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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한국 기독교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본문

선교 한국/성서 한국을 기도하다

펌) 한국 기독교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3. 10. 8. 21:52

 

 
 

한국 기독교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가상대화/ 선조들이 만난 예수…신라-경교, 고려-야리가온, 조선-소현세자

  • 기자명 양진일
  •  승인 2005.09.16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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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부터 선조들이 기독교 신앙을 맛보았다. 유물 등을 근거로 볼 때 복음이 한반도에 뿌려진 시기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이 땅에 선포된 복음의 시원을 찾아가 보자(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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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 : 한국 개신교의 시작을 언제로 볼 것인가가 종결되지 못한 논의인 것처럼, 한국기독교의 시작도 그 출발이 정확히 언제부터이다 라고 규정하기는 곤란합니다.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나 증거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추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통일신라시대 때 이 민족이 처음으로 기독교를 접하지 않았겠나 추측하기도 합니다. 당시 통일신라와 밀접한 교류관계에 있던 당나라에 '밝음의 종교'라는 '경교'(景敎)가 유행하였는데, 두 나라 사이의 교류 과정 중, 경교가 자연스럽게 이 땅에 유입되지 않았을까를 추론하는 것이지요.

정호 : 아무리 당나라와 신라 사이의 교류가 밀접하였다고 해서 당나라에 유행하던 경교가 신라에도 유입되었을 것이다 추론하는 것은 비약이라 생각되는데요. 혹시 그렇게 추론할 수 있는 몇 가지 증거라도 있나요?

▲ 경주 불국사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신대의 돌십자가상. 당시 선조들이 복음을 수용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서이다. (사진제공 한국기독교박물관)
김 목사 : 정호 형제의 얘기처럼, 몇 가지 증거가 없다면 추론이라기보다는 상상이나 소망에 불과할 것입니다. 추론이라고 하는 것은 몇 가지 증거를 바탕으로 어떤 사실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추측하는 것이니까요. 경교의 신라 유입 가능성에 대해서 추론할 수 있는 몇 가지 증거가 있는데, 1955년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돌 십자가, 마리아의 모습을 닮은 관음상, 해남 대흥사에 있는 동 십자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불교 사찰에서 기독교적 상징물들이 발견됨으로써, 경교의 자연스러운 유입이 있지 않았겠나를 추측하게 된 것입니다.

주희 : 경교의 유입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잘 아는 불교사찰에서 기독교적 상징물들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신라 시대 이후에도 이 땅에 기독교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추측하게 만드는 내용들이 있나요?

기독교 유입은 여러 번 연기되었다

▲ 불국사 조재의 통일신라시대 마리아의 모습을 닮은 관음상. (사진제공 한국기독교박물관)
김 목사 : 고려 시대에도 몽고에서 유행하던 기독교 신앙(야리가온)이 유입되지 않았을까를 질문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추측입니다. 그러다 추론의 단계를 뛰어넘어 명확한 역사적 사실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세스페데스 신부의 입국부터입니다. 그러나 세스페데스 신부는 우리 민족을 침략한 일본군의 종군신부로 이 땅을 밟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과 관련된 직접적인 전도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일본에 포로로 잡혀 간 이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여 그들 중 상당수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고, 그들이 1600년대 초반에 있었던 일본 내 가톨릭 박해 때 순교자로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다는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주희 : 그렇다면 목사님, 세스페데스 신부 이후에 이 땅을 찾아 온 기독교 선교사는 누가 있나요?

김 목사 : 이 땅을 찾아 온 것은 아니지만, 병자호란 당시 포로로 청나라에 잡혀 간 소현세자가 독일인 예수회 신부 아담 샬을 만나 가톨릭 신앙을 접하고,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포로의 신분이기는 하였지만 앞으로 조선의 왕이 될지도 모를 세자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실제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귀환할 때 선교사 한 명을 자신과 동행하게 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선교사의 부족으로 인해 대신 신앙이 돈독한 환관 5명과 궁녀 몇을 황제가 하사하는 형식으로 함께 딸려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조선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죽게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죽은 원인에 대해 학질이다, 중국에서 가져온 비단 때문이다 많은 말들이 있는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기득권세력의 암살로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성길 : 만약 그 때 소현세자가 조선에 왕이 되고, 자신의 신앙을 국교로 선포하거나 아니면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였다면 우리 민족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걸요.

김 목사 :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지나친 상상은 금물입니다. 하여튼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 민족과 기독교 복음과의 만남을 연기시킨 사건이라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후에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남인 계열의 유학자들에 의해 학문적 관심에서 서학을 받아들인 것이 계기가 되어 천주교 신앙인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은 왜 박해를 받았을까

영숙 : 목사님,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1884년부터 보통 시작하는데, 가톨릭의 역사는 언제부터라고 보나요?

김 목사 : 개신교의 역사 시점과 관련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는 것처럼, 가톨릭도 언제부터 이 땅 위에서 교회공동체의 모습을 갖추었는지 그 정확한 연도를 산출해내는 것이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 땅을 침략한 일본군 가운데 수 만 명의 천주교 신앙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전도에 의해 1592-1593년에 조선교회가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1779년 천진암(天眞庵)에서 가톨릭 교회가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이 땅에 돌아와 이벽의 집에서 영세식을 가진 1784년을 가톨릭의 시작으로 봅니다. 개신교 역사보다 정확히 100년이 앞선 것이지요.    

태수 : 가톨릭이 초기에 받았던 박해가 상당히 혹독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박해를 받았던 주원인은 무엇 때문이었나요?

김 목사 : 여러분이 국사를 공부할 때 자주 들어 보았을 신해박해(1791), 을묘박해(1795),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경신박해(1860), 병인박해(1866) 등 가톨릭 교인들이 받았던 박해는 그 횟수와 강도가 정말 엄청났습니다. 사실은 이러한 대규모 박해 사건 뿐 아니라 가톨릭이 이 땅에 소개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불란서와의 1886년 수교가 체결되기 전까지 천주교인들은 일상적으로 박해를 받아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해를 받았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핵심만 말하자면 가톨릭 신앙이 말하는 내용과 그 신앙을 받아들여야 했던 이 땅 토양과의 세계관의 차이, 신앙의 차이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태수 : 목사님,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시겠어요.

▲ 양진일 목사(열린마을교회).
김 목사 : 천주교 신앙이 이 땅에 소개되기 전, 이 민족은 나름대로의 세계관과 가치규범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원리가 무엇인지, 조화로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금해야 하는지 등의 내용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던 토양 위에 천주교 신앙이 소개된 것입니다. 만약 소개된 천주교 신앙의 내용과 이 민족이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세계관적 내용이 동일하였다면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박해는 없었을 것입니다. 세계관의 차이가 너무나 분명하였고, 또한 그것이 기존의 질서를 명백하게 위협할만한 내용이다 판단되었기 때문에 조정은 혹독한 박해를 가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남인 계열의 소장 지식인들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조선사회는 직업에 따른 사회계급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이나 반상제도(班常制度)등을 두어 철저한 계급제를 실시하고 있었으나, 천주교 신앙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평등하고 존엄한 존재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인간이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할 유일한 존재는 천주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주장함으로 조선의 절대왕권을 상대화하는 혁명적 사상을 자신들의 신앙 내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조정의 입장에서는 반국가이적단체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다음에 계속)

양진일 / 복음과상황 편집위원·청년성서연구원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