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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민족 주의와 선교 본문

선교 태국/펌) 태국 선교

태국 민족 주의와 선교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2. 10. 6. 11:22

      태국 민족 주의와 선교

       

       

                          목        차


1. 시작하는 말

2. 태국 일반

- 지리와 기후

- 인종과 인구

- 국기

- 상징

- 의상

- 종교

3. 태국 사회의 특징

- 외교의 대가

- 싸눅(Sanuk)

- 마이뺀라이(Mai Pan Rai)

- 천천히 움직이는 사회

4. 태국 정치

- 군주정치

- 근대정치

- 태국정치와 민족주의

5. 태국 역사

- 타이족의 기원

- 쑤코타이

- 아유타야

- 톤부리

- 랏따나꼬신(짝끄리)

- 입헌군주시대

6. 태국 불교

- 전래역사

- 타이 불교도들의 신앙

- 불교의 융성

7. 태국기독교 선교역사

- 초기 카톨릭

- 초기 개신교

- 근대 카톨릭

- 근대 개신교

- 한인태국선교

8. 태국 선교의 과제

9. 맺는말





  

1. 시작하면서


  미국 텍사스주 만한 땅에 6천2백만(1999년 통계)의 사람이 살아가는 나라 태국은 1년 평균기온이 25-30℃이다. 화산,지진,태풍,눈보라,열풍,기근과 같은 자연재해가 없는 조용한 나라이다. 자연은 오랜동안 태국인을 선하고 친절하고 온유하게 만들었다. 9세기초에 시작해서 13세기 민족의 정체성을 완성한 태국은 13세기 람캄행 왕에 의해 국어가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다. 중국과 수천년의 가까운 교제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젓가락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이다. 19세기 중반이래 민족의 자존심이 더럽혀진 경험을 갖고 있지 않은 태국은 서구열강의 식민지 정책을 피하여 전통적 사회와 종교적 전통을 보존할 수 있었다.

 

  1970년초반 동남아시아에 공산화의 바람이 불때에도 민족 특유의 외교술로 이데올로기의 갈등에 몸살을 앓지 않은 나라이다. ‘Thai'라는 말은 ’자유‘라는 말이다. ‘Thai'는 그들의 언어와 잠재의식 속에 자유와 동의어가 되어있다. 자유를 잃는 것은 태국인의 정체성을 잃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 나라 가운데 하나인 태국은 오늘날의 입헌군주제의 나라가 되기 전까지 오래동안 사이암으로 알려져 오다가 1939년 나라 이름을 ‘므앙타이’(Land of the Thai)로 변경하였다. 국제교통의 요지이며 신비한 불교 문화로 '동양의 베니스'라고 불리울 만큼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또한 불교와 더불어 다신종교의 악한 영의 세력이 강하게 자리잡은 사탄의 '유토피아'이기도 하다.

 

  태국은 한국과 오랜 우방 관계를 지속해 온 국가로 1949년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 , 한국 전쟁 때에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1972년까지 한국에 주둔하기도 했다. 1959년에 정식으로 양국간 외교 관계가 성립되었고 1981년 양국간 사증면제협정 체결로 한국인은 비자없이 90일간 태국에 체류할 수 있게 되었다.


  태국 기독교 선교역사에 대해 기술한 대부분의 책에서 타이인의 낮은 회심율을 지적하고 있다. 김순일 선교사는 태국선교를 젖은 나무에 불붙이것에 비교하였고, 브래들리 선교사는 38년간 열정적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태국땅에 묻혔으면서도 그의 사역의 마지막 일기장에서 “나는 좌절, 분노, 위태로움을 느낀다”고 고백하였다. 노력과 투자에 비해 열매가 별로 태국 선교역사에 조그마한 선교전략이 세워지기를 바란다.

                

2. 태국일반


- 지리와 기후 :

  지리적으로 태국은 적도와 북회귀선 사이에 놓여 있고 북동쪽으로 라오스, 남동쪽으로는 캄보디아와 태국만, 북서쪽으로는 미얀마, 남쪽으로는 말레이시아, 남서쪽으로는 안다만해와 접해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심이다. 면적은 513,956㎢로서 남북한의 2.3배로 비옥하고 물이 많은 땅으로 북부산악지대, 북동고원지대, 중부 평원 지대, 남부 밀림 지대의 4지역으로 나누인다.  태국은 종종 코끼리의 나라로 묘사되는데 땅의 생김새가 코끼리의 머리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코끼리의 긴 코는 남쪽을, 귀는 북동쪽을, 머리의 위쪽은 북부의 산악지대를, 짜오프라야 강이 끝나는 항구와 삼각주는 코끼리의 입을 연상하게 한다.


  중부 평원 지대는 짜오프라야 강에 의해 가라앉은 형태로 나라의 핵심이다. 짜오프라야 강은 6,450,000명의 방콕시민과 중부 평원 지대의 젖줄 역할을 하고 있다. 북부 산악 지대는 8천피트 이상의 높은 산악 지대들과 짜오프라야 강의 지류인 깊고 좁은 골짜기들은 풍부한 자연적인 식물과 쌀 그리고 과일, 담배등을 가져다 주고 있다.  산림에서는 나라의 중요한 자원인 티크와 열대나무를 제공한다. 북동 고원 지대는 메콩강으로 향하는 중부 평원을 경사진 고원들이 가로막고 있고, 캄보디아와 분리하게 만드는 고원산림 지역은 20년 이상 게릴라 전투의 무대가 되어 왔다. 사암과 염분으로 구성된 토양은 메마르고 물을 저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농사에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농부들은 옥수수와 타피오카(tapioca)를 재배하며 유일한 생산 광물로 암염을 생산하고 있다.  남부 밀림 지대는 말레이 반도에 이르는 수백만 마일의 좁은 해안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숲과 늪지대들을 이용한 물고기와 새우 양식으로 태국을 세계적인 해양 수산업의 나라로 만들었다. 남부의 대부분은 6,800피트의 높은 산악지대로 여기서 생산하는 고무나무는 태국의 가장 큰 광물 수입원이며, 1975년 이래 태국만에서 생산하는 천연가스는 중요한 에너지원이 되고 있다.

  기후는 몬순기후로 6월부터 10월은 남동쪽에서 불어오는 열대바다의 뜨겁고 눅눅한 바람 그리고 1년 강수량의 90%이상의 비가 내리는 기간이다. 11월부터 2월은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부는 시원하고 마른 바람이 불어오는 기간으로 태국인들과 여행자들에게 좋은 기간이다. 3월부터 5월은 대기 위의 공기가 순환하기 때문에 다시 뜨겁고 메마른 기간이다. 연 평균 기온은 25~ 30℃로 1년내내 변화가 거의 없다.

 

- 인종과 인구 : 태국의 총인구는 1995년 59,605,000명으로 년 평균 증가율은 1.5%이다. 인종은 3개 주요 종족과 수많은 소수 부족(Khmer 1.3%, Kui 1.3%, Sui 0.6%, Karen 0.4%, Phutai 0.4%, Mon 0.3%, Lu 0.3%, Khmu 0.2%, Shan 0.2%, Indian 0.2%)(Barrett 1982:664)으로 구성되어 있다. 3개 주요 종족으로는 타이인이 77.7%, 중국인이 12.1%, 그리고 말레이인이 4.0%이다. 총 인구의 약 11%에 해당하는 6,450,000명이 수도 방콕을 중심으로 머물고 있다.

 

- 국기: 사이암의 기는 라마2세 왕의 통치 시기에 만들어 졌다. 바다를 떠가는 모든 타이인을 상징하는 빨간 바탕에 흰색의 코끼리 모양이었다. 흰색의 코끼리는 타이인들이 매우 좋아하였기 때문이었고, 왕도 흰코끼리 왕이라고 알려졌다.

  현재의 기는 6세에 의해 만들어 졌고 1917년 9월 28일에 최초로 사용되어졌다. 빨간색, 흰색, 파란색의 5개의 선으로 만들어진 현재의 기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다. 빨간선은 타이인의 생명을, 흰선은 국교인 불교의 순수함을, 그리고 파란선은 군주의 지배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 세 가지가 타이인들의 매일의 삶의 중요한 부분임을 나타낸 것이다.


- 상징 : 타이 민족과 왕의 상징은 프라사이암 데바드히즈(Garuda)는 신화적 존재인 힌두신 비슈누의 군마이며 반은 새, 반은 인간의 모양이다. 역대 수상들과 정부는 그들의 표지로 Garuda를 사용하였고, Garuda는 왕의 임명과 시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타이인들에게 Garuda는 큰 명예로 간주되고 있다.

 

- 애국가(National Anthem) : 국기를 게양하고 내릴 때 연주되고 있는 애국가는 1932년 잰드리양 교수에 의해 곡이 만들어졌고 1939년 콘웰사라누쁘랍핸즈에 의해 작사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Thailand is the unity of Thai blood and body.

The whole country belongs to the Thai people, maintaining thus far for the Thai.

All Thais intend to unite together.

Thais love peace, but do not fear to fight.

They will never let anyone threaten their independence.

They will sacrifice every drop of their blood to contribute to the nation, will serve their country

with pride and prestige-full of victory. CHAI YO.


- 의상(National Dress) : 공식적인 타이 의상은 없지만 비공식 전통 의상이 채택되고 있다. 여자는 타이 실크로 만들어진 긴 팔 블라우스를 입고 그 위에 왼쪽 어깨로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가슴을 가로지르는 장식띠를 두르고 4각형의 긴 옷감인 '파신'(pha sin)을 치마처럼 입는다. 남자는 바지와 함께 ‘프라 라차탄’(phra  ratchathan)이라 부르는 긴목의 짧은 팔 셔츠를 입으며 공식석상에서는 허리에 장식 허리띠를 두른다.


- 종교 : 태국은 불교 국가로 1976년 태국 교육청의 보고자료에 의하면 태국인의 95.2%가 자신은 불교도라고 믿고 있으며, 1986년 현재 약 33,000개의 사원, 285,000명의 수사, 145,000명의 수련승이 활동하는 것으로 보고 되었다. 이것은 타이 남자어른 35명당 1명의 수사가 있는 것이다.  1992년 12월 31일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태국의 종교별 비율은 다음과 같다. Buddhists 93.47 %, Muslims 3.96 %, Christians 0.52 %, Hindus, Sikhs 0.01 %, Unidentified 2.04 % 이다. 


  태국은 종교의 자유와 활동이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나라이다. 아래 태국헌법 제 25장에 기록된 종교에 관한 법은 태국이 모든 종교의 권리와 활동에 대하여 보호하고 보장하여 주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임을 보여준다.

A very person enjoys full liberty to profess any religion, any religious denomination or religious tenet, and to exercise a form of worship in accordance with his belief, provided that it is not contrary to his civic duties or public order or good morals.

An exercising the liberty referred to in the first paragraph, every person shall be protected from any act by the State, which is derogatory to his rights or detrimental to his due benefits on the ground of professing a religion, or a religious denomination or religious tenet, or exercising a form of worship in accordance with his belief which is different from that of others.


In addition, the Penal Code of Thailand has 3 sections provided in order to prevent any action likely to insult any sacred religious object of place or any disturbance caused at any religious assembly or unlawful dressing or using symbols in imitation of a monk or a clergyman as follows:


Section 206. Whoever commits any act, by any means whatever, to an object or a place of religious reverence of any community in a manner likely to insult the religion shall be punished with imprisonment from one to seven years or a fine from two thousand to fourteen thousand baht, or both.


Section 207. Whoever causes any disturbance at an assembly lawfully engaged in the performance of religious worship or religious ceremonies shall be punished with imprisonment not exceeding one year or a fine not exceeding two thousand baht, or both.


Section 208. Whoever dresses or uses a symbol showing that he is a Buddhist monk or novice, ascetic or clergyman of any religion unlawfully in order to make another person believe that he is such person shall be punished with imprisonment not exceeding one year or a fine not exceeding two thousand baht, or both.


There is no discrimination on religious grounds as to accepting or assigning any person to any government or state enterprise position. This includes the case of candidates for parliamentary or municipal seats all over the country.


3. 태국 사회의 특징

: 김순일은 그의 책(밀림에 세운 십자가,1982:285)에서 태국인의 국민성을 (1)사상의 무풍지대; 아시아 어느나라보다 민족의 다양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종적인 대결이나 분열이 없이 조화를 이루는 나라, (2)낙천주의; 모든 것을 낙관하는 전통적인 불교의 영향과 풍요를 약속하는 열대의 자연 조건이 이들을 "Mai Pen Rai"(Never Mind) 백성으로 만들었다. 어지간한 역경에서도 걱정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며 무관심과 태연함으로 일관하는 백성, (3)흔들리지 않는 주체의식; 외면으로 유순하지만 내면에는 묵묵히 흐르는 주체성이 있다. (4)봉건사상; 태국 국민은 법적으로 모두 평등하다. 그러나 옛 관습과 전통이 강하게 작용하여 Chaow-Nai(왕이 임명한 상전)사상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평민들은 관리들에게 잘 순종하며 지극한 경의를 표한다. 이와 같은 봉건적인 사회풍조는 태국사회 곳곳에 침투되어 있으며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은 권력 있는 인사들이나 부자 앞에서는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발표하지 못하고 거북해 한다.

 

- 외교의 대가 : 태국에서의 최고의 덕은 예절과 관용이다. 이것은 사람 면전에서 그 사람의 의견을 거절하지 못하게 한다. 그 이유는 상대방의 마음에 거절로 인한 상처를 주기 원치 않기 때문이다. 태국인의 삶을 오랫동안 연구한 Herbert P. Phillips는 “Social Cosmetic"이란 용어로 태국사회를 설명한다. 태국인들의 태도는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그들은 상대방 면전에서 ”no"라고 말하는 것을 힘들어 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순히 상대방과의 갈등을 피하는 것이다. 타이인들의 외적태도는 종종 그들의 진짜 태도와 많이 다르다. 그들은 종종 대화의 통로로 제삼자를 사용한다. 그들은 이런 점에서 사회적 관계의 대부들이며 외교의 대가들이다.

 

- 싸눅(Sanuk) : 타이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놀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Sanuk"(amusement)이 타이인 들에게 중요한 용어인 이유는 가치의 표준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마을 사람이 도시에 직장을 얻어 나갔다가 돌아오면 마을 사람에게 설명하기를 그 직장은 재미가 없어서 사퇴했다고 설명한다. 반면에 급여가 없는 직장이라도 그들은 종종 나가 일한다. 왜냐하면 재미(Sanuk)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노소를 막론하고 지적된다. 그들이 목사를 좋아하는 이유도 설교가 재미(Sanuk)가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를 해도 이기기 위해 하지 않고 재미를 위해 한다.

 

- 마이뺀라이(Mai Pan Rai) : 타이인들은 정말 염려하지 않고(no worry), 서두르지 않고(no hurry), 무관심 하는(unconcern) 사람들이다. 끝없는 낙천주의와 "Sabai"(easiness)에 기초된 삶의 철학을 갖고 있다. 만약 그들에게 마실 물이 없다면 그들은 아직 말하기를 “Mai Pan Rai"(It doesn't matter) 왜냐하면 아직 ”Nam Klong(강)에 가서 마실 물을 얻어서 그것을 끊일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 천천히 움직이는 사회 : 서구에서 시간은 돈이다. 일반적으로 시간은 자연의 순환 처럼 다시 나타나는 한 부분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는다. 그래서 ‘시계는 걸어간다’ 라고 표현한다. 약속 시간에 30분 늦게 나타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되어있는 사회이다. 복음은 급하게 전해지는데 타이인들은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말할뿐이다. 


4. 정치


: 타이인들은 두 가지 사실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 그 하나는 동남아시아에서 외부에 의하여 식민지가 되거나 지배 받은 역사가 없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1960년도의 정치적 수렁에서 1970년도에 빠져 나와서 1980년대에 번영하게 된 자민족의 성공적인 융통적이고 역동적인 외교술이다. 거기에는 적어도 두가지의 기본적인 외교정책이 있는데 민족의 주권과 독립 그리고 민족의 존재를 보존하는 것이다.


- 변화의 1970년대 : 중국과 일본의 세계 무대 복귀와 서구 유럽의 점진적인 정치적, 경제적 잠식 가운데 세계는 정치적으로 동서의 두 양극으로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은 베트남을 차지하고 힘의 원리를 앞세운 닉슨의 교리는 동남 아시아를 미국의 보호아래 위탁하게 되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3나라가 차례로 공산화 되면서 자유의 땅 태국을 위협하였다. 이와 같은 국제 환경의 급격한 변화속에서 태국의 외교정책은 적어도 3가지 기본적인 발전을 오늘날까지 견지하고 있다.  1) 이웃 나라와의 관계에서 전방위적 정책을 수용하였다. 1975년 방콕과 뻬이징에 외교관계 수립과 대사 교환, 캄보디아와의 외교관계 수립 그리고 1976년 베트남과의 외교관계 정상화 같은 것이다.  2)지방분권주의는 태국의 외교정책에 더 중요한 역할을 가져다 주었다. 오늘날 ‘외교의 혁명’ 이라 불리우는 1976년 발리에서의 아세안 정상회담이 그것이다.  3) 태국은 더 나아가 중립국가들과 등거리 외교정책을 발전시켜 나갔다.


  오늘날 태국은 52개의 나라에 대사관을, 미국에 영구적인 2개의 공관을, 15개 나라에 일반영사관을, 45개 나라에 명예 일반영사관을, 35개 나라에 명예 영사관을 그리고 13개 나라에 무역센타을 가지고 있다.


- 군주 정치 : 태국의 정치형태는 유사 이래 지금까지 3가지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즉 초기의 온정주의(가장적) 군주정치), 아유타야 시대의 절대 군주정치, 그리고 1932년 혁명 이후의 입헌군주 정치 형태로 변형되어 왔다. 태국의 근대 군주정치는 전체적인 삶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항상 국민들과 사회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자신을 안전하게 적응해왔다.

  첫 번째 태국 왕의 통치는 약 800년전 수코타이 시대에 발견되었다. 람캄행 대왕(1275-1317)은 은 가장적인 통치자의 기원으로 신적 통치의 크메르 시대와는 현저하게 다르게 백성들의 필요에 관심을 갖고 인도하였다. 람캄행에 의해 만들어진 비문에 의하면 왕궁의 문밖에 벨을 걸어두어서 만일 어떤 백성이 배가 아프거나 마음에 슬픔이 있으면 벨을 울리도록 하였다.

  가장적 군주정치는 아유타야 시대에 사라지고 절대 군주정치가 시작되었다. 1782년 짝끄리 왕실이 방콕을 수도로 정하고 불교를 덕의 근간으로 삼으면서 군주는 대부분의 백성들이 가까이하기 힘든 대상이 되었다.

절대 군주 짝끄리 왕조는 1932년 6월 24일 조그마한 시민그룹과 군부에 의한 무혈쿠테타에 의해서 무너지고 입헌군주정치가 시작되었다. 라마 7세 Prajadhipok 왕은 입헌군주정치의 첫 번째 왕이 되었다.

  3년후 Prajadhipok 왕은 태자 마히돌이 운명적으로 죽고 1935년 3월 phahon 정권의 압력에 의해 영국에서 계승자 없이 왕의 자리를 포기하였다. 1929년 10살된 그의 조카 Ananda Mahidol (Rama VIII) 스위스에서 공부하게 한 후 Pridi 정권의 섭정아래 짝끄리 제 8대 왕이 된다. Prajadhipok 왕의 통치 11년 동안 Ananda Mahidol는 대부분의 시간을 스위스에서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살던 2차 대전 동안 고향으로 부터의 소식을 끊은채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1946년 왕궁에서 Ananda Mahidol 왕이 죽고, 현 국왕인 태자 Bhumibol Adulyadej 는 19살의 나이에 짝끄리 왕조 제 9대왕으로 추대되었다. 2년후 파리의 Fontainebleau를 방문하는 동안 그는 프랑스 주재 태국 대사인 딸Rajawongse Sirikit Kitiyakara를 만나고 1948년 태국정부는 그들의 결혼예정을 발표하였다. 1950년 4월 28일 방콕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1주일 후에 그는 대관식을 거행하여 짝끄리 왕조 제 9대 왕에 즉위하였다. 그는 대관식 선서에서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다:

"We will reign with righteousness for the benefit and happiness of the Siamese people."

한 사람으로서 푸미폰 왕은 괄목할만한 재능이 있다. 그는 음악 작곡가로서 재능이 있어서 특히 1950년대 브로드웨이에서 그의 노래중 하나(째즈)는 특집 기사거리였다. 그는 열정적인 선원으로 통치 초기인 1967년에는 동아시아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 이외에도 화가, 사진작가, 기술자로서 다방면에서 인상적이었다. 유아기에 받은 국제적인 교육은 그를 다양한 문화게 쉽게 적응하며 유럽의 3나라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만들었다.

  그는 일명 Royal Project 라고 불리우는 Hilltribe Development Project in North와 Royal Rain-Making Project in Northeast와 같은 지방에 거주하는 타이인들을 위한 많은 일들로 인하여 국민적 지지가 높으며 태국의 명실상부한 리더역할을 하고 있다.


- 근대 태국정치 : 태국의 정치적 혼란은 태국이 입헌군주제 수립후 지금까지 17차례의 쿠테타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권력을 둘러싼 분쟁이 심하였다.

  1932년 항일자유타이 운동을 지도하던 쁘리디(Pridi)는 군부의 도움을 받아 무혈쿠테타를성공시키고 1933년 11월 태국역사상 최초의 의회법에 의한 총선을 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1947년 11월 피분(Phibun)파가 쿠데타로 쁘리디 등을 추방하고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으나, 군부내에서 경찰세력인 파오(General Phao Siyanon)와 육군세력인 싸릿파의 대립이 심해졌다. 1957년 9월 싸릿(General Sarit Thanarat)은 다시 쿠데타로 피분과 파오를 밀어내고 다음해 10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싸릿이 죽은 후 정권을 인계받은 타넘은 1968년 민정으로 이양하였으나 1971년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군정으로 환원시켰다. 1973년 10월 학생데모로 타넘 군사정권이 무너진 후 싼야가 총리로 임명되어 헌법을 제정하고 농지개혁법을 재정하는 등 의욕적인 정책을 폈지만 좌우의 대립과 빈발하는 파업 등 국민적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1975년 반정부 폭동으로 물러났다.

  그 후 1976년 2월 총선거를 실시하여 쎄니(Seni Pramoj) 내각이 재등장했으나 같은해 10월 쌍앗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타닌을 총리로 하는 새로운 내각이 성립하였다. 1977년 10월 당시 국방장관 겸 최고사령관이던 끄리앙싹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타닌을 축출하고 1979년 4월 총선거를 실시하여 끄리앙싹이 민간인 총리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끄리앙싹이 경제정책의 실패로 총리직을 사퇴하고 당시 국방장관이던 쁘렘 띤쑬라논이 정권을 이양받았다. 그 후 쁘렘 내각이 계속되다가 1988년 8월 찻차이가 12년만에 민선총리로 정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1991년 2월 군부를 비난한 각료의 중용에 불만을 품은 군장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찻차이 총리의 내각이 붕괴되고 약 1년간 아난 과도내각이 수립되었다. 1992년 3월 22일 총선결과 전년도 쿠데타를 주동했던 쑤찐다 전육군 사령관을 총리로 하는 쑤찐다 내각이 1992년 4월 21일 수립됐다. 그러나 쑤찐다를 반대하는 민주화 물결과 유혈 진압사태 결과 쑤찐다는 총리직을 사임하고 총선거 실시를 위한 제 2차 아난 과도내각이 수립되었다. 1992년 9월 13일의 총선거에서 민주당 등 반군부 4개 야당이 과반수를 차지하며 연립정부를 구성 새총리에 추언 릭파이 민주당 당수가 취임하였다. 1995년 5월 토지개혁부정의혹을 이유로 연정에서 제 3당이던 팔랑탐당이 탈퇴하자 하원이 해산되면서 같은 해 7월 2일 총선거가 실시됐다. 이 결과 보수계 야당이던 찻타이당(태국국민당)이 제1당이 되었고 총리로 임명된 반한 씰라빠아차는 7당으로 구성된 연립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반한 총리가 각종 부정부패 및 비리에 연루되어 집권 14개월만에 총리직을 사임하고 1995년 7월 2일 총선거가 실시됐다. 총선결과 보수계 야당인 찻타이당이 제1당으로 약진하고 총리에 반한 총리가 7당연립정권을 발족시켰다. 그러나 반한 총리는 각종 부정부패와 탈세, 석사학위표절, 국적조작 등으로 지탄을 받아오다 집권 14개월만에 사임하고 1996년 11월 17일 총선거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제1당으로 차왈릿 용짜이윳 부총리 겸 국방장관이 이끄는 신희망당이 6개 정당을 통해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1997년 7월부터 본격화된 태국의 외환위기로 인해 IMF 관리경제 체제하에 들어서면서 경제파탄의 책임을 지고 차왈릿 총리의 연립정부가 퇴각하고 추언 릭파이가 다시 총리직에 오르면서 태국은 의원수 감축 등 정치권 개혁을 선두로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있다.  태국 정치는 1)군주: 불교와 다른 모든 종교의 힘의 수장으로서의 군주는 모든 헌법을 제공하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존재이다. 군주는 의회를 통하여 입법권을 행사하며 그의 절대적 권한은 백성에게서 나온다. 2)입법기관: 상원과 하원의 양원제로 하원은 국민의 투표로 선출하고 상원은 수상평의회에서 추천하여 왕이 임명한다. 양원의 수는 각각 반반이다. 3)행정기관: 1933년 숭상에 의해 공고된 이래 모든 헌법의 실행은 수상이 정부의 수장이며 최고의 실행기관이다. 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위주의, 방관주의 내지는 자유주의 그리고 제도보다는 혈연, 지연, 학연 등 사람 중심의 정치를 특징으로 한다.


- 태국정치와 민족주의 : 태국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표면화 된 것은  1910년 람마 6세(Vajravudh,1910-25)가 즉위하면서부터 이다. 그는 국가, 불교, 왕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면 절대 군주정치를 펼쳤다. 

 

  두 번째의 민족주의 운동은 2차 세계대전이 고조되던 1940년대와서 피분쏭크랑 수상에 의해서 재현되었다. 피분 정권의 주변 국가들의 전화에 휩싸여 있고 내적으로는 신교육과 매스컴의 발달로 국민들의 대부분이 인류 평등주의 사상에 젖어 있어 민족주의의 중심에 불교를 사용하였다. 

 

  피분 정권의 민족주의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피분은 말하기를 오직 불교인만이 타이의 애국자가 될 수 있다면서 특히, 당시 타이 크리스챤들을 모슬렘교도만큼 공적으로 차별 하였으며, 안티 중국인이라 하여 중국인에 의해 일자리를 잃어버린 타인인들에 일자리를 돌려주기 위하여 중국인의 이주를 단속하였다.

또한 안티 프랑스 감정을 고조시키고 유럽의 힘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서구화를 이룬 일본을 아시아의 모델로 생각하고 일본과 가깝게 지내려고 하였다. 같은해에 쁘리디는 ‘Thailand for Thais'라는 경제 계획을 소개하면서 외국인 사업자에게는 중과세 정책을, 내국인 사업가에게는 장려금을 주어 격려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공식적으로 신발과 모자를 쓰게 하여 유럽패션과 경쟁하도록 격려하는 것, Betel 껌 매매를 금지한 것, 아편중독자를 기소하고 만약 중국인이며 추방하는 것 등이다. 또한 일본이 프랑스의 허락을 받아 사용하던 메콩강 동편에 있는 라오스 지역의 54,000㎢의 땅을 양도 받음으로 피분 수상의 평판이 높았다.   1941년 12월 8일 춤폰 지역에서 일본과 몇시간의 전투가 있은 후 태국은 일본이 미얀마, 말레이시아를 침략하는데 동의하는 조건으로 태국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받는 일본과 상호방위 조약을 맺었고, 1942년 1월 일본의 압력 아래 피분 정권은 영국과 미국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당시 워싱턴에 대사로 있던 Seni Pramoj는 이것을 부인함으로 미국은 태국과의 전쟁을 자제하였다. 종전후 태국의 새 정권(Aphaiwong)은 전시에 한 일본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1945년 8월 16일 대영․미 선전포고는 일본의 무력강압에 의한 것으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태국내의 친일파를 제거하기 시작했고 영국과 프랑스에 자진해서 손해배상을 해주기도 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도움으로 1946년 12월에는 유엔에 가입하였다.

 

  1958년 10월 싸릿 수상은 정권을 재 집권하면서 1960년 1월 “Nation-Religion-King"이라는 모토를 정치적 슬로건으로 내걸고 고대 가장주의적 정치와 불교의 자비를 앞세웠다. 그는 왕과 왕비 그리고 불교의 스님들을 국민앞에 내세우면서 불교와 왕을 그의 정치에 이용하였다. Thanom 군사정권을 무너뜨린 1973년 10월 학생과 노동자들의 데모시에도 거리에서 부처와 왕의 사진 그리고 국기를 앞세우며 불교와 왕에게 호소하며 시위를 벌였다. 타넘 정권이 무너진후 학생들 사이에 불만이 고조되면서 갑자기 ‘안티 미국’ 이라는 운동이 펴져나가 결국 27,000명의 미군이 1975~1976년 사이에 철수 하였다. 같은 시기에 보수적 시민 약 5만명이 학생들을 대항하여 나라와 불교 그리고 왕을 지키는 초국가 모임을 결성하였다.


5. 역사


- 타이족의 기원 : 기원전 4,500년경부터 타이족은 원주민의 쌀농사를 중심으로 한 최소한의 자급경제를 유지하면서 중국의 남부 및 서남부 지역에 거주하였다(태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기록). 한편 6세기 경 지금의 캄보디아 및 태국, 말레이 반도를 지배하던 푸난(Fuan) 왕국의 몰락으로 현재 미얀마 남부의 몬(Mon)왕국 및 메콩강 유역의 크메르(Khmer)왕국이 이 지역의 강대국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강력한 부족연맹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10세기경부터 중국 남부지역에 거주하던 타이족들은 한족의 세력이 증대하자 남쪽으로 이동 지금의 태국북부, 미얀마 북동부, 라오스북부 및 베트남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부분적으로 소국가를 형성하며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중 일족은 라오스를 형성하고 다른 일족은 더 남하하여 오늘날의 태국지역인 짜오프라야 강 유역에 정착해서 오늘날의 태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타이족의 기원에 관해서는 위에서 기술한대로 북방에서 이주해 왔는지 남방에서 올라왔는지 또는 선사 시대부터 계속 그곳에 거주해 왔는지 아직도 논쟁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13세기까지 타이족이 그곳 일대에 하나의 세력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 쑤코타이(Sukhothai) 왕조 (1238~1378) : 10세기경부터 타이족들이 점차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태국의 광대한 평야에 정하게 되자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3세기에 타이족은 선주민인 몬족과 크메르족이 쇠퇴하자 치앙마이를 수도로 정한 태국북부의 란나타이 왕국(타이유언족), 쑤코타이를 수도로 정한 태국 중부의 쑤코타이 왕국(샴족), 라오스와 동북 타이의 랑싼 왕국(라오족) 등 태국계 민족의 소왕국이 각지에 생겼다.

 

  이와같이 13세기에 출현한 타이족의 여러 소왕국중 가장 번성함과 동시에 태국사상 처음으로 독립된 왕조의 기틀을 형성한 쑤코타이 왕국은 태국 역사상 정통 왕조로 1238년 타이족 일파의 수장 퍼쿤 방끌랑타우와 퍼쿤 화므엉이 크메르 왕국의 쇠퇴를 틈 타 북서부의 주요 거점인 쑤코타이를 정복하여 건국한 나라이다. 쑤코타이 왕조는 제 3대 람캄행(Ramkhamhaeng)왕(재위 1277~ 1317) 때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람캄행왕은 크메르 문자를 변형시켜 타이문자를 발명하고 스리랑카로부터 소승불교를 도입하였다. 또한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 안정적으로 주변국가를 복속 현재 태국과 거의 같은 크기까지 영토를 확대하였다. 람캄행왕의 사후 14세기 중반부터 쑤코타이 왕국은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1378년 아유타야 왕조에게 멸망하였다.


- 아유타야(Ayuthaya) 왕조(1350~1767) : 쑤코타이 왕조가 점차 쇠퇴해가자 주변의 속국들이 모두 독립, 강대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중 가장 강력한 나라가 아유타야 왕국이었다. 아유타야 왕국은 Uthong(Ramathibodi 1세)이 롭부리 지역에 1350년 건국한 나라이다. 14세기 말 주변국가를 복속시켜 왕국의 기반을 조성하고 1378년 Borommaracha 1세는 쑤코타이 왕국을 정복하였다.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아유타야 왕조는 무역이 번창하여 서양 제국 및 중국, 일본 등과 교역하였다. 9대 뜨라이록까낫 왕 때에는 말레이 반도와 벵갈만까지 통치영역을 확대하기도 했다. 한편 16세기부터 융성하기 시작한 인근의 미얀마와 잦은 전쟁으로 쇠약해지던 아유타야는 마침내 1569년 3년간의 미얀마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수도를 점령당하고 미얀마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나레쑤언 왕은 1600년까지 미얀마군 완전히 축출하고 아유타야 왕국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다시 아유타야 왕조의 내부 혼란을 틈타 미얀마 군이 1765년 침공하여 아유타야 왕국은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

  아유타야 왕국의 멸망으로 태국은 정치적 분열 및 혼란기를 겪었지만 딱씬이 톤부리 왕국을 세우고 미얀마를 축출 타이왕국을 재통일했다.


- 톤부리(Thon Buri) 왕조(1767~1782) : 아유타야 왕조가 망하고 미얀마 군의 공격 속에서 딱 지방의 성주이던 프라야 딱씬(Taksin)이 짜오프라야강 하구 서안 톤부리에 도읍을 세우고 잃었던 아유타야의 영토를 회복하면서 미얀마군을 축출했다. 딱씬왕은 이전의 아유타야 왕국의 정치제도나 사회신분을 그대로 세습하고 치앙마이를 정복하는 등 타이제국의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딱씬왕은 정신이상으로 왕위에서 쫓겨나는 비극을 맞게되고 딱씬왕 1대로 톤부리 왕조는 종말을 맞이하였다.  대신 딱씬의 부하 장수였던 짝끄리 장군이 왕으로 추대되어 방콕으로 천도하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짝끄리 왕조(랏따나꼬신 왕조)가 그 뒤를 잇게 되었다.


- 랏따나꼬신(짝끄리) 왕조(1782~현재) : 1782년 딱씬 왕의 부하였던 짝끄리(King Yot Fa Rama I, 1782-1809), 장군이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던 왕을 처형하고 도읍을 현재의 방콕으로 옮기면서 현재까지 왕조가 지속되고 있다. 라마 3세때(Nang Klao, Rama III, 1824-51) 남동쪽으로 캄보디아 북으로 라오스까지 영토를 넓혔다. 19세기 들어 군주들이 유럽 국가들에 이권을 주고 그들과 정치적 관계를 맺게 됨에 따라 태국에 대한 서구의 영향력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에 태국은 그 동안 유지해오던 쇄국정책을 버리고 영국(1855년 보우링조약), 미국(1856), 프랑스(1856) 등 몇몇 서구열강과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교를 세우고 해외유학을 장려하였으며 도로건설에 노력을 기울이는 등 근대화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쭐라롱껀 왕(라마 5세 재위 1868~1910)은 랏따나꼬신 왕조(짝끄리 왕조)시대의 사회변혁뿐만 아니 왕권을 더욱더 강화하여 절대주의 국가를 만드는데 정성을 쏟았으며 사법, 행정제도 개혁과 함께 근대화를 실행하였다. 또한 자국의 영토를 서구열강의 지배 속에 놓이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그들의 집요한 침략정책에 의하여 상당한 영토를 빼앗긴 상태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을 이용하여 독립국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해 나가게 되었다. 1867년 캄보디아에 대한 권리를 프랑스에 양도했으며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지방에 있던 속국을 프랑스에게 양도했다. 1917년에는 연합국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라마 5세부터 추진된 국왕에 의한 근대화는 마침내 진보적 사상을 지닌 많은 관료와 군인을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진보파 그룹은 자신들을 길러준 왕의 권력을 부정할 만큼 세력이 강해지고 왕족 전제에 의한 정치적 부패에 불만이 높아져 1932년 6월 24일 무혈혁명을 일으켰다. 인민당이 주도한 이 혁명에 의하여 태국은 절대군주제에서 벗어나 12월 10일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고 입헌군주제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왕은 새로이 입헌군주로서 국가 통합의 상징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열강의 진출로 아시아 각국이 식민지화된 가운데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하였으며 1939년에는 국호를 사이암에서 타이로 변경하였다.


- 입헌군주 시대 : 태국은 마지못해 2차 세계대전에 일본의 동맹국으로 참전했다. 1942년 피분 총리 정권하에서 태국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일본과 공수동맹을 체결하고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전황이 일본에 불리해지자 1944년 8월 일본과의 전시협정을 파기했다. 1945년 8월 16일 대영․미 선전포고는 일본의 무력강압에 의한 것으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태국내의 친일파를 제거하기 시작했고 영국과 프랑스에 자진해서 손해배상을 해주기도 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도움으로 1946년 12월에는 유엔에 가입하였다. 1946년 6월 10일 등극한 지금의 라마 9세(푸미폰 아둔야뎃 왕)는 정치적 실권을 가지지 않고 있으나 계속되는 쿠데타에 의해 권력의 헤게모니가 바뀌는 상황에서도 현재까지 흔들림없는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서 자리잡고 있다.


6. 태국불교


- 전래역사 : 12, 13세기경 중국의 남서쪽에 위치한 운남성으로부터 태국에 이주한 중국인들에 의해 불교(Theravada)가 전파될 때 태국에는 이미 7세기 전 미얀마 남부로부터 그리고 11세기 미얀마의 왕 Anawrahta에 의해 태국의 북쪽이 정복되어 있을 때 불교가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태국인들은 A.D. 1238년에 그들의 첫 번째 왕조 때에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수코타이 왕조의 람캄행 왕(A.D.1275-1300)은 태국의 승려들을 Ceylon(스리랑카)의 명성 있는 Singhalese 승려에게 보내어 수준 높은 훈련을 받도록 했으며 왕조의 성직제도를 세웠다. 1360년에는 불교를 법적으로 통할하고 인정하는 의식을 위해 Singhalese 승려를 초청하였고 Mahinda로부터 Mahavihara를 통하여 내려오는 정통불교를 태국 승려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태국 불교는 이와 같이 보수적인 불교로 ‘자유’ 태국인들에게 1767년 아윳타야의 시대의 문명의 절정기에 이르기까지 침투하였다. 태국 불교는 수도를 현재의 방콕으로 옮긴 이후 현재까지 외부의 방해 없이 자유의 땅에 가장 강한 국가 종교로 번영하고 있다.


- 타이 불교도들의 신앙 : 타이인들의 세계관은 부다의 가르침인 Anicca(impermanence)에 근거한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고 존재란 착각이며 계속 변하는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변하는 삶(생로병사)에는 고통(Dukkha)이 있고, 그 원인은 욕망이고(Sammudya), 욕망의 남음이 없는 상태가 고통의 중지(Nirodha)이고, 고통을 없앨수 있는 8가지 길(Magga) 은 바른이해(right understanding), 바른생각(right intention), 바른말(right speech), 바른행동(right action), 바른생활(right livelihood), 바른노력(right effort), 바른마음(right mindfulness), 그리고 바른집중(right concentration)을 실천함으로 가능하다고 믿는다.


  Kamma의 법칙(the law of causation) : 윤회설의 중요한 법칙으로 이것은 불교인들의 삶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다. 태국 불교인들은 생각하기를 환생은 12가지 윤회 바퀴의 원인과 효과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다. 1)무지(ignorance), 2)범죄(violation actions), 3)의식(consciousness), 4)마음과 사건(mind and matter), 5)육감(six senses), 6)접촉(contacts), 7)느낌(feeling), 8)욕망(carving), 9)들러붙음(clinging), 10)생성의 과정(process of becoming), 11)환생(rebirth), 12)늙고 죽음(old age and death)

  처음의 2바퀴는 전생에, 다음 5바퀴는 현생에, 다음 3바퀴는 현생이지만 기능은 미래에, 마지막 2바퀴는 현재의 행동에 대한 결과이다. 그리고 이 삶의 수레바퀴가 영원히 돌아간다고 믿는다.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 : 타이인들은 초자연적 존재를 천사(thewadaa), 지역신(jao), 귀신(phii)의 3가지 범주로 믿는다. 시바(sivia), 브라마(brahma), 비쉬누(vishnu), 그리고 인드라(indra) 같은 천사들은 우주의 중심 메루(meru)산에 살면서 이 세상을 보호한다고 믿는다. 지역신은  Saanphraphuum(the house of

the spirit of the place)에 살면서 집,정원,논, 그리고 사원을 지킨다고 믿는다. 타이인들은 Saanphraphuum

앞에 곡식, 향, 촛불을 매일 저녁 바치고 특별한 날에는 음식을 바치며 가족들의 출생,죽음,질병,불행,여행,시험등을 위해 도움과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를 올린다.  귀신(phii)은 사람들의 귀신, 스스로 존재하는 많은 귀신 그리고 정글에 사는 귀신등 그 수는 헤아릴수 없이 많다. 타이인들은 건강, 사업, 결혼, 출산등에 닥치는 어려움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또한  자신들의 몸이 kaai(육체), khwan(혼), winyaan(정신)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데 khwan은 육체 안과 밖 어느곳에도 거할 수 있지만 육체 밖에 거할때는 놀란다고 믿는다. 만약 어린이의 허리가 아프면 khwan을 허리띠로 매어서 아프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죽었을 때 곡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육체를 떠나는 영혼에게 어려움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관속에 사다리를 넣어두서 언제든지 관에서 그의 영혼이 떠날 수 있다고 믿는다.

 

- 불교의 융성 : 20세기 초 당시 태국을 통치하던 Rama VI(1910-25)세는 민족, 종교, 왕으로서의 통일성(unity), 계속성(continuity), 정체성(identity) 이 세가지 기둥을 세워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다. 1976년 태국 종교성의 통계에 따르면 태국 국민의 95.92%가 자신은 불교신도라고 응답하였고 이들이 25,702개 사원, 213,175 수도승, 114,792 수련승, 10,529 여수도승, 총 338,496명을 후원하고 있다. 연도별 통계의 변화는 위 도표와 같다. 위 표가 보여주는 한가지 사실은 태국 불교가 여전히 융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태국불교는 해마다 우기철이 시작되는 때에 불교신자들의 수련기간(Lent of three months, Phansaa)을 가지고 있는데 해마다 20세 이상의 남자들 가운데 약 20%가 이 기간에 임시 수련승이 되는데 이 숫자는 약 75,000명 정도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원에 계속 남아서 수도승으로 헌신하게 되는데 그 이유 가운데는 경제적 요인과 교육적인 요인들이 있다.


7. 태국기독교 선교역사


- 초기 로마카톨릭선교역사(1511-1688) - 로마카톨릭은 1511년 사이암(현재의 태국)에 들어왔고, 1585년 스페인은 태국과 상업 및 조약을 맺기 위해 마닐라로부터 Don Tells de Aguirre가 사이암에 입국했다. 17세기말까지 동양의 모든 카톨릭 선교는 포루투칼에 의해 지배되었고 그 주류는 Jesuits이었지만 Ayutthays에 도미티칸 선교사도 있었다. 한편 로마카톨릭 선교사들은 포르투칼의 군대와 상인들을 따라왔다.

  프랑스의 로마카툴릭 선교사들은 Narai왕이 통치하던 1662년 태국에 들어와서 왕의 관심과 호의 속에서 1688년 신학교와 몇 개의 예배처소를 세웠다. 그러나 태국은 1688년 Narai왕이 질병에 걸리면서 영국 모험가이면서 태국 귀족들과의 무역거래에 성공적으로 활동했던 Constantin Phaulkon을 위시한 프랑스로부터 태국을 구하자는 민족주의적 정책으로 바뀌게 되었다. 1688년 Phaulkon은 롭부리에서 목을 베임을 당하였고, 수도 Ayutthays에서 일어난 반프랑스 운동에 의해 카톨릭 선교사들은 추방당하고 옥에 갇히었고, 프랑스 군대는 태국에서 떠나게 되었다. 프랑스 카톨릭 선교사들은 140년동안 선교사역을 하면서 점점 약해졌고 1828년 당시 방콕에 4교회, 아윳타야에 1교회, 짠타부리에 1교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총 그리고 상선과 함께 온 프랑스 카톨릭 선교사들은 태국에서 거절당하고 말았으며 태국왕조는 그후 150동안 서구와 교제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였다.

  아무튼 프랑스의 로마카톨릭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선포된지 1세기 후인 1785년 사이암의 로마카톨릭 교회는 총 1,372 곳이었으며, 신자들의 대부분은 수도에 가까운 톤부리-방콕에 살았다. 로마카톨릭은 태국에서 그들의 선교사역 300년동안 오직 6개의 교회를 개척하였을 뿐이다.


- 초기 개신교 선교역사(1828-1867) - Carl Gutzloff와 Jacop Tomlin은 태국의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이다. 그들은 1828년 도착한지 2개월만에 그들의 중국어 성경을 다 소비할 정도로 근면했다. 그들은 또한 사이암 언어를 배워서 4복음서와 로마서를 중국어로부터 태국어로 번역하였고, 사이암어 사전을  썼다. 그 이후 3년이 넘게 사이암에서 섬기다가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짧은 기간 사이암에 머물면서 Boon-Tee라는 중국인 회심자를 얻었는데 훗날 Boon-Tee 사이암 교회를 위해 크게 섬기게 되었다. 그러나 태국에서의 개신교 선교의 역사는 1818년 버마에서 사역하던 아도니람 저드슨의 아내 Ann.H.Judson에 의해 1818년 이미 시작되었다. 그녀는 미얀마에서 전쟁포로가 된 사이암인들을 만나 그들의 언어를 배움으로 사이암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녀의 남편 Judson이 만든 미얀마 교리문답서를 사이암어로 1819년에 번역하였다.(김순일, 1982:39-40) Gutzloff의 호소에 힘입어  미국침례교 선교회는 1853년부터 1893사이에 선교사들을 사이암에 보내어 중국인들 가운데 선교하도록 하다가 선교지를 중국으로 옮겨갔다.

  미국선교회(American Board)는 1831년 그들의 첫 번째 선교사 Dr. David Abeel를 시작으로 Dan Beach Bradley, Jesse Caswell를 파송하였다. 이들은 사이암인들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위대한 사이암 선교의 선구자들이다.

  Dan Beach Bradley(1835-1873); 의사이면서 목사였던 Bradley는 1835년 7월 18일 그의 아내와 방콕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후 38년간 의사, 목사, 정부조언자, 민간대사 등등의 많은 역할을 했지만 태국인들은 의사 Bradley를 기억한다. 또한 Chulalongkorn왕의 아버지 Chan Fa Monkut의 최초의 외국인 친구이기도 했다. Jesse Caswell(1840-1848); 사이암의 왕자였던 Monkut은 그의 영어와 과학 선생으로 Caswell를 초청하였다. Monkut은 곧 왕(Rama IV)이 되었고 그는 영어로 읽고, 쓰고, 말하는 아시아인 최초의 군주가 되었을뿐 아니라 최초의 기독교 종교의 학생이 되었다. 사이암 정부는 Beach Bradley, Jesse Caswell 선교사를 매우 사랑하였고 존경하였다. Beach Bradley, Jesse Caswell 선교사는 장로교 교단 배경을 갖고 있었고 이들의 수고로 말미암아 사이암의 선교는 새벽에서 밝은 아침으로 변하게 되었다. 미국장로교 선교회(American Presbyterian Mission)는 Samuel R.House(1847-1876) 선교사와 Stephen Mattoon(1847-1865)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이들에 의하여 현재 여학교 가운데 가장 좋은 학교로 알려진 방콕의 Wattana Wang Lang 학교가 세워졌다.

  계속되는 개신교 선교(1867-1938); 1863년 라오스 선교회의 Daniel McGilvary 선교사가 올 때까지 북태 지방에는 한사람의 선교사도 없었다. McGilvary 선교사 이후 수십 년이 지난 후 북태의 거의 모든 도에 Mission Station이 설립되었고, Dr. W.A.Briggs의 보고에 의하면 “치앙마이 지역의 교회들이 미얀마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고 한다. 남태 지방은 북태 지방보다 적어도 35년 일찍 복음의 씨가 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장로교 선교사들은 한사람의 회심자를 얻지 못한 채 교회를 세웠다. 미국장로교 선교회가 1840년 태국에 들어온 후 19년만인 1859년 8월 3일 첫 회심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 근대 카톨릭 선교역사(1688-1980) - 비록 로마카톨릭이 지난 수세기 동안 미미한 성장에 그쳤지만 최근 지난 반세기 동안에 교회성장에 진전이 있었다. 1982년 태국에는 카톨릭 신자가 어른 181,000명이었으며, 5년에 3%의 성장을 보여왔다.

  카톨릭 교회는 태국의 불교도들에게 좋은 태도를 취해왔고, 태국문화를 잘 배워왔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불교도들과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함께 살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성경적인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교도들의 참된 회심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나의 예로 Yasothom 도에 있는 Ban Song Yae 마을에는 불교도들과 카톨릭 신자들이 함께 살았다. 그들은 결혼도 같이 했지만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고 강요하지 않았다. Ban Song Yae 마을에 살던 카톨릭 신자들은 이원론과 혼합주의를 실천하였을 뿐이다.


- 근대 개신교선교역사(1938-1980) -태국에는 크게 두 개의 개신교 그룹이 있다. 첫째는 에큐메니칼 그룹인 태국기독교총회(Church of Christ in Thailand)와 둘째는 태국복음주의 그룹인 태국복음주의협회(the Evangelical Fellowship of Thailand)이다. 두 그룹의 중요한 차이점은 선교신학이다. 전자는 기독교인의 삶의 양식과 사회사업을 통하여 불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반면 후자는 복음 선포와 말씀 증거로 불교인들에게 접근한다.

  1828년 시작된 태국의 개신교 선교는 172년이 지난 오늘까지 수많은 선교사들의 열정적인 복음 전파에도 불구하고 아직 1% 미만의 복음화율에 머무르고 있다. 현재 대략 1,000여명의 선교사와 60여개의 기독교 단체, 1,608교회(북태-800개, 중태-430개, 동북태-255개, 남태-123개, 1997년 현재)가 복음화에 힘쓰고 있다.  태국최초의 장로교회는 1849년 10월 31일 외국선교부(Board of Foreign Mission)에 의해 세워진 방콕 제 1장로교회(현재의 쌈례교회)이다. 최초의 성도는 Stephen Mattoon 목사 가족, Samuel House 의사, Steven 목사 가족 그리고 1849.9.3 미장로교 선교부에서 세례 받은 중국인 끼앵꾸웨이시얀과 1860년 2월 세례 받은 태국인 ‘츤’이 전부였다. 지역별 태국교회 분포 현황은 북태 지방에 태국교회의 49.8%가 형성되어 있고 북쪽의 중심 도시인 치앙마이(246 교회), 치앙라이(214 교회), 매헝선(79 교회) 3개 지역의 교회를 합한 숫자는 북태지방 전체 교회의 67%(539 교회)에 해당한다.


- 한인태국선교

:  한인에 의한 태국선교는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1950~1953)중에 중단되었다가 1956년 태국에 2가정(최찬영,김순일)을 파송함으로 본격적인 선교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한인태국선교는 1) 구 한국장로교 선교시기(1956~1970) 2)한국국제선교회(KIM) 시기(1971~1980) 3)한인선교 전성기(1981~) 로 구분되어진다;


김활영(in 1994)은 한인태국선교활동을 5시기로 구분한다; (1) the  successor of the old PCK ministry(1969-1976), (2)the misnistries of the World Mission Partners(1971-), (3)the works of the Korea Presbyterian Mission(1979-), (4)the services of the Seomoon World Mission(1984-), (5)and the activities of the Korea General Assembly Mission(1989-). 정승회(in 1992)는 3시기로 구분한다; (1)the period of Presbyterian Mission(1956-1970), (2)the period of Korea International Mission(1970-1980), (3)the golden age of Korean missions(1981-). 김정웅(in 1985)은 4시기로 구분한다;(1)the presbyterian Mission of Korea(the old PCK and its successeor between 1956 and 1970, (2)the Korea International Mission(an interdenominational mission since 1970), (3)the Presbyterian Mission in thailand(the PCKH mission from 1979), (4)the Korea Evangelical Church since 1974.

 

  각 선교단체와 교회의 이름으로 태국에 파송된 한인선교사는 총 99가정에 186명으로 37개 선교단체 및 선교회의 이름으로 파송받아 사역하고 있다.(태국선교사친교회 2001년 총회회의록. 2001.2.23현재) 이 숫자는 장,단기 선교사 및 부인 선교사 포함한 전체 숫자이다. 특이할만한 것은 GP, KGAM, WMP, KPM의 대부분의 선교사는 예장합동(GMS) 선교사로서 이중회원 선교사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숫자를 GMS에 포함할 경우 GMS 선교회는 총 49명으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태국에 파송하고 있는 선교단체가 된다. 편의상 선교사 수가 2인 이하인 선교단체나 선교회는 도표에 포함하지 않았으며 그 현황은 다음과 같다; 고신, 국제기아대책기구, 기하성, 루디아선교회, 바울선교회, 사랑의교회, 성서침례교회, 안디옥선교회, 예성, 예장대신, 예장보수, 예하성, 울산노회, 주영광선교회, AHM, AND, BIAS, EGF, NSM, UBF, 기타(자비량) 이상 각 2명, 어린이전도협회 1명.

  연도별 파송선교사 현황(은 한국교회가 90년대 초반에 많은 선교사를 태국에 파송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80년대 중반까지는 선교사 파송열기가 미미했음을 보여준다. 선교사역 기간별로는 26년 이상된 선교사가 2명, 21-25년 6명, 16-20년 10명, 11-15년 25명, 6-10년 60명, 5년 이하가 83명으로 나타났다.  한인 선교사들의 사역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크게 교회개척, 교육(신학교), 지도자훈련양성(목회자 연장훈련), 사회봉사(고아원,구제), 체육(축구,태권도), 문서, 청소년, 어린이, 이슬람권등이다. 사역종류별 현황은 한 명의 선교사가 2가지 이상의 사역에 관계하거나 정확한 자료수집이 어렵지만 대부분의 선교사가 직,간접으로 교회개척에 헌신하고 있다. 거주지(사역지)별 현황은 총 186명의 선교사 가운데 방콕(98명, 언어훈련중인 선교사포함), 북태(43명), 동북태(18명), 중태(8명), 남태(6명), 기타(13명)으로 나타났다. 신임 선교사(1-2년미만)의 대부분이 언어훈련을 위해 방콕에 거주한다는 점을 감안한다해도 약 53%의 선교사가 거주한다는 사실은 한인선교사의 방콕 집중현상을 보여주고 있다.(주태한인선교사 친교회 총회, 2001.2.23)


8. 태국선교의 과제


가. 태국문화(불교)이해 : 난타차이 목사는 그의 논문(Nantachai Mejudhon, 1997 Meek:A New Approach To Christian Witness To The Thai People, Asbury Theology Seminary)에서 주장하기를 선교사에 대한 핍박이 전혀없고 헌법에 모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며, 선교사들이 공공장소에서 설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태국의 복음화가 저조한 이유는 서구 선교사들의 선교방법이 공격적이었다는 것이다. 그 예로 1970년에 한 몰몬 선교사는 거대한 부처상 어깨에 앉았다가 추방되고 말았고, 1994년 한국의 한 선교사는 Srisagate 지방의 한 시골교회 뒷뜰에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고 하면서 그 교회 새신자의 불상 하나를 망치로 부수었다. 태국 신자에 의해 경고를 받고 그 지역 공동체 전체가 그를 파문하였다. 그 선교사는 24시간 이내에 태국을 떠나야만 했다. 불교를 악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우상을 함께  버려야 한다고 믿는 선교사들이 수천의 타이 회심자을 얻을 수 있을까? 라마 3세는 그의 유언에서 말하기를 “서구인들을 주의하라, 그들은 미래에 너희의 큰 문제가 될 것이다. 만약 네가 할수 있다면 그들의 좋은점은 받아드려라, 그러나 그들은 숭배하거나 따르지 말라” 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타이인은 의식적 노력으로 nirvana에 이르지 못한다고 믿으며 진리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더 많은 이 세상의 것들을 붙잡고 있다. 미래는 그들에게 현재처럼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수많은 필요들을 느끼고 있다. 전통적인 세계관의 혼동을 느끼는 그들에게 온유는 적합한 새 전략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면 한다.


나. 영적해방 : 태국은 영적상태는 귀신들림의 형태 가운데 집단적 사로잡힘(collective possession) 형태로 판단된다. 한 집단이나 나라 전체가 귀신에 의해 장악되어 한가지로 마귀에게 굴복되는 상황집단적 사로잡힘(collective possession)의 상황은 전체 사회가 악마에 사로잡히게 되기때문에 국민들은 자신이 그것에 사로잡혔는지 깨닫거나 느끼지를 못하며 악이 사회에 깊이 침투하였으나 대중은 죄의식을 느끼지도 않는다.

  집집마다 마을마다 빌딩마다 자리하고 있는 산프라품(지역신)과 수많은 귀신들 그리고 왜곡된 세계관으로 인해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타이인들에게 묶임에서 놓일수 있도록 구체적인 중보기도와 하나님의 영역확보를 위한 선교전략이 수립되어야 한다.


다.

라.

마.
















참고문헌


김순일

  1982 밀림에 세운 십자가,  서울: 도서출판 메시아

횃불선교센터 해외선교국

  1998 아시아의 상황과 기독교 선교, 서울: 도서출판 횃불

Hong-Shik Shin

  1990 The Thought and Life of Hinayana Buddhism,  Bangkok:  Kanok Bannasan

Hwal-young Kim

  1994   From Asia To Asia,   Manila: The Philippines

Nantachai Mejudhon,

  1997 Meek:A New Approach To Christian Witness To The Thai People, Asbury Theology Seminary.

Niels Mulder

  1996 Inside Thai Society,  Bangkok: The Pepin Press

Samuel.I Kim,

  1980 The Unfinished Mission In Thailand,  Seoul: East-Wast Center for Missions Reserch.

Thanapol Chadchaidee

  1994 Essays on Thailand, Bangkok: D.K. Today co., LTD

Mahidol 대학 인터텟 사이트

Netec 인터넷 사이트

Virtual Library 인터텟 사이트

 



Kings of Siam and Thailand


Kings of Sukhothai

Sri Indraditya c.1240-c.1270

Ban Muang c.1270-c.1279

Ramkhamhaeng c.1279-1298

institution of Thai alphabet, by 1283

Lo Thai 1298-1346/7

Ngua Nam Thom 1346-1347

Mahathammaracha I

Luthai 1346/7-1368/74?

Mahathammaracha II 1368/74?-1398?

Mahathammaracha III

Sai Luthai 1398-1419

Mahathammaracha IV 1419-1438

Conquered by Adudhya, 1438


Kings of Ayudhya

Ramathibodi I 1351-1369

Ramesuan 1369-1370,

Borommaracha I 1370-1388

Thong Chan 1388

Ramaracha 1395-1409

Intharacha 1409-1424

Borommaracha II 1424-1448

Borommatrailokanat 1448-1463

in Phitsanulok 1463-1488

Borommaracha III 1463-1488

Intharacha II 1488-1491

Ramathibodi II 1491-1529

Portuguese arrive, 1511

Borommaracha IV 1529-1533

Ratsada 1533-1534

Chairacha 1534-1547

Yot Fa 1547-1548

Khun Worawongsa 1548

Chakkraphat 1548-1569

Mahin 1569

Burmese capture Ayudhya, 1569

Maha Thammaracha Burmese vassal,

1569-1590

New Royal Seal obtained from China, 1575

Naresuan 1590-1605

Burmese Defeated,

Battle of Nong Sarai, 1593

Ekathotsarot 1605-1610/11

(Si Saowaphak) 1610-1611?

Song Tham, Intharacha 1610/11-1628

Chettha 1628-1629

Athittayawong 1629

Prasat Thong 1629-1656

Chai 1656

Suthammaracha 1656

Narai 1656-1688

Phra Phetracha 1688-1703

Sua 1703-1709

Phumintharacha, Thai Sa 1709-1733

Borommakot 1733-1758

Buddhist missions to Ceylon, 1751, 1755

Uthumphon 1758

Suriyamarin 1758-1767

Burmese capture Ayudhya, 1767

King of Thonburi

Taksin 1767-1782


Kings of Bangkok,

Chakri Dynasty

Phra Phutthayotfa, Rama I 1782-1809

Penang ceded to Britain

by Sultan of Kedah, 1785;

Burmese Invasion Defeated, 1785

Phra Phutthaloethla, Rama II 1809-1824

Phra Nangklao, Rama III 1824-1851

Mongkut, Rama IV 1851-1868

Cambodia ceded to France, 1867

Chulalongkorn, Rama V 1868-1910

Laos east of Mekong ceded to

France, 1893; Laos west of Mekong

ceded to France, 1904; Malay States

ceded to Britain, 1909

Vajravudh, Rama VI 1910-1925

Prajadhipok 1925-1935,

d.1941

Military takes over, 1932

Ananda Mahidol 1935-1946;

in exile, except

1938 & 1946

Siam becomes Thailand, 1939;

Japanese Invasion, reluctant

alliance, 1941-1945

Bhumibol Adulyadej 1946-present


 출처 : http://www.missionthailand.net/thaimission/thaimission6.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