대대가 예비군과 함께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1950년 당시 이 교통호 능선 부분에서 촬영한 사진이 현재도 남아 있다. 부산독일문화원 원장 Jens-Olaf Walter 씨가 마산 전투 당시 마산에 주둔하던 미군이 찍은 사진을 기증했는데, 촬영자는 당시 미 25사단 소속 Donald L. Grovom 일병(PFC)이다.[23]
좌측 사진 정중앙에 보이는 부분이 구 일본 조선주차군의 병영 자리로, 이후 일본 육군 조선군 제20사단이 쓰다가 해방 후 국군 제15연대가 창설되었다. 1954년에는 국군의무사령부가 이 곳에서 발족했으며 1990년대까지 국군지구마산병원(마통)이 주둔하다가 현재는 월영마을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이 부대 시설은 6.25가 터지자 미 육군 24, 25사단도 사용했고 1950년대 말까지 미군이 주둔해서 구 일본인 거류지가 있던 두월동에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시장'이 생기는 배경이 됐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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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항목의 진동리 전투가 벌어진 곳에는 현재 위령비가 세워져 있으며, '진동리 전적지'라고 해서 시 당국과 해병대가 매년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해병대 블로그 기사 해당 전적비 앞으로 삼진의거대로가 지나간다.[25] 창원시 시내버스 73-1번, 75(-1)번, 76번, 77(-1)번 및 마산남부시외버스터미널 출발 진주, 통영 방면 국도경유 노선이 전적비 앞을 경유하여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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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0년대 마산에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정신의학과 전문 병원이었던 배신경정신과 병원장 배대균 선생은 현재 은퇴 후 마산 전투에 대한 미군 기록을 찾아내어 정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기사보기), 기념사업회장도 맡고 있다. 2021년 초에는 단행본으로 자료 일부를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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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년 6월 6일 현충일, 이 날 취재가 YTN에도 보도되었는데 상술한 배대균 선생의 인터뷰도 포함되었다. #YTN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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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시기에 마산의 북쪽에서 벌어진 다부동 전투와 학도병의 활약 등을 소재로 몇 번 영화화되어서[3] 인지도가 있는 포항, 영천 방면 전선에 비해서, 비교적 국지적이었고 덜 알려졌지만 못지 않은 중요성을 지녔던 전투이다. 마산과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생각해보면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북한군 제6사단의 우회기동을 놓친 미 8군은 마산 일대에 방어 병력을 배치해 놓지 않았다가 뒤늦게 6사단의 기도를 파악하고 나서야 달성군 일대 전선에서 미 25사단을 빼내 부랴부랴 마산 방면으로 전환했는데, 당시에는 도로망이 정비된 현재와 다르게 대구로 일단 집결한 후 철도로 밀양을 거쳐 삼랑진의 낙동강철교를 통해 우회해야 했다. 5번 국도는 당시에도 존재했으나 비포장 우마차로였던데다가, 낙동강 도하지점인 창녕군 남지읍에는 백사장만 펼쳐져 있고 다리가 없어서 나룻배로 건너는 곳이었기에 대규모 병력과 물자 이동은 불가능했다. 특히 전쟁 발발 직후 한반도에 급속 전개된 주일미군은 대규모 도하작전이 가능한 장비도 그다지 없었다.[4] 이 때문에 미 25사단이 아슬아슬하게 마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령부 안팎으로 낙동강 방어선이 그대로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기도 했다.
북한군은 서울 점령 이후에 퇴각하며 지연전을 벌이는 국군과 미군을 상대로 가열찬 추격전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방호산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6사단(제1 · 13 · 15연대)은 1개 모터사이클연대(제83모터싸이클연대)와 함께 서해 방면의 국군을 계속 추격하면서 목포 · 여수를 점령하고 마산을 점령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한편 미 제8군은 7월부터의 후퇴 과정 도중, 북한군 제4사단과 제6사단, 2개 사단의 행방을 놓친 상태였다. 미군은 7월 31일에서야 포로 심문과 감청을 통해 6사단의 마산 점령 기도를 포착했다. 마산 전투를 통틀어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미 8군은 마산으로의 우회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당장 마산에 투입할 예비대가 없어 전선에서 병력을 빼와야 할 판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북한군 6사단이 여수와 목포를 점령하느라 2일을 지체했다는 점이었다. 워커 장군이 말했듯이 "만일 북한군 제6사단이 호남의 항구를 점령하는 우회공격을 선택하지 않고 모든 전력을 집중해 부산을 향해 쇄도해 왔다면 아마 나는 이 적을 저지하기 위한 병력을 투입할 시간적인 여유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마산에는 미 제24사단 예하 제19연대, 제29연대, 제25사단 예하 제27연대 등 3개 연대의 미군 병력과 국군 민기식 대령, 김성은 중령이 이끄는 민 부대와 김 부대[7]들이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전력이 약화된 상태라서 6사단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되었다. 실제로 이들 중 2개 연대는 예하에 2개 대대씩만을 보유했을 정도로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어쨌든 미 제24사단 등은 25사단이 마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마산 방어를 맡아야 했다.
이 전투 이후에도 북한군은 괘방산을 점령하고 미 제19연대 1대대와 국군 제7보병사단(민기식 부대 일명 민 부대) 사이로 침투하여 박격포진지를 공격했다. 공군기의 오폭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백병전이 펼쳐졌지만, 19연대 1대대는 괘방산의 북한군을 몰아내어서 우측방의 위협을 제거했다. 또한 연대 예비였던 2대대가 침투한 북한군에 대한 역습을 감행하여 이들을 격퇴시켰다. 8월 2일 오후가 되면서 북한군의 공격은 중단되었다.
한편 길버트 체크(Gilbert Check) 중령이 대대장으로 있던 미 제25사단 예하 제27연대 예하 1대대에도 위력정찰 명령이 내려졌다. 셔먼 전차 4대와 1개 포대(제8야전포병대대 A포대)를 증원받은 1대대는 8월 2일 04시에 정찰을 개시했다. 이들은 무촌리[9] 인근 노변에서 잠자던 약 30명의 북한군을 기습했고 대부분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09시가 지났을 때 정찰대는 무촌리를 지났는데, 정찰기로부터 적 차량이 진주고개에서 철수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찰대는 진주고개에서 전차를 앞세우고 국도를 따라 공격했지만, 대전차포 사격으로 2대의 전차가 돈좌되었다. 이에 증원받은 포대로 대전차포를 침묵시켰고, 그 와중에 19연대를 우회하여 내려온 북한군이 후방에서 사격을 개시했다.
미 제27연대장 존 H. 마이켈리스(John H. Michaelis) 대령[10]은 다른 곳에서도 들어온 보고들을 종합하여 북한군 제6사단은 장군대산 고개에 있으며, 체크 대대를 공격하려 한다고 판단했으며, 17시에 제27연대 1대대에게 위력정찰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니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철수 명령을 받은 1대대 정찰대는 항공기의 엄호와 포병의 지원 하에 돈좌된 전차들을 견인하여 3일 새벽 1시에 27연대 본부가 있는 진동초등학교에 도착했다. 대대장 체크 중령은 이 전공으로 십자훈장을 수훈했다.[11]
미 제25사단 27연대장 존 H. 마이켈리스 대령은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사격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태연히 A중대장에게 북한군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중화기의 엄호사격 하에 A중대는 북한군을 격퇴 했다. 또 인근 고지 정상에서 미군은 차량에서 하차하는 대규모의 북한군을 발견했는데 이들은 마산으로 진격하려던 북 제6사단 1연대 소속의 1대대였다. 미 제8포병대대가 이들에게 포격을 가해서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체크 대대는 이 전투로 13명이 전사하고 40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확인된 북한군의 사체는 600여구에 달했다.
진동초등학교 전투 상황은 27연대에서 종군하다 직접 전투를 경험한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의 비망록 'War in Korea'(8장 'STAND OR DIE')에 생생하게 기술되어 있다.
김성은 부대는 8월 3일, 경남 진동리 서쪽 고사리에서 전진해오는 적 대대 규모 병력을 공격하여 전차 2대 트럭 4대 등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무전기 고장으로 사령관에게 보고는 하지 못했고, 진동리를 차단한 것으로 판단한 부대장은 함안으로 출발하여 8월 4일 13시 40분에 도착했다.
이 전공으로 김성은 부대는 8월 5일부로 국군 사상 세번째로 부대 장병 전원이 1계급 특진을 하였다.#[12]
8월 6일, 김성은 부대는 미 제25사단 제27연대에 배속되었고 야반산[13]을 공격하여 탈취했다. 다음날 마산으로 이동하여 집결하였다.
전투 이후 다시 진동리 지역으로 이동하여 방어임무를 수행했다.[14]
한편 북한군 제6사단도 제105전차여단 예하 제83모터사이클연대를 증원 받았다.
8월 6일, 25사단장 킨 소장의 이름을 딴 킨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Kean)가 편성되었는데, 이 임무대에는 미 제25사단에 제5연대전투단, 제1해병여단, 제89中전차대대, 해병 제1전차대대가 배속되었다. 임무대의 목표는 마산에서 출발하여 진주로 향하는 3개 도로를 타고 진격하여 진주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미 제25사단 35연대가 북쪽 도로를 타고 공격하며, 제5연대전투단이 진주고개를 공격하고, 제1해병여단이 진주 남동쪽을, 미 제25사단 24연대(민기식 부대 · 김성은 부대 · 경찰 배속)는 함안 도로를 확보하는 계획이었다. 워커 중장은 이를 위해 8월 5일부터 이틀간 항공력을 마산 일대에 집중할 것을 요청했다.
킨 임무대는 8월 7일 06시 30분에 공격을 개시했다. 미 제25사단 35연대는 항공 지원을 등에 업고 괘방산 일대의 북한군을 대파했다. 제5연대전투단은 진동리 도로를 따라 고성 방향으로 진출 했지만, 야반산에서 예하의 2대대가 포위 공격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고지를 점령한 해병 2대대는 식수를 공수 받았지만 극심한 더위로 인해 일사병 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이들은 하루 뒤인 8월 8일에 항공 지원하에 공격을 개시하여 북한군을 밀어냈다.
한편 해병 제3대대와 제24연대 제2대대는 진동리 일대의 감제고지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으나 별 진전이 없다가 3일째인 8월 9일에서야 진동리의 북한군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저항은 점차 거세지고 있었고, 35연대는 5연대전투단의 진출을 기다리기로 했다. 중앙도로를 따라 전진하던 5연대전투단은 8월 10일 야간에 기습을 받고, 11일 새벽에 공군의 도움을 받아 적을 격퇴했다. 5연대전투단은 35연대와 합류했고, 함께 진주고개로 진격했다.
8월 12일 당시 제5연대전투단은 봉암리 계곡[15]에 있었다. 철수 명령을 받은 5연대의 예하 2대대는 이미 계곡 바깥으로 물러난 뒤였지만 연대 본부와 3개 포병대대들은 아직 계곡 안에 있었다. 8월 12일 자정이 지나면서 사방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고, 5연대장은 연대가 포위 되었다고 판단하고 야간을 이용하여 후퇴를 결심했다. 연대 본부는 계곡을 빠져나왔지만 포병들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에 노출되었고, 이들은 악전고투 끝에 근접항공지원을 받고 새벽에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계곡 밖에 있던 2대대가 지원 요청을 받고 정오경에 도착 했지만 이미 전투는 끝난 뒤였다. 5연대를 증원하기로 되어 있던 24연대 3대대도 적의 공격을 받아서 이들을 지원하지 못했다. 결국 이 전투에서, 계곡에 있던 제555포병대대는 180명의 사상자와 105mm 포 8문을 상실했고, 제90포병대대 역시 190명의 사상자와 155mm 포 6문을 상실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봉암리는 이로 인해 ‘포병의 무덤’으로 일컬어졌다.
제5연대전투단과 제1해병여단이 군 예비대가 되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킨 임무대는 8월 16일에 해체되었다. 킨 임무대는 진주 탈환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임무대의 공격으로 북한군은 4,000명 이상의 병력을 손실했고 전차 13대를 상실했다.
한편 북한군은 예비 사단인 제7사단(제51연대 · 제52연대)을 8월 15일에 진주에 집결시키고 일부 병력은 통영과 여수에도 진출하였다. 또한 북 제6사단은 징집병 2,000명을 보충 받고, 마산 정면의 각 고지들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미 35연대, 24연대에 대해 각각 북 13연대와 북 15연대가 동원되었다. 35연대에 대한 공격은, 북한군이 야간 기습으로 진지를 돌파하면 포격과 폭격을 바탕으로 한 미군의 역습에 밀려나는 양상을 보였다. 며칠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13연대는 결국 8월 23일에 후퇴했다. 미 24연대는 북한군 15연대의 공격을 받았다. 15연대는 서북산 정상을 장악하고 둔덕탄광을 요새화하여 폭격에 의한 피해를 줄이는 한편 미군측의 보급로를 감제하고 후방지역도 관측했다. 수 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고, 미 24연대는 서북산을 상실하고 전투산[16]북부 일부마저 잃었다가, 미 전폭기의 집중지원으로 전투산을 수복했고, 미 제5연대가 서북산 탈환을 위한 반격에 나서서 서북산 정상을 점령했다. 양측의 집중 포격과 돌격이 반복된 결과, 서북산 정상의 주인은 8월 말까지 19차례나 바뀌었다.
최종적으로 미 제25사단은 마산 정면의 고지들을 지켜내어서 전체 작전에 큰 공헌을 했다. 8월 30일에는 군 예비로 차출 되었던 제27연대가 25사단으로 복귀 했고, 제5연대전투단이 제24사단에 배속 되었다.
북한군은 마산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면서 전차를 증원받고 제104치안연대와 제7사단을 추가 동원했다. 제105전차사단의 전차 20대와 제16기갑여단의 전차 43대를 지원 받은 6사단은 진주에 집결하여 부대 정비 및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고, 7사단은 의령 일대에 집결해 있었다. 북한군은 UN 공군의 폭격에도 남강에 수중교를 부설했고, 6사단과 7사단은 2개 도로를 따라 공세를 수행하기로 했다. 즉 6사단은 미 제35연대 1대대를 돌파하여 진주-마산도로를 따라 중리로 진출할 계획이었고, 7사단은 제35연대 2대대를 돌파하여 남지리-마산 간의 도로를 차단할 계획이었다.
8월 31일 23시 30분, 북한군은 2개 사단으로 총공격을 개시했다. 9월 1일에 북한군 7사단은 남강을 도하하여 35연대를 공격했다. 미군은 공군 지원과 VT신관을 사용하는 포격 지원을 받아 북한군을 저지 했으나, 미군 35연대 1대대와 2대대 사이의 간격이 뚫리면서 북한군의 대규모 병력이 후방 지역으로 침투했다. 35연대 1대대는 북한군의 정면 공격을 3차의 전투 끝에 저지했고, 북한군 제6사단 제13연대장 한일동 대좌가 여기서 사망했다.
한편 북한군의 공격 첫 날, 미 제25사단장 킨 소장은 워커 중장에게 8군 예비대인 27연대 2대대의 투입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킨 소장은 독단으로 마산에 있던 27연대 2대대로 하여금 35연대의 후방으로 침투한 북한군을 공격하도록 했다(후에 워커 중장은 이를 묵인했다). 이들은 폭우와 탄약 부족으로 고전하기도 했지만 9월 4일에는 침투한 북한군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특히 공중지원이 큰 역할을 했는데, 킨 소장도 “근접항공지원이 사단을 구했다”고 평했다. 25사단은 9월 1일부터 7일까지 후방지역에서만 북한군 사체 2,000여구를 매장했다. 한편 9월 8일과 9일에 쏟아진 폭우로 강의 수위가 2m나 높아짐에 따라 북한군 도하가 어려워지자, 25사단은 한 숨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25사단의 중앙을 방어했던 24연대는 방어선이 뚫리고 9월 1일에 함안을 상실했다. 공중지원을 받은 27연대 1대대가 반격을 실시하여 최초 진지를 수복하여 9월 4일에 24연대에 인계했으나 24연대는 5일 아침에 소규모 공격을 받고 다시 철수 했다. 킨 소장은 24연대의 빈번한 철수로 인해 작전에 큰 차질이 초래되었다고 24연대의 교체를 건의했지만 워커 중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군 6사단과 7사단은 해안선 일대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전투산, 서북산 일대에 포격을 집중시켰다. 9월 7일에 전투산이 북한군에게 점령되어, 킨 소장은 함안을 탈환했던 27연대 3대대에게 전투산 탈환을 명령했지만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후 24연대장 코리 중령은 공격을 일시 중단하고 집중적인 화력의 운용으로 적의 소모를 강요한 뒤 전투산을 탈환했다. 북한군은 9월 14일에 전투산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고, 24연대는 병력 소모가 심해서 철수했다.
이 공격 이후에 공세의 한계에 다다른 북한군은 공격을 자제하고 수세로 전환했다. 미 제25사단은 전투 내내 공세적인 방어로 북한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부산으로 향하는 서부 관문인 마산을 지켜냈다.
미군의 피해도 컸다. 전력이 감소된 제24사단 29연대는 임무대 편성 과정에서 해체되었다. 상술된 포병 피해를 포함해 1천여 명의 전사자와 3천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20명이 실종되었다.
당시 마산을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해군과 해병대의 중심지인 진해가 인접해 있었다는 점이 꼽히고 있다. 진해에서 이들을 빠르고 적극적으로 증편하여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이 문서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김성은 부대도 해병대다.)
상술한 바와 같이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8월 초에는 함안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는데, 서북산 루트로 탈출하지 못한 피난민 중 상당수는 의령 쪽으로 진로를 돌렸다가 8월 18일 발진한 미군 해군항공대 함재기의 기총소사에 참변을 당했다.[18] 이 곳은 "남산벌"이라고 불렸으며, 현재의 군북면 안도리 일대(위 지도의 A/29라 적힌 부분)인데 이 때문에 7월, 8월은 1980년대말까지도 군북 장터가 상당히 북적거렸다. 8월 초순에는 인민군한테 끌려갔다 생사불명이 된 사람들 집이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내고, 8월 중순에는 미군한테 포격과 폭격으로 죽은 사람들 집이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제사 준비를 하느라 장터가 북적거렸던 것이다.
특히 여항산 밑의 오곡리(새마을, 골마을) 및 사촌리 등의 골짜기 마을에는, 이 한날 한시에 제사 지내는 집이 많다. 후퇴하는 조선인민군 제6사단이 미처 피난가지 못한 장정들을 징발하여 전투에 투입하거나 노역에 동원했고, 이에 폭격에 죽거나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패잔병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어떤 주민도[19] 피난가던 도중 인민군에게 징발되어 군북에서 여항까지 노역에 시달리다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몇 몇과 함께 탈출했는데, 탈출한 사람들 외에는 모두, 전투 중 포격에 휘말려 죽었다고 한다. 일부 피난민이 명관리 뒤쪽(소어석터널쪽) 깊은 산중으로 피난갔지만 하필 그곳은 상술한 인민군 6사단 전익이 포진했던 방어산의 우측 날개 쪽으로, 이 쪽에는 인민군이 임시 보급기지를 지어놓았기 때문에 미군의 전략폭격 대상이 되었고 폭격에 휩쓸리고 말았다. 관련 증언 채집록 및 미군 문서를 살펴보면 여기 증언들이 모두 교차검증됨을 알 수 있다.
치열한 전투의 여파로 이 일대에는 불발탄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1980년대 말까지도 국민학교 방학 주의사항으로 항상 '불발탄 만지지 말고 발견하면 경찰이나 군 부대에 신고할 것'이란 내용이 따라붙었다. 실제로 1960년대 초반 군북초등학교 재학 중인 동네 아이들이 사촌리 상데미산 기슭까지 소 먹이러 갔다가, 산기슭에서 불발탄을 주운 후 폭사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포탄인 줄도 모르고 쇳덩이를 벗겨내 동네 엿장수에게 갖다주려고 무덤 상석에다 고폭탄을 두들겨댔다는 것이다.[20] 이외에도 일반인들이 나무를 하다 불발탄 뇌관을 잘못 건드려 폭사하거나 불구가 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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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면 봉암리 일대가 미군에게 워낙 출혈을 안겨주다 보니 아예 주요 전장이었던 서북산, 여항산 일대의 별명은 '각대미산'이 되어버렸다. 영어의 '갓 댐 잇[22]'이 몬데그린화된 것이다. 다만 '데미'리는 게 경남 사투리로 바위란 뜻이기 때문에 어원 자체는 확실치 않은데, 각대미산은 인근의 상데미산 이름이 미군에 의해 "저기 산 이름이 상데미라고? 갓뎀이다"라는 식으로 와전된 것으로도 여겨진다. 현재도 상데미산(661고지)의 이명으로 미군이 붙여준 이름인 '전투산(Mount of battle)'이란 이름이라든가, 사촌리와 오곡리 사이의 산 능선 이름은 '피바위능선'이라고 불리는 등 전쟁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는 지명이 많다.
현 군북역 앞에서 바라본 마산 전투의 주요 전장. 군북에서 정남방을 보면 상데미산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 모양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이게 피바위다. 앞에 보이는 동네는 동촌리(새동네)이며, 골새미산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널따란 오곡리 골짜기가 숨겨져 있다. 이 천혜의 감제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한미연합군과 북한군은 45일간 혈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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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마산회원구 무학산 정상부에는 산꼭대기부터 서마지기, 봉화산까지 능선부를 따라 교통호가 반쯤 무너진 채 남아 있는데, 이 당시 미 제24사단과 국군 해병대 등이 방어선을 쳤던 부분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교통호는 한국전쟁과 관련된 구조물은 아니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1989년 여름 당시 육군 최고위층의 지시로 후방에도 전방 수준의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공사로 진행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공사를 담당한 부대는 구 마산통합병원(현 월영마을 부지)에 위치한 39사단 예하 8358부대 1대대가 예비군과 함께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1950년 당시 이 교통호 능선 부분에서 촬영한 사진이 현재도 남아 있다. 부산독일문화원 원장 Jens-Olaf Walter 씨가 마산 전투 당시 마산에 주둔하던 미군이 찍은 사진을 기증했는데, 촬영자는 당시 미 25사단 소속 Donald L. Grovom 일병(PFC)이다.[23]
좌측 사진 정중앙에 보이는 부분이 구 일본 조선주차군의 병영 자리로, 이후 일본 육군 조선군 제20사단이 쓰다가 해방 후 국군 제15연대가 창설되었다. 1954년에는 국군의무사령부가 이 곳에서 발족했으며 1990년대까지 국군지구마산병원(마통)이 주둔하다가 현재는 월영마을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이 부대 시설은 6.25가 터지자 미 육군 24, 25사단도 사용했고 1950년대 말까지 미군이 주둔해서 구 일본인 거류지가 있던 두월동에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시장'이 생기는 배경이 됐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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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항목의 진동리 전투가 벌어진 곳에는 현재 위령비가 세워져 있으며, '진동리 전적지'라고 해서 시 당국과 해병대가 매년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해병대 블로그 기사 해당 전적비 앞으로 삼진의거대로가 지나간다.[25] 창원시 시내버스 73-1번, 75(-1)번, 76번, 77(-1)번 및 마산남부시외버스터미널 출발 진주, 통영 방면 국도경유 노선이 전적비 앞을 경유하여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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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0년대 마산에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정신의학과 전문 병원이었던 배신경정신과 병원장 배대균 선생은 현재 은퇴 후 마산 전투에 대한 미군 기록을 찾아내어 정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기사보기), 기념사업회장도 맡고 있다. 2021년 초에는 단행본으로 자료 일부를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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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년 6월 6일 현충일, 이 날 취재가 YTN에도 보도되었는데 상술한 배대균 선생의 인터뷰도 포함되었다. #YTN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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