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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6.25 사변과 마산 전투 본문

선교 한국/아 ! 대 한민국

펌) 6.25 사변과 마산 전투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24. 9. 24. 17:02

마산 전투

최근 수정 시각: 2024-09-22 15:18:59
 
 
 
 

방어선을 구축한 미군 전차와 병력들. 창원시 마산회원구 중리역 인근으로 추정된다.[1]# 옆의 하천은 광려천으로 제방 공사를 하기 전에는 저런 모습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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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미군의 이동4. 정찰전5. 진동리지구 전투
5.1. 미 제27연대의 진동초등학교 전투5.2. 국군 해병대의 진동리 부근 전투
6. 미 제25사단의 도착과 증원7. 킨 특수임무부대의 공격8. 공격 중지와 봉암리 전투9. 방어선 재편성과 고지전10. 통영 상륙작전11. 9월 공세12. 양측의 피해13. 민간인의 피해14. 여담15. 출처
 
마산 전투 당시의 UN군 및 북한군 배치도
 
마산 전투 당시 격전이 벌어졌던 최전선인 군북 상데미산(전투산) 일대 능선.
지도 서쪽 바깥부분이 조선인민군 6사단 본대가 있던 방어산이고, 여항산 남동쪽이 서북산이며 그 아래가 미군 포병대가 진입한 봉암리 쪽이다.
 
헐 다운 방어선을 구축한 미군 전차와 병력들. 창원시 마산회원구 중리역 인근으로 추정된다.[1]# 옆의 하천은 광려천으로 제방 공사를 하기 전에는 저런 모습이었다고 한다.
 
진해 안민고개 인근에 임시 방사선을 구축한 해군사관학교생도들[2]

1. 개요[편집]

마산 전투는 1950년 8월 2일에 시작되어 9월 14일까지 계속된, 마산(現 경상남도 창원시)을 점령하려는 조선인민군(이하 북한군)과 마산 일대를 방어하던 유엔군(대한민국 국군 ·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들) 사이에 있었던 전투로, 6.25 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의 최남단에 속한다.

동 시기에 마산의 북쪽에서 벌어진 다부동 전투와 학도병의 활약 등을 소재로 몇 번 영화화되어서[3] 인지도가 있는 포항, 영천 방면 전선에 비해서, 비교적 국지적이었고 덜 알려졌지만 못지 않은 중요성을 지녔던 전투이다. 마산과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생각해보면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북한군 제6사단의 우회기동을 놓친 미 8군은 마산 일대에 방어 병력을 배치해 놓지 않았다가 뒤늦게 6사단의 기도를 파악하고 나서야 달성군 일대 전선에서 미 25사단을 빼내 부랴부랴 마산 방면으로 전환했는데, 당시에는 도로망이 정비된 현재와 다르게 대구로 일단 집결한 후 철도로 밀양을 거쳐 삼랑진의 낙동강철교를 통해 우회해야 했다. 5번 국도는 당시에도 존재했으나 비포장 우마차로였던데다가, 낙동강 도하지점인 창녕군 남지읍에는 백사장만 펼쳐져 있고 다리가 없어서 나룻배로 건너는 곳이었기에 대규모 병력과 물자 이동은 불가능했다. 특히 전쟁 발발 직후 한반도에 급속 전개된 주일미군은 대규모 도하작전이 가능한 장비도 그다지 없었다.[4] 이 때문에 미 25사단이 아슬아슬하게 마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령부 안팎으로 낙동강 방어선이 그대로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기도 했다.

2. 배경[편집]

전쟁 당시 마산은 부산에 이은 경상남도 제2의 도시로, 인구는 약 10만 명이었다. 부산에서 서쪽 57km, 진주에서 동쪽으로 60km 지점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도로 · 철도 · 해로 등 교통의 요지로 부산의 서부 관문이었다. 철도교통으로는 진주-삼랑진을 연결하는 경남선[5]과 창원-진해를 연결하는 진해선이 있었다. 도로로는 사천-마산의 우회도로(33번 국도), 창원-부산의 도로(14번 국도), 진해-부산의 도로(2번 국도) 등이 있었다. 마산항 가까이에는 대한민국 육군 제15연대[6] 주둔지와 대한민국 해군의 본거지인 진해가 있었다.

북한군은 서울 점령 이후에 퇴각하며 지연전을 벌이는 국군과 미군을 상대로 가열찬 추격전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방호산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6사단(제1 · 13 · 15연대)은 1개 모터사이클연대(제83모터싸이클연대)와 함께 서해 방면의 국군을 계속 추격하면서 목포 · 여수를 점령하고 마산을 점령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마산을 점령하면 적의 숨통을 조르는 것이다."
조선인민군 제6사단장 방호산 소장
제13연대는 1950년 7월 24일에 목포항을 점령했고, 제1연대는 다음날인 25일에 여수항을 점령했다. 6사단은 점령한 두 항구의 방어를 위해 각각 1개 대대씩의 주둔 병력을 남겼고, 이외의 주력은 28일에 하동에 집결 시켰다. 29일부터 6사단은 마산 방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제15연대가 30일에 진주-마산간 도로를 차단했고 31일에는 진주를 점령했다.

한편 미 제8군은 7월부터의 후퇴 과정 도중, 북한군 제4사단과 제6사단, 2개 사단의 행방을 놓친 상태였다. 미군은 7월 31일에서야 포로 심문과 감청을 통해 6사단의 마산 점령 기도를 포착했다. 마산 전투를 통틀어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미 8군은 마산으로의 우회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당장 마산에 투입할 예비대가 없어 전선에서 병력을 빼와야 할 판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북한군 6사단이 여수와 목포를 점령하느라 2일을 지체했다는 점이었다. 워커 장군이 말했듯이 "만일 북한군 제6사단이 호남의 항구를 점령하는 우회공격을 선택하지 않고 모든 전력을 집중해 부산을 향해 쇄도해 왔다면 아마 나는 이 적을 저지하기 위한 병력을 투입할 시간적인 여유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3. 미군의 이동[편집]

미 제8군은 북한군의 마산으로의 움직임을 포착하고서 8월 1일, 상주에 주둔해 있던 제25사단(제24연대 · 제27연대 · 제35연대)에게 마산 방면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미 25사단은 이미 전선에서 북한군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상주에서 철수하여 마산으로 이동할 경우 뒤통수를 맞을 우려가 있었지만, 북한군 15사단은 동락리 전투 화령장 전투에서 연패하고 미군 포병의 집중포격까지 받아서 전투력이 크게 약화돼 있었으므로 위험을 감수할 만 하다고, 미 8군 사령부는 판단하였다.

이 당시 마산에는 미 제24사단 예하 제19연대, 제29연대, 제25사단 예하 제27연대 등 3개 연대의 미군 병력과 국군 민기식 대령, 김성은 중령이 이끄는 민 부대와 김 부대[7]들이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전력이 약화된 상태라서 6사단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되었다. 실제로 이들 중 2개 연대는 예하에 2개 대대씩만을 보유했을 정도로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어쨌든 미 제24사단 등은 25사단이 마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마산 방어를 맡아야 했다.

4. 정찰전[편집]

미 제25사단이 마산에 도착하기 전인 8월 1일, 미 제24사단장 존 H. 처치(John H. Church) 소장은 예하 제19연대 1대대에 중형 전차 5대와 장갑차 4대를 증강시켜 주면서, 마산 서쪽에 있으리라 판단하는 북 제6사단에 대한 위력정찰을 명령했다. 06시 30분에 위력정찰에 나선 1대대는, 가파른 고갯길[8]을 내려가던 도중 북한군에게 기습 공격을 받았다. 선두의 전차가 박격포탄에 맞고 돈좌 되고 정찰대 후미의 트럭도 대전차포에 맞아서 도로를 완전히 막게 되었으며, 결국 모든 차량이 파괴 되었다.

이 전투 이후에도 북한군은 괘방산을 점령하고 미 제19연대 1대대와 국군 제7보병사단(민기식 부대 일명 민 부대) 사이로 침투하여 박격포진지를 공격했다. 공군기의 오폭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백병전이 펼쳐졌지만, 19연대 1대대는 괘방산의 북한군을 몰아내어서 우측방의 위협을 제거했다. 또한 연대 예비였던 2대대가 침투한 북한군에 대한 역습을 감행하여 이들을 격퇴시켰다. 8월 2일 오후가 되면서 북한군의 공격은 중단되었다.

한편 길버트 체크(Gilbert Check) 중령이 대대장으로 있던 미 제25사단 예하 제27연대 예하 1대대에도 위력정찰 명령이 내려졌다. 셔먼 전차 4대와 1개 포대(제8야전포병대대 A포대)를 증원받은 1대대는 8월 2일 04시에 정찰을 개시했다. 이들은 무촌리[9] 인근 노변에서 잠자던 약 30명의 북한군을 기습했고 대부분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09시가 지났을 때 정찰대는 무촌리를 지났는데, 정찰기로부터 적 차량이 진주고개에서 철수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찰대는 진주고개에서 전차를 앞세우고 국도를 따라 공격했지만, 대전차포 사격으로 2대의 전차가 돈좌되었다. 이에 증원받은 포대로 대전차포를 침묵시켰고, 그 와중에 19연대를 우회하여 내려온 북한군이 후방에서 사격을 개시했다.

미 제27연대장 존 H. 마이켈리스(John H. Michaelis) 대령[10]은 다른 곳에서도 들어온 보고들을 종합하여 북한군 제6사단은 장군대산 고개에 있으며, 체크 대대를 공격하려 한다고 판단했으며, 17시에 제27연대 1대대에게 위력정찰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니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철수 명령을 받은 1대대 정찰대는 항공기의 엄호와 포병의 지원 하에 돈좌된 전차들을 견인하여 3일 새벽 1시에 27연대 본부가 있는 진동초등학교에 도착했다. 대대장 체크 중령은 이 전공으로 십자훈장을 수훈했다.[11]

5. 진동리지구 전투[편집]

5.1. 미 제27연대의 진동초등학교 전투[편집]

그런데 공교롭게도 6시간 뒤인 8월 3일 07시에 북한군이 미 제25사단 27연대 본부와 1대대(체크 대대)가 야영하고 있떤 진동초등학교를 기습했다. 북한군 6사단장 방호산 소장은, 체크 대대가 후퇴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대 본부에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 채, 휘하 제6사단 1연대를 동원하여 기습해 온 것이었다. 이때 아침을 먹고 휴식을 취하던 도중이었던 체크 대대는, 미군 경계병들이 배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접근해오는 북한군을 국군의 지원병인줄 알았다가 기습을 당했다.

미 제25사단 27연대장 존 H. 마이켈리스 대령은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사격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태연히 A중대장에게 북한군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중화기의 엄호사격 하에 A중대는 북한군을 격퇴 했다. 또 인근 고지 정상에서 미군은 차량에서 하차하는 대규모의 북한군을 발견했는데 이들은 마산으로 진격하려던 북 제6사단 1연대 소속의 1대대였다. 미 제8포병대대가 이들에게 포격을 가해서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체크 대대는 이 전투로 13명이 전사하고 40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확인된 북한군의 사체는 600여구에 달했다.

진동초등학교 전투 상황은 27연대에서 종군하다 직접 전투를 경험한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의 비망록 'War in Korea'(8장 'STAND OR DIE')에 생생하게 기술되어 있다.

5.2. 국군 해병대의 진동리 부근 전투[편집]

국군 서남지구전투사령관 이응준 소장은 대한민국 해병대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는 김성은 부대에게“마산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적을 진동리 서쪽에서 저지하여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따라 김성은 부대는 8월 1일 18시 마산을 떠나 22시 30분경에 봉암리 계곡에 도착했다.

김성은 부대는 8월 3일, 경남 진동리 서쪽 고사리에서 전진해오는 적 대대 규모 병력을 공격하여 전차 2대 트럭 4대 등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무전기 고장으로 사령관에게 보고는 하지 못했고, 진동리를 차단한 것으로 판단한 부대장은 함안으로 출발하여 8월 4일 13시 40분에 도착했다.

이 전공으로 김성은 부대는 8월 5일부로 국군 사상 세번째로 부대 장병 전원이 1계급 특진을 하였다.#[12]

8월 6일, 김성은 부대는 미 제25사단 제27연대에 배속되었고 야반산[13]을 공격하여 탈취했다. 다음날 마산으로 이동하여 집결하였다.

전투 이후 다시 진동리 지역으로 이동하여 방어임무를 수행했다.[14]

6. 미 제25사단의 도착과 증원[편집]

미 제25사단은 8월 3일 야간, 집결을 완료했다. 약 240km을 차량과 철도를 이용하여 36시간 만에 이동한 것이다. 워커 장군과 미 8군 사령부는 "유사 이래 가장 극적인 기동으로 부산을 구했다"고 기뻐했다. 8월 3일부터 25사단장 윌리엄 B. 킨(William B. Kean) 소장은 마산 방면의 모든 부대를 통합하여 지휘할 권한을 부여 받았다. 25사단이 8월 4일까지 방어지에 배치되는 한편 제24사단 예하 제19연대는 원대 복귀하게 되었다. 25사단은 마산으로 이동하던 도중인 8월 2일 제5연대전투단을 증원 받았으며, 8월 3일 8군의 예비대였던 제1해병여단도 증원 받았다. 이 당시 마산은 미 8군 예비대가 배치될 정도로 위험성이 높아져 있던 상태였다.

한편 북한군 제6사단도 제105전차여단 예하 제83모터사이클연대를 증원 받았다.

7. 킨 특수임무부대의 공격[편집]

서남부 전선의 전력이 강화되자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마산-진주 축선에서의 사단급 반격 작전을 계획했다. 이 반격에는 진주 일대 북한군을 격파함은 물론, 북한군 예비대를 진주 일대로 전개하도록 압박함으로써 대구 방면의 북한군 압력을 완화한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8월 6일, 25사단장 킨 소장의 이름을 딴 킨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Kean)가 편성되었는데, 이 임무대에는 미 제25사단에 제5연대전투단, 제1해병여단, 제89中전차대대, 해병 제1전차대대가 배속되었다. 임무대의 목표는 마산에서 출발하여 진주로 향하는 3개 도로를 타고 진격하여 진주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미 제25사단 35연대가 북쪽 도로를 타고 공격하며, 제5연대전투단이 진주고개를 공격하고, 제1해병여단이 진주 남동쪽을, 미 제25사단 24연대(민기식 부대 · 김성은 부대 · 경찰 배속)는 함안 도로를 확보하는 계획이었다. 워커 중장은 이를 위해 8월 5일부터 이틀간 항공력을 마산 일대에 집중할 것을 요청했다.

킨 임무대는 8월 7일 06시 30분에 공격을 개시했다. 미 제25사단 35연대는 항공 지원을 등에 업고 괘방산 일대의 북한군을 대파했다. 제5연대전투단은 진동리 도로를 따라 고성 방향으로 진출 했지만, 야반산에서 예하의 2대대가 포위 공격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고지를 점령한 해병 2대대는 식수를 공수 받았지만 극심한 더위로 인해 일사병 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이들은 하루 뒤인 8월 8일에 항공 지원하에 공격을 개시하여 북한군을 밀어냈다.
한편 해병 제3대대와 제24연대 제2대대는 진동리 일대의 감제고지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으나 별 진전이 없다가 3일째인 8월 9일에서야 진동리의 북한군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저항은 점차 거세지고 있었고, 35연대는 5연대전투단의 진출을 기다리기로 했다. 중앙도로를 따라 전진하던 5연대전투단은 8월 10일 야간에 기습을 받고, 11일 새벽에 공군의 도움을 받아 적을 격퇴했다. 5연대전투단은 35연대와 합류했고, 함께 진주고개로 진격했다.

8. 공격 중지와 봉암리 전투[편집]

한편 북방 대구의 전황이 악화되고 국군 제3사단이 포위되는 등 전선 상황이 나빠지면서, 제8군은 예비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킨 임무대는 공격을 중단하고 제1해병여단과 제5연대전투단의 배속은 해제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미 제25사단장 킨 소장은 신속한 이동을 위해, 5연대 예하의 2대대에 미리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8월 12일 당시 제5연대전투단은 봉암리 계곡[15]에 있었다. 철수 명령을 받은 5연대의 예하 2대대는 이미 계곡 바깥으로 물러난 뒤였지만 연대 본부와 3개 포병대대들은 아직 계곡 안에 있었다. 8월 12일 자정이 지나면서 사방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고, 5연대장은 연대가 포위 되었다고 판단하고 야간을 이용하여 후퇴를 결심했다. 연대 본부는 계곡을 빠져나왔지만 포병들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에 노출되었고, 이들은 악전고투 끝에 근접항공지원을 받고 새벽에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계곡 밖에 있던 2대대가 지원 요청을 받고 정오경에 도착 했지만 이미 전투는 끝난 뒤였다. 5연대를 증원하기로 되어 있던 24연대 3대대도 적의 공격을 받아서 이들을 지원하지 못했다. 결국 이 전투에서, 계곡에 있던 제555포병대대는 180명의 사상자와 105mm 포 8문을 상실했고, 제90포병대대 역시 190명의 사상자와 155mm 포 6문을 상실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봉암리는 이로 인해 ‘포병의 무덤’으로 일컬어졌다.

제5연대전투단과 제1해병여단이 군 예비대가 되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킨 임무대는 8월 16일에 해체되었다. 킨 임무대는 진주 탈환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임무대의 공격으로 북한군은 4,000명 이상의 병력을 손실했고 전차 13대를 상실했다.

9. 방어선 재편성과 고지전[편집]

미 제25사단은 방어선 재편성에 들어갔다. 8월 14일부터 예하의 35연대, 24연대, 제5연대전투단을 주저항선에 배치했고, 27연대는 군 예비로 전환 되었다. 미 제24사단은 낙동강 남쪽을 맡게 되었다.

한편 북한군은 예비 사단인 제7사단(제51연대 · 제52연대)을 8월 15일에 진주에 집결시키고 일부 병력은 통영과 여수에도 진출하였다. 또한 북 제6사단은 징집병 2,000명을 보충 받고, 마산 정면의 각 고지들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미 35연대, 24연대에 대해 각각 북 13연대와 북 15연대가 동원되었다. 35연대에 대한 공격은, 북한군이 야간 기습으로 진지를 돌파하면 포격과 폭격을 바탕으로 한 미군의 역습에 밀려나는 양상을 보였다. 며칠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13연대는 결국 8월 23일에 후퇴했다. 미 24연대는 북한군 15연대의 공격을 받았다. 15연대는 서북산 정상을 장악하고 둔덕탄광을 요새화하여 폭격에 의한 피해를 줄이는 한편 미군측의 보급로를 감제하고 후방지역도 관측했다. 수 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고, 미 24연대는 서북산을 상실하고 전투산[16]북부 일부마저 잃었다가, 미 전폭기의 집중지원으로 전투산을 수복했고, 미 제5연대가 서북산 탈환을 위한 반격에 나서서 서북산 정상을 점령했다. 양측의 집중 포격과 돌격이 반복된 결과, 서북산 정상의 주인은 8월 말까지 19차례나 바뀌었다.

최종적으로 미 제25사단은 마산 정면의 고지들을 지켜내어서 전체 작전에 큰 공헌을 했다. 8월 30일에는 군 예비로 차출 되었던 제27연대가 25사단으로 복귀 했고, 제5연대전투단이 제24사단에 배속 되었다.

10. 통영 상륙작전[편집]

  자세한 내용은 통영 상륙작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마산 정면에서 고지전이 벌어지고 있던 8월 17일, 북한군 제7사단 제51연대는 고성을 점령하고 통영까지 진출했다. 진해에서 정비중이던 대한민국 해병대 김성은 대령이 지휘하는 김성은부대는 2척의 함정으로 8월 17일 18시 통영에 기습 상륙했고, 18일부터 개시된 북한군의 역습을 공군기와 함선의 지원을 받아 격퇴했다. 이후 여러 차례의 북한군 공격을 격퇴한 김성은 부대는 고성, 통영, 거제 등지에 숨어 있던 북한군 선박을 찾아내어 격침시켰다. #

이후 원문고개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역습을 막아내었다.

11. 9월 공세[편집]

8월 하순, 마산 일대는 대체적으로 소강 상태였지만 북한군의 후방에선 병력 집결이 관측되고 있었다. 미 제25사단은 산과 철도를 아우르는 48km라는 비교적 넓은 정면을 방어하고 있었고, 예하 27연대는 사단 예비대가 되어 마산에 위치해 있었다.

북한군은 마산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면서 전차를 증원받고 제104치안연대와 제7사단을 추가 동원했다. 제105전차사단의 전차 20대와 제16기갑여단의 전차 43대를 지원 받은 6사단은 진주에 집결하여 부대 정비 및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고, 7사단은 의령 일대에 집결해 있었다. 북한군은 UN 공군의 폭격에도 남강에 수중교를 부설했고, 6사단과 7사단은 2개 도로를 따라 공세를 수행하기로 했다. 즉 6사단은 미 제35연대 1대대를 돌파하여 진주-마산도로를 따라 중리로 진출할 계획이었고, 7사단은 제35연대 2대대를 돌파하여 남지리-마산 간의 도로를 차단할 계획이었다.

8월 31일 23시 30분, 북한군은 2개 사단으로 총공격을 개시했다. 9월 1일에 북한군 7사단은 남강을 도하하여 35연대를 공격했다. 미군은 공군 지원과 VT신관을 사용하는 포격 지원을 받아 북한군을 저지 했으나, 미군 35연대 1대대와 2대대 사이의 간격이 뚫리면서 북한군의 대규모 병력이 후방 지역으로 침투했다. 35연대 1대대는 북한군의 정면 공격을 3차의 전투 끝에 저지했고, 북한군 제6사단 제13연대장 한일동 대좌가 여기서 사망했다.

한편 북한군의 공격 첫 날, 미 제25사단장 킨 소장은 워커 중장에게 8군 예비대인 27연대 2대대의 투입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킨 소장은 독단으로 마산에 있던 27연대 2대대로 하여금 35연대의 후방으로 침투한 북한군을 공격하도록 했다(후에 워커 중장은 이를 묵인했다). 이들은 폭우와 탄약 부족으로 고전하기도 했지만 9월 4일에는 침투한 북한군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특히 공중지원이 큰 역할을 했는데, 킨 소장도 “근접항공지원이 사단을 구했다”고 평했다. 25사단은 9월 1일부터 7일까지 후방지역에서만 북한군 사체 2,000여구를 매장했다. 한편 9월 8일과 9일에 쏟아진 폭우로 강의 수위가 2m나 높아짐에 따라 북한군 도하가 어려워지자, 25사단은 한 숨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25사단의 중앙을 방어했던 24연대는 방어선이 뚫리고 9월 1일에 함안을 상실했다. 공중지원을 받은 27연대 1대대가 반격을 실시하여 최초 진지를 수복하여 9월 4일에 24연대에 인계했으나 24연대는 5일 아침에 소규모 공격을 받고 다시 철수 했다. 킨 소장은 24연대의 빈번한 철수로 인해 작전에 큰 차질이 초래되었다고 24연대의 교체를 건의했지만 워커 중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군 6사단과 7사단은 해안선 일대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전투산, 서북산 일대에 포격을 집중시켰다. 9월 7일에 전투산이 북한군에게 점령되어, 킨 소장은 함안을 탈환했던 27연대 3대대에게 전투산 탈환을 명령했지만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후 24연대장 코리 중령은 공격을 일시 중단하고 집중적인 화력의 운용으로 적의 소모를 강요한 뒤 전투산을 탈환했다. 북한군은 9월 14일에 전투산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고, 24연대는 병력 소모가 심해서 철수했다.

이 공격 이후에 공세의 한계에 다다른 북한군은 공격을 자제하고 수세로 전환했다. 미 제25사단은 전투 내내 공세적인 방어로 북한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부산으로 향하는 서부 관문인 마산을 지켜냈다.

12. 양측의 피해[편집]

국군과 미군은 마산을 점령하고 이를 통해 부산까지 점령하려는 북한군의 45일간 공격을 막아내었다. 북한군은 미군의 적극적인 방어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북한군 6사단과 7사단은 수천명의 사상자와 포로 3천여 명 등의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군의 피해도 컸다. 전력이 감소된 제24사단 29연대는 임무대 편성 과정에서 해체되었다. 상술된 포병 피해를 포함해 1천여 명의 전사자와 3천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20명이 실종되었다.

당시 마산을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해군과 해병대의 중심지인 진해가 인접해 있었다는 점이 꼽히고 있다. 진해에서 이들을 빠르고 적극적으로 증편하여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이 문서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김성은 부대도 해병대다.)

13. 민간인의 피해[편집]

현재 제39보병사단이 함안군으로 이전하여서, 당시 격전지에 주둔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탓에 진양군(현 진주시)및 함안군 일대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발생했고, 이들 중 상당수는 파수, 신음, 입곡, 서북산이라는 오솔길 루트[17]로 마산과 김해로 빠져나갔다. 이후 이 일대는 상술한 전투들의 최전선이 된다. 창원군(현 창원시) 진전면 봉암리가 미군 포병의 무덤이었다면, 함안군 군북면의 원북역에서부터 하림리-수곡리 일대에 북한군 6사단의 전익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곳에서도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상술한 피난민들이 9월 이후 집으로 돌아온 후에, 미처 수습되지 못하고 들판에 버려진 양측의 시신들을 치웠다고 한다. 주민들에 의하면 "사람 키만큼 유독 높게 풀이 웃자란 곳에는 반드시 송장이 있더라"고 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8월 초에는 함안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는데, 서북산 루트로 탈출하지 못한 피난민 중 상당수는 의령 쪽으로 진로를 돌렸다가 8월 18일 발진한 미군 해군항공대 함재기의 기총소사에 참변을 당했다.[18] 이 곳은 "남산벌"이라고 불렸으며, 현재의 군북면 안도리 일대(위 지도의 A/29라 적힌 부분)인데 이 때문에 7월, 8월은 1980년대말까지도 군북 장터가 상당히 북적거렸다. 8월 초순에는 인민군한테 끌려갔다 생사불명이 된 사람들 집이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내고, 8월 중순에는 미군한테 포격과 폭격으로 죽은 사람들 집이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제사 준비를 하느라 장터가 북적거렸던 것이다.

특히 여항산 밑의 오곡리(새마을, 골마을) 및 사촌리 등의 골짜기 마을에는, 이 한날 한시에 제사 지내는 집이 많다. 후퇴하는 조선인민군 제6사단이 미처 피난가지 못한 장정들을 징발하여 전투에 투입하거나 노역에 동원했고, 이에 폭격에 죽거나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패잔병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어떤 주민도[19] 피난가던 도중 인민군에게 징발되어 군북에서 여항까지 노역에 시달리다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몇 몇과 함께 탈출했는데, 탈출한 사람들 외에는 모두, 전투 중 포격에 휘말려 죽었다고 한다. 일부 피난민이 명관리 뒤쪽(소어석터널쪽) 깊은 산중으로 피난갔지만 하필 그곳은 상술한 인민군 6사단 전익이 포진했던 방어산의 우측 날개 쪽으로, 이 쪽에는 인민군이 임시 보급기지를 지어놓았기 때문에 미군의 전략폭격 대상이 되었고 폭격에 휩쓸리고 말았다. 관련 증언 채집록 및 미군 문서를 살펴보면 여기 증언들이 모두 교차검증됨을 알 수 있다.

치열한 전투의 여파로 이 일대에는 불발탄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1980년대 말까지도 국민학교 방학 주의사항으로 항상 '불발탄 만지지 말고 발견하면 경찰이나 군 부대에 신고할 것'이란 내용이 따라붙었다. 실제로 1960년대 초반 군북초등학교 재학 중인 동네 아이들이 사촌리 상데미산 기슭까지 소 먹이러 갔다가, 산기슭에서 불발탄을 주운 후 폭사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포탄인 줄도 모르고 쇳덩이를 벗겨내 동네 엿장수에게 갖다주려고 무덤 상석에다 고폭탄을 두들겨댔다는 것이다.[20] 이외에도 일반인들이 나무를 하다 불발탄 뇌관을 잘못 건드려 폭사하거나 불구가 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21]

14. 여담[편집]

  • 진전면 봉암리 일대가 미군에게 워낙 출혈을 안겨주다 보니 아예 주요 전장이었던 서북산, 여항산 일대의 별명은 '각대미산'이 되어버렸다. 영어의 '갓 댐 잇[22]'이 몬데그린화된 것이다. 다만 '데미'리는 게 경남 사투리로 바위란 뜻이기 때문에 어원 자체는 확실치 않은데, 각대미산은 인근의 상데미산 이름이 미군에 의해 "저기 산 이름이 상데미라고? 갓뎀이다"라는 식으로 와전된 것으로도 여겨진다. 현재도 상데미산(661고지)의 이명으로 미군이 붙여준 이름인 '전투산(Mount of battle)'이란 이름이라든가, 사촌리와 오곡리 사이의 산 능선 이름은 '피바위능선'이라고 불리는 등 전쟁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는 지명이 많다.

     군북역 앞에서 바라본 마산 전투의 주요 전장. 군북에서 정남방을 보면 상데미산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 모양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이게 피바위다. 앞에 보이는 동네는 동촌리(새동네)이며, 골새미산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널따란 오곡리 골짜기가 숨겨져 있다. 이 천혜의 감제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한미연합군과 북한군은 45일간 혈투를 벌였다.
  • 창원시 마산회원구 무학산 정상부에는 산꼭대기부터 서마지기, 봉화산까지 능선부를 따라 교통호가 반쯤 무너진 채 남아 있는데, 이 당시 미 제24사단과 국군 해병대 등이 방어선을 쳤던 부분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교통호는 한국전쟁과 관련된 구조물은 아니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1989년 여름 당시 육군 최고위층의 지시로 후방에도 전방 수준의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공사로 진행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공사를 담당한 부대는 구 마산통합병원(현 월영마을 부지)에 위치한 39사단 예하 8358부대 1대대가 예비군과 함께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1950년 당시 이 교통호 능선 부분에서 촬영한 사진이 현재도 남아 있다. 부산독일문화원 원장 Jens-Olaf Walter 씨가 마산 전투 당시 마산에 주둔하던 미군이 찍은 사진을 기증했는데, 촬영자는 당시 미 25사단 소속 Donald L. Grovom 일병(PFC)이다.[23]
    좌측 사진 정중앙에 보이는 부분이 구 일본 조선주차군의 병영 자리로, 이후 일본 육군 조선군 제20사단이 쓰다가 해방 후 국군 제15연대가 창설되었다. 1954년에는 국군의무사령부가 이 곳에서 발족했으며 1990년대까지 국군지구마산병원(마통)이 주둔하다가 현재는 월영마을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이 부대 시설은 6.25가 터지자 미 육군 24, 25사단도 사용했고 1950년대 말까지 미군이 주둔해서 구 일본인 거류지가 있던 두월동에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시장'이 생기는 배경이 됐다.[24]
  • 80~90년대 마산에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정신의학과 전문 병원이었던 배신경정신과 병원장 배대균 선생은 현재 은퇴 후 마산 전투에 대한 미군 기록을 찾아내어 정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기사보기), 기념사업회장도 맡고 있다. 2021년 초에는 단행본으로 자료 일부를 출판하였다.
  • 2022년 5월 22일, 현충일을 앞두고 (사)ROTC경남지구에서 서북산전적비를 참배하는 산행에 MBC경남에서 따라가 취재한 영상이 유튜브를 통해 공개되었다. #MBC경남 영상
  • 동년 6월 6일 현충일, 이 날 취재가 YTN에도 보도되었는데 상술한 배대균 선생의 인터뷰도 포함되었다. #YTN 영상
  • 2024년 5월, JTV 진전방송[26]에서 마산서부지역전투 기념사업회에서 만든 영상을 업로드했다.# 내용은 본 문서 내용을 요약한 정도이며 39사단 장병들이 서북산 일대에서 유해발굴 영현 작업을 하는 모습이 포함되어 있다.

15. 출처[편집]

《6·25 전쟁사 제5집 낙동강선 방어작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8

 
 
 
 
[1] 중리역에서 감천 방향으로 인입선 철로가 있었다는 어르신들의 증언과 맞아떨어진다.[2] 안민고개는 진해에서 창원 넘어가는 고개로, 당시 대한민국 해군의 본거지인 진해에서 가장 가까운 방어선이었다. 즉 진해를 지키던 해병대들은 최전선인 진동리로 모두 이동하고, 이들의 빈 자리를 아직 장교 임관을 하지 않은 해사 생도들이 배치되어 최후방어선을 지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쓰고 있는 철모는 구 일본 해군이 진해요항부에 남기고 간 육전대(해병) 철모로, 미군의 M1 철모 보급이 해사 생도에게까지 닿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3] 포화속으로,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등.[4] 인천 상륙 작전 당시 연안부두에 상륙하기 위한 나무 사다리조차 일본에서 급히 제작하여 공수해야 했을 정도로 물류사정이 엉망이었다. 전쟁 발발 직후 가용 가능한 공업자원이라고는 부산, 마산, 대구 세 도시의 경공업 공장뿐이었다.[5] 경전선 항목 참조. 삼랑진-(신)마산간은 마산선, 마산-진주간은 경남선으로 이름지어져 있었지만 사실상 한 계통처럼 운행했고, 1966년 순천과 진주가 이어지며 경전선으로 개칭된다.[6] 현재의 월영마을 자리로 원래는 러시아 조계지이던 곳을 일본이 빼앗아 일본 육군 조선주차군 주둔지로 사용했고 해방 후 국군이 접수해서 군부대로 계속 사용했다. 6.25 후에는 국군의무사령부가 창설되었고 상당 기간동안 미군이 주둔하기도 했다. 경남의 향토방위 사단인 제39보병사단은 6.25 이후 강원도 전방에서 창설된 부대이며 이후 현재의 위수지역인 경남으로 이동한 부대이다.[7] 구 일본군 육군의 경우 정식 편제명 외에도 해당 부대의 지휘관 이름을 따서 "나카지마 부대", "오노다 부대" 등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었는데 광복 후 창군 과정에서 일본 영향을 받은 흔적이다. 김성은 부대가 아니라 김 부대라고 부르는 것이 지휘관의 성만 딴 흔적인데 미군도 이 편이 부르기 편해서 별칭을 비공식적으로 존중해줬다.[8] 현재의 1004번 지방도가 지나는 사봉고개의 남쪽 사면. 이 고개의 서쪽 봉우리가 괘방산이고, 그 북쪽이 방어산으로 함안군과 진주시의 경계를 이룬다. 높이는 600~700고지 정도이지만 가야읍내에서도 보일 만큼 인근 일대에서는 높은 산이다. 과거 자료를 찾아볼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사봉고개를 지나는 지방도가 과거 1032번으로 할당되어 있었으며, 1004번 지방도는 현재의 사봉고개가 아닌 의령읍~가야읍간 79번 국도 루트에 할당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연혁은 79번 국도 참조. 그래서 과거 자료로 대조하려면 1004번 지방도가 아닌 1032번 지방도를 찾아야 한다.[9] 현재의 일반성면 사무소 소재지의 서북쪽 야산. 괘방산(함안방면)과 진전면(마산 진동방면)의 길이 평촌리에서 합쳐진 직후, 여기서부터 진주고개를 넘어가면 바로 현재의 진주 시가지 외곽이다.[10] 1개 전차중대와 1개 포병대대와 함께 다부동 전투에 투입된 그 양반, 맞다.[11] 지도상에서 보면 정찰대가 교전한 곳은 현재의 진주시 문산읍/일반성면 일대이고 진동초등학교는 한참 뒤쪽인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이다. 그야말로 적진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온 것.[12] 건군 이래 국군 최초 부대 전 장병 일계급 특진 기록을 세웠다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 세번째 부대 전 장병 일계급 특진 기록이다. 첫번째는 1950년 7월 6일부터 7일까지의 동락리 전투에서 육군 제6보병사단 7연대가 연대장 비롯 연대원 전원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고, 두번째는 7월 17일부터 25일까지 화령장 전투에서 육군 제17연대가 연대장 비롯 연대원 전원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다.[13] 현재의 진북면 인곡리에 있는 산. 한때 국군마산통합병원이 마산으로부터 진동으로 옮겨가 이 산자락에 있었다.[14] 8월 1일부터 7일까지 김성은 부대가 이동한 거리를 도상에서 찍어 보면 거의 웬만한 행군거리 이상으로 기동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진동초등학교→진전면 봉암리→(여항면 경유)→함안면→진북면 야반산→(차량이동 추정)→마산→진동면 진동리.[15] 마산회원구에 있는 봉암수원지가 아니라 마산합포구 진전면 봉암리다. 진주시(구 진양군)과 접해있으며 인근 군북면 방어산에 진을 친 인민군 6사단 전초와는 산 두개 너머 거리.[16] 661고지에 미군이 붙인 이름이다.[17] 서북산은 현재도 등산로외 길이 없다. 파수로 넘어가는 길은 우마차로가 있었다가 90년대 말에야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2차선 포장되었다. 그런데 현재는 제39보병사단이 이전하며 생긴, 군 관련 시설 때문에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18] 6.25 전쟁 내내 빈번하게 일어난 사례임. 상공에서 적진 내에 움직이는 무리만 보이면 무조건 쏴제끼고 봤기 때문이다. 평택역 폭격의 경우는 피난민 중 일부가 평택역 지붕에 태극기를 펼쳐놓아서 폭격과 기총소사를 피할 수 있었다. 임진강 공방전의 경우도 경기 북부나 황해도 등지에서 피난나오다 강변에서 폭격에 불귀의 객이 되거나 이산가족이 된 경우가 매우 많다.[19] 후술하는 나무꾼 농민의 형님 집.[20] 부산광역시 북구 교육청장을 역임한 김정외 장학사는 이 당시 군북초등학교 재직중인 평교사였는데, 이 날 휴일 당직을 서고 있었다고 한다. 사고 소리를 듣고 현장으로 달려갔을 때 "손은 저기 널찌가 있고 몸뚱이는 저기 소나무 위에 걸려있고..." 라며 피해 아동들의 시신이 조각나서 여기저기 널려 있는 참상이 벌어져 있었다고 술회. 군에서 취급하는 인마살상용 폭발물이 민간으로 흘러나갈 경우 얼마나 무서운 결과가 벌어지는지 알 수 있다.[21] 대암리 마을 주민의 증언으로는, 이 때 불발탄 뇌관을 잘못 건드린 나무꾼 한 분이 얼굴에 파편이 박히고 오른손이 날아가서 이후 마산 역전이나 시외터미널(둘 다 지금의 위치가 아니다. 마산역은 현 마산중부경찰서-옛 마산경찰서- 앞에 있던 신마산역이고 시외터미널은 3.15 의거탑 앞에 있었다.) 앞에서 품팔이나 행상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흘러 어느 날 밤 꿈에 미군이 보이더니 다음 날 주택복권 2등 당첨이 되었다고 한다. 당사자 말로는 "전쟁통에 송장 치워준 군인 같은데 꿈에 보여서 나 데리러 왔나 싶었더니만 은혜 갚으려고 그랬나 보다"라고... 믿거나 말거나식이지만 동네에서는 유명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당사자는 2018년 작고하였다.[22] "God Damn it!" 직역하면 '이런 천벌을 받을~' 이란 별 것 없어 보이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이런 씨발!' 정도의 격한 욕설이다.[23] 이 사람은 마산 전투 시기 내내 고지에서 내려다 본 사진을 많이 찍었다. 현재도 flickr에 그로봄 씨가 촬영한 사진들이 자료로 남아있다.#[24] 사진에서 보듯 현재의 경남대 인근에는 시가지가 없었기 때문에 구 일본인 조계지(신마산) 북쪽에 시장이 형성된 것. 마산의 시가지는 원마산(현 어시장 일대)과 신마산이 떨어져 있었고 중간의 빈 지역에 학교 등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었다. 이 곳을 광복 전까지 일본 육군이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5] 2010년 남해안대로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2번 국도 14번 국도의 일부였다.[26] SBS 네트워크 가맹국인 JTV 전주방송이 아니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일대를 관장하는 지역케이블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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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전투

최근 수정 시각: 2024-09-22 15: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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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미군의 이동4. 정찰전5. 진동리지구 전투
5.1. 미 제27연대의 진동초등학교 전투5.2. 국군 해병대의 진동리 부근 전투
6. 미 제25사단의 도착과 증원7. 킨 특수임무부대의 공격8. 공격 중지와 봉암리 전투9. 방어선 재편성과 고지전10. 통영 상륙작전11. 9월 공세12. 양측의 피해13. 민간인의 피해14. 여담15. 출처
 
마산 전투 당시의 UN군 및 북한군 배치도
 
마산 전투 당시 격전이 벌어졌던 최전선인 군북 상데미산(전투산) 일대 능선.
지도 서쪽 바깥부분이 조선인민군 6사단 본대가 있던 방어산이고, 여항산 남동쪽이 서북산이며 그 아래가 미군 포병대가 진입한 봉암리 쪽이다.
 
헐 다운 방어선을 구축한 미군 전차와 병력들. 창원시 마산회원구 중리역 인근으로 추정된다.[1]# 옆의 하천은 광려천으로 제방 공사를 하기 전에는 저런 모습이었다고 한다.
 
진해 안민고개 인근에 임시 방사선을 구축한 해군사관학교생도들[2]

1. 개요[편집]

마산 전투는 1950년 8월 2일에 시작되어 9월 14일까지 계속된, 마산(現 경상남도 창원시)을 점령하려는 조선인민군(이하 북한군)과 마산 일대를 방어하던 유엔군(대한민국 국군 ·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들) 사이에 있었던 전투로, 6.25 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의 최남단에 속한다.

동 시기에 마산의 북쪽에서 벌어진 다부동 전투와 학도병의 활약 등을 소재로 몇 번 영화화되어서[3] 인지도가 있는 포항, 영천 방면 전선에 비해서, 비교적 국지적이었고 덜 알려졌지만 못지 않은 중요성을 지녔던 전투이다. 마산과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생각해보면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북한군 제6사단의 우회기동을 놓친 미 8군은 마산 일대에 방어 병력을 배치해 놓지 않았다가 뒤늦게 6사단의 기도를 파악하고 나서야 달성군 일대 전선에서 미 25사단을 빼내 부랴부랴 마산 방면으로 전환했는데, 당시에는 도로망이 정비된 현재와 다르게 대구로 일단 집결한 후 철도로 밀양을 거쳐 삼랑진의 낙동강철교를 통해 우회해야 했다. 5번 국도는 당시에도 존재했으나 비포장 우마차로였던데다가, 낙동강 도하지점인 창녕군 남지읍에는 백사장만 펼쳐져 있고 다리가 없어서 나룻배로 건너는 곳이었기에 대규모 병력과 물자 이동은 불가능했다. 특히 전쟁 발발 직후 한반도에 급속 전개된 주일미군은 대규모 도하작전이 가능한 장비도 그다지 없었다.[4] 이 때문에 미 25사단이 아슬아슬하게 마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령부 안팎으로 낙동강 방어선이 그대로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기도 했다.

2. 배경[편집]

전쟁 당시 마산은 부산에 이은 경상남도 제2의 도시로, 인구는 약 10만 명이었다. 부산에서 서쪽 57km, 진주에서 동쪽으로 60km 지점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도로 · 철도 · 해로 등 교통의 요지로 부산의 서부 관문이었다. 철도교통으로는 진주-삼랑진을 연결하는 경남선[5]과 창원-진해를 연결하는 진해선이 있었다. 도로로는 사천-마산의 우회도로(33번 국도), 창원-부산의 도로(14번 국도), 진해-부산의 도로(2번 국도) 등이 있었다. 마산항 가까이에는 대한민국 육군 제15연대[6] 주둔지와 대한민국 해군의 본거지인 진해가 있었다.

북한군은 서울 점령 이후에 퇴각하며 지연전을 벌이는 국군과 미군을 상대로 가열찬 추격전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방호산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6사단(제1 · 13 · 15연대)은 1개 모터사이클연대(제83모터싸이클연대)와 함께 서해 방면의 국군을 계속 추격하면서 목포 · 여수를 점령하고 마산을 점령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마산을 점령하면 적의 숨통을 조르는 것이다."
조선인민군 제6사단장 방호산 소장
제13연대는 1950년 7월 24일에 목포항을 점령했고, 제1연대는 다음날인 25일에 여수항을 점령했다. 6사단은 점령한 두 항구의 방어를 위해 각각 1개 대대씩의 주둔 병력을 남겼고, 이외의 주력은 28일에 하동에 집결 시켰다. 29일부터 6사단은 마산 방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제15연대가 30일에 진주-마산간 도로를 차단했고 31일에는 진주를 점령했다.

한편 미 제8군은 7월부터의 후퇴 과정 도중, 북한군 제4사단과 제6사단, 2개 사단의 행방을 놓친 상태였다. 미군은 7월 31일에서야 포로 심문과 감청을 통해 6사단의 마산 점령 기도를 포착했다. 마산 전투를 통틀어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미 8군은 마산으로의 우회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당장 마산에 투입할 예비대가 없어 전선에서 병력을 빼와야 할 판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북한군 6사단이 여수와 목포를 점령하느라 2일을 지체했다는 점이었다. 워커 장군이 말했듯이 "만일 북한군 제6사단이 호남의 항구를 점령하는 우회공격을 선택하지 않고 모든 전력을 집중해 부산을 향해 쇄도해 왔다면 아마 나는 이 적을 저지하기 위한 병력을 투입할 시간적인 여유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3. 미군의 이동[편집]

미 제8군은 북한군의 마산으로의 움직임을 포착하고서 8월 1일, 상주에 주둔해 있던 제25사단(제24연대 · 제27연대 · 제35연대)에게 마산 방면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미 25사단은 이미 전선에서 북한군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상주에서 철수하여 마산으로 이동할 경우 뒤통수를 맞을 우려가 있었지만, 북한군 15사단은 동락리 전투 화령장 전투에서 연패하고 미군 포병의 집중포격까지 받아서 전투력이 크게 약화돼 있었으므로 위험을 감수할 만 하다고, 미 8군 사령부는 판단하였다.

이 당시 마산에는 미 제24사단 예하 제19연대, 제29연대, 제25사단 예하 제27연대 등 3개 연대의 미군 병력과 국군 민기식 대령, 김성은 중령이 이끄는 민 부대와 김 부대[7]들이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전력이 약화된 상태라서 6사단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되었다. 실제로 이들 중 2개 연대는 예하에 2개 대대씩만을 보유했을 정도로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어쨌든 미 제24사단 등은 25사단이 마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마산 방어를 맡아야 했다.

4. 정찰전[편집]

미 제25사단이 마산에 도착하기 전인 8월 1일, 미 제24사단장 존 H. 처치(John H. Church) 소장은 예하 제19연대 1대대에 중형 전차 5대와 장갑차 4대를 증강시켜 주면서, 마산 서쪽에 있으리라 판단하는 북 제6사단에 대한 위력정찰을 명령했다. 06시 30분에 위력정찰에 나선 1대대는, 가파른 고갯길[8]을 내려가던 도중 북한군에게 기습 공격을 받았다. 선두의 전차가 박격포탄에 맞고 돈좌 되고 정찰대 후미의 트럭도 대전차포에 맞아서 도로를 완전히 막게 되었으며, 결국 모든 차량이 파괴 되었다.

이 전투 이후에도 북한군은 괘방산을 점령하고 미 제19연대 1대대와 국군 제7보병사단(민기식 부대 일명 민 부대) 사이로 침투하여 박격포진지를 공격했다. 공군기의 오폭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백병전이 펼쳐졌지만, 19연대 1대대는 괘방산의 북한군을 몰아내어서 우측방의 위협을 제거했다. 또한 연대 예비였던 2대대가 침투한 북한군에 대한 역습을 감행하여 이들을 격퇴시켰다. 8월 2일 오후가 되면서 북한군의 공격은 중단되었다.

한편 길버트 체크(Gilbert Check) 중령이 대대장으로 있던 미 제25사단 예하 제27연대 예하 1대대에도 위력정찰 명령이 내려졌다. 셔먼 전차 4대와 1개 포대(제8야전포병대대 A포대)를 증원받은 1대대는 8월 2일 04시에 정찰을 개시했다. 이들은 무촌리[9] 인근 노변에서 잠자던 약 30명의 북한군을 기습했고 대부분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09시가 지났을 때 정찰대는 무촌리를 지났는데, 정찰기로부터 적 차량이 진주고개에서 철수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찰대는 진주고개에서 전차를 앞세우고 국도를 따라 공격했지만, 대전차포 사격으로 2대의 전차가 돈좌되었다. 이에 증원받은 포대로 대전차포를 침묵시켰고, 그 와중에 19연대를 우회하여 내려온 북한군이 후방에서 사격을 개시했다.

미 제27연대장 존 H. 마이켈리스(John H. Michaelis) 대령[10]은 다른 곳에서도 들어온 보고들을 종합하여 북한군 제6사단은 장군대산 고개에 있으며, 체크 대대를 공격하려 한다고 판단했으며, 17시에 제27연대 1대대에게 위력정찰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니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철수 명령을 받은 1대대 정찰대는 항공기의 엄호와 포병의 지원 하에 돈좌된 전차들을 견인하여 3일 새벽 1시에 27연대 본부가 있는 진동초등학교에 도착했다. 대대장 체크 중령은 이 전공으로 십자훈장을 수훈했다.[11]

5. 진동리지구 전투[편집]

5.1. 미 제27연대의 진동초등학교 전투[편집]

그런데 공교롭게도 6시간 뒤인 8월 3일 07시에 북한군이 미 제25사단 27연대 본부와 1대대(체크 대대)가 야영하고 있떤 진동초등학교를 기습했다. 북한군 6사단장 방호산 소장은, 체크 대대가 후퇴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대 본부에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 채, 휘하 제6사단 1연대를 동원하여 기습해 온 것이었다. 이때 아침을 먹고 휴식을 취하던 도중이었던 체크 대대는, 미군 경계병들이 배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접근해오는 북한군을 국군의 지원병인줄 알았다가 기습을 당했다.

미 제25사단 27연대장 존 H. 마이켈리스 대령은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사격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태연히 A중대장에게 북한군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중화기의 엄호사격 하에 A중대는 북한군을 격퇴 했다. 또 인근 고지 정상에서 미군은 차량에서 하차하는 대규모의 북한군을 발견했는데 이들은 마산으로 진격하려던 북 제6사단 1연대 소속의 1대대였다. 미 제8포병대대가 이들에게 포격을 가해서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체크 대대는 이 전투로 13명이 전사하고 40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확인된 북한군의 사체는 600여구에 달했다.

진동초등학교 전투 상황은 27연대에서 종군하다 직접 전투를 경험한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의 비망록 'War in Korea'(8장 'STAND OR DIE')에 생생하게 기술되어 있다.

5.2. 국군 해병대의 진동리 부근 전투[편집]

국군 서남지구전투사령관 이응준 소장은 대한민국 해병대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는 김성은 부대에게“마산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적을 진동리 서쪽에서 저지하여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따라 김성은 부대는 8월 1일 18시 마산을 떠나 22시 30분경에 봉암리 계곡에 도착했다.

김성은 부대는 8월 3일, 경남 진동리 서쪽 고사리에서 전진해오는 적 대대 규모 병력을 공격하여 전차 2대 트럭 4대 등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무전기 고장으로 사령관에게 보고는 하지 못했고, 진동리를 차단한 것으로 판단한 부대장은 함안으로 출발하여 8월 4일 13시 40분에 도착했다.

이 전공으로 김성은 부대는 8월 5일부로 국군 사상 세번째로 부대 장병 전원이 1계급 특진을 하였다.#[12]

8월 6일, 김성은 부대는 미 제25사단 제27연대에 배속되었고 야반산[13]을 공격하여 탈취했다. 다음날 마산으로 이동하여 집결하였다.

전투 이후 다시 진동리 지역으로 이동하여 방어임무를 수행했다.[14]

6. 미 제25사단의 도착과 증원[편집]

미 제25사단은 8월 3일 야간, 집결을 완료했다. 약 240km을 차량과 철도를 이용하여 36시간 만에 이동한 것이다. 워커 장군과 미 8군 사령부는 "유사 이래 가장 극적인 기동으로 부산을 구했다"고 기뻐했다. 8월 3일부터 25사단장 윌리엄 B. 킨(William B. Kean) 소장은 마산 방면의 모든 부대를 통합하여 지휘할 권한을 부여 받았다. 25사단이 8월 4일까지 방어지에 배치되는 한편 제24사단 예하 제19연대는 원대 복귀하게 되었다. 25사단은 마산으로 이동하던 도중인 8월 2일 제5연대전투단을 증원 받았으며, 8월 3일 8군의 예비대였던 제1해병여단도 증원 받았다. 이 당시 마산은 미 8군 예비대가 배치될 정도로 위험성이 높아져 있던 상태였다.

한편 북한군 제6사단도 제105전차여단 예하 제83모터사이클연대를 증원 받았다.

7. 킨 특수임무부대의 공격[편집]

서남부 전선의 전력이 강화되자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마산-진주 축선에서의 사단급 반격 작전을 계획했다. 이 반격에는 진주 일대 북한군을 격파함은 물론, 북한군 예비대를 진주 일대로 전개하도록 압박함으로써 대구 방면의 북한군 압력을 완화한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8월 6일, 25사단장 킨 소장의 이름을 딴 킨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Kean)가 편성되었는데, 이 임무대에는 미 제25사단에 제5연대전투단, 제1해병여단, 제89中전차대대, 해병 제1전차대대가 배속되었다. 임무대의 목표는 마산에서 출발하여 진주로 향하는 3개 도로를 타고 진격하여 진주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미 제25사단 35연대가 북쪽 도로를 타고 공격하며, 제5연대전투단이 진주고개를 공격하고, 제1해병여단이 진주 남동쪽을, 미 제25사단 24연대(민기식 부대 · 김성은 부대 · 경찰 배속)는 함안 도로를 확보하는 계획이었다. 워커 중장은 이를 위해 8월 5일부터 이틀간 항공력을 마산 일대에 집중할 것을 요청했다.

킨 임무대는 8월 7일 06시 30분에 공격을 개시했다. 미 제25사단 35연대는 항공 지원을 등에 업고 괘방산 일대의 북한군을 대파했다. 제5연대전투단은 진동리 도로를 따라 고성 방향으로 진출 했지만, 야반산에서 예하의 2대대가 포위 공격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고지를 점령한 해병 2대대는 식수를 공수 받았지만 극심한 더위로 인해 일사병 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이들은 하루 뒤인 8월 8일에 항공 지원하에 공격을 개시하여 북한군을 밀어냈다.
한편 해병 제3대대와 제24연대 제2대대는 진동리 일대의 감제고지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으나 별 진전이 없다가 3일째인 8월 9일에서야 진동리의 북한군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저항은 점차 거세지고 있었고, 35연대는 5연대전투단의 진출을 기다리기로 했다. 중앙도로를 따라 전진하던 5연대전투단은 8월 10일 야간에 기습을 받고, 11일 새벽에 공군의 도움을 받아 적을 격퇴했다. 5연대전투단은 35연대와 합류했고, 함께 진주고개로 진격했다.

8. 공격 중지와 봉암리 전투[편집]

한편 북방 대구의 전황이 악화되고 국군 제3사단이 포위되는 등 전선 상황이 나빠지면서, 제8군은 예비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킨 임무대는 공격을 중단하고 제1해병여단과 제5연대전투단의 배속은 해제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미 제25사단장 킨 소장은 신속한 이동을 위해, 5연대 예하의 2대대에 미리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8월 12일 당시 제5연대전투단은 봉암리 계곡[15]에 있었다. 철수 명령을 받은 5연대의 예하 2대대는 이미 계곡 바깥으로 물러난 뒤였지만 연대 본부와 3개 포병대대들은 아직 계곡 안에 있었다. 8월 12일 자정이 지나면서 사방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고, 5연대장은 연대가 포위 되었다고 판단하고 야간을 이용하여 후퇴를 결심했다. 연대 본부는 계곡을 빠져나왔지만 포병들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에 노출되었고, 이들은 악전고투 끝에 근접항공지원을 받고 새벽에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계곡 밖에 있던 2대대가 지원 요청을 받고 정오경에 도착 했지만 이미 전투는 끝난 뒤였다. 5연대를 증원하기로 되어 있던 24연대 3대대도 적의 공격을 받아서 이들을 지원하지 못했다. 결국 이 전투에서, 계곡에 있던 제555포병대대는 180명의 사상자와 105mm 포 8문을 상실했고, 제90포병대대 역시 190명의 사상자와 155mm 포 6문을 상실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봉암리는 이로 인해 ‘포병의 무덤’으로 일컬어졌다.

제5연대전투단과 제1해병여단이 군 예비대가 되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킨 임무대는 8월 16일에 해체되었다. 킨 임무대는 진주 탈환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임무대의 공격으로 북한군은 4,000명 이상의 병력을 손실했고 전차 13대를 상실했다.

9. 방어선 재편성과 고지전[편집]

미 제25사단은 방어선 재편성에 들어갔다. 8월 14일부터 예하의 35연대, 24연대, 제5연대전투단을 주저항선에 배치했고, 27연대는 군 예비로 전환 되었다. 미 제24사단은 낙동강 남쪽을 맡게 되었다.

한편 북한군은 예비 사단인 제7사단(제51연대 · 제52연대)을 8월 15일에 진주에 집결시키고 일부 병력은 통영과 여수에도 진출하였다. 또한 북 제6사단은 징집병 2,000명을 보충 받고, 마산 정면의 각 고지들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미 35연대, 24연대에 대해 각각 북 13연대와 북 15연대가 동원되었다. 35연대에 대한 공격은, 북한군이 야간 기습으로 진지를 돌파하면 포격과 폭격을 바탕으로 한 미군의 역습에 밀려나는 양상을 보였다. 며칠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13연대는 결국 8월 23일에 후퇴했다. 미 24연대는 북한군 15연대의 공격을 받았다. 15연대는 서북산 정상을 장악하고 둔덕탄광을 요새화하여 폭격에 의한 피해를 줄이는 한편 미군측의 보급로를 감제하고 후방지역도 관측했다. 수 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고, 미 24연대는 서북산을 상실하고 전투산[16]북부 일부마저 잃었다가, 미 전폭기의 집중지원으로 전투산을 수복했고, 미 제5연대가 서북산 탈환을 위한 반격에 나서서 서북산 정상을 점령했다. 양측의 집중 포격과 돌격이 반복된 결과, 서북산 정상의 주인은 8월 말까지 19차례나 바뀌었다.

최종적으로 미 제25사단은 마산 정면의 고지들을 지켜내어서 전체 작전에 큰 공헌을 했다. 8월 30일에는 군 예비로 차출 되었던 제27연대가 25사단으로 복귀 했고, 제5연대전투단이 제24사단에 배속 되었다.

10. 통영 상륙작전[편집]

  자세한 내용은 통영 상륙작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마산 정면에서 고지전이 벌어지고 있던 8월 17일, 북한군 제7사단 제51연대는 고성을 점령하고 통영까지 진출했다. 진해에서 정비중이던 대한민국 해병대 김성은 대령이 지휘하는 김성은부대는 2척의 함정으로 8월 17일 18시 통영에 기습 상륙했고, 18일부터 개시된 북한군의 역습을 공군기와 함선의 지원을 받아 격퇴했다. 이후 여러 차례의 북한군 공격을 격퇴한 김성은 부대는 고성, 통영, 거제 등지에 숨어 있던 북한군 선박을 찾아내어 격침시켰다. #

이후 원문고개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역습을 막아내었다.

11. 9월 공세[편집]

8월 하순, 마산 일대는 대체적으로 소강 상태였지만 북한군의 후방에선 병력 집결이 관측되고 있었다. 미 제25사단은 산과 철도를 아우르는 48km라는 비교적 넓은 정면을 방어하고 있었고, 예하 27연대는 사단 예비대가 되어 마산에 위치해 있었다.

북한군은 마산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면서 전차를 증원받고 제104치안연대와 제7사단을 추가 동원했다. 제105전차사단의 전차 20대와 제16기갑여단의 전차 43대를 지원 받은 6사단은 진주에 집결하여 부대 정비 및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고, 7사단은 의령 일대에 집결해 있었다. 북한군은 UN 공군의 폭격에도 남강에 수중교를 부설했고, 6사단과 7사단은 2개 도로를 따라 공세를 수행하기로 했다. 즉 6사단은 미 제35연대 1대대를 돌파하여 진주-마산도로를 따라 중리로 진출할 계획이었고, 7사단은 제35연대 2대대를 돌파하여 남지리-마산 간의 도로를 차단할 계획이었다.

8월 31일 23시 30분, 북한군은 2개 사단으로 총공격을 개시했다. 9월 1일에 북한군 7사단은 남강을 도하하여 35연대를 공격했다. 미군은 공군 지원과 VT신관을 사용하는 포격 지원을 받아 북한군을 저지 했으나, 미군 35연대 1대대와 2대대 사이의 간격이 뚫리면서 북한군의 대규모 병력이 후방 지역으로 침투했다. 35연대 1대대는 북한군의 정면 공격을 3차의 전투 끝에 저지했고, 북한군 제6사단 제13연대장 한일동 대좌가 여기서 사망했다.

한편 북한군의 공격 첫 날, 미 제25사단장 킨 소장은 워커 중장에게 8군 예비대인 27연대 2대대의 투입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킨 소장은 독단으로 마산에 있던 27연대 2대대로 하여금 35연대의 후방으로 침투한 북한군을 공격하도록 했다(후에 워커 중장은 이를 묵인했다). 이들은 폭우와 탄약 부족으로 고전하기도 했지만 9월 4일에는 침투한 북한군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특히 공중지원이 큰 역할을 했는데, 킨 소장도 “근접항공지원이 사단을 구했다”고 평했다. 25사단은 9월 1일부터 7일까지 후방지역에서만 북한군 사체 2,000여구를 매장했다. 한편 9월 8일과 9일에 쏟아진 폭우로 강의 수위가 2m나 높아짐에 따라 북한군 도하가 어려워지자, 25사단은 한 숨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25사단의 중앙을 방어했던 24연대는 방어선이 뚫리고 9월 1일에 함안을 상실했다. 공중지원을 받은 27연대 1대대가 반격을 실시하여 최초 진지를 수복하여 9월 4일에 24연대에 인계했으나 24연대는 5일 아침에 소규모 공격을 받고 다시 철수 했다. 킨 소장은 24연대의 빈번한 철수로 인해 작전에 큰 차질이 초래되었다고 24연대의 교체를 건의했지만 워커 중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군 6사단과 7사단은 해안선 일대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전투산, 서북산 일대에 포격을 집중시켰다. 9월 7일에 전투산이 북한군에게 점령되어, 킨 소장은 함안을 탈환했던 27연대 3대대에게 전투산 탈환을 명령했지만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후 24연대장 코리 중령은 공격을 일시 중단하고 집중적인 화력의 운용으로 적의 소모를 강요한 뒤 전투산을 탈환했다. 북한군은 9월 14일에 전투산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고, 24연대는 병력 소모가 심해서 철수했다.

이 공격 이후에 공세의 한계에 다다른 북한군은 공격을 자제하고 수세로 전환했다. 미 제25사단은 전투 내내 공세적인 방어로 북한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부산으로 향하는 서부 관문인 마산을 지켜냈다.

12. 양측의 피해[편집]

국군과 미군은 마산을 점령하고 이를 통해 부산까지 점령하려는 북한군의 45일간 공격을 막아내었다. 북한군은 미군의 적극적인 방어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북한군 6사단과 7사단은 수천명의 사상자와 포로 3천여 명 등의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군의 피해도 컸다. 전력이 감소된 제24사단 29연대는 임무대 편성 과정에서 해체되었다. 상술된 포병 피해를 포함해 1천여 명의 전사자와 3천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20명이 실종되었다.

당시 마산을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해군과 해병대의 중심지인 진해가 인접해 있었다는 점이 꼽히고 있다. 진해에서 이들을 빠르고 적극적으로 증편하여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이 문서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김성은 부대도 해병대다.)

13. 민간인의 피해[편집]

현재 제39보병사단이 함안군으로 이전하여서, 당시 격전지에 주둔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탓에 진양군(현 진주시)및 함안군 일대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발생했고, 이들 중 상당수는 파수, 신음, 입곡, 서북산이라는 오솔길 루트[17]로 마산과 김해로 빠져나갔다. 이후 이 일대는 상술한 전투들의 최전선이 된다. 창원군(현 창원시) 진전면 봉암리가 미군 포병의 무덤이었다면, 함안군 군북면의 원북역에서부터 하림리-수곡리 일대에 북한군 6사단의 전익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곳에서도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상술한 피난민들이 9월 이후 집으로 돌아온 후에, 미처 수습되지 못하고 들판에 버려진 양측의 시신들을 치웠다고 한다. 주민들에 의하면 "사람 키만큼 유독 높게 풀이 웃자란 곳에는 반드시 송장이 있더라"고 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8월 초에는 함안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는데, 서북산 루트로 탈출하지 못한 피난민 중 상당수는 의령 쪽으로 진로를 돌렸다가 8월 18일 발진한 미군 해군항공대 함재기의 기총소사에 참변을 당했다.[18] 이 곳은 "남산벌"이라고 불렸으며, 현재의 군북면 안도리 일대(위 지도의 A/29라 적힌 부분)인데 이 때문에 7월, 8월은 1980년대말까지도 군북 장터가 상당히 북적거렸다. 8월 초순에는 인민군한테 끌려갔다 생사불명이 된 사람들 집이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내고, 8월 중순에는 미군한테 포격과 폭격으로 죽은 사람들 집이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제사 준비를 하느라 장터가 북적거렸던 것이다.

특히 여항산 밑의 오곡리(새마을, 골마을) 및 사촌리 등의 골짜기 마을에는, 이 한날 한시에 제사 지내는 집이 많다. 후퇴하는 조선인민군 제6사단이 미처 피난가지 못한 장정들을 징발하여 전투에 투입하거나 노역에 동원했고, 이에 폭격에 죽거나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패잔병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어떤 주민도[19] 피난가던 도중 인민군에게 징발되어 군북에서 여항까지 노역에 시달리다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몇 몇과 함께 탈출했는데, 탈출한 사람들 외에는 모두, 전투 중 포격에 휘말려 죽었다고 한다. 일부 피난민이 명관리 뒤쪽(소어석터널쪽) 깊은 산중으로 피난갔지만 하필 그곳은 상술한 인민군 6사단 전익이 포진했던 방어산의 우측 날개 쪽으로, 이 쪽에는 인민군이 임시 보급기지를 지어놓았기 때문에 미군의 전략폭격 대상이 되었고 폭격에 휩쓸리고 말았다. 관련 증언 채집록 및 미군 문서를 살펴보면 여기 증언들이 모두 교차검증됨을 알 수 있다.

치열한 전투의 여파로 이 일대에는 불발탄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1980년대 말까지도 국민학교 방학 주의사항으로 항상 '불발탄 만지지 말고 발견하면 경찰이나 군 부대에 신고할 것'이란 내용이 따라붙었다. 실제로 1960년대 초반 군북초등학교 재학 중인 동네 아이들이 사촌리 상데미산 기슭까지 소 먹이러 갔다가, 산기슭에서 불발탄을 주운 후 폭사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포탄인 줄도 모르고 쇳덩이를 벗겨내 동네 엿장수에게 갖다주려고 무덤 상석에다 고폭탄을 두들겨댔다는 것이다.[20] 이외에도 일반인들이 나무를 하다 불발탄 뇌관을 잘못 건드려 폭사하거나 불구가 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21]

14. 여담[편집]

  • 진전면 봉암리 일대가 미군에게 워낙 출혈을 안겨주다 보니 아예 주요 전장이었던 서북산, 여항산 일대의 별명은 '각대미산'이 되어버렸다. 영어의 '갓 댐 잇[22]'이 몬데그린화된 것이다. 다만 '데미'리는 게 경남 사투리로 바위란 뜻이기 때문에 어원 자체는 확실치 않은데, 각대미산은 인근의 상데미산 이름이 미군에 의해 "저기 산 이름이 상데미라고? 갓뎀이다"라는 식으로 와전된 것으로도 여겨진다. 현재도 상데미산(661고지)의 이명으로 미군이 붙여준 이름인 '전투산(Mount of battle)'이란 이름이라든가, 사촌리와 오곡리 사이의 산 능선 이름은 '피바위능선'이라고 불리는 등 전쟁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는 지명이 많다.

     군북역 앞에서 바라본 마산 전투의 주요 전장. 군북에서 정남방을 보면 상데미산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 모양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이게 피바위다. 앞에 보이는 동네는 동촌리(새동네)이며, 골새미산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널따란 오곡리 골짜기가 숨겨져 있다. 이 천혜의 감제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한미연합군과 북한군은 45일간 혈투를 벌였다.
  • 창원시 마산회원구 무학산 정상부에는 산꼭대기부터 서마지기, 봉화산까지 능선부를 따라 교통호가 반쯤 무너진 채 남아 있는데, 이 당시 미 제24사단과 국군 해병대 등이 방어선을 쳤던 부분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교통호는 한국전쟁과 관련된 구조물은 아니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1989년 여름 당시 육군 최고위층의 지시로 후방에도 전방 수준의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공사로 진행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공사를 담당한 부대는 구 마산통합병원(현 월영마을 부지)에 위치한 39사단 예하 8358부대 1대대가 예비군과 함께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1950년 당시 이 교통호 능선 부분에서 촬영한 사진이 현재도 남아 있다. 부산독일문화원 원장 Jens-Olaf Walter 씨가 마산 전투 당시 마산에 주둔하던 미군이 찍은 사진을 기증했는데, 촬영자는 당시 미 25사단 소속 Donald L. Grovom 일병(PFC)이다.[23]
    좌측 사진 정중앙에 보이는 부분이 구 일본 조선주차군의 병영 자리로, 이후 일본 육군 조선군 제20사단이 쓰다가 해방 후 국군 제15연대가 창설되었다. 1954년에는 국군의무사령부가 이 곳에서 발족했으며 1990년대까지 국군지구마산병원(마통)이 주둔하다가 현재는 월영마을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이 부대 시설은 6.25가 터지자 미 육군 24, 25사단도 사용했고 1950년대 말까지 미군이 주둔해서 구 일본인 거류지가 있던 두월동에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시장'이 생기는 배경이 됐다.[24]
  • 80~90년대 마산에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정신의학과 전문 병원이었던 배신경정신과 병원장 배대균 선생은 현재 은퇴 후 마산 전투에 대한 미군 기록을 찾아내어 정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기사보기), 기념사업회장도 맡고 있다. 2021년 초에는 단행본으로 자료 일부를 출판하였다.
  • 2022년 5월 22일, 현충일을 앞두고 (사)ROTC경남지구에서 서북산전적비를 참배하는 산행에 MBC경남에서 따라가 취재한 영상이 유튜브를 통해 공개되었다. #MBC경남 영상
  • 동년 6월 6일 현충일, 이 날 취재가 YTN에도 보도되었는데 상술한 배대균 선생의 인터뷰도 포함되었다. #YTN 영상
  • 2024년 5월, JTV 진전방송[26]에서 마산서부지역전투 기념사업회에서 만든 영상을 업로드했다.# 내용은 본 문서 내용을 요약한 정도이며 39사단 장병들이 서북산 일대에서 유해발굴 영현 작업을 하는 모습이 포함되어 있다.

15. 출처[편집]

《6·25 전쟁사 제5집 낙동강선 방어작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8

[1] 중리역에서 감천 방향으로 인입선 철로가 있었다는 어르신들의 증언과 맞아떨어진다.[2] 안민고개는 진해에서 창원 넘어가는 고개로, 당시 대한민국 해군의 본거지인 진해에서 가장 가까운 방어선이었다. 즉 진해를 지키던 해병대들은 최전선인 진동리로 모두 이동하고, 이들의 빈 자리를 아직 장교 임관을 하지 않은 해사 생도들이 배치되어 최후방어선을 지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쓰고 있는 철모는 구 일본 해군이 진해요항부에 남기고 간 육전대(해병) 철모로, 미군의 M1 철모 보급이 해사 생도에게까지 닿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3] 포화속으로,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등.[4] 인천 상륙 작전 당시 연안부두에 상륙하기 위한 나무 사다리조차 일본에서 급히 제작하여 공수해야 했을 정도로 물류사정이 엉망이었다. 전쟁 발발 직후 가용 가능한 공업자원이라고는 부산, 마산, 대구 세 도시의 경공업 공장뿐이었다.[5] 경전선 항목 참조. 삼랑진-(신)마산간은 마산선, 마산-진주간은 경남선으로 이름지어져 있었지만 사실상 한 계통처럼 운행했고, 1966년 순천과 진주가 이어지며 경전선으로 개칭된다.[6] 현재의 월영마을 자리로 원래는 러시아 조계지이던 곳을 일본이 빼앗아 일본 육군 조선주차군 주둔지로 사용했고 해방 후 국군이 접수해서 군부대로 계속 사용했다. 6.25 후에는 국군의무사령부가 창설되었고 상당 기간동안 미군이 주둔하기도 했다. 경남의 향토방위 사단인 제39보병사단은 6.25 이후 강원도 전방에서 창설된 부대이며 이후 현재의 위수지역인 경남으로 이동한 부대이다.[7] 구 일본군 육군의 경우 정식 편제명 외에도 해당 부대의 지휘관 이름을 따서 "나카지마 부대", "오노다 부대" 등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었는데 광복 후 창군 과정에서 일본 영향을 받은 흔적이다. 김성은 부대가 아니라 김 부대라고 부르는 것이 지휘관의 성만 딴 흔적인데 미군도 이 편이 부르기 편해서 별칭을 비공식적으로 존중해줬다.[8] 현재의 1004번 지방도가 지나는 사봉고개의 남쪽 사면. 이 고개의 서쪽 봉우리가 괘방산이고, 그 북쪽이 방어산으로 함안군과 진주시의 경계를 이룬다. 높이는 600~700고지 정도이지만 가야읍내에서도 보일 만큼 인근 일대에서는 높은 산이다. 과거 자료를 찾아볼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사봉고개를 지나는 지방도가 과거 1032번으로 할당되어 있었으며, 1004번 지방도는 현재의 사봉고개가 아닌 의령읍~가야읍간 79번 국도 루트에 할당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연혁은 79번 국도 참조. 그래서 과거 자료로 대조하려면 1004번 지방도가 아닌 1032번 지방도를 찾아야 한다.[9] 현재의 일반성면 사무소 소재지의 서북쪽 야산. 괘방산(함안방면)과 진전면(마산 진동방면)의 길이 평촌리에서 합쳐진 직후, 여기서부터 진주고개를 넘어가면 바로 현재의 진주 시가지 외곽이다.[10] 1개 전차중대와 1개 포병대대와 함께 다부동 전투에 투입된 그 양반, 맞다.[11] 지도상에서 보면 정찰대가 교전한 곳은 현재의 진주시 문산읍/일반성면 일대이고 진동초등학교는 한참 뒤쪽인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이다. 그야말로 적진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온 것.[12] 건군 이래 국군 최초 부대 전 장병 일계급 특진 기록을 세웠다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 세번째 부대 전 장병 일계급 특진 기록이다. 첫번째는 1950년 7월 6일부터 7일까지의 동락리 전투에서 육군 제6보병사단 7연대가 연대장 비롯 연대원 전원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고, 두번째는 7월 17일부터 25일까지 화령장 전투에서 육군 제17연대가 연대장 비롯 연대원 전원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다.[13] 현재의 진북면 인곡리에 있는 산. 한때 국군마산통합병원이 마산으로부터 진동으로 옮겨가 이 산자락에 있었다.[14] 8월 1일부터 7일까지 김성은 부대가 이동한 거리를 도상에서 찍어 보면 거의 웬만한 행군거리 이상으로 기동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진동초등학교→진전면 봉암리→(여항면 경유)→함안면→진북면 야반산→(차량이동 추정)→마산→진동면 진동리.[15] 마산회원구에 있는 봉암수원지가 아니라 마산합포구 진전면 봉암리다. 진주시(구 진양군)과 접해있으며 인근 군북면 방어산에 진을 친 인민군 6사단 전초와는 산 두개 너머 거리.[16] 661고지에 미군이 붙인 이름이다.[17] 서북산은 현재도 등산로외 길이 없다. 파수로 넘어가는 길은 우마차로가 있었다가 90년대 말에야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2차선 포장되었다. 그런데 현재는 제39보병사단이 이전하며 생긴, 군 관련 시설 때문에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18] 6.25 전쟁 내내 빈번하게 일어난 사례임. 상공에서 적진 내에 움직이는 무리만 보이면 무조건 쏴제끼고 봤기 때문이다. 평택역 폭격의 경우는 피난민 중 일부가 평택역 지붕에 태극기를 펼쳐놓아서 폭격과 기총소사를 피할 수 있었다. 임진강 공방전의 경우도 경기 북부나 황해도 등지에서 피난나오다 강변에서 폭격에 불귀의 객이 되거나 이산가족이 된 경우가 매우 많다.[19] 후술하는 나무꾼 농민의 형님 집.[20] 부산광역시 북구 교육청장을 역임한 김정외 장학사는 이 당시 군북초등학교 재직중인 평교사였는데, 이 날 휴일 당직을 서고 있었다고 한다. 사고 소리를 듣고 현장으로 달려갔을 때 "손은 저기 널찌가 있고 몸뚱이는 저기 소나무 위에 걸려있고..." 라며 피해 아동들의 시신이 조각나서 여기저기 널려 있는 참상이 벌어져 있었다고 술회. 군에서 취급하는 인마살상용 폭발물이 민간으로 흘러나갈 경우 얼마나 무서운 결과가 벌어지는지 알 수 있다.[21] 대암리 마을 주민의 증언으로는, 이 때 불발탄 뇌관을 잘못 건드린 나무꾼 한 분이 얼굴에 파편이 박히고 오른손이 날아가서 이후 마산 역전이나 시외터미널(둘 다 지금의 위치가 아니다. 마산역은 현 마산중부경찰서-옛 마산경찰서- 앞에 있던 신마산역이고 시외터미널은 3.15 의거탑 앞에 있었다.) 앞에서 품팔이나 행상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흘러 어느 날 밤 꿈에 미군이 보이더니 다음 날 주택복권 2등 당첨이 되었다고 한다. 당사자 말로는 "전쟁통에 송장 치워준 군인 같은데 꿈에 보여서 나 데리러 왔나 싶었더니만 은혜 갚으려고 그랬나 보다"라고... 믿거나 말거나식이지만 동네에서는 유명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당사자는 2018년 작고하였다.[22] "God Damn it!" 직역하면 '이런 천벌을 받을~' 이란 별 것 없어 보이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이런 씨발!' 정도의 격한 욕설이다.[23] 이 사람은 마산 전투 시기 내내 고지에서 내려다 본 사진을 많이 찍었다. 현재도 flickr에 그로봄 씨가 촬영한 사진들이 자료로 남아있다.#[24] 사진에서 보듯 현재의 경남대 인근에는 시가지가 없었기 때문에 구 일본인 조계지(신마산) 북쪽에 시장이 형성된 것. 마산의 시가지는 원마산(현 어시장 일대)과 신마산이 떨어져 있었고 중간의 빈 지역에 학교 등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었다. 이 곳을 광복 전까지 일본 육군이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5] 2010년 남해안대로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2번 국도 14번 국도의 일부였다.[26] SBS 네트워크 가맹국인 JTV 전주방송이 아니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일대를 관장하는 지역케이블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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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전투

최근 수정 시각: 2024-09-22 15: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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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미군의 이동4. 정찰전5. 진동리지구 전투
5.1. 미 제27연대의 진동초등학교 전투5.2. 국군 해병대의 진동리 부근 전투
6. 미 제25사단의 도착과 증원7. 킨 특수임무부대의 공격8. 공격 중지와 봉암리 전투9. 방어선 재편성과 고지전10. 통영 상륙작전11. 9월 공세12. 양측의 피해13. 민간인의 피해14. 여담15. 출처
 
마산 전투 당시의 UN군 및 북한군 배치도
 
마산 전투 당시 격전이 벌어졌던 최전선인 군북 상데미산(전투산) 일대 능선.
지도 서쪽 바깥부분이 조선인민군 6사단 본대가 있던 방어산이고, 여항산 남동쪽이 서북산이며 그 아래가 미군 포병대가 진입한 봉암리 쪽이다.
 
헐 다운 방어선을 구축한 미군 전차와 병력들. 창원시 마산회원구 중리역 인근으로 추정된다.[1]# 옆의 하천은 광려천으로 제방 공사를 하기 전에는 저런 모습이었다고 한다.
 
진해 안민고개 인근에 임시 방사선을 구축한 해군사관학교생도들[2]

1. 개요[편집]

마산 전투는 1950년 8월 2일에 시작되어 9월 14일까지 계속된, 마산(現 경상남도 창원시)을 점령하려는 조선인민군(이하 북한군)과 마산 일대를 방어하던 유엔군(대한민국 국군 ·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들) 사이에 있었던 전투로, 6.25 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의 최남단에 속한다.

동 시기에 마산의 북쪽에서 벌어진 다부동 전투와 학도병의 활약 등을 소재로 몇 번 영화화되어서[3] 인지도가 있는 포항, 영천 방면 전선에 비해서, 비교적 국지적이었고 덜 알려졌지만 못지 않은 중요성을 지녔던 전투이다. 마산과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생각해보면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북한군 제6사단의 우회기동을 놓친 미 8군은 마산 일대에 방어 병력을 배치해 놓지 않았다가 뒤늦게 6사단의 기도를 파악하고 나서야 달성군 일대 전선에서 미 25사단을 빼내 부랴부랴 마산 방면으로 전환했는데, 당시에는 도로망이 정비된 현재와 다르게 대구로 일단 집결한 후 철도로 밀양을 거쳐 삼랑진의 낙동강철교를 통해 우회해야 했다. 5번 국도는 당시에도 존재했으나 비포장 우마차로였던데다가, 낙동강 도하지점인 창녕군 남지읍에는 백사장만 펼쳐져 있고 다리가 없어서 나룻배로 건너는 곳이었기에 대규모 병력과 물자 이동은 불가능했다. 특히 전쟁 발발 직후 한반도에 급속 전개된 주일미군은 대규모 도하작전이 가능한 장비도 그다지 없었다.[4] 이 때문에 미 25사단이 아슬아슬하게 마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령부 안팎으로 낙동강 방어선이 그대로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기도 했다.

2. 배경[편집]

전쟁 당시 마산은 부산에 이은 경상남도 제2의 도시로, 인구는 약 10만 명이었다. 부산에서 서쪽 57km, 진주에서 동쪽으로 60km 지점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도로 · 철도 · 해로 등 교통의 요지로 부산의 서부 관문이었다. 철도교통으로는 진주-삼랑진을 연결하는 경남선[5]과 창원-진해를 연결하는 진해선이 있었다. 도로로는 사천-마산의 우회도로(33번 국도), 창원-부산의 도로(14번 국도), 진해-부산의 도로(2번 국도) 등이 있었다. 마산항 가까이에는 대한민국 육군 제15연대[6] 주둔지와 대한민국 해군의 본거지인 진해가 있었다.

북한군은 서울 점령 이후에 퇴각하며 지연전을 벌이는 국군과 미군을 상대로 가열찬 추격전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방호산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6사단(제1 · 13 · 15연대)은 1개 모터사이클연대(제83모터싸이클연대)와 함께 서해 방면의 국군을 계속 추격하면서 목포 · 여수를 점령하고 마산을 점령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마산을 점령하면 적의 숨통을 조르는 것이다."
조선인민군 제6사단장 방호산 소장
제13연대는 1950년 7월 24일에 목포항을 점령했고, 제1연대는 다음날인 25일에 여수항을 점령했다. 6사단은 점령한 두 항구의 방어를 위해 각각 1개 대대씩의 주둔 병력을 남겼고, 이외의 주력은 28일에 하동에 집결 시켰다. 29일부터 6사단은 마산 방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제15연대가 30일에 진주-마산간 도로를 차단했고 31일에는 진주를 점령했다.

한편 미 제8군은 7월부터의 후퇴 과정 도중, 북한군 제4사단과 제6사단, 2개 사단의 행방을 놓친 상태였다. 미군은 7월 31일에서야 포로 심문과 감청을 통해 6사단의 마산 점령 기도를 포착했다. 마산 전투를 통틀어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미 8군은 마산으로의 우회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당장 마산에 투입할 예비대가 없어 전선에서 병력을 빼와야 할 판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북한군 6사단이 여수와 목포를 점령하느라 2일을 지체했다는 점이었다. 워커 장군이 말했듯이 "만일 북한군 제6사단이 호남의 항구를 점령하는 우회공격을 선택하지 않고 모든 전력을 집중해 부산을 향해 쇄도해 왔다면 아마 나는 이 적을 저지하기 위한 병력을 투입할 시간적인 여유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3. 미군의 이동[편집]

미 제8군은 북한군의 마산으로의 움직임을 포착하고서 8월 1일, 상주에 주둔해 있던 제25사단(제24연대 · 제27연대 · 제35연대)에게 마산 방면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미 25사단은 이미 전선에서 북한군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상주에서 철수하여 마산으로 이동할 경우 뒤통수를 맞을 우려가 있었지만, 북한군 15사단은 동락리 전투 화령장 전투에서 연패하고 미군 포병의 집중포격까지 받아서 전투력이 크게 약화돼 있었으므로 위험을 감수할 만 하다고, 미 8군 사령부는 판단하였다.

이 당시 마산에는 미 제24사단 예하 제19연대, 제29연대, 제25사단 예하 제27연대 등 3개 연대의 미군 병력과 국군 민기식 대령, 김성은 중령이 이끄는 민 부대와 김 부대[7]들이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전력이 약화된 상태라서 6사단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되었다. 실제로 이들 중 2개 연대는 예하에 2개 대대씩만을 보유했을 정도로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어쨌든 미 제24사단 등은 25사단이 마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마산 방어를 맡아야 했다.

4. 정찰전[편집]

미 제25사단이 마산에 도착하기 전인 8월 1일, 미 제24사단장 존 H. 처치(John H. Church) 소장은 예하 제19연대 1대대에 중형 전차 5대와 장갑차 4대를 증강시켜 주면서, 마산 서쪽에 있으리라 판단하는 북 제6사단에 대한 위력정찰을 명령했다. 06시 30분에 위력정찰에 나선 1대대는, 가파른 고갯길[8]을 내려가던 도중 북한군에게 기습 공격을 받았다. 선두의 전차가 박격포탄에 맞고 돈좌 되고 정찰대 후미의 트럭도 대전차포에 맞아서 도로를 완전히 막게 되었으며, 결국 모든 차량이 파괴 되었다.

이 전투 이후에도 북한군은 괘방산을 점령하고 미 제19연대 1대대와 국군 제7보병사단(민기식 부대 일명 민 부대) 사이로 침투하여 박격포진지를 공격했다. 공군기의 오폭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백병전이 펼쳐졌지만, 19연대 1대대는 괘방산의 북한군을 몰아내어서 우측방의 위협을 제거했다. 또한 연대 예비였던 2대대가 침투한 북한군에 대한 역습을 감행하여 이들을 격퇴시켰다. 8월 2일 오후가 되면서 북한군의 공격은 중단되었다.

한편 길버트 체크(Gilbert Check) 중령이 대대장으로 있던 미 제25사단 예하 제27연대 예하 1대대에도 위력정찰 명령이 내려졌다. 셔먼 전차 4대와 1개 포대(제8야전포병대대 A포대)를 증원받은 1대대는 8월 2일 04시에 정찰을 개시했다. 이들은 무촌리[9] 인근 노변에서 잠자던 약 30명의 북한군을 기습했고 대부분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09시가 지났을 때 정찰대는 무촌리를 지났는데, 정찰기로부터 적 차량이 진주고개에서 철수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찰대는 진주고개에서 전차를 앞세우고 국도를 따라 공격했지만, 대전차포 사격으로 2대의 전차가 돈좌되었다. 이에 증원받은 포대로 대전차포를 침묵시켰고, 그 와중에 19연대를 우회하여 내려온 북한군이 후방에서 사격을 개시했다.

미 제27연대장 존 H. 마이켈리스(John H. Michaelis) 대령[10]은 다른 곳에서도 들어온 보고들을 종합하여 북한군 제6사단은 장군대산 고개에 있으며, 체크 대대를 공격하려 한다고 판단했으며, 17시에 제27연대 1대대에게 위력정찰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니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철수 명령을 받은 1대대 정찰대는 항공기의 엄호와 포병의 지원 하에 돈좌된 전차들을 견인하여 3일 새벽 1시에 27연대 본부가 있는 진동초등학교에 도착했다. 대대장 체크 중령은 이 전공으로 십자훈장을 수훈했다.[11]

5. 진동리지구 전투[편집]

5.1. 미 제27연대의 진동초등학교 전투[편집]

그런데 공교롭게도 6시간 뒤인 8월 3일 07시에 북한군이 미 제25사단 27연대 본부와 1대대(체크 대대)가 야영하고 있떤 진동초등학교를 기습했다. 북한군 6사단장 방호산 소장은, 체크 대대가 후퇴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대 본부에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 채, 휘하 제6사단 1연대를 동원하여 기습해 온 것이었다. 이때 아침을 먹고 휴식을 취하던 도중이었던 체크 대대는, 미군 경계병들이 배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접근해오는 북한군을 국군의 지원병인줄 알았다가 기습을 당했다.

미 제25사단 27연대장 존 H. 마이켈리스 대령은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사격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태연히 A중대장에게 북한군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중화기의 엄호사격 하에 A중대는 북한군을 격퇴 했다. 또 인근 고지 정상에서 미군은 차량에서 하차하는 대규모의 북한군을 발견했는데 이들은 마산으로 진격하려던 북 제6사단 1연대 소속의 1대대였다. 미 제8포병대대가 이들에게 포격을 가해서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체크 대대는 이 전투로 13명이 전사하고 40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확인된 북한군의 사체는 600여구에 달했다.

진동초등학교 전투 상황은 27연대에서 종군하다 직접 전투를 경험한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의 비망록 'War in Korea'(8장 'STAND OR DIE')에 생생하게 기술되어 있다.

5.2. 국군 해병대의 진동리 부근 전투[편집]

국군 서남지구전투사령관 이응준 소장은 대한민국 해병대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는 김성은 부대에게“마산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적을 진동리 서쪽에서 저지하여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따라 김성은 부대는 8월 1일 18시 마산을 떠나 22시 30분경에 봉암리 계곡에 도착했다.

김성은 부대는 8월 3일, 경남 진동리 서쪽 고사리에서 전진해오는 적 대대 규모 병력을 공격하여 전차 2대 트럭 4대 등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무전기 고장으로 사령관에게 보고는 하지 못했고, 진동리를 차단한 것으로 판단한 부대장은 함안으로 출발하여 8월 4일 13시 40분에 도착했다.

이 전공으로 김성은 부대는 8월 5일부로 국군 사상 세번째로 부대 장병 전원이 1계급 특진을 하였다.#[12]

8월 6일, 김성은 부대는 미 제25사단 제27연대에 배속되었고 야반산[13]을 공격하여 탈취했다. 다음날 마산으로 이동하여 집결하였다.

전투 이후 다시 진동리 지역으로 이동하여 방어임무를 수행했다.[14]

6. 미 제25사단의 도착과 증원[편집]

미 제25사단은 8월 3일 야간, 집결을 완료했다. 약 240km을 차량과 철도를 이용하여 36시간 만에 이동한 것이다. 워커 장군과 미 8군 사령부는 "유사 이래 가장 극적인 기동으로 부산을 구했다"고 기뻐했다. 8월 3일부터 25사단장 윌리엄 B. 킨(William B. Kean) 소장은 마산 방면의 모든 부대를 통합하여 지휘할 권한을 부여 받았다. 25사단이 8월 4일까지 방어지에 배치되는 한편 제24사단 예하 제19연대는 원대 복귀하게 되었다. 25사단은 마산으로 이동하던 도중인 8월 2일 제5연대전투단을 증원 받았으며, 8월 3일 8군의 예비대였던 제1해병여단도 증원 받았다. 이 당시 마산은 미 8군 예비대가 배치될 정도로 위험성이 높아져 있던 상태였다.

한편 북한군 제6사단도 제105전차여단 예하 제83모터사이클연대를 증원 받았다.

7. 킨 특수임무부대의 공격[편집]

서남부 전선의 전력이 강화되자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마산-진주 축선에서의 사단급 반격 작전을 계획했다. 이 반격에는 진주 일대 북한군을 격파함은 물론, 북한군 예비대를 진주 일대로 전개하도록 압박함으로써 대구 방면의 북한군 압력을 완화한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8월 6일, 25사단장 킨 소장의 이름을 딴 킨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Kean)가 편성되었는데, 이 임무대에는 미 제25사단에 제5연대전투단, 제1해병여단, 제89中전차대대, 해병 제1전차대대가 배속되었다. 임무대의 목표는 마산에서 출발하여 진주로 향하는 3개 도로를 타고 진격하여 진주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미 제25사단 35연대가 북쪽 도로를 타고 공격하며, 제5연대전투단이 진주고개를 공격하고, 제1해병여단이 진주 남동쪽을, 미 제25사단 24연대(민기식 부대 · 김성은 부대 · 경찰 배속)는 함안 도로를 확보하는 계획이었다. 워커 중장은 이를 위해 8월 5일부터 이틀간 항공력을 마산 일대에 집중할 것을 요청했다.

킨 임무대는 8월 7일 06시 30분에 공격을 개시했다. 미 제25사단 35연대는 항공 지원을 등에 업고 괘방산 일대의 북한군을 대파했다. 제5연대전투단은 진동리 도로를 따라 고성 방향으로 진출 했지만, 야반산에서 예하의 2대대가 포위 공격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고지를 점령한 해병 2대대는 식수를 공수 받았지만 극심한 더위로 인해 일사병 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이들은 하루 뒤인 8월 8일에 항공 지원하에 공격을 개시하여 북한군을 밀어냈다.
한편 해병 제3대대와 제24연대 제2대대는 진동리 일대의 감제고지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으나 별 진전이 없다가 3일째인 8월 9일에서야 진동리의 북한군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저항은 점차 거세지고 있었고, 35연대는 5연대전투단의 진출을 기다리기로 했다. 중앙도로를 따라 전진하던 5연대전투단은 8월 10일 야간에 기습을 받고, 11일 새벽에 공군의 도움을 받아 적을 격퇴했다. 5연대전투단은 35연대와 합류했고, 함께 진주고개로 진격했다.

8. 공격 중지와 봉암리 전투[편집]

한편 북방 대구의 전황이 악화되고 국군 제3사단이 포위되는 등 전선 상황이 나빠지면서, 제8군은 예비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킨 임무대는 공격을 중단하고 제1해병여단과 제5연대전투단의 배속은 해제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미 제25사단장 킨 소장은 신속한 이동을 위해, 5연대 예하의 2대대에 미리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8월 12일 당시 제5연대전투단은 봉암리 계곡[15]에 있었다. 철수 명령을 받은 5연대의 예하 2대대는 이미 계곡 바깥으로 물러난 뒤였지만 연대 본부와 3개 포병대대들은 아직 계곡 안에 있었다. 8월 12일 자정이 지나면서 사방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고, 5연대장은 연대가 포위 되었다고 판단하고 야간을 이용하여 후퇴를 결심했다. 연대 본부는 계곡을 빠져나왔지만 포병들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에 노출되었고, 이들은 악전고투 끝에 근접항공지원을 받고 새벽에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계곡 밖에 있던 2대대가 지원 요청을 받고 정오경에 도착 했지만 이미 전투는 끝난 뒤였다. 5연대를 증원하기로 되어 있던 24연대 3대대도 적의 공격을 받아서 이들을 지원하지 못했다. 결국 이 전투에서, 계곡에 있던 제555포병대대는 180명의 사상자와 105mm 포 8문을 상실했고, 제90포병대대 역시 190명의 사상자와 155mm 포 6문을 상실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봉암리는 이로 인해 ‘포병의 무덤’으로 일컬어졌다.

제5연대전투단과 제1해병여단이 군 예비대가 되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킨 임무대는 8월 16일에 해체되었다. 킨 임무대는 진주 탈환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임무대의 공격으로 북한군은 4,000명 이상의 병력을 손실했고 전차 13대를 상실했다.

9. 방어선 재편성과 고지전[편집]

미 제25사단은 방어선 재편성에 들어갔다. 8월 14일부터 예하의 35연대, 24연대, 제5연대전투단을 주저항선에 배치했고, 27연대는 군 예비로 전환 되었다. 미 제24사단은 낙동강 남쪽을 맡게 되었다.

한편 북한군은 예비 사단인 제7사단(제51연대 · 제52연대)을 8월 15일에 진주에 집결시키고 일부 병력은 통영과 여수에도 진출하였다. 또한 북 제6사단은 징집병 2,000명을 보충 받고, 마산 정면의 각 고지들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미 35연대, 24연대에 대해 각각 북 13연대와 북 15연대가 동원되었다. 35연대에 대한 공격은, 북한군이 야간 기습으로 진지를 돌파하면 포격과 폭격을 바탕으로 한 미군의 역습에 밀려나는 양상을 보였다. 며칠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13연대는 결국 8월 23일에 후퇴했다. 미 24연대는 북한군 15연대의 공격을 받았다. 15연대는 서북산 정상을 장악하고 둔덕탄광을 요새화하여 폭격에 의한 피해를 줄이는 한편 미군측의 보급로를 감제하고 후방지역도 관측했다. 수 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고, 미 24연대는 서북산을 상실하고 전투산[16]북부 일부마저 잃었다가, 미 전폭기의 집중지원으로 전투산을 수복했고, 미 제5연대가 서북산 탈환을 위한 반격에 나서서 서북산 정상을 점령했다. 양측의 집중 포격과 돌격이 반복된 결과, 서북산 정상의 주인은 8월 말까지 19차례나 바뀌었다.

최종적으로 미 제25사단은 마산 정면의 고지들을 지켜내어서 전체 작전에 큰 공헌을 했다. 8월 30일에는 군 예비로 차출 되었던 제27연대가 25사단으로 복귀 했고, 제5연대전투단이 제24사단에 배속 되었다.

10. 통영 상륙작전[편집]

  자세한 내용은 통영 상륙작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마산 정면에서 고지전이 벌어지고 있던 8월 17일, 북한군 제7사단 제51연대는 고성을 점령하고 통영까지 진출했다. 진해에서 정비중이던 대한민국 해병대 김성은 대령이 지휘하는 김성은부대는 2척의 함정으로 8월 17일 18시 통영에 기습 상륙했고, 18일부터 개시된 북한군의 역습을 공군기와 함선의 지원을 받아 격퇴했다. 이후 여러 차례의 북한군 공격을 격퇴한 김성은 부대는 고성, 통영, 거제 등지에 숨어 있던 북한군 선박을 찾아내어 격침시켰다. #

이후 원문고개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역습을 막아내었다.

11. 9월 공세[편집]

8월 하순, 마산 일대는 대체적으로 소강 상태였지만 북한군의 후방에선 병력 집결이 관측되고 있었다. 미 제25사단은 산과 철도를 아우르는 48km라는 비교적 넓은 정면을 방어하고 있었고, 예하 27연대는 사단 예비대가 되어 마산에 위치해 있었다.

북한군은 마산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면서 전차를 증원받고 제104치안연대와 제7사단을 추가 동원했다. 제105전차사단의 전차 20대와 제16기갑여단의 전차 43대를 지원 받은 6사단은 진주에 집결하여 부대 정비 및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고, 7사단은 의령 일대에 집결해 있었다. 북한군은 UN 공군의 폭격에도 남강에 수중교를 부설했고, 6사단과 7사단은 2개 도로를 따라 공세를 수행하기로 했다. 즉 6사단은 미 제35연대 1대대를 돌파하여 진주-마산도로를 따라 중리로 진출할 계획이었고, 7사단은 제35연대 2대대를 돌파하여 남지리-마산 간의 도로를 차단할 계획이었다.

8월 31일 23시 30분, 북한군은 2개 사단으로 총공격을 개시했다. 9월 1일에 북한군 7사단은 남강을 도하하여 35연대를 공격했다. 미군은 공군 지원과 VT신관을 사용하는 포격 지원을 받아 북한군을 저지 했으나, 미군 35연대 1대대와 2대대 사이의 간격이 뚫리면서 북한군의 대규모 병력이 후방 지역으로 침투했다. 35연대 1대대는 북한군의 정면 공격을 3차의 전투 끝에 저지했고, 북한군 제6사단 제13연대장 한일동 대좌가 여기서 사망했다.

한편 북한군의 공격 첫 날, 미 제25사단장 킨 소장은 워커 중장에게 8군 예비대인 27연대 2대대의 투입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킨 소장은 독단으로 마산에 있던 27연대 2대대로 하여금 35연대의 후방으로 침투한 북한군을 공격하도록 했다(후에 워커 중장은 이를 묵인했다). 이들은 폭우와 탄약 부족으로 고전하기도 했지만 9월 4일에는 침투한 북한군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특히 공중지원이 큰 역할을 했는데, 킨 소장도 “근접항공지원이 사단을 구했다”고 평했다. 25사단은 9월 1일부터 7일까지 후방지역에서만 북한군 사체 2,000여구를 매장했다. 한편 9월 8일과 9일에 쏟아진 폭우로 강의 수위가 2m나 높아짐에 따라 북한군 도하가 어려워지자, 25사단은 한 숨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25사단의 중앙을 방어했던 24연대는 방어선이 뚫리고 9월 1일에 함안을 상실했다. 공중지원을 받은 27연대 1대대가 반격을 실시하여 최초 진지를 수복하여 9월 4일에 24연대에 인계했으나 24연대는 5일 아침에 소규모 공격을 받고 다시 철수 했다. 킨 소장은 24연대의 빈번한 철수로 인해 작전에 큰 차질이 초래되었다고 24연대의 교체를 건의했지만 워커 중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군 6사단과 7사단은 해안선 일대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전투산, 서북산 일대에 포격을 집중시켰다. 9월 7일에 전투산이 북한군에게 점령되어, 킨 소장은 함안을 탈환했던 27연대 3대대에게 전투산 탈환을 명령했지만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후 24연대장 코리 중령은 공격을 일시 중단하고 집중적인 화력의 운용으로 적의 소모를 강요한 뒤 전투산을 탈환했다. 북한군은 9월 14일에 전투산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고, 24연대는 병력 소모가 심해서 철수했다.

이 공격 이후에 공세의 한계에 다다른 북한군은 공격을 자제하고 수세로 전환했다. 미 제25사단은 전투 내내 공세적인 방어로 북한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부산으로 향하는 서부 관문인 마산을 지켜냈다.

12. 양측의 피해[편집]

국군과 미군은 마산을 점령하고 이를 통해 부산까지 점령하려는 북한군의 45일간 공격을 막아내었다. 북한군은 미군의 적극적인 방어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북한군 6사단과 7사단은 수천명의 사상자와 포로 3천여 명 등의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군의 피해도 컸다. 전력이 감소된 제24사단 29연대는 임무대 편성 과정에서 해체되었다. 상술된 포병 피해를 포함해 1천여 명의 전사자와 3천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20명이 실종되었다.

당시 마산을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해군과 해병대의 중심지인 진해가 인접해 있었다는 점이 꼽히고 있다. 진해에서 이들을 빠르고 적극적으로 증편하여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이 문서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김성은 부대도 해병대다.)

13. 민간인의 피해[편집]

현재 제39보병사단이 함안군으로 이전하여서, 당시 격전지에 주둔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탓에 진양군(현 진주시)및 함안군 일대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발생했고, 이들 중 상당수는 파수, 신음, 입곡, 서북산이라는 오솔길 루트[17]로 마산과 김해로 빠져나갔다. 이후 이 일대는 상술한 전투들의 최전선이 된다. 창원군(현 창원시) 진전면 봉암리가 미군 포병의 무덤이었다면, 함안군 군북면의 원북역에서부터 하림리-수곡리 일대에 북한군 6사단의 전익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곳에서도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상술한 피난민들이 9월 이후 집으로 돌아온 후에, 미처 수습되지 못하고 들판에 버려진 양측의 시신들을 치웠다고 한다. 주민들에 의하면 "사람 키만큼 유독 높게 풀이 웃자란 곳에는 반드시 송장이 있더라"고 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8월 초에는 함안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는데, 서북산 루트로 탈출하지 못한 피난민 중 상당수는 의령 쪽으로 진로를 돌렸다가 8월 18일 발진한 미군 해군항공대 함재기의 기총소사에 참변을 당했다.[18] 이 곳은 "남산벌"이라고 불렸으며, 현재의 군북면 안도리 일대(위 지도의 A/29라 적힌 부분)인데 이 때문에 7월, 8월은 1980년대말까지도 군북 장터가 상당히 북적거렸다. 8월 초순에는 인민군한테 끌려갔다 생사불명이 된 사람들 집이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내고, 8월 중순에는 미군한테 포격과 폭격으로 죽은 사람들 집이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제사 준비를 하느라 장터가 북적거렸던 것이다.

특히 여항산 밑의 오곡리(새마을, 골마을) 및 사촌리 등의 골짜기 마을에는, 이 한날 한시에 제사 지내는 집이 많다. 후퇴하는 조선인민군 제6사단이 미처 피난가지 못한 장정들을 징발하여 전투에 투입하거나 노역에 동원했고, 이에 폭격에 죽거나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패잔병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어떤 주민도[19] 피난가던 도중 인민군에게 징발되어 군북에서 여항까지 노역에 시달리다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몇 몇과 함께 탈출했는데, 탈출한 사람들 외에는 모두, 전투 중 포격에 휘말려 죽었다고 한다. 일부 피난민이 명관리 뒤쪽(소어석터널쪽) 깊은 산중으로 피난갔지만 하필 그곳은 상술한 인민군 6사단 전익이 포진했던 방어산의 우측 날개 쪽으로, 이 쪽에는 인민군이 임시 보급기지를 지어놓았기 때문에 미군의 전략폭격 대상이 되었고 폭격에 휩쓸리고 말았다. 관련 증언 채집록 및 미군 문서를 살펴보면 여기 증언들이 모두 교차검증됨을 알 수 있다.

치열한 전투의 여파로 이 일대에는 불발탄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1980년대 말까지도 국민학교 방학 주의사항으로 항상 '불발탄 만지지 말고 발견하면 경찰이나 군 부대에 신고할 것'이란 내용이 따라붙었다. 실제로 1960년대 초반 군북초등학교 재학 중인 동네 아이들이 사촌리 상데미산 기슭까지 소 먹이러 갔다가, 산기슭에서 불발탄을 주운 후 폭사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포탄인 줄도 모르고 쇳덩이를 벗겨내 동네 엿장수에게 갖다주려고 무덤 상석에다 고폭탄을 두들겨댔다는 것이다.[20] 이외에도 일반인들이 나무를 하다 불발탄 뇌관을 잘못 건드려 폭사하거나 불구가 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21]

14. 여담[편집]

  • 진전면 봉암리 일대가 미군에게 워낙 출혈을 안겨주다 보니 아예 주요 전장이었던 서북산, 여항산 일대의 별명은 '각대미산'이 되어버렸다. 영어의 '갓 댐 잇[22]'이 몬데그린화된 것이다. 다만 '데미'리는 게 경남 사투리로 바위란 뜻이기 때문에 어원 자체는 확실치 않은데, 각대미산은 인근의 상데미산 이름이 미군에 의해 "저기 산 이름이 상데미라고? 갓뎀이다"라는 식으로 와전된 것으로도 여겨진다. 현재도 상데미산(661고지)의 이명으로 미군이 붙여준 이름인 '전투산(Mount of battle)'이란 이름이라든가, 사촌리와 오곡리 사이의 산 능선 이름은 '피바위능선'이라고 불리는 등 전쟁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는 지명이 많다.

     군북역 앞에서 바라본 마산 전투의 주요 전장. 군북에서 정남방을 보면 상데미산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 모양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이게 피바위다. 앞에 보이는 동네는 동촌리(새동네)이며, 골새미산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널따란 오곡리 골짜기가 숨겨져 있다. 이 천혜의 감제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한미연합군과 북한군은 45일간 혈투를 벌였다.
  • 창원시 마산회원구 무학산 정상부에는 산꼭대기부터 서마지기, 봉화산까지 능선부를 따라 교통호가 반쯤 무너진 채 남아 있는데, 이 당시 미 제24사단과 국군 해병대 등이 방어선을 쳤던 부분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교통호는 한국전쟁과 관련된 구조물은 아니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1989년 여름 당시 육군 최고위층의 지시로 후방에도 전방 수준의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공사로 진행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공사를 담당한 부대는 구 마산통합병원(현 월영마을 부지)에 위치한 39사단 예하 8358부대 1대대가 예비군과 함께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1950년 당시 이 교통호 능선 부분에서 촬영한 사진이 현재도 남아 있다. 부산독일문화원 원장 Jens-Olaf Walter 씨가 마산 전투 당시 마산에 주둔하던 미군이 찍은 사진을 기증했는데, 촬영자는 당시 미 25사단 소속 Donald L. Grovom 일병(PFC)이다.[23]
    좌측 사진 정중앙에 보이는 부분이 구 일본 조선주차군의 병영 자리로, 이후 일본 육군 조선군 제20사단이 쓰다가 해방 후 국군 제15연대가 창설되었다. 1954년에는 국군의무사령부가 이 곳에서 발족했으며 1990년대까지 국군지구마산병원(마통)이 주둔하다가 현재는 월영마을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이 부대 시설은 6.25가 터지자 미 육군 24, 25사단도 사용했고 1950년대 말까지 미군이 주둔해서 구 일본인 거류지가 있던 두월동에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시장'이 생기는 배경이 됐다.[24]
  • 80~90년대 마산에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정신의학과 전문 병원이었던 배신경정신과 병원장 배대균 선생은 현재 은퇴 후 마산 전투에 대한 미군 기록을 찾아내어 정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기사보기), 기념사업회장도 맡고 있다. 2021년 초에는 단행본으로 자료 일부를 출판하였다.
  • 2022년 5월 22일, 현충일을 앞두고 (사)ROTC경남지구에서 서북산전적비를 참배하는 산행에 MBC경남에서 따라가 취재한 영상이 유튜브를 통해 공개되었다. #MBC경남 영상
  • 동년 6월 6일 현충일, 이 날 취재가 YTN에도 보도되었는데 상술한 배대균 선생의 인터뷰도 포함되었다. #YTN 영상
  • 2024년 5월, JTV 진전방송[26]에서 마산서부지역전투 기념사업회에서 만든 영상을 업로드했다.# 내용은 본 문서 내용을 요약한 정도이며 39사단 장병들이 서북산 일대에서 유해발굴 영현 작업을 하는 모습이 포함되어 있다.

15. 출처[편집]

《6·25 전쟁사 제5집 낙동강선 방어작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8

[1] 중리역에서 감천 방향으로 인입선 철로가 있었다는 어르신들의 증언과 맞아떨어진다.[2] 안민고개는 진해에서 창원 넘어가는 고개로, 당시 대한민국 해군의 본거지인 진해에서 가장 가까운 방어선이었다. 즉 진해를 지키던 해병대들은 최전선인 진동리로 모두 이동하고, 이들의 빈 자리를 아직 장교 임관을 하지 않은 해사 생도들이 배치되어 최후방어선을 지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쓰고 있는 철모는 구 일본 해군이 진해요항부에 남기고 간 육전대(해병) 철모로, 미군의 M1 철모 보급이 해사 생도에게까지 닿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3] 포화속으로,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등.[4] 인천 상륙 작전 당시 연안부두에 상륙하기 위한 나무 사다리조차 일본에서 급히 제작하여 공수해야 했을 정도로 물류사정이 엉망이었다. 전쟁 발발 직후 가용 가능한 공업자원이라고는 부산, 마산, 대구 세 도시의 경공업 공장뿐이었다.[5] 경전선 항목 참조. 삼랑진-(신)마산간은 마산선, 마산-진주간은 경남선으로 이름지어져 있었지만 사실상 한 계통처럼 운행했고, 1966년 순천과 진주가 이어지며 경전선으로 개칭된다.[6] 현재의 월영마을 자리로 원래는 러시아 조계지이던 곳을 일본이 빼앗아 일본 육군 조선주차군 주둔지로 사용했고 해방 후 국군이 접수해서 군부대로 계속 사용했다. 6.25 후에는 국군의무사령부가 창설되었고 상당 기간동안 미군이 주둔하기도 했다. 경남의 향토방위 사단인 제39보병사단은 6.25 이후 강원도 전방에서 창설된 부대이며 이후 현재의 위수지역인 경남으로 이동한 부대이다.[7] 구 일본군 육군의 경우 정식 편제명 외에도 해당 부대의 지휘관 이름을 따서 "나카지마 부대", "오노다 부대" 등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었는데 광복 후 창군 과정에서 일본 영향을 받은 흔적이다. 김성은 부대가 아니라 김 부대라고 부르는 것이 지휘관의 성만 딴 흔적인데 미군도 이 편이 부르기 편해서 별칭을 비공식적으로 존중해줬다.[8] 현재의 1004번 지방도가 지나는 사봉고개의 남쪽 사면. 이 고개의 서쪽 봉우리가 괘방산이고, 그 북쪽이 방어산으로 함안군과 진주시의 경계를 이룬다. 높이는 600~700고지 정도이지만 가야읍내에서도 보일 만큼 인근 일대에서는 높은 산이다. 과거 자료를 찾아볼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사봉고개를 지나는 지방도가 과거 1032번으로 할당되어 있었으며, 1004번 지방도는 현재의 사봉고개가 아닌 의령읍~가야읍간 79번 국도 루트에 할당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연혁은 79번 국도 참조. 그래서 과거 자료로 대조하려면 1004번 지방도가 아닌 1032번 지방도를 찾아야 한다.[9] 현재의 일반성면 사무소 소재지의 서북쪽 야산. 괘방산(함안방면)과 진전면(마산 진동방면)의 길이 평촌리에서 합쳐진 직후, 여기서부터 진주고개를 넘어가면 바로 현재의 진주 시가지 외곽이다.[10] 1개 전차중대와 1개 포병대대와 함께 다부동 전투에 투입된 그 양반, 맞다.[11] 지도상에서 보면 정찰대가 교전한 곳은 현재의 진주시 문산읍/일반성면 일대이고 진동초등학교는 한참 뒤쪽인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이다. 그야말로 적진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온 것.[12] 건군 이래 국군 최초 부대 전 장병 일계급 특진 기록을 세웠다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 세번째 부대 전 장병 일계급 특진 기록이다. 첫번째는 1950년 7월 6일부터 7일까지의 동락리 전투에서 육군 제6보병사단 7연대가 연대장 비롯 연대원 전원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고, 두번째는 7월 17일부터 25일까지 화령장 전투에서 육군 제17연대가 연대장 비롯 연대원 전원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다.[13] 현재의 진북면 인곡리에 있는 산. 한때 국군마산통합병원이 마산으로부터 진동으로 옮겨가 이 산자락에 있었다.[14] 8월 1일부터 7일까지 김성은 부대가 이동한 거리를 도상에서 찍어 보면 거의 웬만한 행군거리 이상으로 기동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진동초등학교→진전면 봉암리→(여항면 경유)→함안면→진북면 야반산→(차량이동 추정)→마산→진동면 진동리.[15] 마산회원구에 있는 봉암수원지가 아니라 마산합포구 진전면 봉암리다. 진주시(구 진양군)과 접해있으며 인근 군북면 방어산에 진을 친 인민군 6사단 전초와는 산 두개 너머 거리.[16] 661고지에 미군이 붙인 이름이다.[17] 서북산은 현재도 등산로외 길이 없다. 파수로 넘어가는 길은 우마차로가 있었다가 90년대 말에야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2차선 포장되었다. 그런데 현재는 제39보병사단이 이전하며 생긴, 군 관련 시설 때문에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18] 6.25 전쟁 내내 빈번하게 일어난 사례임. 상공에서 적진 내에 움직이는 무리만 보이면 무조건 쏴제끼고 봤기 때문이다. 평택역 폭격의 경우는 피난민 중 일부가 평택역 지붕에 태극기를 펼쳐놓아서 폭격과 기총소사를 피할 수 있었다. 임진강 공방전의 경우도 경기 북부나 황해도 등지에서 피난나오다 강변에서 폭격에 불귀의 객이 되거나 이산가족이 된 경우가 매우 많다.[19] 후술하는 나무꾼 농민의 형님 집.[20] 부산광역시 북구 교육청장을 역임한 김정외 장학사는 이 당시 군북초등학교 재직중인 평교사였는데, 이 날 휴일 당직을 서고 있었다고 한다. 사고 소리를 듣고 현장으로 달려갔을 때 "손은 저기 널찌가 있고 몸뚱이는 저기 소나무 위에 걸려있고..." 라며 피해 아동들의 시신이 조각나서 여기저기 널려 있는 참상이 벌어져 있었다고 술회. 군에서 취급하는 인마살상용 폭발물이 민간으로 흘러나갈 경우 얼마나 무서운 결과가 벌어지는지 알 수 있다.[21] 대암리 마을 주민의 증언으로는, 이 때 불발탄 뇌관을 잘못 건드린 나무꾼 한 분이 얼굴에 파편이 박히고 오른손이 날아가서 이후 마산 역전이나 시외터미널(둘 다 지금의 위치가 아니다. 마산역은 현 마산중부경찰서-옛 마산경찰서- 앞에 있던 신마산역이고 시외터미널은 3.15 의거탑 앞에 있었다.) 앞에서 품팔이나 행상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흘러 어느 날 밤 꿈에 미군이 보이더니 다음 날 주택복권 2등 당첨이 되었다고 한다. 당사자 말로는 "전쟁통에 송장 치워준 군인 같은데 꿈에 보여서 나 데리러 왔나 싶었더니만 은혜 갚으려고 그랬나 보다"라고... 믿거나 말거나식이지만 동네에서는 유명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당사자는 2018년 작고하였다.[22] "God Damn it!" 직역하면 '이런 천벌을 받을~' 이란 별 것 없어 보이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이런 씨발!' 정도의 격한 욕설이다.[23] 이 사람은 마산 전투 시기 내내 고지에서 내려다 본 사진을 많이 찍었다. 현재도 flickr에 그로봄 씨가 촬영한 사진들이 자료로 남아있다.#[24] 사진에서 보듯 현재의 경남대 인근에는 시가지가 없었기 때문에 구 일본인 조계지(신마산) 북쪽에 시장이 형성된 것. 마산의 시가지는 원마산(현 어시장 일대)과 신마산이 떨어져 있었고 중간의 빈 지역에 학교 등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었다. 이 곳을 광복 전까지 일본 육군이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5] 2010년 남해안대로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2번 국도 14번 국도의 일부였다.[26] SBS 네트워크 가맹국인 JTV 전주방송이 아니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일대를 관장하는 지역케이블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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