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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여운형 본문

선교 한국/아 ! 대 한민국

여운형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2. 7. 11. 13:17

여운형

呂運亨

요약 테이블
출생일시 1886년
사망일시 1947년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인간적인 면모가 훌륭했을 뿐 아니라 대중정치가로서 충족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예부터 동양에서는 훌륭한 지도자의 구비조건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 신체 조건, 말 솜씨, 글씨 쓰기, 판단력)을 말했다. 여운형은 이런 조건을 충분히 구비한 사람이다. 그는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충분한 물적 지원을 받으며 교육을 받았다. 명석한 머리로 진보적 학문을 일찍이 깨쳤으며, 한학과 영어를 골고루 터득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영어회화에도 능통했고 웅변술에 뛰어났으며 사람을 대할 적에 인정이 넘쳤다. 잘생긴 데다가 세련된 멋쟁이였고 게다가 기지와 제스처에도 능란했다.

여운형

여운형은 중단 없는 민족운동가였고 목숨을 바쳐 민족을 사랑했으며 언제나 남보다 한발 앞서 사람들을 이끈 탁월한 지도자였다. 사진은 1935년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의 모습이다.

늙은 나이에도 이웃집에 사는 여고보생이 남학생들에 시달리자 그 남학생들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협기를 보이기도 했다. 또 이화여자전문대학 학생인 이태영(李兌榮)이 웅변대회에서 여성의 평등을 주장하는 당찬 여학생이나 아버지가 없음을 알고 양녀로 삼은 정감이 넘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서울역 노동자들의 주례를 서느라 온통 시간을 빼앗기면서도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 정도의 인물이 왜 해방공간에서 실패를 거듭한 끝에 암살을 당하고 말았을까? 그는 과연 이상주의자로 현실과 유리된 노선을 걷다가 좌절한 것일까?

여운형은 경기도 양평 신원리에서 대대로 벼슬을 누리던 부잣집 양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0대 중반에 한문수업을 중단하고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개화소년이 되었다. 을사조약 이후 그는 국책보상운동에 나서기도 하고, 일제 반식민지 상태에서 민중을 깨우치기 위해 곳곳에서 대중연설을 하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으로 단연운동이 일어났을 때 담배를 끊고 평생 다시 피우지 않는 결단을 보였다.

그는 21세에 아버지가 죽어 상속을 받았는데, 맨 먼저 빚 받을 문서와 노비관계의 서류를 불태워 버렸다. 그는 종들을 모두 불러 “너희들은 이제부터 나의 형제요 자매들이다”라고 외치고 각기 살길을 마련해 주었으며, 혼인하지 않은 종들은 짝을 맺어 주었다. 평생 농민과 노동자를 사랑하던 모습이 이때부터 나타났다.

여운형은 자신의 집 사랑채에 학교를 세워 신교육운동에 나서는 한편 상동교회에 들어가 전덕기 목사와 이동녕, 이회영 등의 명사들과 접촉했다. 그는 기독교에 들었으나 남의 신앙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1914년 그는 활동무대를 국외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상해로 갔다. 그리고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金陵大學) 영문과에서 서양학문을 익히고 미국인 서점인 협화서국(協和書局)에 근무하면서 영어회화를 배웠다.

여운형은 상해에 망명해 있던 신규식 등과 교민단을 조직하여 그 단장으로 활동했다. 이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피압박민족의 사정을 설명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고, 자금과 선전자료를 얻기 위해 서북간도와 시베리아로 진출하기도 했다. 이때 그의 영어실력과 웅변술은 그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 즈음 국내에는 3·1운동이 일어났고, 그 영향을 받아 상해에 임시정부가 태동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임시정부 지도인사들과 마찰을 빚었다. 그는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하고 구황실을 배격해야 한다고 고집했는데, 대부분의 지도인사들은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할 것이며 구황실의 우대를 주장했다. 그가 ‘대한’이란 국명을 반대한 이유는 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을 승계하는 정신을 거부한 것이요 구황실의 우대는 공화정체를 추구하면서 이씨 왕조를 받드는 꼴이란 것이다. 당시로서는 아주 진보적인 의식이었다. 이때부터 임시정부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때로 현실대처에 이견을 드러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임시정부의 외교위원을 맡기도 했는데 임시정부가 정부형태로 발전하자 입각을 거절하고 상해교민단장의 일만 보았다. 그는 이회영과 같이 정부형태보다는 운동단체의 육성을 더 강조했던 것이다. 그의 활동은 개인적이라는 비난을 받긴 했으나 대단히 폭이 넓고 화려했다.

여운형은 일본 척식장관(拓殖長官)의 초청을 받고 임정계 인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일본 고위인사들에게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특히 대중연설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는 연설이 끝난 뒤 청중들이 자연스럽게 “조선독립 만세”, “몽양 일행 만세”를 외치도록 유도했다. 일본 당국은 그를 초청한 것을 후회했으나 체포할 수는 없었다.

상해로 돌아온 그는 임정과 관계없이 줄기차게 외교활동을 벌였고 중국 공산당에도 가입했다. 그가 기독교도가 된 것이나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민족운동을 위해 지원세력을 확대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1921년 김규식, 홍범도, 이동휘 등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遠東)피압박민족대회에 다녀왔고, 중국의 혁명세력인 손문에게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장개석 주도의 중국 국민당에도 가입했다. 이런 활동으로 그는 늘 테러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1927년 장개석이 공산당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감행한 뒤 중국 혁명세력은 공산당과 국민당으로 분열했다. 위기를 느낀 여운형은 장개석의 눈을 피해 일단 지하운동으로 활동을 전환했으며, 중국 학생들로 남양(南洋) 원정축구단을 만들어 싱가포르, 필리핀 등지를 돌았다.

이 무렵 그는 영국 제국주의를 공격한 탓으로 체포되어 일본경찰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제 그의 생애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목숨을 앗아간 통일의지

여운형은 국내에 들어와 3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냈다. 감옥에서 나온 그에게 일제는 감투를 주겠다느니 많은 이권을 주겠다는 따위로 유혹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그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겉으로는 서울역 노동자들의 결혼주례 같은 일에나 열중하는 듯이 보였으나 안으로는 중경의 임시정부와 연안의 조선독립동맹과 연계를 모색하는 등 지하운동을 펼쳐 나갔다. 많은 인사들이 친일파가 되어 날뛰는 시기, 그는 고고하게 변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된 뒤 그는 신사참배니 국방헌금이니 징병 권유니 따위 강요를 일체 거절하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그는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는데 그때 맹원이 1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또 비밀리에 농민동맹을 조직하기도 했다.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을 앞두고 혼란기의 치안을 유지하려면 무장력 확보가 시급하다고 보았고, 건국동맹 조직을 통해 이를 실현시키려 했다. 미래에 대처하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패망을 앞두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는 그에게 조선의 치안에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긍정적으로 이를 수용했다. 그런데 미리 준비한 대로 조건을 달았다. 곧 정치범 · 경제범의 즉시 석방,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간섭하지 말 것 등이었다. 총독부를 대신해 치안을 맡겠다는 뜻이다. 다급해진 엔도는 거부할 처지가 아니었다.

드디어 8·15 해방을 맞아 여운형은 재빨리 건국동맹을 모태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자신이 위원장을 맡고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앉혔다. 건준은 치안대 조직을 확대해 8월 말경 전국에 걸쳐 145개의 치안대 지부를 설립했다. 이어 건준이 모체가 되어 새로이 조선인민공화국을 발족시켰다. 여기에는 이승만을 주석으로, 여운형을 부주석으로 추대했다. 우익이 임정추대운동을 벌이자 이에 대항하려는 수단이었다. 삽시간에 남한의 모든 지역에서 면 · 동 · 리 단위로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실시되고 이승만이 환국하자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는 강한 압박을 받아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적어도 주체적 정부수립을 계획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으며, 미군정의 피점령국 정책에 맞선 자주적 노선을 추구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좌우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어 신탁통치문제로 그 찬반을 놓고 좌우익이 극한대립을 보일 적에 그의 노선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극우의 이승만은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들고 나왔고, 극좌인 박헌영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을 토대로 신전술을 채택해 미군정과 심한 마찰을 보였다. 이로 인해 나라 전체가 펄펄 끓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여운형은 중도좌파를 대표해 김규식으로 대표되는 중도우파와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여 조국분단과 민족분열을 저지하고 통일정부 실현에 앞장섰다. 이 운동이 미군정 당국의 교묘한 방해공작으로 좌절되자 북한지도자들과 네 차례에 걸쳐 좌우합작과 통일정부 실현을 위해 회담을 했다. 김구보다 훨씬 조직적이고도 실천적인 운동을 펼친 것이다.

1947년 5월,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좌우합작을 위해 미소공동위원회의 성사를 지원하던 중 여운형은 극우청년 암살자의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암살자의 배후로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게 떠돌았는데 미국이 사주했다고도 하고 이승만을 따르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있다고도 하고 김두한 등 우익청년들이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그 배후가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빈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통곡했고 장례행렬에 자발적으로 모인 조문객이 큰 행렬을 이루었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었다. 1945년 11월 선구회에서 벌인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 항목에 여운형 33퍼센트, 이승만 21퍼센트, 김구 18퍼센트, 박헌영 16퍼센트, 김일성 9퍼센트, 김규식 5퍼센트의 순서로 매겨졌다. 물론 어수선한 시기였고 정치활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지지 않은 시기여서 국민의식이 자리잡았다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는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는 중에 그 실패를 예견했다고 하며, 죽기 전에도 측근들에게 “나는 결국 죽을 거야. 그렇지만 죽더라도 분단만은 막으려 노력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실패를 하더라도 끝까지 남북분단을 막기 위한 운동을 중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니, 이를 가지고 그를 이상주의자라고 탓할 수가 있겠는가?

새로운 통일기운의 큰 기준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은 김구가 벌인 남북협상 이전의 일이다. 이에 대해 극우와 극좌 모두 합작노선의 계급적 기반이 약하다고 비판했다. 사실 이때 중도파는 박헌영이 이끄는 극좌처럼 운동의 강도와 대중조직을 갖지 못했고, 이승만의 한민당이 주도하는 극우처럼 자금과 경찰과 행정기구, 청년단체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좌우합작운동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굳게 믿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의 추진에는 내외의 조건으로 따져보아 국토의 분단과 민족의 분열을 당장에는 막아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극좌 극우노선에 의해 양극화된 민족 내의 대립을 중화시키고 약화시켜 상호간의 증오와 살상을 최소화하여야 한다는 판단도 작용했다.”(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그가 죽고 난 뒤 그의 집안은 심한 고통을 당했으며 취직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의 딸 연구(燕九)는 해방 당시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다녔는데 늘 미군정청 경찰의 감시가 따랐으며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1946년 여운형은 북쪽에 갈 때 딸을 데리고 가서 북쪽에서 살게 했다. 아버지로서는 딸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겠지만 이것도 그를 꾸짖는 빌미가 되었다.

그의 동생인 여운홍의 정치활동도 늘 견제를 당했다. 그의 추종세력인 건준 또는 인민위원회 또는 근로인민당 당원들은 끊임없이 감시와 압박을 받았다. 툭하면 빨갱이로 몰려 정치활동은커녕 사회활동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제는 그에 관한 연구가 대단히 활발하게 전개되어 전기와 전집, 연구서들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그동안 권위주의 정권들의 반공 이데올로기정책으로 그에 대한 조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현실 탓이기도 하나, 그보다는 새로운 통일기운에 그의 사상과 의지가 큰 기준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운형은 중단 없는 운동가였고 목숨을 바쳐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그는 언제나 남보다 한발 앞서서 민중을 이끌어 나간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가 죽었을 때 묘지는 서울 교외에 속하는 성북구 우이동에 정했다. 국립묘지가 조성된 뒤에도 그의 묘소는 국립묘지로 옮겨지지 않았으며 독립유공자로도 지정되지 않았다. 좌익과 손을 잡았다는 뜻이다. 한편 북한강 가에 있는 강변마을 신원리에 있는 그의 생가는 모두 무너져 없어지고 작은 건물 하나만 겨우 버티고 서 있었는데 근래에는 뜻있는 인사들이 복원을 서두르고 있다.

여운형 묘지

해방공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었던 여운형은 극우청년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의 묘지는 현재 서울 수유리 서라벌 중학교 근처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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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이화 전체항목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의 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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