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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펌) 마산 제 7 포로 수용소 본문

부르심의 축복/동행 in Masan 1981

펌) 마산 제 7 포로 수용소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8. 12. 4. 10:49

   [마산 반공포로수용소 터]

 

 

마산에 6.25전쟁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잊혀져가는 포로수용소를 찾아 보았습니다. 뒤에는 청량산이 둘러 있고 앞에는 바다가 있는 천혜의 요충지 입니다. 지금 바다는 매립되어 몇년 전까지는 한국철강이 있다가 지금은 (주)부영이 부지를 매입하여 아파트단지가 들어설 예정입니다.

포로수용소터에는 터널식 방공호가 5곳이 있고 잡초로 덮혀있습니다.

월영동에서 가포가는 길가에 있답니다.

 

역사적 사실:

1951년 7월에 시작된 휴전회담이 근 2년간을 끌어오던 중,

1953년 6월에 접어 들어서 휴전 회담의 핵심적인 쟁점이었던 포로교환 문제가

6월 8일 타결되고 양측 대표가 합의서에서 명함으로써 휴전협정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민의 의사에 반한 휴전회담의 진전은 한국민을 크게 자극 하였으며,

한국 전역에 걸쳐 거센 휴전반대 운동을 유발시켰다.

이 무렵(6.6)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문제에 대한 성명을 통하여 “우리정부는 유엔군과 공산군이 일시에 한국에서 철퇴하되,

이를 실시하기 전에 한·미 양국간에 공동방위조약을 체결할" 것을 발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포로의 석방 작전:
휴전회담이 한국민의 희망과 부합되지 않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어 가자,

이승만 대통령은 독단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기로 결심하고 헌병 총사령관 원용덕

중장에게 밀명을 내렸다.

원 장군은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전후하여 비밀리에 작전을 전개,

유엔군이 관리하는 부산, 마산, 대구, 영천, 논산, 광주, 부평 등지의 반공포로

수용소에서 2만 7천여명의 반공포로를 석방케 함으로써 그들에게 자유를 안겨 주어, 떳떳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활약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조치에 경찰 및 민간인들

또한 반공 탈출 포로들을 숨겨 주고, 의복 및 음식을 내 주는 등 일치된 민족적 의식을 보여 주었다.

석방후 반공포로들의 탈출은 6월 18일에 처음 이루어 졌지만, 그 후의 혼란 상태에서 미군의 감시 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포로들이 계속 탈출하 였다. 따라서 탈출한 인원과 탈출 당시 미군에 잡힌 포로와 부상 또는 사망한 포로, 미군의 재수용을 위한 수색으로 다시 수용된 인원 등이 정확하게 집계되지 못하였다.

석방의 의미:
반공포로의 석방은 일시에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 시키게 하였다.

미국은 “한국이 유엔의 권한을 침범한 것이 아니냐”는 항의를 제기하였고,

북한과 중공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공모하여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고 비난하여 전원을 재수용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휴전회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자, 당시 미국은 한국에서의 조속한 휴전 타결 문제가 주요 정치 과제로 대두되어 있던 만큼, 대통령의 특사를 6월 25일 파한하여 “이 대통령의 독단은 매우 무익한

일이며, 만약 사리에 맞는 태도를 취한다면, 미국의 힘을 빌려 줄 것을 보증한다.” 고 확약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국정부는 미국으로부터 “휴전 후의 긴밀한 협조 관계의 확대, 포로의 자유의사 보장,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 정치·경제·방위 문제의

협력 증진, 통일한 국의 실현을 위한 상호 협력”을 보장받게 되었으며, 7월 12일

한·미 양국은 휴전 성립을 위한 합의에 도달하였다. 이와 같은 반공포로의 석방은

자유를 갈망하여 포로수용소 내에서 공산군 포로들과의 생명을 건 투쟁에서도 이념을 굽히지 않았던 수많은 반공포로들에게 자유의 길을 열어 주었으며,

휴전 이후의 국가적 이익에 대해서도 사전에 확실한 보장을 받을 수 있게 한 6.25전쟁을 마무리 짓는 중요한 조치였다.  

 

1952년 마산 포로수용소 경비를 서고있는 한국군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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