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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태국 선교 역사 본문

선교 EH국/태국 선교

한인 태국 선교 역사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2. 10. 6. 11:25

한인 태국 선교 역사

 

 

              목                  차




1. 선교지로서의 태국

   가. 역사적 배경  --------------------------------------  2

   나. 사회적 배경  --------------------------------------  4

   다. 종교적 배경  --------------------------------------  4

   라. 문화적 배경  --------------------------------------  5

2. 태국기독교 선교역사

   가. 초기 로마카톨릭선교역사(1511-1688)  ------------------  5

   나. 초기 개신교 선교역사(1828-1867)  ---------------------  6

   다. 근대 로마카톨릭 선교역사(1688-1980)  -----------------  7

   라. 근대 개신교선교역사(1938-1980)  ----------------------  7

3. 한인태국선교역사

   가. 구 한국장로교 선교시기(1956~1970)  -------------------  9

   나. 한국국제선교회(Korea International Mission, 1970-1987) --  10

   다. 한인태국선교 전성기(1981년 이후)  -------------------  11

4. 한인태국선교현황  ------------------------------------  13

5. 한인태국선교의 과제 

  가. 젖은 나무 불붙이기  --------------------------------  14

  나. 태국불교의 융성  ----------------------------------  15






      한인태국선교역사(Thailand Mission History by Korean)        

       

        이 글은 한인선교역사의 한 부분으로 한인태국선교역사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선교지로서의 태국에 대한 이해를 위해 역사적 배경, 태국사회이해, 종교적 배경, 문화적 배경, 그리고 태국의 선교역사를 살표본후 짧은 태국선교역사를 갖고 있는 2차세계대전이후 한인선교사들의 선교현황을 살표볼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자료로 향후 한인태국선교에 긍정적인 데이터로 사용됨에 이 글의 목적을 갖고 있다. 끝으로 태국교회 성장의 더딘 이유를 살표보고 그 문제점 해결을 위해 몇 가지 제안을 하였다.


      1. 선교지로서의 태국


         가. 역사적 배경 - 고대로부터 태국은 1939년 6월 24일까지 Siam으로 알려져 왔다. 오늘날 태국인 들은 "Muang Thai"라고 부른다. “Muang"은 땅(Land), "Thai"는 자유(Free)라는 뜻이다. "Muang Thai"는 자유의 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선사시대에는 Nigritos족이 태국 땅의 주인이었다.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이제껏 외세의 지배를 한번도 받은 적이 없는 나라가 태국이다. 왕을 국가의 수반으로 하는 입헌 군주제 국가이다. 태국인들 정착전의 태국역사는 아직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어떤 역사가들은 몬족(미얀마人)들이 이 지역을 물려 받아서 거주해 태국이 처음으로 우통에 수도를 둔 수바나부미 몬 왕국에 의해 통치를 받았었다고 믿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고고학자들은 반치앙의 북동쪽 작은 마을 근처에서 약 5천6백년 전의 것으로 추측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 문명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후 몬족 , 크메르족 , 타이 족을 비롯한 많은 종족들의 이민 행렬이 이어지게 되었고 지금의 태국이라고 알려진 거대한 땅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이 중국  남쪽으로부터 기름진 땅과 강 , 계곡을 따라 천천히 이동해온 무리들이었다. 약 11 , 12세기 경에는 크메르족이 앙코르로부터 대부분의 지역을 통치하기도 했다.

        드라바티 몬 왕국(550년-1253년) - 후난황제가 3세기 후 지배해 나콘파톰이 수도였다. 675년 드라바티가 크메르황제하에 총독의 임기를 행사했다(11세기). 차오프라야 유역의 수로를 이용할 수 있는 농업의 가능성에 매료되 쌀을 경작했던 태국인 들은 11세기에 중국 남쪽에서 이주하기 시작했다. 12세기 초 , 타이 족은 북쪽의 란나, 파야오, 수코타이에 조그만 공국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1238년에 이르러서는 2명의 타이 지도자들이 크메르 영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최초의 독립왕국인 수코타이(행복의 새벽이라는 의미)를 세웠다.

        수코타이 왕국(1238-1419) - 향후 차오프라야강 유역을 따라 발전하게 되는 타이 왕국의 기초가 되었다. 태국의 국교인 테라바다 불교(Tehravada Buddhism)를 확립하고 , 태국 문자의 발명 , 미술 , 조각 , 건축과 문학 등 태국 예술 형성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이다. 수코타이 왕국은 치앙마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1238년에 드라바티를 압도해 크메르를 병합해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00년경에 쇠퇴일로를 걸으면서 결국에는 신흥 아유타야 (Ayutthaya) 왕국의 종속국이 된다.

        아유타야 태국왕조(1350-1767) - 14세기에는 수코타이와 다른 그 밖의 작은 왕국들을 차례로 병합해 부와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1350년에 건립된 이 아유타야 왕국은 챠오프라야 강 남부 멀리까지 영토 하에 두었다.  1767년 버어마의 침략을 받기까지 태국 중심지의 역할을 했다. 포르투갈 사절단(시암을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이 1511년 도착했으나 동남아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태국은 결코 유럽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417년간 33명의 왕이 통치한 아유타야 왕국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탄생시켰다. 전체적으로는 크메르의 영향에서 벗어나 아라비아 , 인도 , 중국 , 일본 및 유럽과도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 아유타야의 붕괴는 프랑스의 파리나 영국 런던의 붕괴와 비견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후에 탁신 왕이 버어마를 몰아내고 수개월만에 타이왕국을 재건하였다.

        방콕시대(1767-1932) - 부르만들은 1767년 아유타야의 수도를 함락시켜 새로운 지역, 즉 현재의 방콕으로부터 차오프라야를 건넌 톤부리에 새 수도를 설립했다. 1782년에 이르러 차크리왕조의 초대 왕인 라마 1세가 차오프라야 강 유역의 방콕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현재의 왕궁은 이 기간에 2번째 왕이었던 챠크리 장군 때부터 내려온 것이다. 19세기에 완벽한 군주제 통치를 했던 몽굿(라마4세:1851~68년)왕이 태국을 근대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 쥴라롱콘(라마5세:1868~1910)왕이 노예제도 폐지와 철도 창시, 전보 서비스, 과학교육 등을 강하게 추진했다. 이러한 서구방식의 표출은 1932년 입법부가 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국가의 완벽한 군주대치를 요구하는 태국 지식인들의 무혈폭동을 야기시켰다. 혁명은 또한 군대와 오늘의 태국정치가 계속될 수 있도록 정부를 제제하는 시민단체 사이에 분쟁을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일본의 통치가 끝난 후 1945년과 1946년 사이에 쎄니 프라모지하의 시민정부가 국가를 다스렸다. 1947년에 무혈군대반란이 마샬 피불 쏭크람 전투를, 1957년 이와 유사한 폭동이 마샬 싸릿 타나랏 전투를 일으켰다. 싸릿은 1963년에 죽고 그의 후계자인 타놈 키티카촌(최후의 마샬 전투) 장군이 1968년에 적은 기간 동안 정치적인 시민통치를 주도했으나 1971년 쌓여있던 불안 때문에 군사통치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1973년 싸냐 다르마삭티가 임시 시민정부를 창설했다.1975년에 치뤄진 선거는 다수당 창당에 실패해 쎄니 프라모지와 쿡크릿 파라 모지가 각각 연합정부를 만들었으나 분단된 국가를 통일하는데는 실패했다. 쎄니는 1976년 공직에 재선됐으나 나중에 그해 쌍가드 차롤유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반란으로 쫓겨났다. 타닌 크라이비치엔이 수상이 되었으나 1977년에 크리앙삭 초마난 장군 지휘하의 무혈반란으로 대치되었다. 1979년 선거는 크리앙삭을 선거로 선출된 정부의 수상으로 공직에 재임시켰으나 1980년에 사임했다. 

        프렘 틴슐라논다 장군 - 새 수상인 프렘 틴슐라논다 장군은 1981년과 1985년에 목숨을 빼앗고자 기도한 부대를 살려주었다. 이로 인해 1981년과 1986년의 잇따른 선거에서 수상으로 계속 남아있을 수 있었다. 1988년 선거후 프렘은 정부에 남아있기를 권유받았으나 강력히 거절했다. 그의 후계자인 차티차이 춘하벤은 쑨톤 콩쏨퐁 장군의 무혈반란으로 1991년 2월에 쫓겨났다. 선거를 하지 않고 임명된 군대수상은 1992년 3월 강력한 일반 여론의 항변에 의해 만들어져 새 입법 하에 치뤄진 선거 후에 정식으로 취임되었다. 군대지배하의 잔혹한 진압이 수상이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왕이 과도기에 시민의 수상을 임명하게 했다. 구 민주당은 1992년 9월 선거에서 소수의 다수당을 이겨 추안 릭파이가 수상으로 있는 시민정부와 연합했다.

        현재의 태국은 입헌 군주제로 1932년이래 현재의 국왕인 푸미폰 압둘야뎃 (H.M. King 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에 이르기까지 태국의 국왕들은 국회를 통하여 입법권을, 수상이 이끄는 내각을 통하여 행정권을, 사법부를 통한 사법권을 행사해오고 있다.(동남아선교회 인터넷 홈페이지)


         나. 사회적 배경 - 김순일은 그의 책(밀림에 세운 십자가,1982:285)에서 태국인의 국민성을 (1)사상의 무풍지대; 아시아 어느나라보다 민족의 다양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종적인 대결이나 분열이 없이 조화를 이루는 나라, (2)낙천주의; 모든 것을 낙관하는 전통적인 불교의 영향과 풍요를 약속하는 열대의 자연 조건이 이들을 "Mai Pen Rai"(Never Mind) 백성으로 만들었다. 어지간한 역경에서도 걱정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며 무관심과 태연함으로 일관하는 백성, (3)흔들리지 않는 주체의식; 외면으로 유순하지만 내면에는 묵묵히 흐르는 주체성이 있다. (4)봉건사상; 태국 국민은 법적으로 모두 평등하다. 그러나 옛 관습과 전통이 강하게 작용하여 Chaow-Nai(왕이 임명한 상전)사상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평민들은 관리들에게 잘 순종하며 지극한 경의를 표한다. 이와 같은 봉건적인 사회풍조는 태국사회 곳곳에 침투되어 있으며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은 권력 있는 인사들이나 부자 앞에서는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발표하지 못하고 거북해 한다.

        태국에서의 최고의 덕은 예절과 관용이다. 이것은 사람 면전에서 그 사람의 의견을 거절하지 못하게 한다. 그 이유는 상대방의 마음에 거절로 인한 상처를 주기 원치 않기 때문이다. 태국인의 삶을 오랫동안 연구한 Herbert P. Phillips는 “Social Cosmetic"이란 용어로 태국사회를 설명한다. 태국인들의 태도는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그들은 상대방 면전에서 ”no"라고 말하는 것을 힘들어 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순히 상대방과의 갈등을 피하는 것이다. 타이인들의 외적태도는 종종 그들의 진짜 태도와 많이 다르다. 그들은 종종 대화의 통로로 제삼자를 사용한다. 그들은 이런 점에서 사회적 관계의 대부들이며 외교의 대가들이다.(Samuel I. Kim, 1982:8)

        타이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놀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Sanuk"(amusement)이 타이인 들에게 중요한 용어인 이유는 가치의 표준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마을 사람이 도시에 직장을 얻어 나갔다가 사퇴하면 돌아와서 마을 사람에게 설명하기를 그 직장은 재미가 없어서 사퇴했다고 설명한다. 반면에 급여가 없는 직장이라도 그들은 종종 나가 일한다. 왜냐하면 재미(Sanuk)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노소를 막론하고 지적된다. 그들이 목사를 좋아하는 이유도 설교가 재미(Sanuk)가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를 해도 이기기 위해 하지 않고 재미를 위해 한다.

        타이인들은 정말 염려하지 않고(no worry), 서두르지 않고(no hurry), 무관심 하는(unconcern) 사람들이다. 끝없는 낙천주의와 "Sabai"(easiness)에 기초된 삶의 철학을 갖고 있다. 만약 그들에게 마실 물이 없다면 그들은 아직 말하기를 “Mai Pan Rai"(It doesn't matter) 왜냐하면 아직 ”Nam Klong(강물)에서 마실 물을 얻어서 그것을 끊일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Samuel I. Kim, 1982:9)


         다. 종교적 배경 - 12, 13세기경 중국의 남서쪽에 위치한 운남성으로부터 태국에 이주한 중국인들에 의해 불교(Theravada)가 전파될 때 태국에는 이미 7세기 전 미얀마 남부로부터 그리고 11세기 미얀마의 왕 Anawrahta에 의해 태국의 북쪽이 정복되어 있을 때 불교가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태국인들은 A.D. 1238년에 그들의 첫 번째 왕조 때에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수코타이 왕조의 람캄행 왕(A.D.1275-1300)은 태국의 승려들을 Ceylon(스리랑카)의 명성 있는 Singhalese 승려에게 보내어 수준 높은 훈련을 받도록 했으며 왕조의 성직제도를 세웠다. 1360년에는 불교를 법적으로 통할하고 인정하는 의식을 위해 Singhalese 승려를 초청하였고 Mahinda로부터 Mahavihara를 통하여 내려오는 정통불교를 태국 승려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태국 불교는 이와 같이 보수적인 불교로 ‘자유’ 태국인들에게 1767년 아윳타야의 시대의 문명의 절정기에 이르기까지 침투하였다. 태국 불교는 수도를 현재의 방콕으로 옮긴 이후 현재까지 외부의 방해 없이 자유의 땅에 가장 강한 국가 종교로 번영하고 있다.(Hong-Shik Shin, 1990:30)

       

        라. 문화적 배경 - 태국은 모계, 군주, 소승불교를 삶의 근간으로 하는 나라로 19세기 중반 이래로 외세로 부터의 침입을 받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1년내내 25-30의 거의 변화 없는 날씨와 파괴적이고, 지진, 화산, 기근, 태풍, 눈보라와 같은 자연적인 재앙이 없는 조용한 삶을 영위하여 왔다. 태국속담에 “우리는 물에서 고기를 얻고 논에서 쌀을 얻는다” 와 같이 평화로운 자연환경은 오랜동안 태국인들의 마음과 정신을 만들어왔다.

        약6천만의 인구와 미국의 택사스주 만큼의 큰 나라이다. 역사적으로 그들의 조상은 피라미드를 세운 고대 이집트, 약속의 땅을 찾아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모세와 동시대였다. 태국 말이 남중국의 방언과 비슷하고 중국과 수천 년의 오랜 교제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중국의 젓가락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은 민족이다. 국어는 수코타이 시대에 람캄행 왕에 의해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람캄행 왕에 의해 돌에 새겨진 자유의 헌장이 최초의 독립국인 수코타이 초기부터 선포되었다. 만일 어떤 형태로든 자유가 침해를 받는다면 람캄행 왕의 자유 헌장은 도움을 주었다. “궁궐의 문에 벨을 걸어두어라, 만일 어떤 시민이 배가 아프거나 마음에 슬픔이 있으면 벨을 울려라, 그러면 왕이 나타나서 도와줄 것이다” 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13세기에 태국은 이미 오늘날과 같은 24 Hour Service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최초의 독립국이 세워지기 전 태국의 서부는 근대 캄보디아의 조상 크메르족이, 중앙평원은 몬 족이 지배하고 있었다. 새로운 땅을 발견한 고대 태국인들은 몬 족과 크메르족을 무력으로 통일하지 않고 그들의 특별한 방법으로 평화적으로 흡수 통일하였다. 태국의 동화정책에 몬족과 크메르족은 나쁜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 태국인들은 동화과정에서 몬 족과 크메르족이 갖고 있었던 고대의 화려한 최고의 문화들을 받아드렸다.

        서구의 식민주의와 개신교는 1828년 들어왔고 공산주의는 1973년에 태국에 들어왔다. 태국인들은 흡수정책을 사용하였고 그들 모두를 이겼다. 그곳에는 어떤 종교적, 정치적, 인종적 전쟁이 없었으며 시민전쟁도 없었다. 공산주의는 남동아시아의 많은 나라에 침투하였다. 그때 태국 수상이었던 Pramoj는 중국의 마오쩌둥을 만나 이문제의 해결책을 얻어 태국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을 지배하는 한가지 방법은 백성들이 잘먹고 안전하게 잘사는 행복한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Pramoj는 돌아와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더 신사적으로 함께 나누는 새법을 발표하였다. 태국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을 선량한 태국시민으로 바꿔놓았던 것이다.(Nantachi, 1997:21)

           

      2. 태국기독교 선교역사


         가. 초기 로마카톨릭선교역사(1511-1688) - 로마카톨릭은 1511년 사이암(현재의 태국)에 들어왔고, 1585년 스페인은 태국과 상업 및 조약을 맺기 위해 마닐라로부터 Don Tells de Aguirre가 사이암에 입국했다. 17세기말까지 동양의 모든 카톨릭 선교는 포루투칼에 의해 지배되었고 그 주류는 Jesuits이었지만 Ayutthays에 도미티칸 선교사도 있었다. 한편 로마카톨릭 선교사들은 포르투칼의 군대와 상인들을 따라왔다.

        프랑스의 로마카툴릭 선교사들은 Narai왕이 통치하던 1662년 태국에 들어와서 왕의 관심과 호의 속에서 1688년 신학교와 몇 개의 예배처소를 세웠다. 그러나 태국은 1688년 Narai왕이 질병에 걸리면서 영국 모험가이면서 태국 귀족들과의 무역거래에 성공적으로 활동했던 Constantin Phaulkon을 위시한 프랑스로부터 태국을 구하자는 민족주의적 정책으로 바뀌게 되었다. 1688년 Phaulkon은 롭부리에서 목을 베임을 당하였고, 수도 Ayutthays에서 일어난 반프랑스 운동에 의해 카톨릭 선교사들은 추방당하고 옥에 갇히었고, 프랑스 군대는 태국에서 떠나게 되었다. 프랑스 카톨릭 선교사들은 140년동안 선교사역을 하면서 점점 약해졌고 1828년 당시 방콕에 4교회, 아윳타야에 1교회, 짠타부리에 1교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총 그리고 상선과 함께 온 프랑스 카톨릭 선교사들은 태국에서 거절당하고 말았으며 태국왕조는 그후 150동안 서구와 교제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였다.(Samuel I. Kim, 1982:38)

        아무튼 프랑스의 로마카톨릭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선포된지 1세기 후인 1785년 사이암의 로마카톨릭 교회는 총 1,372 곳이었으며, 신자들의 대부분은 수도에 가까운 톤부리-방콕에 살았다. 로마카톨릭은 태국에서 그들의 선교사역 300년동안 오직 6개의 교회를 개척하였을 뿐이다.(Nantachi, 1997:106)


        나. 초기 개신교 선교역사(1828-1867) - Carl Gutzloff와 Jacop Tomlin은 태국의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이다. 그들은 1828년 도착한지 2개월만에 그들의 중국어 성경을 다 소비할 정도로 근면했다. 그들은 또한 사이암 언어를 배워서 4복음서와 로마서를 중국어로부터 태국어로 번역하였고, 사이암어 사전을  썼다. 그 이후 3년이 넘게 사이암에서 섬기다가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짧은 기간 사이암에 머물면서 Boon-Tee라는 중국인 회심자를 얻었는데 훗날 Boon-Tee 사이암 교회를 위해 크게 섬기게 되었다. 그러나 태국에서의 개신교 선교의 역사는 1818년 버마에서 사역하던 아도니람 저드슨의 아내 Ann.H.Judson에 의해 1818년 이미 시작되었다. 그녀는 미얀마에서 전쟁포로가 된 사이암인들을 만나 그들의 언어를 배움으로 사이암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녀의 남편 Judson이 만든 미얀마 교리문답서를 사이암어로 1819년에 번역하였다.(김순일, 1982:39-40) Gutzloff의 호소에 힘입어  미국침례교 선교회는 1853년부터 1893사이에 선교사들을 사이암에 보내어 중국인들 가운데 선교하도록 하다가 선교지를 중국으로 옮겨갔다.

        미국선교회(American Board)는 1831년 그들의 첫 번째 선교사 Dr. David Abeel를 시작으로 Dan Beach Bradley, Jesse Caswell를 파송하였다. 이들은 사이암인들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위대한 사이암 선교의 선구자들이다.

        Dan Beach Bradley(1835-1873); 의사이면서 목사였던 Bradley는 1835년 7월 18일 그의 아내와 방콕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후 38년간 의사, 목사, 정부조언자, 민간대사 등등의 많은 역할을 했지만 태국인들은 의사 Bradley를 기억한다. 또한 Chulalongkorn왕의 아버지 Chan Fa Monkut의 최초의 외국인 친구이기도 했다. Jesse Caswell(1840-1848); 사이암의 왕자였던 Monkut은 그의 영어와 과학 선생으로 Caswell를 초청하였다. Monkut은 곧 왕(Rama IV)이 되었고 그는 영어로 읽고, 쓰고, 말하는 아시아인 최초의 군주가 되었을뿐 아니라 최초의 기독교 종교의 학생이 되었다. 사이암 정부는 Beach Bradley, Jesse Caswell 선교사를 매우 사랑하였고 존경하였다. Beach Bradley, Jesse Caswell 선교사는 장로교 교단 배경을 갖고 있었고 이들의 수고로 말미암아 사이암의 선교는 새벽에서 밝은 아침으로 변하게 되었다.(Samuel I. Kim, 1982:42) 미국장로교 선교회(American Presbyterian Mission)는 Samuel R.House(1847-1876) 선교사와 Stephen Mattoon(1847-1865)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이들에 의하여 현재 여학교 가운데 가장 좋은 학교로 알려진 방콕의 Wattana Wang Lang 학교가 세워졌다.(Nantachi, 1997:118)

        계속되는 개신교 선교(1867-1938); 1863년 라오스 선교회의 Daniel McGilvary 선교사가 올 때까지 북태 지방에는 한사람의 선교사도 없었다. McGilvary 선교사 이후 수십 년이 지난 후 북태의 거의 모든 도에 Mission Station이 설립되었고, Dr. W.A.Briggs의 보고에 의하면 “치앙마이 지역의 교회들이 미얀마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고 한다. 남태 지방은 북태 지방보다 적어도 35년 일찍 복음의 씨가 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장로교 선교사들은 한사람의 회심자를 얻지 못한 채 교회를 세웠다. 미국장로교 선교회가 1840년 태국에 들어온 후 19년만인 1859년 8월 3일 첫 회심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김순일, 1982:43)


        다. 근대 카톨릭 선교역사(1688-1980) - 비록 로마카톨릭이 지난 수세기 동안 미미한 성장에 그쳤지만 최근 지난 반세기 동안에 교회성장에 진전이 있었다. 1982년 태국에는 카톨릭 신자가 어른 181,000명이었으며, 5년에 3%의 성장을 보여왔다.(Nantachi, 1997:134)

       

       

        카톨릭 교회는 태국의 불교도들에게 좋은 태도를 취해왔고, 태국문화를 잘 배워왔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불교도들과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함께 살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성경적인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교도들의 참된 회심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나의 예로 Yasothom 도에 있는 Ban Song Yae 마을에는 불교도들과 카톨릭 신자들이 함께 살았다. 그들은 결혼도 같이 했지만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고 강요하지 않았다. Ban Song Yae 마을에 살던 카톨릭 신자들은 이원론과 혼합주의를 실천하였을 뿐이다.(Nantachi, 1997:137)


        라. 근대 개신교선교역사(1938-1980) -태국에는 크게 두 개의 개신교 그룹이 있다. 첫째는 에큐메니칼 그룹인 태국기독교총회(Church of Christ in Thailand)와 둘째는 태국복음주의 그룹인 태국복음주의협회(the Evangelical Fellowship of Thailand)이다. 두 그룹의 중요한 차이점은 선교신학이다. 전자는 기독교인의 삶의 양식과 사회사업을 통하여 불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반면 후자는 복음 선포와 말씀 증거로 불교인들에게 접근한다.(Nantachi, 1997:139)

        1828년 시작된 태국의 개신교 선교는 172년이 지난 오늘까지 수많은 선교사들의 열정적인 복음 전파에도 불구하고 아직 1% 미만의 복음화율에 머무르고 있다. 현재 대략 1,000여명의 선교사와 60여개의 기독교 단체, 1,608교회(북태-800개, 중태-430개, 동북태-255개, 남태-123개, 1997년 현재)가 복음화에 힘쓰고 있다.  태국최초의 장로교회는 1849년 10월 31일 외국선교부(Board of Foreign Mission)에 의해 세워진 방콕 제 1장로교회(현재의 쌈례교회)이다. 최초의 성도는 Stephen Mattoon 목사 가족, Samuel House 의사, Steven 목사 가족 그리고 1849.9.3 미장로교 선교부에서 세례 받은 중국인 끼앵꾸웨이시얀과 1860년 2월 세례 받은 태국인 ‘츤’이 전부였다. 지역별 태국교회 분포 현황은 북태 지방에 태국교회의 49.8%가 형성되어 있고 북쪽의 중심 도시인 치앙마이(246 교회), 치앙라이(214 교회), 매헝선(79 교회) 3개 지역의 교회를 합한 숫자는 북태지방 전체 교회의 67%(539 교회)에 해당한다.(W.M.P.선교동역자 화보.1998,제1호.)


       

      3. 한인태국선교역사

          한인에 의한 태국선교는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1950~1953)중에 중단되었다가 1956년 태국에 2가정(최찬영,김순일)을 파송함으로 본격적인 선교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한인태국선교는 1) 구 한국장로교 선교시기(1956~1970) 2)한국국제선교회(KIM) 시기(1971~1980) 3)한인선교 전성기(1981~) 로 구분되어진다;

      김활영(in 1994)은 한인태국선교활동을 5시기로 구분한다; (1) the  successor of the old PCK ministry(1969-1976), (2)the misnistries of the World Mission Partners(1971-), (3)the works of the Korea Presbyterian Mission(1979-), (4)the services of the Seomoon World Mission(1984-), (5)and the activities of the Korea General Assembly Mission(1989-). 정승회(in 1992)는 3시기로 구분한다; (1)the period of Presbyterian Mission(1956-1970), (2)the period of Korea International Mission(1970-1980), (3)the golden age of Korean missions(1981-). 김정웅(in 1985)은 4시기로 구분한다;(1)the presbyterian Mission of Korea(the old PCK and its successeor between 1956 and 1970, (2)the Korea International Mission(an interdenominational mission since 1970), (3)the Presbyterian Mission in thailand(the PCKH mission from 1979), (4)the Korea Evangelical Church since 1974.

        최찬영,김광명 선교사는 1955년 4월 24일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40회 총회(서울영락 교회)에서 파송을 받고 1956년 5월 23일에 방콕에, 김순일 선교사는 1956년 9월 하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41회 총회(새문안 교회)에서 파송예배를 드리고 같은 해 11월 하순 방콕에 도착함으로 한인태국선교시대가 시작되었다.

         가. 구 한국장로교 선교시기(1956~1970)

        김순일,김윤희(1956-1976)선교사 - 물리학 공부를 집어치우고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기로 결심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던 김순일 선교사는 육군 군목으로 있던 1954년 7월 경북대 교정에서 개최되었던 “국제기독교 청년봉사단체” 모임에서 마나라는 태국 청년을 만나 그로부터  태국에 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받고 태국선교에 헌신하였다. 만병을 고칠 수 있는 영약으로 알려진 한국의 인삼 외에는 한국에 대하여 잘못된 인상과 편견이 태국 대중 속에 뿌리 깊게 내려 있었다. 6.25 전쟁으로 가난하고 헐벗은 나라, 미국의 원조로 살아가는 나라, 태국의 안남미라는 쌀의 원조를 받아 사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알려진 한국에서 온 선교사 부부는 존칭 없이 이름을 부르는 태국인들 속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태국 언어를 배운지 6개월후 첫 설교에서 좋은 평판은 10개월이 되어 치앙라이 지방에서 특별집회 강사로 초청되면서 한국선교사에 대한 좋은 소문이 나면서 김순일 선교사에 대한 태국인들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1년 6개월후 김순일 선교사는 치앙라이 지방으로 사역지가 결정되었다. 5개월이 지난 후 38개 교회와 그 가운데 10%가 나환자인 치앙라이 지역노회에서 김 선교사는 4년 임기의 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2번의 안식년을 포함하여 13년동안 섬겨온 태국 교회는 그에게 또 하나의 조국이었다. 그는 13년 동안 태국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전도를 위해 최일선에서 활동하였다. 남태에서는 회교도와, 중태에서는 불교도와 북태에서는 토착 미신들과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싸움은 태국 교회 내부에 암세포 처럼 번식해 가는 극단의 자유주의와 종교 혼합주의 사상이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지 태국의 종교 혼합주의와 안일함이 천성적으로 교회의 한 부분으로 되어있는 태국교회와 자유주의 신학의 태국선교주도시대에 복음주의 신학을 실천하였던 김순일 선교사의 안타까움과 그의 외로운 투쟁을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Thailand can be compared to wet firewood which does not easily burn"(Samuel I. Kim, 1980:vii)

        김순일 선교사는 1964년 프린스톤과 스위스에서 안식년 연구를 마치고 치앙라이로 돌아와서 태국신학교 교수로, C.C.T.의 청년회 대표로 다시 사역을 시작하였다. 1969년 총회여전도회 후원을 받아 PCKH로 소속을 변경하였다.  1970년 사역지를 방콕으로 옮기고 선교사 소속을 PCKH와 KIM의 이중회원 선교사로 사역하였다. 1964-1972년 사이의 그의 주 사역은 C.C.T. 청년회의 대표로 청년들의 부흥과 신학교를 인도하면서 1년에 거의 6만 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었으며 그와 그의 선교팀은 1년의 약 700명의 회심자들을 도왔다. 그는 1971년 3월 방콕에 한인들의 필요를 따라 한인사역을 시작하였다. 1972년 8월 도미하여 1974년 훌러에서 선교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학위과정에 있으면서 1973년 3월 헐리우드 지역에 태국인 교회를 시작하였다.  1974년 태국인 목사 Prachuap Dechawan에게 교회를 맡기고 태국으로 돌아갔다; 현재 김순일 선교사가 시작했던 그 태국인 교회는 명칭이 First Thai Presbyterian Church in U.S.A.이며 캘리포니아 Covina에 위치하고 있으며 김순일 선교사의 아내였던 김윤희 선교사가 교회장로로 계속하여 시무하고 있다.

        그는 태국신학교에서 1년을 가르치고 태국교회의 자유주의 신학 때문에 더 이상 태국에 머물지 않았다. 1974년과 1976년 사이에는 그의 사역을 세계무대로 확장하여 파키스탄,인도,싱가포르, 그리고 한국에서 태국에서와 같이 가르치는 사역을 하였다. 또한 휘튼대학,탈봇신학교,달라스신학교의 방문교수로 가르쳤다. 1975년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하였으며 1974년과 1978년 사이에 서울에 있는 Institute of the East-West Center for Missions and Development에서 여름학기 과장으로서 선교훈련을 담당하였다.  1979년 훌러신학교 교수와 아시아목회자과정의 책임자로 초빙되었다. 그는 현대한국의 타문화권 선교의 모델이었다.(김활영, 1994:175)

        최찬영,김광명 (1956-1970)선교사 - 1956년 5월 23일 당시 천국으로 여겨지던 미국으로의 유학의 꿈을 접고 방콕에 도착한 최찬영 선교사는 1년간의 태국언어 공부를 마치고 방콕기독병원의 원목으로, 의사였던 김광명 선교사는 의사로 봉사하였다. 그는 또한 태국 제 2장로교회의 담임목사와 C.C.T.산하 30여개의 기독교 고등학교들과 복음주의 교회들, 해외선교회, 남침례회 그리고 기독교 선교 동맹교회(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Churdhes)등의 수련회 강사로 초빙되어 일하였다.(박기호, Winter 2001:66) 그는 5년간의 1기 사역을 마치고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낸 후 복음전도 사역을 원하였으나 1962년 태국으로 돌아와서 태국성서공회 총무로 사역하였다. 최찬영 선교사는 영어와 중국어 그리고 태국어에 능통하여 그의 사역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1970년 이후 PCKT는 최선교사를 더 이상 후원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장로교 선교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1956-1991) 활동적으로 사역하는 선교사가 되었다.(김활영, 1994:172)


         나. 한국국제선교회(Korea International Mission, 1970-1987)

        KIM은 1968년 조동진 박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김순일 선교사가 1970년 KIM에 소속하던 당시 선교지 태국에 부임했다. 그 뒤를 이어 1971년 신홍식 선교사, 1976년 김정웅 선교사, 1980년 윤수길 선교사, 1982년 한준수, 양병화 선교사가 부임하였고, 그후 몇몇 선교사들이 더 태국에 부임하였다. 대부분의 KIM선교사들은 PCKH교회의 주 후원을 받아 파송되었다. 이들의 사역은 현지 교회들에 의해 좋게 평가되었으며, 람빵, 펫부리,치앙마이와 같은 몇몇 노회로 사역이 확장되었다.

        불행하게도 KIM은 한국의 선교본부와 태국현지의 선교사들 사이의 선교정책의 차이로 인하여 계속되지 못하였다. 1987년 태국에서 KIM선교부는 해체되고 신홍식 선교사를 제외하고 그 이외의 선교사들은 CCT와의 관계성 때문에 the Korea Global Mission을 조직하였다.  KIM 선교부에 의 해 불교의 심장과 같은 태국 선교는 성공적으로 시작되었으며 한인선교의 모델이 되었다.(김활영, 1994:176)

        1971년 6월 13일 신홍식 선교사는 왕십리 교회(서재신 목사)와 KIM의 조동진 박사의 후원으로 태국에 부임하였다. 그의 첫 번째 임무는 방콕한인회중 목회였고 현재(2001.3)까지 계속하고 있다. 1976년 제1기 사역을 마친 후 달라스 신학교에서 1981년 박사학위을 취득하고 제 2기 사역을 태국에서 계속 시작하였다. 그러나 1987년 KIM이 태국에서 철수하면서 그는 자신의 현지 선교단체인 the World Mission  Partners를 조직하였다. 신홍식 선교사는 1971년 태국어 공부를 마치고 2개의 사역에 참여하였는데 첫째는 방콕한인회중 목회였고 둘째는 방콕신학교(Bangkok Institute of Theology) 교수 사역과 남태에 위치한 CCT 제 8노회에서의 교회개척 사역이었다. 그는 남태 사역을 시작한 최초의 아시아 선교사였다. 1973년 펫부리의 Thayang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다음해에 Kaoyoi마을에 또 다른 교회를 시작하였으며, 1976년 안식년으로 태국을 떠나기 전에 Zombung 마을에 3번째 교회 개척을 시작하였다. 그는 그의 제 1기 사역기간에 제 8노회가 제 2차 세계대전이래 개척한 교회보다 더 많은 교회를 홀로 개척하였다. 이일로 인해 태국교회에 한인선교사가 교회개척에 은사가 있음을 알림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는 교회개척하는 중에 펫부리의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주어진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았던 한인선교사의 모형이었다. 그는 안식년으로 달라스에서 연구하던 1976년과 1981년 사이 달라스에 살던 라오스 피난민들과 태국이주민들 위해 각각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이것은 김순일 선교사가 미국에서 태국인들을 위한 교회개척을 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다. 한인태국선교 전성기(1981년 이후) - 이 시기는 KIM의 해체와 수많은 선교단체와 선교사가 태국에 부임한 한인태국선교의 전성기이다. 이 기간에 활동한 선교단체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CCT와 관계된 선교단체(KGAM,KPT,WMP)에 속한 30명, TBCA에 관계된 4명, 그리고 그 이외의 선교단체와 선교사 약 152명은 EFT(The Evangelical Fellowship of Thailand)와 관계하여 사역하고 있다.(주태한인선교사친교회 총회, 2001년 2월 23일 현재) 이 글에서는 자료수집의 제한성과 시간의 제약으로 PCKH 선교사들 중심으로 사역 현황을 기술하였다. 

        세계선교동역기구(The World Mission Partners) - 신홍식 선교사는 1987년 WMP 선교단체를 조직하면서 현재의 GMS인 PCKH에 가입하였고, 1991년 차대영,임진옥 선교사를, 1993년 정대연(의사), 안옥희 선교사와 그의 2남인 신영선 선교사를, 1995년 김용섭,이경미 선교사를, 1996년 박재천,홍영숙 선교사를, 1999년 김종구,이성숙 선교사를 허입하여 도시교회 개척을 팀사역을 통하여 추구하고 있다.

        제 2기 사역에 들어와서 한인회중목회, 방콕신학원 전임교수, 문서사역, 한국신학교들에서의 교수사역과 한인선교사 훈련사역을 하였다. 신홍식 선교사가 1981년 전임교수가 된 BIT는 1940년대 개교한  CCT의 무지역 노회인 제 7노회가 직영하는 신학교이다. BIT는 CCT의 자유주의 신학을 좋아하지 않는 학교로 복음주의 노선의 신학적 환경을 제공하였다. 신홍식 선교사는 신학교학장(1981-1986)과 부원장(1986-1999)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영어로 된 Berkohf's의 조직신학 책을 태국어로 번역하였고 뿐만 아니라 그가 처음 교수사역을 시작할 때 7명이던 학생수가 1985년에는 102명으로 늘어났다.

        그는 BIT졸업생들로 하여금 교회개척을 하도록 하여 1984년 방콕연합교회의 후원으로 Bangkuntian 교회를 개척하였다. 현재 그가 기구대표로 있는 WMP선교부는 10명의 선교사가 팀사역을 하면서 Bangkuntian 교회 이후 8개의 교회를 더 개척하고 양육하는 중에 있다. 그 가운데 7교회는 방콕에, 1교회는 깐짜나부리도에 위치하고 있다. 8개 교회(탄프라폰 교회-수원수성교회 후원, 쏨싹 전도사, 파타나깐 교회-수원태국후원회& 수원북북교회 후원, 와린 전도사, 람썽대학 교회-수원영광교회 후원, 수라폰 전도사, 싼띠숙랑씻 교회-서울잠실동교회 후원, 탄프라쿤 교회-평택제일교회 후원, 쌕산 전도사, 쨍와타나 교회-태국한인교회 후원, 탄팁방본 교회-태국한인교회 후원, 싼띠 전도사, 깐짜나폰 교회-부산성동교회 후원, 우돔폰 전도사)는 모두 CCT 제 7노회에 속한 교회들로 한국교회들의 후원으로 세워졌다.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The Korea Presbyterian Mission in Thailand) - 정승회 선교사는 서울 왕십리 교회(서재신 목사)의 후원과 태국교회진흥원(Thailand Church Growth Committee)의 위치안 박사의 초청으로 1979년 12월 27일 방콕에 도착하였다. 그는 1980년 중순 태국정부가 외국선교 단체들에 대한 규제조치의 새로운 종교정책을 수립할 당시 1980년 10월 태국 종교성에 EFT의 파트너로서 일하는 주태 한국장로교선교부를 등록 설립하였다. 이것은 태국적 상황에서 한국 선교사들이 선교사 비자를 공식적으로 얻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되었으며, 그때까지 CCT는 태국선교사로 파송받은 한인선교사들의 유일한 교섭통로 역할을 하였다. 한국교회는 1970년에 선교단체를 중심하여 조직되고 정부에 등록된 태국복음주의연맹(The Evangelical Fellowship of Thailand; 정부에 의해 통제 받지 않으며 1986년 현재 48개 선교단체, 522개 태국교회, 29개 태국 기독교 기관,병원,학교등을 회원으로 갖고 있다)에 대하여는 아는바가 없었다. 정승회 선교사는 PCKH 선교사들이 EFT를 통하여 태국선교를 할 수 있는 새 장을 열어놓았다.(김활영, 1994:183)

        정 선교사는 PCKH 선교사 대회(마닐라, 1980.5)에 발표한 원고에서 6가지(EFT와 함께하는 사역, 태국과 한국사이의 적절한 관계 성립, 지방교회 개척, 지도자 훈련, 사회사업, 태국인들을 통한 사회주의권 사역)를 언급하였다. 그 후 3년이 지난 뒤 3가지 전략을 갖고 그의 사역을 더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첫째는 교회개척으로 1993년말 현재 11개처에 10인의 교역자 437명의 교인을 보유하고 있고, 산족교회중 아카족은 14개처에 14인의 교역자 833명의 교인을 보유하고 있으며 라후족은 14개처에 14인의 교역자 633명의 교인을 보유하고 있어 약 2,000명의 재적교인(어린이 포함)에 주일아침예배 출석교인이 1,500명에 이르고 있다. 

        둘째는 지도자 훈련으로 목회자 훈련 사역 분야는 태국교회를 위한 방콕목회대학원(Bangkok Graduate School of Pastoral Theology)의 운영과 산족교회를위한 산족교회사역자훈련원(The School of Thai-tribal Church Workers)을 북부 치앙라이에서 운영 중에 있고 신학생장학사업과 조기 목회훈련을 년중 실시중이고 태국교회지도자를 위한 한태교회성장쎄미나(The Church Growth Seminar in Korea)를 매해 한국에서 개최하여 한국교회와 같은 교회 부흥을 꾀하고 있다. 1994년말 현재 방콕목회대학원은 2회에 걸쳐 석사과정에서 7인, 학사과정에서 3인, 기타 7인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4,5,6기생 각 10여명씩 매달 1주간씩 쎄미나와 훈련을 받고 있으며, 교역자 사모훈련을 년4회 실시하여 교역자 훈련을 보완하고 있으며, 산족교회사역자훈련원은 아직 졸업생을 내지 않았으며 25인이 교육과 훈련에 임하고 있고, 신학생 장학사업과 목회훈련에는 3개 신학교육기관에 재학중인 15인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매주 또는 방학중에 집중 훈련 중에 있다.(정승회 선교사 인터넷 홈페이지, 자료실) 셋째는 어린이 사역이다.

        정 선교사가 마닐라 대회에서 발표한 6가지 사역은 1989년 이후 열매를 맺혔다. 1992년말 현재 KPM 14명의 전임 사역자와 16개의 예배처소, 731명의 신자(어린이 포함), 만일 산족들을 포함시킨다면 35개 예배처소에 1,701명의 신자로 성장하였다.(김활영, 1994:189)

        서문세계선교회(The Seomoon World Mission) - 대구서문 교회는 1984년 7월 22일  김성곤 선교사를 태국에 보내면서 SWM 선교부를 조직하고 독립적인 사역을 시작하였다. SWM은 KPM과 좋은 관계를 통하여 비자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좋은 관계를 맺는데 실패하고 태국에 PCKH의 또 하나의 선교단체를 설립하였다.

        김성곤 선교사는 한국의 SWM과 함께 3가지 주 사역을 결정하였다; (1)자립교회 개척-, (2)제자훈련을 통한 지도자 양성, (3)사회봉사. 이상의 3가지 사역들을 위해 SWM에 많은 선교사들이 합류하였으나; 송용자(1989), 유인섭-박영순, 김종일-손영란(1990), 김정배-이명국, 김성희-함옥자(1992) 2001년 3월 현재 SWM에 잔류한 선교사는 김성곤 선교사 이외는 아무도 없고 SWM선교부는 태국에서 왕성하게 사역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후원교회의 관계 중단에 있다.

        한국총회선교회(The Korea General Assembly Mission) - 강대흥 선교사는 1987년 11월 25일 태국한인교회에 교포목회를 위해 초빙되어 왔다가 1989년 2월 24일 PCKH 선교사로 재 부임하였다. 그리고 김문수-조영미(1991), 권오혁-우종복(1993), 김농원-강명선(1994), 오영철-김보순(1995), 양덕훈-신미숙(1997), 김창수-김장숙(1998) 제 선교사들이 팀에 합류하였다. KGAM은 1989년 강 선교사에 의해 PCKH의 선교단체로 조직되었으며 주사역은 (1)목회자 훈련원 사역, (2)카렌족 사역, (3)태국인접공산권 사역이다.

        목회자 훈련원 사역은 강 선교사가 현지에서 소속하고 있는 CCT의 제 6노회에 “Pastoral Training Center for Revival and Church Growth" 라 이름한 훈련원 설치를 제안하고 제 6노회가 허락함으로 1988년 발족되었다. 목회자 훈련원은 1990년 5월 방콕의 삼례에 위치한 제1장로교회에서 태국목회자 20명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훈련과정은 1주간의 집중강의로 이루어지며 일정한 과목을 이수하면 졸업한다. 훈련원의 비용은 제6노회와 KGAM가 동등한 비율로 부담하고 있다. 태국교회는 선교사들보다더 이 훈련에 흥미를 느끼고 있으며 방콕의 와타나 교회는 이 훈련원 사역을 위해 1백만 달러에 상당하는 땅을 기부하였다.

        카렌족 사역은 1989년 강 선교사가 태국과 미얀마 국경지역에 사는 카렌 난민들을 방문하면서 그들의 영적,물질적 필요가 있음을 알고 1991년 8월, 12월 두차례에 걸쳐 150명, 120명의 카렌족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훈련을 시작하였다. 카렌족 사역은 현재 1995년 부임한 오영철 선교사가 전담하여 사역하고 있다.

        강 선교사는 그의 사역을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장하였다. 라오스 복음주의 교회는 23,000명의 성도를 3명의 목사와 30명의 평신도 사역자가 담당할 정도로 지도력의 부재가 매우 심하다. 강 선교사는 1992년 5개의 라오스교회 지도자들을 목회자 훈련원에 초청하여 훈련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관계를 맺고 있다. 또한 라오스 찬송가 5천권를 기증하였으며 라오스의 오래된 교회 건물을 재건축하는 사역을 시작하였다.(김활영 1994:193)

        서두에서 밝힌바와 같이 나머지 33개의 한인선교단체와 선교사들의 사역은 자료수집의 한계로 생략하였다.


      4. 한인태국선교현황

        각 선교단체와 교회의 이름으로 태국에 파송된 한인선교사는 총 99가정에 186명으로 37개 선교단체 및 선교회의 이름으로 파송받아 사역하고 있다.(태국선교사친교회 2001년 총회회의록. 2001.2.23현재) 이 숫자는 장,단기 선교사 및 부인 선교사 포함한 전체 숫자이다. 특이할만한 것은 GP, KGAM, WMP, KPM의 대부분의 선교사는 예장합동(GMS) 선교사로서 이중회원 선교사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숫자를 GMS에 포함할 경우 GMS 선교회는 총 49명으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태국에 파송하고 있는 선교단체가 된다.

       

      편의상 선교사 수가 2인 이하인 선교단체나 선교회는 도표에 포함하지 않았으며 그 현황은 다음과 같다; 고신, 국제기아대책기구, 기하성, 루디아선교회, 바울선교회, 사랑의교회, 성서침례교회, 안디옥선교회, 예성, 예장대신, 예장보수, 예하성, 울산노회, 주영광선교회, AHM, AND, BIAS, EGF, NSM, UBF, 기타(자비량) 이상 각 2명, 어린이전도협회 1명.

        연도별 파송선교사 현황(은 한국교회가 90년대 초반에 많은 선교사를 태국에 파송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80년대 중반까지는 선교사 파송열기가 미미했음을 보여준다. 선교사역 기간별로는 26년 이상된 선교사가 2명, 21-25년 6명, 16-20년 10명, 11-15년 25명, 6-10년 60명, 5년 이하가 83명으로 나타났다.

        한인 선교사들의 사역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크게 교회개척, 교육(신학교), 지도자훈련양성(목회자 연장훈련), 사회봉사(고아원,구제), 체육(축구,태권도), 문서, 청소년, 어린이, 이슬람권, 기타, 총 10가지로 나누어진다.

       

       

       

      사역종류별 현황은 한 명의 선교사가 2가지 이상의 사역에 관계하거나 정확한 자료수집이 되지 않아 도표로 나타낼 수 없지만 대부분의 많은 선교사가 직,간접으로 교회개척에 헌신하고 있다.

        거주지(사역지)별 현황은 총 186명의 선교사 가운데 방콕(98명, 언어훈련중인 선교사포함), 북태(43명), 동북태(18명), 중태(8명), 남태(6명), 기타(13명)으로 나타났다. 신임 선교사(1-2년미만)의 대부분이 언어훈련을 위해 방콕에 거주한다는 점을 감안한다해도 약 53%의 선교사가 거주한다는 사실은 한인선교사의 방콕 집중현상을 보여주고 있다.(주태한인선교사 친교회 총회, 2001.2.23)


       

      5. 한인태국선교의 과제

       

        가. 젖은 나무 불붙이기 - Adoniram Judson은 미얀마에서 첫 회심자를 얻는데 6년을, 초대 중국개신교 선교사 Robert Morrison은 중국에서 7년을, 잠비아에서 감리교 선교부는 첫 회심자를 얻는데 각각 13년을 소비해야했다. 반면에 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그것은 더 나쁘다. 1831년 미회중교회 선교사가 태국에 들어온 후 18년동안 한 사람의 회심자없이 1849년 철수하였고, 미침례

      교 선교사는 17년간 한 명의 회심자없이 철수한 후 2차대전후까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1828년부터 태국 선교를 시작한 개신교는 미장로교 선교사가 1840년 태국에 들어온 후 철수하지 않은 결과 19년만에 태국인 첫 회심자를 얻었다. 태국이 은혜를 입은 위대한 의료선교사 Dan Beach Bradley 선교사는 1835년부터 1873년까지 38년간을 복음전파하고 태국 땅에 묻혔다. 서구의 의료기술과 예방접종 백신을 최초로 태국에 소개하는 등 그의 업적은 셀 수 없이 많다. 또한 그는 거의 매주일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그러나 그의 사역 마지막 그의 일기에서 그는 말하기를 “나는 좌절, 분노, 위태로움을 느낀다”고 쓰고있다.  또한 1511년 태국에 들어와서 300년의 선교사역 기간중 단지 6개교회를 세우고, 아시아에서 가장 적은 인구비례 카톨릭 신자를 갖고 있는 태국의 카톨릭이 태국 전체기독교의 절반이 넘는다는 사실은 태국선교가 얼마나 천천히 성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Nantachai, 1997:20)

       

       

      1966 년

      1976 년

      1986 년

      사  원(Temple)

      24,000

      25,702

      33,000

      수도승(Monks)

      175,000

      213,175

      285,000

      수련승(Novices)

      87,000

      114,792

      145,000

      여승(Nuns)

      ---

      10,529

      ---

      성인불교신자대 비율

      34 : 1

      35 : 1

      38 : 1

      국민 총인구

      3천 2백만

      ---

      5천 3백만

 

        김순일 선교사는 “The Unfinished Mission in Thailand”에서 말하기를 “Thailand can be compared to wet firewood which does not easily burn" 라고 했다.(Samuel I.Kim, 1980:vii) 이것은 태국복음화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태국선교는 젖은 나무에 불붙이는 심정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나. 태국불교의 융성 - 20세기 초 당시 태국을 통치하던 Rama VI(1910-25)세는 민족, 종교, 왕으로서의 통일성(unity), 계속성(continuity), 정체성(identity) 이 세가지 기둥을 세워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다.

        1976년 태국 종교성의 통계에 따르면 태국 국민의 95.92%가 자신은 불교신도라고 응답하였고 이들이 25,702개 사원, 213,175 수도승, 114,792 수련승, 10,529 여수도승, 총 338,496명을 후원하고 있다. 연도별 통계의 변화는 위 도표와 같다. 위 표가 보여주는 한가지 사실은 태국 불교가 여전히 융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태국불교는 해마다 우기철이 시작되는 때에 불교신자들의 수련기간(Lent of three months, Phansaa)을 가지고 있는데 해마다 약 75,000명의 임시 수련승(21세의 남자)들이 이 훈련에 참여하며 이들 가운데 30,000명 이상이 사원에 10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을 보낸다. 아마도 이들 중에 1/3이 수도승으로 헌신하게 된다. 이들이 사원에 남아서 오랜 수련기간을 통하여 수도승으로 헌신하게 되는 이유가운데는 경제적 요인과 교육적인 요인들이 있다.(Niels Mulder, 1996:113) 육체적,정신적 활동이 왕성한 태국 청년들을 복음화해야 하는 과제가 여기에 있다. 끝

       



        참고도서


      1. Hwal-young Kim

        1994   From Asia To Asia,   Manila: The Philippines


      2. Nantachai Mejudhon,

        1997   Meek:A New Approach To Christian Witness To The Thai People, Asbury Theology           Seminary.

      3. Niels Mulder

        1996   Inside Thai Society,  Bangkok: The Pepin Press


      4. Samuel.I Kim,

        1980   The Unfinished Mission In Thailand,  Seoul: East-Wast Center for Missions Reserch.


      5. Hong-Shik Shin

        1989   Principles Of Church Planting,  Bangkok:  Kanok Bannasan


      6. Timothy Kiho Park

        1991   A Two-Thirds World Mission on The Move,


      7. 김순일

        1982   밀림에 세운 십자가,  서울: 도서출판 메시아


      8. 동남아 선교회 인터넷 홈페이지, 태국색션


      9. 박기호, 훌러신학교 2001년 Winter 학기 강의안 


      10. 정승회 선교사 인터넷 홈페이지


      11. 주태한인선교사 친교회 총회회의서류, 2001. 2. 23 .


      12. W.M.P.선교동역자 화보. 1998, 제 1호.

       

       

      출처 : http://www.missionthailand.net/thaimission/thaimission8.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