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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Thailand) : 정치와 군사 본문

선교 태국/펌) 태국은?

태국 (Thailand) : 정치와 군사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2. 10. 6. 12:28

태국 (Thailand) : 정치와 군사

 

 (정치와 군사)  (태국군과 정치:요약본)

 

정치/군사 】



      < 정 치 >

      가. 정 체 : 입헌군주제

      1) 1932.12.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 헌법 채택

         1932.6. 청년장교 및 관료를 중심으로한 민주개혁 구테타 발생, 입헌군주제 도입

      2) 현 헌법은 1997.10. 공포

         96.12. 설치된 헌법기초의회(Constitution Drafting Assembly)에 의한 8개월여 기간동안의 개정작업 끝에 사실상 전면개정된 신헌법 탄생. 선거개혁, 인권강화, 부정부패 방지등을 위한 획기적인 내용 다수 포함

      나. 국가원수 : 국왕

      1) 기 능

        의회, 행정부, 사법부를 통하여 각각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행사

        국군의 최고 통수권자

        내각․상원의원 및 15명 이내의 추밀원(Privy Council) 위원 임명

      2) 현 국왕 : His Majesty King Bhumibol Adulyadej(푸미폰 국왕)

         현 Chakri 왕조 제 9대 왕(라마 9세)

         1946.6. 형인 라마 8세 Ananda 국왕의 변사로 왕위 계승

         1950.5. 대관식 거행

      ※ 왕 비 : Her Majesty Queen Sirikit

        왕세자 : His Royal Highness Crown Maha Vajiralongkorn

         공 주 : Her Royal Highness Crown Princess Maha Chakri Sirindhorn

         1988.7. 태국 사상 최장기 재위 국왕이 되었으며, 1999.6. 즉위 53주년을 맞음.

      다. 정 부

      1) 형 태 : 내각책임제

      2) 내 각

      구 성 : 총리 1명과 35명이하의 각료로 구성(국왕이 임명)

      현 내각은 97.11. Chavalit 내각의 사퇴에 따라 출범한 민주당 중심의 연립내각으로서 Chuan Leekpai 총리 및 부총리 4명, 총리실 장관 6명, 14개부 37명의 장관․부장관 등 총 48명으로 구성(신헌법의 경과규정에 따라 구헌법의 각료 정원 규정 적용)

      3) 총 리  : 임기 4년

        헌법상 국왕이 임명하고 국회의장이 부서하며, 하원의원만이 총리에 임명될수 있음.

      - 단 총리 임명후에는 의원직 사퇴

      신헌법 규정상 총선후 하원 첫 소집후 30일이내에 하원 과반수 찬성으로 선출된 총리 지명자를 국회의장이 국왕에게 임명제청

        헌법상 국회는 총리 임명에 대한 허가표결권은 없으며, 다만 임명후 불신임 표결만 가능

        현 'Chuan' 총리는 97.11.9 제 21대 총리로 취임

      4) 연정구성 정당별 각료직 배분

         민주당(Democrat Party : DP) : 27석(총리포함)

         태국 국민당(Chart Thai Party : CTP) : 9석

         사회 행동당(Social Action Party : SAP) : 5석

         태국 시민당(Prachakorn Thai Party : PTP) : 5석

         연 대 당 (Solidarity Party : SP) : 3석

         자 민 당 (Seritham Party) : 1석

         계 50석(48명의 각료중 Chuan 총리가 국방장관,Supachai 부총리가 상무장관직을 겸임)

      5) 지방행정 : 1개 특별시(방콕), 75개 주(Changwat), 1개 직할시(파타야), 749개 군(District), 7,222개 면(Tambon)

         신헌법에 의해 지방의회 및 지방행정 관리는 인선(1999년부터 실시예상)

          - 임기 4년

         신헌법 경과규정에 따른 현행제도에 의하면 시장은 민선이며 주지사는 내무장관이 임명

      - 군수는 내무장관이 임명하며, 서장은 주민에 의해 선출

      - 지방의회는 직선이며 임기 5년

      라. 국 회

      1) 상 원(Senate)

      가) 구성 및 선출

      신헌법 경과규정상 현행제도에 의하면 하원 의석수 2/3에 해당하는 262명의 상원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신헌법에 따라 차기부터 200명으로 구성

      - 신헌법에 따라 보통선거에 의해 직선 예정

      - 총리 제청으로 국왕이 임명하는 현 상원의원의 대부분은 군인․관리․경찰 출신 고위 인사로 55%가 전․현직 군부 인사

      피선거권

      - 연령 : 40세(정당 인사 제외)

      - 학력 : 학사 이상

      나) 임 기 : 6년

      경과규정에 따라 96.3. 임명된 현 상원의원은 4년의 임기 향유 가능

      다) 의장단

      상원의장(President of the Senate) : Meechai Ruchupan

      ※ 상원의장은 국회 부의장(Vice-President of the National Assembly) 임.

      상원부의장

      - 제 1부의장 : Arsa Meksawan

      - 제 2부의장 : Air Chief Marchal Prapan Dhupatemia

      라) 주요 권한(신헌법 규정)

      하원발의 법률안 및 상정안 심의

      각종 감찰기구 위원 임명권

      각료․정무직 공무원, 헌법 재판소장, 행정 재판소장, 검찰총장, 하원의원의 비행조사요구권

      2) 하 원(House of Representatives)

      가) 구성 및 선출

      신헌법에 따라 500명의 의원으로 구성 예정(현행 제도상으로는 393명의 직선의원으로 구성)

      - 400명은 소선거구제에 의거 보통선거로 직선

      - 100명은 전국구 후보명단에서 선출

      하원의원 선거는 임기종료의 경우 임기 종료일로부터 45일 이내, 의회해산의 경우 해산일로 부터 60일 이내에 실시

      - 동 기간중 임기종료의 경우 상원이 국회를 대표

      피선거권

      - 연령 : 25세(승려 제외)

      - 학력 : 학사이상

      나) 임 기 : 4년

      다) 의장단(96.11. 선출)

      하원의장(Speaker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 Wanmuhamadnoor Matha

      (New Aspiration Party)

      ※ 하원의장은 국회의장(President of the National Assembly) 겸임

      하원부의장

      - 제 1부의장 : Sophon Phetsawang(Chart Pattana Party)

      - 제 2부의장 : Somsak Kiatsuranont(Socicl Action Party)

      라) 주요 권한

      대정부 불신임권

      주요 법률안 발의

      예산 및 재정에 관한 법률안 발의

      마) 정 당

      여 권

      - Democrat Party(DP) : 민주당 . 당수 : Chuan Leekpai 총리 . 하원의석수 : 96.11총선 123, 95.7 총선 86

      * NAP에 이은 제2정당이나 경제 위기에 따른 97.11 Chavalit 내각 사퇴를 계기로 야권세력을 규합 정권 장악

      * 방콕이 세력기반

      - Chart Thai Party(CTP) : 태국국민당. 당수 : Barharn Silpa-Archa (전총리) . 하원의석수 : 96.11총선 39, 95.7 총선 95

      * 95.7-96.9 집권

      * 96.11 총선참패로 야권에 머물러 있다가 민주당과 제휴, 연정에 동참

      * 북부가 세력기반

      - Social Action Party(SAP) : 사회행동당 . 당수 : Montree Pongpanit (전부총리) . 하원의석수 : 96.11총선 20, 95.7 총선 22

      * 정권교체시마다 집권연정에 가담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정당

      * 97.11 Chavalit 진영에서 이탈한 것이 당시 야권의 정권장악에 결정적으로 기여

      - Prachakorn Thai Party(PTP ) : 시민당 . 당수 : Samak Sundaravej (전부총리) . 하원의석수 : 96.11총선 18(연정가담의원수는 12명), 95.7 총선 18

      * 97.11. Chuan 내각구성시 소속의원 13명이 Samak 당수의 지시를 어기고 민주당 진영에가담

      * Samak 당수는 이들의 축당을 모색하고 있어 가담 의원수 감소로인한 연정세력 약화 가능성 상존

      * 방콕이 세력기반으로서 민주당과 경쟁관계

      - Solidarity Party(SP) : 연대당 . 당수 : Chaiyot Sasomsab (총리실 장관) . 하원의석수 : 96.11총선 8, 95.7 총선 8

      * 95.7. 선거시 Uthai 당수(전 상무장관)의 낙선으로 Chaiyot 사무총장이 당수로 취임

      - Seritham Party(SP) : 자민당 . 당수 : Phinij Jurusombat (내무성장관)  . 하원의석수 : 96.11총선 4, 95.7 총선 11

      * Chavalit 집권시 여권에 있었으나 97.11 Chuan 총리측에 가담

      - Palang Dharm Party(PDP) : 진리의 힘당  . 당수 : Chaiwat Sinsuwong  . 하원의석수 : 96.11총선 1, 95.7 총선 1

      * PDP 소속 유일한 하원의원인 Sudarat 의원이 탈당하여 신당 창설을 모색하고 있어 붕괴 가능성 상존

      - Thai Party(TP) : 태국당 . 당수 : Thanabodin Saengsathaporn . 하원의석수 : 96.11총선 1, 95.7 총선 0

       

      야 권

      - New Aspiration Party(NAP) : 신여망당 . 당수 : Chavalit Yongchaiyuch(전총리) . 하원의석수 : 96.11총선 125, 95.7 총선 57

      * 96.11 총선시 CTP내 Sanoh 사무총장 계열의 하원의원 약 60명을 영입, 제1당으로 부상

      * 경제위기로 인한 96.11. Chavalit 총리의 사임후 지지세력규합을 통해 재집권을 시도하였으나, SAP, PTP 등의 이탈로 인해 실패

      * 동북부가 세력기반

      - Chart Pattana Party(CPP) : 국가개발당  . 당수 : Chatichai Choonhavan(전총리) . 하원의석수 : 96.11총선 52, 95.7 총선 53

      * 96.11 총선후 NAP과 전격제휴, 연정내 제2정당으로 군림

      * 97.11 Chavalit 총리 사임후 Chatichai 당수를 총리에 추대코자 하였으나 일부 연정세력의 이탈로 인해 마지막 순간에 좌절

      * 북부․동북부가 세력기반

      - Muan Chon Party(MCP) : 대중당 . 당수 : Chalem Ubumrung(전내무성부장관) . 하원의석수 : 96.11총선 2, 95.7 총선 3

      연정에 가담치 않은 PTP 소속 의원 6


      마. 사 법

      1) 연 혁

      1907년 근대 사법제도 확립

      1932년 사법권 독립이 헌법상 보장

      2) 제 도

      제 1심

      - 중앙(14개소) : 민사재판소, 형사재판소, 간이재판소, 중앙소년재판소, 노동재판소, 조세재판소

      - 지방(119개소) : 지방재판소, 간이재판소, 지방소년재판소

      제 2심(4개소)

      - 중앙 항소 재판소 : 방콕 및 중부지역 관할

      - 제 1지방항소재판소 : 동북지역 관할

      - 제 2지방항소재판소 : 북부지역 관할

      - 제 3지방항소재판소 : 남부지역 관할

      최결심(1개소) : 최고재판소


      < 군 사 >

      가. 개 관

      국군통수권:국왕이 행사

      국군 조직

      - 육.해.공 3군으로 편성

      - 기타 내무부 산하에 국경경비를 위한 경찰보유

      병역제도:의무병역제(2년간 복무)

      국방비:99회계연도 21.6억불(예산 총액의 약 9.4%, GNP의 약2.0%)

      병력수준:총병력 28.3만

      - 육군 : 16 만

      - 해군 : 6.2만(해병포함)

      - 공군 : 4.3만

      ※ 기타 : 1.8만

      나. 군의 특성

      형식적인 3군 통합군 체제

      국왕은 상징적 군통수권자이며,실질적으로는 국방장관, 최고사령관 및 각군사령관이 군사장악

      군의 정치 참여 인정(상원의원의 55%가 전.현직 군부 인사)

      군전용 방송 운용(TV :2, Radio :11)

      다. 군비현황

      태국군 군사력 강화 목표는 최소한의 정규군 유지와 동시에 최신 장비 보유임.

      태국군은 정규군을 96년도까지 15%,2001년까지 10%로 줄여 총 3만명을 감축할 계획

      태국군의 장비는 미군 장비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후 중국 장비를 대량구입하여 다양한 장비를 보유

      현재 보유하고 있는 노후장비의 교체 및 군장비의 현대화 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며, 주변국의 군사력 강화 에 따라 군사력 증강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음.

      88년 미국으로부터 F-16기 12대를 도입하였으며 96년 신예 F-16기 18대를 추가도입

      라. 외국과의 군사협력

      1976년 주태 미군 철수이후 미국과의 군사적 유대가 약화되었으나, 마닐라 협정(SEATO 협약:1954.9.서명) 및 Khoman-Rusk 공동성명 (1962.3)에 의거한 미국의 방위 약속이 유효하므로 유사시에는 군사적 지원이 가능

      - 현재 주태 미군사고문단(Joint United States Military Advisory Group)에 무기판매.합동군사훈련 등의 연락, 조정역할

      - 안보위협 대처의 일환으로 82년부터 미.태 해군연합훈련인 COBRA GOLD훈련을 태국만 일대에서 매년 실시하고 있으며, 86년부터 육.해.공군이 모두 참가하는 연합.합동훈련으로 발전

      아세안은 회원국간의 정치.경제. 문화.사회분야에 있어서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으나. 인접국과의 정면대결 을 회피하기 위해 군사동맹체로 발전될 가능성은 아직 희박하며, 태국.말레이지아간의 공산게릴라 소탕을 위한 합동 작전, 태국. 인니간 해. 공군합동훈련,태국.싱가폴간 해. 공군훈련등과 같이 회원국 상호간의 쌍무적인 군사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음.

      한.태 관계는 한국전 참전후 우호관계 유지로 상호 군사교류 활발

      - 상호 군 주요인사. 국방대학원생.육.공군 참모대생 교류

      마. 군 주요인사

      국방장관 :Chuan Leekpai (총리겸임)

      최고사령관(Supreme Commander of the Armed Forces) : Gen. Monkal Ampornpisit

      육군사령관(Commander-in-Chief of the Army) : Gen. Surayud Chulanont

      해군사령관(Commander-in Chief of the Navy) : Admiral Thira Hao-Charoen

      공군사령관(Commander-in-Cief of the Air Force) : ACM Tananit Niamtan


       

      태국군부 참고사항

      1.군사력 현황(총병력 28.3만)

      가. 육군(16만) ; 4개 지역사령부

         8개보병사단,1개기갑사단,1개 기계화사단,1개 포병사단,1개 방포사단

         탱크 약 469대, 각종포 약 930문, 항공기 약 300대

         예비병력 50만

      나. 해군(6.2만)

         헬기항모 1척, 프리게이트함8척,미사일쾌속정6척,대형초계정 26척, 소해정 11척등

         항공기 55대,헬기항모 1척(97.8월 보유)

         해병 2개 여단(14,000)

         군항(4개):Bangkok,Sattahip,Songkhla, Phang-nga

         예비병력:3만

      다. 공군(4.3만: 전투기193대)

         전투기 3개대대(F-16 AB 22대,F-5E 30대)

         지상공격기 1개중대 (F 5A/B 14대)

         요격기 2개중대(F 5E 34대, F5F 5대)

         7개 게릴라 요격대대, 1개 정찰기부대, 3개 운송기부대 (C-47, 20 대, C-123B, 25대, C-130, 6대 등), 2개 헬기 대대등

      라. 기타: 1.8만

      2.군사비 지출현황

      가. 예산

         

      구 분

      1997

      1998

      1999

      군사비(백만불)

      4,772

      2,250

      2,151

      총예산대비(%)

      12.2

      10.1

      9.4

      GNP 대비(%)

      2.3

      2.1

      2.0

      나. 99년 각군별 예산(비율)

       

      단위 : 백만불

       

      합계

      국방부

      국왕경호국

      최고사

      육 군

      해 군

      공 군

      2,151.3

      (100)

      103.7

      (4.8)

      3.9

      (0.2)

      208.6

      (9.7)

      980.7

      (45.6)

      428.1

      (19.9)

      426.3

      (19.8)

       

      3. 군사전통

      가. 국가형성과 군

      중국 남부에서 유입하여 수코타이 왕조(13-14세기), 아유타야 왕조(14-18세기)를 거쳐 방콕의 현 왕조(18세기말)성립에 이르기까지 원주민 및 주변 경쟁세력(버마.크메르)과의 끊임없는 투쟁속에 국가 형성

      현 왕조도 200여년전 아유타야 왕조를 멸망시킨 미얀마침공군을 격퇴하고 국권을 회복한 장군 가문

      나. 전통적 통치방식

        중앙의 강력한 군사역을 기반으로 임명 또는 자생의 군소 봉주들로부터 충성을 확보

        군사력과 왕실 외교의 부단한 통합노력

      다. 성공적 근대화 과정

        왕실의 적극적인 주도에 의한 서구문물 도입

        군부에 의한 체제 근대화(1932년 혁명:입헌군주제 확립)

        외교적 성공에의한 독립 보존

      라. 1932년 전제군주국에서 입헌군주국으로 탈바꿈한 후에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왕실과 군부는 국가통합 및 국가수호의 광범위한 상징으로서 강력한 권위를 유지

        정당 및 행정부는 민주화.근대화의 상징 및 도구로서 발전, 강화되고 있으나 군부의 직접 개입과 영향력 행사로 인해 반복적으로 해체, 재편성 되는 상황

        91.2 군부쿠테타에 대한 1992.5월 군부의 민주시위 군중 진압시 유혈사태 발생, 대규모 민주항쟁으로 악화, 국왕중재로 민선총리 취임. 이로인해 군부의 대정치적 영향력은 감소되었으나 군부는 태국사회의 전통 엘리트 집단임.

      바. 사관학교 제도: 7년

        예비사관학교:2년(고2.3학년 과정)

        사관학교: 5년(예비사관학교 졸업후 육.해.공.경찰사관학교로 분리교육)

        현재 사관학교 12기생(65년도 임관)이 군부내 핵심세력

      4. 군의 국내 영향력 행사 장치

      가 .국내 치안작전사령부(ISOC)

      육군사령부의 조직에 ISOC의 명칭만 추가한 조직

      안보관련 제반분야에 대해 지방경찰 행정조직은 자체 지휘계통 외에 육군에 이중보고 제도화

      나. 수도권 치안사령부

      육군사령관은 자동적으로 수도권 치안사령관을 겸하여 수도권 일원의 육.해.공.경찰의 모든 전투부대를 지휘할 수 있음.

      다. 국내 최대의 매스콤 장악

      4대 주요 TV방송국중 시청율이 높은 2개 방송국을 육군이 소유 또는 통제

      전국 136개의 라디오방송국과 대중선전 매체 장악

      99.1월 태국 육군은 필수 군 소요(약 50개) 외에는 국가에 반납 추진

      라. 지역개발 사업조직 확대

      4개 개발사단(공병)을 창설, 농촌지역 도로건설, 대민지원등 적극적 선무활동(국내 최대 대민지원 기구)

      개발의용대.마을단위 자위대등을 전국적 조직으로하여 자위. 치안. 보건. 농사. 교육등 주민관리

      5. 한국전 참전부대 및 참전 협회

      가. 참전부대

      보병2사단 지연대로 현재 왕비 근위부대 임무겸임.(촌부리 위치)

      부대내 한국전 참전 기념탑과 기념 박물관 있음.

      최초 태권도 보금 (86년)

      태국군의 한국전 파병일인 10월22일에 참전기념행사 매년 실시(왕실후원)

      태국군의 한국전 파병일인 10월22일에 참전기염행사 매년 실시(왕실후원)

      나. 참전협회

      1952년 설립(왕실후원단체), 참전용사유대강화, 유자녀지원

      1998년 참전 유자녀 장학재단 설립(기금 6만불), 매년 장학금 지급(100명)

      참전용사의 재방한사업 지속 실시


       

       

       

      태국군과 정치

       

      김홍구 지음 <요약:박경숙  제출일:2003년2월26일>


      제1장 서론

        연구의 방법과 내용 : 본 연구는 문헌 연구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태국 현지에서 관계 정보 제보자와의 면접을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본 연구의 내용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면 본론은 네 개의 장으로 나뉘어진다.

        제2장은 태국군부 정치개입의 역사적 과정을 기술하였다. 제3장은 태국군부 정치개입의 유인요인-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민간조직의 취약성, 민간정부 정통성의 약화- 을 분석했다. 제4장은 태국 군부 정치개입의 추진요인- 군부의 이익적 동기-를 분석했다. 제5장은 태국군부 정치개입의 배후요인으로서 미국의 역할과 왕의 정치적 역할을 분석했다.

        본 연구의 시기상 범위는 1932년부터 1991년까지로 한다. 그리고 이 기간중 발생한 성공한 10차례의 쿠테타 중 32년, 47년, 57년, 71년, 76년 그리고 91년 여섯 차례의 쿠데타가 주요 연구대상이 된다. 연구대상에 있는 여섯 차례의 쿠데타는 태국군부의 정치개입 원인을 포괄적으로 규명해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여섯 차례의 성공 쿠데타 이외의 네 차례 성공 쿠데타 -33년, 51년, 58년, 77년 쿠데타- 대부분은 단순히 군사정권의 통치체제 강화를 목적으로 한 제한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에 반해 여섯 차례의 성공 쿠데타 중 32년 쿠데타는 절대군주제 전복에 목적을 두었고, 나머지 쿠데타의 경우 순수한 문민정권 내지는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부의 전복에 목적을 둠으로써 악순환의 태국 정치체제를 포괄적이고, 의미있게 이해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장 태국 군부 정치개입의 역사적 과정

        1932년 태국 군부가 최초로 쿠데타에 성공하여 정치에 개입한 이래 현재까지 태국 군부의 정치개입은 4기 - 1932년에서 44년, 1945년에서 57년, 1957년에서 73년, 1973년 이후 - 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주로 정권을 담당한 군부의 지도적 파벌 내지는 인물 등에 따른 것이다.


        1. 인민당내의 갈등과 제 1차 피분정권 : 1932-44년

        태국에는 1932년 6월 24일 최초로 성공한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32년 쿠데타는 군과 중간계급 민간관료들을 각각 대표하는 파혼, 피분 그리고 문민파의 지도자 쁘리디가 결정한 인민당이 주도했으며, 절대군주제를 전복하고,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목적으로 했다.

        인민당은 32년 12월10일 태국 최초의 헌법을 기초하여 공포했는데 인민 당원 과반수가 의회의원으로 임명됨으로써 본질적으로 비민주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인민당의 의회 지배에도 불구하고 인민당 내부의 파쟁과 왕당파로부터의 도전으로 인해 의회체제는 안정되지를 못했다.

        쁘리디가 입안한 사회주의적 국가경제계획안을 둘러싼 의회내 파쟁으로 인민당 내부의 수구파와 개혁파간의 분열이 생기게 되었다. 개혁파 소장장교 피분은 33년 6월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활동을 재개시켰으며 구성된 내각에는 파혼이 수상직에 오르고 수구파는 제거되었다.

        수구파와 왕당파가 제거된 후 피분의 지위는 급상승하였다. 피분은 1938년 수상직에 올랐다. 1938년부터 1944년까지 지속된 피분의 군사정원은 강력한 민족주의, 군국주의, 영토확장주의를 추구하며 파시스트화되어 갔으며 2차 대전중에는 군국주의 일본과 공수동맹을 맺고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선언했다.

        이후 전쟁이 연합국에 유리하게 전개되어가자 1944년 7월 피분 정권은 물러나고 대신 쁘리디의 지지를 받는 쿠엉의 중도파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2. 1947년 쿠데타와 제2차 피분정권 : 1945-57년

        전후 군은 정치의 장에서 배제되고 문민정부가 탄생했으나, 문민정부는 전후의 경제사정 악화와 사회혼란에 직면해야 했다. 쁘리디 정부는 양원에서 다수석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정을 찾지 못햇다. 44-46년 사이의 급등했던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사정 악화, 2차대전 후 예편군인 문제, 정부 관료와 여당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정부의 정통성은 약화되어 갔다. 특히 46년 6월 9일 라마 8세 아난타마히돈왕의 의문의 변사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쁘리디 정부의 정통성은 더욱 약화되어 갔으며 정국의 긴장을 완화시킬 목적으로 쁘리디가 스스로 사임한 후 탐롱정부가 들어섰다.

        피분사임후 집단이익과 명예에 큰 손실을 당하고 있던 군은 문민세력에 불만을 갖게 되었고 46년에 제정된 군의 정치참여를 금지시키는 헌법이 신설됨으로써 불만은 더욱 증대되어 47년11월 핀 장군이 주도하는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48년에 피분이 재차 수상직에 올랐지만 전쟁 전과 같이 안정되지 못해서 51년까지 세차례의 불발쿠데타에 시달려야 했다.

        군부에 대항한 주요 민간세력은 민주당이었다. 46년 이후 군부통치에 비판적 자세를 취해 온 민주당이 51년 해군 쿠데타의 강경진압을 비난하면서 정국이 악화되자 51년 피분은 쿠데타를 일으켜 의원 과반수를 임명직으로 하는 32년 헌법을 복원시켰다.

        51년-57년까지의 태국 정치는 파오와 싸릿, 그리고 그들을 분할 통치함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했던 피분, 3인이 주도했다.

        싸릿과 파오의 반목은 심화되어 갔으며 결국 싸릿은 57년 9월 쿠데타를 일으켜 피분 정권을 붕괴시켰다.

       

        3. 1957년 쿠데타와 싸릿, 타넘-쁘라팟 체제 : 1957-73년

        싸릿의 57년 쿠데타는 태국 군부 통치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58-63년까지의 싸릿 통치와 이후 63-68년까지의 그의 후계자 타넘 통치는 이전의 군부 통치와 여러면에서 차이점을 갖는다. 첫째, 싸릿은 쿠데타 후 선거를 치르지 않고 임시 헌법에 의해 통치했으며, 특히 임시헌법 17조에 따라 사법권까지 자의적으로 행사했다. 둘째, 32년 이래 도입된 의회체제는 전원이 임명직 의원으로 구성되는 반의회체제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셋째, 47-57년 기간중 어느 정도 허용되었던 국민의 정치참여가 완전히 금지되었다.

        싸릿은 57년 쿠데타 후 바로 절대 권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폿과도문민정부를 내세워 57년 12월 총선을 치르었으며, 총선후 타넘을 수상에 임명했다.

        싸릿 정권의 통치방식은 전제군주적 행동양식을 자의로 행하는 전통적, 토착적 측면을 가지면서도 개발에 의한 근대화를 도모하는 개명적 측면을 동시에 갖고, 정권의 정통성 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강력한 행정력에 의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근대화 정책 추진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정치참여는 금지되었으며, 참여적 정치제도는 개발되지 않았다.

        선거 후 군부는 여전히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개의 파벌로 나뉘어짐으로써 어느 파벌도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정치적 주도권은 타넘, 쁘라팟, 쁘라쓷과 끄릿등이 공유하게 되었다. 한편 정당들은 과거와 달리 비교적 행정부 통제에 효과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학생들은 수적으로 훨씬 증가했고, 그들의 조직은 군부에 대한 강력한 저항세력이 되었다.

        민간 정치인과 학생 등은 71년 쿠데타를 군부 지도자들의 개인적 이해에 목적을 둔 불법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타넘의 아들이며 쁘라팟의 사위인 나롱의 정치적 지위부상에 불만을 가졌는데, 나롱은 쿠데타 후 신설된 국가행정위원회의 사무차장이 되어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몇 개의 압력집단들은 점차 정치화되어 가고 타넘, 쁘라팟, 나롱의 독재통치에 반발하였다. 73년 초 태국전국학생센타는 영구헌법 제정을 요구하며 전단을 뿌리다 구속된 람캄행 대학교 학생들의 석방과 영구헌법 제정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10월14일 학생과 경찰간의 충돌을 시발로 시위는 방콕 전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군은 진압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혼란 와중에서 왕은 타넘, 쁘라팟, 나롱의 해외망명을 권유했으며, 육군사령관이었던 끄릿 장군의 타넘 체제 편입 거부로 3인은 망명하고 타넘-쁘라팟 체제는 붕괴되었다.


        4. 1973년 ‘10월14일 사태’와 개방정치 : 1973년 현재  

        1) 1973년 ‘10월 14일 사태’와 1976년 쿠데타

        1973년 ‘10월 14일 사태’ 이후 태국은 민주정치가 활성화되었다. 73-76년 민주화 기간 중 태국의 군부는 정치의 장에서 배제되었다. 73년의 입법의회는 왕이 임명한 국민회의 의원 2,436명 중에서 선출되었는데, 총 299명의 입법의회 의원중 군 출신은 25명뿐이었다.

        73년 ‘10월 14일 사태’ 이후 태국에는 각종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압력단체의 정치참여가 활발했다. 한편 73년 사태이후 활성화된 태국의 정당정치는 태국 고유의 다당제 체제에서 기인한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다. 74년 헌법에 의거하여 치르어진 75년 1월 선거에는 42개 정당이 선거에 참여했으며 제1당이 된 쎄니의 민주당이 주도하는 연립정권은 하원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해 한 달 만에 붕괴엇다. 이후 큭릿이 이끈 사회행동당 주도의 연립정권이 실질적으로 민주화시대를 이끌게 되었으나 노동자 소요와 인플레이션 등으로 야기된 국내의 정치적 불안정과 주변국가의 공산화와 관련된 외부적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또한 76년 4월 선거로 탄생한 민주당의 쎄니 정권은 76년 8월,9월에 귀국한 쁘라팟과 타넘으로 인해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들 귀국은 학생들을 자극시켰고, 반 타넘 포스터를 붙이던 시위대 2명이 살해된 채로 발견됨으로써 시위가 탐마싿대학에서 벌어졌다. 76년 우익단체 나와폰, 끄라팅댕, 빌리지 스카우트 등과 합동으로 학생시위대를 무력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쿠데타후 쎄니 정건에서 국방부장관을 지냈던 쌍앗장군이 주도하는 국가행정개혁위원회가 설립되고 타님이 수사에 임명되었다. 타닌은 군부가 기대했던 것만큼 융통성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 정책은 정치적 반대세력에게 지나치게 억압적이었으며 인도지나 3국과의 외교관계를 악화시켰다. 결국 타닌 정책은 과격한 극우 반동적인 성격을 띰으로 국민들의 심각한 정권 이반현상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군부는 1977년 10월 쿠데타를 일으켜 타닌 정권을 실각시켰으며 끄리양싹을 수상에 임명했다.

        끄리양싹의 새 정권은 타닌 정권 기간둥의 반체제인사들에 대해 보다 온건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끄리양싹 정권은 학생과 반체제인사들에 대하여 사면령을 내리고 언론검열을 완화시켰으며, 인도지나 3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1978년에는 새 헌법을 제정했다. 1979년에 총선이 실시되었으며, 총선 결과 끄리양싹은 재차 수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79년 말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중공의 베트남 침공에 고무된 태국 공산주의자들의 준동과 국내의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엿고 79년 유가인상과 인플레이션으로 80년 2월에 사임하게 되었다.

        2) 쁘렘 정권과 민주화

        끄리양싹이 물러난 후 육군 사령관 겸 국방장관인 쁘렘이 수상직에 올랐다. 쁘렘 정권은 81년, 85년의 두 차례의 불발쿠데타를 겪는 등 군부로부터의 도전을 받으면서도 다섯 차례의 내각개편과 세 차례의 의회해산을 통해 8년 동안 문민통치와 민주화의 기반을 착실히 구축해 나갔으며, 정치적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쁘렘 정권은 81년 정당법을 제정하여 정당정치의 기틀을 마련하고 경제의 안정적 성장기조를 유지함으로써 민주화의 기반을 구축해 나 갔으며, 민선하원의원으로 선출되지 않은 수상임명반대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88년 4월 야당의 전내각 불신임안 제출과 여당인 민주당내 비주류그룹의 개각요구와 저작권법 반대에 직면해 의회를 해산하였다.

        3) 찻차이 문민정권의 등장과 1991년 쿠데타

        의회해산 후 7월 24일 실시된 총선에서는 찻타이당이 제 1당이 되고 민선의원인 찻타이당 당수 찻차이가 수상에 임명되었다. 정권기반을 주로 기업가 출신이 다수로 이루는 찻타이당을 비롯한 정당에 둔 찻차이 정권은 취임 후 군부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군부는 91년 2월 쿠데타를 일으켜 찻차이 정권을 붕괴시켰다. 쿠데타의 명분은 정부의 부정부패, 정치인의 관료영역개입, 의회독재, 군부분열, 왕정전복 음모사건 수사 왜곡 등이었다.

        쿠데타 후 최고사령관 쑨턴과 육군사령관 쑤찐다를 각각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하는 국가평화유지위원회는 입법의회를 구성하고 1992년 3월 총선을 실시하였다. 쑤찐다가 수상에 임명되었으마 그의 수상임명은 또 다른 쿠데타로 볼 수 있는 사건이였다. 그는 91년 쿠데타 후 정치 참여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수상임명과 정치개입 약속 번의에 반대하여 전직의원 찰랏과 전직 방콕시장 짬렁을 선두로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발생했다. 짬렁 주도의 시위는 소위 5월사태라 일컫게 되엇고, 대규모 반정부시위에는 중산층이 대거 참여하게 되엇다. 5월 사태는 5월 20일 왕이 쑤찐다와 짬렁을 소환하여 타협할 것을 종용함으로써 일단락되었으며, 쑤찐다는 5월 24일 수상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선거 후 민주당의 추언 수상이 이끄는 반군부 연립내각이 구성되었다. 95년 7월 2일 실시된 선거 결과 찻타이당이 제1당이 되었으며 팔랑탐당, 새희망당, 사회행동당, 태국시민당, 대중당 등과 함께 연립내각을 구성하여 제2기 문민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제3장 태국군부 정치개입의 유인요인


        1. 민간조직의 취약성

        민간조직이 취약한 사회에서 군의 민간영역 침투는 용이하게 된다. 헌팅턴은 변동사회의 군부 정치개입을 군조직의 내부적인 요인이 아닌 군부 외재적 상황, 즉 그 사회의 정치제도적 구조의 취약성으로 설명하고 잇는데 이런 사회에서 군은 다른 사회집단들과 마찬가지로 이익의 표출을 위해 자신의 방식대로 직접적 행동을 하게 되며 이때 군사적 방법은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군사적 방법이 군의 정치적개입에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고 해도 강력하고 조직화된 민간조직이 존재할 때 군의 정치개입은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 태국의 경우 군에 대적할 수 있는 민간조직이 취약하다. 민간조직 중 가장 강력하게 조직화되어 있는 관료체제는 군부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중요한 민간정치조직인 정당과 의회는 빈번한 군부 쿠데타와 관료체제의 정치체제 지배로 인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며, 기타의 정치적 압력단체 역할을 할 수 있는 상인, 사업가, 노동자, 농민, 학생집단 등의 역할도 미미하다. 따라서 태국에는 군만이 유일한 강력한 조직이 됨으로써 군이 정치개입을 결의하는 때에 누구도 거부할 수 없었고, 군부는 국력행사의 수단으로 국가의사에 대해서만 행동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정부를 지배하거나 정치에 개입하는 등 과도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1) 관료체제

        근대 태국의 정치체제는 관료체제가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관료주의 정체를 특징으로 한다. 또한 태국의 군부는 민간관료체제를 지배하고 정치에 개입함으로써 태국 정체는 집정주의적 정치체제로 특징지어지기도 한다.

        태국의 관료체제는 32년 쿠데타 이후 그 이전과 상이한 성격을 띠게되는데, 즉 절대군주제하의 관료체제에서 관료의 역할은 왕의 절대권력 행사를 단순히 수행하는 것이었으며, 관료체제는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32년 쿠데타 이후 절대왕정이 붕괴되고 민간 정치조직이 취약한 상황 속에서 관료체제는 여타 기구의 방해없이 정치체제를 지배하게 되었다.

      릭스는 1932-63년 사이(1대-29대 내각)의 태국 관료의 직업배경을 연구한 결과, 이 기간중 총 29개 내각각료 237명 중 민간관료가 100명, 군 출신 84명, 비관료 38명, 직업 미상이 15명을 차지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태국의 의회 역시 관료체제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관료는 임명 의원직을 통해 의회를 지배한다. 태국 관료체제의 내각과 의회 지배에서 특징적인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군의 두드러진 진출현상이다. 군부의 관료체제 지배현상은 결과적으로 민간 관료체제의 자율성을 제약하게 되었다. 한편 태국의 관료체제는 32년 이후 정치체제를 지배해 오면서 양적팽창을 거듭함과 동시에 내부 조직상의 문제점을 안게 되었는데 태국 관료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태국 관료체제는 파벌주의가 만연하며 파벌의 근복적인 속성은 관료체제의 응집력을 약화시키게 된다.

        둘째, 태국 관료체제는 사인주의(personalism)를 특징으로 한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정치적 리더십은 개인적 성격을 띠었다. 이런 체제에서 문제 해결은 특정 문제에 관련된 관리 개인에게 의존케 되며 관리들의 개인적 이해와 연합은 정책결정의 내용과 범위를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파벌주의와 사인주의는 편애성과 인척등용을 유도하게 됨으로 태국 관료체제의 부패의 주요 원인이 된다.

        셋째, 태국 관료체제는 각 부서간의 업무중복 현상과 정책의 하향식 결정을 특징으로 한다. 태국 관료들은 새로운 문제를 해결키 위해 위원회를 결성하기를 좋아한다. 이같ㅇ든 많은 새로운 위원회가 신설됨으로써 행정의 중복현상이 초래된다.

        2) 정당

        태국에는 군부 쿠데타가 빈번히 발생하고 정치체제가 관료체제에 종속됨으로써 정당이 제대로 정치적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태국에 정당이 최초로 출현한 것은 군부가 정치의 장에서 일시적으로 배제되었던 2차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였다.

        태국의 정당들은 그 취약성으로 인해 군부세력에 대항할 수 없었는데 태국 정당의 취약성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태국의 정당들은 잦은 군부 쿠데타로 인해 정당활동이 자주 단절되었다.

        둘째, 태국의 정당들은 대중적 지지의 확보에 실패하고 있다. 80년대 이전까지 태국의 선거에 미치는 정당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태국 정당은 파벌주의가 만연하여 당의 규율이 부재하고 응집력이 없다. 태국 정당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개인 이해를 좇아 구성된 여러 개의 파벌로 구성되어 있어서 개인이나 파벌집단의 이익이 보장되지 못할 때 당명에 쉽게 불복하여 응집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넷째, 태국 정당은 조직적으로 취약하다.

        다섯째, 근래 들어 태국의 정당들은 점차 지역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찻타이당은 중부 태국을 기반으로 하며, 찻팟타나당은 북부, 새희망당은 동북부, 민주당은 남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정당의 지역화 경향은 연립정부내의 정책적 갈등과 행정의 비효율성을 야기시키게 될 뿐 아니라 전국적인 강력한 정당체제의 발전을 저해함으로써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시킬 수 있다.

        3) 의회

        태국의 의회의 취약성은 잦은 쿠데타로 인한 의회 활동의 단절과 임명직 의원을 통한 관료체제의 의회지배에서 그 근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932년 쿠데타 후 태국 최초의 임시헌법에 의해 구성된 의회는 전원이 쿠데타 주체인 인민당에서 임명된 임명직 의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군,민간 관료로 충원됨으로써 태국 최초의 의회는 관료체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에도 임명직 의원제도는 의회내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관료체제 특히 군부세력에 의해 존속됨으로써 태국에는 국민 대의적 성격을 띤 정치기구로서의 의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관료체제에 종속되었다.

        4) 압력단체

        태국에는 초관료적 세력으로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압력단체가 취약하며 이들은 관료체제의 영향력하에 놓임으로써 정치적 역할을 제한받고 있다.

        (1) 상인, 사업가

        이 집단은 초관료적 집단 중 가장 정치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경제체제를 장악하고, 경제력을 수단으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는 관료체제와의 후견-의존관계의 틀 속에서 통제를 받는 제한적인 것이다.

        태국의 사회, 경제적 구조가 변화함에 따라 태국인의 상인, 사업가들의 정치적 역할은 꾸준히 증가했다. 그들은 의회와 내각에 참여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들이 의회나 내각 등에 참여함으로써 정치적 역할을 확대한 것은 그들의 개인이익을 위한 정치참여였기 때문에 공식적 압력단체로서 상인, 사업가집단의 이익을 대변할 수 없었다.

        (2) 노동자

        태국의 노동단체는 집권자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설립되고 관료체제에 종속됨으로써 조직의 영속성과 자율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태국 중앙노조는 쁘리디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태국노동자협회 등은 피분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설립되고 후원을 받은 단체였다. 또 태국의 노동운동은 법적 제재를 받음으로써 조직화되기가 힘들었다. 태국 노동자 집단은 응집력이 부족하고 파벌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3) 농민

        태국의 농민은 태국 사회에서 가장 규묘가 큰 초관료 세력이다. 그러나 정치적 측면은 미미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태국의 농민단체는 주로 관료체제 주도로 조직되었는데 사회의 대종을 이루는 농민과 농업문제는 국가의 안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정부의 관심에서 유래되었다.

        태국 농민조직은 관료체제에 종속됨으로써 자율성을 확보치 못했고, 정치, 문화적 맥락에서 태국인의 집단의식의 결여가 조직형성을 방해했다. 농촌사회의 지리적 여건-분산되어 거주- 이 또 한 이유가 된다. 또 농업분야는 여타 분야와 비교해 가장 뒤떨어지는 경제환경으로 인해 조직형성에 필요한 자원이 부족하다.

        (4) 학생

        태국 학생의 정치적 역할은 크다고 볼 수 없으나 특정시기에 있어서 학생들의 정치적 역할은 특별한 것이었다.

        태국에서 정치적 압력단체로서의 학생의 역할은 사실상 1932년 쿠데타 이후 계속되어 왔으나 그다지 중요성은 갖지 못했다. 

        학생운동이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한 것은 57년 부정선거 규탄시위때 였다. 그후 싸릿의 쿠데타로 학생운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학생운동이 다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하게 되는 시기는 1969-76년 기간중이다. 이 시기에 학생운동의 전환점이 되는 것은 전국태국학생센터의 창설이었다.

        초관료적 정치세력 이외에도 오늘날 가장 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시민단체로서 비정부기구(NGO)를 꼽을 수 있다. 이 기구는 처음에는 비정치성을 유지하였으나 ‘1973년 10월 14일사태’ 와 76년 10월의 쿠데타를 거치면서 풀뿌리 민주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 민간정부의 정통성 약화

        국민 대다수가 정부가 통치할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고 믿을 때 그 정부는 정통성을 갖는다. 민간정부가 정통성이 부재하거나 약화되었을 때 군의 정치개입은 용이해질 수 있다.

        태국의 민간정부의 정통성은 취약하다고 볼 수 있다. 32년 쿠데타후 헌법, 정당, 선출의회 등이 도입되었으나 잦은 쿠데타로 제도화되지 못했다. 또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치에 무관심함으로써 민간정부에 대한 애착도 그리 크지 않았다.

        태국의 민간정부의 정통성 약화는 일차적으로 민간정치조직의 취약성이나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주원인이 되며, 기타 정치. 사회적 혼란, 경제적 실패 등의 요인은 부차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1) 정치. 사회적 혼란

        1932년 쿠데타 당시의 정치. 사회적 혼란은 크지 않았다. 이전인 1911년 일단의 소장층 군 주도의 불발쿠데타가 발생했으나 정치.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킬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 후 태국에는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엘리트 계층의 자각현상이 나타나 절대군주제에 대한 존경심이 약화되고 절대군주제의 정통성은 더욱 약화되어 갔다.

        1947년 쿠데타 당시는 무질서와 폭력이 난무하고 부정부패 등의 불법적 행동이 자행됨으로써 정치.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다. 수도와 지방에서 강도, 약탈 행위 등이 자행되어 치안부재 상태를 초래했는데 특히 사태가 악회된 곳은 중부와 남부지방이었다.

        공무원과 국회위원 등의 부정부패의 만연도 정부 정통성 약화의 요인이 되었다.

        1957년 쿠데타는 정부의 부정투표로 야기된 불법행위가 정부 정통성을 약화시킨 주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71년, 1976년 쿠데타에 즈음해서 4,000여명의 학생들이 탐마싿대학에서 데모를 벌였는데, 우익단체, 군, 경찰의 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76년 쿠데타 이전의 쎄니 정권은 선거로 선출된 정통성이 있는 정권이었으나 일부 급진주의자들의 과격한 정치참여로 야기된 혼란 때문에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정통성이 약화되었다.

        1991년 쿠데타를 초래했던 사건은 부정부패 문제였다.

        2) 경제적 실패

        32년 이전  태국의 경제는 세계적 대공황의 영향을 받았고, 라마 7세는 재정적자 타개방안으로 정부지출을 감소하고 새로운 세제를 도입하는 등 경제적 조치를 단행했지만 실패했다.

        1947년 쿠데타 당시의 경제적 문제는 전후 인플레이션과 쌀 품귀현상으로 발생했는데 문민정부는 이런 문제에 잘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정부 정통성이 약화되었다.

        57년, 71년 그리고 76년 당시의 경제사정은 32년이나 47년과 같이 심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정부의 경제정책은 실패하였다.

        91년 쿠데타는 여타의 다섯 개 쿠데타 당시와 비교해 경제사정은 극히 호조였으며 경제적 실패가 정부의 정통성을 훼손시킨 주 요인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고도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경제정책 수행과정에서의 이권개입으로 인한 경제비리사건은 경제성장에 큰 저해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비리사건에 대한 반정부 시위가 90월 10월 람캄행대학에서 개최되었을 때 한 학생이 분신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정부의 정통성은 훼손되었다.


      제4장 태국군부 정치개입의 추진요인


        1. 군부의 강점

        군부의 강점을 만드는 것은 군부의 내재적 특징이다.

        태국군의 경우 군의 직업주의 수준은 높으나 민간조직이 취약하여 군이 민간역할을 대행한다고 볼 수 있으며 군부의 강점은 이러한 점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어 준다고 볼 수 있다. 태국 군부의 강점을 만드는 군부 내재적 특징은 위계질서와 응집력, 조직력, 규모, 예산, 부 그리고 매스컴의 소유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군부 내재적 특징은 민간조직이 갖지 못하는 군부의 정치적 자원이 됨으로써 군의 민간영역 침투를 용이하게 만들어 준다.

        1) 태국군 직업주의의 발달

        근대 태국군의 장교단은 전통적 관료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들의 역사적 기원은 민간관료와 같다. 예로부터 태국의 통치형태는 적으로부터 공격에 대비해 인력통제를 수월히 하기 위해 군대식으로 조직되었다.

        1920년대에 군사와 민사간의 기능상의 구별이 뚜렷해지면서 군사는 특수화를 통하여 전문성을 띠고 국가에 대한 책임감, 집단의식과 이데올로기 등을 갖추고 직업주의화되었으며 독립된 기구로 되었다.

        2차대전의 패전과정에서 문민정권이 들어선 이래 일시적으로 정치의 장에서 배제되었던 군부는 47년 쿠데타를 성공시켜 본격적인 정치개입을 통해 태국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다.

        2) 태국군부의 강점

        (1) 위계질서와 응집력

        태국 육군조직은 명확한 위계질서를 특징으로 하며, 특히 태국 사회조직의 전통양식과 부합되고 있다. 코넬대학 연구팀은 태국의 한 마을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태국의 사회조직은 주종관계의 틀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태국군의 응집력은 군의 연대의식과 단체정신, 애국심을 통해 만들어진 내집단심리로 형성되며 각종 군사학교 졸업자의 동기의식 등으로 더욱 공고화된다.

        (2) 조직력

        태국 군조직은 여타 민간조직과는 다른 복잡성을 내포함으로써 군부의 강점을 보강한다.

        태국군의 중추를 이루고 쿠데타를 주도해 온 육군은 적국적으로 4군으로 나뉜다. 4군 중 특히 방콕을 중심으로 주둔하고 있는 1군은 폭력진압, 쿠데타 거사주도 또는 쿠데타 기도진압에 등에 있어서 정치적 중요성을 갖는다. 싸릿, 타넘, 쁘라팟 등이 1군부대의 요직을 항상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1군의 중요성을 암시해 주는 예로 볼 수 있다.

        정규군 조직 외에 비정규군 조직으로 중요한 조직은 국내안보작전 사령부다. 법적으로 이 기구는 군조직의 계선상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수상 직속기구로 설치되어 있으나 이 기구의 장은 육군사령관이고 군, 경찰, 민간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군고위직이 이 기구의 중요 직책을 겸직함으로써 사실상 군조직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3) 규모

        태국군은 여타 국가의 군가 비교해 상대적으로 큰 규모이며 육군 위주로 편성됨으로써 정치개입이 빈번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태국군, 특히 육군이 보유하고 있는 무력수단의 통제권 장악은 군부에 직접적인 정치적 잠재력을 부여함은 물론 다른 민간조직이 갖지 못하는 정치적 자원이 되었다.

        태국군의 규모는 33년 20,800명으로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0.16%였는데 47년 쿠데타로 피분 군부정권이 재집권한 후 미국의 군사원조로 인해 꾸준히 증가하여 58년에는 0,35%, 61년에는 0.5%, 86년에는 0.48%, 91년에는 총인구 대비 0.48%를 차지하고 있다.

        (4) 예산

        태국군은 높은 예산을 할당받음으로써 조직상의 강점을 보강하고 있다.

        1939-44년 피분 통치기의 국방비는 평균 33%이다. 그러나 1945-48년 문민통치기의 군사비 지출은 평균 20.5%의 낮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48년 이후 군사비 지출은 그 이전과 비교해 크게 줄어들고 있는데 그 이유는 미국의 군사원조 때문이며 51년부터 71년까지 미국의 태국에 대한 총군사원조는 동기간중 태국 총국방예산의 55%에 달했다.

        (5) 부와 매스컴 소유

        태국군은 싸릿 때 설립된 군인은행을 소유하고 있으며 각종 중국인 소유 기업 이사회에 참여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다. 이같은 부의 축적을 통해 군 지도자들은 그의 지지자들을 규합하고 정치적 파벌을 형성하며 정치적 강점을 보강하게 된다.

        또한 태국군은 TV와 라디오방송국을 소유하고 있으며 TV와 라디오는 쿠데타 거사시 또는 군의 정책을 홍보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2. 군부의 이익적 동기 

        군부의 정치개입을 이익적 동기에서 파악코자 하는 논의들은 국가적 차원과 집단적 차원에 의한 논의로 분류된다.

        국가적 차원으로는, 군대는 한 나라의 독립을 상징하는 역할을 하며 국가방위라는 독특한 과업으로부터 유래되어 조직 전체에 걸쳐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로 무장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이 복합됨으로써 하나의 신념, 즉 위기시에는 군대가 정치에 간섭해서라도 구국에 앞장서야 한다는 의무감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파이너는 군부의 집단적 자기이익을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자율성은 훈련, 승진, 장교임면과 군사전략적 측면등으로 구성되는데 이러한 자율성은 민간의 간섭을 배제케 된다.

        태국에 있어서의 군부의 이익적 동기는 세가지- 국가적, 집단적, 파벌적 이익동기- 로 나눌 수 있다.

        1)국가적 이익동기

        태국군 정치개입의 대부분은 주로 군부의 집단적이나 파벌적 이익 동기에 의한 것이다. 분석대상에 있는 여섯 개 쿠데타 중 47년, 57년, 71년, 76년, 91년 쿠데타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32년 쿠데타의 경우는 국가적 이익동기에서 통치체제의 변화를 갈망하는 이념적 색채가 뚜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2년 쿠데타는 수세기간의 절대왕정을 종식시키고 서구식 민주주의 도입을 목적으로 했다.

        2) 집단적 이익과 파벌적 이익동기

        1947년 쿠데타는 2차대전 후의 예편군 문제, 자유타이군과 기존 군부간의 마찰로 인한 군부의 집단적 이익 침해와 46년 헌법개정으로 인한 군의 정치적 파벌이익 침해가 주된 이유였다.

        1957년 쿠데타는 군내부 파벌간의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파벌투쟁과 군과 경찰력간의 알력으로 빚어진 군의 배타성 침해가 주요 요인이 되었다. 특히 배타성 침해의 측면에서 47년 쿠데타의 경우 군의 배타성을 침해한 것이 자유타이군인 데 비해 57년 쿠데타에서는 경찰력이 군의 배타성을 침해하였다.

        1971년 쿠데타는 47년, 57년 쿠데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군의 자율성이나 배타성의 침해를 덜 받았다고 볼 수 있는데, 군에 대한 도전세력은 다름 아닌 의회였다. 또한 의회는 군의 정치적 파벌이익을 침해하기도 했다.

        1976년 쿠데타는 73년 ‘10월 14일 사태’ 이후 현저히 손상된 군의 자율성과 정치적 파벌이익 침해 등에 의해 발생했다.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히 전파되고 있을 때 인도지나반도에서 공산화의 도미노현상이 발생했다. 태국에서 공산주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이 증가했을 때 군부는 노동자, 농민, 학생들의 자본주의체제 전복 움직임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따라서 76년 쿠데타는 하층계급의 정치적 자각에 대한 군부의 우려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다.

        1991년 쿠데타는 민간정치세력에 의한 군부의 정치적 파벌이익과 자율성의 침해가 주요 원인이 되었다. 88년 7월 총선 후 찻타이당 당수 찻차이 수상이 민선 하원의원 출신으로는 12년 만에 수상에 취임함으로써 정당과 의회 등 민간정치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신장된 반면, 상대적으로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또한 군부의 자율성을 손상시킨 사건은 쑤찐다 대장의 해임가능성 풍문이었다.


      제5장 태국군부 정치개입의 배후요인


        1. 미국의 역할

        미국 군사원조계획의 군부에 대한 영향은 개인적 차원과 제도적 차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태국의 경우 미국의 군사원조계획은 군 장교들의 정치적 보수화에 기여하여 반공이데올로기를 강화시켰고, 태국군의 군사전문화 수준을 제고시켜 군부로 하여금 민간정치조직이 갖지 못하는 정치적 자원을 소유케 함으로써 군부의 상대적인 강점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원조계획이 태국 군부통치의 출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거나 쿠데타의 가능성을 높였다고 단정할 근거는 제한적인 것이며 배후요인으로서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 미국의 아시아 정책과 군부통치 

        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정책은 2차대전 이후 공산주의 세력 팽창 저지라는 미국의 세계전략적 측면에서 실시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태국 군부통치에 미친 미국의 직접, 간접적 영향력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1932년 쿠데타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태국 군부정권은 미국의 군사원조가 시작된 후부터 반공정책을 강화하고 반공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게 되었다.

        2) 미국의 인도지나사태 개입과 군부통치

        인도지나에서 미국의 새로운 역할이 증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탄생된 싸릿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도 과거와 변함없었다. 미국은 63년 12월 싸릿 사후 들어선 타넘 정권에 대해서도 계속적 지지를 다짐했다.

        미국은 베트남전 수행을 위하여 태국의 군사기지를 사용했다. 양국 정부는 중공과 북베트남이 태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데 견해를 같이했다.

        3) 미국의 베트남정책 변화와 군부의 영향력 감소

        미국의 베트남정책의 변화를 가져오는 1969년 7월 닉슨독트린 발표후 동남아에서 미국의 영향력 감소는 태국 군부지도자들에게 국내 안보상황에 대한 우려를 자아내게 했다.

        미국의 군사원조계획은 태국으로 하여금 2차대전 후 동남아 지역에서의 공산주의 세력팽창 저지라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순응토록 하는 데 1차적 목적을 둔 것으로 태국의 특정 쿠데타- 47년, 57년, 58년, 71년, 76년 - 발생이나 군부통치 출현에 간접적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2. 왕의 정치적 역할

        1) 왕권과 정치적 정통성

        태국의 전통적 왕권은 불교와 브라마니즘 양대사상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불교의 교리에서는 왕이 법을 준수하여 통치하는 왕을 정의로운 왕으로 불렀고, 법을 준수하는 정의로운 왕이 됨으로써 통치의 정통성을 갖게 되었다. 

        태국 왕권의 브라마니즘적은 특성은 왕은 신성을 부여받은 신왕과 같은 존재이다.

        이상과 같은 두 가지의 왕권개념은 상호보완적으로 공존, 발전하면서 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절대적인 존경심과 경외심을 낳게 되었고 태국의 전통적인 정치체제를 지배하게 되었다.    라마4세, 몽꿋왕때부터 시작된 근대화는 전통적인 왕권의 종교적 기반과 정치적 권위행사에 도전이 되었다. 1932년 쿠데타로 절대군주제는 붕괴되었다.

        2) 군부의 정치개입과 왕의 정치적 역할

        1932년 쿠데타 후 태국은 입헌군주제를 도입했다. 입헌군주제하의 왕은 명목상의 국가원수로서 정치적 실권 없이 군림하나 지배하지 않는 소위 초정치적 위치에 놓이게 되었으나 태국의 왕은 오늘날까지도 정치과정상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군부쿠데타나 군부정권의 정통성 확보에 필요불가결한 배후요인이 되고 있다.

      싸릿 쿠데타 이전 왕의 정치적 역할은 별로 없었다. 32년 쿠데타 후 왕의 정치적 역할이 활발히 재개된 것은 싸릿 쿠데타 이후였다. 서구식 민주주의 교육경험이 없고 왕권에 대해 여전히 존경심을 갖고 있던 싸릿은 쿠데타 후 그 사실을 왕에게 제일 먼저 알려 쿠데타를 인정받고자 했으며 왕은 싸릿에게 친서를 내려 신뢰를 표시함으로써 싸릿의 쿠데타와 군부정권은 정통성을 확보 할 수 있었다.

        싸릿은 전통적인 불교의식에 왕을 참석시켜 불교의 최고 후원자로서의 정의로운 왕의 이미지를 창출해 내고 자신의 정권이 왕에 대한 존경심이 있음을 국민에게 알림으로써 정권의 정통성을 구하고자 노력했다.

        싸릿 정권 때부터 시작된 왕의 정치적 역할은 싸릿 사후 더욱 적극적 형태로 나타났다.

        71년 11월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왕은 교서를 통해 쿠데타 세력이 국민의 이익을 옹호해 주기를 촉구했으며, 71년 쿠데타를 승인하여 타넘 군부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특히 1973년 ‘10월 14일 사태’를 전후로 왕은 태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등장했다. 1973년 ‘10월 14일 사태’를 맞이하여 왕은 유혈사태의 종식과 타넘과 쁘라팟의 망명을 촉구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왕의 망명권유는 군부정권의 붕괴를 초래했다.

       

      제6장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태국 군부쿠데타의 원인은 어떤 한 가지 변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인변수들 -유인요인, 추진요인, 배후요인 - 이 관련된 복합적인 것이었다.

        태국의 정치체제는 관료체제가 정치체제를 지배하는 관료주의 체제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에 중요한 미간정치조직인 의회와 정당 등이 관료체제에 종속되어 있을 뿐 아니라 32년 이후 빈번한 군부 쿠데타로 인해 활동이 자주 단절됨으로써 제대로의 기능을 발휘하는 데 실패했다.

        한편 민간관료제와 동일한 역사적 뿌리를 갖는 군부는 여타의 민간정치조직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국가의 근대화 과정을 통하여 직업주의화됨으로써 32년 쿠데타 당시 민간관료와 함께 태국사회의 가장 강력한 집단이 되었으며, 이후 군부는 민간관료체제를 지배하면서 민간정치조직이 갖추지 못한 정치적 자원인 고유의 강점 -위계질서와 응집력, 조직력, 규모와 예산, 부의 소유와 매스컴의 장악-을 갖춤으로써 민간영역에 용이하게 침투할 수 있었다.

        군부가 상기의 복합적 요인으로 빈번히 정치에 개입함으로써 태국에는 민주주의의 정치과정이 제도화되지 못했다. 그 결과 쿠데타가 또 다른 쿠데타를 야기시키는 정치적 악순환의 고전적 도식이 정형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태국의 정치적 악순환 현상은 1980년대를 전후하여 점진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태국에는 77년 쿠데타 후 91년의 성공한 쿠데타가 발생할 때까지 46년이래 어느 시기보다도 오랫동안 의회체제가 영속성을 유지하였으며 정당활동이 활성화되었다.

        태국의 민주화는 1992년 5월 사태 이후에 92년 9월과 95년 7월 선거를 통하여 탄생한 두 차례의 문민내각에 의해서 다시 계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의회와 정당 등의 정치체제의 발전으로 1932년 쿠데타 후 오랜 기간동안 태국정치를 특징지었던 군부주도의 관료적 정치체제는 의회 중심의 다원적 민주주의체제로 점진적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다. 또한 그 동안의 태국의 사회, 경제적 변화로 인해 확대된 도시 중산층과 신흥기업가, 지식인, 경제개발에 종사하는 관료 등은 민주적인 개방체제를 열망하는 새로운 정치정향을 갖게 되었으며, 80년대 이후 왕은 정치적 민주화를 지지하고 있다.

        또한 태국 군부는 1992년 5월 사태 후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난 수상은 92년 5월 사태 후 군부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실시함으로써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배제시켰다.

        한편 태국에는 아직까지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고 군부의 정치개입에 기여하는 요인들 - 상원에 대한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 연립정부의 약체성, 부정부패와 금권정치- 도 여전히 상존해 있으며 이러한 요인들의 극복 여부가 앞으로 태국 민주주의 발전의 과제라고 볼 수 있다.  

       

       

       

      출처 : http://www.missionthailand.net/thai14.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