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펌) 간추린 태국 역사 본문
역사적 배경
- 고대로부터 태국은 1939년 6월 24일까지 Siam으로 알려져 왔다. 오늘날 태국인 들은 "Muang Thai"라고 부른다. “Muang"은 땅(Land), "Thai"는 자유(Free)라는 뜻이다. "Muang Thai"는 자유의 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선사시대에는 Nigritos족이 태국 땅의 주인이었다.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이제껏 외세의 지배를 한번도 받은 적이 없는 나라가 태국이다. 왕을 국가의 수반으로 하는 입헌 군주제 국가이다. 태국인들 정착전의 태국역사는 아직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어떤 역사가들은 몬족(미얀마人)들이 이 지역을 물려 받아서 거주해 태국이 처음으로 우통에 수도를 둔 수바나부미 몬 왕국에 의해 통치를 받았었다고 믿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고고학자들은 반치앙의 북동쪽 작은 마을 근처에서 약 5천6백년 전의 것으로 추측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 문명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후 몬족 , 크메르족 , 타이 족을 비롯한 많은 종족들의 이민 행렬이 이어지게 되었고 지금의 태국이라고 알려진 거대한 땅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이 중국 남쪽으로부터 기름진 땅과 강 , 계곡을 따라 천천히 이동해온 무리들이었다. 약 11 , 12세기 경에는 크메르족이 앙코르로부터 대부분의 지역을 통치하기도 했다.
드라바티 몬 왕국(550년-1253년) - 후난황제가 3세기 후 지배해 나콘파톰이 수도였다. 675년 드라바티가 크메르황제하에 총독의 임기를 행사했다(11세기). 차오프라야 유역의 수로를 이용할 수 있는 농업의 가능성에 매료되 쌀을 경작했던 태국인 들은 11세기에 중국 남쪽에서 이주하기 시작했다. 12세기 초 , 타이 족은 북쪽의 란나, 파야오, 수코타이에 조그만 공국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1238년에 이르러서는 2명의 타이 지도자들이 크메르 영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최초의 독립왕국인 수코타이(행복의 새벽이라는 의미)를 세웠다.
수코타이 왕국 (1238-1419) - 향후 차오프라야강 유역을 따라 발전하게 되는 타이 왕국의 기초가 되었다. 태국의 국교인 테라바다 불교(Tehravada Buddhism)를 확립하고 , 태국 문자의 발명 , 미술 , 조각 , 건축과 문학 등 태국 예술 형성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이다. 수코타이 왕국은 치앙마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1238년에 드라바티를 압도해 크메르를 병합해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00년경에 쇠퇴일로를 걸으면서 결국에는 신흥 아유타야 (Ayutthaya) 왕국의 종속국이 된다.
아유타야 태국왕조(1350-1767) - 14세기에는 수코타이와 다른 그 밖의 작은 왕국들을 차례로 병합해 부와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1350년에 건립된 이 아유타야 왕국은 챠오프라야 강 남부 멀리까지 영토 하에 두었다. 1767년 버어마의 침략을 받기까지 태국 중심지의 역할을 했다. 포르투갈 사절단(시암을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이 1511년 도착했으나 동남아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태국은 결코 유럽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417년간 33명의 왕이 통치한 아유타야 왕국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탄생시켰다. 전체적으로는 크메르의 영향에서 벗어나 아라비아 , 인도 , 중국 , 일본 및 유럽과도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 아유타야의 붕괴는 프랑스의 파리나 영국 런던의 붕괴와 비견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후에 탁신 왕이 버어마를 몰아내고 수개월만에 타이왕국을 재건하였다.
방콕시대(1767-1932) - 부르만들은 1767년 아유타야의 수도를 함락시켜 새로운 지역, 즉 현재의 방콕으로부터 차오프라야를 건넌 톤부리에 새 수도를 설립했다. 1782년에 이르러 차크리왕조의 초대 왕인 라마 1세가 차오프라야 강 유역의 방콕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현재의 왕궁은 이 기간에 2번째 왕이었던 챠크리 장군 때부터 내려온 것이다. 19세기에 완벽한 군주제 통치를 했던 몽굿(라마4세:1851~68년)왕이 태국을 근대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 쥴라롱콘(라마5세:1868~1910)왕이 노예제도 폐지와 철도 창시, 전보 서비스, 과학교육 등을 강하게 추진했다. 이러한 서구방식의 표출은 1932년 입법부가 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국가의 완벽한 군주대치를 요구하는 태국 지식인들의 무혈폭동을 야기시켰다. 혁명은 또한 군대와 오늘의 태국정치가 계속될 수 있도록 정부를 제제하는 시민단체 사이에 분쟁을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일본의 통치가 끝난 후 1945년과 1946년 사이에 쎄니 프라모지하의 시민정부가 국가를 다스렸다. 1947년에 무혈군대반란이 마샬 피불 쏭크람 전투를, 1957년 이와 유사한 폭동이 마샬 싸릿 타나랏 전투를 일으켰다. 싸릿은 1963년에 죽고 그의 후계자인 타놈 키티카촌(최후의 마샬 전투) 장군이 1968년에 적은 기간 동안 정치적인 시민통치를 주도했으나 1971년 쌓여있던 불안 때문에 군사통치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1973년 싸냐 다르마삭티가 임시 시민정부를 창설했다.1975년에 치뤄진 선거는 다수당 창당에 실패해 쎄니 프라모지와 쿡크릿 파라 모지가 각각 연합정부를 만들었으나 분단된 국가를 통일하는데는 실패했다. 쎄니는 1976년 공직에 재선됐으나 나중에 그해 쌍가드 차롤유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반란으로 쫓겨났다. 타닌 크라이비치엔이 수상이 되었으나 1977년에 크리앙삭 초마난 장군 지휘하의 무혈반란으로 대치되었다. 1979년 선거는 크리앙삭을 선거로 선출된 정부의 수상으로 공직에 재임시켰으나 1980년에 사임했다.
프렘 틴슐라논다 장군 - 새 수상인 프렘 틴슐라논다 장군은 1981년과 1985년에 목숨을 빼앗고자 기도한 부대를 살려주었다. 이로 인해 1981년과 1986년의 잇따른 선거에서 수상으로 계속 남아있을 수 있었다. 1988년 선거후 프렘은 정부에 남아있기를 권유받았으나 강력히 거절했다. 그의 후계자인 차티차이 춘하벤은 쑨톤 콩쏨퐁 장군의 무혈반란으로 1991년 2월에 쫓겨났다. 선거를 하지 않고 임명된 군대수상은 1992년 3월 강력한 일반 여론의 항변에 의해 만들어져 새 입법 하에 치뤄진 선거 후에 정식으로 취임되었다. 군대지배하의 잔혹한 진압이 수상이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왕이 과도기에 시민의 수상을 임명하게 했다. 구 민주당은 1992년 9월 선거에서 소수의 다수당을 이겨 추안 릭파이가 수상으로 있는 시민정부와 연합했다.
현재의 태국은 입헌 군주제로 1932년이래 현재의 국왕인 푸미폰 압둘야뎃 (H.M. King 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에 이르기까지 태국의 국왕들은 국회를 통하여 입법권을, 수상이 이끄는 내각을 통하여 행정권을, 사법부를 통한 사법권을 행사해오고 있다.(동남아선교회 인터넷 홈페이지)
나. 사회적 배경
- 김순일은 그의 책(밀림에 세운 십자가,1982:285)에서 태국인의 국민성을 (1)사상의 무풍지대 ; 아시아 어느나라보다 민족의 다양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종적인 대결이나 분열이 없이 조화를 이루는 나라, (2)낙천주의 ; 모든 것을 낙관하는 전통적인 불교의 영향과 풍요를 약속하는 열대의 자연 조건이 이들을 "Mai Pen Rai"(Never Mind) 백성으로 만들었다. 어지간한 역경에서도 걱정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며 무관심과 태연함으로 일관하는 백성, (3)흔들리지 않는 주체의식 ; 외면으로 유순하지만 내면에는 묵묵히 흐르는 주체성이 있다. (4)봉건사상 ; 태국 국민은 법적으로 모두 평등하다. 그러나 옛 관습과 전통이 강하게 작용하여 Chaow-Nai(왕이 임명한 상전)사상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평민들은 관리들에게 잘 순종하며 지극한 경의를 표한다. 이와 같은 봉건적인 사회풍조는 태국사회 곳곳에 침투되어 있으며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은 권력 있는 인사들이나 부자 앞에서는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발표하지 못하고 거북해 한다.
태국에서의 최고의 덕은 예절과 관용이다. 이것은 사람 면전에서 그 사람의 의견을 거절하지 못하게 한다. 그 이유는 상대방의 마음에 거절로 인한 상처를 주기 원치 않기 때문이다. 태국인의 삶을 오랫동안 연구한 Herbert P. Phillips는 “Social Cosmetic"이란 용어로 태국사회를 설명한다. 태국인들의 태도는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그들은 상대방 면전에서 ”no"라고 말하는 것을 힘들어 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순히 상대방과의 갈등을 피하는 것이다. 타이인들의 외적태도는 종종 그들의 진짜 태도와 많이 다르다. 그들은 종종 대화의 통로로 제삼자를 사용한다. 그들은 이런 점에서 사회적 관계의 대부들이며 외교의 대가들이다.(Samuel I. Kim, 1982:8)
타이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놀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Sanuk"(amusement)이 타이인 들에게 중요한 용어인 이유는 가치의 표준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마을 사람이 도시에 직장을 얻어 나갔다가 사퇴하면 돌아와서 마을 사람에게 설명하기를 그 직장은 재미가 없어서 사퇴했다고 설명한다. 반면에 급여가 없는 직장이라도 그들은 종종 나가 일한다. 왜냐하면 재미(Sanuk)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노소를 막론하고 지적된다. 그들이 목사를 좋아하는 이유도 설교가 재미(Sanuk)가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를 해도 이기기 위해 하지 않고 재미를 위해 한다.
타이인들은 정말 염려하지 않고(no worry), 서두르지 않고(no hurry), 무관심 하는(unconcern) 사람들이다. 끝없는 낙천주의와 "Sabai"(easiness)에 기초된 삶의 철학을 갖고 있다. 만약 그들에게 마실 물이 없다면 그들은 아직 말하기를 “Mai Pan Rai"(It doesn't matter) 왜냐하면 아직 ”Nam Klong(강물)에서 마실 물을 얻어서 그것을 끊일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Samuel I. Kim, 1982:9)
다. 종교적 배경
- 12, 13세기경 중국의 남서쪽에 위치한 운남성으로부터 태국에 이주한 중국인들에 의해 불교(Theravada)가 전파될 때 태국에는 이미 7세기 전 미얀마 남부로부터 그리고 11세기 미얀마의 왕 Anawrahta에 의해 태국의 북쪽이 정복되어 있을 때 불교가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태국인들은 A.D. 1238년에 그들의 첫 번째 왕조 때에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수코타이 왕조의 람캄행 왕(A.D.1275-1300)은 태국의 승려들을 Ceylon(스리랑카)의 명성 있는 Singhalese 승려에게 보내어 수준 높은 훈련을 받도록 했으며 왕조의 성직제도를 세웠다. 1360년에는 불교를 법적으로 통할하고 인정하는 의식을 위해 Singhalese 승려를 초청하였고 Mahinda로부터 Mahavihara를 통하여 내려오는 정통불교를 태국 승려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태국 불교는 이와 같이 보수적인 불교로 ‘자유’ 태국인들에게 1767년 아윳타야의 시대의 문명의 절정기에 이르기까지 침투하였다. 태국 불교는 수도를 현재의 방콕으로 옮긴 이후 현재까지 외부의 방해 없이 자유의 땅에 가장 강한 국가 종교로 번영하고 있다.(Hong-Shik Shin, 1990:30)
라. 문화적 배경
- 태국은 모계, 군주, 소승불교를 삶의 근간으로 하는 나라로 19세기 중반 이래로 외세로 부터의 침입을 받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1년내내 25-30의 거의 변화 없는 날씨와 파괴적이고, 지진, 화산, 기근, 태풍, 눈보라와 같은 자연적인 재앙이 없는 조용한 삶을 영위하여 왔다. 태국속담에 “우리는 물에서 고기를 얻고 논에서 쌀을 얻는다” 와 같이 평화로운 자연환경은 오랜동안 태국인들의 마음과 정신을 만들어왔다.
약6천만의 인구와 미국의 택사스주 만큼의 큰 나라이다. 역사적으로 그들의 조상은 피라미드를 세운 고대 이집트, 약속의 땅을 찾아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모세와 동시대였다. 태국 말이 남중국의 방언과 비슷하고 중국과 수천 년의 오랜 교제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중국의 젓가락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은 민족이다. 국어는 수코타이 시대에 람캄행 왕에 의해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람캄행 왕에 의해 돌에 새겨진 자유의 헌장이 최초의 독립국인 수코타이 초기부터 선포되었다. 만일 어떤 형태로든 자유가 침해를 받는다면 람캄행 왕의 자유 헌장은 도움을 주었다. “궁궐의 문에 벨을 걸어두어라, 만일 어떤 시민이 배가 아프거나 마음에 슬픔이 있으면 벨을 울려라, 그러면 왕이 나타나서 도와줄 것이다” 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13세기에 태국은 이미 오늘날과 같은 24 Hour Service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최초의 독립국이 세워지기 전 태국의 서부는 근대 캄보디아의 조상 크메르족이, 중앙평원은 몬 족이 지배하고 있었다. 새로운 땅을 발견한 고대 태국인들은 몬 족과 크메르족을 무력으로 통일하지 않고 그들의 특별한 방법으로 평화적으로 흡수 통일하였다. 태국의 동화정책에 몬족과 크메르족은 나쁜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 태국인들은 동화과정에서 몬 족과 크메르족이 갖고 있었던 고대의 화려한 최고의 문화들을 받아드렸다.
서구의 식민주의와 개신교는 1828년 들어왔고 공산주의는 1973년에 태국에 들어왔다. 태국인들은 흡수정책을 사용하였고 그들 모두를 이겼다. 그곳에는 어떤 종교적, 정치적, 인종적 전쟁이 없었으며 시민전쟁도 없었다. 공산주의는 남동아시아의 많은 나라에 침투하였다. 그때 태국 수상이었던 Pramoj는 중국의 마오쩌둥을 만나 이문제의 해결책을 얻어 태국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을 지배하는 한가지 방법은 백성들이 잘먹고 안전하게 잘사는 행복한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Pramoj는 돌아와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더 신사적으로 함께 나누는 새법을 발표하였다. 태국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을 선량한 태국시민으로 바꿔놓았던 것이다.(Nantachi, 199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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