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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회의 태국 선교 (펌) 본문

선교 태국/펌) 태국 선교

성결교회의 태국 선교 (펌)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04. 7. 12. 09:53

★태국의 일반현황★

1. 국 명 - 타일랜드 왕국(Kingdom of Thailand)
2. 면 적 - 51만 3천 115㎦(남한의 2.5배)
3. 수 도 - 방콕(Bangkok)
4. 정 체 - 입헌군주국
5. 인 구 - 약 5천5백만명(1991년)
6. 도 시 화 - 19.8%(1985년)
7. 종교상황 - 불교(92%), 모슬램(4%), 정령숭배(1.4%), 천주교(0.4%), 개신교(0.3%), 중국교(1.6%)

Ⅰ. 태국의 선교현황

    1. 일반적 측면
    태국은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며 세계 도처에서 관광객이 몰려오는 나라 중 하나로서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과거로부터 "풍요한 나라"라고 불리워 왔다. 
    국토면적은 한국의 2.3배 정도가 되며 인구는 5천5백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주식은 역시 쌀이며 열대과일이 풍성하며 과거로부터 의식주 문제로 크게 염려하지 않으며 안일하게 살아온 민족이다. 태국인은 일반적으로 "미소의 나라"라고도 불러왔다.
    또한 태국인은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하기로 유명한 국민으로서 소문이 나 있는데 이는 그들의 과거의 역사이해로부터 기인한것이다.
    태국은 지난 6백년 이상을 외세의 침략에 굴복하여 식민지 통치를 받아본 역사가 없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태국(Thailand)이란 국명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민족적 자존심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말뜻이 "자유의 나라"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태국인은 태국이 오늘날까지 이처럼 자유와 번영을 누리며 살아온 것은 불교와 왕가의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배적이다.
    태국의 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을 수정없이그대로ㅡ전수받아 지키려고 하면서 개인의 해탈을 추구하는 소승불교에 속한다.
    태국의 왕가는 이 불교를 처음부터 적극 수용하여 국교로 삼고 크게 숭상하여 왔는데 현재에도 왕이나 왕가의 사람들은 모두 불교도이어야 한다는 것을 법으로 정해놓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태국의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되어 있으나 왕가의 경우는 종교의 자유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초등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가르치는 종교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태국인에 있어서 종교란 곧 불교를 가르치는 것이며 세계의 그 어떤 종교보다도 불교가 더 나은 종교요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종교라고 굳게 믿고 있다.
    왕가의 숭불정책으로 인하여 태국 전역에 사찰이 없는 데가 없고 중들이 없는 데가 없다. 
    한국적 상황과 비교해 본다면 오늘날 거의 모든 도시와 마을마다 새벽기도가 있는데 태국에는 아침마다 새벽시주가 있다.
     특기 할 만한 사실은 태국의 사찰은 한국과는 상황이 달라서 산속에 들어가 있는 사찰은 별로 없고 도시나 마을의 한 복판에 들어와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상황은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불교왕국"이라는 말일 것이다.
    태국인이 자랑하는 그들의 종교 곧 불교가 이처럼 공적을 외치고 있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버린 인생들은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들을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태국은 국제적으로 창녀가 많기로 유명한 나라이기도 하며 동남아 나라들 중에서 동성연애자들도 엄청나게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따라서 AIDS환자도 가장 많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또한 별로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살인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그들은 윤회설을 믿기 때문에 다음 세상에서 조금 낮은 등급으로 태어나면 그뿐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태국인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의 의식이 없기 때문에 범죄란 인간대 인간의 윤리를 범하는 것뿐으로 심각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불교는 계율은 있으나 하나님을 향한 계명은 찾아볼 수 없다.
     

    2. 선교역사적 측면
    태국이라는 불교왕국에 기독교의 복음이 처음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선교의역사는 금년들어 168년이 된다. 천주교는 이보다 한참 더 앞서서 들어와 선교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 프랑스, 영국 등지의 서구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선교활동을 시작했을 때는 전도의 문이 열리지 않아 너무나도 어려운 상황에서 선교를 했다고한다.

    어떤 선교사는 18년 동안 선교하여 한 명의 신자를 얻어 세례를 주었다고 하니 그 어려움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라나 복음에 대하여처음으로 긍정적으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지역은 태국 북부의 지역이었다.

    그들은 현재의 치앙마이를 중심한 지역의 주민들이었는데 비교적 부지런하고 온건한기질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이 북부 지역이 기족교 인구의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태국이 기족교 선교를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핍박한 역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아 순교한 역사는 치앙마이지역에서 두명의 경우가 있었을 뿐이다. 그 들은 단순히 자기네들의 종교를 고수하며 기독교의 복음에 문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태국인이 이처럼 자기네들의 종교를 고수하게 된 데는 종교작인 이유만이 전부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서구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할때에 서구의 문명이 자기들의 그것보다 더 발달했음을 발달했음을 깨달았고 서구 열강의침약에서 자기들을 보호해야 된다는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 복음을 경계하도록 만들었다고 본다.

    고로 태국은 서양의 문물은 선교사들을통하여 조심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는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선교사들을 서구 열강의 식민지 통치를 위한 선발대정도로 오해한 것이었다.

    태국에서는 지금도 외세의 침략을 두려워하는 의식이 남아 있으며 기독교는 서양 종교이며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배신행위로 비난하고 있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러자 서구의 선교사들은 전도와 교회개척 등 직접선교를 하는 것보다 병원, 학교, 사회사업 등 간접선교를 통하여 서서히 전도의 문을 열 수 밖에 없었다.
    태국의 선교역사상 교회부흥의 물결이 한법 태국 전역을 휩쓸었던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서구 선교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내려온 부흥사겸 선교살였던 존 숭(John Sung)에 의해서 일어난 부흥운동이었다.

    지금도 태국의 교회들은 그 때의 부흥을 회상하면서 그리워하고 있다.

    태국의 교회들 중 뿌리가 잘 밖힌 교회들 대다수가 이 부흥운동의 결과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부흐운동은 존 숭이 지나가자 그 뒤를 잇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계속될 수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태국교회에서는 이러한 교회의 부흥이 다시 한번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3. 태국내의 기독교 단체들
    태국내에는 정부를 상대로 하는 기독교 단체가 5개 있다.

    1) 천주교 2) 태국기독교회(CCT) 3) 태국복음주의연맹(EFT-The Evangelical Fellowship of Thailand) 4) 미국남침례교선교부 5) 제칠일 안식교 등이 그것이다.

    태국의 종교계에서는 이들 모두를 기독교 단체로 간주하고 있으며 기독교 종교단체들로는 이것들 밖에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외에 모든 선교단체는 이 5개 종교단체를 통해서만 정부를 상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들 중에 개신교로 이해되고 있는 것들은 태국기독교회(CCT), 태국복음주의연맹(EFT) 그리고 미국남침례교선교부(Southern Baptist) 등 3개 단체이다.

     이들 무두는 총회가 구성되어 있다.

    한국의상황과 비교한다면 교단의 기능과 유사한 기능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태국에서는 한국식의 교단 또는 교파의 개념은 별로 없고 또 그런 식으로 교파가 난립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교단의 모양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미국 남침례 선교부이나 이는 교세가 별로 크지 못하며 70여 명의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여러 교단과 교파를 함께 수용하면서 총회를 구성하여 교단의 기능도 수행하고 종교성을 통하여 정부를 상대하는 두 종교단체는 태국기독교회와 태국복음부의연맹이다.

    한국 선교사들은 이 둘 중의 하나에 소속하여 일하고 있으며 우리 성결교단의 선교사들은 태국 복음주의연맹에 소속되어 일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두 종교단체에 대해 좀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

    태국의 기독교(개신교)는 원래 하나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태국교회에 WCC계통의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와서 판을 치자 복음주의 노선에 서 있던 선교단체나 교회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탈퇴하여 나와서 구성한 것이 태국복음주의연맹이다,

    이 때에 미국남침례교는 별도로 행동했기 때문에 별도의 선교부가 되었고 그 외에 복음적인 교회나 선교단체는 모두 태국복음주의연맹(EFT)에 모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WCC의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할 뿐만 아니라 선교사는 태국인을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태국인 밑에서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태국기독교회의 선교이론은 처음에는 대단한 호응을 얻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태국기독교회의 선교활동을 점점 퇴조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반면, 복음적인 신앙을 고수하며 선교사와 현지인의 자유로운 협력 관계를 표방하고 선교협의체로 출발한 태국복음주의연맹(EFT)은 점점 선교가 왕성해져서 현재에는 선교의 규모나 활동하는 선교사의 수에 있어서 가장 큰 종교단체가 되었다.

    태국기독교회의 경우 80여명 정도의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는데 비하여 태국복음주의연맹의 경우는 현재 800여명의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여기에는 OMF, CMA 등등의 큰 선교단체들이 모두 들어와 있으며 한국인의 선교단체로는 장로교 선교부와 지구촌선교회가 여기에 등록되어 있으며 타선교단체들도 등록기회만 열리면 선교부 등록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현재 EFT에 등록된 외국선교단체는 51개 단체이며 국내선교단체는 43개가(1990년 12월 현재)있다.
    현재 태국 정부는 태국내의 기독교 단체들에게 선교사 쿼타제도를 적용하여 선교사의 수를 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 선교를 제한하는 1단계 조치라고 본다.

    이 조치는 1981-82년에 내려진 조치인데 그 때에 선교사의 명단을 제출하여 쿼타를 신청한 선교단체나 교회는 필요한 만큼의 선교사 쿼타를 얻을 수 있다.

    이 때에 기존의 선교단체들과 태국의 몇몇 개교회가 그들의 상황에 따라 필요한 수의 쿼타를 신청했다. 그러나 그 후 태국의 개교회가 가지고 있는 얼마 안되는 쿼타문제로 정부가 일일이 개교회를 상대하는 일은 번거로운 일이므로 종교성에서는 이 몇몇 개교회의 쿼타들은 모두 EFT가 맡아서 관리해 주도록 부탁했기 때문에 현재 이 개교회의 쿼타들은 모두 EFT에서 관리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선교단체들이 받아낸 쿼타들도 그 자리가 비었을 경우에는 EFT가 조정하고 알선하여 그 쿼타가 필요한 선교사들에게 돌아가도록 하고 있다.

    EFT의 한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EFT내의 남아도는 모든 선교사 쿼타를 다 쓰고도 모자랄 경우에는 태국정부에 정식으로 추가요청을 할 수 있어서 정부에 일아본 결과 먼저 남아도는 쿼타를 다 쓴 다음에야 다시 신청할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당분간은 이와 같은 EFT의 조정역할을 통하여 남아도는 선교사 쿼타는 모두 꼭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될 것으로 본다

Ⅱ. 태국내의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1. 서구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선교초기의 선교사들은 외세의침략을 두려워하며 서구 열강의 세력을 경계하는 태국인이 자기네들의 종교인 불교를 고수하며 문을 안으로 잠가버린 상태에서 어려운 선교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천주교의 선교사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 확장에 편승하여 선교한 것도 사실이며 개신교 선교사들도 이에 대하여 전연 무관하다고 할 수 없었으므로 태국인의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조건없이 베푸는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가 직접선교보다는 병원, 학교, 자선단체 등의 간접선교릉 시도하게 되었고 서구의 문물을 소개하면서 태국인을 접근하게 되었던 것이다.
     방콕시를 설계한 것도 프랑스의 한 선교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선교사들은 태국의 상류층의 사람들 곧 왕가 지식층 귀족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선교사는 태국의 왕궁에서 봉사하는 한 중에게 예수를 믿지 않으면 멸망이며 불교에는 구원이 없고 부처도 지옥을 면할 수 없다는 식으로 직선적인 전도를 했다가 그 중에게 침뱉음을 당하고는 다시는 왕궁에 들어갈 기회가 없었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선교활동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불교왕국인 태국에서 불교를 깎아내리는 발언을 하고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서는 선교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였다고 본다.
    이러한 태국의 상황에서 간접선교를 통해 서서히 전도의 문을 연 것은 당시에 있어서 적절한 선교방법이었다고 믿는다.
    그 덕분에 태국은 기독교를 서양종교라고 거부하면서도 서구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방편으로 기독교 선교를 조심스럽게 계속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왔다고 본다.

    2. 한국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한국동란 후 최찬영 선교사와 그 뒤를 따라 6개월 쯤 후에 들어온 김순일 선교사가 태국땅을 밟고 선교를 시작한 최초의 한국 선교사들이었다. 최 선교사는 태국에서 성서공회를 중심으로 15년 정도 사역하다가 홍콩으로 가서 중국을 상대로 선교를 계속했고 김 선교사는 태국 북부의 치앙라이를 중심으로 20년간 사역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정착하고 말았다.

    그 후 한 동안 태국에 오는 한국선교사가 없다가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신홍식 선교사가 들어왔고 다음에 김정웅 선교사와 윤수길 선교사 등이 들어온 후로 오늘에 이르러는 40여 가정에 들어와서(80여명)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 선교사들에 하는 일들을 보년 다양한 사역들을 전개해 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도와 교회개척을 하는 선교사도있고 소수부족을 상대로 선교하는 선교사도 있으며 신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는 선교사도 있고 사회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는 선교단체도 있으며 스포츠 선교와 같은 특수선교를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한국 선교사들은 무슨 일이나 다 손을 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선교사들이 있는 곳에는 시끄러운 일들이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넘치는 의욕을 가지고 헌신적인 열정으로 일을하기 때문에 비교적 선교의 성과는 서구 선교사들보다는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 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 교단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성결교단의 태국선교는 이미 이루어져 있던 므앙타이교회에 1981뇬 2월에 박희성 선교사를, 같은 9월에는 홍성철 선교사를 각각 파송함으로 시작되었다.

    홍 선교사는 이전에 벌써 서너 차례 태국을 방문하여 므앙타이교회의 신자들을 제자훈련시켰던 적이 있었지만 선결교단의 선교가 정식으로 시작된 것은 1981년도부터였다.

    박 선교사는 처음에 태국어를 배우며 므앙타이교회를 중심으로 열심히 일하다가 홍 선교사가 온 후에는 사역지를 옮겨서 반프랐크릿교회와 함께 일하다가 2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갔다.

    반면 홍 선교사는 므앙타이교회의 난타차이 부부가 헌신하여 미국 애즈베리 신학교에 가도록 도왔으며 므앙타이교회에서 사역하면서도 초교파적으로 초청을 받아 전국적으로 다니면서 영어로 집회 및 세미나를 인도하면서 사역을 했다.

    이 때에 므앙타이교회에 전도폭발 프로그램을 소개했는데 후에는 전도폭발 태국지부로 발전되기도 했다.

     홍 선교사는 2년동안 이처럼 열정적으로 일하다가 단기사역의 임기를 마쳤다.
    1983년에 홍 선교사가 태국을 떠날때 당시에 방글라데시에서 선교하다가 비자문제가 걸려서 잠시 태국에 머물러 있던 송희천 선교사를 교단 선교사로 영입하여 태국에서 일하도록 했는데,

    이 때에는 므앙타이교회의 난타차이 부부가 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므앙타이교회를 맡게 되었고 송 선교사는 므앙타이교회를 중심으로 성가대와 성극을 지도하는 사역을 했다.

    당시 성극을 통한 선교는 태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서 공영 TV에 방영 되기도 했다.

    또한 선교지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훙 선교사 때부터 구상된 신학교의 건축계획을 계속 추진하여 므앙타이교회와 함께 장소를 마련하는 등 기본적인 준비를 했다.

    송 선교사는 태국에서 4년 동안 일한 후 1987년에 안식년을 맞아 한국으로 돌아갔다.
    반면, 1986년에는 이영기 선교사가 파송되어 태국말을 공부하면서 사역 준비를 하다가 1987년부터는 전도및 교회개척 사역을 시작했다.

    이 선교사는 특별히 므앙타이교회와 협력하여 태국 십자군을 창설하고 교회개척 사역을 전개해 나갔는데 이 사역은 KEHC와 OMS가 협력하여 지원한 사역이었다. 이 태국 십자군을 통하여 지난 5년도안 5개 교회가 개척되었는데 그 개척일을 년도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87년 2월 28일-<므앙타이코랏>교회(태국 동북부)
    1989년 7월 26일-<므앙타이남펀>교회(방콕시내)
    1989년12월 16일-<므앙타이차이야>교회(태국 남부)
    1990년10월 23일-<므앙타이팡아>교회(태국 남부)
    1991년 5월 25일-<므앙타이황>교회(태국 북부)
    이 중에 <코랏>교회는 자립을 시도하고 있으며 <남펀>교회는 1년 후에 므앙타이교회에서 독립했다.

     그리고 나머지 3교회는 아직 태국 십자군의 재정지원및 사역지도 아래 있다.

    태국 십자군을 통하여 개척된 이 교회들 외에도 이선교사가 직접 또는 간접으로 사역을 지도하는 가운데서 2교회가 더 개척되었는데 그 개척일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89년 12월 2일-<므앙타이치앙마이>교회(태국 본부)
    1990년 5월19일-<시온꾸룽텝>교회(방콕시내)
    또한 1987년 2얼부터는오랫 동안 모금하며 기도로 주비해오던 교회겸 신학교의 건축이 시작되어,

    건축비용의 부족으로 어려움도 없지는 않았지만,

    다음 해 7월 16일에는 감격스러운 헌당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원래의 계획은 4층 건물로 짓는 것이었으나 우선 2층 건물로 지어서 교회겸 신학교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므앙타이교회의 난타차이 목사는 이미 1986년 6월 학기부터 므앙타이교회에서 헌신한 3명의 신학생을 모아놓고 강의를 시작한 터였기 때문에 더 이상 신학교의 건축을 뒤로 미룰 수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므앙타이 신학교는 처음에 대학원으로 시작했다.

    그래서 한 때는 15명의 대학원생을 확보하기도 했지만 교수진이 약할 뿐만 아니라 응시자들도 한정되어 있음을 느끼면서 1990년부터는 대학부를 신설하고 신학 대학원생과 대학원생을 동시에 모집하기 시작 했는데, 현재는 모두 합하여 20명 정도의 신학생을 가지고 있다.
    1988년도에는 이용우 선교사가 추가로 파송되어 태국말을 공부하고 1989년 7월에 개척된 <남펀>교회를 개척하여 현지인을 세워 놓고 사역을 지도해왔다.

    그러다가 1991년 10월부터 돕다가 다음 해 곧 1990년 6월에는 <롱니란>교회를 개척하여 현지인을 세워놓고사역을 지도해왔다.

    그러다가 1991년 10월부터는 그 동안 신학교의 학장으로 일하다가 유학을 준비중에 있는 난타차이 목사를 도와 신학교 학장의 중책을 떠맡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91년 12월부터는 현지 목회자의 영적 재충전과 재교육을 위하여 므앙타이 신학교 부설기관으로 <목회자 훈련원>을 개설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매년 25명의 목회자들을 선발하여 매월 첫째 주간에 합숙훈련을 시키면서 1년간 집중교육을 받게하는 훈련이다.
    1989년 8월에는 태국 북부의 산부족 선교를 위하여 박윤식 선교사가 증원 파송 되었다.

    박 선교사는 방콕의 언어학원에서 1년동안 태국말을 공부한 후 태국의 제2의 도시인 치앙마이로 자리를 옮겨서 산부족들 중 하나인 <라후>부족의 언어를 또 다시 공부하면서 전도대상 마을들을 선정하고 전도자들을 훈련시키며 <라후> 부족 선교를 시작하였다.

     현재 미전도지역 중 9개마을을 선정하고 7명의 전도자들을 훈련시켜서 파송하고 있으며 3개의 교회(짜터, 짜웍, 도이랑)를 설립했으며 부족 마을들의 절대빈곤을 해결하기 위하여 잠업을 실시하는등 영농대책도 세우고 있다.

     또한 신학생 육성, 마약중독자 진료, 신자양육을 위한 기숙사 운영 등 다방면의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1991년 10월 말에는 피은형 선교사가 교단의 편신도 선교사로서 태국내 스포츠 선교를 위하여 파송받아 현재 언어를 공부하며 사역을 시작하고 있다.

    사실은 피 선교사는 축구코치로서 지난 88년에 태국에 잠시 들어와서 이영기 선교사와 함께 태국 스포츠 선교회의 기독교 축구팀을 구성하고 국내 King's Cup 대회에 출전시킨 바 잇다.

    그러다가 좀더 장기적인 안목에서 선교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본국에 들어가서 한 동안 기도하며 준비한 후에 이처럼 교단평신도 선교사로 다시 나오게 된것이다.

    현재에는 언어공부 중이지만 므앙타이 신학교와 협력하여 축구팀을 구성하여 여러가지 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4. 므앙타이 교회의 선교협정 체결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태국 무앙타이교회는 성결의 은혜인 성령세례를 강조하는 복음주의적인 웨슬레신학을 공동의 규범으로 인정하면서, 상호선교협력을 통한 효과적인 세계선교에 참여하고자 선교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앞으로 체결할 선교협정 내용은 상호간 자율성과 독립성을 존중하여 선교부를 설치하고, 선교정보를 교환하며, 교역자와 평신도의 상호협력을 도모한다.
    또한 교회개척 공동위원회를 통하여 교회건축헌금을 모금하여, 교역자를 선정하여 교회개척을 추진해서 태국복음화에 기여할 뿐 아니라, 양교회는 버어마, 라오스, 캄퓨차, 베트남 등의 주변국 선교활동을 협력할 것이며 신학교 발전과 인재 앵성 및 지도자 육성을위하여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무앙타이신학교 이사에 교단총무, 해외선교위원장 및 선교국장과 현지선교사를 포함시키기로 했으며, 교회개척 공동위원회의 위원구성은 50:50으로 하기로 했다. 또한 EFT에 선교부를 등록하여 선교사의 법적지위보장 및 재산을 보호하고, 선교사의 쿼터를 자유롭게 사용하게 될 것이다.

Ⅲ. 태국선교의 평가와 전망

    1. 태국선교의 평가 서구의 선교사들이 어려운 시기에 들어와서 우호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며 간접선교를통하여 전도의 문을 열어 놓은 것은 적절한 접근방법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태국 북부와 오지의 산부족 선교를 헌신적으로 감당하여 열매를 얻은 것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서구 선교사들이 놓친 점을 지적한다면 간접선교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직접선교에 시기적절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 가지를 더 지적한다면 교회의 일꾼을 세우고 현지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에 너무 소홀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 선교사들이 현지인을 지도자들로 세워서 적절한 시기에 권한을 위임해 주었어야 했다는 지적이다. 서구 선교사들이 늦은감이 있기는 하지만 30여년 전부터 지도자 양성을 위하여 신학교와 성경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었다.
    한국 선교사들은 뜨거운 사명감과 헌신적인 열정을 가지고 무슨 일이든 성과를 올리는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서구 선교사들이 많은 재정과 시간을 드려서 이루어놓은 것을 무시하면서 선교지의 상황을 자세히 문석해 보지도 않고 아무 일에나 마구 손을 대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요 또 다시 재정낭비요 시간낭비를 가져올 것이 뻔하다. 태국 정부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사회 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는 것들을 보는데 이런 간접선교가 지금에 와서 과연 그처럼 필요한 사역인가 하는 것은 한 번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오늘날의 태국은 전도와 선교의 문이 열려있는 상태에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간접선교보다는 교회를 개척하고 신학교를 통하여 교회의 일꾼들을 양성하고 전도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는 직접선교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 줄 안다.
     또 한 가지를 더 지적한다면 한국 선교사들은 서로경쟁적으로 같은 종류의 사역을 새롭게 시작하지 말고 먼저 온 선교사들과 협력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좀더 바람직한 선교를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성결교단의 선교가 처음부터 직접선교에 관심을 보이며 출발한 것은 시기적절한 선교 방법이었다고 볼수 있다.
    교회개척에 관심을 가졌고 신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기 시작했고 다양한 방법으로 전도활동을 전개하려고 힘쓰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행정적으로 어느 한 개인이나 교회에 매여서 현지인들 사이에서 갈등 요인이 되고 있을 뿐 아니라. 선교사역을 크게 위축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현지의 선교부와 현지인교회의 관계는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지배하거나 예속시키는 모양이 아니라 대등한입장에서 서로 독립을 유지하면서 바람직한 협력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2. 태국선교의 전망 앞으로 태국선교는 전보다 훨씬 더 빠른 템포로 전개될 것으로 본다.

      현재 12군데의 신학교 또는 성경학교가 설립되어 교회의 일꾼을 양성하고 있으며,

      그 중에는 100여명이 넘는 신학생을 훈련시키는 곳도 있는 것이다.

      아울러 교회개척의 관심도 증대되고 있음은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일들은 외부의 재정지원이 있을 때에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가 있을 것이다.

      신학생들 중에 자비로 공부하는 학생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으며 외부의 지원이 거의 없이 교회를 개척하는 일도 현재로는 거의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는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다,

      매스컴을 통한 선교, 스포츠를 통한 선교, 문서를 통한 선교, 찬양과 율동을 통한 선교, 전도여행단을 통한 선교 등 다양한 접근방법을 사용하여 기독교의 복음이 사회적 관심사가 되도록 만들어 갈 것이다.

      앞으로 태국에서는 교회의 큰 부흥이 대대적으로 일어날 것으로 본다.

      과거의 한 때에 존 숭에 의하여 일어난 부흥보다 더 깊고 더 넓게 전국적으로 파급되는 전도운동 부흥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이 부흥운동의 주역은 역시 태국인이 되어야 하겠지만 이들 속에 불을 지르는 불쏘시게의 역할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한국교회의 부흥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한극 선교사가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앞으로 태국교회의 큰 부흥이 있을 것으로 내다보면서 또한 큰 핍박이 잇을 것도 예상하게 된다.

      태국의 선교적 상황이 항상 평안치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이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

      이쩌면 이 일이 왕가의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나게 될런지도 모른다.

      기독교의 선교가 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증대되고 불교왕국이 이를 도전적 세력으로 인식하게 되는 날 일전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핍박을 의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태국의 목회자들은 이런 일들을 미리 알고 신자들을 미리 준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이 전도와 선교의 문을 열어놓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써 전파하게 하시는 기간이라고 믿는다.

    Ⅳ. 앞으로의 선교사역 계획에 대하여

      1. 교회개척분야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므앙타이교회 사이에 교회개척 공동위원회를 구성하고 태국 십자군을 통하여 OMS와 협력하면서 교회개척 사역을 추진해 나간다.
      개척되는 교회들은 자립 자영 자전 자치의 토착교회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도록 지도하며 그들이 자립 후에는 태국 선교부는 그들의 행정에 간섭하지 않도록 한다.
      교회건축의 문제가 생길 때에는 그들로 하여금 최소한 전체비용의 30%를 책임지도록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2. 신학교분야
      앞으로 신학교는 현재의 건물에 3, 4층을 증축하고 적절한 시기에 기숙사도 별도로 건축해야 할 것이다. 현재는 교수진 확보와 신학생 모집에 어려움이 없지 않지만 앞으로 점점 나아질 것으로 본다.

       부설기관으로 태국내 목회자 훈련원을 운영하여 이를 통하여 태국내 목회자들의 연장교육을 위하여 일익을 담당한다. 또한 이 신학교가

      주변국 선교를위해서도 일익을 담당할 수 있도록 한다.

       태국은 동남아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고 라오스, 버마, 말레이지아, 캄푸치아, 베트남 등의 나라들과 인접해 있어서 주변국 선교를 위해 전략적인 위치에 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역시 언어장벽이나 각 나라에서 이주해 들어온 사람들 중 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일은 현재에도 가능하다.

       

      3. 산부족 선교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별도로 게재하도록 한다.(태국-참고자료2)

       

      4. 스포츠선교
      피은형 선교사를 중심으로 스포츠 팀을 구성하여 이 팀들을 활용한 다양한 전도방법을 개발한다.

       

      5. 선교종합훈련센터
      태국내에 사도행전적 선교를 가능케 하는 전도훈련, 제자양육, 목회자 훈련, 그리스도인의 생활 훈련 등을 다양한 방법으로 실시할 수 있는 종합훈련센터를 건립한다.

      이를 위하여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2만평 정도의 땅을 마련하여 훈련생들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썰을 갖추고 환경을 조성하도록 한다.

       

    참고자료 1. 성결교단 선교사들이 태국내에 개척지원한 교회들

    1. <므앙타이>교회
    므앙타이교회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처음에 복음을 먼저 받은 몇몇 교수들과 학생들이 모여서 시작한 모임이 후에는 교회로 발전되 것을 알 수 있다.

    그 초창기 멤버 중에는 파이툰 교수 부부, 왈 라이폰 자매, 난타차이 교수 부부, 와라퐁(씻니)형제, 유타영 형제 쑤왓 형제 등이 이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교회모임을 시작한 것은 1974년의 일이었다.

    그들은 주로 대학생을 대사으로 전도할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처럼 므앙타이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대한 영향을 끼친 한국인 한 사람은 홍성철 목사이다.

    1971년에 그는 어학훈련을 위해 뉴질랜드에 갔다가 연수중에 우본완이라는 자매를 만나 복음을 전하게 되고 불교를 전하던 우본완 자매는 극적으로 물교에서 기독교로개종하게 된다.

    당시 미국에서 유학중에 있던 그녀의 약혼자 난타차이는 이 소식을 듣고 심한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체를 파악하여 그의 약혼녀를 다시 불교로 돌어오도록 설들할 목적으로 교회를 찾아갔던 그도 얼마 후에는 성경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적격적으로 개종하게 된다.

    그후 그들은 태국에 돌아와 기독교식으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태국에서 만남 몇몇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이러한 관련 속에서 홍성철 선생은(당시) 네 차례나 걸쳐서 채국을 방문하며 그들을 제자훈련시키면서 그들이 참여하는 모임에서 집회및 성경공부를 인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1년 9월에 성결교단에서 정식으로 선교사를 파송을 받아 태국에 와서 상주하면서 그들을 돕게 되었다.

    홍 선교사는 우선적으로 그 동안 가르쳤던 난타차이/우본완 교수 부부를 헌신시켜서 교수직을 사임하고 신학교에 기도록 도운후에 므앙타이교회를 맡아서 2년간 지도하다가 임기를 마치고 유학길에 올랐다.

    난타차이는 홍 선교사의 소개를 받아 성결교단에 잘 알려지게 되었고 또 성결교단에서 장학금을 받아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 때에 파이툰 교수도 스스로의 힘으로 후원을 찾아 미국에 건너가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돌아오는 관계로 므앙타이교회와는 오랬동안 떨어져 있게 되었다.

    반면 그 사이에 난타차이 교수는 미국 내즈베리에서 부인 우본완 여사와 함께 신학석사(M. DIV.)를 마치고 돌아와서 므앙타이교회를 먼저 맡아서 일하게 되었다. 이들 외에도 와라퐁(씻니)교수, 쑤왓/완나 부부, 쏨차이 형제가 미국에 가서 신학석사를 공부하고 돌아왔으며 현재는 파다 자매가 유학중에 있다.
    이들이 이처럼 유학을 장려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후에 택구에서 신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전부터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교수요원을 확보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닌타차이 부부는 므앙타이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하면서 전부터 홍성철 선교사와 함께 구상하여 성결교단과 OMS에서 모금하며 기도로 준비해오던 신학교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1987년 2월에는 방콕시내의 중심지에서 그리멀지 않은 쌈쎈나이 지역에 마련된 1,200평의 대지위에 신학교 겸교회의 건축을 시작하여 1988년 7얼 16일에는 헌당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원래는 이 건물이 4층으로 설계된 것이었으나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어서 우선 2층 건물로 지어 1층은 주로 교회로 쓰고 2층은 주로 신학교로 쓰고 있는형편이다.

    이 건축비용은 대지를 포함하여 3억6천만원 정도가 들어갔는데 비용의 50%정도는 성결교단에서 지원했고 25% 정도는 OMS에서 지원했으며 나머지는 므앙타이교회의 건축헌금으로 충당이 되었다.
    므앙타이 신학교는 1986년 6월에 므앙타이 교회에서 3명의 신학생을 대학원 수준으로 무집한 이래 오늘까지 10명의 대학원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1990년도부터는 대학부를 신설하고 신학생을모집함으로 말미암아 현재 20명 정도의 신학생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므앙타이교회도 그 동안 어려운 시기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고비들을 잘 넘기면서 꾸준히 성장하여 현재는 장년이 150명 정도에 이르고 있다.

    앞으로 므앙타이 신학교와 므앙타이교회가 우리 성결교단과 협력하여 일하면서 선교기지및 모교회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 우리 성결교단의 선교사들은 므앙타이교회와 함께 교회개척에 힘을 기울여 현재까지 모두 13개 교회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개척된 교회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이 교회들은 우선 그 사역을 지도한 주체에 따라서 3분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는 므앙타이교회가 사역을 지도한 경우로 여기에는 <쏭클라>교회, <치앙마이>교회, <농폭>교회가 있다.

    둘째는 태국 십자군 사역을 지도한 경우로 여기에는 <코랏>교회, <남펀>교회, <차이야>교회, <팡아>교회, <황>교회 등이 있다.

    셋째로 태국 선교부가 개척을 지도한 경우로 여기에는 <시온>교회, <룽리란>교회, <짜터>교회, <짜웍>교회, <도이랑>교회 등이잇다 이 교회들을 좀더 자세히 소개하자면 다음과같다.

     

      1) <쏭클라>교회-1985년네 므앙타이 교회에서 집세를 지원하며 개척한 교회. 1991년 3월까지 방콕성서신학교(BBC)를 졸업한 왓싼/울라이완 전도사 부부가 교회를 맡아서 일하다가 사임하고 현재에는 썸차이(애즈베리)/뿌리아눗(무앙타이)전도사 부부가 시무하고 있음. 1987-1988년중에는 태국 십자군의 지도 밑에 있었음. 현재 출석신자 20명 정도

      2) <치앙마이>교회-신길성결교회의 박성철 장로의 재정후원으로 1989년 12월 2일에 므앙타이교회가 지도하는 가운데 개척된 교회임. 재정지원은 3년간 교회 임대료및 교역자 생활비를 지원하기로 약속함. 담임 교역자는 므앙타이 신학교를 졸업한 와니 여전도사이며 그 남편은 사역보조자로 일하고 있음. 현재 출석신자 20명 정도

      3) <농폭>교회-<코랏>교회의 유타영 전도사 밑에서 십자군 사역 보조대원으로 일하던 위타야 전도사(BBC)를 담임 교역자로 두고 므앙타이 교회의 재정지원으로개척된 교회. 1991년 7월에개척됨. 현재 출석신자 15-20명 정도

      4) <코랏>교회-태국 십자군을 통하여 1987년 2월 28일에 개척됨. 재정지원은 성결교단과 OMS에서 3년간 지원한 후 4년째에는 부분 지원했으며 현재ㅐ에는 자립을 시도하고 잇으나 완전자립을 위해서는 교회건축이 시급한 실정임. 교회건축을 위해 필요한 돈은 5천만원 정도. 개척교회이나 7명의 신학생 배출. 담임교역자는 유타영(BBC)/지라폰 전도사 부부. 출석신자는 현재 35명정도.

      5) <남펀>교회-태국 십자군 을 통하여 1988년 7월 26일에 개최됨. 담임교역자는 쑤왓(BBC, 애즈베리)/안나(애즈베리)전도사 부부. 개척된지 1년 후에 독립교회가 되었으나 아직도 외부의 재정지원이 필요한 상태. 현재 출석신자는 20명 정도.

      6) <차이야>교회-태국 십자군을 통하여 1989년 12월 16일에 개척된 교회. 담임 교역자는 므앙타이 신학교 졸업생인 타원 전도사. 꼬이 형제가 사역보조자로 돕고 있으며(부인)도 간호원으로 일하면서 교회를 돕고 있음.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 전도하고 있으며 현재 출석신자는 10명-15명 정도

      7) <팡아>교회-태국 십자군을 통하여 1990년 10월 23일에 개척됨. 담임 교역자는 파야우 신학교 출신인 쁘라껍/나라왓 전도사 부부. 이 둘이 모두 심자군 대원으로 일하고 있음. 현재 출석신자는 25명-30명 정도

      8) <황>교회-태국 십자군을 통하여 이영기 선교사의 지도로 1990년 5월 19일에 개척된 교회. 신길성결교회의 박성철 장로의 후원으로 개척된 교회이며 현재 모든 등록조건을 갖추어 EFT에 등록을 신청해놓고 잇음.

      1년간은 이 선교사가 직접 지도하며 일꾼을 훈련시켰음.

      담임 교역자는 낙티니(파야우) 여전도사이며 유핀(BBC) 여전도사 사역을 돕고 있음.

      현재 출석신자는 25-30명 정도. 때로 40명 이상 모일 때에는 장소가 협소하여 넓은 장소로 이전하는 것이 시급함.

      방콕에서 교회건물을 마련하려면 8천만원 정도의 비용이 필요함.

      10) <룽리란>교회-태국 선교부를 통하여 이용우 선교사의 지도로 1990년 6월에 개척된 교회. 담임 교역자는 빤야((므앙타이) 전도사 부부이며 래라 전도사가 사역보조자로 일하고 있음.

       광복성결교회(최경수 목사)의 후원으로 개척된 교회이며, 45평 정도의 콘도미니엄을 매입하여 교회장소의 문제를 해결 하였음.

      이 교회에서 믿게 된 녹 자매는 헌신하여 므앙타이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음. 현재 출석신자는 20-25명 정도

      11) <짜터>교회, <짜웍>교회, <도이랑>교회는 박윤식 서ㅓ교사가 지도하는 가운데 태국선교부를 통하여 개척된 교회들임. 라후부족의 전도마을 중에 교회설립이 가능한 지역에 개척된 것임.

    참고자료 2. 라후부족 선교에 대하여.
    1. 태국, 미안마, 중국남부의 소수부족이란?
    편의상 "태국, 미안마, 중국남부의소수부족"이라고 명칭하였으나 실제로는 라오스 베트남과 티벳고원 일대의 소수부족까지를 포함할 수 있다.

    이 일대에는 많은 소수부족들이 살고있다.

    이 들은 고산지대에서 유목 도는 화전민의 생활을 하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와 언어, 전통관습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다.

    현재 태국내에는 카렌족을 비롯하여 30여 부족이 살고 있으며 전체 인구의 80만 정도로 추정된다.

            1) 종교-애니미즘. 정글의 귀신을 숭배하며 부족에 따라서 하늘의신을 절대자로 숭앙하기도 한다.

                        중국에서 유래된 종족은 점을 치는등 도교의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2) 가정-종족마다 다르나 일부다처가 대부분이며 근친간의 결혼이 허용된다.

             3) 경제-고산지대에서 쌀, 면화, 아편 등을 생산한다. 절대빈곤 상태로서 질병을 해결하지 못한다. 

             4) 사회-무당이 제정(帝政)을 다스리며 씨족사회를 형성한다. 

             5) 교육-글자가 없으며 선교사가 알파벳을 이용하여 만든 글자가 있으나 보급이 미흡하며

                             성경 이외에는 책도 없으므로 절대무지 속에 산다.

              6) 선교-부족에 따라서 선교가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지역적인 구분과 종족의 문화차이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미전도 종족이라고 할 수 있다.

     

    2. 라후부족에 대하여
    중국 윤난성에서 100년 전부터 남하하기 시작하여 버마 동남부를 거쳐 40년 전부터 태국에들어온 부족이다. 일부 학계에서는 티벳에서 근원된 종족으로 보기도 한다.

    라후부족에는 13개 종족이 있으나 대체로 크게 5종족으로 나눌 수 있다.

     라후니, 라후나, 라후시, 라후쎌레가 한 계통의 언어를 쓰며 라후시와 라후푸가 같은 같은 계통이다.

    선교시에는 라후나 언어를 쓰며 이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이들의 전통은 메주를 만들어 먹으며 워치라는 김치를 먹고 널뛰기, 그네타기, 팽이돌리기, 자치기, 제기차기, 팔방놀이, 실뜨기. 디딜방아, 등짐지기, 아기 등에 업기 등 우리나라 전통과 아주 흡사한 전통을 갖고 있다.

    이들 종족에 따라서 다른 의상을 입기는 하지만 검은색에 무늬를 놓아 입고 남자들은 통이 넓은 반바지를 입는다.

    라후쎌레족의 경우, 긴 가운 형태의 겉옷을 입는데 힌색이나 색동색으로 무늬를 하며 옛 삼국시대의 의상과 거의 비슷한 형태를 하기도 한다.

     이들의 결혼은 15세 정도에 이루어지며(초경이 시작되면) 혼전성행위는 자유로운 편이나 결혼 후에는 절대로 외도가 금지된다.

    이들의 혼전행위는 소수민족의 자손번식에서 온 영향인 듯 하다.

    가정은 모계중심으로 이뤄지며 신부의 집에서 신랑이 살게 된다.
    종교는 귀신숭배의 애니미즘이다. 그러나 초혼(엑시타시)하는 샤먼의 초능력은 극히 적으며 다만 재난이나 질병의 원인을 찾아서 주술적으로 조치하는 원시 애니미즘이다.

    사회구성원의 중심은 항상 무당(남자)으로써 종교의식은 물론이며 생활의 모든 일을 다스린다.

    왜냐하면 귀신은 생사화복에 모두 연관되어 있으므로 무당이 이 모든일을 주관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당은 작은 일에서 큰일까지 판단하여 사람을 죽이는 데서부터 결혼, 출생, 장례 등 생활사를 주관한다.

    지역에 따라서 태국 정부가 임명한 마을 지도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변화가 있기도 한다.

    이들은 국가형성이 전혀 이뤄져 있지 않으며 극히 소수만이사는 지역의 국민자격을 갖고 있으므로 대체로 삶의 범위가 정글 안으로 국한되어 있다.
    이들의 경제생활은 전통적으로 유목 화전민의 생활이었으나,

    근간 10년 전부터 태국내 주요 관광지(트랙킹)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주식은 그들 스스로 재배한 쌀을 먹으며 가축(닭, 개, 돼지)을 방목하여 기른다.

     밭은 화전을 한 산위에 위치하므로 충문한 양식을 확보하지 못하여 년간 3-6개월간 식량부족을 겪곤 하기도 한다.

    영양실조와 마약중독에서 오는 질병이 30세 전후로 나타나기 시작하며 문둥병, 폐결핵, 말라리아, 각기병, 위장병, 신경통 등이 이들의 주요 병이다.

    수명은 45세를 장수하는 것으로 여긴다. 선교사가 영어 철자를 이용하여 만들 글자가 있으나 소수의 기독교인들만이 알고 있을 뿐 아직 보급이 저조하다.

     현재 이들 스스로의 글자가 없으므로(고대에는 있었다는 설도 있음) 전혀 교육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태국 정부가 정글 입구에 학교를 짓고 태국식의 교육을 하고 있으나 언어소통이 어렵고 교사 부족 현상으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현재 이들의 문제점은 마약중독과 절대빈곤, 절대무지이며 화전으로 인한 지역훼손도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에 상당수가 버마 국경지대에서 양귀비를 재배하여 마약매매조직에 팔곤 하는데 이러한 조직은 3,000명이 넘는 군대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마약재배도 심각한 문제이다.

    * 태국내 인구 : 30,000--60,000명으로 추정(확실하지 않는 이유는 인구 이동이 심하여 교통문제로 파악이 어려움)
    * 라후부족 전체인구 : 50만-70만

     

    3. 태국내 라후부족 선교
                     1) 과거 라후부족 선교
    선교사의 최초 라후부족 선교는 버마에서 이뤄졌다. 미국 남침례선교사 PAUL LEWIS가 버마에서 선교한 것이 최초의 선교사역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훨씬 그 전에 카렌족이 이미 선교를 시작했다.

    폴웨이스는 39년간을 라후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 라후어 성경 번역, 찬송가번역, 라후어 사전을 편찬하고 은퇴하였다.

     버마에서 기독교가 박해를 받자 버마의 신자들과 함께 태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태국 라후부족 선교의 시초이다.

    이 외에도 버마와 중국에 있던 소수부족 선교사들이 태국으로 오면서 태국내 선교가 전성을 이루게 되었다.
    한국 선교사로서는 1985년 예수교 장로회 개혁측 선교사인 황윤수 선교사가 태국에 입국하므로 최초의 소수부족 선교사가 되었다.

    현재 한국 선교사는 본인을 포함하여 4가정이 전문 소수부족 선교사로서 활동 중이다.
    초기 라후부족 선교사들의 헌신과 활동은 그야말로 눈부신 것이었다.

    중국과 버마에서 선교의 터전을 잃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으며, 이미 그들의 선배 선교사 또는 부모 선교사들로부터 받은 언어와 선교에 대한 필요한 유산을 충분히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의 선교에 대한 재능은 마치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던 바울과 같았으며 선교가 활발히 진행되는데 큰 역할을 하게 했다.
    먼저 이들(특히 침례교회)은 라후나종족을 집중하여 전도하며 라후나어로 성경과 찬송을 번역 출판하였다.

    현재 출판사업이 중단되기는 하였으나 영농지침서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의료선교와 구제사업이 전도에 발판을 만들어 주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뚜렷한 결실을 보이고 있지는 않다.

     다만 개화된 신자들이 스스로 시골 평야지대로 내려와서 역경을 이기고 정착한 곳이 여러 곳 있으며 그들은 자녀들에게 태국식 교육을 시키므로 그들의 후세를 태국민으로 육성하고 있다.
    현재 라후무족 신앙지도자 육성 기관은 1곳이며 산족 전체를 위한 신학교가 2곳 있다.

    이들은 3-4년제 교육제도를 마련하고 있고 중학교 졸업자에 한하여 입학을 허가하고 있으므로 입학이 무척 어려운 편이다.

    학교별로 학생 수가 다르나 전체로 볼 때 라후부족 신학생은 15명 정도가 있다.

    그 외에 기숙사를 통해서 교육된 사람들이(현재 20명 정도) 다수가 전도자나 사회복지 단체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다.

      2) 현재 라후부족 선교의 선교단체들

        ① 미국남침례교회-가장 오래 선교역사와 광범위한 선교를 시행한 단체이다.
        치앙마이 통호탠 거리에 소재. 선교사들이 점차 퇴각하여 현재 1가정이 본부를 지키고 있다.
        이미 자립한 교회를 통하여 기존의 시설은 운영하고 있으나 점차 규모가 축소되어 가고 있다.
        ② 북태국 선교회-미국그리스도교회 소속. 현재선교사 7가정. 리슈족을 집중적으로 선교하는 단체로써 선교지 부근의 라후족을 일부 선교한다.
        이들은 한 가족으로 구성된 선교단체이며 할아버지 때부터 리슈족 선교를 하여왔다. 리슈족 쎈터를 운영한다.
        ③ 동남아시아 선교회-미국 그리스도교회 소속. 선교사 4가정. 리슈족과 아카족 선교에 기여하고 있다.
        선교지 부근의 라후족을 선교하며 C. B. I. 신학교를 운영한다.
        ④ 한국 예수교장로회 개혁측 선교부-황윤수(1985), 정도연(1990), 박문수(1991), 방정렬(1990) 4명이 카렌족과 라후족 선교에 기여하고 있다.
        메잔지역에 선교쎈터를 건립중이며 카렌족 전도자 훈련쎈타와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다.
        ⑤ 한국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선교부-박윤식 선교사(1989)가 활동 중이다.
        ⑥ 기타 독립 선교사-라후족 중에서 미국으로 이민 이후 선교사가 되어 활동하는 독립 선교사가 있다.

        3) 현재 라후부족 선교의 전략과 비판
        현재 라후부족 선교에서 전파하는 일은 현저하게 축소되고 있다.

        침례교회는 이제 전파하는 일을 중지했다. 그들은 기숙사를 통해서 일꾼을 양성하며 그들이 스스로 전파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자립하는 교회는 극히 드물며 대부분이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고 있거나 다른 단체를 통해서 일하려고 하고 있다.

        기타 다른 선교회들도 그들의 전도모임을 해산시켜 버렸다. 60여개의 아카마을을 전도하던 한 선교사는 현재 하카족 훈련쎈타만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결코 전파하는 일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서구 선교회의 퇴조현상과 초기에 양육을 염두하지 않은채 너무 지나치게 많은 수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현재 기독교대한성결교회가 전도하는 지역에는 57개의 라후부족 마을이 있으나 전도자가 관계하는 마을은 고작 7개뿐이며 그들도 아직 신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아직 전파하는 일은 주요한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후의 전파는 양육하는 일을 동반하여 자전의 시기를 가져 올 수 있도록 전략을 전환시켜야 한다.

        선교정책은 통계를 위한 것이 아니며 한 사람에게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도심주변으로 부족민을 불러내어 훈련시키는 정책이 활기를 띤다. 현재 거의 모든 선교부의 정책은 기숙사 운영, 신학교 운영, 선교쎈터 운영에 집중한다.

        이러한 활동은 도심 주변의 선교부 건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활동은 제자양육과 지도자 육성에 활기를 갖게 하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부족들을 떠나서 도심지 주변에서 이뤄지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

        도심주변의 생활이 익혀지면 모두가 산으로 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훈련을 마친 사람들은 선교사나 선교부의 도심활동을 돕기를 원하거나 아니면 다른 직업에 종사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훈련 내용이 부실함에도 있으나 훈련의 내용과 장소가 산부족들과 격리되어 있는 데서 온다.

        또한 너무 많은 수를 훈련시키므로 실제로 개인에 관심을 두지 못하는 데도 있다고 본다.
        전도를 위한 중간 관리자 도입-선교사가 산부족으로 사랑하지만 결코 산부족과 문화차이를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선교사와 산부족간에 이해의 차이가 생길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 주요정책을 결정 시행하는 데도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다.

        또한 넓게 산재해 있는 전도마을을 찾아가는 것은 시간의 소모와 위험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위험을 극복하는 데에 신실한 라후인 중간 관리자를 두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으로 중간 관리자를 두고 선교사를 돕게 하고 있다.

         중간 관리자 도입 정책은 선교사의 문화극복과 언어장애를 극복케 하는 좋은 정책이다.

        그러나 이 정책을 도입함에 있어 중간 관리자와 선교사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며 선교사가 부족에 대한 이해를 소홀히 하기 쉬운 점을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이다.
        라후부족의 실제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의 부재-서구 선교회의 축소현상으로 서구 선교회의 보다 전진적인 노력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반면 라후부족의 실제 문제인 마약중독, 극빈, 질병, 문맹, 관광지 개발로 인한 부족의 피폐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장기적인 대책은 거의 없는 형편에 있다.

        한국 장로교회개혁측 선교부에서 근간 카렌족을 위한 병원을 산마을 근교에 세우고 영농쎈터를 게획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 선교사의 노력은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라후부족의 실제문제 해결을 위한 지역교회를 중심한 태국어훈련, 라후어 글자 보급, 마약진료, 현대문명의 악습으로부터 보호계몽, 장기영농대책 및 기술제공 등의 실제사역이 간절히 요청된다.

         

        4)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선교전략
        1989년 박윤식/여명순 선교사 부부를 소수 산부족을 위하여 태국에 파송하므로써 구성됨. 박 선교사 부부는 1년간 태국어를 연수한 후, 현재 치앙마이를 근거로 라후어를 연수하며 사역을 하고 있다.
        그 동안의 활동보고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언어연수-라후어와 태국어 연수. 현재 간단한 설교와 통역이 가능함
          ② 복음전도-주요지역을 2지역으로 선정하여 9개 마을에 정기적으로 전도
          ※ 치앙라이지역 : 쩌터, 짜웍, 짜혜, 도이버, 짜하(메따창)
          ※ 황지역 : 넝다우, 방캄, 도이랑, 도이앙카.
          이 모든 마을은 미전도지역이었음.
          ③ 전도자 파송전도-전도마을에 전도자 1인씩을 파송하여 교회 또는 마을을 돌보게 함. 총인원 7명
          ※ 전도자 명단 : 엘리사, 싸이본, 죠셉, 요한, 담롱, 짜이상, 씽
          ④ 라후부족 교회설립-전도마을 중에서 교회의 설립이 허락되고 세례교인이 5명이상 생길 경우에 교회를 설립. 현재 3곳 완성
          ※ 교회명 : 짜터, 짜웍, 도이랑 교회
          ⑤ 부족마을 영농대책-짜터 마을에 교회가 설립된 후에 그들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 잡업을 실시케 함.(코타이 실크주식회사와 협력 : 대표 김병호 박사)3년 후 호당 년간 소득 5만밧트(150만워 이상)
          ⑥ 신학생 육성-3명의 라후부족 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
          ⑦ 전도자 훈련-매월 1회, 1박 2일로 합숙하며 기도회, 성경공부, 전도대책수립 등을 시행
          ⑧ 마약진료-도이랑 마약환자 8명을 진료하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 이들 중에 5명이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어서 양육 중임

        5) 지향해야 할 라후부족 선교전략
        현재 라후부족의 가장 큰 도전은 현대문명의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국토개발과 관광지 개발에 따라서 정글 속으로 밀려드는 현대문명은 폐쇄적이던 라후부족에게는 수용할 수 없으리만큼의 큰 도전이 되는 것이다.

        이 도전적인 현대문명의 접근을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라후부족은 사랑의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의 참모습을 찾게 될것이다.

         만일 수용치 못할 경우에는 그들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먼저 파멸 되었던 소수민족들처럼 파멸로 가고 말것이다.

        따라서 라후부족에 대한 선교는 단순히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전략을 넘어서 다각적인 선교를 시행하도록 해야 한다.

          ① 선교사와 현지인 사역자와의 긴밀한 협력관계 유지-선교사는 현지인 전도자를 제자훈련 등의 방법으로 장기간 양육하므로 사역자로서 성숙시킨 후, 사역에 파송하되 현지 부족민들에 대한 이해를 넓고 깊게 가짐으로 그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
          ② 질적성장을 통한 양적성장의 추가-교회가 전도지역이 절대 부족한 현상을 보이고 있으나 현재의 교회가 너무 허약하므로(구제에 의하여 존속함) 기존의 교회를 성숙시킴이 우선해야 할 과제이다.
          따라서 기존의 교회성숙에 최선을 다함으로 그들 스스로의 헌신으로 양적성장을 가져오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도마을을 급속히 확산시키는 것은 지양해야 하며 매월 1회 정기점검을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성숙과 성장을 함께 추구해야한다.
          ③ 자립 자전의 정책 추구-라후부족교회의 성숙을 위해서는 영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의 자립정책이 필요하다.
          따라서 선교부는 성숙한 사역자 양성에 힘을 기울여 헌신한 사역자를 배출하도록 해야하며 경제적으로는 자립의 기틀로써 영농대책이나 수공업대책을 세워서 근본적인 구제를 해야 한다.
          단편적인 구제는 오히려 자립심을 파괴할 뿐이다,
          ④ 교육대책-교회는 부족민을 위한 교육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
          현대교육을 위해서는 태국식 학교교육을 적극 유치하되 라후부족의 근본을 잃지 않도록 교회가 민족교육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
          (예:라후부족 글자보급, 위생교육, 여성교육, 라후민족 전통과 역사 연구 등)
          ⑤ 문화 보존책-소수민족의문화가 현대문명의 물결 속에서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므로 이들의 문화를 보존하지 않을 경우 라후부족은 각 국가별로 희석되어서 결국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들의 문화를 찾아 보존하며 라후부족의 긍지를 일깨워 주고 라후민족의 장점을 개발하여 인류사에 공헌토록 해야 할 것이다.
        (이상 박윤식 선교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