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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 님 서 신 발 앞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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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열방/펌) 도움 글

대화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09. 12. 24. 11:21

대 화 ( 對 話 ) ( 씨알의 소리 “ 고. 함석헌 옹 저” 1971년 8월호에서 )

나는 다른 어느 책보다도 요한복음을 좋아 합니다. 그것이 가장 내 속을 잘 풀어 주는 듯합니다.  퀘이커들은 일반으로 요한복음을 좋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교리는 대부분 거기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요한복음을 좋아하게 된 것은 퀘이커에게 배운 것은 아닙니다.  내 속에서 말씀해 주시는 이에게 배워서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복음을 좋아했기 때문에 퀘이커가 됐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안에는 가슴을 찌르는 여러 이야기가 있습니다마는 그 중에서도 가장 내게 감격을 주는 것은 세개가 있습니다.  첫째는 4장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문답하는 이야기, 둘째는 8장에 있는 음행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와서 성전에서 예수 앞에 서는 여인과의 이야기, 그리고 셋째는 12장에 있는 예수 돌아가시기 한주일 전에 예수에게 값진 향유를 붓고 발을 씻어드리는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이 세 여인이 다 인생에 실패한 멸시 받는 것들이 있습니다.  요한이 다른 공관복음서의 기자와 다른 점은 속의 예수를 그리려고 애 쓴 점입니다.  그는 그것을 하기 위해서 예수의 생애의 여러 사실 중에서 특히 그의 깊은 속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들을 골라서 썼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 놀랍게 우리 혼을 깨우쳐 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것은 이 세 개의 대화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몇 번을 읽어도 잃을수록 나는 새로운 감격을 얻습니다.


- 내가 그다 ....

야곱의 우물가에서 하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문답에서는 먼저 입을 연 것이 예수였습니다.  “나 물 좀 주시요 ”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사실 예수는 그 여자에게 생명의 물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뭇 영적인 말로 시작하면 그가 알아듣지 못할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또 예수에게는 종교 살림과 세속 살림이 딴것이 아니었습니다.  외양으로는 그는 하나의 피곤한 길손으로 잠간 쉬고 마른 목을 축이고 가자는 것이지만, 그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영적으로 목이 마른 사람이라면 그것을 본 이상 그의 육체상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쓰고만 갈수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는 우선 일상생활의 실지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그 여자를 만났을 때 예수는 맘속에 생각 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여자를 움직일 수 있을까 ?” 예수에게는 남의 속을 뚫어보는 힘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 그 여자는 한 집안 식구에 물을 길어다 주려온 별것 없는 여자지만 속에는 저도 모르게 목이 타 마르고 있는 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을  좀 달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대답하기를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 어찌해서 사마리아 여자인 나더러 물을 달라합니까 ?” 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 겉으로 내가 당신보고 물을 달라 하지만 ) “ 속으로 한다면 당신이야말로 나보고 물 달라 해야 할 것이요, 또 그런다면 내가 산 생명 물을 당신께 줄 수 있을 터인데 ” 했습니다.  여자는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못 할 뿐 아니라 바로 듣기를 거부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놔 보낼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도망 하려는 사람을 팔을 벌려 앞길을 지르듯이  끈질기게 여자를 추궁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안됐다 생각하자 갑자기 화제를 돌려 “ 가서 당신 남편을 데려 오시오” 했습니다.  예수는 그 여자가 어떤 살림을 하고 있는지 첨부터 뚫어보고 있었습니다.  묻지 않고도 남편이 다섯 여섯 이었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 왜 새삼 남편을 데려 오라고 하셨을까 ? 여자의 간지러운 데를 찌른 것입니다.  거기를 찔리고는 그 이상 회피하는 태도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남편이라고 했을 때 그 여자의 마음의 주인을 찾은 것 이였습니다.  이 날까지 여자는 사람대접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자기도 자기를 사람으로 대접 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무엇을 찾는지 저도 모르면서 찾아 남편을 다섯 여섯 번 바꿨습니다. 그러나 마음엔 여전히 얻은 것이 없고 세상을 낡은 신짝처럼 굴러 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한 번 보고 그 안에 사랑에 타 마르는 혼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깨우려고 당신 남편을 데리고 오시오 했습니다.  그 찔림을 받고 나면 그 이상 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짓밟혀 쓰러졌던 혼을 깼습니다.  이제부터 말은 세속에서 영적인 세계로 들어갑니다.  여자가 “ 내가보니 예언자이십니다.” 했을 때 그것은 완전히 투구를 벗고 무조건 항복을 한 것입니다. 자기 내부를 부끄럼 없이 내 논 것입니다.  이제부터 대화는 시작됩니다.

여자가 말하기를 “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하는데 당신들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합니다” 해서 참 종교는 어떤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이것은 윤락 여성이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참 사람의 혼에서 나오는 물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도 “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과 참으로 예배해야 한다” 고 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신약의 최고봉이라고 합니다.  신약 안에 진리가 많습니다. 마는 이보다 더 높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높은 진리를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베드로도 요한도 아니요 남편이 다섯이던 윤락여인에게 참 대화는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나 또 얼마나 쉽습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한 연극의 장면입니다.  여기 깊고 깊은 야곱의 우물이 있습니다.  쌓아 올린 늙은 돌에 퍼렇게 이끼조차 돋아 이스라엘의 오랜 문화를 상징합니다.  그것을 배경으로 그 앞에 세 사람이 섭니다. 하나는 예수, 하나는 윤락 여인, 그리고 놀라는 제자들, 클라이 막스에 가까웠을 때 여자는 말했습니다.  “ 나는 메시아가 오실 줄 압니다.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일러 주실 줄 믿습니다.”  이것은 벌써 어렴풋이 깨달아지는 기쁨이 있어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를 분명히 알아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듣자 예수는 “ 당신과 말하는 내가 깁니다.” 했습니다.  그는 일찍이 누구에게도 이렇게 분명히 짤라 말한 적이 없습니다. 여자가 알아 볼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삼십 청년이 한 나절 길에 피곤해서 이마에 땀이 철철 흘리며 티끌을 쓰고 우물가에 주저앉아 ‘ 나 물 좀 주시오’ 하는 것을 당하고 있는 그의 속에는 메시아라면 반드시 웅장한 체격에 얼굴에 광채가 나고 구름을 타고 오실 것으로 알고 있었을 것 입니다.  그런 것을, 그는 메시아란 밖으로 아무 특별한 것이 아니오, 저같이 남편 다섯 되는 타락 여성의 존재의 밑바닥에 졸고 있는 영혼을 불러낼 수 있는 것을 알려 주어야 했습니다.  그는 “ 너의 영혼과 그 고뇌를 참으로 알아준 이 만이 정말 메시아다.  그리고 내가 곧 그라 ” 하는 뜻을 말하신 것입니다.  여자는 마침내 알아들었습니다.  나와 네가 대면을 했고, 그 가운데서 한 여인이 새로 났습니다.


- 가슴을 어루만지는 손

현장에서 잡힌 여인 이야기에서는 요한은 매우 다른 장면을 보여 줍니다.  때도 정오가 아니라 이른 아침이요, 예수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거의 끝까지 수동적 태도로 계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에는 무지의 문제였지만 여기서는 죄 문제입니다.  어떤 오랜 사본에는 이 대목이 들어 있지 않다 해서 더러 이 이야기의 역사적 진실성을 의심하는 의견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것이 신약에서 빠진다면 나는 신약이 그 가치를 절반은 잃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로 살아난 영혼이 수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말 허다한 파선한 영혼에게 등대가 됐었습니다.  요한은 이 이야기 직전에 7장 끝에 있어서 아주 재미있는 장면을 그립니다.  예수의 능력 있는 말과 기적을 보고 수많은 군중이 열광적으로 따랐습니다.  그러나 저녁이 될 때 모든 사람은 다 헤져가고 말았습니다.  일본 시인 이시가와 닥구복구의 노래가 있습니다.  “ 사람이 다 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마치 무덤에 들어가듯 돌아가 자 버리는 구나 ” 꼭 그 말과 같습니다.  또 돌아가 자 버리기나 하면 괜치 않습니다.  모든 죄악이 밤에 이루어집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낮에는 유한 세계를 보지만 밤엔 무한 세계를 봅니다.  밤은 잠을 위해서만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기도와 명상은 밤에 됩니다.  그러나 또 사람의 나쁜 부분이 날 뛰는 것도 밤입니다.  사람의 눈은 하나만이 아닙니다.  둘입니다.   영원 무한을 보는 눈과 유한 물질의 세계를 보는 눈과 ,  영원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어둠속에서도 비쳐주는 영원한 빛에 따라 사람의 영혼을 뚫어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만 가진 사람은 어둠속에서는 보지도 못하고 보는 사람이 없는 줄 압니다.  그래서 물질계를 보는 눈만을 가진 사람은 밤에는 보는 사람이 없다 생각하기 때문에 꺼림 없이 온갖 죄악을 짓습니다.  그러나 영적 눈을 가진 사람은 영원한 증인이 있는 줄을 알기 때문에 밤에도 낮에도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군중도 낮에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알아들은 것 같았으나 밤이 올 때, 소수의 사람을 제하고는, 집으로 가서 다시 죄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다가 아침이 되면 그 영적인 사람과 육신의 사람이 다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전략적인 순간에 연극이 벌어졌습니다. 

그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뒤에 장엄한 성전이 배경을 이루고 그 앞에 또 세 사람이 섭니다.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눈이 새벽이슬같이 반짝이는 예수,  어둠의 그늘 속에서 정욕으로 한 밤을 지내다가 이불 속에서 끌려나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처럼 떨며 온-하잘 것 없는 여자,  그리고 민족과 종교와 법을 대표하며 스스로 의롭다 하는 마음에 가슴을 제치고 거만이 서서 자기의 업신여기는 자를 잡아먹으려 제 잘난 것을 칼처럼 내 둘으는 서기관 바리새인 교인들,  그들이 그렇게 분노하며 그 불쌍한  여인을 끌고 온 것은 정말 그 여자와 그 여자의 한 일 때문이 아니라 다만 예수를 잡기위해서 였습니다.  여자는 하나의 미끼로  이용이 됐을 뿐입니다.  이렇게 거짓되고 간악한 마음에 대화가 될 리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는 잠잠하고 땅위에 글자만 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세당당하게 네가 이번에는 걸렸구나 하는 듯 추궁했으나 예수는 그저 잠잠했습니다.  왜 잠잠합니까?  그들의 감정이 잔잔해지고 이성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 숨을 태우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제 정신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예수는 땅위에 글만 쓰고 있었습니다.  사실을 말 한다면 그들의 가슴을 어루만진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의 보드라운 손이 앓는 아기의 가슴을 쓸어주 듯이, 사람은 아무리 타락이 됐다 하더라도 그 깊은 속에는 영혼이 있는 법입니다.  예수는 양쪽을 다 불쌍히 보았습니다.  남을 억누르는 사람이나 억누름을 당하는 사람이나 다 같이 그 잘못된 살림으로 영혼이 속에서 쭈구러지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는 강한 서기관이요, 하나는 약한 여자이지만 그들 속사람은 다 같이 죽고 있습니다.  그래 그 둘을 다 불쌍히 보았습니다.  손이 땅에 글자를 쓸 때 그의 마음은 그들의 가슴을 쓸어 주고 있었습니다.  아마 첨에는 “ 죄 ” 하고 썼는지 모릅니다.   그 담은 그것을 슬쩍 지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 영혼” 하고 썼습니다.  또 슬쩍 지워 버리고, 이번은 “ 용서 ” 하고 썼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시간은 차차 흘러가고 마음들은 식기 시작했습니다. 벌벌 떨던 여인도 숨을 쉬고 눈에 예수의 얼굴이 들어오게 됐고, 노가 천정에 올랐던 서기관들도 차차 숨이 가라앉아 예수의 얼굴을 바라보게 됐을 때 거기는 어떤 거룩하고 거스릴 수 없는 위엄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예수께서 고개를 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 누구든지 당신들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시오 ” 했습니다.  거기에는 비난하는 기색도, 타이르는 어조도 없었습니다.  다만 한없이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빛  뿐 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씩 하나씩 빠져 나갔습니다.  아무 말 없이.  침묵의 말씀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가만히 돌이켜 여자를 보고 “ 그들이 다 어디 갔소? 당신을 죄주는 사람이 없소?” 했습니다.  여자가 말하기를 “ 없습니다.” 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음행의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입에서 “ 나를 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했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거룩한 용서를 받아 깨끗해진 양심의 입에서가 아니고는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도 ” 나도 당신을 죄주지 않소,  가시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 했습니다.  왜 예수는 그를 죄주지 않았습니까?  그는 분명히 죄 속에서 딩군 사람입니다.  그러나 속을 본다면 그 여자의 속사람은 목이 타서 사랑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더러운 죄를 지은 것은 바로 사랑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을 만나겠는지 그 방법을 몰랐습니다.  정신적인 사랑을 그는 육체 속에 찾았습니다.  예수는 그것을 뚫어 보셨습니다. 그때 그 한 행동을 옳다는 것 아니지만 그 불쌍한 것의 속에 사랑과 아름다움을 찾아 더듬는 손을 보셨습니다.  그 더듬는 손을 잘못 나가게 해서 죄에 빠지게 한 것은 다만 그의 어리석은 자아입니다.  예수는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것을 인간에게 공동으로 있는 비참으로 보시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예수의 첫째 가르침은 용서입니다.  용서하는 심정이 없이는 대화는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동굴 속에 살든 이래 백 만년 동안 무지와 정욕으로 인해 막혔던 인간의 숨이 한 마디 대화로 열렸습니다.

  

- 말없는 대화

셋째 번 이야기는 저녁에 됩니다.  유대 사람에게는 새 날이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바로 일주일 전입니다.  거기도 세 사람이 나옵니다.  자기의 죽을 것을 알고 그것을 제자에게 알려 주려 애쓰는 예수의 몸에 값진 기름을 붓던 마리아,  그도 아마 천한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불평을 품는 가롯 유다,  이번에는 셋이 다 말이 없습니다.  예수의 태도는 적극적으로 참는 것도 아니고, 수동적으로 참는 것도 아니요, 조용히 사랑의 순간을 즐기시는 태도입니다. 마리아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말로 할 수도 없고 말이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미 죽음을 당하기로 마지막 결심을 했고 그것을 제자들에게도 분명히 말해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뜻을 깨닫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알았습니다.   “ 이번은 평상시와 다르시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직감으로 알았습니다.  사랑은 직감을 가집니다.  직감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예수는 일찍이 말 한 적이 있습니다.  “ 그 여자는 죄 사함을 받은 것이 더 많기 때문에 나를 더 사랑한다.”  사랑했기 때문에 속눈이 열렸고, 그랬기 때문에 남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겉으로 보면 예수는 천연하고 평상과 다른 것이 조금도 없지만, 마리아의 눈에는 그의 마지막이 임박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닥쳐오는 고난에 대해 말 아닌 말로 해주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기 말로 뭐라 대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 ? 사랑은 자기 할 것을 압니다.  사랑은 제 말을 가집니다.  사랑만이 사랑의 말을 알아듣습니다.  그 여자의 그 사랑의 표현이 곧 그 옥합을 깨고 값진 기름을 그의 발에 붓고 제 머리 털로 그 발을 닦는 것입니다.  그 기름이 무엇입니까 ?  그것을 보던 제자에 의하면 그것은 쓸데없는 낭비였습니다.  그 여자는 아마 슬픈 일생을 두고 모아 온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이제 쓰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은 단순한 향 기름이 아닌 것입니다.  그의 사랑의 결정입니다.  이제 그것을 쓸 순간이 왔습니다.  이제 그 때입니다.  두었다가 쓸 때가 없습니다.  그럼으로 합을 깨쳐서 단번에 다 부어 버린 것입니다.  공리주의 눈으로 하면 이것은 낭비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에게는 이에서 더 중요한 순간이 없습니다.  이제 여기서 다 쓰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예수는 이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유다의 그럴듯한 비난을 물리치고 “ 그 여자를 괴롭히지 말라.  그가 나를 위해 장사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했습니다.  마리아가 그의 속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마리아의 속을 알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 사랑의 하나 됨이 도리어 유다의 마음을 어둡게 했습니다.  사랑은 반동을 일으키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샘입니다. 

이 대화는 여기서 끝난 듯 하지만 사실은 엿새 후 마지막 만찬에서 계속이 됩니다.  이번에 비극의 주인공은 유다입니다.  성경에는 수수께끼가 많습니다.  마는 모든 수수게끼 중에서도 수수께끼는 유다의 성격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그의 동기에 대해 여러 추측을 합니다마는 그것은 추측일 뿐입니다.  아무도 이 비극의 주인공에 대해 환하게 납득이 가는 성격을 설명을 해 주는 이는 없습니다.


대 화 ( 對 話 ) ( 씨알의 소리 “ 고. 함석헌 옹 저” 1971년 8월호에서 ) -- 20090930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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