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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가상대화/ 선조들이 만난 예수…신라-경교, 고려-야리가온, 조선-소현세자
- 기자명 양진일
- 승인 2005.09.16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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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가기 메일보내기 복사하기 본문 글씨 줄이기 본문 글씨 키우기개신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부터 선조들이 기독교 신앙을 맛보았다. 유물 등을 근거로 볼 때 복음이 한반도에 뿌려진 시기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이 땅에 선포된 복음의 시원을 찾아가 보자(편집자 주).
김 목사 : 한국 개신교의 시작을 언제로 볼 것인가가 종결되지 못한 논의인 것처럼, 한국기독교의 시작도 그 출발이 정확히 언제부터이다 라고 규정하기는 곤란합니다.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나 증거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추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통일신라시대 때 이 민족이 처음으로 기독교를 접하지 않았겠나 추측하기도 합니다. 당시 통일신라와 밀접한 교류관계에 있던 당나라에 '밝음의 종교'라는 '경교'(景敎)가 유행하였는데, 두 나라 사이의 교류 과정 중, 경교가 자연스럽게 이 땅에 유입되지 않았을까를 추론하는 것이지요.
정호 : 아무리 당나라와 신라 사이의 교류가 밀접하였다고 해서 당나라에 유행하던 경교가 신라에도 유입되었을 것이다 추론하는 것은 비약이라 생각되는데요. 혹시 그렇게 추론할 수 있는 몇 가지 증거라도 있나요?
주희 : 경교의 유입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잘 아는 불교사찰에서 기독교적 상징물들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신라 시대 이후에도 이 땅에 기독교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추측하게 만드는 내용들이 있나요?
기독교 유입은 여러 번 연기되었다
주희 : 그렇다면 목사님, 세스페데스 신부 이후에 이 땅을 찾아 온 기독교 선교사는 누가 있나요?
김 목사 : 이 땅을 찾아 온 것은 아니지만, 병자호란 당시 포로로 청나라에 잡혀 간 소현세자가 독일인 예수회 신부 아담 샬을 만나 가톨릭 신앙을 접하고,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포로의 신분이기는 하였지만 앞으로 조선의 왕이 될지도 모를 세자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실제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귀환할 때 선교사 한 명을 자신과 동행하게 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선교사의 부족으로 인해 대신 신앙이 돈독한 환관 5명과 궁녀 몇을 황제가 하사하는 형식으로 함께 딸려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조선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죽게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죽은 원인에 대해 학질이다, 중국에서 가져온 비단 때문이다 많은 말들이 있는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기득권세력의 암살로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성길 : 만약 그 때 소현세자가 조선에 왕이 되고, 자신의 신앙을 국교로 선포하거나 아니면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였다면 우리 민족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걸요.
김 목사 :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지나친 상상은 금물입니다. 하여튼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 민족과 기독교 복음과의 만남을 연기시킨 사건이라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후에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남인 계열의 유학자들에 의해 학문적 관심에서 서학을 받아들인 것이 계기가 되어 천주교 신앙인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은 왜 박해를 받았을까
영숙 : 목사님,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1884년부터 보통 시작하는데, 가톨릭의 역사는 언제부터라고 보나요?
김 목사 : 개신교의 역사 시점과 관련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는 것처럼, 가톨릭도 언제부터 이 땅 위에서 교회공동체의 모습을 갖추었는지 그 정확한 연도를 산출해내는 것이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 땅을 침략한 일본군 가운데 수 만 명의 천주교 신앙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전도에 의해 1592-1593년에 조선교회가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1779년 천진암(天眞庵)에서 가톨릭 교회가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이 땅에 돌아와 이벽의 집에서 영세식을 가진 1784년을 가톨릭의 시작으로 봅니다. 개신교 역사보다 정확히 100년이 앞선 것이지요.
태수 : 가톨릭이 초기에 받았던 박해가 상당히 혹독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박해를 받았던 주원인은 무엇 때문이었나요?
김 목사 : 여러분이 국사를 공부할 때 자주 들어 보았을 신해박해(1791), 을묘박해(1795),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경신박해(1860), 병인박해(1866) 등 가톨릭 교인들이 받았던 박해는 그 횟수와 강도가 정말 엄청났습니다. 사실은 이러한 대규모 박해 사건 뿐 아니라 가톨릭이 이 땅에 소개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불란서와의 1886년 수교가 체결되기 전까지 천주교인들은 일상적으로 박해를 받아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해를 받았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핵심만 말하자면 가톨릭 신앙이 말하는 내용과 그 신앙을 받아들여야 했던 이 땅 토양과의 세계관의 차이, 신앙의 차이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태수 : 목사님,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시겠어요.
양진일 / 복음과상황 편집위원·청년성서연구원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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