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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차이나와 한국교회의 책임
1999/01/03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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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차이나와 한국교회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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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대흥 -
1.인도차이나
중국에 있는 55개의 부족들 중에 남부와 남서부에서 내려온 부족들은 대략 32개 부족(실제로는 150개 부족과 언어)에이릅니다. 이들이 남하하여 버마와 라오스,캄보디아,베트남,태국에 이르러 원주민들과 어울려 살게 되었는데 이들이 사는지역을 가리켜 우리는 인도차이나 지역 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문화적으로는 인도의 영향(예절,언어)를 정치적으로는공산권(과거 에는 구 소련,지금은 중국)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서방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고 지금도 사회 생활 전반적으로 불란서의 영향(11시 30분-2시까지 점심시간,댄스장)이 사회 곳곳에 미치고 있습니다.
전체 인구가 약 7,450만명에 이르는 라오스(450만명),캄보디아(800만명), 베트남(6,300만명)등 이들 인도차이나 국가들은 지리적으로,경제적으로,종 교적으로,문화적으로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전략 선 교를 해야 하는 당위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1)동일 지역(인도차이나-메콘 델타,황하 델타를 끼고 있음)에 살고 있습니다.
2)동일한 부족-중국의 남부 혹은 남서부에서 이주해온 부족(라후,몽,카렌쓰꼬, 카렌 포우,이꺼,미얀,다이,리수,진호,친,까친 등)들이 서로 얽혀 있습니다.
3)불란서의 지배를 같이 받았던 슬픈 역사가 있습니다.
4)이 시대에 마지막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들입니다.
5)불교(소승불교)의 영향력 아래 있는 국가들입니다.
6)중국의 영향(정치적,종교적인 면에서)이 곳곳에 미치고 있습니다.
7)미전도 소수 부족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곳입니다(대략 160여 부족).
8)기후적으로 아열대 몬순 기후를 갖고 있습니다.
9)문화적으로는 인도의 영향을 받은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10)군사 전략적인 면에서 인도와 중국의 중간에 끼어 있습니다.
2.라오스 개요
1)라오스 정세 이해
1975년 12월 2일 라오스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세워진 이 나라는 지리적으 로는 바다가 없는 국가로서 서쪽으로는 미얀마(버마)와 태국,북쪽으로는 중 국,동쪽으로는 베트남,남쪽으로는 캄보디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236,800spkm의 넓이인 전국토의 70%가 산으로 되어 있고 비옥한 토지와 자원이 많이 있는 국가이면서도 아시아에서발전이 가장 늦은 나라 중 하나 입니다. 고대의 린창 왕국에는 100만 마리의 코끼리가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는데 지금도 많은 자연 동물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라오스를 다스리는 정당은 Lao People's Revolutionary Party(L.P.R.P)이고 5년마다 당의 리더와 국회의원을 뽑고 있습니다. L.P.R.P가 가장 중요한 당임에도 불구하고 구성원은 하급 계급자(노동자와 산족)로서 1975년 이후 계속 늘고 있습니다.
L.P.R.P의 대부분의 정책은 1920년 싸와나케에서 태어난 Kayson에 의해서 결정이 되었는데 오늘날 사람 들은 그를 베트남의 아버지,라오스의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라오스 국민의 직업은 80%는 농업,어업,삼림업에 종사하고 80 %만이 군인과 계급 시민입니다.
라오스 화폐는 낍(Kiep)으로 국가 자체의 인플레이션 비율은 과거 65%까지 오른 적이 있으나 달러($)와 태국돈에 대해서는 상당한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라오스의 중요 수출품은 Opium(라오스 정부가 독점하여 태국을 통해 관광 객에게 팔음)이고,원목(산이 전국토의 2/3)이 중요한 수출품이며,특히 은의 산지로서 은세공은 세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라오스의 산업이 경.중공업과 거리가 먼 이유도 민도가 낮고 정치와 경제 가 불완전한 이유도 있으나 지리적으로는 바다가 없어서 수송이 어렵기 때 문이며 꼭 제3국을 의지해야 하기에 그러합니다. 그리고 자원은 풍부하나 (예/주석,구리,기름,은,인광,카드뮴)기술의 낙후로 개발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습니다.
국민은 중국의 유난성과 광시성에서 온 것으로 여기는데 대략 중국계,버마 계,월남계,태국계등으로 구성이 되며 67개의 부족(일반적으로는 100여 족 속에 이른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중 대표되는 부족은 5부족이며 1가족은 보통 7-10명의 식구가 있습니다. 이들 5부족은 다음과 같습니다.
1.Lao Lum/Low Lao인데 주로 소승불교를 믿고 약 10여 부족이 있음.
2.Lao Thai/Thai Yai,Thai Dei,Thai Low등이 있습니다.
3.Thai Dam/Black Thai로서,1950년 이전에 이주해 온 난민으로 Phu Tao,
Phu Noy,Maw의 3족속이 있습니다.
4.Lao Theung/KhaMoo,Lave Biu등 약 50여 부족이 여기에 속해 있습니다. 약간의 그리스도인과 대부분의 정령숭배자입니다.
5.Lao Song/일명 High Lao라고 하며 Hmong이 제일 크고 Mien, Akha, Lisu, Lahu등 약 10여 부족이 여기에 속해 있습니다.
최근 우정의 다리가 개통되어 태국에서 자동차로 직접 운전을 하면서 라오 스에 입국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외국인의 지방 출입 통제가 해제되고 여행의 자유가 이루어졌으나 라오스 당국은 체제 유지를 위하여 은근하고 강한 통제를 자행하고 있으며 아직 한국인으로서는 정부의 허락과 라오스 당국의 비자 등이 장애물로 남아 있어 입국이 자유로운 형편은 아니나, 곧 좋아지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2)라오스 복음주의 교회
1902년 스위스의 형제 교회가 복음을 가지고 들어온 후 북구 라오스에는 C &MA 선교부가, 남부 라오스에는 형제교회가,중부 라오스에는 침례교회, OMF와 장로교회가 복음을 전해왔습니다. 그러나 1975년 라오스가 군부와 학생들의 소요로 공산주의의 정권으로 바뀌고 결국 예배당은 파손되고 교회는 지하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공산정부는 1980년대까지 라오스 교회의 활동을 강하게 억압하였으나 1985년에 들어와 예배와 약간의 자유를 허락하였습 니다.
1986년 교회는 정책을 바꾸어서 라오스를 위해서(비록 공산정권이기는 하나) 기도하기 시작했고,1987년 교회들이자율적으로 얼마나 남아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확인하는 과정에 많은 교회가 순교적 신앙을 갖고 공산 치하 아래서 믿음을 지킨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989년 교회는 공산주의 아래에서 처음으로 전국대회를 갖게 되었고 1994 년 초에 공산정부에게 보고한 바로는 205교회와 30,000명의 교인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특히 1992년에 전국적으로 2,000명의 성도가,1993 년에 3000의 성도가 증가되었다고 합니다.
라오스에는 1970년까지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없었고 1970년에 신학교를 세워서 1975년에 1명의 신학생을 내었는데 1975년 라오스가 공산화되면서 유일한 목회자가 라오스를 떠났으며 많은 주의 종들도 결국 라오스를 떠났 기에 라오스 교회는 지도자 부재 현상이 1989년까지 계속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청년인 BEE THAO가 태국의 맥길버리 신학교(종교음악 전공)을 졸업하고 라오스로 돌아간 후 총회장이 되어 지금까지 지내고 있습니다.
라오스 정부는 선교사들이 세운 교파(SECT)를 원하지 않아 라오스에 있던 모든 교회를 합쳐 라오스 복음주의 교회(Laos Evangelical Church)라 칭하 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1990년 라오스 교회 스스로 목회자를 필요로 하여 KAM PHOONG (싸와나케 소재 SONG KOK교회 목사)과 KHAM-PHONE KOUNTHAPHANYA(라오스 복음주의 교회 총무)를 목사로 세웠고 특히 총무는 UN에서 통역의 일을 했는데
중국계 미국인 Daniel Lam(1994년 4월 소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UN을 사직하고 지금까지 교회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특히 캄폰 목사는 1991년-1993년까지 뱅콕의 성경 신학교 M.Div를 졸업하 였고 목회자들 중 강사격이며 지도자격인 캄푸워앙(부총회장),씨앙다우(전 문교부 장학관,전도국장,나캄 교회 부교역자),누폰(나싸이 부교역자,청년국장),씰라완(치의사,나싸이교회 부교역자)4명이 뱅콕의 강대흥 선교사가 운영하는 목회자 훈련원(Pastor Training for Church Frowth Center)에 1992년 5월 1994년 3월까지 매월 1주간씩 훈련을 받았고, 여기서 훈련받은 내용을 갖고서 라오스로 돌아가 다시금 지역 목회자들에게 재훈련시키는 일을 하여서 많은 목회자들의 영적 진보를 가져왔습니다.
라오스 복음주의 교회의 신앙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이라 하 겠는데 최근(1994년 4월 9일)우정의 다리가 개통되고 자본주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물질의 맛을 보면서 교회가 전에 알지 못했던 물질에 의한 움직임이 지도자 몇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우려해야 할 일중 하나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며 어려움당할 때마다 금식기도로 대 처하고 있습니다. 1995년 3월 현재 약 250교회와 30,000명의 교인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993년 9월에는 나싸이 교회를 정부로부터 돌려 받고 CNW의 도움으로 US$ 30,000을 정부에게 지불하고 현재는 실내 수리를 마친 뒤 Bee Thao목사가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3) 라오스 국내 선교사역 이해
공산국가인 라오스에서 사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나 많은 선교단체들이 라오스에 진출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성공회는 평신도(영어선생)를 파송하여 영어학원을 개설하고 그곳에서 외국인을 위한 교회를 시작하였으며 지금은 현지인 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하 고 있습니다(뱅콕 엥그리칸 교회가 본부).
하나님의 성회는 태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데 넝카이에 있는 교회(크리스 짝 쌈판)을 중심으로 목회자를 파송하여 라오스 복음주의 교회의 교인들 약 10여 명을 빼돌려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교인들에게 차비와 음식 비용을 주면서 가정교회를 운영하는데 라오스 법에도 맞지 않아 곧 문 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안식교회는 1975년 이전에 있던 것으로서 지금은 약간의 자유를 부여받아 예배는 드리나 전국에 한 곳으로 포교는 거의 못하고 현재 20여명 미만의 신자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교회로서 선교사들의 입국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나 LEC와 곧 합류되어서 지금은 없습니다.
C&MA는 현지의 World Concern과 미국 대사관 그리고 UN에 속한 직원으로 사역을 하고 현지에서는 CAMA이름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OMF의 사역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주로 현지인들과의 관계를 쌓아가며 특히 전문인(의사,영어선생,교수)이 소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최근에 몰몬교가 라오스 정부에 학교를 지원해 주는 조건으로 많이 진출 해 있습니다. 특히 지방에는 물량공세로 나오고 있는데 조심해야 할 존재입 니다.
이슬람교는 현지인 교인은 없으나 이미 예배처소를 마련하였고 포교입니다.
노르웨이 교회 연합회(NCC), 퀘이커 교회 등도 있으나 선교활동보다는 사회사업에 더 관심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 노르웨이(NCC)의 라오스 대표는 비기독교인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LCC는 크리스찬 크리닉의 허락을 정부로부터 이미 받았고, 현재는 나싸이 교회에 직업 기술학교를 세우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CCC의 사역(예수 영화,4영리)이 활발합니다. 4영리는 LEC에 의해서 전도 되고 있습니다.
3.캄보디아 개요
1) 캄보디아 정세 이해
캄보디아는 라오스에 비해서 비교적 자유롭고 자본주의적 맛을 이미 UN군 을 통해 맛보아서 다시금 공산주의로 돌아가지는 않으이라 전망합니다. 로칼 스타일이 생활비는 1달에 $40-$80이면 가능하나 외국인을 위한 간접 자본의 투자가 거의 없어 외국인의 생활비는 거의 10배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UN군의 철수 이후 이들의 물자가 많이 시중에 돌아 부유층에서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호텔비와 다종자,집세가 많이 인하되 었음).
그러나 밤 8시 이후 혼자 밖을 나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술집,창 녀촌(주로 베트남인), AIDS가 만연하는 곳이기도 합니다(태국의 오명이 캄보 디아로 갈 위기에 있습니다). 전기의 부족으로 밤 8시 이후에는 수도 프놈펜 까지 정전이 되고,프놈펜에서 120KM만 나가면 지금도 크메르 루즈와 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크메르 루즈의 지도자 키우쌈판이 태국과 캄보 디아의
국경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씨 아누크 왕은 캄보디아 국민들의 게으르고,비도덕적,비윤리적인 생활을 개탄 하면서 캄보디아의 장래가 없음을 외신기자들 앞에 솔직히 털어놓기도 하였습니다.
1975-1978년까지 Killing Field의 3,000,000명의 학살은 이해되지 않은 일이나 전쟁 박물관을 가보면 모든 일이 역사적 자료로서 그대로 부관 되어 있습니다.
1990년에 개신교와 천주교회, 신 사도교회(Neo Apostles)가 정부로부터 선 교허락을 받았고 1992년 CNW를 통해서 프놈펜에 성경 할교가 세워졌으며 1994년 11월에는 GNW를 통해서 Mike Evans 대 전도집회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2) 캄보디아 교회 개요
1928년 캄보디아에 교회가 소개되었는데 미국인 C&MA선교사 2명이 복음을 전한 것을 계기로 교회가 시작되었으나 공산화 이후 모든 선교서와 교회 지도자가 캄보디아를 떠나(ZERO TIME)교회는 암흑 속에 지내어야 했고 1993년 5월 이전까지는 모든 것이 제한된 상태 속에서 선교사들은 전도,심방을 했 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민정이 들어서고 난 후 선교사들은 제한된 자유지만 운신의 폭이 넓어지고 교회개척과 전도를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었 습니다.
현재 캄보디아에는 약 300개의 교회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안식일교회 44교회, C&MA교회 40여 교회, 남침례교회 30여 교회, CCC 30여 교회, 독일 캐리스마틱교회 40여 교회, GNW 5교회, 프놈펜 신학교 18교회, 하나님의 성회 10교회 정도 있습니다.
한편 캄보디아에는 Cambodia Church Committee가 있어서 교회들끼리 연합 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나 이들은 대부분 지식 수준이 낮은 모든 일들은 외국에서 신학교육을 마치고 외국 선교 단체의 파송을 받아 캄보디아에 다시 돌아온 외국 시민권을 갖고 있는 캄보디아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봐야겠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House Church의 형태를 유지하나 나사렛, 성공회 등은 프 놈펜 시내에 큰 교회를 확보해 모교회로서 사역을 감당하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워지면 1년 안에 50-10명이 모이는데 공산주의하에서 학습을 많이해서 그런지 성경공부에 열심이 대단하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3) 캄보디아 선교사역 이해
125 NGO가 있고 그중에 18개 선교단체가 있으며(천주교 포함) 이들은 중심 으로 매월 1회씩 기도회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NGO에 등록하지 않은 단체 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의 사역을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NGO 보고 용).
영어교육/복음과의 접착점으로 사용, 많은 사람들이 불어보다 영어를 선호한다. 캄보디아 최초의 학생 데모는 불어를 배제하고 영어를 배우자는 데 모였는데 약 1,000명이 전국적으로 합니다.
고아원 운영/캄보디아의 모든 가정에는 킬링필드의 아픔이 있고 고아가 전국적으로 많습니다.
의료사역(조산원,치과,공중 보건 등)/대단히 필요로 하는 사역입니다.
농업 지도사역
우물파기 지원 사역
직업 기술 학교(여성 및 전문인 양성)/대단히 필요한 사역.
지역(공동사회)개발 사역
국민학교,중,고등학교,치과대학 등등 지원 및 운영사역
캄보디아 송환자 지원 및 교육,정착할 수 있도록
모자보건사역(조산원,간호원을 중심으로)
선교단체에 따라서 교회 개척을 하는 곳도 있고 다른 면을 강조하기도 하 나, 교회(총회)선교부가 아니면 복음 전파와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 러나 C&MA는 선교사들을 모든 NGO에 파송하여 선교사역의 맥을 잇고 있습니다.
Phnom Penh Bible School은 1992년에 세워진 유일한 성경학교로 지식 수준이 낮은 현지인들에게 신학교육의 기회를 주자는 좋은 의미로 세워졌으나 학생들을 통한 교회 개척 PPBS에 오지 않은 목회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 로 초기에는 기존 선교사들로 하여금 캄보디아 교회를 분리하게끔 하는 행동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1994년 PPBS의 설립자 Daniel Lam의 서거로 캄보디아 교회와의 접목을 위해서 많이 노력하고 있다.
CCC도 신학교를 계획하고 있으나 이는 CCC내의 간사들을 양육시키기 위한 1년짜리 간사 양육기관이라고 말함이 옳을듯 싶습니다. 선교단체들은 CCS(Cammbodian Christian Sevic)에 속하여 매월 정기회를 통하여 선교 정보를 교환하고 있고 1994년 10월 선교단체로는 최초로 OMF가 선교단체로서 정식으로 정부에 등록을 필하였습니다.
1994년 11월 미국의 하나님의 성회 전도자 Mike Evans의 3일간의 신유 은 사 집회는 30,000-50,000명의 현지인들을 동원하여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개최되었습니다(GNW 주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 못하자 불만을 가진 일부 군중들이 강사 숙소에서 항의, 공산정부의 개입으로 집회는 유산되었고, 기독교인의 민심 흉용에 대해서 정부의 기독교에 대한 분위기는 냉각 상태로 급강하 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근들어 약간씩 회복되는 기세에 있습니다.
정부는 모든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들을 하나로 묶으려고 하고 있다(정부 접촉 창구 단일화).그러나 복음적인 선교단체들은 신앙과 교리가 맞지 않는 단체들과의 연합전선에 난색을 표하고 있으며 현재 정부와의 대 화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 교계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캄보디아 정세를 알아야 합니다. 왜 냐하면 캄보디아 정치는 교계, 재계 등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996년 5월 선거에서 만약 훈쎈이 승리하면 캄보디아의 종교정책은 베트남을 따를 확률이 있으며 이는 캄보디아 선교의 적신호입니다.
4. 베트남 개요
1) 베트남의 정세 이해
1858년 8월 Tourane(오늘의 다낭)에 도착한 불란서군은 인도차이나에 영향 을 줄 수 있는 종교적이고 전략적인 요새를 구축하기 위해서 다낭에 불란서 영사관 및 공사관을 설립하려 했으나 Hue의 황제 법령에 의해 거절된 후 강 제로 다낭을 점령했습니다. 1861년 불란서는 사이공을 점령하였고,6년 후에 는 남부 베트남(이른 바 Cochin china)를 점령하였으며 1883전에 전베트남 을 점령하였습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민족해방을 위한 저항운동이 발생하였고 1904년 일본이 러시아에게 승리한 후 베트나인들은 일본으로 많이 유학을 갔고 일본은 이들을 도와 베트남의 독립을 추구하였으며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 발 발시 불란서는 1940년에 패배하였고 일본은 45년 3월에 2차 세계대전시 북 부 베트남을 지배하였으나 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망하면서 45년 9월2일 호지명이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제네바 협정에 의해서 남쪽에는 영국인이, 북쪽에는 중국의 장개석 이 지배를 하였는데 불란서가 계속 베트남을 불란서의 속국으로 자유를 인정하려 하였고 베트남은 이에 동의하지 않자 1946년 북구 하이퐁(Haipong) 에 폭탄 투하를 함으로 1946년 12월 9일 호지명은 불란서와의 독립전쟁을 선언하였습니다. 결국 1954년 5월 8일 그 유명한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 전쟁에서 불란서가 항복을 하였고 북구에 있던 불란서군은 16도 아래 남부로 철수를 하였습니다. 남부의 대통령인 Bao Dai는 미국의 도움을 바랐으나 국민투표에서 디엠(Diem)에게 패하였고 결국 사임을 한 후, 1955.10.26에 Mguyen 왕조는 끝나고 베트남 남부 공화국(The Republic of South Vietnam) 이 탄생되었던 것입니다.
1954년 7월 20일 제네바 협정을 통해서 독립전쟁을 끝났으나 1954년 8월 강대국들은 1956년 중반에 있었던 일반선거에 의지해 17도 선으로 남과 북을 나누어 두 나라로 만든 후 남과 북의 두 베트남은 1974년까지 외교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잠정적으로 1년 간 남과 북의 사람 들이 자유롭게 거주하도록 하여 투표로 국가의 통일을 결정하기로 하였으나 남쪽사람들은 북쪽으로 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북쪽은 1957년에 토지 개혁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지주들과 천주교, 개신교 신자들이 많이 어려움 을 당해서 많은 분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당시 남쪽에도 공산당(1930년에 이미 결성됨)이 많이 있었으나 북쪽으로 가지 않은 이유는 2년 후면 공산화되어 국가가 통일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북쪽은 1960년 12월에 남부 베트남 민족해방을 위해서 인민군을 파송(게릴라식), 실제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1965년 미국 의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과의 전쟁을 시작하였으나 1973년에 미국이 국내 여론의 불리와 전쟁의 무력함을 깨닫고 물러난 후 파리 회담에서 남부 베트남의
독립을 결정했으나 회담의 실패로 인해 계속되는 전쟁 그리고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남부 베트남에 대한 무기 지원을 중단한 이후 1975년 4월 30 일에 북부에서 대공세를 펴 결국 남부 베트남은 함락이 된 것입니다.
통일이 된 후 1976년에 공산당 대회를 열어 베트남을 공산화하였고 당시에 (1976년) 반동분자들을 색출하여 숙청했으나 지금도 개조하지 않은 사람들 이 정글 어디엔가 있으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경제정책에 있어서는 중공업을 지향했으나(소련을 본받아) 대부분이 농민 이기에 실패하였고 전세계적으로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베트남도 1991년 개방정책을 하면서 급진적으로 발전하였으며 1994년 미국이 엠바고(선박억 류)를 푼 이후로 해빙의 물결이 일어나는 등 전베트남이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경제정책이 성공하고 또 국가 전체가 일어서고 아시아의 제 5 용이 되자 이제 베트남의 당은 국가를 계속 통치하기 위해 다시금 공산주의로 돌아 가려고 모든 사회 전체 분위기를 공산주의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2) 베트남 복음주의 교회의 이해
베트남 복음주의 교회는 둘로 나누는데 남부 베즈탐 복음주의 교회와 북부 베트남 복음주의 교회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1. 남부 베트남 복음주의 교회
남부교회는 1980년에 총회장이 되신 온반 트위엔 목사(90세)가 계시고 싸 이곤 중앙교회를 중심으로 싸이곤의 40교회를 포함해서 약 200여 교회가 있습니다. 7개의 노회가 있는데 2개의 노회가 고산 부족이고 1975년 이전에 는 성경학교가 2곳에 있었습니다.(다낭,나트랑/1976년까지 존속되었음).
최근 다낭에서는 성경학교를 다시금 돌려달라는 편지를 지방 종교위원회에 보냈으며, 아직도 신앙의 자유가 없는 관계로 교회의 지도자 양육 혹은 복음 전도의 실질적인 기회는 거의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목회자 수급을 위해서 1975년 이전에 신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분들을 모아 4명의 전도자를 내세워 순회 신학교육을 하고 있으며 특히 싸이곤 지역에서는 자체적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1991년부터 시작한 여름 성경 캠프를 매년 8월에 2주간 씩 금년까지(1994년8월)4회째 운영을 하고 특히 금년에는 350명의 베트남 인과 100여명의 중국인들과의 연합모임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현재 나뜨랑 에서 사역하고 있는 T목사님과 싸이곤의 P목사님은 남부 교회의 중요한 분들로 이들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2. 북부 베트남 복음주의 교회
하노이를 중심으로 약 35교회가 있으며 목회자 수급을 위해 허락된 하노이 신학교는 1994년 마지막 졸업생(15명)을 내고 당국의 지시로 문을 닫은 형편입니다. 교수들은 남부로 흩어졌고 신학교 졸업생들은 각각 시골로 내려가 목회를 하고 있으나 지방 경찰국과 지방 종교 위원회의 반대로 목회를 못하는 일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고 되고 있습니다.
현재 남부와 북부의 교회는 서로 교류가 없으며 정치적으로 남부의 교회는 공인을 못 얻고 북부의 교회만 공인을 얻었음으로 공산치하에서도 북부교회가 자유로운 면이 조금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교역자로는 트 목사님(하노이 교회 담임목사)외에 P교역 자가 있는데 이분은 최근에 서방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Hmong족에게 성경 및 찬송가를 배부하기도 하였고 최근에 부족의 찬송가를 운반하다 경찰에 게 조사도 받고 불이익을 당해 이들을 위한 중보기도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성경 전달은 이미 됐고, 찬송가만 현재 발간 중)
5. 전략선교 개념으로 본 인도차이나
1) 전략적으로 다루어야 할 선교사역
제한 국가이며 공산국가인 인도차이나 3국(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은 입 체적이며 총체적인 전략적 선교 Approach가 이루어쟈야 합니다. 무모한 재래 식 선교방법을 지양하고 정보(교계,정치,문화, 사회구조 등등)을 갖고 전략 을 수립해야 합니다.
1. 미전도 족속
베트남(56개 소수부족), 라오스(100여개 소수부족), 캄보디아(80여 개의 소 수부족)을 연구하여 이미 소개된 인도차이나를 족속별로 나눈 지도를 활용 하여 구체적으로 족속을 입양하고 마닐라의 FEBC를 통한 선교와 서구 선교 단체들의 미전도 족속 입양 정보를 받아들여 연합 전략을 구축해야 합니다.
이들 인도차이나 국가에서 미전도 족속들이 있는 지역은 이미 공산 정부로 부터 제한 접근 지역으로 인정된 곳이기에 선교사는 전략적으로 인도차이나 국가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직업적 기술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2. 지도자 양육 사역
인도차이나 3국 중 교회 지도자 양성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곳은 캄보 디아뿐입니다. 그러나 라오스에는 TEE를 할 수 있고, 베트남은 조금 구체적으로 TEE를 할 수 있습니다. 인도차이나 국가들 교회에서 교회 지도자의 부족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하면 제자 삼는 사역과 목회자 양성 사역은 전략적으로 감당해야 할 사역입니다.
3. 방송선교/문호사역
필리핀 마닐라의 FEBC는 인도차이나를 카바하고 태국에서 쏘는 방송은 라 오스와 캄보디아를 카바합니다. 베트남 북부 허몽족의 집단 개종 사건은 방송 선교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가능성 있는 부족에게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태국에 있는 선교단체는 라오스 방송 선교를 구체화하고 있는데 라오스에 서 하기 어려운 말들(예/귀신숭배,우상숭배,기독교에 대해서,무당에 대해서 등등)을 방송으로 전할 계획을 LEC(라오스 복음총회)와 협의하고 있습니다. 인도차이나 국가의 기독교 문서는 아주 미약하여 목회자의 부족과 교인의 부족,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기독교 문서가 발전되고 있지 않습니다. 목회자를 위한 문서가(주석,성경공부 교재,설교집 등) 선교차원에서 발행되어야 합니다.
2) 교회개척 및 재건 사역
인도차이나에서 교회 개척을 할 수 있는 국가는 캄보디아입니다. 그 외에는 개척보다는 재건이라는 표현이 옳습니다. 특히 라오스는 비록 교인이 있다고 해도 과거에 교회가 없던 곳이라면 교회 재건을 지방 종교성에서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 개척이나 재건이 한국교회가 원하는 사역이지만 이 사역은 재정이 투자되어야 하기에 돈선교라는 오명을 갖기가 쉽습니다.
교회 개척 및 재건에 접근하는 방법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교회 지어주는 것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다짜고짜 재정을 알아보고 약속 혹은 즉석 결정을 하기에 (현지 선교사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이 이루어짐)현지 선 교사들이
현지의 시골을 방문하여 교회의 실상을 알아보려고 했을 때에 현지 교역자들은 상대가 한국 선교사(교역자)라는 것을 안 즉시 교회 개척 혹은 증축,수리 문제를 알리고 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는 한국 선교사의 운신의 폭을 좁혀주고,아직은 필드를 배우려는 현지의 선교사에게 현지 교회를 접촉하기에 어려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을 개척(재건)할 때에 우선적으로 재고되어야 할 일은 다 음과 같습니다.
- 현지 선교사들이 동의하는 사역인가?
- 예배당 건축이 현지 사정에 가장 맞는 사역인가?
- 훈련된 목회자가 있는 교회인가?(목회자의 훈련을 담당할 수가 있는가?)
- 현지 교인들이 헌금할 수 있는 범위가 얼마나 되는가?
3) 인도차이나 선교를 위한 한국 교회에 대한 제언
1.현지 사역하는 선교사 중심의 선교 전략 개발
현지를 잘 아는 사람은 현지 선교사입니다. 공산국가이며, 제한 국가이고 특히 한국과 수교가 안된 나라들이기에 선교사들은 많은 것을 생각하며 사역에 임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중심의 선교전력이나,현지 선교사 없는 선교회의 전략은 위험한 경우가 있습니다.
현지 선교사들을 위로하고 좋은 전략을 세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격려합시다. 한국교회의 선교가 선교 현장 중심의 선교가 될 때에 무모한 경쟁(한국 사람끼리의 경쟁/후원교회 혹은 파송 교회의 욕심에 따라)를 피할 수 있는 확 률이 높아집니다.
2. 한국교회(교단/선교회)의 연합적인 선교전선 구축
신학과 신앙에 큰 차이가 없다면 협력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선교정보는 가능한 공유할 수 있어야 하고, 전체적인 모양이 한국교회 선교 모습에 따라 그려져야 합니다. 1도시에 3-4신학교, 혹은 현지인 1사람에게 3-4명의 선교사 등의 모습은 후원단체의 포용력을 필요로 합니다.
한국교회의 연합적인 선교전선을 논한다면 무엇보다 한국의 전문인들은 한국 선교부에 속해서 사역하도록 배려합시다. 선교 현지에서는 외국 선교단체가 많은 전문인들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처럼 선교부는 아직 공산권 선교의 단계인 만큼 여러 분야에서 협력이 요청됩니다.
3. 물질 앞세운 선교사역은 지양
현지 선교사가 언어를 충분히 배우도록 파송 후 2년간은 선교 열매를 기대하지 말고 인내하는 공감대가 형성되기를 바랍니다. 한국 교회의 축복으로 비 교적 재정이 충족하면 후원교회는 열매를 요구하고, 그 첫 번째가 교회 개척인
것입니다(일반적인 한국교회 성도 혹은 목회자들은 선교사에게 어디서 목회합니까? 혹은 선교사님 교회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교회개척은 결국 내(선교사)가 목회하는 것이 아니고 현지인 목회자들이 하는 것이기에 충분한 재정만 있다면 비록 언어가 짧다고 하여도 교회를 열고 예배는 드릴 수 있다.
그러나 선교사가 현지 언어를 잘하지 못하면 결국 한없는 재정 투자만 가져올 뿐이다.
6. 인도차이나 선교전략
1) 선교지 경험이 있는 씨니어 선교사를 파송
씨니어 선교사는 나름대로 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산권, 제한국가에서 선교를 할 때에 우리보다 앞선 서양 선교사들을 인정하고 초보자가 범하기 쉬운 결정을 막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처녀 선교사일 경우 사역을 보는 안목이 있으 며 조직력이 있는 씨니어를 인도차이나 국가에 보내기를 제안한다.
2) 인도차이나 국가를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전략기구 설립(교단/선교회)
태국은 인도차이나를 구체적으로 비교하면서 이해할 수 있는 선교지입니다. 공산권 선교를 전문으로 하는 선교단체 및 선교사 그리고 선교현장을 아는 분들이 모여서 총체적 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현지 선교사를 지도하고 그들 의 결정을 도와줄 수 있는 전문인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교단 선교부는 파 송하는 일에는 열심이나 관리에는 인력과 현지 이해 부족으로 어려움이 있으므로 이를 보충할 수 있는 전담 기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약간은 강력한 행정능력이 요구됩니다.
선교지(공산주의 국가)에서 선교사가 당하는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 후방 교회의 지도자(아시아 지역에서 선교 경험이 있는 분)가 필요하고 선교지의 강력한 리더쉽을 인정할 수 있는 인도차이나 국가 선교의 전담기구 설립을 제안합니다(교단과 선교회가 합동으로 ).
3)가능성 있는 국가에 집중적인 선교사 파송
인도차이나 3국 중 선교 가능성이 많은 국가는 캄보디아입니다. 캄보디아는 복음에 대해서 문이 열려 있고 선교사에게 비자를 허락하기 시작한 나라입니다. 캄보디아는 국가의 전경제가 어려우며 이미 전술한 대로 킬링필드를 통해 300만 명이 죽었기에 전문인 선교의 최적지입니다.
캄보디아 선교의 강력한 리더십을 요청합니다. 서양선교사들로서 구성되어 있는 Cambodian Christian Service에 아직 한인 선교사는 참석을 못하고 있습니다. 전체 한국인 선교사들이 공동 협력 선교 를 할 수 있도록 후방 교회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한국교회의 캄보디아 선교 셋엎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캄보디아도 종교정책이 곧 바뀔 수 있습니다. 열려 있을 때에 선교사를 보냅시다.
4) 선교지 내에서는 연합사역 추구
한인 선교사는 이제 시작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비록 파송단체와 교단이 달라 도 선교지에서 한인 선교사는 같은 그룹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한인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신앙의 유사성 때문에 공통적인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접촉하는 현지인 교역자들도 제한적입니다.
한인 선교사들끼리 경쟁 상대에서 협력상대로 바뀌어야 하겠으며,최소한 한국교회 선교의 전체 분위 기에 의해서 우호적이고 존중하는 모습을 선교지에서 보여야하겠습니다. 연합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언어순화입니다. 왜냐하면 순화되지 못한 언어는 결국 팀 스피릿을 깨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 잘 알 기에 협력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을 하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5) 전문인 선교사의 개발 및 파송
제한국가인 인도차이나에서 목사 선교사 파송은 많은 제약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전문인들은 인도차이나 국가 여러 곳에서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혹 전문인 선교사 파송에 있어서 후원이 문제가 된다면 한국 교회의 인식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KOICA(한국국제협력기구)의 소속원으로서 선교지에 갈 수 있고 NGO 혹은 UN 혹은 국제 기구의 일원으로 선교지 사역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전문인 선교사가 있음으로 해서 현지 선교단체는 위상을 높일 수가 있습니다.
또한 목사 선교사라고 할지라도 제한국가에서의 사역은 기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신실한 한인 사업가들은 비자를 주고 싶어합니다. 목회사역 외에는 자 격증이 전혀 없는 분들은 비자 연장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신실한 전문인의 헌신으로 인도차이나에 한국교회의 좋은 선교 역사를 기대해 봅니다.
출처 : http://www.missionthailand.net/thaimission/thaimission1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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