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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기독교단(CCT)의 역사와 선교사역 본문
태국 기독교단(CCT)의 역사와 선교사역
조 준 형 목사
우리교단총회 태국선교사로 1986년 9월 28일 파송 받았다.
파얍대학의 맥길버리 신학교와 치앙마이대학 교수로, 치앙마이 중심의 태국과 그 주변국 선교를 위해 사역 중이다
태국기독교단(CCT)의 역사
CCT의 역사를 되돌아 볼때 1828년 처음으로 장로교 선교사인 목사 야곱텀린과 의사 칸 꾼랍이 기독교를 전파한데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들은 미국의 교회들에 의해 파송된 런던 선교 협회의 선교사들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CCT는 1840년대에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생겨났는데 1847년 의사 사무엘 하우스와 사띠펜 목사 그리고 메리 메뚠 선교사가 서로 협력하는 기관을 만듬으로 CCT가 시작되게 되었다. 이 단체는 1948년 8월 31일 방콕에 장로교회를 세웠으며 계속해서 1858년 9월 1일-1961년까지 싸이암에 장로교회들을 세웠다. 그리고 이 선교 단체는 1861년 다니엘 목사와 사무엘 목사가 페차부리에 선교 센타를 세움으로 다른 지역으로 계속해서 확장을 하게 되었다.
한편 1867년 맥길버리 가족이 치앙마이에 기독교 선교를 위한 전도 기관을 설립했다. 그리고 월슨 선교사 가족과 연합하여 1868년 4월 18일에 치앙마이에 제 1장로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또한 미국 장로교회 소속인 버드의 허락으로 라오스 선교회를 설립했다.
결국 1868년에 미국 장로교회는 두개의 선교센타를 가지게 되었는데 하나는 방콕에 있는 사이암 선교센타이고 다른 하나는 북부 지방의 치앙마이에 있는 라오스 선교센타이다. 그리고 1885년에는 북쪽 사역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라오스 장로회를 설립하였다.
사이암 선교회는 1861년 페차부리에 선교 센타를 세운 후에 그 사역이 계속 확장되어져서 1772년에는 아유타야에 선교 센타를 세웠으나 그 사역의 성장이 그 후에 멈추었다. 그러나 1889-18일 사이에 다시 그 사역이 확장되기 시작하여 라차부리에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특히 1899년에는 페차부리 선교회와 사이암 선교회가 협력하여 피싸눌록 지역을 선교하였고 그 후반기에는 남부지방을 선교하기 시작하였는데 1900년에는 낙헌시탐마랏에 1910년에는 뜨랑에 벽지 선교와 남부 지방을 선교하기 위한 선교센터를 세웠다.
1867년 맥길버리 가족이 치앙마이에 세운 라오선교회는 계속해서 성장을 했는데 특히 1878년 왕이 치앙마이와 람푼 그리고 람빵지역에 종교의 자유화를 선포하자 1885년에 람빵, 1571 람푼에 (그러나 이것들은 1897년에 치앙마이 선교센타와 합쳐졌다), 1893 프레, 1895 난, 1897 치앙라이에 선교 센타를 설립하였으며 그 후에도 계속해서 성장하여 1904-1908 치앙뚱(버마), 1917-1941 치앙룽(중국)에까지 그 사역이 확장되었다.
선교 초기 사역부터 1894년까지 선교사역과 모든 목회사역을 선교사들이 감당하였으나 1875년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네비우스정책이 수용되자 cct의 흐름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1913년 라오스 선교회와 사이암 선교회가 하나로 합쳐지는 결과를 가져 왔으며 그 이름을 남부 사이암 그리고 북부 사이암 선교 위원회라 부르다가 완전히 하나가 되고 난 뒤 사이암 연합 선교 위원회라 부르게 되었다.
1920년에 사이암 선교회는 가장 활동적이고 성장하는 센타가 되었으며 이 선교 단체는 CCT에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 냈는데 그 새로운 움직임은 cct를 구성했던 장로교회의 두 선교 단체가 토착교회를 설립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비록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 갔지만 태국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자립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1902년-1923년 까지 태국인 지도자들이 교회를 계속해서 짓도록 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계속해서 1925년 사이암의 교회 지도자들은 선교 센타와 자신들의 사역을 되돌아보았다. 그때에 선교사가 태국인으로 하여금 자신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한 파트너로 인정하여 그들이 교회를 다스리게 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같은 해에 복음 전도위원들이 이 새로운 계획으로 사이암국의 교회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성공적으로 성장하는 두드러진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1928년 태국 기독교장로회 100주년에 태국 자치 교회들로 하여금 열심 있게 사역하도록 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를 위해 예루살렘 회의에 대표를 보냈다. 이 대표가 1925년에 돌아와서 태국 교계지도자들과 선교사들 단체로 구성되는 이른바 Mott회의라고 불리우는 회의를 통해 싸이암 민족기독협의회를 만들면서 민족 자립 교회의 설립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사이암 민족 기독협의회는 1930년 1월 6일 태국내에 있는 여러 선교 단체들인 미국 장로교회 위원회, 영국 기독교 단체, S.P.G. 단체, 미국 그리스도 연합회, 태국 장로교회 대표 등 여러 기관의 단체 대표 18명이 모여서 사이암 기독교단 회의를 열었다. 1932년 4월에 사이암과 라오스 장로교는 태국 교회를 자유롭게 치리하기 위한 새로운 위원회를 만들고 이 위원회에서는 두 교단이 서로 돕고 소식을 나누기 위한 목적으로 총회지인 '교회소식'을 발간하기 시작했으며, 1933년까지 임시 총무가 이 연합교단에 있었으나 1934년 4월에 사이암내의 교회들이 사이암 내의 교회들로만 구성되는 새로운 위원회의 결성을 요구하는 것이 새로운 총회의 헌법으로 받아들여져 정식으로 사이암 기독교단이 결성되게 되었고, 첫 번째 창립 회의 때에는 미국 장로교회와 중국 침례교회가 사이암 기독교단을 구성하였다. 사이함 기독교단의 최초의 임원들은 다음과 같다. 회장-쁘르엉 쑤티캄 목사, 총무-Mrs. 아짠 위타야 콤, 부총무-분막 낏대산목사 와 회계에는 타이용선생.
사이암 기독교단 초기에는 전체 교회를 7개의 노회로 조직했으며 아직은 선교사들에게 의지해야만 하기에 사이암 민족 기독협의회를 재정적인 후원자로 두고 있었다. 1939년 사이암국이 태국이라는 새로운 국호를 사용함에 따라 사이암 기독교단은 태국 기독 교단이라는 CCT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19771년 제 2차 세계대전에 선교사들이 미국으로 귀국함에 따라 cct는 재정과 그밖에 모든 CCT 운영의 문제들을 안게 되었고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립에 더욱 많은 힘을 기울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후에 민족주의 자각 운동으로 여러 교회들이 문을 닫게 되었고 선교사들의 재산과 학교와 병원이 모두 정부의 것이 되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나자 CCT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새해에는 선교사들이 다시 돌아와서 CCT와 다시 사역을 계속해 나간 결과 2개의 노회를 더 만들었고 이 노회는 태국인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이 함께 다스리게 했다. 1952년부터 본격적으로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부서와 기관들을 조직했으며 이들은 총회의 기구로서 부서들 및 부속 기관들이 되었다.
이외에도 다른 교단의 선교사들도 들어와 같이 사역하여 노회가 확장하여 갔다. 1949년에 미국 침례교단의(ABFMS) 선교로 10노회인 카렌족 노회가 치앙라이, 람빵과 치앙라이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1954년 독일의 마버거선교회, 제자교회(UCMS), 필리핀의 기독교단과 OMF선교회가 들어와 같이 일하게되었다. 이어서 1955년에 제11 노회가 조직되어 영국의 예수회 교회와 UCMS가 같이 나콘빠톰에서 일하게되었고, 1957년에는 제 12노회가 ABFMS에 의해서 조직되고, 1774년에 제 13노회(이싼)가 C.M.A.에 의해서 조직되었다. 1717년에 제14노회가 치앙마이의 나환자 교회들로 조직이되었는데 이 노회는 그전에 제1노회(치앙마이-람푼)에 속해 있었다. 1982년 파야호 지역의 교회를 중심으로 마버거선교회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전에는 제2노회인 치앙라이-파야호) 1989년에 제 16노회인 쌍카라부리를(T.B.M.F.) 중심한 카렌족교회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1991년 제 17노회가 뜨랑에 조직되었는데 이는 제9노회인 뜨락-나콘씨타마랏에서 나온 것이다. 1992년에는 제 18노회인 라후족 교회들이(T.B.M.F.) 들어왔다.
1957년 미국의 장로 교회의 사역에 변화가 옴에 따라 선교사들의 지위가 내려가서 동역자와 같은 위치의 동료의 입장이 되어 CCT의 권위아래서 그들의 선교사역을 하게 되었다. 1962년에는 디싸이플 단체가 CCT에 합류가 되었으며 1972년 태국 내에 미국 장로교 사무실과 UCMS가 문을 닫고 CCT에 들어 옴으로 CCT가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가지고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의 결과로 각 부서들의 조정 역활을 위해 총무를 비릇한 여러 임원들을 두었고 1776년 에뷰메니칼 부서들을 만들었다. CCT는 자립 정책의 일환으로 선교사들의 수를 줄이고 점차적으로 태국 지도자들에 의해 사역과 여러 면에서 다스리도록 했으며 세계의 교회들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1948년에 생긴 WCC의 회원이 되었고 세계 여러 기구들과 함께 활동을 했는데 아시아 교회 협의회(CCA), 세계 개혁교회 연맹의 회원이(WARC) 되었다.
1964년 CCT는 말레이지아의 싸라왁 섬에 처음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태국 교회의 최초의 선교사 파송이 되었고 이후로 태국 선교사 3명이 이곳에 선교사로 파송되게 되었는데 처음과 같은 성과는 얻지 못했다.
CCT 총회의 조직은 초기에 3개의 조직 즉 총회, 노회, 지역교회로 구성이 되었다. 총회는 매 2년에 1회가 열렸으며 1998년까지의 CCT총회의 현황은 19개 노회, 교회 505개, 미조직 교회 및 전도처 303개이고 98년 현재 교인의 총수는 93,954여명으로 이들은 서양인, 태국인,중국인, 라오스, 산족들이 포함된 숫자이다. 장래에 여러 교단들이 들어와 일을 하게 될 것이고 CCT의 분위기에 따라 들어온 교란들이 쇄신되고 하나가 될 것이다.
태국선교의 오늘과 내일
1. 사역 보고 (1987년 6월- 2000년 현재)
하나님께서 저를 총회 선교사로 태국 기독교단에 파송 하시고 선교사역을 감당케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아울러 총회와 태국총회가 합하여 사역을 하게됨을 감사 드립니다. 특히 새 문안교회가 적극적으로 후원함으로 지금까지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간단하게 지난 13년간의 사역을 소개합니다.
1) 사역 기간
1987년 6월30일 태국에 도착하여 지금까지 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1) 1987. 7- 1988. 5: 방콕에서 태국어 공부
2) 1988. 6- 1993. 5.: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사역 함
3) 1993. 6.1- 1994. 5.31: 안식년
4) 1994. 6.1- 현재. 계속하여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사역하고 있음
2) 선교 사역
1) 신학교 사역
① 교수사역: 강의 과목은 전도학, 선교학, 조직신학, 신약과목 등등
② 전 장학금 : 두앙수다 땅짓분쌍아(1989-92), 니콤 빤야(1993-94),차난폰 뎅르앙(1995-96)
③ 일부 장학금 : 쏘파폰 통론신, 우싸 두등키야우, 니텟 티앙잔따, 야꾸(산족) 암파이 마니윙, 니콤 빤야, 쑤콘락 빤야, 깔라야 락싼, 두앙쑤다 땅쩟분쌍아
④ 신학교 건축 보조: 새문안교회에서 10,000$, 개인들 10,OOO$
2) 노회별 사역
① 1노회
-쫌통지역 사역(1989-96) : 교인양육, 전도, 성경공부인도 및 목회자 지원
-쫌통교회 : 퐁싹목사 지원(1989-현), 목회자관 건림, 세례 10명.
중고학생을 위한 치앙마이 시내 기숙사 운영(7명) 매빤동네 전도
-씨춤교회 : 교회 건축(1995년 11월17일), 세례 20명. 영농시설 지원
-므앙끌랑전도처 : 세례 6명
-왕문전도처 : 교회건축(1995. 9)
-농롬전도처 내과전도사 지원, 교회건축(1994.12.10) 결신자 10명
-람푼에 개척교회 및 한태선교관 건립 추진 중
② 4노회 : 니콤전도사(메처이교회, 1992.11-77.11),
쑤콘락전도사 지원(남파이교회,1991-97.3)
③ 15노회 : 쌍원전도사(1992.11-95.11) 완차이전도사(1995.11-96.12), 탄유전도사(1992-현)
④ 14노회 : 몽콘 목사(1990-현), 완나파 전도사(1990-94), 파니다전도사(1974-57)
⑤ 18노회 : 라후산족으로 빌립전도사(1990-현), 메따창전도처 개척 및 기숙사 운영(1994.10-현, 23명의 초중고생)
3) 대학생 사역
① 치앙마이대학생 사역(1988.10.28-99.5) : 두앙수다전도사 시무.
4명의 학생들과 합숙하면서 제자 양육(6명의 학생 양육 중)
② 파얍대학 사역(1992-현) : 깔라야전도사와 15명의 학생을 제자 양육 중
4) 목회자 훈련 및 교회내 지도자 훈련
① 목회자 및 지도자 장신대 훈련: 윌라이 락싸나낏교수, 위차 나타쿤탐목사, 싸네 랏타나촘싸꾼전도사, 깔라야 랑싼전도사, 두앙쑤다 땅분짓쌍아전도사, 분야왓마노빤전도사, 왓차라퐁 삔따나전도사, 퐁싹 씬투맛목사, 쏨늑 자리펜목사 1년(Th. M)
② 목회자 한국 연수 훈련
-1차 1990.5:15명 목회자 한국교회 방문(5주간)
-2차 1992.6:10명 연수(4주간)
③ 목회자 1주간 훈련
-카렌족 침례교 목회자 120명(19노회): 3회(91.4.22-27, 91.12.2-6, 93.3,1-5,)
-라후 침례교회 목회자 100명(18노회) 1회(1996. 4.22-27)
④ 1노회 여전도회 15명 한국교회 연수(1995.10.7-17)
⑤ 청년회 한국 방문 17명 (99. 9. 30- 10. 11)
5) 장학 사역
① 나환자 교인 자녀 10명(1989-현)
② 교역자 자녀 지원:나탄 셍차이(1989-1991), 랑싼, 파이툰전도사 자녀 2명
③ 메싸리앙읍의 탄푸라폰 교회의 산족 기숙사 지원(1990-현)
6) 사회 봉사 사역
새문안교회 의료 봉사 및 찬양팀 방문 3회 (1992.11.8-12,1994.9.19-23,1995.9.7-30,1998.5.16-20)
그 외 다양한 전도, 봉사, 의료 팀들이 방문하여 많은 열매를 맺었다.
7) 라오스 선교 사역
99년 1월부터 우돈라차타니에 분미장로를 통하여 라오스교단과 사역을 시작함.
결론 : 위 사역을 정리하면 영적인면, 사회적인면, 교육적인면, 육적인면을 중심으로 전인적인 선교사역을 감당하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성령님께서 함께 하셔서 역사를 감당케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모든 협력자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2. 현재의 사역 소개
1. 한-태 선교관 사역 소개
1)동기
① 람푼시가 치앙마이와 쌍등이 도시로 역할을 함으로 도시 선교의 필요성
② 람푼시의 수퍼하이웨이를 중심으로 공업단지가 조성, 공단 선교의 필요성
③ 오래 전에 선교사에 의하여 람푼에 교회(교인 150명 가량)와 성서학교 봉사 쎈타가 있었으나 40년 전에 사라지고 말아으며, CCT에 속한 교회가 람푼시 안에는 없어 새로 개척할 필요성
④ 교회가 지역사회의 영적, 문화적인 센타로서의 역할; 전인적인 선교의 역활
2). 사 역 분 야
① 교회 개척
- 도시인을 위한 전도 목회
- 공단에 복음 전파
② 교회 성장 훈련
- 교회 목회에 필요한 각 사역별 훈련 프로그램
예, 목회자세미나, 여전도회세미나, 사모세미나,청년-주일학교세미나, 음악 지도 등
- 교인 영농-직업 개발 훈련
③ 사회 봉사 프로그램
- 어린 - 노인에 이르는 전반적인 사회 활동 프로그램
유아원, 컴퓨터, 영어, 한국어, 상담, 악기, 노인 대학 등등
- 여러 기독교 단체와 건전한 사회 봉사 활동 단체들과의 상호 협력 봉사
④ 해외 선교 사역
- 태국 이외의 동남아 지역의 교회 성장과 선교를 위한 프로그램
목회자 훈련 및 세미나
- 한국 교회를 위한 선교 후보생 훈련 및 선교사 훈련
- 여러 외국 선교사와 단체들 간의 협력 및 경험을 나눔
3)건 물
① 교회 건물(2층)
1층; 유아원, 식당, 부엌, 2층: 예배실 (300명)
ⓒ 봉사관
1층; 세미나실 5개 2층: 숙소(강사와 훈련자)
③ 목회자관과 선교사관
4) 헌당:1998년 5월 15일
2. 한태 선교관 소식
1) 교회소식 : 대부분의 교인들이 초신자이거나 믿음의 깊이가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주일 오전 성경공부 반을 새신자반과 일반 성경부반으로 나누어 모임을 갖고 예배를 드립니다. 아직은 많은 인원이 아니지만 말씀공부하는 자세가 차츰 변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도행전을 가르치고, 쏨칫목사가 새신자반을 가르칩니다. 올해 들어와서 1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30명 정도의 등록 교인이 있고 10여명은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정식 반주자가 없어 쏨늑목사 사모가 월 2회 와서 반주합니다. 공단에서 오는 젊은 교인들은 변화가 맡고 주일이 휴무가 아니라 어려움이 있습니다. 한인전자회사에 전도를 정규적으로 나가면서 외부 인사가 와서 근자에는 초등학생 반이 장식으로 모임을 갖고 신학생이 가르칩니다. 교도소 전도가 은혜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약 사범 죄수가 점점 늘고있어 사회문제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죄수 가운데는 1년 미만되는 아기를 데리고 들어와 수감생활 하는데 6-7명의 아기를 위하여 교회에서 우유와 분식을 넣어주고(정부 예산이 없음) 정기적으로 다른 교회와 연합하여 방문하고 있습니다. 8월26일 방문시 예배 후에 20살 갖넘은 여죄수 한 명의 결신을 받았습니다. 또한 11명이 통신성경공부를 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다른 자매는 자신이 물질에 어두워 주일을 범하면서 장사를 하고 결국에는 만약에 손을대 결국 이곳에 왔다면서 이곳에 오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간증을 하였습니다.
40-50명이 예배에 참석하는데 대부분이 관심자들이며 이곳을 나가면 믿음의 생활을 하겠다고 합니다. 예배를 마치면 그들을 나누어 상담도합니다. 남자 쪽도 많은 관심자들이 있읍니다.
2) 교회지도자 양육 사역 : 3-5월은 태국의 방학기간이라 각가지 훈련, 수련회가 매주 열려 쎈타가 전가동 되었습니다. 목회자훈련, 사모훈련, 교사훈련, 주일학교 교사훈련, 주일학교 수련회 등. 마지막 수련회를 마치고는 저와 집사람, 직원들이 몸살을 앓기도 했습니다. 쎈타의 소문이 펴지면서 이곳을 이용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아가서 태국교회를 위한 여러 분야의 전문적인 훈련학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길 기도합니다.
3) 봉사사역 : 유아원은 작년부터 시작하였고 올해에는 2월부터 의료진료와 태권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후 영어, 한국어, 음악교실 등도 열었습니다. 특히 태권도는 중고생들에게 최고의 인기 종목으로 60명이 등록하여 배우고 있습니다. 도복에 교회 십자가 위로 무지개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합니다. 노량진교회 청년 전도팀이와서 이들과 같이 만남의 시간을 갖고 전도를 하였습니다. 음악 사역을 의한 동역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4) 선교사역 : 한국교회에서(부산 은성교회, 서울 노량진교회) 선교훈련 팀들이 이곳에 와서 선교 실습을 은혜 가운데 마쳤습니다.
- 센타의 전체 예산 중 인건비와 유지비는 봉사사역의 수익금과 센타 사용료 등으로 자립하고 있습니다.
3. 신학교 사역
올해 신학기에 예년에 비하여 많은 학생들이 입학했습니다. 47명입니다. 4학년 학생들이 전도학을 배우는데 9월 17일에 전도를 나갑니다. 처음으로 개인 전도를 나가기에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대부분이 생전 처음으로 많은 무리 앞에서 전도하는 경험을 합니다. 근자에는 많은 신학생들이 포기하고 돌아갑니다. 사명감 없이 오는 경우, 실력이 부족한 경우, 행위가 부적합 경우 등입니다. 졸업생 가운데 목회자로서 나가는 신학생의 비율이 20% 정도입니다. 목회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태국교회이지만 (50%의 교회가 목회자 있음) 현실이 그렇지 못해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기도가 필요합니다.
4. 산족 사역
카렌 농롬교회는 크게 성장하진 않지만 어린이 전도 및 성경학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월 두 번에 걸쳐 띵전도사가 30여명의 학생들에게 성경학교를 열고 있어 좋은 반응입니다.
라후 기숙사에는 22명의 학생이 있으며 빌립전도사 부부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년 2-3 차례 열고있는데, 처음으로 복음을 배우기에 새로 들어온 10여명은 어색한 듯 합니다. 컴퓨터 1대를 기숙사에 설치하여 공부와 실습에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이 2-3년간 수확이 적어 주민들이 고생을 하고 있고 생활 필수품 부족 현상이 있습니다.
메따창 교회는 주일에 1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3. 미래의 사역
1) 다양한 훈련원 개원: 상담자 훈련원, 교사 훈련원, 목회자를 위한 교회성장 세미나. 청년 사역자 훈련원 평신도 훈련원 등
2) 전문인 평신도(단기 선교사) 사역자 초청: 음악 및 기술을 가진 전문인
3) 우리 총회와 CCT 간의 보다 폭 넓은 인적 자원의 교류 및 훈련
4) 태국 전국을 커버하는 사역을 실시
5) 폭 넓은 봉사 사역과 복음의 전파 강화
6) 선교사역의 구체화:
① 한국의 선교사 후보생이나 훈련을 위한 적극적인 프로그램 개발
② 태국인 선교사 훈련 기지화 ,
③ 주변국 선교에 따른 훈련 프로그램 개발 : 라오스를 위한 사역 개발 및 주변국의 우리 교단 선교사와의 밀접한 협력 체제 강화
④ 선교사간의 선교 세미나 개발
4. 일반사역
1) 태국에 주재하는 총회 선교사간의 구체적인 사역의 분담과 협력 모색
2) 라오스 사역의 방향을 정하고 직-간접 사역을 위한 구체적인 사역 확정
3) 동남아 선교의 총회적인 차원의 방향과 방법을 논의할 수 있는 창구를 열고, 중국 서부지역을 공략할 수 있는 선교 전략을 세운다.
4) 선교사 자녀를 위한(특히 동남아 지역) 기숙사 운영의 타당성을 조사하고 총회에 건의한다.
5) 새문안 선교사들 간의 협력을 모색한다.
4. 라오스 교회 방문 보고
방문 일정: 1999. 10. 14-17
방 문 자: 씬목사(CCT총무) 분미 장로(태국-라오스 사역자), 조준형 선교사,김장원선교사,
면 담 자: 싸이비타우 목사(라오스 총회장) 엘리아 타마위(부총회장) 캄폰목사(라오스총무) 시리완목사(라오스 간사)
I > 사역소개:
라오스는 17개 도로 구성. 각 도에 교회와 교인이 있다.
5개 도에서 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있다.
1) 전도 사역 : 전도를 마음대로 할 수 없으나 1:1 전도, 청년 노인들에게 VDO를 통하여 전도. 90년부터 종교의 자유를 어느 정도 허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3-4 개월 전부터 매월 100명 세례 받음, 교회 건축시에 정부에 요청하여 허락을 요청해야 한다.
2) 훈련 사역: 주일학교 교사훈련을 통해 자격증을 준다. New Life Groups 모임= 예배 후에 청년 중심 .
평신도 훈련- 1년 코스로 매월 2주간
3) 신학 과정 훈련 사역
97년에 시작하였다. 각 도에서 와서 훈련. 2년 간.
1차 25명 졸업(98. 11월) 2차 25명(99. 10월 졸업)
3차 28명 수업 중 4차 99. 11월에 시작 예정(20명 정도)
4) 교회 개척은 어떻게
- 사회 봉사 사역을 통해 : 우물 파주기, 운동 기구 기증, 핍박이 많았으나 봉사를 통하여 친근해 짐.
- Exposure Trip(공무원들을 태국에 초청, 교회와 여러 기독교 사역을 보게 하는 사역) : 이후에 핍박하고 비협조적인 공무원들이 교회 사역을 돕게 됨.
- 99년 9월의 Trip 평가회에 교계 지도자를 초청하여 회의 함. 특히 외무부 공무원이 참석한 것은 이번이 이례적이다.
- 교회 건축:
1단계: 엉성하게 대나무로 시작하여 3-4년 후에 정부에 건축 허가
2단계: 좋은 대나무 혹은 시멘트로 짓는다
- 각 도에 핍박이 심하다. 28명이 감옥에 있었는데 8명이 지난주에 석방됨. (쑤완나켓지역) 16개 교회를 새로 개척. 1990년 이후 본격적으로 사역 시작했으나 정부 차원에서 핍박이 있고 믿는 자들도 반대하는 경우가 있다. 사회사역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한다. 어떤 때는 교회 내에 배구 팀을 만들어 주변의 경찰, 군인 팀들과 경기한다. 저들은 기독인 팀에 대해 신기하게 생각한다
ll > 연합 사역 협의 : 라오스 교회의 제안
- 영농 훈련을 통해 교인들의 자립을 돕고, 불신자도 참석함으로 좋은 전도의 기회를 가짐
- 훈련받는 목회자에게도 영농 교육 실시
- 학위를 주는 전도자 신학 교육
- Exposure Trip을 년 2회 정도- 태국 교회를 방문하거나 라오스 교회의 사역지 방문
(E.T.=공산당원인 공무원들을 태국에 초청하여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역)
111 > 10. 15-16. 왕위앙 지역 교회 방문
95년에 전도처로 시작하여 97년에 교회를 세움. 21명 예배 참석. 비디오 선교를 시작, 한 가정의 여성이 러시아로 유학하여 믿음을 갖게되고 그의 가정을 통하여 예배 시작함. 처음에는 그의 집에서 예배를 시작하였고, 과거 경찰 간부가 예수님을 믿고, 지역의 재판소의 간부가 땅을 (건물 포함) 팔았기에 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쏨분 전도사가 시무 중인데 위앙짠(수도)에서 신학 교육을 받고 있다.
결론: 라오스 교회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 성장하고 있다.
이는 성령의 역사요, 교회와 주의 백성을 회복하시는 역사요, 하나님이 친히 이루시는 역사이다.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뜻을 두시고 역사하고 계신다. 주의 백성들을 통하여 때로는 이방인들을 (정부 관리) 통하여 역사 하시고 계신다. 복음 전파의 열매가 많은 것은 다른 동남아와 달리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거의 없다.
프랑스의 식민 기간 동안 프랑스가 주민들에게 폐해를 별로 주지 않은 것 같이 보이고 지난 공산 치하 동안 식민시대의 사람들이 많이 사라져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 또한 공산치하에서 자란 젊은이들은 어떤 특정 종교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태국의 청년과의 다른 점) 따라서 이런 상황이 전도에 큰 효과를 준다. 교회가 공산 기간 동안 핍박 속에서 회개하면서 새롭게 섰고 눈물의 간절한 기도는 성령의 역사 하심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학개서를 읽으며 하나님이 중단된 성전 건축을 재건하시고, 회복케 하시는 것을 알게되었다. 라오스에서도 주님이 친히 이런 역사를 이루시고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사역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성령의 인도로 현지인들에 의해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감당하는 사역은 현지 교회를 지원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우며,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logos/3kBP/229
V. 미얀마 사역 보고
1999. 12. 8-11의 미얀마를 선교팀과 방문하여 2000년 초에 미얀마의 수도 양군에 개척교회를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Vl. 기도 제목
1. 라오스교회가 공산정부의 핍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
2. 주님이 미얀마교회 개척에 필요한 복음에 열정이 있는 목회자와 복음이 절실한 지역을 허락하여 주시도록 -.
3. 저희 가정이 성령의 역사에 의지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도록‥‥
4. 저희 가정의 안식년 준비와 성원이와 아라가 대학 진학을 잘 준비하도록‥‥
** 1999년 방문팀 : 사랑의 교회 청년회 24명(1.22-24), 부산 은성교회 청년회 16명(8.11-15), 노량진교회 청년회 16명(8.16-21), 태국 청년 한국 방문 18명(9.3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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