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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 태국 선교의 현황과 본문

선교 태국/펌) 태국 선교

펌 ) 태국 선교의 현황과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20. 6. 20. 10:59

 

태국 선교의 현황과 문제점 그리고 해결책

2019년 5월 29일
태국 치앙라이에서

조병성. 서세윤 선교사


서문
   나는 태국선교 4년 차이고 아내는 7년 차이다.
 이 시점에서 태국선교에 대한 실제적인 상황과 문제점 그리고 해결책들을 짚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국은 한국뿐만이 아니라 미국이나 호주 쪽에서도 꾸준히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선교역사 180여 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여전히 1% 미만 대의 복음화율을 자랑(?)하고 있다.

   복음화율 1%미만의 민족이나 나라를 미전도 종족 혹은 미전도 국가라 부른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아마존 밀림 지역의 개방되지 않은 종족(식인을 한다거나 혹은 코뚜레를 하고 불 앞에 모여 춤을 추는..)만이 미전도 종족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일까?  혹 귀가 둔하신 것인가? 혹은 하나님이 이 태국엔 관심이 없으신 걸까?...

절대 아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에게서 찾으면 안 되고 바로 사람에게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닌(사59:1) 바로 인간의 죄악, 인간의 잘못이 가로 막고 있기 때문임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논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구를 설득하기 위한 연설문도 아니다. 
단지 태국 선교에 대한 현 시점에서의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하고 과거 선배 선교사들의 잘못된 과오를 회개하고 다시는 그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취지에서 쓰게 되었다.

   또한 여기 쓰는 모든 글들의 기반을 성경에 두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 크리스천의 모든 지침이요 표준은 바로 성경이기 때문이다.  
부디 이 글을 통하여 단 한 사람이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지닌 선교사가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2019년 5월 29일
태국 치앙라이에서…
조병성&서세윤 선교사

 

1. 태국 선교의 현황
  1) 태국 소개
   가. 민족에 관하여
태국의 선교 현황을 알기 전에 먼저 태국이란 나라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큰 그림으로 이해를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태국은 우리 한국과는 다른 문화와 민족구성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나중에 이야기할 문제점의 일부도 이 민족구성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태국의 민족구성을 보아야 한다.
 태국을 다민족 국가로 보는 견해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절대로 태국은 다민족 국가가 아닌 단일민족 즉 타이족으로 구성된 국가이다. 
이는 태국의 국가(한국의 애국가 같은)인 “플랭 찻 타이”의 내용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다.(타이족을 강조하고 있음)

   그런데 태국은 이 타이족 이외의 산족(소수민족,)과  그외 소수의 중국계와 이슬람계가 어울려 있다. 
하지만 태국 국민의 4/5이상이 타이족이고 나머지 1/5정도가 산족과 중국계 그리고 이슬람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태국에 선교하러 갑니다.”라고 말할 때 이 태국은 타이족을 말하는 것이지 산족이나 중국계 혹은 이슬람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산족 같은 경우 매우 다양하게 존재하는데 아카족, 라후족, 리수족 등등 10여 개 이상의 소수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소수 민족은 언어도 태국어를 쓰지 않고 각 족속별 언어를 따로 사용하고 있다.

다시 강조하자면 한국=한민족 이듯이 태국=타이족임을 알아야 한다.
80%이상을 타이족이 차지 하기 때문에 정치 경제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타이족들이 독점하고 있으며 일상생활에서도 타이족들은 소수민족들을 산족(태국어로 ‘콘더이’)이라고 부르며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소수민족들은 전통적으로 태국이 아닌 타 국(라오스나 미얀마 캄보디아 등)에서 이주한 경우가 많으며 이를 타이족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받아주고 살게 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 종교 구성(타이족)
 태국의 종교 구성은 단연히 압도적으로 불교(소승불교)가 대세(타이족의 90%이상)를 이루고 있다. 
이 타이족들에게 불교는 종교가 아닌 생활이다. 
어릴적부터 죽을 때까지 불교가 관여하고 있으며 각 집에는 ‘산푸라품’이라는 개인 신전 같은 것을 모시고 있다. 
어찌 보면 조상 대대로의 불교의 뿌리가 뼈 속 깊이 박혀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남자가 성인이 되면 한번 정도는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된다든가(한달~3년 정도), 
이사 하면 승려를 불러 예불을 드린다든가, 
매년 전통신년행사(쏭크란)에 승려를 모시고 예불을 드리기도 하며, 
죽었을 때 장례도 거의 대부분 절에서 주관한다.

  태국의 불교는 한국의 불교와는 약간 다르다. 
이곳 불교는 ‘하나님’이란 신적 존재를 믿지 않고 ‘자연’을 ‘하나님’ 으로 모신다. 
그러기에 자연적으로 다원론적 신앙관이 깊이 박혀있으며 이들에게 신은 해와 달이며 바다나 강 혹은 각종 동물들이 되기도 하고 큰 나무가 되기도 한다.
이 문제는 이들에게 과연 선교적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참고로 산족(소수민족)은 40%이상이 카톨릭이나 개신교이다.  
다시 말해서 태국의 복음화율이 1%라고 말 할 때 그 1%의 대부분이 산족(소수민족)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러분 주변에 태국 선교사가 있다면 한 번 물어 보라 “지금 하시는 사역의 대상이 타이족이예요 아니면 산족이예요?”  
단언컨대 10명중 9명은 산족일 것이다(아카족, 라후족, 리수족 등등)  왜 태국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태국의 주종족인 타이족이 아닌 산족(소수민족)을 대상으로 선교를 할까? 
이 문제는 나중에 태국 선교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 다시 언급할 것이다.

다. 민족성(타이족)
태국의 민족성은 불교에 기반한다. 
이 들에겐 ‘탐분문화’라는 특이한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탐분’이란 대략 열 가지 정도로 구분 되는데, 승려에게 시주하고, 절에 가서 봉사하며, 어려운 사람을 돕고, 힘든 일에 서로 협력하는 등의 일들을 말한다. 
또한 타이족들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다. 남에게 해 끼치기를 싫어하며 잘 싸우지도 않는다.  이러한 타이족의 민족성은 과거 태국 역사에서 전쟁을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유래한다. 
이들에게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보다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한시가 더 어울리는 듯하다. 
외교에 있어서도 이들은 중립성을 매우 강조한다.  
이러한 민족성을 아는 것 또한 이들에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라. 경제
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 만해도 태국은 못 사는 나라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구호 물품이나 옷가지, 학용품 등등의 지원이 필요한 나라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런 내 생각과는 정 반대로  태국은 절대 못사는 나라가 아닌 한국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선진국 수준의 나라였다.
 아마도 이곳에서 한 달 정도만 생활해보면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못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못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산족(소수민족)들이다. 
타이족 대부분은 한 집에 한 대 혹은 두 대 이상의 자가용을 소유하고 있으며 집과 직장을 가지고 있다.
한 끼에 만 원 이상 가는 외식도 가끔 하며 여행도 다니고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즐기기도 한다. 
나이트바사(야간시장)에 가면 값싸고 좋은 옷들과 물건들이 즐비하다.
KFC에서 치킨을 먹고 피자헛에서 피자를 먹는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센탄(센트럴 파크)이라는 쇼핑몰에서 쇼핑을 즐기고 극장에서 이제 막 개봉된 어벤져스 인피니티2를  팝콘을 먹으며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태국의 못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대부분은 소수민족(산족)들이다. 
그들은 국가에서 무상으로 제공한 땅에서 커피농사를 짓거나 쌀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거나 시장에 자신들의 전통제품을 만들어 내다 팔아서 먹고 살기도 한다. 
어쩌면 그들은 태국의 전통 민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기에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어떻든 태국 국민의 80%이상을 차지하는 타이족은 여러분의 생각과는 많이 다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마. 정치
태국은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이다. 
국왕이 정치는 하지 않지만 국왕은 국민들(타이족)의 정신적 지주이다. 
이들에게 국왕은 아버지이며 왕비는 어머니이다. 
더군다나 2년 전(2017년) 승하한 국왕 ‘푸미푼 아둔야뎃’은 70여 년간 국민들을 위해 훌륭한 일을 많이 했기에 이들에게 있어서 국왕의 존재는 거의 절대적이다.  

실제적인 정치는 총리가 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정당이 있으며 쿠데타를 통한 군인 정부가 들어섰었고 올해(2019년) 국민 투표(총선)를 통해 민간으로의 정치 인양을 시도했다.  

종교에 대해선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너희가 아무리 선교해 봐야 민족의 뿌리인 불교를 이길 수 없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며 슬프게도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상으로 태국의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 살펴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 나와 내 아내가 이곳에서 살면서 직접 태국인(타이족)들에게 듣고 경험하고 알게 된 것을 기반으로 했다.
 또한 침술 치료를 통해 천 여명이상의 산족(소수민족)들이 우리 센터(성민T.D.M.C)를 다녀갔기에 그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백승’이란 말이 있다. 
태국에 대해 제대로 알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2) 태국 선교 현황
카톨릭 선교 역사는 15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카톨릭(포르투갈)에 의해 처음 선교가 시작되었으며  개신교는 1828년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의 태국에 대한 개신교 선교는 한국전쟁 이후 1956년 최찬영, 김순일 선교사의 파송을 그 시작으로 본다.

현재(2019년) 태국에는 크게 두 개의 개신교 그룹이 있다. 
첫째는 에큐메니칼 그룹인 태국기독교총회(C.C.T)이고
두 번째는 태국 복음주의 그룹인 태국복음주의협의회(E.F.T)이다.

1828년에 시작된 태국 개신교 선교는 뿌리 깊은 역사와 선교사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현재(2019년) 카톨릭+개신교 통합 1%미만에 머물러 있으며 개신교만 놓고 보았을 때 이 보다 훨씬 내려간다. 
거기에다 80%이상을 차지하는 타이족들만 놓고 본다면 내 계산으론 타이족의 개신교인구는 전체 인구 중에 0.1% 아래라고 보면 될 것이다.  
태국의 개신교 성도들의 대부분이 산족(소수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뿌리 깊은 역사나 열정적인 선교에도 불구하고 태국 개신교가 추락하고 말았을까?  
앞 서문에서 내가 언급했듯이 이 문제 원인은 바로 인간에게 있음을 알아야 하며 지금까지 나와 내 아내가 발견한 문제들과 그 해결 방안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2. 기존 태국 선교의 문제점
 1)문화 선교
    거의 모든 신학대학에서 선교학 시간에 가르치고 있는 ‘문화 선교’가 어찌 보면 태국선교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이곳 태국에서 이 ‘문화 선교’를 다른 말로 ‘퍼주기 선교’라고 혹은 ‘돈 선교’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문화선교는 기숙사사역, 방과 후 사역, 언어사역, 음악사역, 스포츠 사역 등을 총칭한다.

이 문화 선교의 문제점을 파악해 보자.
첫째로 ‘문화 선교”라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말이다. 
예수님도, 베드로도, 바울도 그 어떤 사도도 문화적으로 접근해서 복음을 전한 기록이 성경에는 없다. 
그렇다면 2,000년 전에는 문화가 없어서인가?  아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로마제국은 문화로서 가장 발달했으며 언어도 라틴어, 아람어, 헬라어 등 각종 언어가 발달했고 스포츠 또한 지금과 거의 다를 바 없이 발달한 제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포함한 사도들과 70명의 제자들 어느 누구도 문화 선교했다는 기록은 없다.

 둘째로 문화 선교에는 필수적으로 따라 붙는 것이 있다.  
바로 “돈”이다.  
내가 선교사로 나간 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돈 없으면 선교 못해” 이다. 
바로 이 ‘문화 선교’ 때문이다. 
만약 돈이 없다면 어떻게 기숙사 사역을 할 것이며, 
어떻게 건물을 지을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그들을 모은단 말인가?
 ‘문화 선교’에는 필연적으로 돈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선교사들이 후원금에 연연하게 되고 그 후원금을 유지하기 위해 문화선교를 해야 하고 또 다시 돈이 필요하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절대로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겸하여 섬기지 못 한다고…(눅16:13)

 셋째로  문화 선교는 퍼주기 선교이다. 
사람을 모으려면 퍼주어야 한다. 
옷이든 볼펜이든 퍼줘야 하고 가르치는 것도 공짜로 해 줘야 하고 기숙사 사역하는 것도 거의 공짜로 해줘야 한다. 
그러기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돈’이 있어야 한다.

 넷째로 문화 선교는 절대로 동등한 경제. 문화권이나 상위 경제.문화권에서 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문화 선교를 할 수 있는가?) 
선교사 자신이 속한 문화나 경제보다 하위의 나라나 민족에게 통한다. 
이곳 태국에서 선교가 산족(소수민족)에게 집중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동등한 문화, 경제권인 타이족에게는 문화 선교는 불가능하고 하위 그룹인 산족(소수민족)에게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다면 옆에 인터넷을 여시고 ‘태국선교’라고 입력한 후 조회해 보세요.  90%이상이 문화 선교, 산족(소수민족, 아카, 라후, 리수 등등)선교 입니다.)

다섯째로 문화 선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건물이다.
(이것도 생각해보니 ‘돈’이네요 ) 
그러기에 선교지에서 크게 두 부류의 선교사가 있다고 한다. 
건물(교회든 센터이든)있는 선교사와 건물 없는 선교사…(참 슬픈 현실이다.)
 한 태국인 전도사에게 우리가 직접 물어보았다
“ 당신은 선교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태국전도사가 뭐라고 대답했을까?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의 대답은 “ 교회 지어주고 후원해 주는 사람이요~”이였다.  
우리가 자주 방문하는 태국인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를 담임하는  태국인 목사님 왈 “ 태국 사람들은 한국 선교사들 보면 돈이 많다고 생각해요”  
결국 이곳에서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그저 교회건물 지어주고 돈으로 후원하는 “물주”일 뿐인 것이다.
 이 문제가 이들의 잘못일까?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렇게 생각하게 만든 문화 선교를 하는 선교사들이 문제인 것이다.

참고로 여러분은 교회를 ‘건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교회론의 기초인데 교회는 유기적인 그리스도인의 집합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리운다. 
헬라어로 교회는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세상에서 구별된 자’를 뜻하지 절대로 건물을 뜻하지 않는다.
 아직도 교회를 십자가가 서있는 건물로 생각한다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제대로 읽어보길 바란다. 
예수님을 비롯 모든 사도들 그리고 신약성경의 어디를 봐도 교회를 건물이라고 말한 곳은 없으며 건물을 짓지도 않았다.
(오히려 건물(성전)을 무너뜨리셨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교회란 단어는 ‘성도의 모임’을 뜻하는 것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여섯째로 문화 선교를 하게 되면 바쁘다. 
아이들 가르쳐야 하고 보살펴주어야 하고 공연준비도 해야 하고, 차량운행도 해야 하고, 방학 때면 단기 선교팀도 받아야 하고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뭔가 선교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착각도 들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되니 정작 말씀 연구와 가르침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문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하기 위해 말씀을 가르치는 역전이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기회도 없으며,  태국어말씀연구(특히 선교사는 언어적으로 다르기에)에 집중할 시간조차 없다.

이상 문화 선교의 문제점을 들어 보았다. 
이런 문제들이 이번에만 생긴 것이 아니다. 
태국 선교역사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퍼 주기식 선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180년 이상을 이렇게 해왔고 또 실패했다.  
그런데 오늘도 선교사들은 이런 실패한 선교를 또 다시 하고 있다.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아니 동물이라도 계속 실패하면 다른 길을 모색하기 마련인데 왜 태국 선교는 180년간 실패한 문화 선교, 퍼 주기 선교를 계속 반복해서 하는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문화 선교가 계속되는 한 태국 선교의 미래는 절대로 없다.

 2)말씀의 부재
내가 3년 전 태국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가장 궁금한 것이 태국어로 “성령님” 이었다. 
성령님은 헬라어로 ‘하기우 프뉴마토스’  영어로 ‘홀리 스피릿’  인데 태국어로는 '프라윈얀 버리숫’이었다. 
여기에서 ‘프라윈얀’은 영을 말하고 ‘버리숫’은 ‘순수한’, ‘순결한’ 영어로‘pure’를 뜻한다. 
혹은 처녀(virgine)를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처녀 마리아를 ‘마리 싸우 버리숫’이라고 부른다.  
태국어 단어에 거룩한(Holy)이란 뜻의 ‘싹씻’이란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순결하다는 의미의 ‘버리숫’을 성령님으로 쓴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성경을 보면 안다.
 하나님은 이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신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으며  그 뜻도 모세를 통해 알려주셨다. 
또한 아브람과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으며 모든 예언자들의 이름엔 그 의미가 들어있고 예수님의 이름도, 세례요한의 이름도 직접 정해주셨다.
 이토록 중요한 이름, 거기에다 하나님의 삼위 중에 한 분인 성령님의 이름에 왜 하필 ‘버리숫(Pure, virgin)을 썼을까…
지금도 모른다. 
어떤 태국인 목사도, 선교사도 지금까지 설명하지 못한다.(궂이 설명한다는 것이 관습이 그래서 라고…)

   내가 기도하며 생각했을 때 이유는 단 한 가지. 
이곳 태국은 말씀에 관심이 없다. 
말씀은 성령님의 검이며, 능력인데 ‘버리숫’ 엔 권능이 없다. 
그저 깨끗하고 순결할 뿐이다. 
하지만 이들은 말씀이나 성령의 권능엔 관심이 없기에 권능과 힘을 상징하는 ‘싹씻(Holy)’을 쓰든 말든 아무도 지적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이것이 태국에서 성령의 이적과 표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태국기독교청년이 우리에게 말했다. 
“계시록은 읽으면 안 되는 책이래요 무서워서요”
이 말을 듣고 정말 기가 막혔다.  
믿는 자들에게 마라나타의 소망과 믿음을 주는 요한계시록이 무서워서 못 읽는 책이라니….

   태국인 전도사 중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구약이 뭐고 신약이 뭔지도 모르는 성도도 봤다.

   이곳에서 내가 말씀을 가르쳐준다고 하면 이상한 눈으로 본다. 
그리고 갈급함도 없다……
선교사는 그저 와서 건물 지어주고 영어나 한국말 가르쳐주면 되지 왜 말씀을 가르치나 하는 눈초리다.  
이것 또한 이들 잘못이 아니다. 
문화 선교하시느라 바쁘신 선교사님들의 잘못인 것이다.

   아내가 요한 복음을 새로 번역해서 거의 완성 단계에 있다. 
태국에 태국어 성경이 많이 있는데 왜 또 번역을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쓸데 없는 짓 한다고)  
번역하는 첫째 이유는 태국성경이 ‘라찻샆’이라는 궁중언어(한국성경으로 치자면 한자성경)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태국인이 읽어도 그 뜻을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둘째. 원어(헬라어, 혹 히브리어)와 다르게 번역되어 있는 경우가 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성령님이 ‘버리숫’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 할 때 ‘아버지’ 또한 ‘프라비다’(한국어로 비유하자면 아바마마)로 되어 있기에 이를 ‘쿤퍼’(한국말로 하자면 아버지)로 바꾸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한국에서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모르는 자식을 가리켜 ‘후레자식’이라고 들 말한다.  
그런데 이곳 태국에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히브리어)도 모르고 쓰지도 못한다. 
여러분 중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봐도 ‘저게 뭐여?’하는 사람이 없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고 아내를 이곳 태국에 보내신 이유는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라(마 28:19~20)는 것이지 문화사역이 아님을 나는 확신한다.

   이 말씀의 부재가 바로 태국 선교의 가장 큰 걸림돌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3)성령님의 역사의 부재
이곳 태국은 성령의 기적과 표적(방언, 예언, 신유 등)이 없는 곳이다.  
성령님이라는 태국어 단어 자체가 그저 순결한 영일뿐 영적인 힘이나 권능도 없을뿐더러 이들에게 성령님의 이적과 표적이 간절하지도 않다. 
이들에겐 그저 건물 지어주고 영어나 한국어, 피아노나 기타 가르쳐줄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 
선교사가 문화선교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금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는 말씀이 이곳에선 그저 2,000년 전 베드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명령일 뿐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행1:9) 선교하라는 말씀이 성경 말씀이다. 
그러나 나는 이곳 현재의 태국 선교를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오직 돈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문화를 가지고~”

 4)잘못된 선교대상
앞에서 서술했듯이 태국이란 나라의 국민의 80%이상은 타이족이 차지한다. 
그래서 영어로 타일랜드이다. 
타이족들은 산족(소수민족)과 엄연히 구분되며 언어 자체도 다르다.

   그런데 왜 태국에 오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타이족들이 아닌 산족(소수민족)상대로 선교를 하는 것일까?   
우리가 3년간 침술치료를 했을 때 거의 산족(특히 아카족)위주로 했다.
 우리가 원한 것도 아닌데 그냥 오는 사람들이 다 그랬다. 
천 여명이 넘게 왔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카톨릭 이거나 개신교 였다. 
이를 토대로 보았을 때 산족(소수민족)들의 복음화율은 50%를 훌쩍 넘어선다. 
개신교만 놓고 봐도 40%대가 넘는다.  
산족 마을에 가면 거의 대부분 교회당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왜 선교사들이 이미 선교의 의미가 없고 자생할 수 있는 산족(소수민족)에게만 가는 것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문화사역’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돈으로 사역하기 쉽기 때문인 것이다. 
이유는 첫째 산족(소수민족) 대부분이 가난하기 때문에 도움을 필요로 한다. 
둘째 이미 복음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모으기가 쉽다.(기독교에 대해 매우 호의적임)

필리핀의 복음화율의 50%가 넘어서서 선교사들이 철수 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자생할 수 있고 선교사를 받을 나라가 아니라 파송할 나라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 산족(소수민족)들은 복음화률 50%가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파송은 커녕 자생 자립하지도 못한다. 
선교사들이 돈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태국은 타이족의 나라이지 산족(소수민족)의 나라가 아니다. 
산족들에게 복음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복음화 되어 있다.  
태국 복음화률 1% 미만이다 라고 말할 때는 ‘타이족’을 말하는 것이다.  
이 타이족은 문화로 접근이 힘들다.(문화수준이 한국과 비슷함) 
또한 자존심도 강하기 때문에 돈으로도 안 된다.  
이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문화나 돈이 아닌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한다.

한국에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합법이든 불법이든 취업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이족이 아닌 산족(소수민족)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상으로 태국 선교의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다.
 나는 신학공부를 하기 전에 세상에서 영업을 하였다.
15년 정도 보험과 자동차판매를 했고 내 사업도 2년여 정도 해 보았다. 
사람은 실수를 할 수도 있고 또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다. 
세일즈나 사업도 마찬가지이다.  
다행인 것은 몇 번 해보다 실패하거나 혹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면 다시 돌아와서 다른 방법을 쓰거나 제대로 된 길을 가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이곳 태국에 오는 선교사들은 참 이상하다.
180년 이상을 실패 했던 선교 방법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반복한다. 
왜 그러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와 내 아내는 과거 그리고 현재의 잘못된 태국 선교방법을 따라 하고 싶지는 않다.

3. 해결 방안
나는 해결방안을 주신 하나님께 참 감사한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태국 선교는 문제투성이다. 
하지만 해결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이 해결 방법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닌 바로 ‘성경’ 안에 있다.  
어찌 보면 해결 방안이 아니라 선교의 방법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를 우리가 무시한 것뿐이다.

   예수님이 하셨던 선교방법, 바울이 했던 선교 방법이 바로 해결 방안이다.

 1)첫째로 기다려야 한다.(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행1:4)

    예수님은 사역하기 시작 전까지 30년을 기다리셨고,
12사도들은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기까지 기다렸으며, 
바울은 다멕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로부터 10년을 기다렸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인간이 열심으로 나서서 잘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나님의 일을 그르칠 뿐이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기다리라는 명령이 많이 나오고 의외로 많은 구약의 사람들이 기다렸다. 
인간의 조급증으로 기다리지 못해 낭패를 당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분명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기다려라!”  
우리는 말로는 성령보다 기도보다 앞서지 않겠노라고 늘 외치면서 늘 내 자신이 앞서 나간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성경 말씀을 생각해 보지도 않고 앞서 나간다.  
기다림이 지루할 수도 있다. 
힘겨울 수도 있다.  
앞에는 홍해바다, 뒤에는 죽이겠다고 쫓아오는 애굽 군인들을 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기다리라고(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14:14) 하시고는 바로 홍해를 가르신 게 아니라 밤새 동풍으로 홍해를 가르셨다.  
그 밤샐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기다려야 했다.

   선교도 이와 마찬가지 이다. 
당장에 칼을 차고 군사를 준비해야 될 것 같고 훈련도 해야 될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똑 같이 “기다리라!”이다.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될 것 같지만 절대로 아니다.  
선교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한 번은 치앙마이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전도사 시절에 가르쳤던 청년 한 명이 종신 선교사로 작정하고 왔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선교 기도제목도 함께 보내왔다. 
여러분도 아마 짐작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 요약하자면 ‘문화사역 잘 할 수 있도록, 성전건축 잘 할 수 있도록’ 이었다…가슴이 아팠다.  
성전이란 말은 신약엔 있지도 않을뿐더러(이미 성전휘장을 찟으셨고 우리 몸이 성전임. 
고전6:19; 롬12:1) 와서 기다리고 성령의 역사를 따라 선교하기 보단 내 능력 내 힘으로 선교하려 하는 그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 청년은 또 다시 과거 180년 동안이나 실패했던 선교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다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있다. 
내가 선교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일(특히 문화 선교)들을 멈추어야 한다. 
아니 시작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내 능력, 내 솜씨, 내 노력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이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다. 기간이 1년이 됐든 10년이 됐든 기다려야 한다.

무엇을???   성령님의 권능의 역사를~~~

 2)기도해야 한다.(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기 힘쓰더라 행1:14)

    한국의 개신교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떻게 한국 개신교가 부흥되었는지 말이다.  바로 기도의 힘이었다..  
우리 인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그것은 기도뿐이다.  
기숙사 짓는 것도 아니고, 영어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피아노 가르치는 것도 아닌 바로 “기도!”이다.

   더불어 기도해야 한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태국 선교의 문제점들을 공감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더불어 기도하기 위함이다. 
저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유일한 무기이며 방패이며 모든 것이다.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을 간절히 기다리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에 힘써야 한다. 
오늘도 나와 내 아내는 기도한다.
 ‘성령님께서 행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기도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 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행4:29~30)  이들이 빌기를 마쳤을 때 땅이 진동하고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명심하라!  
선교사의 유일한 무기는 기도이지 자격증이나 능력, 힘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바로 “성령님의 권능”이다.
 이 성령님의 권능이 바로 증거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예수님은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다 증인은 증거를 갖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이 증거는 바로 성령님을 통해서 받는 권능을 의미한다.   
이 권능을 받지 않았다면 증거가 없는 것이며 증거가 없는 사람은 증인이 될 수 없다.  
증인이 되겠다고 한다면 아마도 위증이 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성령님의 권능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며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방인의 선교사였던 바울을 보라 바울이 문화를 가지고 이방인을 전도하였는가?  
바울이 기숙사 사역을 하면서 말씀을 가르쳤는가?  
예수님이 피아노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하셨는가?
 베드로가 교회건물 짓고 다녔는가?  
이 분들이 했던 유일한 선교의 접촉점은 이적과 표적이었다.
 바울이 이방 나라에 가는 곳마다 귀신이 떠나가고 병자들이 나음을 입었다.
 이를 통해 기독교인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선교사들은 태국뿐 아니라 그 어느 곳을 간다 할지라도 오직 성령의 권능이 임하실 때까지 기다리며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3)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지금 현재 성도가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기도하면서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에게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라고 말했다  
이 말은 바울이 성경을 가르쳤다는 말이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 피아노도 아니고 헬라어나 라틴어도 아니고 다름 아닌 성경을 가르쳤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66권의 성경을 주셨다. 
이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한 절도 빠짐없이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우리 선교사가 복음을 전한 다음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물론 가르치기 위해선 내가 먼저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태국에선 태국어로 일본에선 일본어로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 이외에 목사나 선교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맺는 말
이상으로 태국 선교의 문제점들과 해결방안을 서술해 보았다.  
이 모든 내용들은 내와 아내가 태국에서 선교사로 있으면서 직접 경험했고 알고 있던 것들을 바탕으로 했다.

   이 모든 것들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선교의 교본으로 사도행전이란 책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런데 나는 아직 이곳 태국에서 이 선교의 교본인 성경대로 하는 선교사를 단 한 명도 만나 보지 못했다.
 내가 만난 모든 선교사가 신학대학교에서 선교학 시간에 배운 문화 선교를 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태국선교의 가장 중요한 실패 원인이다.
 실패한 정도가 아니라 태국인들에게 ‘전도=문화’라는 비 성경적 공식과 함께 ‘선교사=돈’이라는 인식을 하도록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1.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이 구절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헌법1조1항의 내용이다.

   이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을 우리는 얼마나 무시하고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은 성경일 따름인 것인가? 
그저 2,000년 전 일일 뿐이고,
 선교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아님 시대가 바뀌었으니 시대에 맞게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난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은 2,000년 전이든 6,000천 년 전이든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신앙행위(예배, 찬송, 기도, 삶, 선교 등등)에 대한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간곡히 권한다.

“바울이 어떻게 선교하였는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기다리며 성령의 권능 임하심을 위해 같이 힘써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