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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이슬람 본문

선교 태국/펌) Deep South thai

태국의 이슬람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0. 7. 12. 10:53

태국의 이슬람

 

 

이병도(2000년)

Ⅰ. 서 론

 

타이족은 본래 중국 양자강 하류 운남성(雲南省)에서 7세기 경에 난짜오왕국을 건설하여 존속해 오다가 몽고의 침략으로 점차적으로 남하하여 현재의 땅으로 정착한 후 13세기초 북부지역에 쑤코타이왕국(1238-1438년)을 건설하였다. 타이족이 인도차이나반도의 현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기 이전에 이 지역은 이미 크메르문화 및 먼문화를 비롯한 여러 종족의 문화가 혼재하였다. 현재는 타이족 외에도 중국인, 무슬림, 인도인, 그리고 여러 갈래의 고산족 등 다양한 종족들이 태국 각 지역에 산재하여 거주하고 있다.

 

태국은 전체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상좌불교(Theravada Buddhism)를 신봉하고 있는 불교국으로 불교는 태국인의 의식구조 및 생활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불교문화는 곧 태국인의 생활문화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태국인과 불교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태국에는 불교 외에도 이슬람교, 기독교 그리고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고, 그 외 다양한 민간신앙들이 태국인의 생활과 직?간접적으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은 태국 전체인구의 약 4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데 불교를 믿고 있는 태국인들은 이들을 통칭 '타이무슬림’(Thai Muslim)이라고 부른다.

타이무슬림은 한 종족이 아니라 말레이무슬림, 인도무슬림, 파키스탄무슬림, 방글라데시무슬림, 중국무슬림 등의 서로 다른 종족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 말레이계 무슬림이 가장 큰 단일 종족집단을 이루어 타이무슬림 전체의 약 6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은 말레이시아와 국경에 인접한 빳따니, 얄라, 나라티왓, 싸뚠 등 태국 남부 4개 도(道)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현재 타이무슬림의 대부분은 말레이계 무슬림으로 태국 내 다른 혈통의 무슬림이 대부분 태국사회에 동화된 것과는 달리 말레이계 무슬림은 아직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 문화, 전통을 고수하며 태국사회에서 소수종족의 하나로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언급하는 타이무슬림은 말레이계 무슬림을 지칭함을 미리 밝혀둔다.

타이무슬림은 타 지역에서 현재의 태국의 땅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던 여타 종족과는 달리 타이족이 인도차이나반도에 정착하기 시작한 13세기 이전부터 이미 태국 남부지역에서 찬란한 문명을 누리며 살았던 토착민족이다. 그 후 이들 중 일부는 태국의 중부지역으로 진출하여 말레이반도로 경유하는 무역을 전담하면서 서서히 태국사회에 동화되어 갔다.

그러나 남부지역에서 왕국을 건설하고 정착해 살던 무슬림들은 지리적으로 말레이시아와 인접해 있고, 역사적으로 말레이문화와 지속적인 접촉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말레이문화에 더 익숙해 있으며, 언어 또한 일상생활에서 태국어가 아닌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 언어 그리고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진 채 태국사회에서 이슬람이라는 신앙을 매개로 한 집단들로 구성된 소수종족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이와 같이 언어, 민족, 그리고 문화적으로 말레이세계의 일부라 할 수 있는 태국의 남부지역이 상좌불교국가인 태국에 속해 있는 것은 과거 수 백년간에 걸친 태국인들의 팽창주의적인 정복과 1909년에 체결된 태국과 영국간의 말레이반도 국경조약의 결과이기 때문이다.(Wyatt 1984 : 206-207)

따라서 영토는 태국에 속해 있지만 역사, 문화, 언어 등의 정체성에 있어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불교도와 타이무슬림 간의 상호이질감은 결국 종족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래서 타이무슬림은 태국으로부터 분리하여 독립적인 이슬람국가를 건설하려는 분리주의운동을 전개하면서 많은 문제를 야기시켜 왔다.

이에 대해 초기에 태국정부는 강압적인 방법으로 타이무슬림을 태국사회로 흡수하려는 정책을 취했지만 오히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1980년대 이후부터 정부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무슬림사회에 종교활동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면서 교육정책을 중심으로 한 꾸준한 동화정책을 시도하여 많은 실효를 거두고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타이무슬림 사회의 특색을 알아보고 태국정부와 타이무슬림간의 갈등의 역사적 근원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서 태국정부가 타이무슬림을 태국사회로 동화시키기 위해 어떠한 정책을 취해 왔고, 그리고 앞으로 타이무슬림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를 고찰하기로 한다.

 

 

Ⅱ. 타이무슬림사회의 특색과 역사적 배경

 

1. 타이무슬림의 사회?경제적 특색

일반적으로 태국 남부의 국경지역이라 함은 빳따니, 얄라, 나라티왓, 그리고 싸뚠의 4개도(道)를 포함하는 북부 말레이시아와의 국경지방을 통칭한다. 이 중 싸뚠도의 경우는 다른 3개 도와는 달리 주민의 대부분이 태국어를 읽고, 말할 줄 아는데 이는 그만큼 역사적으로 말레이문화의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다른 도의 타이무슬림보다는 말레이족으로서의 민족의식이 그다지 강하지 않다.

이들 4개 도를 합하여 ‘씨짱왓팍따이’라고 부르며 인구분포상 불교도보다 무슬림이 더 많고 동일한 역사와 문화 및 전통과 관습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태국어가 아닌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있고, 그리고 과거 절대군주시대에 태국의 속국으로서 통치에 자율성을 가졌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 4개 도 중 빳따니도를 제외한 나머지 3개 도가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4개 도의 총 인구는 2000년 현재 약 340여만명으로 주민의 약 70퍼센트가 이슬람교를 신봉하며, 이들 중 약 40퍼센트 정도가 태국어를 읽거나 쓸 줄을 모르며 또한 말할 줄도 모른다.(Kromkanpokkrong 2000) 즉 일상생활에서 태국어가 아닌 말레이어를 쓰는데 야위(Jawi)라 칭하며 말레이시아 끌란딴(Kelantan)주에서 많이 사용하는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언어는 물론 신앙, 풍습, 복장, 음식 등 불교를 믿고 있는 태국인들과 생활상의 차이점이 뚜렷하고, 지리적으로도 인접한 말레이시아 사회와 더 밀접한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타이무슬림이라는 어휘를 거부하고 스스로 말레이무슬림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태국의 다른 종족의 하나인 중국인과 태국의 중부지역으로 진출한 무슬림들이 태국사회에 거의 동화된 것과는 달리 이들은 태국에서 태어나 태국인의 국적을 갖고 있으면서 태국사회로 동화하기를 거부한 채 자신들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며 이슬람에 대한 높은 긍지를 가지고 있다.

 

4개 도의 총 면적은 약 13,600평방k㎡이며, 일반적인 지형적 특성은 평지 및 산, 구릉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거리상의 관계도 있지만 항로, 수로, 육로 등 교통이 말레이시아와의 접촉이 편리하게 되어 있다. 이로 인해서 중앙정부나 다른 도보다도 말레이시아와 접촉이 잦고, 말레이시아로부터 문화영역과 생활영역에서 자연스런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차상호 1983-84 : 62)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으로 태국에 속해 있는 남부의 4개 도는 모든 면에서 태국보다는 말레이시아와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에 말레이세계의 일부라 할 수 있다. 이 지역의 무슬림이 일상생활에서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종교, 언어, 풍습 등의 면에서 말레이시아와 비슷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태국인이라는 의식보다는 말레이시아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타이무슬림 사회 역시 태국사회와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태국의 다른 농촌사회처럼 대가족제도를 형성하고 있고, 윗사람에 대한 공경심이 높으며, 가족구성원끼리 서로 협력하여 생계를 꾸려간다. 이들에게 이슬람교는 거의 절대적이어서 모든 생활이 이슬람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거의 드물다. 만약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결혼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배우자가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결혼한다. 무슬림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여 결혼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들은 아직도 결혼이나 유산상속 등은 꾸란의 계율에 따라 이루어지고 부인을 4명까지 둘 수 있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고 있다. 또한 술과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다른 국가의 무슬림 사회와 같다.

이들은 촌락형태로 집단을 이루며 살고 있는데 대부분 태국불교도와 따로 떨어져 무슬림들끼리 살고 있다. 그 이유는 이들의 강한 배타성 때문으로 불교도들이 사는 마을에 무슬림들이 소수로 같이 사는 경우는 있어도 무슬림들이 사는 마을에 불교도들이 소수로 사는 경우는 드물다. 어떤 부락에서는 태국불교도와 무슬림들이 함께 촌락을 이루어 살고 있으나 상호교류는 흔하지 않다.

 

한편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지역은 말라카(Malacca)해협과 끄라(Kra)협곡의 중요성이 특히 부각되었던 곳이다. 과거에 인구도 많았고, 아시아무역의 중요한 항구로서 유럽과 중동 그리고 중국의 상인들이 많이 왕래하며 교역을 하였던 곳으로 경제적 부(富)를 누리던 이슬람왕국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현재는 태국에서 매우 낙후되어 있는 지역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태국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남부지역은 여름과 우기의 두 계절만 있으며, 몬순계절풍의 영향으로 일년 내내 덥고 비가 자주 온다. 타이무슬림은 대부분 촌락단위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지역이나 해안가에 거주하며, 주로 농업을 위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특히 고무재배가 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주업이며, 그 밖에도 소규모의 벼농사나 상업, 과수원, 커피재배, 광업, 그리고 고기잡이나 중국인 혹은 태국인들이 경영하는 공장의 고용인으로 종사하고 있다.(Kruvannapan 1990 : 76-80)

고무재배는 대부분 소규모인데 빳따니도에서는 벼농사 다음으로, 그리고 나머지 3개 도에서는 타이무슬림이 가장 많이 종사하고 있는 생계수단이다. 따라서 고무가격의 변동이 이들의 수입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벼농사는 경작지가 매우 적어 자체수급이 어려운 실정이다.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접한 관계로 말레이시아와의 무역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어 고무, 주석, 망간, 과일 등을 말레이시아로 수출하고, 말레이시아로부터는 기계류, 소비재, 건설장비, 밀가루, 우유 등을 수입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규모 무역은 중국계 태국인이 장악하고 있으며 타이무슬림은 단지 일상생활용품을 팔고 사는 정도의 소규모 장사를 하고 있어 경제적 수준이 매우 열악한 상태에 있다.

 

2. 뻐너(pondok)의 역할

 

타이무슬림의 교육수준은 매우 낮고 문맹률도 70퍼센트 정도로 매우 높은 편이다. 이들에게는 말레이어가 모국어로 간주되며 일상생활에서도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태국어는 배울 필요성도 없다고 느끼고 있다. 이들이 사용하는 말레이어는 태국 쑤코타이왕국의 3대왕인 람캄행대왕(재위:1279-1298년)이 태국문자를 창제하기 이전에 태국 남부지역에서 뿌리를 내린 언어이다.

타이무슬림은 말레이어를 통해서 이슬람에 관한 교리와 지식을 배우기 때문에 말레이어를 이슬람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말레이어를 잃는 것은 그들의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구사하는 말레이어는 말만 있고 문자가 없다. 이 때문에 야위라 칭하는 아랍문자로 표시하며 말레이어로 일상생활이나 종교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김영애 1995 : 240-241)

타이무슬림은 어릴 때부터 뻐너(pondok)라는 전통적인 이슬람학교에서 이슬람에 관한 기본적인 교리와 교육, 수행방법 그리고 철학, 역사, 아랍어 및 기타과목 등을 배운다. 뻐너에는 또크루(To' Guru, Tok Guru)라는 전통 이슬람교사와 우스따즈(Ustaz)라는 일반 이슬람교사가 모든 교육을 담당하며 이들은 이슬람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지도자들이다.(Suttasat 1976 : 132-133)

태국어로 뻐너는 ‘끄라텀’이라고 번역되며, 이는 초가집이란 뜻으로 무슬림을 교육시키는 학교를 의미하는데 우리나라의 옛날 서당(書堂)과 비슷하다. 이슬람교사가 각 가정을 다니며 개인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비효율적이자 대개 또크루의 집 주위에 작은 초가집을 세워 꾸란과 이슬람에 관련된 각종 관습을 가르쳤던 것에서 연유되었다.

뻐너라는 말은 이집트에서 처음 생겨나 말레이반도를 거쳐 태국에 들어왔으며, 남부 국경지역과 무슬림 거주지역에 처음 설치되었다. 뻐너가 없었을 때 타이무슬림은 마을의 어느 일정한 집에서 교사로 부터 꾸란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꾸란에 대한 교육은 번역이 없이 단지 암기만 하도록 했는데 그 이유는 꾸란에 쓰여진 언어가 아랍어였기 때문이다.

태국의 첫 뻐너는 아유타야왕국(1350-1767년)때 빳따니에 설치되었고 이 때부터 또크루에 의한 교육이 실시되었다. 무슬림들은 또크루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갖고 자녀들을 뻐너에 보냈으며, 학생의 수가 많고 적은가는 전적으로 마을 주민들의 선호도에 달려 있었다. 뻐너의 학생들은 아랍어로 ‘빠께’라고 부르며 연령의 제한이 없이 입학할 수 있다. 또한 뻐너는 등록금이 없는 무상교육이며 교육에 소요되는 각종 경비는 ‘싸깓’이라 부르는 마을 주민들이 기부한 재산으로 충당한다.(Vichaitanapat 1973 : 65-66)

타이무슬림 거주지역에 뻐너가 설치된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종교적 측면으로 무슬림에게 있어 꾸란은 ‘삶의 법전’이며 무슬림의 사상과 생활, 가치관, 행동방향 등을 정하는 지침이다. 따라서 뻐너에서의 교육을 통하여 이슬람사상과 이슬람교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것은 무슬림의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며,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마을 공동체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사회적 가치관의 측면으로 타이무슬림은 자녀들이나 자신이 돌보아야 하는 사람에게 꾸란에 규정되어 있는 이슬람교리를 올바로 지키고 수행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고자 한다. 무슬림사회에서 명예와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타이무슬림의 최우선의 의무이자 가치관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 무슬림 공동체에서 뻐너의 설립이 촉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경제적인 측면으로 뻐너는 무상형태의 교육방식이고 또크루는 강사료를 요구하지 않지만 모든 주민들의 존경과 칭송을 받으며 ‘싸깓’이라는 기부재산을 헌납받는다. 따라서 또크루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는 같은 공동체의 일반 주민들보다 높을 수밖에 없으며 이 점 역시 이들에 의한 뻐너의 설립을 촉진시킨 또 다른 요인이 되었다.

사실 초기에 설치된 뻐너는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뻐너에서의 강의는 말레이어와 아랍어만 사용하고 태국어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으며, 교육기간도 8년 내지 15년으로 일정치 않았고, 또한 교과과정, 교재, 교육계획 등에서 확실한 규정이 없이 교육에 관한 모든 것이 전적으로 또크루 개인에 달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뻐너에서의 교육은 교육내용이 꾸란의 교리와 일치하여 올바른 이슬람교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타이무슬림의 선호도는 매우 높았다.

 

타이무슬림의 자녀들은 의무적으로 태국식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는 하지만 교과과정이 이슬람교상의 교리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여러가지 규제를 받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대개 중도에 그만둔다. 또한 이슬람식 교육을 받는 것이 사회적으로 가치있고 체면이 선다는 가치관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타이무슬림이 뻐너에서 공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슬람식 풍습과 문화가 그들 사회의 행동방향을 정하는 지침이 되고 있고, 또한 자신들의 역사, 종교, 그리고 언어적인 특성을 지키고 이슬람을 통해 그들의 생존과 단결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이외에도 태국의 정규학교에서 교육시키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들고 수업시간이 자유로와 자유선호의식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타이무슬림의 성격과도 부합되고, 또한 일상생활에서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굳이 어려운 태국어를 배울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지 않다. 즉 태국어를 잘 할 경우 그 자녀들이 이슬람의 전통적인 문화와 지식에 관심을 갖지 않고 태국화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김영애 1995 : 202-203) 일부사람들은 말레이어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의 언어인 것과 마찬가지로 태국어가 불교도의 언어라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태국어를 사용하면 불교도로 동화되고 이는 곧 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와 함께 종교적 이점을 얻는다는 부모들의 가치관은 많은 무슬림 자녀들을 뻐너에 보내 꾸란과 말레이어에 대한 공부를 더욱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타이무슬림사회에서는 뻐너출신의 졸업생을 더 선호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칭송하고 있다. 따라서 타이무슬림이 이러한 뻐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교육을 고수하고 중요시했으므로 이들이 태국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갖거나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기 힘들었을 것은 자명하며 이러한 것은 대략 197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같이 타이무슬림은 어릴 때부터 뻐너 중심의 교육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신적,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언어적 특성을 가지고 그들의 생존을 위해 그리고 무슬림의 단결을 유도하기 위해 이슬람을 내세우며 태국사회에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율법 학습을 통해서 이슬람 근본 원리사상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만일 이슬람을 믿지 않거나 교리를 지키지 않으면 이슬람사회가 발전할 수도 또한 자신들이 생존할 수도 없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3. 타이무슬림의 역사적 배경

고대 시대에 태국 남부지역은 크게 두 지역 즉, 빳따니(현재 태국의 빳따니도, 얄라도 나라티왓도)와 싸이부리(현재 말레이시아 케다(Kedah)주 일부와 태국의 싸뚠도)로 나뉘어졌다. 빳따니의 경우, 역사학자들은 7세기경 말레이반도에 랑까쑤까(Langkasuka)왕국이 세워졌다고 하며 이 왕국이 빳따니의 전신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랑까쑤까왕국은 인도문명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와 브라만교를 믿었고, 랑까쑤까만(灣)은 지형적으로 무역선들이 몬순계절풍을 피할 수 있는 대피처이자 중계 무역항으로써 중국을 비롯하여 서양과 중동상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곳이었다.(Kruvannapan 1990 : 32)

 

랑까쑤까왕국이 멸망하고 씨위차이(Srivichai)왕국(A.D. 7-13세기)이 들어서 영토를 빳따니, 말레이반도, 자바, 그리고 수마트라까지 확장하여 통치하게 됨에 따라 불교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 크게 확대되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이 불교왕국이 수마트라 남부에서 발흥하여 말라카 해협을 장악했던 스리비자야(Srivijaya)왕국으로 이해하고 있다.

 

한편 이슬람교가 13세기경 아랍상인에 의해 말라카 무역왕국을 경유하여 동남아에 전파되었고, 빳따니왕국의 건국과 때를 같이 하여 이슬람은 태국에 영향력을 뻗치기 시작하였다.

빳따니왕국 역사에 의하면 왕국을 창건한 뚜낙파왕이 심한 병이 들었을 때 차약 싸잇(Sheikh sa-id)이라는 무슬림이 왕을 완치시켰다고 한다. 그 후 그를 초빙하여 왕 자신은 물론 왕족과 귀족들에게 이슬람교를 가르치게 했고, 이에 국민들도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Teeuw and Wyatt 1970 : 146-148)

 

빳따니일대의 말레이반도지역이 태국인들의 영향하에 들어온 것은 쑤코타이왕국의 람캄행대왕 때로 13세기말 람캄행대왕이 남부의 나컨씨탐마랏을 정벌하러 갔을 때 말라카해협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는 이미 이슬람이 전파되어 있었다. (Chulalongkorn University, 1983 : 435) 당시 나컨씨탐마랏은 말레이반도와 싱가포르까지 영토를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빳따니지역은 쑤코타이왕국부터 태국에 예속되었고 따라서 이슬람교는 쑤코타이왕국부터 태국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쑤코타이왕국은 남부지역을 속국에 포함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빳따니는 쑤코타이왕국에게 3년에 한번씩 공물을 받쳐야 했지만, 대내적인 행정이나 통치에 있어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쑤코타이왕국에 이어 아유타야왕국의 영향력도 말레이반도로부터 싱가포르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던 까닭에 빳따니는 물론 말라카도 한동안 아유타야왕국에 예속되었다. 그 후 아유타야가 타이만에만 무역을 독점하고 남부지역에는 소홀한 틈을 이용해 말라카왕국은 1460년부터 1511년까지 빳따니를 일시적으로 합병하기도 했다. 그러나 말라카가 1511년 포르투칼의 점령으로 식민지가 되자 빳따니는 다시 아유타야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Kruvannapan 1990 : 40)

아유타야왕국 때 빳따니는 쑤코타이왕국 때와 마찬가지로 속국의 위치에 있었지만 중앙정부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간섭과 견제를 덜 받았다. 또한 당시 속국에 대한 통례적인 지배방식대로 대내적인 행정이나 통치는 술탄에게 맡겨 스스로 통치하는 자치권은 인정받고 있었으므로 빳따니는 고유의 역사, 문화, 종교, 풍습 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종주국인 태국과는 달리 문화적으로 불교가 아닌 이슬람교의 영향이 지속되었고 종족이 같은 말레이족이었기 때문에 자연 모든 면에서 말레이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김영애 1995 : 196-197)

 

1767년 아유타야왕국이 버마에 의해 몰락되자 빳따니는 다른 남부지역의 여러 도시들과 함께 독립을 선언하였고, 태국정부는 버마와의 전쟁에 휘말려 한동안 빳따니를 비롯한 남부의 여러 지역들을 평정할 기회가 없었다.

이후 현 랏따나꼬씬왕국(1782년-현재)의 라마 1세(재위:1782-1809년)가 1786년에 군대를 보내어 빳따니를 정복하여 쏭클라도의 관할을 직접 받도록 함으로써 태국정부가 직접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빳따니의 영주들이 수 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키며 쏭클라도를 공격하는 등 통치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빳따니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남부지역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라마 2세(재위:1809-1824년)는 1809년에 빳따니를 7개의 소주(小州)로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이들 7개의 소주들은 쏭클라도의 관장 하에 통치되었고, 통치자는 태국인 관료가 아닌 태국정부에 충성하는 술탄이나 라자를 임명하여 통치하게 함으로써 준자치권을 인정받아 내정상 종주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어느 정도 독립을 누렸다.(Burupat 1976 : 75)

 

러나 라마 5세(재위:1868-1910년)때 태국은 각 지방을 효과적으로 중앙정부의 통제하에 두려는 행정개혁을 단행하여 지방의 영주가 절대권력을 가졌던 과거의 통치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이 몬톤제(Monthon : 管區制)를 설치함으로써 중앙집권화된 관료체제를 확립했다. 이 개혁의 일환으로 남부지역에 대해서 1902년 '7개 소주지역 통치에 관한 법’ 을 공포하여 종전의 지방 왕족이나 영주들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켰다. 이에 실권을 빼앗긴 ‘라자’ 중심의 왕족들은 자치권 회복문제를 들고 나와 자신들의 움직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이에 동조하는 타이무슬림과 함께 태국정부에 대항하였다.

 

사실 1902년의 행정개혁은 타이무슬림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이유로는 첫째, 타이무슬림사회에서 전통적으로 권한을 행사하던 정치적, 종교적 엘리트그룹이 태국인 관료나 태국정부에 복종하고 충성하는 무슬림으로 대치되어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따라서 행정적, 재정적으로도 그들의 지위가 크게 위축되었다. 둘째, 타이무슬림에 대해 불교적인 가치관과 문화를 강요함으로써 태국인과 무슬림 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러한 행정개혁은 타이무슬림에게 태국으로부터 분리하여 그들 자신의 독립된 자치정부를 세우려는 열망을 갖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김영애 1995 : 209)

 

몬톤제는 태국에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다음해인 1933년에 폐지되어 몬톤은 짱왓(道)으로 변경되어 빳따니몬톤은 빳따니도, 얄라도, 나라티왓도로 분리됨으로써 태국정부의 직접 관할을 받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남부 4개 도 중의 다른 하나인 싸뚠도의 경우 원래 싸이부리(Saiburi)에 속해 있었는데 랏따나꼬씬왕국의 라마 3세때부터 태국정부에 대해 자주 반란을 일으키자 싸이부리를 싸이부리, 꾸방까쑤, 뻐릿, 싸뚠으로 분할하여 각 도시마다 태국정부에 충성하는 말레이 영주의 후예들을 임명하여 나컨씨탐마랏주의 관할하에 두었다.

그 후 1859년 꾸방까쑤는 싸이부리에 합병되었고, 1897년 라마 5세때 ‘몬톤제’ 하에서 이들 지역들이 싸이부리몬톤으로 전부 합병되었다. 이어 1909년 영국과의 국경조정 과정에서 싸이부리와 뻐릿을 영국에게 양도하였고 싸뚠만 남겨 태국의 푸껫주의 관할하에 두었으며, 이후 1933년에 현재의 싸뚠도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Kruvannapan 1990 : 47-55)

 

앞서 언급했듯이 싸뚠도는 비록 남부 4개 도 중의 하나이고 말레이시아와 인접해 있으나 이미 19세기초부터 태국정부의 관할을 직접 받아 다른 도의 무슬림보다는 말레이문화의 영향을 덜 받았다. 따라서 말레이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이 그다지 강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주민들 또한 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른 3개 도의 주민들보다 월등히 높고 태국식 교육체제를 많이 수용하여 비교적 교육수준이 높다.

 

 

Ⅲ. 타이무슬림의 분리독립투쟁

 

 

쑤코타이왕국 이후 빳따니왕국은 속국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문화, 종교, 언어적으로 말레이시아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음으로 끊임없이 태국정부에 항거하여 소요를 일으켰다. 특히 태국의 역대 왕조들이 왕권쟁탈에 휘말리거나 외부세력과의 전쟁으로 인해 곤경에 처해 있을 때는 그 강도가 더욱 심했다.

이러한 소요는 라마 5세가 1902년 남부 7개 소주 통치에 관한 법령을 시행하자 더욱 심화되었다. 중앙정부가 지방 영주들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태국인 관료들로 영주를 대치시키는 한편, 타이무슬림에 대해 강제적으로 흡수하려는 정책이 시도되었다. 이 때부터 타이무슬림은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고수하기 위해 태국으로부터 분리독립 움직임을 본격화하였다. 특히 빳따니의 영주였던 압둘 카데(Abdul Kader)는 분리독립운동의 핵심인물로 태국으로부터 분리를 주장하다 1902년 체포된 후 핏싸눌록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9개월만에 사면되었다.

 

태국정부는 남부지역에서의 분리독립운동이 정부정책에 불만을 품고 기득권을 되찾으려는 세력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주로 조세거부나 이슬람 종교기관에 대한 정부의 제한정책에 대한 불만 표시, 그리고 타이무슬림의 종족적, 종교적 분리요구 등이었다.(차상호 1983-84 : 68)

그러나 태국정부는 1903년 결혼과 상속에 관한 사항만 빼놓고 이 지역의 모든 행정제도와 법규를 태국식으로 바꾸었다. 또한 1921년에 ‘초등교육 의무법’을 제정하여 타이무슬림의 자녀들을 태국 초등학교에 입학시켜 태국식의 교육을 받는 것을 의무화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강압적인 정책이 전개되자 타이무슬림은 이슬람과 자신들의 문화를 말살시키려는 정책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그들의 저항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상대적으로 태국정부에 대한 반감이 깊어 갔다.

 

또한 1932년 입헌혁명 이후 태국정부는 타이무슬림을 통합하려는 첫 단계 조치로 남부지역에서 태국국가, 태국역사, 태국어를 가르치도록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타이무슬림들의 거센 반발만 야기시켰다. 타이무슬림 지도자들은 그들의 문화와 종교를 고수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타이무슬림간의 단결을 유도하고 자치권을 획득하고자 말레이시아의 끌란딴으로 이주하여 태국에 있는 무슬림과 연계하여 투쟁하였다. 일부는 태국의 의회나 행정부에서 타이무슬림의 대변인 역할을 맡으며 그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였다.

 

1938년 피분(Phibun)이 수상이 되면서 타이무슬림의 태국정부에 대한 반감은 절정에 달했다. 민족주의자였던 피분은 ‘랏타니욤’(pan-thaism)정책의 일환으로 태국 내에 거주하는 모든 종족을 태국국민으로 끌어들여 태국의 언어와 문화로 흡수하여 동질화하려는 강력한 정책을 전개하였다. 동시에 이질적인 언어나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등 태국 내 모든 소수종족에 대해 강압적으로 일관하였다.

태국정부가 타이무슬림에 대해 처음으로 ‘콘타이’(태국인)라고 부르게 된 것은 피분 정부가 소수종족들에 대해 동화정책을 실시하면서부터였다. 이 전까지는 캑, 캑무슬림, 캑말라유, 캑팍따이 등의 호칭으로 무슬림들을 멸시하거나 차별을 하였다. 이외에도 피분은 초등학교에 말레이어 교육을 취소하고, 말레이시아로부터 말레이어 서적 반입을 금지시켰으며, 태국인이 다른 지역에서 남부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는 것을 금했고, 또한 뻐너를 이슬람공립학교로 개칭하는 등 철저하게 타이무슬림을 태국사회로 동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밖에도 치마모양의 싸롱 바지의 착용을 금지하고, 남자에게는 긴 바지와 모자의 착용을 강제적으로 시행하였다. 또한 짐을 운반할 때 머리에 이는 말레이식을 금하고 태국식으로 어깨에 매는 방법을 하도록 규정하는 등 무슬림들의 관습, 풍습, 언어와 여타의 이슬람 관습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인 강압정책이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서 타이무슬림은 생존차원에서 태국으로부터 분리독립하려는 욕망을 더욱 자극하였다.(차상호 1983-84 : 15)

 

한편 2차 대전 이후 태국의 여러 주변국가들이 잇달아 독립하자 식민지역에 거주하던 무슬림들 사이에 민족주의 의식이 생겨났고, 타이무슬림 민족주의자들도 태국으로부터 분리독립하려는 강한 유혹을 받았다. 그 결과 타이무슬림은 1946년 '대(大)빳따니말레이연합(Association of Malays of Great Pattani, GAMPAR)'과 '빳따니 인민 운동(The Pattani People's Movement, PPM) ' 등의 조직체가 중심이 되어 무슬림의 자치권과 독립획득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Vichaitanapat 1973 : 75)

일부 극단적인 타이무슬림은 말레이무슬림과의 공동투쟁을 통하여 연방결성을 성취하자고 주장하였다. 당시 무슬림 최고 지도자였던 하지 압둘 라만(Haji Abdul Rahman)은 1948년 나라티왓에서 대규모의 폭동을 주도하였다. 피분 정부가 시행한 동화정책에 대한 반감으로 촉발된 대규모 폭동에서 수많은 인명이 태국군대에 의해서 살상되고 약 2천여 명의 타이무슬림이 말라야로 피난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

이 폭동 이후 타이무슬림은 1948년 1월 유엔사무총장에게 탄원서를 보내어 남부 태국의 4개 도를 분리하여 영국령 말라야에 합병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유엔 안보리가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특별위원회를 태국에 파견하여 조사하고 국민투표로 타이무슬림의 의사를 물을 것도 요청하였다.

그 결과 이 지역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고조되어 이슬람과 타이무슬림에 대한 위협이 감소되었다. 뿐만 아니라 피분 정부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나마 타이무슬림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태국정부는 또한 남부에서 정부관료의 임용과 이슬람교의 지위, 그리고 이제까지 타이무슬림이 추구해 온 개혁에 관한 조치를 담은 성명을 발표하는 등 남부 4개 도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정책을 내놓았다. 타이무슬림도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국정부가 약속한 개혁은 실천되지 않았다. 태국정부와 타이무슬림 간의 관계는 1954년 무슬림 지도자인 하지 수롱(Haji Sulong)과 3명의 추종자가 행방불명되면서 크게 긴장되었다. 이들을 태국경찰이 타이만에 수장시켰다는 풍문이 유포되자 타이무슬림 사회에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하였고 태국정부의 종족차별정책에 대한 비난이 국내외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결국 피분 정부의 타이무슬림에 대한 동화정책의 시도는 남부 4개 도에 심각한 피해를 안겨 주었고, 이들에게 깊은 원한을 남겨 놓았다.

 

1960년대에 들어서도 태국정부의 타이무슬림에 대한 동화정책이 계속되자 분리운동을 주장하는 무슬림 조직들이 여러 지역에 대표부를 설치하여 적극적으로 분리주의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편 1961년 싸릿 정부는 전 국민의 국가적 통합을 유도하기 위하여 남부 4개 도에 대해 전통적인 이슬람학교인 뻐너를 이슬람공립학교로 등록하여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도록 조치하였다. 이 정책은 타이무슬림에게 태국식 교육과 태국어를 가르쳐 태국인으로서의 의식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으며, 이에 따라 모든 뻐너는 태국정부가 만든 교과과정에 따라 태국어 교재를 이용하여 태국어로 교육을 해야 했다.(Chantawomol 1964 : 23-24)

이러한 정책은 무슬림사회에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으며, 1961년 3월에 대규모의 폭동 준비로 이어졌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반란음모죄와 공산주의자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운동은 진정되지 않고 1970년대 중반까지 도처에서 크고 작은 소요사태가 계속되었다. 이에 태국정부도 군사작전을 증가시키며 무슬림에 대한 강경책을 견지하자 분리주의운동가들은 결국 극단적인 성향을 띄며 테러나 약탈, 방화 등 지하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말레이공산당의 무장세력이었던 말레이인민해방군과 연계되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 당시 타이무슬림 분리주의운동은 크게 3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째 그룹은, 연방국가를 형성하여 연방체제하에서 태국정부와 대등하게 독립된 행정체제를 갖자는 그룹이고, 둘째는 술탄체제하에서 독립국가로 출발하자는 그룹이며, 셋쌔는 독자적으로 빳따니공화국을 건설하자는 그룹이었다.

이 그룹들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사이에 생겼는데 그 주요 조직으로는 '빳따니 민족 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of the Pattani, BNPP), '빳따니 연합 해방기구’(Pattani United Liberational Organization, PULO), '민족혁명전선’(National Revolution Front, BRN), 그리고?? '(알라)의 군대’(Sabil-Illah) 등이다. (Pitsuwan 1985 : 17)

 

1980년대 초에는 또 하나의 이슬람 분리주의운동 조직체로 태국 남부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다와(Dawah)라는 명칭의 정통 이슬람조직이 태국정부에 알려졌다. 이 단체 역시 무장투쟁의 노선을 취했으며 태국 남부에 무슬림 독립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조직들은 말레이시아와 태국의 국경에 있는 밀림 속에서 활동하면서 상호 연계협조하면서 파괴와 약탈행위를 일삼았다. 그들은 태국인에게 불안감과 태국정부에 안보상의 위협을 가중시키면서 국내외적으로 지지와 지원을 요구하여 분리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1981년 쁘렘 수상이 남부지역에 대한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부국경행정관리대’를 창설한 이후 이들의 게릴라 활동은 크게 줄어들었지만, 그 후에도 태국남부의 무슬림 지역에서의 소요와 게릴라 활동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1993년 8월에 빳따니, 얄라, 나라티왓에서의 학교 방화사건, 불교사원에 대한 수류탄 투척, 태국군 공병대에 대한 습격, 열차폭팔미수사건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는 분리독립운동에 대한 타이무슬림의 열망이 소멸되고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1997년에는 빳따니무슬림위원회(Council of the Muslim People of Pattani : MPRMP) 란 단체가 새로 등장하여 타이무슬림을 대변하여 태국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태국정부는 과거의 강경 일변도에서 벗어나 온건한 포용정책을 취하며 무슬림의 문제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꾸준히 노력해 왔고, 그 결과 최근에는 무슬림들에 의한 테러행위나 대규모 폭동은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어 표면적으로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Ⅳ. 태국정부의 무슬림정책

 

 

1. 교육 및 종교면

여러 연구결과에 의하면, 타이무슬림을 통합시키는데 가장 큰 장애로 교육문제를 들고 있다. 따라서 태국정부는 타이무슬림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교육수준을 높이는데 중점을 두어 왔다.

이슬람교육을 담당하는 또크루에 의해 설립된 뻐너는 교과과정이나 과목, 그리고 수업시간과 교육기간 등이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타이무슬림의 교육은 전적으로 또크루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에 의존하였는데, 또크루의 자격기준 또한 일정한 기준이나 원칙이 없었다.

강의는 아랍어나 말레이어를 4년 간 기본언어로 교육하는데 태국어 과목이 없어 학생들은 태국어를 말하거나 쓸 수가 없었다. 따라서 시대의 변화에 맞는 새로운 학문이나 지식을 폭넓게 배우거나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 결과 어릴 때부터 태국인이라는 의식이 부족하게 되고 태국식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서 태국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원하는 일부 정치가나 무슬림단체로부터 쉽게 유혹을 받게 되어 있었다.

태국정부는 무슬림사회의 뻐너에서의 교육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뻐너를 시대에 적합하고 올바른 교육기관으로 만들고자 기준에 떨어지는 뻐너를 정비하여 타이무슬림에게 교육의 기회를 확대시켜 주고 정규 이슬람교육을 정책적으로 뒷받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취지에서 1954년 ‘공립학교법’에 따라 태국정부는 뻐너를 타이무슬림 지역의 공동체발전의 중심 교육기관으로 육성하는 방안으로 이를 공립학교로 등록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등록 첫 해는 약 200여개의 뻐너 중 단지 20여개만이 등록을 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1959년 푸미폰 국왕이 얄라를 방문하여 무슬림들의 교육에 큰 관심을 표명한 후 활기를 띄게 되었다.(Piyanat 1991 : 138)

 

“ ......이 지역에 있어서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주민들이 태국어를 말할 수 있도록 교육제도를 개선해야 할 것이다. 비록 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는 없어도 의사가 소통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태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통역을 이용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서로간에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태국어를 배우도록 노력하자.....”

 

위의 연설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왕은 남부 타이무슬림 지역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대부분의 주민들이 태국어를 말할 수 없다는 점을 들었다. 이로 인해 교육은 물론 경제와 사회문제, 그리고 행정문제를 야기하여 남부지역의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고 인식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타이무슬림과 불교도간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결국은 국민화합에도 큰 장애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국왕의 연설은 정부로 하여금 서둘러 교육제도를 개선하도록 했다. 이에 정부는 1961년 처음으로 ‘뻐너개정법’을 공포함으로써 전국에 있는 모든 뻐너가 교육성에 자발적으로 등록하도록 하였다. 이 법에 따라 공립학교로 등록을 한 뻐너는 정부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고 과거에 종교교육만 가르치는 것에서 탈피하여 태국어 과목과 직업교육과목도 추가하여 태국어 교육과 태국식 교육을 받도록 유도하였다.

이에 따라 1961년부터 남부의 거의 모든 촌락에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4년 과정까지 설립하여 태국식 학교의 교과과정을 지역의 특성에 맞게 개선하여 타이무슬림이 많은 지역에서는 이슬람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허용했다. 또한 태국어로 만들어진 많은 표준 태국어 교과서가 말레이어로 번역되었으며, 뻐너가 교과과정에 비종교과정을 넣기로 합의함으로써 정부의 보조금과 공식적 신임의 약속을 받고 일부 이슬람교와 말레이어에 관한 교과목을 포기하기도 하였다.(차상호 1983-84 : 76)

그후 1965년 정부는 뻐너를 더욱 철저하게 정부의 감독과 보호 하에 두려는 목적으로 다시 뻐너를 이슬람공립학교로 변환시키는 정책을 취하여 뻐너를 다른 태국의 일반공립학교와 마찬가지로 ‘공립학교법’의 감독하에 두고자 했다. 그러나 이 정책 역시 지난 1961년 때와 마찬가지로 강제적이지는 않았고, 공립학교로 등록한 뻐너에 대해서는 교사, 교육기자재 그리고 각종 보조금을 지원했다.

1961년과 1965년 두 번에 걸친 뻐너에 대한 정부 정책에 있어서 주목할 점은 뻐너를 이슬람공립학교로 개편하는데 있어서 강제성을 띄지 않고 순수하게 또크루의 자발적인 의사에 맡겼다는 것이다. 즉 정부는 보조금 지급을 활용하여 뻐너를 일반공립학교로 등록케 하여 정부의 감독과 보호 하에 두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큰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따라서 많은 수의 뻐너들이 일반공립학교로 전환하기를 거부했다.

이렇게 되자 정부는 1966년 뻐너에 관한 두 가지 정책을 규정했다. 첫째, 새로 뻐너를 설립하는 것을 금지하고, 둘째, 기존에 설립된 뻐너는 앞으로 6개월 이내에 교육성에 등록하고 3-5년 내에 공립학교로 전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는 앞으로 뻐너와 같은 성격의 종교 교육제도를 없애고, 국가의 정치?사회?경제적 상황에 부합되도록 새로운 종교 교육제도를 마련하여 정부의 보호와 감독 하에 두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전국 535개의 뻐너 중 426개가 공립학교로 변환했고, 이후 새로 설립된 뻐너는 없었다. 나머지 109개의 뻐너는 내각의 의결에 따라 폐교하도록 결정했다.

 

또한 중?고등학교와 직업학교가 여러 지역에 설립되었다. 고등교육기관으로 1967년에 쏭클라국립대학교를 빳따니에 설립하여 타이무슬림을 위해 많은 수의 정원을 특별 배려하였으며, 고등교육을 받고자 하는 타이무슬림을 위해 대학입학특별할당제를 채택하여 1971년부터 남부지역의 국립대학과 경찰대학에 각각 50명씩 특례입학을 허용하고 있다.(김영애 1995 : 234-235)

이러한 교육제도의 개선으로 태국어를 말할 수 있는 무슬림이 1959년의 34퍼센트에서 1980년대 초까지는 62퍼센트나 증가하였다.(Ticachunnatiyen 1996 : 92) 또한 1960년대 이전에는 남부지역의 태국식 중학교에 진학한 무슬림이 거의 없었으나 1985년에는 약 60퍼센트나 되었으며, 교육대학을 졸업한 무슬림도 전체학생의 20퍼센트에 이르러 태국정부가 의도한대로 많은 수의 무슬림이 태국식 고등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밖에 새로운 지방 엘리트를 양성함으로써 무슬림들을 태국정부의 관료조직에 참여하게 하고, 자신의 출신지역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유도함으로써 태국어를 말하는 관료와 말레이어를 말하는 주민간의 의사소통은 물론 지역주민간의 적대감과 문화적 갈등을 줄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태국정부는 이 지역에 파견되는 태국관료에 대한 교육도 강화하여 타이무슬림의 언어, 문화, 풍습 등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이질감과 거리감을 좁히도록 했다. 이러한 정책에 일환으로 1977년 태국 남부 4개 도에 파견되는 관료의 자질을 규정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태국 남부의 사투리를 말할 수 있는 품행이 바른 타이무슬림이어야 하며, 둘째, 무슬림이 아닌 경우 적어도 무슬림의 언어를 말할 줄 알아야 하고, 셋째, 언어를 모를 경우에는 타이무슬림이어야 하며, 넷째로 타이무슬림도 아니고 또 말레이어를 모를 경우에는 무슬림의 풍습과 전통에 밝고 업무 처리가 공정한 인물이어야 한다.(김영애 1995 : 236)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규정에 따라 태국정부는 이 지역에 파견되는 관료들이 무슬림의 종교 및 문화에 따라 올바르고 편견이 없이 공정하게 정부정책을 수행하도록 특별한 배려를 하였다. 이들의 업무지침으로 준수할 사항과 금기사항을 다음과 같이 정해 놓았다.(Kana Kamma kan Aekalak Haeng Chat 1988 : 77-79)

 

□ 준수사항 □

첫째, 종교적 차이가 태국인을 서로 다른 종족으로 분리할 수는 없다.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 역시 태국인이기 때문에 국가의 한 구

        성원으로서의 권리를 가지며, 다른 종교를 믿는 태국인과 동등하게 정부로부터 여러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

둘째, 무슬림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막기 위해 이슬람 교리를 비롯하여 이슬람의 관습, 종교활동 등을 공부하고 이해함으로써 무

        슬림들과의 문화적 괴리감을 없애도록 노력한다.

셋째, 이슬람사원, 이슬람의 종교의식에 대해 성스러운 마음을 갖고 항상 존경심을 표한다.

넷째, 무슬림의 종교행사에 초대받았을 때 종교적인 차이를 이유로 들어 거부하지 말고 함께 참여하도록 한다.

다섯째, 무슬림 지역에 처음 파견되는 관료는 먼저 이 지역 이슬람지도자를 방문하여 인사하고 존경을 표한다.

여섯째, 무슬림이 관료가 되었을 경우 종교교리에 따라 철저히 수행하고 다른 종교를 믿는 관료들과도 잘 협력한다.

일곱째, 종교가 국가에 평화 및 안보를 가져다주는 중요한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무슬림의 종교활동을 보장하고 적극 후원하는데

            관심을 갖고 도와주는 것이 최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 금기사항 □

첫째, 무슬림을 ‘캑’이라고 부르는 등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간에 ‘분리’를 불러 일으킬만한 언행을 삼간다.

둘째, 무슬림이 금기하는 가축의 요리를 먹는다던가 술을 마시는 행위 등 무슬림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종교교리에 반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셋째, 무슬림 여성에게 옳지 않은 행위나 처신을 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넷째, 무슬림의 종교활동을 비하하는 말이나 행위를 금지한다.

다섯째, 다른 종교의식에 무슬림을 강제로 초청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설명한 태국정부의 무슬림에 대한 교육정책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타이무슬림을 제도권내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로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태국정부의 노력으로 근대식 교육을 받은 많은 무슬림들이 태국 내 여러 높은 지위에 채용되었고 이들은 서서히 태국사회에 동화되었다.

특히 고등교육을 받은 타이무슬림을 관료로 특채하고 있는 태국정부의 정책은 무슬림사회의 변화에 큰 기여를 하였고 무슬림과 불교도 간의 융합에도 의미있는 역할을 하였다. 무슬림 또한 그들 나름대로 정부의 관료가 됨으로써 사회적 지위의 상승은 물론 경제적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해당자들에게는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뻐너 출신의 학생들의 교육수준이 낮아 무슬림 학생들 모두가 태국의 상류사회로 나갈 수 있는 관문인 고등교육을 받기가 힘든 실정이며, 태국정부의 정책에 의해 특전을 받은 무슬림들도 요직에 임명되는 경우도 흔치 않다. 비록 정부의 특전을 받았다해도 이들의 입장은 태국사회 내에서 무슬림도 불교도도 아닌 다소 애매한 입장에 있어 무슬림사회에서 자신의 문화를 거부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결국 무슬림 관료들은 태국정부와 타이무슬림 간의 가교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종교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때 태국은 역사적으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불교이외의 다른 종교를 배척하거나 혐오한 적이 결코 없었다. 오히려 국왕을 비롯하여 정부, 그리고 일반 국민들까지도 종교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에 대한 자유는 헌법에서도 명확히 명시되어 있다.

이슬람교는 태국에서 불교 다음으로 신도수가 많은 종교이며 전국적으로 40여개 도에 약 2,000개의 이슬람사원이 있다. 태국정부는 1945년 타이무슬림을 태국인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의 일환으로 이슬람법령을 공포하였다. 태국정부의 대 무슬림 지원은 주로 그들의 종교활동을 보장해 주기 위한 것이며, 이에 따라 무슬림들은 각종 출판사업을 통해 이슬람문학을 포함한 각종 출판물을 보급시키며 이슬람에 관한 이해를 높이고 있다.

또한 1976년 이슬람선교단체인 탐마짜릭(Pilgrims of Faith)을 설립한 이후 이슬람에 대한 올바를 종교교육을 하도록 조처하였다. 이외에도 이슬람 최고 지도자로 국왕에 의해 임명되고 왕실의 후원을 받는 쭐라랏차몬뜨리를 방콕에 두고 이슬람에 대한 자문을 받고 있으며, 그 밑으로 ‘이슬람중앙위원회’를 설치하여 실질적으로 이슬람에 관한 업무를 총괄케 하고 있다. 또한 '이슬람 지방위원회’와 '자문위원회’를 두어 타이무슬림 전체의 이익을 대변화 함으로써 무슬림과 태국불교도간의 이해와 평화적인 공존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현재 태국에는 왕실과 정부의 후원을 받는 쭐라랏차몬뜨리 그룹, 알 지하드(Al-Jihad)지를 발행하는 이슬람 현대주의자 그룹. ‘결속’이라는 뜻을 가진 알 라비타(Al Rabitah)의 발행을 주관하는 정통 이슬람주의 그룹, 그리고 이들 두 세력과의 경쟁을 꺼리면서 쭐라랏차몬뜨리의 간섭을 거부하는 태국 남부의 말레이계 무슬림 그룹 등 4개의 그룹이 각기 무슬림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양승윤 1996 : 471)

 

2. 정치 및 경제면

 

1902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야기된 타이무슬림의 분리주의운동은 그간 태국정부가 강압적인 방법으로 태국사회에 동화시키려 한다는 인식 하에 타이무슬림 스스로에 의한 정권을 장악하는 길만이 자신들의 독립과 주체성 확립을 주장해 왔다. 따라서 이들은 주로 테러나 파괴, 폭동 등의 물리적 행동을 통해서 불안과 소요를 야기시킴으로써 태국정부에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했다. 이들의 분리주의 움직임은 또한 인접한 말레이시아는 물론 아시아, 중동의 이슬람국가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정신적 지원 외에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받기도 했다.

태국정부는 이러한 타이무슬림의 자치권에 대한 열망을 분리주의운동의 원인으로 의심해왔고, 타이무슬림은 태국정부가 자신들의 정당한 열망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문화적으로 예속시키려는 의도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에 태국정부는 무슬림들로부터 정부의 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타이무슬림사회에 많은 종교적 특권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정치적인 배려는 무슬림들을 정치적으로 대중화시키고 태국정부에 대해 좀 더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함으로써 타이무슬림을 태국사회로 동화시키는 계기로 삼고자 함이었다. 또한 태국정부는 과거 분리주의운동에 관여한 무슬림들을 무조건 체포하여 내란이나 소요 선동죄로 구금하고 실형을 가하는 등 강경 일변도였으나, 1990년 이후 기존의 노선에서 벗어나 온건한 포용정책을 취하고 있다.

 

이외에도 태국정부는 분리주의자들이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중동 이슬람국가들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지속적인 반정부 활동이 가능하다고 믿고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외부의 지원을 중립화하거나 감소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제까지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리비아, 파키스탄을 비롯한 여러 이슬람국가들은 타이무슬림의 분리주의운동을 해방운동의 차원에서 도와왔다. 타이무슬림에게 재정적인 지원 뿐만 아니라 장학금과 유학을 알선하여 다수의 타이무슬림 자녀들을 유학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인접한 말레이시아 및 인도네시아와는 특별하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들 두 정부로부터 남부 4개 도에 대한 태국의 주권을 거듭 확인하기 위함이다. 나아가서 말레이시아가 공식적으로 혹은 비공식적으로라도 타이무슬림의 분리주의 운동을 지원하지 않고, 또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로 하여금 중동 이슬람국가들의 분리주의자들이 타이무슬림에 대한 지원을 자제해 주도록 요청하는 데 있다.(김영애, 1995 : 240)

 

한편 경제적인 측면에서 남부 4개 도 지역의 전반적인 소득수준은 태국의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낙후된 상태이다. 이들의 소득은 태국의 평균소득에 미치지 못하며, 더욱이 이웃 말레이시아와 비교하면 더욱 열악한 상태여서 태국정부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또한 주민들 대부분이 해안가를 따라 작은 촌락을 이루며 살고 있기 때문에 도시문명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다.

따라서 타이무슬림은 중국계 태국인들과 불교도들은 정부의 보호 아래 잘 살고 있는데 자기들만이 가난하다고 여기고 있다. 타이무슬림의 상대적으로 낮은 교육수준은 경제적 수준의 향상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그래서 종족적인 문제도 경제적 빈곤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따라서 일부 무슬림 지도자들은 이 지역의 부는 중국계 태국인과 태국불교도에게 대부분 돌아가기 때문에 그들의 자치 혹은 분리가 이 지역에서 소득의 정당한 분배를 성취하는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차상호 1983-84 : 77)

 

태국정부가 타이무슬림 지역에서 경제적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남부 4개도 지역의 발전에 힘쓰기 시작한 것은 1961년 이후의 일이다. 1961년 태국정부는 이 지역 주민들의 주요 생계수단인 고무재배로 얻는 수입을 증가시키고자 ‘고무농장 보조기금’을 마련하여 오래된 고무나무를 잘라버리고 품종이 더 좋은 고무나무를 재배토록 유도했지만 대부분 소규모의 영세농들이었기 때문에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새로운 고무나무가 자랄 때까지 기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고, 그 기간 동안의 수입의 감소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태국정부는 특별위원회를 두어 1964년부터 1974년까지 남부 4개 도의 농촌지역 발전에 많은 돈을 투자하여 도로와 항만의 건설을 비롯해 주민들의 복지건설에 힘썼으며, 농촌의 소득을 증대시키기 위해 농기구의 자동화 및 기계화에 힘썼다.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무슬림의 경제적 빈곤을 해소하고자 마을단위 공동체를 만들어 그 공동체를 중심으로 발전시킴으로써 경제적으로 자립마을을 유도하였다. 이 자립마을은 종교와 종족을 가리지 않고 지원 받은 사람 중에서 무작위로 선발하여 정착시켰다. 초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야기되었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불교도와 무슬림들은 합일점을 찾아내어 국민적 일체감을 창출해내는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 운동을 통해 언어, 문화, 종족상의 차이점보다는 공동체 의식과 삶에 대한 희망이 공통된 목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 이 지역에서 태국정부의 꾸준한 경제적 발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부 4개 도는 아직 낙후된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므로 생활수준이 높은 말레이시아와 비교해 볼 때 타이무슬림은 상대적인 빈곤으로 인한 열등의식과 함께 이웃 말레이시아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이들은 말레이시아와의 합병을 통해서 그들 자신들도 말레이시아인들처럼 잘 살 수 있으리라는 은근한 소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생각들이 불식되지 않는 한 태국정부에 대한 불신감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3. 무슬림 정책의 전망

 

태국정부는 오랫동안 타이무슬림과의 이질감을 좁히고 태국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통합시키는데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 왔고 이러한 노력은 1990년대 이후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특히 불교도와 타이무슬림 간의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큰 열쇠라고 판단된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타이무슬림의 역사, 문화 및 종교 그리고 언어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적극 지원하는 것이다. 타이무슬림은 이슬람을 그들의 정체성과 단결성을 지탱하는 지침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의 차별적인 문화적 특성이 다수종족을 형성하고 있는 불교도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타이무슬림은 그들의 종교활동에 있어서 태국정부로부터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립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정부는 불교도와 무슬림이 종교적인 믿음에 있어서 상호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둘째, 타이무슬림 거주지역에 파견되는 관료들의 자질을 강화해야 하는 문제이다. 관료는 정부의 대표이고 따라서 관료의 행동 하나 하나가 바로 정부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관료들이 정부가 의도한 목표에 따라 올바르고 공정하게 처신을 하지 못한다면 이는 정부와 무슬림 간의 상호불신임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남부 얄라시에서 개최된 ‘관료의 행태’ 에 관한 세미나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지적되었다.(Rusamilae 2000 : 34-35)

① 일부 관료들은 아직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경향이 있다.

② 업무수행에 있어서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

③ 무슬림들을 멸시하여 접촉을 꺼려 한다.

④ 주민들에 대한 봉사정신이 투철하지 않고 포용력이 부족하다.

⑤ 관료들 사이에 협동심이 부족하다.

⑥ 일부 계층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

⑦ 파견지역의 전통, 관습, 언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현지 토착민들과 갈등을 자주 일으킨 다.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위와 같은 문제들은 일부 관료들의 비우호적인 행태를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정부는 타이무슬림과 가장 근거리에서 접촉하는 사람이 바로 관료라는 점을 인식하여 이 지역에 파견되는 관료들의 자질을 강화시키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셋째, 교육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특히 교육은 불교도와 태국정부에 대해 불신임과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타이무슬림의 사고방식이나 관점 혹은 가치관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수준의 향상이 무슬림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태국어와 태국문화를 강요하는 교육이 되어서는 안된다. 무슬림의 정체성은 인정하면서 말레이어와 마찬가지로 태국어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 전 세계 이슬람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태국정부는 적극적인 정책적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웃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그리고 중동 및 아프리카의 여러 이슬람국가들은 타이무슬림과 이슬람 형재애로 연결되는 끈끈한 연대감을 유지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태국정부가 여러 이슬람국가들과 꾸준히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남부지역 문제 해결에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태국정부는 무슬림 문제가 국제문제로 비화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말레이시아를 위시한 동남아의 이슬람국가와 유대관계 진작에 특별하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Ⅴ. 끝맺음 말

 

인구의 90% 이상이 불교도인 태국사회에서 무슬림은 종교적 차원의 소수종족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태국 남부 말레이반도 지역에 먼저 뿌리를 내린 종교는 이슬람교였고, 이후 이 지역은 정치, 사회적으로 전형적인 말레이사회가 되었다.

타이무슬림은 자신들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태국국민이 된 것이 아니라 태국정부의 팽창정책에 의한 정치적, 역사적 사건의 희생물이라는 인식에서 더욱 더 말레이시아와 하나라는 생각을 갖게 했고, 따라서 종족, 언어, 종교, 문화 등의 면에서 종주국인 태국과의 차이는 태국에서 분리하여 독립된 이슬람 자치정부를 세우려는 저항운동으로 발전되어 태국정부와 심한 갈등을 겪어왔다.

태국이 통일된 국가를 수립한 후 빳따니를 비롯한 남부 4개도 지역은 태국의 속국의 위치에 있었지만 통치의 권한은 속국의 통치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이 지역은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누렸다. 그러나 랏따나꼬씬왕국의 라마 5세가 행정개혁을 단행하여 중앙집권체계를 이루는 과정에서 남부 이슬람지역의 자치권을 빼앗고 태국정부의 영향력 하에 두자 타이무슬림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태국에서 정치적으로 독립하여 이슬람국가를 건설하려는 분리독립운동으로 전환되기에 이르렀다.

라마 5세 이후 태국정부는 타이무슬림의 세력을 약화시켜 태국의 제도권 내에 끌어들임으로써 태국사회로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시도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피분 정부의 타이무슬림에 대한 강압적인 동화정책은 타이무슬림으로 하여금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일체감을 중심으로 더욱 더 공동체 의식과 결속을 강화하도록 만드는 결과만 가져왔다.

이후 태국정부는 동화보다는 통합을 강조함으로써 타이무슬림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 어느 정도의 종교의 자유를 부여함과 동시에, 교육면에 중점을 두는 정책의 실시로 타이무슬림과의 거리감을 좁히고 태국사회에서 조화를 이루게 하여 많은 실효를 거둘 수 있었으며, 분리주의운동가들에 대해서도 온건한 포용정책을 취함으로써 무슬림사회에 큰 호응을 받았다.

현재 태국 내의 타이무슬림사회에서 그들의 최대의 안전보장과 영향력 있는 지위의 보장은 하나의 공동사회에 있다는 사실의 인식이 점차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타이무슬림 문제는 태국의 정치적, 사회적 통일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안보적인 측면에서도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적 차이에서 오는 상호 현격한 문화적 차이로 인한 갈등이므로 상호간의 문화적인 포용이 가장 기본적인 열쇠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태국정부는 남부 4개 도의 타이무슬림이 스스로가 태국인이고 태국에서 태어났으며, 따라서 태국영토 내에서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하는 방법을 모색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태국어를 말하고, 태국어를 배우며, 다른 지역의 무슬림들이나 다른 종교를 믿는 태국인들과 같은 느낌을 갖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태국불교도와 무슬림 간의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불평등 역시 문제해결의 장애물로 남아 있다. 타이무슬림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태국정부의 많은 투자와 노력이 있었으나 타이무슬림의 일반적인 상황은 여전히 열악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태국정부의 적극적인 대책도 필요할 것이다.

 

이외에도 양측간의 서로의 양보를 필요로 하여 타이무슬림은 태국국민으로서 지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권리와 의무를 행하고, 태국정부도 계속해서 타이무슬림에 대한 고등교육의 기회를 확대하여 경제적으로 생활을 향상시킴으로써 점진적인 통합을 지속해 나아간다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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