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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남부 3개 도 소요사태 원인에 대한 역사적 고찰 본문

선교 EH국/Deep South Thai

태국 남부 3개 도 소요사태 원인에 대한 역사적 고찰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0. 7. 12. 10:39

태국 남부 3개 도 소요사태 원인에 대한 역사적 고찰

 

양덕훈 선교사(2007년 발표)

 

I. 서론

 

태국 남부 3개 도(道)는 지난 20세기 내내 시끄러웠지만, 2004년 이후에는 소요 사태가 더욱 험악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 소요 사태는 급기야 탁신 정권을 무너뜨리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소요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공무원으로서 무슬림을 위해 봉사하거나 선교사로서 이들을 섬기는 일들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

 

이 논고에서는 태국 남부 3개 도에서 일어나는 소요 사태의 근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 지난 수백년간 흘러내려온 역사와 소요 사태를 둘러싼 태국 정부와 무슬림들의 입장에 대해 간략히 살펴 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태국 남부에 사는 무슬림 이웃들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II. 본론: 이 지역은 누구 땅인가?

 

태국 정부나 국제 사회가 인정하든 말든 태국 최남단에 사는 무슬림들은 이 지역이 자신들의 영토라고 생각한다. 분쟁은 바로 이런 사고 방식을 바탕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자신들’은 혈통적으로는 말레이족, 종교적으로는 이슬람 교도들을 뜻한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에 대해서 Ibrahim Syukri(가명)라는 무슬림이 기록한 책, '빠따니 말레이 왕국의 역사(Histiry of the Malay Kingdom of Patani: SKMP)'를 살펴 본다.

 

1. 태국 남부 역사 개관:

 

1.1. 먼저 들어온 사람들

이 지역에 가장 먼저 살던 종족은 원시종족이었다. 원시종족으로는 세망(Semang)족과 사까이(Sakai)족이 있는데, 문명과는 동떨어진 원시적인 삶을 살았다. 그 후에 인도로부터 온 힌두족들이 이 땅에 정착했다. 힌두족들은 기원전 수백년 경에 가축들을 몰고 말레이 반도로 이주했다. 육로로 이주한 자들은 버마를 거쳐 태국과 말레이 반도로 들어왔고 해로로 이주한 자들은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자바, 발리, 브루네이 같은 여러 섬으로 흩어져 정착했다. 힌두족은 이미 매우 발전한 문명에서 살다가 왔기에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 원주민들은 힌두족을 존경했기에 힌두족은 교사(지도자)로 행세했다. 자연히 그들의 주 종교였던 브라만교와 불교 역시 넓은 지역에서 영향을 끼쳤다.

 

힌두족들이 말라야 지역으로 와서 정착하고, 그 당시 원주민이던 자꾼(Jakun)족과 혼인하면서 혼혈족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을 일컬어 말레이족(Malay: Malaya 사람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말레이족은 조상들을 따라 대승불교(Maha Nikaya)와 브라만교를 숭상했다.

 

한편 사얌으로부터 내려온 토착민들(Siam-Asli)이 말레이 반도를 8세기까지 지배했고 그 후에야 말레이족이 들어왔다. 빠따니(Patani)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사얌 토착민들이 말라야 북부, 빠항, 끄다(Keda), 끌란딴(Kelantan)과 빠따니를 지배했다.

 

수마트라 섬에 스리위자야(Srivijaya) 왕국이라는 말레이 왕국이 세워진 후 이 지역에 거주하던 사얌 토착민들의 힘은 무너졌고 사얌 내지(內地)에 있던 사얌 토착민들 역시 중국 남부로부터 밀려내려온 타이족에 의해 그 힘을 잃게 되었다. 결국 전체 말라야가 스리위자야 왕국에 복속하게 되었다.

 

말레이족은 수마트라를 벗어나기 시작해 말레이 군도와 같은 동남아 지역, 태평양의 하와이와 일본, 안다만 해(海) 여러 섬들, 실론, 니코바르, 마다가스카르 같은 인도양 섬들로 항해를 하면서 여러 부족 국가를 형성했다.

 

특별히 말레이 반도에도 이 고대 말레이 족이 방문하고 거주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말레이족은 말레이 반도에 정착할 때 주로 해변에 머물렀다. 당시 거주하던 사얌 토착민(Siam-Asli)들이 내지 쪽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지금 말레이족이 더 이상 거주하지 않는 지역이 있지만, 나타나는 흔적들과 여러 지역이나 마을들의 명칭들을 추적해보면 말레이족이 거주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심지어 파탈룽 국 연대기를 보면, 이 나라를 다스린 통치자(raja)였던 술탄 술라이만(Sultan Suaiman)의 종교가 이슬람교였다고 한다. 이 말레이족 국가는 대적들에 의해 전복되었고 술탄 술라이만은 전사했다.

 

말레이족들이 동서남북 각지에 거주하며 창성하게 될 때, 스리위자야 왕국도 수마트라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말레이족들도 말라야 지역에서 사얌 토착민들과 병행해 존속하던 차원에서 벗어나 차츰 힘을 발휘하는 데 이르렀다. 이 스리위자야 왕국을 발전시킨 사람들은 힌두교를 신봉해 힌두 말레이(Hindu Malay)라고도 불리던 말레이족이었다. 이 왕국은 14세기경 그 힘이 꺾일 때까지 크게 번창했다. 8세기 경에는 말라야, 수마트라, 자바, 발리 등을 복속시켰고 9세기 경에는 나콘시탐마랏(Nakhon Sri Thammarat)를 위시해 오늘날 방콕 서쪽에 있는 나콘파톰(Nakhon Pathom) 같은 국가까지 복속시켰다.

 

14세기경에는 수마트라를 중심한 이 스리위자야 왕국의 힘이 차츰 소멸되고 자바(Java) 섬을 중심한 마자빠힛 왕국이 힘을 얻어 1377년에는 싱가뿌라(Singapura)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을 정복했다. 스리위자야 왕국의 힘이 차츰 약해지자 사얌에 들어와 지배하기 시작한 타이족(Thai)이 나콘시탐마랏을 비롯한 사얌의 여러 국가들을 정복했고 스리위자야 왕국의 힘은 완전히 깨어졌다. 이 때문에 말레이족은 크게 두 갈래로 흩어졌는데, 한 쪽은 타이 왕국이 지배하던 북쪽이고 다른 한 쪽은 사얌 남부쪽이다.

 

1.2. 이슬람의 도래

아라비아 반도에서 무하마드에 의해 탄생한 이슬람교가 인도로 뻗어갔고 인도에서 말라야와 동쪽 섬들로 유입되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무슬림들은 9세기부터 끄다(Keda) 국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그 무슬림들은 말라야에서 상업을 하기 위해 들어온 아랍인, 인도인, 페르시아인들이었다.

 

1403년에는 멜라까(Melaka) 왕국을 지배했던 힌두 말레이 왕들이 자발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후에는 끄다를 다스리던 왕 마하왕사(Mahawnagsa)가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그 이후로 이슬람교는 말라야에 있던 여러 국가에 폭넓게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사얌의 지배하에 있던 영역도 포함되었다. 이슬람을 받아들인 사얌족은 삼삼(Samsam)이라고 불렸다.

 

1.3. 빠따니의 기원과 말레이 이슬람 왕국의 융성

비교적 오래 사얌 토착민(Siam-Asli)들이 빠따니를 비롯한 태국 최남단을 지배했다. 빠따니 지역은 ‘꼬따 말리까이’(Kota Malikai)라고 불렸는데, 사얌어나 힌두(발리)어가 아니라 페르시아어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고 해서 말리까이(Malikai)라는 지역 이름에 대한 혼란이 있다. 하지만, ‘말리까이’라는 말이 ‘마하 니까야’(Maha Nikaya: 불교 대승파)라는 말에서 비롯된 오기(誤記)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설이 맞다면 빠따니 일대가 무시 못할 불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얄라(Yala)에는 부처 와상(臥象)을 안치한 큰 동굴을 지닌 사찰이 아직까지 존재한다.

 

‘빠따니’라는 지역 명칭은 ‘따니’(Tani)라고 하는 말레이족 어진 어부 이름에서 왔다. 이 존경받는 어부는 ‘바빡 따니’(Bapak Tani: 아버지 따니)라고 불렸고, 이 어부를 중심으로 살던 마을은 ‘깜뿡 빡 따니’(Kampung Pak Tani: 아버지 따니 마을)라고 일컫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명칭은 이 지역을 일컫는 명칭으로 알려졌다. ‘빠따니’는 아랍 상인들이 쉽게 부르기 위해 사용된 명칭이고 이것이 이 지역 명칭으로 굳어졌다.

 

수마트라, 자바를 위시한 여러 지역이 이슬람화하고 있을 때, 빠따니는 아직 힌두교, 불교권 영향 아래 있었다. 그리고 힌두교도들은 무슬림들을 공격하는 일이 잦았다. 이때 신변의 위협을 느낀 빠사이(Pasai) 국의 무슬림들이 빠따니 지역으로 피신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깜뿡 빠사이(Kampung Pasai: 빠사이 사람들 마을)이라는 마을은 현재도 남아있다. 그 빠사이 사람들 가운데, 이슬람 종교 법을 익히 잘 아는 셰이크 샤피알루딘(Sheik Syafialudin)이라는 노인이 있었다. 이 사람은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 데도 능숙한 두꾼(Dukun)으로도 잘 알려졌고 빠따니 사람들은 그를 기려 ‘뚜한 셰이크’(Tuhan Sheik: 신(神)세이크)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그 당시 라자 인트라(Raja Intera)로 알려진 빠따니 왕이 몸 전신에 퍼진 나병(혹 피부병)에 감염되었다. 이 병을 고치려고 애를 쓰던 왕은 마침내 셰이크를 불러 치료를 받았다. 치료해주는 조건으로 셰이크는 왕이 이슬람 신앙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했고, 다급한 왕은 그 청을 수락한 다음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병이 치료되면 왕은 약속을 파기하고 이슬람 신앙을 도외시 했다. 병이 악화되면 다시 셰이크를 부르는 과정을 통해 왕은 치료를 받아 완치되었고, 이슬람교에 대한 강의를 받은 다음 마침내 불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셰이크는 궁정에서 이슬람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고, 왕을 비롯한 왕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자 빠따니 주민 전체가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라자 인트라는 그후 이슬람 법에 따라 술탄 마무드 샤아(Sultan Mahmud Shah)로 이름을 바꾸고 말레이 족들간의 동맹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또한 오래지 않아 사절단을 사얌 국으로 보내기도 하면서 빠따니라는 국가가 점차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빠따니는 나날로 무역을 통해 창성하기 시작했다. 빠따니 강 하구는 무역 상인들의 배로 붐볐고 이 시절 빠따니는 말라카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빠따니의 발전은 1516년까지 계속되었다. 16세기에는 유럽인들이 동아시아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1.4. 태국과의 갈등

빠따니 왕인 술탄 무자파 샤아(Sultan Mujafar Shah)는 사얌 정부와 유대관계를 맺기 위해 몸소 사얌을 방문했으나 푸대접을 받았다. 사얌 왕이 무척 홀대했기 때문에 빠따니 왕은 몹시 불쾌한 감정을 갖고 돌아왔다. 어쩌면 이것이 갈등이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다. 1563년에 버마가 사얌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술탄은 전함을 몰고 사얌을 성공적으로 침공을 마쳤지만, 술탄은 방콕 근처에서 급사했다. 이를 통해 사얌과 빠따니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이후 빠따니는 술탄 바하두르 샤아(Sultan Bahadur Shah)가 남긴 세 딸들이 차례로 왕위에 오르며 절정기를 구가했다.

 

라자 히자우(Raja Hijau: Green Princess), 라자 비루(Raja Biru: Blue Princess), 라자 웅구(Raja Ungu: Purple Princess)는 모두 여왕이었지만, 차분한 통치로 신망을 얻었고 사얌 국의 계속되는 공격을 잘 방어하기도 했다.

 

히자우 여왕이 다스리던 시절 1603년에는 사얌 국왕이 빠따니를 정복하기 위해 아유타야로부터 함대를 보내 빠따니를 침공했다. 하지만 빠따니 말레이족의 완강한 저항, 유럽인들이 지원한 무기들이 있어 샤얌 군대는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비루 여왕 시절에도 사얌 국왕이 빠따니를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 소문을 듣고 여왕은 당시 유럽인들에게서 구입해 비치했던 포들이 충분치 않았기에 대형 포를 가능한 많이 만들 것을 제안했다. 비루 여왕은 준비를 잘 마치고 죽었고 막내인 웅구 여왕이 즉위했다.

 

1632년 사얌은 두 번 째로 빠따니를 침공했다. 그때는 사얌이 네덜란드와 약조를 맺어 같이 빠따니를 침공하자고 할 정도로 치밀한 준비 끝에 빠따니를 공격했다. 하지만, 사얌이 기대했던 네덜란드 측 지원은 없었고, 미리 준비한 대포 3대의 위력과 빠따니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두 번 째 침공도 무위로 끝났다.

 

사얌은 1633년에도 침공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네덜란드와 단단한 약조를 맺고 전함 6대와 군사들과 무기를 지원받기로 하고 침공했는데, 결국 수 개월간 진행된 전쟁으로 식량이 떨어지고 전함에 질병이 돌자 또 한 번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철수한 다음에야 네덜란드 전함이 빠따니에 나타났다. 웅구 여왕은 전쟁이 끝난 2년후 죽고 그 딸이 꾸닝 여왕(Raja Kuning)이 즉위해서 빠따니를 다스렸다.

 

1.5. 빠따니 말레이 왕국의 몰락

1638년 사얌의 왕이 바뀌었지만, 빠따니를 정복하려는 사얌의 시도는 계속되었다. 당시에는 야마다(Yamada)라는 일본 출신 리고르(Ligor: 나콘시탐마랏) 총독이 사얌 왕의 신임을 받아 리고르 군인들과 일본 용병군대를 이끌고 빠따니를 침공했다. 하지만 이때에도 빠따니는 꾸닝 여왕의 영도하에 사얌의 공격을 잘 견뎌냈다.

 

1767년 사얌 수도가 버마에 의해 포위되자, 이를 기회로 리고르는 사얌으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사얌이 톤부리 왕조로 재정비 된 후 1769년 사얌은 리고르를 평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다급해진 리고르, 파탈룽, 싱고라(송클라)의 왕들은 빠따니로 피신했다. 사얌의 위협과 요구에 의해 3왕들을 잡아 사얌으로 보낸 후에도 빠따니를 복속시키려는 사얌의 욕구는 여전했다.

 

이 당시에는 술탄 마무드(Sultan Mahmud)가 빠따니를 다스렸다. 1784년경 버마가 다시 사얌에 복속된 리고르를 침공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방콕에서 파견된 군대가 수 개월간의 전쟁끝에 버마군을 몰아내게 되자 그 여세를 몰아 빠따니를 다시 넘보게 되었다. 이 때에 사얌은 전력이 크게 강화된 상태였고, 빠따니는 그 위세가 예전만 못했다. 게다가 막상 사얌 함대가 빠따니에 도착했을 때, 리고르 출신으로 마무드 왕의 신임을 받았던 당시 빠따니군 사령관 나이 짠통(Nai Chathong)이 같은 종족인 사얌에 대한 충성을 보이기 위해 마무드 왕과 빠따니를 배신해 방어선을 고의적으로 열어주었다. 아직 전에 만든 대포도 남아있었고, 빠따니 주민들도 열심히 싸웠지만, 전선이 무너지면서 마무드 왕도 전사했고 결국 빠따니는 함락되었다. 이것은 역사상 첫 패전이었다.

 

 

1.6. 저항운동: 이슬람을 지키려는 무슬림들

빠따니 왕국의 몰락은 그 지체로 그 치욕이었다. 혈통적으로 다른 종족에게 지배를 당한다는 것도 참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빠따니 말레이족 삶의 근본으로 자리잡은 이슬람교가 무시되고, 그들의 이슬람식 삶의 양식이 조롱받는 일들이 사얌의 지배하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빠따니 말레이족의 저항은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이슬람을 지키자는 열망은 순수한 무슬림들이나, 분리 독립주의자 같은 정치적 세력으로 뭉치는 무슬림들이나 한결같다. 이런 근본적 열망이 태국 남부 소요 사태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2. 태국 남부 소요사태

 

2.1. 빠따니 말레이 왕국 몰락 직후: 즉각적인 자항

2.2. 20세기 중반까지: 태국 정부의 강경책에 대한 반항

2.3. 20세기 후반까지: 태국 정부의 유화책에 대한 반응

2.4. 2000-2004년: 탁신 정부에 대한 저항

2.5. 2004-현재

 

3. 소요사태에 대한 태국 정부의 입장과 대처

태국 최남단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소요 사태를 태국 정부나 관계자들이 바라보는 시각은 천차만별인데, 정치권 주류의 시각은 사회적 소요, 분란 그 자체에 집중되고 이러한 사태들을 억제하겠다는 데 주안점을 두는 듯 하다.

 

3.1. 남부 소요사태 원인에 대한 태국 정부의 분석:

 

도표: 2000년 10월-2001년 7월 사이 남부 4개도에서 일어난 범죄들의 다양한 그룹들

그룹(Groups)

발생수(Frequency)

분리주의자(Separists)

4

지역 강도(Local Thieves)

2

지역 범죄단(Local Mafias)

16

개인(Individuals)

2

미분류 그룹(Undefined Groups)

3

합계(Total)

27

 

 

 

그동안 관계자들이 남부 소요 사태를 바라보던 시각은 위 도표에 잘 드러난다. 관계자들은 물론 신문 방송같은 방송 매체에서도 태국 남부에서 일어나는 테러를 두고 ‘쫀따이’(남부 강도단)라는 표현을 쓴다. 엄연히 정치 세력이 조직적으로 준동하는데도 정부 관계자들은 애써 이 사실을 축소시키려는 느낌이 든다.

 

태국 정부는 한동안 ‘분리주의자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이런 표현이 정부와 무슬림들 사이에 나쁜 감정을 부추킬까봐 1972년 1월 27일부터는 분리주의자들을 ‘테러리스트들’이라고 불렀다. 결국에는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이슈들의 중요성을 감소시키기 위해 ‘강도단’(Bandits)라고 재명명했다.

 

분리주의자들이라는 개념은 Tenku Abdul Kadir Kamaruddin이라고 불리는 빠따니 말레이 왕족들에 의해 비롯되었고 그 개념은 다음 세대로 전달되었다. 이것은 말레이 빠따니 왕국이 방콕에서 파견된 관리들에 의해 지배되기 시작한 1902년 태국에 복속된 것에 기인한다.

 

여기서 잠시 과거 역사속에서 남부 소요사태를 일으킨 배경 그룹들을 알아본다.

 

3.1.1. GMPAR(Gabungan Melayu Patani Raya: Great Pattani Malay Association):

1948년 3월 5일 뗑꾸 마무드 마히이딘(Tenku Mahmud Mahyideen)에 의해 조직되었는데, ⑴ 태국 남부에서 핍박받는 말레이족을 통일하고 해방하여 이슬람 말레이 국가를 세우고, ⑵ 말레이족의 필요를 종교적으로나 전통적으로 맞춰주고, ⑶ 말레이족의 사회적 신분과 삶의 질을 높여 그들로 하여금 인간으로서의 높은 존엄성과 정의와 자유와 적절한 교육 혜택을 갖춘 그 땅의 주인이 되게 한다는 3중 목적을 표방했다.

 

3.1.2. BNRP(Barisan Nasionale Remelasan Patani: The National Liberation Front of Pattani)

1952년 죽은 뗑꾸 마무드 마히이딘의 GMPAR을 대신해 그 아들들이 1959년부터 일으킨 운동이다. 이 그룹은 빠따니 족을 전세계와 아랍 세계에 알리는데 공헌했고 태국 젊은이들을 중동 대학교들에 유학을 보내어 돌아온 후에는 자신들의 그룹을 위해 봉사하게 했다. 특별히 남부에서는 보수적인 부류와 공고한 관계를 유지했고 말레이시아 북부의 이슬람 정당인 PAS(Parti Islam Se-Malaysian: Party of Maysia)와 좋은 관계를 지금까지 강력히 쌓아오고 있다. 이 운동의 전사(戰士)들은 부도(Budo)와 같은 나라티왓(Narathiwat)의 산악지역 주위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주창하는 5대 전투 원리가 있다. ⑴ 여성들과 아이들의 권리를 해하거나 침범하지 않는다, ⑵ 정당한 사적 재산이나 생필품 같은 것들을 훼방하거나 파괴하지 않는다, ⑶ 지역 주민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받아들인다, ⑷ 기구(BNRP)의 고상한 목적을 견고히 하기 위해 용감히 싸우고 획득한 무기 품목을 잘 간수한다, ⑸ 오직 주민들 공동체에서 만들어진 결정을 존중한다.

 

3.1.3. BRN(Barisan Revolusi Nasional Melayu Patani: Pattani Malay Natioanl Revolutionary Front)

BNR은 나라티왓(Narathiwas)도 르써(Rue Sor)읍에 있는 뻐너(Pondok) 학교 교사에 의해 1960년 3월 13일 발족되었다. 이 기구의 기본 신앙은 민족주의적이고 이슬람적이다. 정치적으로는 좌익, 사회주의적이고 폭력을 선호하기도 한다. 이들의 목표는 이슬람 공화국을 세우는 것이고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기보다는 정치적인 활동들을 전개하는 데 더 집중한다. 이 그룹의 리더들은 인도네시아 출신이다. BNR은 3그룹으로 분열되었다. ⑴ BNR Coordinate: 1979년 설립되었고 말레이시아에서 정치적인 활동들을 전개했다. ⑵ BNR Congress: 1984년 설립되었고 무장 세력을 형성하는 데 주력했다. ⑶ BNR Ulama: 1984년 설립되었고 정밀한 이슬람 리더들인 원로 위원회 회원 그룹에 의해 종교적 운동들을 시행하는 데 주력했다.

 

3.1.4. PULO(Patani United Liberation Organization)

이 빠따니 통일해방 기구는 인도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뗑꾸 비라(Tenku Bira)에 의해 1968년 1월 2일 설립되었다. 이 분리주의 기구는 다른 그룹들과 비교할 때 가장 잘 조직된 기구이며 1968년에 기록된 그들 자신의 헌법을 갖고 있고 정치적 선언문서로 기록된 정치 이념도 갖고 있다. 그 정책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⑴ PULO는 빠따니 민족의 이익을 위해서 설립된 정치 기구이다. 기구의 목표는 첫째, 태국 제국주의자들을 대항해 싸우는 빠따니 민족 정치 세력들을 연합시키고, 둘째, 제국주의자들과 용감히 싸우고 세상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힘과 무기 사용을 포함한 어떤 방법도 사용하며, 아랍 국가들을 침공하고 점령한 유태인들을 대항해서도 싸운다. ⑵ PULO는 정치적으론 경제적으로나 또는 빠따니의 전통과 민족을 돕는 어떤 체제라도 합력할 수 있는 역사와 이념을 갖고 있다. ⑶ PULO는 민족성과 도덕성에 관련된 이슬람 원리들을 사용해 행동한다. ⑷ 태국 제국주의자들과 싸우는 것은 빠따니 민족의 모든 사회 단위와 세대의 생사가 달린 상황이다. PULO는 빠따니를 자유롭게 하고 이슬람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태국 정부를 향한 항거를 끝없이 시도할 것이다.

 

이상에서 개괄한 것처럼 분리주의 운동을 일으켜 온 세력들의 목적은 하나다. 태국 정부의 지배를 벗어나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 따라서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은 다양한 모양의 항거이다. 그것이 테러이든, 삶 속의 저항이든.

 

이에 대한 태국 정부의 대응 방법이나 자세는 어떤지 살펴 본다.

 

3.2. 태국 정부의 강경정책

빠따니 왕국 몰락 직후 사얌 관리들이 무슬림 지방에서 자행한 행동들은 가뜩이나 분에 차 있는 빠따니 종족의 폭발적인 분노를 야기시켰다.

 

과거 태국 정부가 태국 남부의 무슬림들을 다루는 정책은 ‘팔 비틀기’식이었다. 20세기초, 피분송크람 수상은 ‘타이 국가 민족주의’로 알려진 ‘극단적 민족주의’를 표방했고 타이 문화만 촉진되고 허용되는 것이었다. 문화적 세뇌 정책은 무슬림 말레이족들을 자극해 남부 3개주에 말레이 민족주의를 확산하는 것과 자유 빠따니 분리주의 저항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도 기본적인 자세는 별 변화가 없었고, 빠따니 말레이 민족 역시 불만에 차서 크고작은 문제들을 일으켰다.

 

3.3. 태국 정부의 유화정책

태국 정부가 유화정책을 전해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남부 지방 4개도에 학교 교육을 통해 빠따니 말레이 족의 교육 수준을 높이려는 계획도 세웠고 빠따니에 PSU(Prince of Songkhla University) 같은 국립대학교를 세워 빠따니 종족 중에서 가교 역할도 하고 지역 리더십을 발휘할 인재를 키우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이슬람 자치 학교인 뻐너(Pondok)를 무조건적으로 공립학교로 바꾸려는 정책이 빠따니 민족을 태국화하려는 교활한 음모라고 생각한 무슬림들에 의해 큰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고무나무 산업을 비롯해 무슬림들이 보다 윤택하게 지낼 수 있는 정책도 펼쳤는데, 이 마저도 수입의 세금이 중앙정부로 넘어간다는 생각과 이익을 많이 창출해도 자신들에게는 별 유익이 없다는 무슬림들의 미온적 반응 때문에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3.4. 태국 정부의 방관정책

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니지만, 태국 정부가 수수방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주로 관리들 때문에 일어난 부조리들이 있다. 그것은 지방 정부 관리들이 직간접으로 자행한 사건들이다. 내무부 보안 담당 관리들은 “강도들과 싸우는 강도”(bandits fight bandits) 정책을 사용해 한 분리주의자들을 자극해 또다른 그룹과 싸우게 함으로써 상을 얻거나 계속 승진하는 기회로 삼았다.

 

반대로 대부분의 일반 관리들은 돈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도적들이나 강도들을 고용해 태국 최남단에서 범죄를 저지르게 해서 자기들의 유익을 챙기거나 이런 일들을 분리주의자들을 비난하는 데 사용했다.

 

III. 결론: 태국 무슬림을 잘 알자

 

초두에서 이야기 한 빠따니 왕국 역사나 말레이족들에 대해 태국 정부 관리들은 무지하거나 혹은 알면서도 무척 무시한다. 태국인들이 무슬림들을 무시하는 단적인 예는 무슬림을 ‘캑’(태국 말로 ‘손님’, ‘객’을 의미)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는 무슬림 숫자에 대한 정부 당국의 왜곡 축소 자세이다. 정부 통계를 따르면, 태국에 사는 무슬림은 전체 태국 인구의 3.5~5% 정도로 대략 210만~300만명 사이일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전 총리 탁신 치나왓(Thaksin Chinawatra)는 프랑스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무슬림들이 9%라는 정보를 언급한 바 있다. 이 점유율은 일반적으로 태국인들이 알고 있는 상식,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정보에 비해 2배를 웃돈다.

 

무슬림들 자신은 어떻게 보는가? 2000년경 공식 이슬람 관리 한 사람은 태국내 무슬림은 전국적으로 7,392,735명이고 태국 남부에 6,297,800명이라고 진술했다. 이 무렵 태국 이슬람 사무소에 제출된 공식 집계에 의하면 8,988,800명이나 된다. 아래에 이슬람측에서 제공한 도표를 보면 각 지역별로 무슬림들 자신이 조사한 무슬림 인구 통계를 우리가 아는 상식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어쩌면 무슬림들이 실제 인구를 더 부풀렸는지 모른다. 혹은 다른 나라로부터 와서 머무는 무슬림 인구를 많이 추가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수가 일반적인 우리 예상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태국 총인구의 7.5~8%에 해당하는 근 500만을 헤아리는 무슬림 인구는 현재의 무슬림 인구 증가율인 2~2.6%를 유지한다면 몇 년 안에 10%를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500만은 정말 큰 숫자이다. 그리고 이 500만은 이웃하는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수 억의 말레이족과 한 혈통이다.

 

이들은 어떤 모양으로든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독립하기를 원하는 정치 그룹이며, 사회 정치를 초월해 더 큰 힘과 영향력을 발휘하는 종교 그룹이다.

 

동남아 이슬람 선교에 헌신해야 하는 선교사들과 교회 사역자들은 빳따니 말레이 무슬림들을 잘 알아야 한다. 그들의 세력, 그들의 내면에 담긴 생각과 이념, 그들의 취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하고, 이에 따라 이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증거하기도 하고 효과적인 선교전략을 수립하고 적용해야 한다.

 

빠따니 말레이를 더 깊이 이해하자.

 

 

통계로 보는 태국 이슬람

 

Province

No. of

Mosques

Muslim

Population

Imams/

Mosque

Imams/

City*

Central

390

997,740

5,840

185

Angthong

2

850

30

-

Ayuthaya

58

130,500

870

25

Bangkok

165

570,000

2,475

30

Chachoengsao

52

145,000

780

25

Chainat

1

340

15

-

Kanchanburi

7

8,000

95

15

Lopburi

3

650

45

15

Nakhon Nayok

27

75,000

405

15

Nakhon Phathom

1

350

15

-

Nakhon Sawan

3

450

45

-

Nothaburi

21

75,000

405

15

Pathumthani

28

37,500

420

15

Ratchaburi

2

850

30

-

Samut Prakan

14

24,000

210

15

Samut Songkhram

1

750

15

-

Saraburi

3

2,500

45

15

Singburi

1

350

15

-

Suphanburi

1

650

15

-

North

30

21,550

450

45

Chiang Mai

13

12,000

195

15

Chiang Rai

2

3,500

75

15

Mae Hong Son

2

300

30

-

Lampang

1

400

15

-

Phetchabun

2

800

30

-

Phichit

1

300

15

-

Phisanulok

1

400

15

-

Phrae

1

350

15

-

Tak

4

3,500

60

15

Northeaster(Isan)

13

6,020

195

15

Chaiyaphum

1

450

15

-

Kalasin

1

400

15

-

Khon Khaen

3

1,450

45

15

Nakhon Ratchasima

2

650

30

-

Nongbualamphu

1

350

15

-

Sakon Nakhon

1

400

15

-

Surin

1

300

15

-

Ubon ratchasima

1

620

15

-

Udon Thani

2

1,400

30

-

East

44

71,125

660

45

Chanthaburi

1

375

15

-

Chonburi

26

68,930

390

15

Prachinburi

2

750

30

-

Rayong

6

10,000

90

15

Trat

9

15,000

135

15

South

2,441

6,297,800

36,615

150

Chumphon

6

15,000

90

15

Krabi

152

326,250

2,280

30

Nakhon Si Thammarat

104

285,000

1,560

30

Narathiwat

487

1,135,050

7,305

30

Prachuapkhirikhan

11

14,000

165

15

Pattani

551

1,230,750

8,265

30

Phangnga

78

109,200

1,170

25

Phatthalung

76

104,400

1,140

25

Phetchaburi

15

22,750

225

15

Phuket

38

82,500

570

15

Ranong

21

35,150

315

15

Satun

152

514,500

2,280

30

Songkhla

298

1.036,000

4,470

30

Surat Thani

38

113,750

2,280

30

Trang

98

185,000

1,470

25

Yala

316

1,088,500

4,740

30

Total

2,918

7,391,235

43,760

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