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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 운동 때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1. 마산 지역
일제 강점으로 인한 억압과 수탈은 일부 매판자본가·기생지주(寄生地主)들을 제외한 우리의 대다수 민중들을 몰락과 고통으로 몰고 갔다. 마산 지역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는 마산에 1909년 동양 척식 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 마산 출장소를 설치하고, 농민들의 토지 박탈과 고율의 소작료 징수 및 고리대를 통한 수탈을 자행하였다. 1910년 10월부터 1918년 12월까지 이루어진 토지 조사 사업의 결과 마산 지역의 농민들은 토지 박탈과 경작권 상실 및 고율의 소작료에 시달렸다. 특히 마산은 항구 도시라는 지역 특성상 일제의 본격적인 식민화 정책이 일찍이 행해진 곳으로 상권 침탈이 극심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진해의 군항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910년 12월 31일 마산 개항장을 폐쇄한 이후 마산항을 대일 미곡수출과 소비성 물품의 수출입항으로 삼아 경제적 상권 침탈을 본격화하였다. 일본인 상인들은 수입 상품 판매업으로부터 제조업·서비스업에 이르기까지 업종 전반에 걸쳐 마산의 상권을 침탈해갔다. 상권을 지키기 위한 지역민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정책적 비호와 우세한 자본에 밀려 상권의 대부분이 일본인 상인에 의해 잠식되었다. 이에 지역 토착 상인은 점차 상권에서 배제된 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마산은 토지 침탈과 고율의 소작료에 의한 농민층의 몰락뿐만 아니라 일제의 상권 침탈로 인해 농업과 상업 양면에서의 피해가 가속화되었고 이 결과 주민의 생존권 위협도 타 지역에 비해 심각하였다.
일제는 경제 침탈과 아울러 각종 학교의 설립을 통해 식민지화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마산에는 합병 이전부터 공립 마산 심상 소학교·마산 소학교·사립 일어 학교 등이 세워졌으며, 합병 이후에는 1915년에 마산 실과 고등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런 학교에서의 교육은 처음부터 조선인을 위한 교육과는 무관하였다.
따라서 일제 식민지 교육에 대응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할 민족 학교 설립이 절실히 요구되었고 마산 최초의 민족 사학으로 창신 학교가 설립되었다. 창신 학교는 국권 회복과 근대화 달성을 위한 실력 양성과 민족의식 고취를 교육 목표로 마산 지역의 민족 교육 담당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정규 학교 이외에 야학도 민족 의식과 자주 독립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마산의 노동야학은 지역 주민 옥기환·구성전 등이 자금을 출자하고 명도석·김명규·나인한·팽삼진 등이 교사로 참여하여 1907년 6월 10일 개교하였다. 노동 야학의 민족적 성격의 교육은 마산의 3·1 운동에서 앞장서 투쟁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한편, 1915년 1월 조직된 비밀 결사 단체인 조선 국권 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활동도 마산 3·1 운동의 또 하나의 배경으로 들 수 있다. 조선 국권 회복단은 박상진·윤상태·서상권·배중세·이시영 등 영남 지역의 자산가·혁신 유림·지식인들이 경북 달성에서 독립군 지원을 목적으로 조직한 항일 운동 단체였다. 마산에는 국권 회복단 지부가 설치되어 지부장 안확을 비롯하여 이형재·변상태·김용환 등이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3·1 운동이 일어나자 마산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2. 창원군
창원군은 개항 이래 일제의 경제적·정치적 침략으로 많은 이권을 빼앗겨,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강한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의 독립 만세 운동은 보다 많은 농민들이 규합하여 대중적인 완강한 항일 투지를 발휘할 수 있었다.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과 독립에 대한 의지를 알리기 위해 창원 지역의 청년, 학생, 일반 민중들이 만세 운동을 벌였다.
1. 마산 지역
마산의 3·1 운동은 초기 단계에서는 종교계 인사와 학생 및 지역 유림 등 지식인 계층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초기 단계의 만세 운동은 대략 세 계통이 연계하여 진행하였다. 그 하나는 창신 학교 설립 관계자 이승규·이상소·손덕우 등을 비롯하여 창신 학교 교사 임학찬 및 의신학교 교사 박순천[당시 이름 박명련] 등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계 인사, 다른 하나는 창신 학교 학생 한태익·이정기·이일래 등과 의신 학교 학생 최봉선·안음전 등 학생 대표, 그리고 지역 인사 이형재·김용환·명도석·변상태 등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서울의 3·1 독립 선언식에 즈음하여 민족 운동 지도자들과 접촉하거나 지역 인사 상호 간의 다양한 연계 경로를 통해 시위에 관한 정보를 얻고, 각기 마산 지역 만세 운동을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3·1 운동 발발 직전 중앙에서의 독립 선언식 개최 계획이 마산에 전해지면서 마산 역시 만세 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3·1 독립 선언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갑성은 2월 23일 마산에 내려와 이상소·임학찬 등에게 일본 도쿄의 2·8 독립 선언과 서울의 독립 선언식 추진 계획을 전해주며 동참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어 3월 2일에는 세브란스 의전 학생 이용상이 마산에 내려와 서울의 운동 진행 상황과 함께 독립 선언서 200매를 임학찬에게 전달하였다. 이 독립 선언서는 다시 이형재와 김용환 등에게 전달되었다. 서울에서의 만세 운동에 대한 정보와 독립 선언서 전달 등의 경로를 통해 마산의 만세 운동의 분위기도 무르익어 갔다.
2. 창원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3·1 운동 소식이 전해지고 이웃 마산에서도 3월 3일 시위가 일어나면서 창원읍을 중심으로 창원의 청년들이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준비하고 거사일을 계획해 창원읍 장터에서 진동면, 삼진, 웅천, 가덕, 상남 등으로 전파되어 갔다.
3. 진해
1919년 4월 3일 진해면, 웅천면, 웅동면에서 같은 시각에 각 면별로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웅동면은 가까운 웅천면으로 넘어와 웅천 시위대와 합류하여 헌병 주재소가 있는 성내동에서 대대적으로 전개하기로 하였다. 4월 3일로 택한 것은 음력으로 3월 삼짇날로 민족 명절이고 일본인들의 일왕 제사가 웅천 신사에서 있었으며 경화동은 장날이었기 때문이다.
1. 마산
마산의 3·1 운동은 3월 3일 김용환이 독립 선언서를 군중에게 배포하는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김용환은 3월 3일 고종의 국장(國葬) 참관을 위해 마산 무학산에 모인 군주에게 독립 선언서를 나누어주고 조선의 독립과 항일 투쟁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하지만 김용환은 현장에서 검거되어 마산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항일 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창신 학교·의신 여학교 학생을 비롯하여 인근 각 지역에서 만세 시위를 위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창신 학교는 한태익·이정기·이일래 등 학생 대표가 이은상의 집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며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의신 여학교 학생들은 세브란스 의전 학생 배동석으로부터 독립 선언서를 전달받은 교사 박순천(朴順天)과 김필애(金弼愛)의 지도 아래 학생 대표를 중심으로 최봉선(崔鳳仙)의 집에서 시위를 모의하였다. 한편 3월 12일에는 창신 학교 교사 전원이 항일의 표시로 사직서를 제출함으로써 만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기독교계 인사와 학생들의 시위 준비와는 별도로 지역인사들에 의한 시위 계획도 활발히 추진되었다. 2월 25일 비밀결사단체인 대동 청년단으로부터 서울로 올라오라는 지시를 받고 서울의 3·1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변상태와 김관재는 3월 3일 마산으로 귀향해 지역인사들에게 서울의 만세 시위 소식을 알리고 독립 선언서와 『조선 독립 신문』을 전달하였다. 서울의 만세 운동에 크게 고무된 명도석·최용규·이정찬·김용환 등 지역 인사들은 시위를 위한 사전 준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3월 10일 이들은 추산정에서 시위를 모의하고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제 헌병에 의해 현장에서 참가자 전원이 검거 연행됨으로써 시위 계획이 중단될 수밖에 되었다. 다만 후일의 시위를 도모하기 위해 김용환이 모든 책임을 지고 구속됨으로써 3월 16일 김용환을 제외한 주동자 전원이 훈방되어 다시 모의할 수 있게 되었다.
각기 개별적으로 시위를 준비하던 종교계·학생·지역 인사들은 추산정 사건 이후 보다 효과적인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에 운동 세력 간의 연계와 규합을 통한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3월 21일 제1차 구마산 장날 시위가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3월 21일 구마산 장날 장터는 시위 참가자를 비롯하여 장을 보러 나온 인근 지역의 주민들로 붐볐다. 김익렬이 보부상으로 가장하고 가져온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군중들에게 배포하였다. 그리고 오전 12시 경 마산발 삼량진행 열차의 기적 소리를 신호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에 장터의 군중들도 합세하여 만세를 부르며 시내로 진출하였다. 시위 행렬이 이어지자 주위의 행인들도 가담하여 시위대는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날의 시위는 시종일관 평화적 만세 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강압적·폭력적 진압으로 일관하였다. 시위 군중이 가두로 진출하며 단시간에 대규로 시위로 확대되자 마산 주재 일본 헌병과 경찰을 출동시켜 총검을 앞세워 시위대를 무차별 탄압하였다. 더욱이 진해 해군 경비부의 군함 조무호를 마산포로 출진시켜 전투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시위는 오후 6시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주동 인물 50여 명이 마산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제1차 구마산 장날 시위 뒤 3월 26일 장날을 기해 1차 구마산 장날 시위에서 검거를 피한 인사를 중심으로 제2차 구마산 장날 시위가 일어났다. 3월 26일 오후 2시경 구마산 장터에 모인 군중은 앞서 제1차 구마산 장날 시위로 투옥된 애국지사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가두로 진출하였다. 시위 행렬이 북마산 파출소를 지나 마산 형무소로 나아가자 시위 군중은 3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날의 시위는 구속 인사 석방이라는 구체적 요구가 전면에 등장하며 1차 시위에 비하여 그 정도가 좀 더 격렬해졌다. 일부 시위자들은 마산 형무소로 쳐들어가 수감된 동지들을 구출하자고 할 정도였다. 시위 군중의 확산에 당황한 일제는 경찰을 급파하고, 마산 가포동의 육군 총포병 대대 병력까지 긴급 출동시켰다. 무장 군경의 무차별 진압 속에 이날 시위에서도 주동자 14명이 체포 연행되었다.
두 차례의 구마산 장날 만세 시위 이후 시위 재발 방지를 위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더욱 가혹해졌다. 하지만 시민과 학생들의 항일 투쟁 분위기는 오히려 고조되었다. 제2차 구마산 장날 시위에 이어 5일 후인 3월 31일 장날을 기해 제 3차 구마산 장날 시위가 또 다시 일어났다. 처음 3월 31일의 장날을 기해 폭발한 만세 시위는 이제 장날만 되면 일어날 정도로 지속적인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그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의 요구 또한 구체화되어 갔다. 제3차 구마산 장날 시위에는 약 2500여명의 군중들이 참가하여 앞서 1·2차 시위에 비해 인원수는 감소하였다. 하지만 시위에는 형무소 간수마저 합세하면서 시위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만세 시위가 절정에 이를 때 진압을 위해 무장한 일본 군경이 출동하였다. 이들은 총칼을 휘두르며 또 다시 시위 군중 20여 명을 연행하였다.
구마산 장날의 세 차례 시위는 일제의 무차별 탄압 검거에 대한 분노가 더해지며 시위가 진행될수록 격렬하게 고조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시위가 폭력화하지 않은 채 대체로 평화적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비폭력 시위대에 대한 일제 무장 군경의 무차별 진압과 1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연행 구금되는 현실에는 이후의 만세 시위는 점차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개 될 조짐을 보이게 되었다.
마산 시내 장날을 기해 시작된 대규모 만세 시위는 3월 말로 접어들며 외곽 농어촌지역으로까지 확산되며 더욱 격렬해져 갔다. 마산 지역 3·1 독립 만세 운동의 가장 대표적 만세 시위인 마산 삼진 의거가 폭발하였다.
마산 삼진 의거는 3·1 독립 만세 운동의 절정기에 폭발한 전형적인 민중적 민족 운동으로 1919년 3월 28일 1차와 1919년 4월 3일 2차 두 차례에 걸쳐 폭발하였는데 마산시 진전(鎭田)·진북(鎭北)·진동(鎭東) 3개 면(面)이 연합한 큰 시위였다.
3월 28일 마산 진동면 고현 시장에서 발발한 제 1차 삼진 의거와 4월 3일 발발한 제 2차 삼진 의거는 양 시위 모두 같은 지역 주민에 의한 동일한 투쟁 대상과 목표를 갖는 시위로 시위의 계획 단계부터 전개까지 동일한 주동자와 가담자에 의한 연속성을 갖는 만세 운동이다.
마산 삼진 지역의 만세 시위는 마산 시내의 구마산 장날 시위와는 별도로 서울의 3·1 독립 만세 운동이 발발한 직후부터 이미 계획되고 있었다. 조선 국권 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과 대동 청년단(大同靑年團) 단원으로 활동하던 변상태(卞相泰)는 자신의 연고지인 삼진에서의 만세 시위를 위한 계획에 착수하였다. 시위 준비에는 변상태를 비롯하여 권영조(權寧祚)·권영대(權寧大)·변상헌(卞相憲)·변상섭(卞相燮)·권태용(權泰容)·백승학(白承鶴)·백운태(白雲台) 등 삼진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진동면 고현 시장의 장날인 3월 28일[음력 2월 27일] 장터에서 시위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백승학이 중심이 되어 진전면의 성구사(誠久詞) 등지에서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하고, 권태준이 “曰我同胞 有進無退”[우리 동포는 나아가 물러서지 않는다]라는 격문을 목판(木板)에 새겨 전단을 만들었다. 시위 준비자들은 각 면을 순회하며 주민들에게 고현 시장의 시위 계획을 알리고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28일 금요일 오후 1시경 마산 진동면 고현 장터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백승학이 가운데 마련된 단상에 올라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뒤이어 권영대가 독립 만세 선창으로 군중 속에 있던 주동자들이 일시에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아울러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며 시위를 본격적으로 주도해 나갔다. 이에 장터에 모여 있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몇 바퀴 돈 뒤 거리로 나와 진동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은 고현 시장에서 시위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마산 주재 육군 중포병 대대로 연락해 병력을 지원 받아 시위 진압에 나섰다. 일제는 비무장 평화 시위대를 총검을 앞세운 잔혹한 방법으로 진압하였다. 그 결과 시위대는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체포 연행되는 가운데 오후 5시경 해산되었다.
1919년 4월 3일 발발한 제 2차 마산 삼진 의거는 단일 시위로는 마산 지역 3·1 만세 운동 중 가장 격렬한 연합 대시위로 흔히 4·3 삼진 의거로 불리는 만세 시위이다.
3월 28일의 제1차 삼진 의거에서 검거를 피했던 변상태·권태용·권영대·변상헌 등은 곧바로 재차 시위를 모의하였다. 이들은 시위 일자를 4월 3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참가자 규합에 착수하였다. 4월 1일에는 시위를 위한 사전 모의가 여러 장소에서 있었다. 성구사에서는 변상태·권영대·권태용·변상섭·변상기 등이 시위의 세부 사항을 최종적으로 논의하였으며, 변우범의 집에서도 변상태·황태익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의거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또한 변상태·권태용·권영대·변상헌·변상섭·변갑섭·김수동·김영종·변종열·변상복 등도 각기 별도의 모임을 가졌다. 이날 모임의 참석자들은 대부분 제2차 삼진 의거에서 중심 역할을 한 인물들로 시위 도중 순국하거나 체포·구금되었다.
4월 2일에는 정오 무렵 변상태가 진전면 양촌리 토지 개간장에 모인 70~80여 명의 주민들에게 시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시위 당일인 4월 3일에는 진전면 양촌리 냇가 둑에 세워진 장대에 매단 대형 태극기 아래로 인근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오전 9시경 2000여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변상섭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변상태가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만세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운집한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진동 쪽으로 나아갔다. 시위 주동자들은 ‘十人長(십인장)’·‘二十人長(이십인장)’이라고 쓴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대열을 이끌었다. 행렬이 마을 어귀에 다다르면서 부근의 주민들도 시위대에 속속 합류하였다. 처음 출발할 때부터 대규모인데다 도중에 합류한 사람들로 인해 시위대의 전진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는 않았다. 시위 행렬이 진동면 소재지에서 2㎞ 정도 떨어진 진북면 지산교 부근에 다다를 무렵 시위 군중은 더욱 불어났다. 이곳에서 대열을 재정비한 시위대는 사동교 쪽으로 나아갔다.
시위 소식을 접한 진동 헌병 주재소는 마산 육군 중포병 대대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무장 헌병과 헌병 보조원 및 일본 재향 군인 30여명을 즉시 사동교 건너편에 배치하였다. 이 지점에서 시위 군중과 일본 군경 간에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 시위대가 접근하자 헌병 오장(伍長) 가와카미[川上淸太郞]는 전진하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선두에서 대형 태극기를 앞세워 시위대를 이끌던 김수동(金守東)은 돌진하며 일본 헌병 보조원을 다리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 이 순간 헌병 보조원 심의중(沈宜中)이 발사한 총을 잡고 김수동이 쓰러졌다. 이때 김수동과 함께 시위대열의 선두에 섰던 변갑섭은 김수동이 들고 있던 태극기를 집어 들고 헌병 기와카미의 머리를 내리쳤다. 이 순간 가와카미의 장검이 변갑섭의 양 어깨를 내리쳐 변갑섭은 두 팔이 잘린 채 쓰러지고 있었다. 김수동과 변갑섭 두 사람이 총검에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 본격적인 충돌이 벌어졌다. 일제의 만행을 목격한 군중들은 분노에 싸여 길가의 돌을 집어던지며 맞섰다. 그러나 일군경의 무차별 사격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며 시위대는 오후 3시경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비슷한 시각 진동 방면에서도 전북·진동면 주민들이 진전면 양촌리에서 출발한 시위대와의 합류를 위해 만세시위에 나섰다. 삼월 삼짇날 나들이를 가장하여 나온 진북·진동면 주민들은 일단 진동 장터에 모인 뒤 진동 성터 뒤편으로 나아갔다. 오전 12시 경에 백승학이 군중 앞에 나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선창하였다. 군중들도 일제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시위 대열은 진동 장터를 한 바퀴 돈 뒤 양촌리에서 출발한 시위대와 합류하기 위해 사동리 쪽으로 나아갔다. 이때 진동면 소재지에 거주하던 일인들은 시위대에 놀라 상가를 닫고 철수하였다. 그러나 진동 헌병 주재소 헌병들이 진전 방면의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한 다음 이어서 유혈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2. 창원
창원군에서는 가장 먼저 창원읍 장터에서 3월 23일이 시위가 일어났다. 이후 3월 28일 진동면 고현리 장터의 만세 운동으로 이어졌는데 이때 만세 운동을 주동했던 변상태(卞相泰)·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 등이 다시 의거를 계획해, 4월 3일 진전면 양촌리 냇가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외침으로써 창원에서 가장 격렬한 삼진의거가 일어났다.
같은 날 웅동면 마천리에서도 500~600명의 군중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웅천읍을 향하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많은 군중이 자진 호응하여 시위 군중의 수는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진해로부터 일본 헌병 6명과 경찰 4명이 급파되면서 총검으로 군중을 구타하는 등 만행을 자행하여 군중은 해산하고 32명이 검거되었다.
창원읍에서도 재차 4월 2일 6000~7000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고, 4월 11일에는 가덕도(加德島)에서 400여 명이, 4월 29일에는 상남면 사파정에서 50여 명이 모여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다.
3. 진해
진해면 3·1 독립 만세 운동은 경화동 시장에서 4월 3일 11시 30분에 시위를 하기로 약속하고 당시의 대정 학교[현 경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문임현이 중심이 되어 홍의식·문찬두·김종건 등과 추진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미행으로 문임현이 만주 방명으로 망명을 해 좌절될 위기에 처했으나 이 소식은 들은 대정 학교 졸업생 우을룡이 대정 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이복근과 신기옥 등에게 시위를 제의하자 이를 받아 들여 비밀리에 동급생들을 규합하였다.
동급생인 손흥조·이용식·김석수·김재복 등이 경화동 복습방에 4월 2일 저녁 7시에 모여 시위 때 군중들에게 나누어 줄 태극기를 만들고 벽보의 문안을 작성하였다. 다음 날 새벽 벽보를 붙이고 다음날 태극기를 나누어 줄 시장의 분담한 위치를 정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시위 준비가 탄로가 나고 이복근·우을룡·신기옥 등이 체포되어 부산 검찰청 마산 지청으로 송치되었다.
웅천 지역 3·1 독립 만세 운동은 김창업·정운조·김중환·문석주·김석환·김병화·김진찬·주국녕 등이 주로 웅천 북부동 560번지 김재령 전 웅천 군수의 자택에서 밀의를 하고 준비를 하였다. 주기선·김조이·주녕옥 등의 여성들은 웅천 교회에서 시위 준비를 하였다. 웅천의 시위대는 쇠전[우시장]에 모여 합세를 하기로 하고 웅동의 시위대를 기다렸다. 그러나 약속 시간인 11시가 되어도 도착하지 않자 김창업이 연설을 하고 난 뒤에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그의 선창으로 독립 만세를 삼창하였다. 이어 동문 거리에서 서문 거리를 오가며 시위를 하다가 웅동 시위대를 맞이하기 위해 대형 태극기를 든 정기부를 앞세우고 동문 밖으로 나가면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웅동 지역의 3·1 독립 만세 운동은 사립 계광 학교 교사인 주기용, 배재황·신자균·허전 등이 중심이 되었고 유지로서 배건수·이원우, 청년 김일성·배종인과 여기에 서울 유학생 이부근·이종인 등이 귀향하여 가담하면서 준비하였다. 웅동 지역의 3·1 독립 만세 운동 준비 장소는 대장동의 죽벽 마을 236번지 이두용의 집 부엌방이었다. 죽벽 마을은 대나무가 우거진 산기슭에 있는 산촌이라 은밀하게 일을 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태극기와 독립 선언문을 계광 학교 선생님들이 마을 별로 상급생을 뽑아 미리 마을에 배부하여 3·1 독립 만세 운동 당일 마을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도록 몰래 연락하였다.
4월 3일 아침 웅동의 면민들은 말냇가로 모여 들어 10시쯤 2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였다. 주기용이 군중 속에서 나와 연설을 하고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독립 만세는 이부근이 선창하고 군중들이 뒤를 이었다.
주기용의 연설에 흥분하기 시작한 군중들은 약속한 웅천으로 향했다. 갈수록 시위 군중이 늘어나 면사무소에 이르러 면장으로 하여금 독립만세에 동참하도록 권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웅동 시위대와 웅천 시위대가 만났고 헌병 주재소를 지키던 이천오 보조 헌병은 만세 소리가 들리자 진해 헌병 분대로 긴급 전화보고를 하고 헌병 주재소로 시위대가 가까이 오자 웅천 공립 보통학교 운동장 서편 느티나무가 있는 곳에서 총을 쏘았다. 총소리에 놀란 시위대는 멈칫하였다가 공포인 것을 확인하고 더욱 기세를 올렸다. 이 때 웅천 신사에서 일왕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던 일본 헌병과 거류 일본인들이 만세 소리를 듣고 현장으로 달려 왔다. 헌병들은 칼, 일본인들은 대창, 낫, 칼 등을 들고 시위대를 위협하였다. 그때 진해 헌병대의 기마 헌병이 공포를 쏘면서 군중 속으로 뛰어 들었다. 일본 헌병과 경찰들의 총검과 말굽 아래에서 시위 군중들은 흩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웅동면의 시위대는 웅동 쪽으로, 웅천면의 시위대는 부녀자와 어린이들은 뒷동산의 도장골로, 성인 남자들은 고방산 쪽으로 피신하였다. 시위대는 일본 헌병 경찰에 쫓기고 짓밟히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1. 마산
3월 3일 무학산 독립 선언서 배포 사건 이후 연이은 만세 시위로 많은 주민과 학생들이 체포 구금되어 옥고를 겪었다. 특히, 3·3 독립 선언서 배포 사건과 3·10 추산정 시위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김용환은 1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또한 창신 학교 부교장 이상소 장로는 몇 차례의 만세 시위의 배후 조종 및 주모자로 지목되어 서울 고등 법원에서 2년 형을 선고받고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2차 구마산 장날 시위의 주동자 박순천은 이듬해인 1920년 봄 일본에서 체포되어 마산 형무소에서 1년을 복역하였다. 이외에도 최용규·이연찬·신택식 등 40여명 이상이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제1차 마산 삼진의거 시위에서 검거된 11명 중 6명은 6개월에서 1년 형을 선고받고 마산 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5명은 태형(笞刑) 또는 집행 유예에 처해졌다.
제2차 삼진 의거는 격렬했던 만큼 엄청난 희생을 남겼다. 시위에 앞장섰던 8명이 숨지고 부상자만도 22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일제도 헌병과 헌병 보조원 등 3명이 부상을 입는 타격을 입었다. 이날 희생을 면한 시위 참가자 중 다수는 검거되어 재판을 받고 복역하였다. 삼진 의거로 기소된 사람들은 1920년 10월 30일 서울 복심법원(覆審法院) 형사 재판에서 판결이 확정되었다. 궐석 재판(闕席 裁判)을 받은 변상태·권영대·권대용 등은 2년 형을, 변상섭·변상술·구수서·변상헌·김영종·변우범 등은 1년 형을 선고받았다.
마산의 3월 만세 항쟁으로 1백여 명에 이르는 애국지사·시민·학생들이 체포 구금되거나 실형을 선고받는 와중에도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일제에 대한 저항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비인간적 만행이 자행될수록 투쟁에 대한 열기는 더욱 뜨거워져 갔다. 마산 시내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는 3월말로 접어들며 마산시 외곽 농어촌 지역으로까지 확산되며 더욱 격렬해져 갔다. 더욱이 4월에 이르러는 마산 공립 보통학교[현 마산 성호초등학교 전신]의 어린 학생들까지 22일부터 연 3일간 교내에서 독립 만세를 부를 정도로 연령·지역·계층을 망라한 민족 운동으로 확산되어 갔다.
2. 창원
1919년 4월 3일 삼진 의거에서 김수동, 변갑섭과 8명의 민중이 순국하였고 부상자는 22명이었다. 같은 날 웅동면 만세 운동에서는 32명이 검거되었다.
3. 진해
진해면의 3·1 독립 만세 운동은 4월 2일 시위 준비가 탄로가 나 웅천과 웅동 지역에서는 진행되었으나 진해 지역은 실패하고 말았다.
웅천면, 웅동면 3·1 독립 만세 운동에서 체포된 사람은 32명이었다. 허전·신자균은 피해 다니다가 타계하였고 배재황은 사후 수습과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시위에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하여 체포는 면하였으나 진영으로 이주하여 소작 쟁의와 노동 운동에 참여하였다. 주기용은 피신하지 않고 학교에 남아 근무하다 체포되었고 이종인은 피신을 하여 궐석 재판으로 1년을 언도 받은 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한편 웅천면의 황병덕, 김상윤, 김종호도 피신해 있다가 뒤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주국녕은 피신한 채 궐석 재판을 받았으나 뒤에 3·1 독립 만세 운동 관련 서류가 집에서 발견되어 자수해 3년 징역에 3년 집행유예를 받았다.
수형자는 신분장과 범죄인 명부에 따라 확인된 것[2003년]으로 웅동 지역은 6명, 웅천 지역은 9명이었다. 형량은 1년 징역이 6명, 6개월 징역이 5명, 4개월 징역이 3명, 징역 3개월에 2년 집행 유예가 1명이었다.
1. 마산
첫째, 마산의 3·1 독립 만세 운동은 일반적인 만세 운동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식자층의 주도로 시작했으나 시위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민중적 민족 운동의 형태로 나아갔다. 둘째, 시위 형태 또한 3·1 독립 만세 운동의 일반적 특성과 같이 처음에는 비폭력 평화 시위로 전개되었으나 일제 무장 군경의 폭력적 진압과 검거, 구금으로 인해 점차 폭력화되어 갔다. 셋째, 마산 삼진 의거는 3·1 독립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절정기에 이른 시기에 폭발한 시위였다. 넷째, 마산 3·1 독립 만세 운동은 확대 과정에서 계획적 조직적 연속성을 띤 대규모 민중 시위로 전개되었다. 다섯째 마산 삼진 의거는 시 외곽 농어촌 지역 3개면이 연합한 대시위로 운동사적 의미를 갖는다.
2. 창원
창원군에서는 여러 지역의 많은 민중들이 시위에 참가하여 부상자뿐만 아니라 사상자까지 나오는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활발하게 진전된 3·1 독립 만세 운동은 이후 창원 지역의 청년 운동에 영향을 미쳐 많은 청년 단체를 만들었다.
3. 진해
진해면에서의 3·1 독립 만세 운동은 준비 과정에서 발각되어 진행되지 못했으나 웅천면, 웅동면에서는 교사, 학생, 민중들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특히 웅천면과 웅동면은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이자는 약속을 하고 두 지역이 함께 3·1 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같은 진해 지역의 3·1 독립 만세 운동이 이후 진해 지역의 청년 운동에 영향을 미쳐 많은 청년 단체들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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