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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빠따니 말레이 이슬람 선교 전략 본문

선교 EH국/Deep South Thai

빠따니 말레이 이슬람 선교 전략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0. 7. 12. 10:32

빠따니 말레이 이슬람 선교 전략

 

양덕훈 선교사(태국 남부)

 

 

I. 들어가는 말:

 

이슬람 선교의 효시(嚆矢)인 라몬 룰(Ramon Lull: A.D. 1235-1315)은 당시의 이슬람 세력인 사라센을 복음화(福音化)하기 위해 다음의 세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첫째, 이슬람(사라센) 언어에 대한 폭 넓고 정확한 지식,

둘째, 기독교 진리에 대한 변증서 발간,

셋째, 복음 증거를 위한 순교적 자발성.[1]

 

그의 생각은 현대의 이슬람 선교 전략에 여전히 귀중한 기초를 놓아준다.  그가 언어라고 불렀던 것은 실상 이슬람 세계관, 신앙 등을 표현하는 도구로서의 언어이므로 이슬람 지역 선교사들은 이슬람, 더 나아가 자기가 속한 지역의 ‘이슬람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기독교 진리를 왜곡이나 타협 없이 이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변증하며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을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결여되면 복음 전파를 온전히 완수할 수 없다.

 

위의 세 가지 요건을 틀로 삼아 ⑴ 태국 이슬람 현황, ⑵ 태국 이슬람권 선교를 위한 효율적인 전략, ⑶ 바람직한 태국 이슬람권 사역 자세 등을 차례로 기술해 본다.

 

 

II. 본 말:

 

 A. 태국 이슬람 현황:

 

마히돌 대학교(Mahidol University) 에서 제공하는 기본 자료[2] ([괄호] 안의 진술)-필자의 견해와 다소 차이가 있다-를 중심으로 부가 설명을 덧붙인다.

 

  1. 주 거주 지역과 인구:

 

[모슬렘들은 나라티왓, 빠따니, 얄라, 싸뚠 등의 최남단 도(province)에 주로 집중되어 있으며, 태국 최대의 종교적 소수 집단을 이룬다.] (Mahidol University)

그러나 방콕에만도 70만에 이르는 이슬람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으며, 태국 남부 전반에 이슬람 공동체가 점차 확대되는 모습이 보인다.

 

관계자들은 태국 인구를 6천만 명으로 보고 대략 4 % 240-250만 명 정도를 이슬람 인구로 보지만, 두 자녀로 그치지 않는 그들의 인구 증가율을 감안하면 최소한 300만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2. 종족과 언어:

 

태국 모슬렘은 선교학적으로 통상 미전도 종족인 ‘빠따니 말레이족’이라고 알려진 말레이족 모슬렘 60%와 타이족으로서 모슬렘이 된 자들 40%로 이루어져 있다.  빠따니 말레이족은 태국 남부에서 ‘차오 야위’(야위족), ‘콘 야위’(야위사람), ‘차오 말레이’(말레이족) 또는 ‘차오 이슬람’(이슬람족)이라고 불린다.

 

20세기 초엽까지만 해도 태국 남부의 빠따니 말레이 족,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지역에서는 말레이어를 변형 아랍어로 표기하는야위(Yawi, Jawi)’어를 사용했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각각 영국과 네덜란드 지배를 받을 당시인 20세기 초에 문자 개혁을 해서 로마자로 표기 방식을 바꿨지만, 빠따니 말레이족은 아직 야위어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문자 인식률은 겨우 15% 정도이다.  태국 정부의 강력한 태국어 사용 정책에 따라 의무교육 기관인 초등학교에서 태국어를 배우며, 일부 모슬렘 학교에서만 주말을 이용해 야위어를 배우는 실정이므로 이런 문맹률은 좀처럼 개선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3. 이슬람의 전래:

 

[이슬람교는 13세기경 아랍 무역 상인들과 탐험가들을 통해 말레이 반도에 소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태국 모슬렘들은 말레이족 후손들이며, 말레이시아와 접경한 최남단 도()들의 공통 문화 유산을 반영한다.](Mahidol University)

 

그러나 이슬람교는 무역 상인들보다는 인도에서 파견된 이슬람 선교사들의 본격적인 진출에 의해 수마트라, 자바, 말레이 지역에 급속히 퍼지게 되었다.  인도가 이슬람 왕국인 무굴 제국으로 바뀐 것도 이슬람을 존경받는 종교로 인식시키는 데 한 몫을 했다.[3]

 

빠따니 말레이 지역의 집단 개종은 16세기 후반에 일어났다.  하지만 빠따니 말레이족의 거주지역이 이슬람교의 북상을 막는 완충 지대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말레이시아의 말레이족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바로 이러한 역사적 이유로 말레이시아 이슬람은 빠따니 말레이족을 이슬람의 변절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4]

 

  4. 이슬람 파() 구성 비율:

 

[99 퍼센트는 ‘수니’파() 1퍼센트가 ‘시아’파()이다.](Mahidol University)

 

전세계 이슬람의 90%정도를 차지하는 정통 수니파가 태국 이슬람권에서 99%를 차지한다는 점은 특이하다.  태국 정부가 보는 1%의 시아파는 종종 과격 분리주의자들로 나타나는 모슬렘들을 지칭하는 것 같다.

 

이러한 종파 구분과는 별도로 태국 이슬람은 대체로 ‘수피’ 이슬람으로 규정할 수 있다.  태국 모슬렘들은 신비주의적이고 정령 숭배적인 성향이 있다.

 

  5. 역사 속에 나타난 남부 이슬람 지역과 태국 정부와의 관계:

 

   a. 14-19세기:

 

빠따니 왕국은 제법 많은 주위 지역을 다스렸던 독립 부족국가였다.  그러나 사얌(, 태국)이 아유타야 왕조 설립(A.D. 1351) 이후 말레이 반도까지 진출해 인도네시아 해로를 위협할 만큼 국력이 팽창[5]됨에 따라 직접적인 태국의 영향을 받아왔고 16세기부터는 태국의 속국으로 지내왔다.  이슬람으로 집단 개종 한 시기도 이 때였던 것으로 알려진다.[6]

 

   b. 1900-1950년대:

 

태국 짜끄리 왕조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쭐라롱꼰 대왕 통치 시절에는 식민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말레이시아를 점령했던 영국에 남부 4개 도(나라티왓, 얄라, 빠따니, 싸뚠) 1909년 양도함으로써[7] 빠따니 말레이족은 영국의 관할하에 있게 되었다.  1942년에는 태국이 인도차이나에 세력을 뻗치던 일본 편에 서며 영국과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는 한편, 일본과의 비밀협정에 의해 4개 도를 돌려 받음으로써[8] 다시 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나 태국은 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국의 폭격으로 일본 패망이 분명해지자 다시 4개 도를 영국에 돌려줄 준비와 함께 연합국 편에 서는 순간[9] 재차 영국 치하에 들어갔고, 영국은 194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태국에 남부 4개도를 반환했다.[10]   현대사의 벽두부터 태국 남부의 이슬람은 이런 국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있었다.

 

[빠따니, 나라티왓, 얄라, 싸뚠 등의 4개 도에 이슬람법을 적용하는 것과 관련한 법령이 1946년 제정되었는데, 거기에는 결혼이나 모슬렘 사이의 재산 문제를 다루는 이슬람법이 실제적으로 사용되며 카디(Kadi/Cadi: 이슬람 하급 법관)나 모슬렘 판사가 이런 문제를 심리하며 재판하는 데 참여하도록 되어 있고 이슬람법의 관점으로 표결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1945, 1948년에 제정된 이슬람교 보호에 관한 왕령은 다음과 같다.

 

* 모슬렘 관련 업무를 위한 의원(쭐라라차몬뜨리)이 한 사람 임명되며, 그는 직권으로(ex officio) 태국의 모슬렘들을 위한 전국 의회의 의장이 된다.

* 교육부는 적절한 시기에 태국의 이슬람 대학을 통해 태국 모슬렘들이 학업과 훈련을 제공받을 수 있도록 관련 업무를 시작한다.

* 태국 모슬렘 전국 의회는 최소한 5명의 모슬렘 회원으로 이루어진 기구로 설립되며, 이들은 왕의 포고령의 효력에 의해 임명되거나 제명될 수 있다.

* 모슬렘 도의회들은 칙령에 의해 모든 도에서 설립되며 그 지역에 실제 거주하는 3명의 모슬렘으로 구성된다.

* 각 교구장은 칙령에 위해 해당 도의 각 모스크를 위한 협의회를 임명할 수 있다.  모스크 협의회는 최소한 7명의 모슬렘으로 구성되며, 그 지역내의 종교적인 업무와 모스크의 행정 업무에 책임이 있는 이맘(Imam)에 의해 관장된다.](Mahidol University)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의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에서 이런 법령 자체가 제대로 이행되었는지는 의문이다.  현재는 이슬람 관련 문제에는 나름대로의 자치가 이행되고 있다.  일반적인 행정, 사법, 치안, 교육 등의 주요 분야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불교도 고위 공무원들이 지휘하는 관료주의를 따른다.

 

   c. 1960년 이후:

 

1960년대를 전후해서 태국 남부에는 약 100만 명 정도의 모슬렘이 있었는데, 태국 정부는 타이 말레이족인 그들을 ‘타이 회교도’라고 부르며 민족적 동일성을 강조했다.[11]

 

[태국 모슬렘들은 영적, 재정적 지원을 국왕으로부터 받으며 왕은 코란을 태국어로 번역하는 비용을 제공했다.  매년 국왕이나 대리인들은 선지자 모하메드의 생일을 기념하는 축제들을 관할하기도 한다.  또한 국왕은 이슬람에 관련된 일을 위해 존경받는 모슬렘 지도자들을 최고 교주인 ‘쭐라라차몬뜨리’나 고위 자문위원으로 임명한다.](Mahidol University)

 

헌법상 태국 국왕은 ‘신앙들의 수호자’(The Defender of Faiths)이다.   이런 이유로 국왕과 대리인(왕족)들은 불교뿐 아니라 이슬람과 기독교의 각종 주요 종교행사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정부는 또한 모스크들을 짓거나 수리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제공하기도 한다.   모슬렘 인구가 대다수인 남부 몇몇 도()에서, 정부는 모슬렘들을 고용하는데 그들은 중요한 모슬렘 축제에 일자리를 비울 수 있고 모슬렘 성일(聖日)인 금요일에는 반나절만 일할 수 있도록 허용된다.  이러한 도에서는 가족과 유산에 관련된 소송 따위는 코란 법을 따르며 거기에 심판석에 앉은 모슬렘 종교 판관이나 카디(Cadi: 이슬람 하급 법관)에 의해 판결 받는다.   메카로의 순례인 하지(Haj)를 위해 한 번에 한해 4개월간의 휴가도 월급을 다 받으며 가는 것이 허용된다.  태국에는 약 2,000여 곳의 모스크가 있으며, 그 중 100 곳은 방콕에 있다.   모스크에 관련된 1974년 법령에는 내무부가 모스크 등록에 책임이 있으며 등록된 모스크는 법인(法人: juristic person)이 된다.](Mahidol University)

 

위 자료는 태국에 약 2,000여 곳의 모스크가 있다고 보고하지만, 1992년도 태국 문교부가 발간한 자료집에는 남부 14개 도에만 2,347곳의 모스크가 등록되어 있다.[12]  여기에는 70만 명이나 모여 산다는 방콕이나 북부 치앙마이 등, 다른 지역에 있는 모스크들은 집계에 빠져 있다.  게다가 미등록된 모스크 수[13] 1992년 이후 계속 건립되어 온 새 모스크 수를 합하면 2,500-3,000개 사이가 될 것이다.

 

비록 태국 정부가 모스크 건축 등에 재정 지원을 하는 등 모슬렘을 위해 상당히 많은 호의를 베풀지만, 빠따니 말레이 모슬렘은 자기들의 힘으로 모스크를 건립하고 재정 자립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얄라(Yala)에는 기차역 근방에 정부가 지어준 모스크가 있는데, (지붕)이 전통 이슬람 형식이 아니라, 연꽃 봉오리를 형상화 한 돔이다.  대다수의 골수 모슬렘들은 이 건물을 아주 부정하게 여긴다.  크고 작은 규모의 모스크들을 건립할 때에는 나름대로 기금 마련 캠페인을 하기도 하고[14] 수입이 있는 사람들은 헌금도 한다.  2002년 현재도 도시와 시골 도처에 모스크 건축이 한창이다.

 

[대략 200여에 이르는 모슬렘 학교들은 일반 교육과 종교 교육을 제공한다.  이 외에도 태국의 모슬렘들은 국가적인 지원과 그들 자신의 교의에 따른 그들의 종교를 가르치고 실행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Mahidol University)

 

하지만 남부 태국의 일반 공립학교에서는 아무리 모슬렘 학생들이 많이 있어도 아침 조회시의 찬불 시간에 억지로 참여하며-물론 방관자처럼 서 있거나 학교 당국의 허락을 받고 자체 경배의식도 갖기도 하지만-, 불교 교리 공부도 하는 등, 불편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이슬람 종교 교육은 이슬람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이외에도 모스크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6. 태국 정부를 향한 이슬람의 태도:

 

   a. 반정부 과격 분리주의:

 

태국 정부를 향한 모슬렘들의 태도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나라티왓, 얄라, 빠따니 등의 3개 도에는 주로 정부 건물이나 공무원들을 표적으로 하는 크고 작은 규모의 폭탄 테러가 자주 일어난다.[15]  오죽하면 태국 최남단이요, 반정부 운동이 가장 활발한 나라티왓에 왕궁 별장을 다 지어놓고 왕이나 왕족이 자주 방문해 이들을 회유해야 할까?  이에 비해 싸뚠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다.

 

어떻든 남부 4개 도에는 아직 대형 슈퍼마켓이나 대규모 백화점이 한 곳도 없는 실정이다. 가장 큰 이유는 폭탄 테러 위험 때문이라고 한다.

 

   b. 침묵 속의 반정부 항거:

 

대다수의 빠따니 말레이족은 과격한 분리주의자들의 무력 시위에 찬동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친정부주의자라고 보면 안 된다.  이들 다수는 침묵한다.  그러나 이들은 특유의 방법을 통해 정부에 항거한다.

 

가장 대표적인 항거 전략은 정부의 고무 생산 정책에 적극 호응하지 않음으로써 정부에 대항하는 것이다.  결국 자신들도 경제적인 혜택을 많이 누리지는 못하지만, 이것이티 내지 않고정부에 저항하는 가장 유력한 길인 것이다.  몇몇 관찰자들이 예리하게 본 대로 농촌 지역의 말레이족들은 자신들의 마을을 향한 태국인들의 침투를 최소화하기 위한 ‘매일 매일의 항거’라는 그들 자신의 기제(mechanism)들을 발전시켜왔다.[16]

 

  7. 이슬람이 분포한 지역의 환경:

 

얄라, 싸뚠, 나라티왓, 빠따니 등 모슬렘이 총인구의 70% 이상을 점유하는 지역을 비롯해 10-40% 정도의 다양한 점유율을 차지하는 쏭클라, 파탈룽, 뜨랑, 나콘시탐마랏, 끄라비 등의 9개 도의 현황을 <: 태국 남부 환경 자료(1995>1999)>에 정리해보았다.

 

현지 주민들(빠따니 말레이족, 태국인) 중 모슬렘 비율은 나라티왓, 빠따니가 약 80%, 얄라, 싸뚠이 약 70%, 쏭클라가 40%, 나콘시탐마랏이 25%, 그 외의 지역이 10% 안팎이다.

 

                                  <: 태국 남부 환경 자료(1995>1999)>[17]

 

1. 인 구

나라티왓

빠따니

 

 

쏭클라

파탈룽

 

나콘시

끄라비

총인구

619,311

>671,649

 572,191

>608,276

399,364

>436,092

244,497

>260,127

1,159,672

>1,223,883

491,326

>502,662

  560,887

>587,930

 1,488,947

>1,525,557

 330,094

>358,383

남자

310,286

>334,845

282,692

>300,003

202,671

>212,124

123,210

>130,663

576,531

>604,425

242,448

>247,731

  279,678

>292,092

742,045

>760,324

167,687

>181,211

출생

12,800

>22,062

11,700

>12,213

11,000

>17,500

4,800

>7,626

20,000

>18,086

6,700

>13,134

   10,500

>6,323

27,000

>21,254

6,000

>5,645

사망

2,400

>2,420

2,300

>2,655

1,200

>1,258

900

>880

6,700

>4,676

1,600

>1,902

    2,500

>2,190

4,500

>6,099

1,000

>1,341

2. 의 료

나라티왓

빠따니

 

 

쏭클라

파탈룽

 

나콘시

끄라비

의사

53>60

43>72

92>90

16>26

490>512

35>47

64>87

126>143

33>40

치과 의사

7>16

12>13

13>16

3>7

120>48

4>14

9>18

23>29

6>11

간호사

683

>399

554

>388

853

>372

258

>200

2,009

>1,631

496

>384

527

>426 

1,263

>942

320

>279

병원 수

10>14

13>14

7>10

4>6

24>31

9>13

 12>15

24>29

7>8

병원 침대

730

>666

528

>735

737

>1,131

230

>296

2,455

>3,714

473

>738

      785

>1,138

1,798

>1902

364

>450

인구:의사

11,217

>10,791

12,884

>8,205

4,139

>4,653

14,801

>9,738

2,298

>2,327

13,879

>10,613

    8,509

>6,621

11,715

>10,572

9,534

>8,615

인구: 침대

814>971

1,049>804

517>370

1,030>855

459>321

1,027>676

694>506

821>795

864>766

3. 교 육

나라티왓

빠따니

 

 

쏭클라

파탈룽

 

나콘시

끄라비

교사

4,831

>5,735

4,897

>5,434

3,582

>4,170

2,415

>2,808

10,835

>12,419

5,160

>5,651

5,595

>6,405

15,637

>16,793

3,140

>3,705

학생

110,132

>134,744

96,672

>116,758

74,323

>91,378

   47,764

>57,391

226,152

>245,174

99,803

>97,583

113,778

>128,538

324,318

>328,267

   67,343

>81,797

학교

406

>408

373

>377

262

>265

      184

>190

608

>624

301

>307

392

>406

1,005

>1,002

     265

>270

4. 자동차

나라티왓

빠따니

 

 

쏭클라

파탈룽

 

나콘시

끄라비

승용차

>5,820

>7,395

>7,149

>1,745

>41,876

>4,463

>8,022

>11,793

>2,940

, 픽업

>12,752

 >24,343

>16,532

>6,229

>74,710

>18,593

>20,885

>57,505

>15,291

모터사이클

>151,854

>109,944

>169,518

>61,884

>388,461

>148,186

>183,410

>327,842

>94,051

5. 생산(%)

나라티왓

빠따니

 

 

쏭클라

파탈룽

 

나콘시

끄라비

농업

공업

건설

교통통신

, 소매

서비스업

기타

25.7>36.7

3.9>4.0

5.0>4.9

4.2>5.3

16.7>20.4

32.0>12.2

12.5>16.5

41.8>56.9

2.2>3.5

4.5>2.4

4.9>3.2

19.0>14.4

13.2>8.5

14.4>11.1

26.7>30.0

4.6>9.8

7.6>4.7

5.0>5.4

16.1>15.8

22.3>15.1

17.7>19.2

44.9>51.6

2.9>5.7

4.6>4.9

4.0>2.9

18.0>14.8

12.1>8.5

13.5>11.6

33.5>34.4

5.1>6.5

8.2>6.9

8.7>12.4

14.2>7.3

12.7>15.1

17.6>17.4

26.7>30.6

5.1>3.0

5.3>4.8

6.3>5.4

23.8>22.7

13.5>14.8

19.3>18.7

41.6>45.5

4.1>5.1

5.0>4.6

4.7>4.3

16.2>14.4

14.0>10.6

14.4>15.5

25.6>31.1

6.7>6.1

8.0>5.6

4.0>2.9

19.9>16.8

15.7>12.4

20.1>25.1

47.1>47.3

6.1>2.8

4.7>3.8

3.1>3.6

12.6>13.1

10.3>17.2

16.1>12.2

총생산액

(Mil.Baht)

17,073

>20,834

15,549

>29,840

11,855

>17,546

7,251

>12,893

49,279

>81,493

9,939

>14,898

16,915

>26,978

36,901

>63,622

12,102

>17,638

1인 생산액

(Baht)

27,230

>32,604

  26,489

>49,816

  29,272

>43,975

  29,004

>51,989

  40,828

>64,168

  19,299

>29,442

29,114

>44,518

   23,325

>39,615

  36,126

>54,947

6. 쌀 생산

나라티왓

빠따니

 

 

쏭클라

파탈룽

 

나콘시

끄라비

첫 모작 쌀(t))97/98

46,480

>41,067

  77,325

>72,775

   20,476

>18,948

   45,524

>34,515

   146,561

>148,648

148,226

>157,067

36,816

>35,956

258,675

>256,091

   11,309

>15,920

둘째 모작 쌀(t)97/98

1,524

>203

   4,216

>981

      765

>Nil

       Nil

>Nil

     9,065

>26,240

9,423

>18,236

Nil

>Nil

8,956

>9,851

      Nil

>Nil

생산kg/rai

333>334

342>340

306>261

395>372

420>380

375>394

331>353

346>338

238>279

 

 

 

 

 

 

 

 

 

 

 

 

 

 

 

 

 

 

 

 

 

 

 

 

 

 

 

 

 

 

 

 

 

 

 

 

 

 

 

 

 

 

 

 

 

 

 

 

a. 인구와 의료 환경:

 

인구는 꾸준히 증가한다.  여기에 맞춰 계속하여 병원이 세워지고 의사의 수도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나라티왓, 빠따니, 싸뚠, 파탈룽, 나콘시탐마랏 같은 도에서는 의사 1명 당 10,000명 가량을 진료해야 한다.  1995년에서 1999년 사이 간호사의 수가 격감한 사실도 주목된다.  이런 열악한 의료환경은 의료 선교가 여전히 큰 호응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 태국 의료법이 외국인 의사, 약사의 무단 진료를 금하므로 의료 선교를 하려면 태국어 시험[18]을 통과해 자격을 얻거나 병원(진료소)을 세워 ‘한시 자격증’을 받아야 한다.

 

b. 교육 환경:

 

교사 1인당 학생 수는 20-30명 정도이므로 선진국 수준이다.  교육 자재나 시설은 상당한 수준의 시설을 자랑하는 시내 학교로부터 초라한 시골학교에 이르기까지 지역마다 판이하게 다르다.

 

외형적인 교권(敎權)은 서 있다.  그러나 어른들이나 교사들과 대화해 보면 학생들의 태도가 점점 나빠진다고 걱정한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중등학교의 학업은 종종 대학 진학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과외수업도 입시 중요 과목을 위주로 이루어진다.  가정들을 방문해보면 자녀들이 집에서 공부할 만한 환경을 조성한 곳이 드물다.   공부는 학교와 과외 수업장소에서만 이루어진다.

 

c. 느리지만 꾸준한 경제 성장:

 

태국 경제는 1997 8월부터 시작된 IMF 경제 위기로 아직도 크게 호전되지 못하고 있지만, 도별 생산 현황을 보면, 태국 남부의 경제는 미미하게나마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통계에는 누락되었지만, 농업 생산량 중 쌀 농사, 과일 재배 이외에 가장 많은 수익을 주는 것은 고무나무 재배이다.  고무나무는 1876년 브라질에서 씨앗을 밀수 선적해 와 말레이 지역에 처음 시험적으로 재배를 시작했는데,[19] 기후나 토질 등이 맞아 확대 재배되었다.   근래 말레이시아의 고무 생산이 공업 중시 정책에 밀려 거의 중단됨으로써 태국 남부의 고무 재배 농가에 당연히 이익이 돌아가야 하는데, 아직도 남부 태국 농가는 위(6. b)에 설명한 이유로 인해 여전히 가난에 처해 있다.  

 

 B. 태국 이슬람권 선교를 위한 효율적인 전략:

 

  1. 기본 선교 전략: 복음 전도, 교육, 현지 교회 선교 동원

 

태국 이슬람을 효과적으로 복음화(福音化)하기 위한 최선의 선교 전략은 ⑴ 이슬람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복음을 전하고, ⑵ 그들을 제자로 양육하고 일군으로 훈련시키며, ⑶ 태국 이슬람들과 접촉이 잦은 현지 태국 교회를 이슬람 선교에 동원하는 것이라고 본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전도(선교)이며 사람을 양성하는 것은 교육이다.  이 두 가지는 교육 선교(Educational Mission) 개념으로 통합할 수 있다.  OMF가 일찍부터 채택한 교육 선교 전략은 남부 태국 불교도들과 몇몇 모슬렘을 대상으로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선교단체들이 현지교회를 이슬람 선교에 동원하는 사역은 미미했던 것 같다.  만일 선교사들에게 문제가 생긴다면(희생당하거나 철수하는 경우), 그 대안은 현지 태국 교회와 크리스천밖에 없으므로 애초부터 현지교회들을 이슬람 선교에 동원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2. 복음 전도:

 

아래에 남부 이슬람 지역에서 가능한 전도 방법들을 열거해 본다.

 

   a. 학원 전도:

 

⑴ 지역 학교 전도: 점심 시간, 특활 시간을 이용한 직접 전도와 종교 교육, ⑵ 대학 전도: 직접 전도, 공연이나 종교 세미나 등을 통한 간접 전도, ⑶ 서클 전도: 학교 크리스천 서클을 통한 전도[20]와 직장 신우회(信友會)를 통한 전도, 등의 학교 전도는 의외로 남부 태국에서 가장 유망한 사역이다.  일반적으로는 공립학교에서 특정 종교(주로 기독교, 이슬람교)를 전파하지 못하게 되어 있지만, 언어 교육이나 특별활동 지도를 통해 침투해 들어가 사역할 수 있다.

 

   b. 언어 교육을 통한 전도:

 

Frontier Mission의 언어[21](영어, 말레이어)학원 등을 통한 전도, ⑵ 빠따니 머어 대학교[22]에서 언어학과 강사로 일하며 전도, ⑶ 청소년 소그룹 영어 교육을 통한 전도 등이 가능한 사역이다.   태국인이나 빠따니 말레이족이나 영어 공부에는 모두 관심이 지대하다.  누구든지 봉사할 시간만 되면 청소년들을 접할 기회가 많다.

 

태국 정부는 태국어 강화를 통해 빠따니 말레이족을 타이화(Thai) 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적어도 이 부분만큼은 실적을 올린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영어나 기독교권의 언어 교육을 통해 태국인들과 빠따니 말레이족을 기독교화(혹 기독교에 친화) 할 수 없는 것일까?

 

   c. 문화 선교: 어린이, 청소년, 주부 대상의 클럽 조직

 

예를 들면, ⑴ 음악 클럽(키보드, 기타 등을 교육하거나 합창단, 중창단, 합주단[23] 운영), ⑵ 미술 클럽(그림, 공예, 사진, 꽃꽂이 등), ⑶ 운동 클럽(태권도, 각종 구기 종목, 하이킹 등), ⑷ 독서 클럽(특히 지성적인 대학생 그룹), ⑸ 영상 클럽(영화, 비디오 비평 등), ⑹ 노인 대학(가부장적인 이슬람 사회에서 호응이 클 것으로 기대됨) 등이 가능하다.

 

태국의 예능 수준은 물론이고, 빠따니 말레이족의 예능 수준이나 생활 여건을 보면 문화 선교는 결코 쉽지 않은 분야이지만, 전문인 선교사들이 꾸준히 봉사한다면 순수 복음 전도 사역이나 양육 사역에도 도움이 되고 특히 청소년들의 마음을 여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d. 캠프 사역: 태국 천연의 캠핑 장소, 교회, 선교 센터 활용

 

환영을 받을 만한 캠프 사역에는 ⑴ 음악 캠프(악기나 노래, 찬양을 가르치며 전도), ⑵ 영어 회화 캠프(영어를 교육하며 전도), ⑶ 스포츠 캠프(청소년, 저변층이나 마약 중독자 선교), ⑷ 천국 가정 캠프(파괴되는 가정 회복 프로그램), ⑸ 워크 캠프(마약 재활 센터[24] Green Way 등의 NGO 프로젝트 현장 등), 등이 있다.  캠프 사역은 앞서 제시한 문화 선교의 일환으로 구상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태국 청소년들과 빠따니 말레이 청소년들은 캠핑을 좋아한다.

 

   e. 셀 그룹 사역:

 

이 사역은 ⑴ 적당한 집을 세 얻거나 안전한 크리스천 가정을 집회 장소(Mission Station)로 활용하고  ⑵ 선교사, 전도자, 혹은 예배 인도자가 정기적으로 가서 집회를 인도하며  ⑶ 교회를 설립하기까지 셀 그룹을 확대시키며 준비시키는 데 유용하다.

 

태국은 교회성장신학만으로 선교나 목회를 하기엔 힘든 지역이다.  셀그룹 사역은 그 기동성이나 그룹원 사이의 돈독한 애정, 양육의 집중성, 전도 지향적 성격 등 많은 이점을 갖고 있어 태국, 특히 남부의 이슬람 사회 선교 사역의 중심 전략이 될 만 하다.

 

   f. 치유 사역:

 

일반적으로 ⑴ 의료 선교, 신유 사역, 상담(내적 치유) 사역 등을 통해 전도할 수 있고, ⑵ 적당한 장소가 없을 경우에는 기존 병원을 방문하며 사역[25]하면 된다.  특별히 ⑶ 정령숭배 모슬렘들에게는 신유, 축귀(逐鬼) 등의 능력 선교(Power Mission)도 필요하다.[26]

 

   g. 기독교 국제학교 사역:

 

이 사역은 ⑴ MK(선교사 자녀) 교육을 실시함으로 보다 많은 선교사들을 남부 태국에 정착케 하며,[27] ⑵ 이슬람권의 우수 학생들과 공무원 자녀를 선발해 기독교 세계관을 교육함으로써 간접 전도가 가능하다.  많은 재정과 인력 자원이 필요하므로 팀 사역이나 선교단체와의 제휴(consortium)가 바람직하고 서양 선교사들이 많은 핫야이(Had Yai)나 안전하고 깨끗한 얄라(Yala)가 후보지로 추천할 수 있다.

 

  3. 새신자 양육:

 

불교로부터 회심한 자들은 현지 교회에서 양육하면 된다.  그러나 이슬람으로부터 회심한 자들은 특별한 양육 방법이 요청된다.  양육 장소와 관련해 대략 3가지를 고려할 수 있다.

 

첫째, 회심자를 계속 이슬람 공동체 안에 머무르게 하며 비밀리에 별도의 장소에서 양육한다.   이것은 선교사가 져야 할 재정적 부담도 별로 없고 당사자가 자신의 사회 속에 문화적 충격 없이 잔류할 수 있다는 이점(利點)이 있다.  그러나 주위 모슬렘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새로운 문화 충격이 될 수도 있다) 마지못해 모스크 집회에 참여해야 하는 회심자들이 혼합주의로 흐를 우려가 있다.  또한 회심한 사실이 드러나면, 말레이시아 재활 훈련소로 압송 당하거나  목숨을 잃을 위험도 있다.

 

둘째, 회심자를 선교사가 직접 돌보며 양육한다.  이것은 첫째 방법의 난점을 해결할 수도 있고 일 대 일의 맞춤식 양육’, 또는 기독교적인 삶을 나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선교사가 치러야 할 정신적, 재정적 희생이 적지 않다.

 

셋째, 회심자를 먼 지역(대개 선교단체, 교회)으로 보내 위탁하거나 유학하게 함으로써 양육할 수 있다.  이 방법은 지도자를 키우는 일에 효과적인 반면에 회심자가 타 문화권에 적응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나 선교사(혹은 이 일을 돕는 단체, 교회)의 재정 부담이 무척 크다.

 

  4. 현지 교회 선교 동원 방안:

 

현지 태국 교회를 이슬람 선교에 동원하려면 각 연령과 부서에 맞는 전도 훈련과 제자 훈련을 정기적으로 실시하며 선교 사역에 초청해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선교 동원책(宣敎動員策)은 주로 제자 양육(훈련)이다.

 

한국 교회에서 양육 프로그램들을 현지 상황에 맞게 적절히 응용해 성공을 거둔다면, 현지 교회 부흥과 이슬람 지역 복음화에 가장 확실한 동역자들을 얻게 된다

 

   a. 어린이 제자 양육:

 

태국 불교도들이나 말레이 모슬렘들처럼 기독교 복음에 대해 변화가 느린 사회는 그 저변인 차세대부터 흔들어야 한다.  누가 어린이들의 마음을 먼저 사로잡는가?’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 ⑴ 각 초등학교에서 전도할 수 있는 어린이들을 훈련시키되, ⑵ 이들을 지도할 교사 훈련을 병행한다(아래 ‘d. 교사 양육’ 참조).

 

   b. 학생 제자 양육:

 

일반적으로 가장 활동력이 왕성한 청소년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⑴ 중, 고등학교에서 전도하고 서클 활동을 인도할 학생들을 훈련시키되, ⑵ 전도훈련에 중점을 두며 비전 있는 삶을 대주제로 양육하며 ⑶ 매주 일정한 교과과정을 따라 실시한다.

 

   c. 청년 제자 양육:

 

대학생들이나 직장 청년들을 위해서는 ⑴ 대학, 직장에서전도하고셀 그룹을 인도할 만한 청년들을, ⑵ 태국 현지 교회나 대학교 안에서 양육하되, ⑶ 리더 교육에는 태국이나 한국 선교단체(CCC, YWAM) 간사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효과적이다.

 

   d. 교사 양육:

 

현재 태국 교회는 교사 양육 프로그램이 부족하다.  교육 사역이 부진한 채 차세대 교회의 부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므로 ⑴ 주일학교, -고등부, 청년부를 인도할 일군 양성을 상설화 하는 것이 시급하므로 ⑵ 최소한 연 1-2회 교사 강습회, 세미나 등을 교회 자체 세미나, 혹은 교회 연합 사역으로 시도 한다.

 

   e. 목회자 양육:

 

교회는 목회자의 지도력 만큼 성숙하고 부흥할 수 있다.  그러므로 ⑴ 목회자 후보생을 발굴해 훈련시키고, ⑵ 목회자 재무장을 위한 훈련을 강화하되, ⑶ 유망한 일군을 유학이나 집중 훈련을 통해 성장시키는 일을 고려해 볼 수 있다.

 

   f. 선교사 양육:

 

현지교회를 이슬람권 선교에 동원시키는 전략 중 가장 직접적인, 그리고 강력한 방법은 ⑴ 이슬람권 선교사 후보생을 발굴해 현지에서 집중 훈련하거나, ⑵ 헌신된 일군을 유학이나 선교훈련 과정에 위탁해 훈련시키는 일이다.  훈련된 일군을 남부 태국이나,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비거주 선교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g. 문서, 교육 자료 보급을 통한 양육:

 

양육이나 훈련을 위해서는 교육 자료(resource)들이 필요하다.  ⑴ 각급 교사/학생/부모용 공과가 제작, 보급되면 체계적인 양육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선교 지향적인 집필진(태국 교역자들)과 함께, 소규모 교회(셀그룹)에 적합한 교재 제작을 서둘러야 한다.  ⑵ 악보가 있는 찬양집도 양육과 훈련에 효과적인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청소년들에게 적합한 곡 수집하여(태국어(말레이어)/영문 가사 기입) 정기적으로 발간할 만하다.  ⑶ 어린이 교재로는 신입 어린이 공과나 교리 교육 교재(Catechism)[28]가 절실히 요청된다.  ⑷ 청소년 교재로는 주제별 성경공부 책이나 교리 교육 교재(Catechism)가 필요하다.  ⑸ 청장년, 목회자 교재로는 전도 훈련 교재와 청지기(Stewardship) 교재, 결혼, 가정 생활 세미나 교재 등이 필요하다.

 

이밖에 ⑹ 신앙 위인전, 기독교 역사, 선교사 열전, 기독교 소설 등도 보조 교재로 활용할 수 있고, ⑺ 각종 Audio/Video/Software 자료들도 필요하다.

 

 

 C. 바람직한 태국 이슬람권 사역 자세:

 

위에 언급한 여러 종류의 사역을 시도하기에 앞서, 태국 이슬람권 사역에는 다음과 같은 자세가 요청된다.

 

  1. 경제(재정)적인 접근방식은 지양한다.

 

1988년 가장 작은 도 중 하나인 얄라 지역의 농업(특히 고무 생산) 발전을 위해 정부가 집행한 비용은 무려 190만 바트였다.[29]  태국 정부가 막대한 외채를 심화시키면서까지 경제적 미끼로 태국화(泰國化)하려고 애써도 말레이 이슬람 공동체들이 요지부동이라는 점은 기독교 선교가 태국내 이슬람을 복음화(福音化)하려고 경제적으로만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태국 관리들은 말레이 이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별로 없었고, 그들의 문화나 사회공동체 속으로 들어가는 데도 실패했다.   선교사들은 말레이 이슬람 속으로 가능한 한 깊이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돈으로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보다 친구가 됨으로 우정을 나누는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2. 말레이 이슬람들에 대한 혐오감을 버린다.

 

남부에서 오래 사역했던 어떤 선교사는 언젠가 ‘나는 남부 말레이 모슬렘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여러 교인 앞에서 ‘솔직히(!)’ 말한 적이 있다.   독립적으로 전도 사역을 하는 어느 선교사 한 명은 교회 주일 예배 설교 시에 ‘이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종교’라고 설파(說破)했다.   이러한 혐오감을 갖고 말레이 이슬람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의심스럽다.

 

  3. 우월감을 버린다.

 

상대적 우월감을 드러내다 보면 그들의 마음 중심에 접근할 수가 없다.   나는 주위 이슬람들에게 뭔가를 주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도움도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삶을 나누는 진지한 벗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실제로 2000-2001년 사이에는 우리 가족이 장기 출타중일 때에 모슬렘 이웃이 집을 봐주기도 하고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는 경우도 많았다.

 

  4. 선교관(宣敎觀)과 선교철학에서 균형을 잡는다.

 

선교 사역이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안전하게 수행되려면, 폭 넓고 균형 잡힌 선교관과 선교철학이 필요하다.

 

   a. 영적 전투목양(牧羊)이라는 개념 사이에서

 

‘선교는 영적 전투’라고 흔히들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선교를 전투 개념으로만 이해하면 타종교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타도해야만 하는 적()이 되고 선교 사역에는 ‘삭막함’만이 남는다.  위에서 예로 든 혐오감도 영적 전투라는 차원에서만 선교를 수행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만일 선교를 목양(牧羊)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보면, 선교는 ‘아직 우리(fold)에 들지 않은 양떼를 인도해들이는 일’이다( 10:16).   여기서 타종교인들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으로 돌봐야 하고 때로는 위하여 목자가 목숨을 버려야 할 양떼가 되는 것이다.

 

   b. 선포변증 사이에서

 

과거 한국의 어느 선교 세미나 자리에서 한 발제자가 ‘선교는 대화’라는 명제를 내보이자, 한 참석자가 강단에 올라가 ‘선교는 대화가 아니라 선포’라고 주장해 많은 갈채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선포는능동적인 복음 증거이다.  그런데 이슬람 사회에서는 때때로일방적인 선포가 모슬렘들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 문을 닫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일방적인 ‘선포’만으로는 부족하다.

 

(Lull) 시대에 어느 모슬렘은 ‘만일 당신이 <그리스의 법은 진리이고 모하메드의 법은 가짜>라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그것을 타당한 사유를 들어 증명해야 한다’고 도전했다.[30]  물론 논쟁을 통해서는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  논쟁에 지면 복음 전도의 기회를 잃고, 이기면 전도할 친구들을 잃는다.

 

그러나 모슬렘이 기독교 진리를 비방하고 왜곡 해석한다면(실제로 그들의 변증 책자나 기독교의 오류를 지적하는 비방 서적들이 범람한다), 우리에게는 힘과 지혜를 모아 복음의 진리를 ‘변증’해야 할 책임이 있다(벧전 3:15).  때로는 ‘담대하게 선포’하면서, 때로는 ‘사려 깊게 변증’하면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다양하게 확보해야만 한다.

 

   c. 토착화혼합주의 사이에서

 

이슬람 영혼들을 얻으려면 그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문화나 언어를 통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 한다.

 

여기서 토착화(indigenization), 혹은 상황화(contextualization)의 문제가 대두된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성육신(incarnation)의 원리를 따라 토착 문화에 적응하며 복음으로 하여금 그 문화 속에서 이질감을 갖지 않도록 배려하며 전한다.

 

그러나 너무 멀리 나아가면 혼합주의(syncretism)에 빠진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건전한 토착화인지, 또 어디쯤부터 혼합주의로 넘어가는 것인지 가늠하기가 정말 쉽지 않다.[31]   선교사들은 ‘토착화의 이점’과 ‘혼합주의의 위험성’을 충분히 파악해야 한다.  어떻든 토착화 작업에 안전 장치가 없으면 위험하다.  

 

만일 선교지 문화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없다면, 토착화를 감행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본다.  차라리 현지 문화에 익숙한 교회나 현지인 신학자들과 함께 이 문제를 진행해나가도록 장려하고 감독하는 것이 안전하다.

 

혹은 선교 지향적인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도움을 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복음적이고 신학적으로 건전한 사역자들이 팀으로 사역하면 혼합주의 위험이 훨씬 줄어든다.   현지 교회와의 팀 사역이든, 복음적인 신학자들과의 팀 사역이든, 동료 선교사들과의 팀 사역이든, 팀 사역처럼 확실한 안전 장치는 없다.

 

  5. 항상 연구하는 자세를 갖는다.

 

한국 선교사들은 서구 선교사들에 비해 열심히 일하는 편이지만, 연구하고 정확한 자료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는 소홀하다.   연구와 기록이 없으면 더 나은 전략을 기대할 수도 없고, 전략이 수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되는 선교는 작전 없는 전투와 같이 위험하기 이를 데 없다.

 

이슬람권이라고 다 같은 곳은 아니고, 같은 지역에서도 조금씩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기도 하며, 더구나 시대가 바뀌면 아무리 보수적인 이슬람도 바뀌는 생활 양식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이슬람 선교 전략을 무작정, 무한정 채택하기보다는 해당 지역의 이슬람을 끊임없이 살피며, 그에 대한 전략을 세워나가는 근면함이 필요하다.

 

연구 조사 활동으로는 ⑴ 종교 집단(건물) 분포도 작성, ⑵ 지역 단위의 사회-종교 상황 파악, ⑶ 타종교인의 기독교 이해도 설문 조사, ⑷ 남부 태국 현지 기독교인의 선교 헌신도(獻身度) 조사, ⑸ 이슬람권 선교사들의 사역 연구(성공이든 실패든), …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⑹ 이러한 연구를 통해 얻은 자료를 정리하고 필요로 하는 선교사나 선교단체에 보급하는 일도 몹시 중요하다.

 

서양 선교사들이 핫야이(Had Yai)에 ‘연구센터’를 세워 이슬람권 선교 정보를 확보하며 서로 나누는 지혜는 본받을 만하다.  이들은 1년에 1차례씩 이슬람 선교에 관련한 세미나와 컨설테이션을 개최해 해마다 선교 전략을 향상시켜나간다.

 

KGAM 선교회가 올해(2002) CSCA(Centre for the Study of Christianity in Asia)를 설립해 선교관련 자료를 수집하며 이번과 같은 종교 세미나를 여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6. 자신감순교 정신을 가져야 한다.

 

이런 표현을 감상적이고 선동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볼 때 이슬람권 선교사들이 종종 자신감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그렇게 연구하고 정탐하는 일에는 출중한 서구 선교사들이 막상 전쟁에는 무기력하게 임하는 자세를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가령 2001년 9월 11 뉴욕 세계 무역회관 테러 사건 이후 이슬람권의 반미-반기독교 감정이 극에 달하게 되었을 때, 태국 남부의 서구 선교사들은 ‘남부 이슬람권에서 테러가 일어날 경우 어디로 대피했다가 어떻게 철수할 것인가’를 심각히 의논한 바 있다.   아마 다른 이슬람 지역에서도 비슷한 모임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는 역사적으로 선교나 복음 증거는 종종 순교를 통해 이루진 사실에 대한 도외시이다.   남부 이슬람 사회 최초의 교회도 OMF 두 여성 선교사들의 희생을 기점으로 해서 빠따니의 싸이부리에 설립되었고[32] 상당한 부흥의 역사도 있었다.  아무도 싸이부리 교회와 의료 선교센터의 지속적인 성장을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허나 지금은 이 교회도 문을 닫았다.   가장 큰 이유는 희생을 각오하고 일할 사람이 계속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선교사들이 희생되면 선교가 끝장날 것이라는 착각이다(자신이 죽으면 이스라엘에서의 예언 사역도 끝장날 것으로 보고 도망한 엘리야의 그 착각 …).  실상 안전 문제는 아무리 서양인이라고 하더라도 평소 모슬렘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33]   또한 교회들이나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을 때 리더(목회자, 선교사)가 피신하기에 급급하다면 훗날 돌아온다 치더라도 그 지역 교회나 공동체에서 얼마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설령 선교사들이 희생된다 해도 뒤를 이어 선교에 헌신할 일군들이 물밀듯이 들어올 것이라는 확신 속에 있어야 한다.  잘 양육한 현지인들도 훌륭한 대타가 될 수도 있다.[34]  현대 이슬람 선교의 가장 큰 문제는 ‘전략의 부재’가 아니라자신감과 순교 정신의 부재’인 것이다.

 

  7. 팀 사역을 구축해야 한다.

 

소위 말하는 ‘창의적 접근 지역’인 이슬람권은 ‘창의적인 개인의 홀로 서기’로 버틸 수 없다.   이슬람은 거대한 사회체제이다.  무신론적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사라진 지금, 이 유신론적 사회주의(이슬람)의 끈끈한 공동체 정신은 왜곡된 기독교의 개인주의를 비웃고 있다.

 

선교사가 개인 사역, 독립 사역에 매달리는 한, 이슬람 공동체를 복음화 하는 사역은 거의 불가능하다.  선교사 개인의 역량만을 빛내는 일체의 사역들은 정리해야 한다.  이슬람 지역의 다양한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다양한 일군들이 활발한 전도 팀을 이루며 살아있는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를 세우게 될 때라야 성공적인 이슬람 선교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

 

팀 사역은 물론 소속 선교 팀을 중심으로 진행할 수도 있고, 다른 선교 단체나 선교사들과 전략적으로 제휴할 수도 있으며, 현지 교회나 일군들과 함께 진행할 수도 있다.

 

 

III. 맺는 말:

 

세계 선교학계가 주목하는 소위 [10/40 창문]에서 살짝 빗나가 있는 [10/10] 창문 지역… . 바로 이곳에 빠따니 말레이족 250만 명과 말레이시아 1,000만 명, 인도네시아 약 2억의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상당한 교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지만 주류 말레이 모슬렘은 아직 요동도 않고 있다.  말레이시아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태국 남부의 빠따니 말레이족 선교를 통해 인접국인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선교가 더욱 활기를 띌 수 있다고 본다.  즉 태국 남부는 근 2억을 헤아리는 말레이 이슬람패밀리 선교를 위한 교두보로서의 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런 전망을 해보며 지금까지 태국 이슬람 현황을 간략히 살펴보고, 이에 따른 선교 전략과 방안들을 거론해 보았다.  그리고 필자 자신을 비롯한 남부 태국 이슬람권 선교사들이 어떤 자세로 사역에 임해야 할 것인가를 나름대로 피력해 보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 태국 이슬람 연구와 선교전략 수립,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해서는 함께 수고할 동역자들이 더욱 많이 필요하다.  필자가 속한 KGAM 선교회를 통해서도 곧 한 가정이 와서 남부 태국 이슬람 사역에 헌신할 것이다.  이곳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분들도 여럿 있다.  이 지역 복음화를 위한 팀 사역은 결코 먼 훗날의 이야기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접하는 말레이 이슬람권 사역자들과 선교 관심자들에게 다음 두 가지를 제안하며 글을 맺는다.

 

첫째, 태국 이슬람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그리고 인도네시아, 필리핀에 걸친 말레이 이슬람 벨트 선교를 위해 사역하는 한국 선교사들이 실제적이고 꼭 필요한 모임(infra)을 구성해 최소한 연 1회 서로간의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방안을 모색해 이 지역 선교에 기여하는 세미나와 팀 사역을 추진하자.

 

둘째, 서구 선교사들의 풍부한 경험과 효과적인 선교전략을 수용해 우리의 것으로 소화하는 한편, 동남아 말레이 이슬람 사역자들과 아시아 선교신학자들만의 협의회를 구성해 아시아인의 컨텍스트에서 아시아적 방법으로 말레이 모슬렘들을 복음화 하는 일에 협력하자.

 

 

참고문헌

 

Ahmad Omar Chapakia. Politik Thai: Dan Masyarakat Islam Di Selatan Thailand.

Pustaka Darul Salam Sdn. Bhd. & RMi Mltimedia Publishing. 2000.

Alpha Research Co., Ltd., Pocket Thailand in Figures. 4th Edition. Bangkok. 2001.

Andrew Cornish, Whose Place is This?  Bangkok. White Lotus Press. 1997.

Ralph Winter & Steve Hawthorne Ed. Mission Perspectives on the Wolrd Christian Movement. 3rd Edition.

Stephen Neil.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 London. Penguin Books, 1990.

Krasuang Suksathikan: Krom Sasana Lae Wathanatham, Thabian Masjid Nai Prathet Thai. 1992.

Milton W. Meyer. 김기태. [동남아사 입문]. 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1994.

노봉린 편저. [미전도종족 선교정보]. 서울. 도서출판 횃불. 1995.

Danis Lane. [하나님의 무기: 기도]. 서울. 성서유니온. 1989.

Mahidol University: http://www.mahidol.ac.th/Thailand/religion/r_muslim.html. 2002.

 



[1] Stephen Neil,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 (London: Penguin Books, 1990), pp. 116-117.

[2] 최신 정보를 담은 주소는 http://www.mahidol.ac.th/Thailand/religion/r_muslim.html 참조.

[3] Milton W. Meyer, 김기태 , [동남아사 입문](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1994), pp. 48.

[4] 노봉린 편저, [미전도종족 선교정보](서울: 도서출판 횃불, 1995), p. 65.

[5] Milton, p. 39.

[6] 노봉린, p. 65.

[7] Milton., p. 67.

[8] Ibid., p. 101.

[9] Ibid., p. 102.

[10] Ibid., p. 143.

[11] Ibid., p. 137.

[12] Krasuang Suksathikan; Krom Sasana Lae Wathanatham, Thabian Masjid Nai Prathet Thai, 1992.  Ahmad Omar Chapakia, Politik Thai: Dan Masyarakat Islam Di Selatan Thailand (Pustaka Darul Salam Sdn. Bhd. & RMi Mltimedia Publishing, 2000), p. 288 재인용.   흔히 알려진 남부 이슬람 집중 점유 지역(빠따니: 544, 나라티왓: 477, 얄라: 308, 싸뚠: 147) 1476곳의 모스크가 등록되어 있어 63% 차지한다.   다른 인접 지역인 쏭클라에는 294, 끄라비에는 144, 나콘시탐마랏에 97곳이 등록되는 이슬람이 춤폰(5) 제외한 남부 14개도 지역에 각각 수십 곳의 모스크를 갖고 있다.

[13] 직접 남부 이슬람 시골 마을들을 방문해본 결과, 개척교회처럼 개인 집을 집회 장소로 사용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14] 예컨대, 종종 공사장 인근의 도로를 봉쇄하고 지나가는 차량으로부터 기부금을 받기도 한다.

[15] 신문이나 TV 뉴스를 모니터 해보면 남부 이슬람 지역 경찰, 학교나 정부 기관을 표적으로 하는 테러 기사를 자주 접할 있다.

[16] Andrew Cornish, Whose Place is This? (Bangkok: White Lotus Press, 1997), p. 117.  J. C. Scott, Weapons of the Weak. Everyday Forms of Peasant Resistance (Yale University Press, 1985)에서 재인용.

[17] Alpha Research Co., Ltd., Pocket Thailand in Figures(bangkok, 2001) 4th Edition, pp. 44, 354-380 요약 정리.

[18] 태국 문교부에서 매년 1회씩 주관하는, 중등학교 입학 자격을 얻기 위한 검정고시( 초등학교 6학년 수준)로서 필답 시험, 작문, 받아쓰기, 읽기, 편지 쓰기 등의 과목이 있다.  많은 선교사, 주재원, 자원봉사자 등이 1 가량 언어학원에서 공부하고 시험에 임한다.

[19] Milton, p. 78.

[20] CCC, IVF, YWAM 등이 대학 사역을, YFC SU(Scripture Union) 등이 중등학교 사역을, SU, CEF 등이 초등학교 사역을 있는데, 태국의 선교 기관들이 아직 미약하므로 선교사들이 이런 선교 단체들과 연합하여(태국인 간사들을 활용) 학원 선교를 효율적으로 감당할 있다.

[21] 필리핀 출신 선교사들 중심으로 구성된 팀은 얄라 지역 선교에 집중하고 있다.

[22] 공식 명칭이 'The Prince of Sonkhla University in Pattani' 국립대학교는 전교생 4,000 (모슬렘 학생 2,000 ) 거의 모든 주요 언어학과가 개설되어 있고, KOICA(한국국제협력기구) 의해 한국어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이제는 한국어 수강생이 400-500명에 이르며, 단기 선교팀의 공연 전도나 언어 실습 도움에 대해 학생들 마음이 개방되어 있어 많은 전도 팀이 찾고 있다.  필자 부부는 2000년도부터 매주 금요일 대학을 방문해 한국어학과 교수들과 친분을 충분히 쌓아놓았고, 2002 2 대학 학장과의 협의를 거쳐 아내가 2002 7월부터 한국어학과 강사로 봉사하게 되었다.

[23] 2002 2 한국의 크리스천 클래식 교향악단인 Gloria Mission Orchestra 빠따니 머어 대학, 고아원, 얄라 청소년 센터 등에서 공연을 가짐으로 남부 태국 지역에 기독교인들의 위상을 한껏 높인 있다.   이때 집중된 이곳 사람들의 관심을 보면 공연, 음악 지도 등을 통한 선교 가능성이 큼을 있다.

[24] WIN(World in Need), Frontier Mission등이 운영

[25] 크리스천 간호사들을 통해 문의한 결과, 병원 전도는 병원측의 허락을 받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바로는 찬양팀 등을 구성해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전도할 있다고 확신한다.  싸이부리에 있었던 OMF 병원 사역은 40여년 간의 사역 속에 상당한 성과를 거둔 있다.

[26] 2002 2 중순, 필자와의 대화에서 전도자 수위산(Suwisarn)씨는 '어느 선교 단체에서 남부 태국의 이슬람 선교를 이끄는 어느 서양 선교사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부인한다' 비판하며, 자신의 '전도와 신유 사역을 통해 여러 명의 모슬렘들이 회심하고 있다' 간증한 있다.

[27] 태국 남부에 선교사들이 정착하지 못하는 원인 제일 심각한 문제는 자녀 교육 문제이다.  아직 태국 남부에는 기독교 국제학교가 하나도 없고 서구 선교사들은 스쿨링(Home Schooling) 방식을 통해 직접 자녀를 양육하므로 선교 사역에 많은 에너지를 사용할 없는 형편이다.  더구나 말레이시아 북부에 있던 선교사 자녀 학교인 Chefu School(OMF 운영) , 문을 닫으면서 말레이시아, 태국 남부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교육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28] 태국 사람들은 직선적인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교리교육(Catechism) 제대로 이뤄지는 교회를 별로 없다.  사견에는 교리교육의 부재가 태국 교회를 약화시켰다고 본다.  참고로, 많은 경우 이슬람 지도자들은 영리한 아이들을 유치원 나이 때부터 기숙사로 모아 키우고 가르치며 특히 이슬람 교리를 집중 교육하기도 한다.

[29] Cornish, p. 122.

[30] Neil, op.cit., p. 117.

[31] 문제에 대한 John Travis Phil Parshall 논쟁은 Ralph Winter, Steve Hawthorne 공저, Mission Perspectives on the Wolrd Christian Movement, 3rd Edition 참고하라.

[32] OMF 총재였던 Danis Lane 소책자 '하나님의 무기: 기도' (서울: 성서유니온)에서 회고.

[33] 언젠가 LA 흑인 폭동이 일어나 한인 상가가 파괴되고 있을 , 평소 흑인들과 좋은 관계 속에 덕을 끼쳤던 한인들은 오히려 흑인들의 보호를 받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모슬렘 사회에서 살아가는 선교사들이 사건을 거울삼을 있지 않을까?

[34] 필자 부부는 BBCS(Bangkok Bible College & Seminary)에서 신학을 하고 한때 르써지역에서 이슬람권 전도자로 사역했다가 힘을 잃고 평신도로 전락한 태국인 부부를 회복시켜 전도 사역에 임하게 했는데, 얼마나 전도 사역과 봉사에 헌신적이고 적극적인지 모른다.  앞으로는 이런 사람들이 한국 동역자들 이상으로 이슬람권 선교를 효과적으로 감당하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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