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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김교신의 교육사상 본문

도움 글/펌) 교회여 일어나라

김교신의 교육사상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2. 7. 11. 21:28

김교신의 교육사상김교신선생과 최용신전기/ 최용신을 도운 사람들

2009.04.05. 21:27

복사http://blog.naver.com/ansanman33/10045293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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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연구Ⅱ - 교육사상을 중심으로
김교신 연구Ⅱ
- 교육사상을 중심으로





Ⅰ. 들어가며

1939년 12월 23일자 일기와 '교사심경의 변화'라는 김교신의 글을 보자.
이번 담임반도 애써하면 볼만한 성적이 나타날 것이요, 졸업기까지에는 학력보다 인물--하나님 외에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 두엇을 출현시킬 듯하니 점점 애착심이 짙어진다. 이 일도 버리기는 아까운 일이다. 할 일은 많고 몸은 하나 뿐...

교사의 초기에는 교단 위에서 볼 때에 선량한 학생과 불량한 학생이 확연히 갈라져 보였다. 그리고 선량한 자가 귀엽게 보이는 반면에 불량한 자는 심히 가증해 보였었다. 그러나 오늘날 당해서는 선량한 자와 불량한 자가 한결같이 귀여워 보이며, 사랑스러워 보여서 가르치기보다 먼저 어루만지고 싶으니 이제 비로소 교사의 자격이 생겼다고 할 것인가? 또는 이젠 벌써 교사 자격을 상실하였다 할 것인가? 우리가 스스로 판단키 어려우나 심판적 태도가 자취를 감추고 동정 연민의 정이 노출하게 된 흔적만은 숨길 수 없다.
...이른바 불량소년...의 속에서 참 사람을 발견할 때의 기쁨에 비할진대 선량한 학생의 교육은 도리어 무미 건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이미 과연 문자대로 죄인의 괴수이어든 나보다 더한 죄인이 어디 있다고 축출할까?
교사의 초기에 학식의 경중을 시험하는 듯한 종류의 질문은 교사를 심히 노발하게 하였다. 그러나 교사 10여 년에 철저히 깨달은 것은 무식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한 것이다. 교사로서 알아야 할 것의 10분의 1, 만분의 1도 알지 못한 자인 것을 심각하게 깨달았으니 이제는 ... 질문을 제한하지 않는다. 오직 아는 것은 아노라고, 모르는 것은 모르노라고 대답할 뿐이다. 이것도 교사로서 부당한 일인지 알 수 없으나 속마음은 극히 편하다.
교사의 초기에는 학생들이 경의를 표하느냐 않느냐가 매우 마음에 걸렸으나 지금은 전혀 무관심이다. {성서조선}을 발간함으로 받지 않은 모든 치욕을 생각하면 학생들의 무례와 괄세쯤은 오히려 기특한 감을 금할 수 없다. 예수 믿기 위하여 이미 받은 창피와 앞으로 당할 치욕을 헤아리면 철나지 못한 어린이들의 실수쯤은 문제가 될 수 없다. 또한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괄시받을 자격 가진 인간이 어디 있다면 그는 교사요, 나 자신이라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인데, 사람의 존경을 기대하는 일 같은 것은 자기를 분별치 못함도 심한 일이다. 이도 역시 교사도에서 어그러진 일인지 알 수 없으나 심경의 변화인 것은 사실이다.


Ⅱ. 김교신의 인격적 기질

김교신의 교사적 기질을 이야기하려면 그의 생애를 통하여 길러진 인격적인 특징을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김정환은 이를 학자적 기질, 예술적 기질, 종교적 기질, 感泣的 기질로 나누었다.
① 원리원칙으로 사리를 밝히고 학문을 위주로 하는 학구적 태도를 갖춤. 그가 처음에 東京高師의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지리.박물과로 전학한 것도 이런 기질로 풀이된다. 또 세인들이 무교회 클럽이 학자들의 모임이라 하듯이 일개 중등 교사로서 경이적인 업적을 남겼고, 그의 수업도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다방면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여 학생들의 흥미와 학문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② 자신의 위치에 분명했으며 실천력이 강함. 그의 일기에는 당시의 官立高普 졸업생들이 총독부 식민지 관리나 되고, 의사나 되어 세속적 행복을 구하며 개인의 입신 영달을 꾀하는 모습에 분개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소위 저명 인사를 대하기 싫어했고 돼먹지 않은 大傳道師들을 싫어했다. 말석 평교사를 평생의 소원으로 삼았으며 검약하여 잡곡밥을 먹었다.
③ 불의를 싫어하고 강직했으며 순수한 눈물이 많았다. 공자를 따르려했으나 낙심한 후 20세에 기독교에 입신하였다. 인생을 유희하려는 자를 싫어하였다.
④ 사회 개혁과 민족의 오랜 타성을 일깨우고 성서를 통해 개혁의지를 갖도록 노력하는 미래 지향적 태도. 조선민족을 충분히 이해하여 장점은 더욱 발전시키고 단점은 개조시켜야 함을 주장하였다.
⑤ 국제적인 안목이 뛰어남. 학생들이 넓은 이상을 갖도록 일깨워 주었다. 19세에 일본에 유학을 떠나 정규 영어 수업을 받았으며 이후 계속 {London Times}誌를 애독하였다.(김종상,pp9-10, 1983)
⑥ 그는 시간을 소중히 아꼈다. 친구의 권유에 못 이겨 바둑을 둔 것을 후회한 일, 교사의 잡담에 끼지 않으면서 술좌석에는 꼭 나타나 안주만 잔뜩 먹고 달아나는, 예의와 실속을 잃지 않았던 이야기는 그의 성격을 알게 한다.


Ⅲ. 교육사상과 교육방법

14년간 계속된 교사 생활에서 김교신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민족에게 교육을 통해 인생의 목적을, 성서조선을 통해 복음의 빛을 주려고 하였다. 그는 변함없는 행동과 말을 통해 교육의 힘인 권위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인생의 목적을 알게 하여 인생의 스승으로 여겨졌다.

1. 교사시절(1927-1941)

1927년 4월에 귀국한 김교신은 咸興 永生女子高等普通學校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해 7월에는 內村鑑三의 문하생인 동지 6인은 조국구원의 유일한 길로 [聖書朝鮮]誌를 창간한다. 당시 김교신은 인격과 전공면에서 학생들의 존경의 대상이었으나 日人 동료 여교사와의 불륜관계가 알려져 사임하였다.
1928년 3월에 서울 養正高等普通學校로 전임하면서 <성서조선>일로 분주하게 되었다. 그가 부임할 때 아무말 없이 인사만 하고 하단하였으나 그 기상과 생기가 높고 충만하게 느껴졌고 첫번 박물 시간에는 인류의 창조를 조직적으로 가르쳤다고 당시의 제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는 도덕적인 면에 치중하였고 엄격강직하였기에 학생간에 '양칼'로 불렸고, 그의 출퇴근 시간은 자유롭게 한다는 조건으로 부임한 것인데 언제나 자전거를 애용하였다.
그는 체육에도 소질이 있어서 농구부장을 역임했고, 서울시내 교사 親睦정구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하기도 하였다. 특히 손기정의 마라톤 코치로 동경예선에 따라 갔는데 손기정이 중간지점에서 돌아 오면서부터는 자동차로 앞서가며 우는 그의 눈물을 보고 뛰어 우승하기도 하였다.
사생활도 검소하여 그의 딸이 크림 바르는 것을 금하였고 자녀 결혼식도 간소하고 실속있게 하길 좋아했다. 매일 새벽에 냉수마찰을 하고 전학년을 통하여 '물에 산에'라는 써클을 조직하여 서울근교의 산과 물을 찾아 학생들로 하여금 애국심을 갖도록 노력하였다.
또한 서울 시내 각 고등보통학교의 박물교사와 전문학교와 연구기관에 있는 한국인들로 [朝鮮博物硏究會]를 조직하여 1937년에는 [朝鮮 植物學 名集]을 출간할 만큼 활발한 모임을 가졌다.
1940년 3월 北美에 유학코자 수속을 밟던 중 조선총독부의 불허로 실패하고 잠시 교단을 떠나게 된다. 그해 9월 선상에서 동경고등사범학교의 지리.박물과의 선배인 岩村俊雄을 만나 그의 호의와 배려로 그가 교장으로 있던 京畿高等普通學校로 부임했다.
김교신은 부임 초부터 금지된 한국어로 강의하였는데 日人 學生과 같은 교육을 받아온 학생들에게 기이한 존재로 보였고 끝내 문제가 되었다.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의 감화로 민족의식이 살아난 학생들이 유명한 남대문 삐라 사건을 주동하였고, 권고 사직 형식으로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41년 10월 開城 松都高等普通學校에 부임하였다. 여기서도 민족의 혼을 불러일으키고 도덕적인 본을 보였다. 그런데 <성서조선>이 1942년 3월 30일 158호의 권두문이 문제가 되어 전국의 수백 誌友가 피검되었고 1943년 3월 29일 사건이 종결되어 김교신은 불기소로 출옥되었다. 1944년 7월 흥남 日本질소비료공장에 입사하게 되는데 그동안 김교신은 북만주와 전국을 순회하며 신앙 동지들을 격려하였다.

2. 교육사상

김교신은 인간 위주의 교육을 통하여 한국혼을 일깨웠고 인격적 교육을 통하여 애국적인 인물,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두려워 않는 인물을 기르려 하였다.

1) 애국애족의 교육

"조선을 알고, 조선을 먹고, 조선을 숨쉬다 장차 그 흙으로 돌아가니 不亦說乎"
김교신은 자신의 신앙과 민족관을 굳게 지키면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하였다. 우리말로 수업하였으며 한글의 중요성과 우수성을 알게 하였다.
일본 지리가 전부인 시절에 조선 지리를 가르쳐 조선 국토의 중심성과 아름다움을 일깨웠다. 그는 부임반에 우리나라 대형지도와 정몽주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애착을 갖고 설계를 그려갔으며 정몽주의 마음을 되새기며 조국 사랑을 다짐하고 학생들에게 애국혼을 길러 주었다.
수업시간에는 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 고함]을 추천하였고 간디의 무저항주의, 불사조에 대한 얘기도 하였다. 때로는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을 말하고 광복하려면 많이 배우고 문맹을 없애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 사치와 낭비는 나라를 좀먹는 것이라 하여 검소를 강조하였다.

2) 인간 위주의 교육

그는 교육을 단순한 지식의 전달로만 생각지 않고 멀고도 높은 이상을 바라보며 변함없이 전진하며 가르친 인물이다. 양정고등보통학교 1학년 입학식 날에 훈화를 통해 교육은 일대 예술적인 공사로 비교하여 학생 하나 하나를 작품으로 구성하였고 창의적이고 완전한 인격으로 교육하려 하였다. 그의 일기에 장남을 입학시키려 학교를 고르는데 신뢰할만하고 보낼만한 학교를 경영하는 이가 없음을 한탄하는 부분이 있다.
김교신의 지리 수업은 인물 위주의 것이었다. 어느 지역을 말할 때는 그 지방 출신의 인물이라든가 그곳의 특산물이나 명산지까지 언급하여, 좌절하고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용기를 갖게 하였다.
과목 자체에 대한 완비된 수업보다는 인생 교육과 민족정신을 환기시키는 수단으로 수업 활동을 전개하였다. 지리 시간 또는 박물시간에 大高句麗, 세종대왕, 이순신을 가르쳤다. 수업시간의 2/3가 自由講話이고 나머지 시간이 그날의 학습시간이었다. 고금의 위인, 철인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종횡무진이었다. 한 제자의 고백에서도, 박물수업의 경우 당시 여건상 훌륭한 박물수업이 아니었으나 학문하는 자세와 사명감, 국가국민에 대한 학자의 태도를 배웠다고 한다.
시험 문제도 해당 과목과 관계없는 교양문제나 때로 종교, 역사문제가 출제되어 벼락치기 인생들의 허를 찔렀고, 시험지에 거짓말을 쓰면 0점을 준다는 경고문을 적었고 실제로 거짓말을 쓰면 통신부에 0점으로 기록되었다. 또 잘 쓴 답안지를 낸 柳達永에게는 120점을 준 일도 있다.
그의 교육은 하나 하나의 사물을 모두 암기시키는 주입식이 아니고 체계를 세우고 원리원칙을 제시하여 학생들이 스스로 흥미를 가지고 공부하게 하였고 그 대신 여가의 시간에는 사람 자체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3) 인격적 교육

① 각성적 교육
김교신은 교육이라는 각성의 길로, 성경이라는 살림의 길로 학생들을 이끌려 하였다.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성을 냉철하게 진단하고 자신을 최선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교육이라 한다. 김교신은 모든 학생에게 반드시 한 개의 운동부와 한 개의 학술 연구부에 들어가 자기를 알고 닦게 하였으며, 일본이 조선인의 혼을 전부 먹어 버리려 하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지리교사로서 지정학적 숙명론에 사로잡혀 있을 때 반대로 우리 반도는 세계에 웅비할 수 있는 노른자위라 외쳤고, 학생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조선을 발견하여 건설된 삶과 진정한 애국의 길을 걷게 하였다. 교과서에 거의 없는 한국 지리를 많이 다루었고, 지리 시간의 경우 교과서는 20분으로 끝나고 처음 10분간은 시사적인 이야기, 나중 20분간은 地理와 관련된 역사, 철학, 종교, 문학 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의 지리시간은 가히 철학 시간이자 세계사 시간이라 할 정도로 이와의 관련에서 참고될 이야기를 많이 해서 학생들에게 인생철학을 들을 수 있다는 기대를 부풀게 했다 한다.
시간이 없어 일요일의 오전 성경강좌에 참석 못한 제자를 위해 일인(一人) 강좌를 하기도 하였는데 학생에게 어려움을 헤쳐나간 신앙의 위인들의 전기(리빙스톤, 슈바이쳐)를 많이 읽으라 권하기도 하였다. 유달영에겐 [최용신양 소전]을 쓰게 하여 시골의 영광을 알게 했다. 진실한 생애의 기록은 감동을 주기에 사랑하였다.

② 무실역행
김교신은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인격 교육을 발휘하였다. 손기정을 눈물로 이끌어 우승하게 하였고, 구습 타파를 위해 舊正에 자녀에게 헌 옷을 입혔다. 아침마다 藥師寺에 올라 목욕하였고 <성서조선>일을 도맡아 하면서 주일마다 가정성서집회를 이끌었다.
그는 원리원칙에 충실하였다. 대인관계에서 편리한 술수를 쓰지 않고 진실한 태도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특히 형제로서 시비를 분명히 가렸고 사랑과 진실로 설득하였다.
제자라 할지라도 앞선 것은 귀담아 듣고 실천하였다. 손기정이 우승 후 네덜란드의 초청으로 독일과 화란을 돌아보고 쓴 편지에서 독일 여자가 화장을 하지 않은 것과 화란 국민이 자전거 탄 것이 신기하여 편지하였더니 선생은 곧바로 이를 실천하였다.

③ 사랑과 동고동락의 교육
김교신은 승자보다는 패자, 강자보다는 약자, 합격자보다는 낙방자를 더욱 사랑하였다. 그는 매우 눈물이 많고 인간적이었으며 문제 학생들이 졸업 후에도 선생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한다. 그는 퇴학당한 한 학생이 자기를 기억하고 바르게 노력함을 편지로 접하고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심정을 일기에 적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심청전에도, 자녀의 전학수도를 하다가 문득 어머니와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고도, 학업성적과 품행이 나쁜 학생을 타이르다가도, 제갈공명의 出師表를 읽다가도, 산에 가서 단풍의 아름다움을 보고도, 시편을 공부하다가도 울었다. 특히 컨닝을 할 때나 칠판에 낙서할 때, 숙제를 하지 않았을 때는 조용히 꾸짖고 타일러 그러한 일을 거듭 못하게 하였다.
학과 공부보다는 人物과 神을 많이 가르쳤으나 담임반 학생들의 성적이 월등하였고(그는 학업정진의 비결을 가지고 있었고 담임반 생도에게만 공개하였다.) 인정이 남달리 많았으나 학생들을 엄격하게 正義로 다스렸다. 일기쓰기를 의무화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돌아오는 소제당번 시간에 항상 해당 학생의 일기를 소제감독하면서 정성들여 읽고 돌려주었고 자신의 소신대로 의사가 관철되지 않을 때는 바로 그만두려고 사표장을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으며 학생들에게도 보였고, 또 근무의 자유를 철저하게 누렸고, 자신의 생활을 시계바늘처럼 엄정하게 지키며 원리원칙대로 살아 나갔다. 그렇게 바쁜 생활이면서도 일단 학교에 나오면 성서 연구 및 집필시간을 제외하고는 학생들과 생활을 같이 하였다. 특히 운동장에서 농구 코우치로 학생과 같이 뛰었고 등산도 같이 하기를 좋아했으며, 씨름까지도 함께 했다고 전해진다.
졸업생 한 사람의 訃音을 듣고서도 통곡하는 마음으로 애도의 紙面을 아끼지 않던 그였다. 수업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며 卒業式날이면 새벽기도 시간을 통해 자기반 졸업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큰 소리로 불러서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던 그런 교사였다.

④ <성서조선>과 교육사상
김교신은 자신의 本業은 <성서조선>을 만드는 일이며 敎師는 副業이라고 말하였다. 성서로 조국 건설의 터전으로 삼는 것을 제일 중시하였고 그럼에도 교직을 아꼈다.
성서적 조선 즉, 종교를 바탕으로 삼지 않은 교육은 헛된 것으로 학생이나 민족을 교육할 때는 종교와 교육을 분리하지 않는 높은 차원의 사상교육과 완전한 도덕교육의 실천으로 스스로 모범을 보이며 가르쳤다(그는 각 나라마다 종교를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자기 자신의 도덕적 이상과 진리에 충실하려면 민족 고유의 토착화된 開化主義를 사랑하고 아끼고 발전시켜야 함을 강조하였고 광복의 그날이 오리라 확신하였다.
성서적 조선을 찾기 위해 죽음에 이르는 날까지 민중계몽교육을 위해 <聖書朝鮮>발간에 헌신하였다.


4. 교육방법

1) 인격적 감화 교육
김교신의 교육은 참고 견디며 같이 느낌으로써 학생이 선생의 인격에 동화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선생의 인격적 특성은 성장 배경과 관련되는 바, 유교적 선비상(예술적.학자적.지사적 기질)으로 요약될 수 있다. 여기에 종교적 기질과 눈물 많은 다혈질적 기질이 더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2) 애국정신 교육
그의 忠교육의 구현은 ①역사적인 한국의 인물을 통해 ②조국 산천의 긍정적 시각을 통해 ③한국어나 한글 등 한국의 문화를 통해 ④동물이나 사물에 의한 비유(예:망구스, 간헐천)를 통해 실현되어졌다.
3) 예의 교육
김교신은 古現七三制를 중시하는 사고 방식을 갖고 있었다. 한 예로 숙부의 상을 당해 기독교식이 아닌 유교의 장을 따랐던 일이 있다.
실천적 교육으로서 ①부모에 대한 효 ②정조관 중시 교육 ③양심에 호소하는 義교육(예 : 어머니와 숙모의 일화)을 하였다.

Ⅳ. 맺으며

김교신은 엄격한 유교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나 유교사상을 습득하였고 조국과 민족의 암담한 미래 앞에서 고뇌하였다. 그후 기독교를 만난 후 그는 일제로부터 조국과 민족을 구할 길은 기독교 진리의 보급과 이를 토대로 한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우렸다.
김교신의 교사로서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신앙적이라 할 만큼 강한 애국심과 민족관을 토대로 투철한 사명감으로 교육에 임했으며 교육의 현장을 지키는 평교사로 일관하였다. ②올바른 인격의 형성과 전인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미래지향적이고 원대한 안목을 심어 주었다. ③충실한 수업을 위한 왕성한 학구적 태도 ④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정의로운 태도, 무실역행 사상 및 학구적 열정을 몸소 실천하여 학생들의 사표가 되었다.
김교신은 교육을 통해 동지를 얻고 한세기 후라도 독립을 이루려 했기에 사표장을 가슴에 품고 다녔지만 교직을 끝내 버리지 못한 교사였고, 一人四役(<성서조선>의 발간, 교직, 農蓄生活, 家長)을 해낸 사람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6척의 거구에 눈물많은 장사였던 그가 자전거를 타고 까까머리 흩날리며 앞만 보고 달렸던 그 모습은 역사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93년 8월 여름 수련회, 대영중 옥성일)



* 참고 문헌
◆ 金鍾相, 金敎臣의 敎師像 硏究, 연세대 교육대학원, 1983.
◆ 林淳根, 김교신의 생애와 사상, 경희대 교육대학원, 1979.
◆ 表炳爀, 金敎臣 硏究 -그의 生涯와 敎育方法을 中心으로-
연세대 교육대학원, 1977.
◆ 金丁煥, 金敎臣, 韓國神學硏究所, 1988.
◆ 金敎臣 著, 金裕坤 編, 眞珠찾는 사람들, 雪雨文庫,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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