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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열방/세계는 지금

류사오보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7. 7. 16. 19:05

 

 

 

류샤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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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를 움직인 100인

류샤오보

劉曉波

인권 운동가, 민주화 운동가.

201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중국 정부의 반대로 빈 의자를 놓은 상태에서 시상식이 진행되었고, 이후 국제 사회가 중국 정부에 그의 석방을 촉구했다. 류샤오보는 랴오닝 성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가석방되었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

출생 1955년 12월 28일

사망 2017년 7월 13일

중국 현대사를 말하다

류샤오보는 중국의 인권운동가로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계속해서 중국의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해 중국 정부에 반체제 인사로 지목되어 여러 번 수감 생활을 했다. 1990년부터 국제단체로부터 인권상을 수상하기 시작해 2008년 12월 세계인권선언 채택 60주년을 맞아 ‘일당독재를 종식하고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민주개혁 요구’를 골자로 한 〈08 헌장(零八憲章) Charter 08〉 발표를 주도해 중국 정부에 체포됐다.

11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수감 중에 201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1957년부터 중화권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모두 7명이나, 이들 중 국적이 중화인민공화국인 경우는 류샤오보가 유일하다. 이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그의 반체제 성향으로 인해 중국 정부는 그의 수상에 강한 반감을 나타냈다. 결국 노벨상 역사상 두 번째로 수상자가 수상식에 참가하지 못해, 수상식은 빈 의자와 그의 초상을 놓고 진행되었다.

류샤오보

류샤오보

지린 성 창춘(長春) 시에서 태어난 류샤오보는 중국 정부의 하방 정책에 따라 부모와 함께 내몽골 호르친으로 이주했다. 1974년에는 지식청년 하방 방침에 따라 지린 성 눙안 현(農安縣)으로 이동했으며, 2년 후에는 창춘시로 돌아와 건축회사에서 노동자로 생활했다. 1977년 지린대학교의 중문과에 입학해 1982년에 졸업했고, 곧바로 베이징사범대학교 중문과에서 문예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이곳에서 1986년까지 강의를 계속했다. 1988년 같은 곳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해외로 활동 영역을 넓혀 1988년에는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에서 중국당대문학(當代文學)을, 1989년에는 미국 하와이대학교에서 중국철학과 중국당대문학을 강의했다.

1989년 봄, 류샤오보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초청방문학자 신분으로 중국 현대정치와 지식인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이때 중국의 계몽철학자인 리저허우(李澤厚)를 비판하는 〈선택의 비판—리저허우와의 대화〉라는 글을 썼는데, 이를 계기로 반체제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89년 4월 중국에서는 전국에서 모인 학생과 시민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단식연좌시위를 벌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류샤오보는 즉각 연구를 중단하고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당시 시위대는 톈안먼 광장 인민영웅기념탑에서 장막을 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는데, 그도 저우둬(周舵), 허우더젠(侯德建), 가오신(高新) 등과 함께 단식농성에 합류했다. 그는 시위대 대표로 중국 정부와 협상을 벌였으나, 중국 정부는 이들의 시위를 난동으로 규정하고 계엄군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는 반혁명 혐의로 투옥되었다.

같은 해 9월 그는 톈안먼 사태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다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고 20개월 동안 구금되었다. 그 후 그는 베이징에서 글을 쓰면서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993년 초청방문학자의 자격으로 오스트리아로 출국한 그는 미국에 잠시 체류하면서 다큐멘터리 〈톈안먼〉의 제작자 칼마 힌튼과 인터뷰를 하여 서방에 중국의 현실을 알리고자 했다.

6·4 톈안먼 사건을 유혈 진압한 중국 정부는 이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박해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감시, 연금, 투옥되었다. 6·4 톈안먼 사건 주도자들 상당수가 이로 인해 중국을 탈출하여 해외 망명을 선택했는데, 류샤오보는 오히려 해외에서 중국으로 다시 돌아와 국내에 머물며 문필 활동과 민주화 운동을 했다. 1996년 그는 톈안먼 사건 희생자의 명예 회복과 인권 보장을 호소하다가 체포, 구금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되었지만, 다시 〈반부패 의거서—8기 인민대표대회 3차 전체회의에 드림〉, 〈흡혈의 교훈, 민주 추진과 법치 발전—6·4 사건 6주년 호소문〉을 집필하는 등 민주화 운동을 계속했다. 이 일로 그는 다시 체포되어 노동개조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그는 류사(劉霞)를 아내로 맞이했다. 1999년 석방된 후 류샤오보는 독립중문필회(獨立中文筆會, Independent Chinese Pen Center)의 회장직을 역임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계속 전개했다.

류샤오보는 2008년 12월 중국의 반체제 인사, 학자, 변호사, 신문기자, 양심적 지식인 등 303명과 함께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를 반대하고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는 〈08헌장〉을 발표했다. 〈08헌장〉을 주도한 그는 2009년 6월 국가권력 전복 선동죄로 베이징 시 공안당국에 체포, 구속되었다. 그는 법정심문 과정에서 죄가 없음을 피력하고, 헌법에 나타난 언론의 자유를 행사했을 뿐 타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권 전복을 선동하지 않았다고 변호했다. 그러나 2009년 12월 베이징 제1급 인민법원은 그에게 징역 11년을 선고했다. 2010년 2월 그는 베이징 고급인민법원에 항소했으나 기각되었고, 징역 11년 및 정치적 권리 박탈 2년이 추가 확정되었다. 그는 랴오닝(遼寧) 성 감옥에 수감되었다.

〈08헌장〉 공표로 국제 사회에서 더 큰 명성을 얻게 된 류샤오보는 2010년 1월 체코의 전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 달라이 라마, 데즈먼드 투투 주교 등에게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받았다. 2010년 10월 8일 노벨위원회는 ‘중국의 인권 신장을 위한 오랜 투쟁’을 이유로 그를 노벨 평화상 수상자에 선정했다. 더불어 노벨위원회는 “중국은 지난 수십 년간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었고, 정치적 참여 범위 또한 확장했다. 하지만 중국은 헌법 35조에 ‘인민들의 언론, 표현, 결사, 집회, 시위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음에도 이 모든 것에 대한 자유를 명백히 박탈하고 있다. 중국은 새로운 지위에 걸맞은 책임을 수반해야 한다.”라며 중국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류샤오보의 석방을 외치는 사람들

류샤오보의 석방을 외치는 사람들 류샤오보는 201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감금이 풀려나지 않아 참석하지 못했고, 결국 빈 의자가 놓인 채로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었다.

중국은 이에 즉각 반발하며 외교통상부를 통해 “류샤오보는 중국 법률을 위반해 사법기관으로부터 처벌받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를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한 것은 노벨 평화상에 대한 모독”이라며 공식 입장을 표명했다. 또한 중국 정부는 류샤오보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반대하여 그의 석방을 주장하는 국제 사회와 인권단체들을 무시하고, 대리 수상을 막기 위해 그의 친인척들까지 가택연금 후 출국금지시켰다. 더 나아가 중국은 언론과 여론을 통제하고, 노르웨이에 있는 65개국 대사관에 압력을 가해 그중 15개국을 불참시켰다.

이러한 중국의 방해로 인해 노벨위원회는 시상식장에 상징적으로 빈 의자를 놓은 상태로 시상식을 진행하고 그의 노벨상 상장과 메달을 빈 의자에 놓았다. 중국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류샤오보에 대한 노벨 평화상 수상식 강행에 대해 명백한 내정 간섭이라고 반발했으나 이후 서방 국가들은 일제히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

류샤오보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직후, 중국 공안당국으로부터 가택연금 처분을 받은 아내 류샤와 연락이 차단된 채 랴오닝 성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가석방되었다. 이후 중국의대 제1병원에 치료하던 중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