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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며 아시아인으로서는 역대 최다득점이 되는 리그 통산 98골을 기록했으며 독일에서 활약했을 당시차붐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국제 축구 역사 & 통계 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Football History & Statistics), 영국 ESPN통신, 아시아 축구 연맹(AFC)등에서 ‘20세기 아시아의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월드사커지에서는 '잊을 수 없는 100대 스타', '20세기 축구에 영향을 미친 100인'에도 선정되었다.[6]은퇴 후 MBC의 해설위원으로 해설가 활동을 시작했으며,2010년 FIFA 월드컵과2012년 하계 올림픽에서SBS의 해설위원을 맡았다. 가족은 부인 오은미, 딸 차하나, 아들차두리, 차세찌, 며느리로 배우한채아가 있다. 차범근의 이전 A매치 기록은 121경기 55골이었으나2014년11월 4일대한축구협회에 의해 135경기 58골로 수정되었고, 지속적인 데이터베이스 정비로 인해 기록이 수정 중이다.[7]
1976년10월공군에 입대해 사병으로 복무 중인,1978년12월에독일분데스리가SV 다름슈타트 98로 이적하였지만 병역 관련 문제로 계약이 파기되었다. (당시 차범근은공군팀 전력 강화를 꾀하던 참모총장의 권한으로 2년 뒤 전역을 약속받고,공군에 입대하였다. 약속된1978년12월 복무 기간을 마쳤다고 생각하고, 특별 휴가를 받아독일로 떠나SV 다름슈타트 98입단 계약을 체결하였고 12월 30일VfL 보훔과의 리그 경기에 출전해서 77분을 소화했고, 키커 평점 3점을 받는 등 좋은 활약을 펼치며분데스리가데뷔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그러나공군의 입장 변화로1979년1월 5일 다시 귀국한 후, 복귀해서 독일로 다시 나가지 못하고1979년5월 31일만기 전역하였다.
국가대표로 발탁된 이후 1976년 9월 11일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말레이시아전에서 1-4로 뒤지고 있을 때 후반 83분,87분,89분 단 6분만에해트트릭을 기록해 무승부로 만든 일화가 유명하며 특히일본과의 정기전을 치룰 때마다 눈부시게 활약하였다.1986년 FIFA 월드컵에 출전하였던1986년6월 10일이탈리아와의 경기가 자신의 마지막A매치가 되었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전한 월드컵에서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 국가대표로 130경기에 출전해 58골을 넣었는데A매치58골은대한민국선수 중A매치최다 골 기록이다. 또한대한민국에서 최초로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
승부차기실축 경험에 따른 공포감으로 실제 경기 중에승부차기기회가 와도 자신이 찬 적이 거의 없었지만 대표팀A매치통산 135경기 58골,분데스리가통산 308경기 98골을 득점할 만큼 탁월한 골 결정력을 자랑했다. 또한분데스리가에서 기록한 98골 중페널티 킥에 의한 득점은 단 한 골도 없다.
체격이 좋은 편인데다 경마장으로 보내도 좋을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로 빠르게 돌진하며 드리블하는 스타일로 상대 수비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신체 조건이 좋고 거친 몸싸움을 하는 선수들이 많은분데스리가에서도 그의 공격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대표팀에서는 중앙 뿐만 아니라 사이드에서 돌파하는 윙 역할을 많이 맡았고, 그 결과 많은 득점 찬스를 만들어 냈다. 이후 윙을 활용한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공격 방식은 대표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변병주,서정원등으로 이어졌다.
클럽에서의 포지션은 논란이 있는데 그 이유는 대표팀에서는 윙으로, 분데스리가에서는 센터 포워드로 뛰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3-5-2의 전술을 자주 사용했는데 차범근은 투톱 중 한명으로 뛰었지만 필요할 때 윙어의 역할을 해주는 탓에 투톱 중 처진 곳에 위치했다. 즉 분데스리가에서 정확한 그의 포지션은 '윙어 역할을 해주는 처진 스트라이커'였다.
언제나 정확한 슈팅을 하였고, 골대를 크게 빗나가거나 어이없게 높이 뜨는 슛은 거의 쏘지 않았다. 그는 묵직한 느낌을 주면서도 강하고 빠른 슈팅을 하였다. 그의 슈팅 자세는 마치 교본과도 같아서 당시 스포츠 잡지나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잡지에 그의 슈팅 순간 모습이 연속 사진으로 실리기도 했다.
볼 간수에 능해 안정된 플레이를 펼쳐 상대 선수에게 좀처럼 공을 빼앗기지 않았다.
청소년 국가대표 시절 헤딩 경합을 하다 코뼈를 크게 다친 이후 한동안 헤딩슛은 별로 하지 않았으나푸스발-분데스리가데뷔골을 헤딩골로 장식한 후에는 헤딩슛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차범근은 자신이 경험한분데스리가시절을 토대로독일식 축구 시스템을 도입하였고, 그 결과 서서히 좋은 성적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인프랑스 월드컵아시아 최종예선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대한민국은일본,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아랍에미리트와 같은 조였는데 무엇보다도 숙적일본과 같은 조에 속한 게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게다가아랍에미리트와우즈베키스탄역시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우선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카자흐스탄과의 1차전에서는 예상대로 3-0의 완승을 거뒀으나우즈베키스탄과의 2차전에서는 동점골을 허용하며 후반 종료 3분 전까지 1-1로 무기력한 경기를 했다. 다행히 후반 42분이상윤이 터뜨린 천금같은 결승골로 2-1 승리를 거뒀다.
2연승을 기록한대한민국은 본선 진출에 있어 최대 고비인일본과의 원정 경기를9월 28일도쿄 국립 경기장에서 치르게 되었다. 반드시 월드컵 본선에 첫 진출하겠다는일본에 맞서대한민국은 상당히 고전했고, 결국 후반 20분고정운의 패스미스로 선제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하지만일본의가모 슈감독은 선제골을 지키기 위해로페스 와그너를 빼고 수비수아키타 유타카를 넣는 수비전술을 펼쳤고, 이를 눈치챈 차범근은 수비수홍명보에게까지 공격에 적극 가세할 것을 지시하여 공격전술로 맞불을 놓았다. 이 전술이 적중하여 마침내 후반 38분과 41분 잇따라 골을 기록해 2-1로 역전승을 거둬대한민국은 3연승으로 B조에서 단독 선두를 달리게 되었다. (이 경기는 소위 ‘도쿄 대첩’으로 불리며 지금까지도한일전최고의 명승부로 손꼽힌다.)
그리고10월 4일에는 조 2위아랍에미리트와잠실종합운동장에서 대결을 펼쳤는데, 전반전에하석주의 선제골로 경기가 쉽게 풀리는 듯했으나아랍에미리트의 적극적인 공격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후반에유상철의 페널티킥과 이상윤의 헤딩골로 3-0의 승리를 거둬 4연승을 기록한 후 중앙 아시아 원정 2연전에 돌입하였다.카자흐스탄과의 원정 경기에서는 무기력한 경기끝에 1-1 무승부를 기록하여 연승 가도에 제동이 걸렸지만 여전히 1위를 유지하였고,우즈베키스탄과의 원정 경기에서 예상 외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5-1의 대승을 거둬 조 1위를 사실상 확정지었다. 이후일본과아랍에미리트의 예상 밖 무승부로프랑스 월드컵본선 직행 티켓을 잡는 데 성공해2002년 FIFA 월드컵개최국 자동 진출까지 합쳐 5회 연속 월드컵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비록11월 1일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일본과의 홈 경기에서는 예상 밖의 0-2 완패를 당했지만, 불과 1년 전만 해도1998년프랑스 월드컵본선 진출조차 불투명했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경우의 수 자체를 논할 필요가 없는 조 1위 본선 직행으로 이끈 차범근은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아랍에미리트와의 마지막 경기에서도 3-1의 완승을 거둬 최종 성적 6승 1무 1패로 예선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이듬해프랑스에서 개최된1998년 FIFA 월드컵본선에서는 크게 부진했다. 리옹에서 열린 1차전에서 선제골을 터뜨린하석주의 퇴장으로멕시코에 1-3 역전패,마르세유에서는 훗날 대한민국의 감독을 맡게 된히딩크감독이 이끌던네덜란드에 0-5 참패를 당하며 참담한 성적을 기록했다. 결국대한축구협회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차범근은 대회 도중 국가대표팀 감독에서 경질당했고,김평석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아 벨기에전을 준비하게 됐다. 이 사례는 같은 대회에서사우디아라비아의페레이라감독을 경질한 뒤 2번째 사례였고,대한민국축구사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김평석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은 후파리에서 열린벨기에와의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는유상철의 동점골로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차범근 본인은 자신을 마르세유에서 침몰시켰던 적장이자,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게 된거스 히딩크를 옹호했다.
차범근이 상대적으로 매우 부진해 보였던 이유는네덜란드에게 0-5,멕시코에게 1-3으로 패한 반면대한민국 이외의 3개 팀인네덜란드,멕시코,벨기에가 전부 무승부를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 조에서는 대한민국과의 경기 결과로 16강 진출이 결정되었는데 대한민국을 5-0으로 이긴 네덜란드가 조 1위, 대한민국을 3-1로 이긴 멕시코가 조 2위로 각각 16강에 진출한 반면 대한민국과도 마찬가지로 무승부를 기록한 벨기에는 조별리그 탈락했다.
차범근은경기도화성군안룡면 송산리(현재의경기도화성시송산동) 출생으로 그의 종교는개신교(예장통합)이며[18]화산초등학교,경신중학교,경신고등학교,고려대학교를 졸업하였다.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할 당시독일사람들이 차범근의 로마자 표기를 부르기 어려워차붐(Tscha Bum)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빠른 공간 침투와 공중전에 강한 면모 때문에갈색 폭격기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2남 1녀 차하나(장녀),차두리(장남),차세찌(차남)를 두고 있다. 장남 차두리는 현재 FC 서울 유스 강화실장을 진행하고 있다.
2002년 FIFA 월드컵기간 중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독일과파라과이의 16강전 경기를 해설하였는데, 경기 내용을 보고 ‘지금까지의 경기 중 가장 나쁘다. 준비도 안 된 상태다.’라고 비판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루디 푈러독일 축구 국가대표팀감독은 ’차범근이 현역 시절아스피린을 너무 많이 먹었나 보다.’라고 되받아쳤다. 이 둘의 설전이독일전역에 전해지자 여론은루디 푈러가 아닌 차범근의 편을 들었고, 결국 둘은독일이미국과의 8강전 경기를 앞둔울산문수축구경기장에서 만나 화해함으로써 일단락됐다.
2002년 FIFA 월드컵에 참가한 독일 축구 대표팀은 파라과이와의 16강전 경기(서귀포), 미국과의 8강전 경기(울산), 대한민국과의 준결승전 경기(서울)를 대한민국에서 치렀다. 당시 독일 축구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던미하엘 발라크는 대한민국 입국 직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여기가 차붐(차범근)의 나라입니까? 정말 와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나의 우상입니다."라고 말했다.
2005년 6월,서울월드컵경기장내에 있는 월드컵 기념관에 마련된 축구 명예의 전당에 선수 부문 헌액자로 선정되었다.
“Hymne auf Bum Kun Cha”Schön ist, Mutter Natur, deiner Erfindung Pracht, Die den großen Gedanken vermochte, den Knaben zu träumen, zu denken – und dann auch zu Bilden mit den schnellen, beseelten, jauchzenden Füßen des Jünglings: Flink, flitzend, Flirrend und flackernd – nicht lange fackelnd, Doch feuernd und feiernd; den fühlenden Herzen Frankfurts zur Freude. Bum Kun Cha! Freund aus dem Osten! Fremdling bist Du nicht länger – nicht bitt’res Los ist Exil Dir! Heimat, die zweite, du fandst s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