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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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온사인에 가려진 월영대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 김춘추 즉 태종 무열왕계의 왕권을 중심으로 전제 왕권을 수립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정치이념의 도구로 유학이 도입되고 6두품 계열의 지식인들은 국왕의 조력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강수, 설총 등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혜공왕 말기부터 시작된 정치적 분규는 진골 귀족들 간의 왕위쟁탈전으로 신라 하대(下代)의 혼란을 가져왔고, 골품제도로 인한 6두품들의 정치 참여 또한 한계를 가지고 있어 이들은 정치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중앙의 진골 귀족들이 권력의 요직을 독점하였고, 지방의 유력자들이나 6두품의 정치적 진출은 차단되었다.
신라 사회에 불만을 품은 6두품 계열의 지식인들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심지어는 귀국을 포기한 채 당나라에 정착하는 이들도 많았다.
폐쇄적인 신분제인 골품제가 유지됨으로써 유교적 소양을 갖춘 6두품 지식인들의 정치적 성장이 봉쇄되었던 신라 사회의 모순에 대한 현실적 불만과 현실 도피의 결과였다.
<최치원 857~ >
-당나라로 간 최치원-
최치원은 헌안왕 1년(857) 6두품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최치원은 경문왕 8년(868)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6년만인 18세(874년)에 외국인을 등용하기 위한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선주 율수현위를 시작으로 당에서 여러 관직을 거쳤다.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879년)이 일어나자 당시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었던 고병(高騈)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았다.
이때 최치원은 황소의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전국의 장수들에게 궐기를 촉구하는 글을 썼는데 만고의 명문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토황소격문〉이 그것이다.
그의 학문이 출중했다는 것은 그의 이름과 저서가「당서예문지(唐書藝文志)」에 실렸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당나라 학자 아닌 사람이 당서 예문지에 실렸다는 것은 예외에 속하는 것이었다.
고려의 이규보는『동국이상국집』권22 잡문의 <당서부립최치원전의(唐書不立崔致遠傳議)>에서 '『당서』열전에 최치원의 전기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 것’ 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최치원의 글솜씨를 짐작할 수 있다.
당나라 문인들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강동의 시인이었던 나은(羅隱)은 재주를 믿고 자만하여 남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는데 최치원에게는 자기가 지은 시 다섯 두루마리를 보여주었다.
또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하였던 고운(顧雲)과 친밀하였는데 최치원이 귀국하려 하자 그의 문장을 높이 칭송하는 시를 지어 송별하였다.
산 아래에는
천리만리의 큰 바다라
가에 찍힌 한 점 계림이 푸른데
자라산 수재를 잉태하여 기특한 이 낳았네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그 문장 중국을 감동시켰네!
열여덟 살에 글싸움하는 곳에 나아가
한 화살로 금문책(金門策)을 깨었네
<최치원이 쓴 진감화상비문. 지리산 쌍계사에 있다>
-사회개혁을 부르짖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머무를 수만 없었다. 귀국할 뜻을 가지자 당나라 희종은 그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었다.
신라 헌강왕 11년(885) 당에 유학한지 17년만인 28세에 고국에 돌아온 그는 시독 겸 한림학사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대숭복사비문」을 쓰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하여『계원필경』20권을 왕에게 바치는 등 학문적인 활동은 있었으나, 당나라에서의 정치적·학문적 경험을펼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즉 최치원의 귀국 시기인 헌강왕 때를 신라가 태평성대를 누린 것으로『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으나, 여기에서 보이는 태평성대는 중앙진골귀족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오히려 최치원이 귀국하기 전후에 이미 신라 중앙진골귀족에 대한 반발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었으며 중앙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세력의 성장으로 혼란은 예상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은 진성여왕 때 현실로 나타났다.
중앙정부는 지방의 주·군에서는 조세도 제대로 거두지 못하여 국가 재정이 궁핍한 실정이었다.
진성여왕 3년(889)에 마침내 주·군에 조세를 독촉하자 원종, 애노 등 농민의 저항을 시작으로 신라는 완전히 내전 상태에 빠졌다.
이후의 상황은 최치원이 해인사 길상탑지에 “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흉(凶) 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옮겨져 와서 그 험악한 중에도 더욱 험악하여 굶어서 죽고 전란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라고 한 것을 보아 당시의 신라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미 신라 정부는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중앙 진골귀족들은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최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서학(西學)하여 얻은 바가 많아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말기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않고 태산군(지금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 태수로 나갔다.”는『삼국사기』의 내용은 중앙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정치를 개혁하기 위한 최치원의 노력은 오히려 중앙 진골귀족들의 곱지 않은 시각으로 인해 중앙관직에서 밀려나 지방직을 전전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890년부터 태산군(지금의 전북 태인)·천령군(지금의 경남 함양)·부성군(지금의 충남 서산) 등 지방관을 지내면서 신라가 안고 있는 모순과 문제점들을 올바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진성여왕 8년(894) 왕에게시무책 10여조를 올렸던 것이다.
시무책의 내용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추측해본다면 신분제의 모순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하기 위한 과거제의 시행, 백성들의 경제적 고통을 덜 수 있는 경제제도 등에 대한 건의였을 것이다.
왕은 이를 받아들여 6두품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을 제수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중앙진골귀족들은 정치·사회의 모순을 외면하고 안일함에만 빠져 최치원의 시무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라에서는 사람을 쓰는데 골품(骨品)을 따지므로 정말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더라도 그 한계를 넘지 못한다.”라는 설계두의 말을 보더라도 최치원의 개혁요구는 실현되기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진골귀족들의 이러한 대응은 신라사회를 패망의 늪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각지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고, 지방에서는 신라정부에 반대하는 새로운 정치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후삼국으로의 분열은 이러한 시대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월영대의 옛 전경>
<월영대>
-이상과 현실의 사이에서 은둔으로-
최치원은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의 사이에서 괴리, 신라 정부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으로 관직을 버리고 은거를 결심하였다.
최치원이 해인사에 은거하기 전에 잠시 합포현(지금의 마산)에 별서를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현재 마산시 월영동 경남대학교 앞에 높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이곳에는 최치원이 새겼다는 ‘월영대(月影臺)’라 새긴 높이 210cm 폭 35cm의 화강암으로 된 자연석의 비석이 남아 있는데, 지금은 천년이 넘는 세월의 비바람으로 이 비석의 다른 부분에 새겨진 글씨를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 비석의 남쪽에 1691년에 창원도호부사로 부임한 최위가 세운 비석에 “월영대를 정화하고 천세만세에 유린되지 말라”고 새긴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 전부터 월영대라 새긴 비석은 최치원이 직접 새긴 것이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최치원은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면서 정치적·학문적 경륜을 쌓았고, 문장가로서의 명성도 얻었다. 그러나 신라 정부에서는 그는 능력은 발휘되지 못했다.
진골귀족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체제유지의도는 새로운 정치세력에게 활동공간을 열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현실사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은둔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추야우중(秋夜雨中)’을 비롯한 그의 시에 나타난 노장사상의 분위기는 은둔을 통해 스스로 만족하려는 그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사회의 모순극복을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통해 해결하기 못한 것은 그의 지식인으로서 한계를 보여준 것은 아닌지, 은둔은 현실도피의 자기 합리화는 아닌지 의문이다.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고려나 후백제를 택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현실을 극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계림은 누런 잎이고, 송악(지금의 개성)은 푸른 소나무”라는 그의 예견은 현실로 나타났다.
그의 제자들은 고려 개국에 기여했고 높은 관직에 오른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고려 현종은 그의 업적을 기려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마산 댓거리 야경>
천년 전 최치원이 처음 찾았던 월영대는 인적이 드문 한적한 바닷가에 뒤로는 노송과 기암절벽이 조화를 이룬 두척산이 병풍처럼 둘렀고, 앞에는 밤이면 잔잔한 바닷가에 비치는 달그림자는 속세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선의 세계였다.
지금 월영대 앞의 바닷가 댓거리(월영대가있는거리)는 무지한 인간의 욕망을 근대화 내지는 도시의 발전이라는 미명으로 화려하게 포장하였다. 일제가 매립한 월영대 앞의 바닷가에 화력발전소를 세우더니, 1980년대이후에는 마산시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더 넓게 매립하였다.
지금의 댓거리는 우뚝 솟은 아파트단지들과 밤이면 휘황한 네온사인이 번뜩이는 번화가로 변했다.
이제는 달그림자가 드리운 바다가 보고싶어 뒤꿈치를 들어보아도 보이지도 않는 길가의 한 모퉁이에 버려진 월영대, 시끄러운 자동차의 소음이 싫어 높은 담벼락과 철망으로 외부와 단절해 버렸다.<<<
김건선 / 당시 마산고등학교 교사
(본래의 글과 일부 차이가 있습니다)
출처: https://www.u-story.kr/727 [허정도와 함께 하는 도시이야기: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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