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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선교회성결교회의 사랑의 사도 차창선목사
해꽃 추천 0조회 16309.08.19 15:06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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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회의 사랑의 사도
차창선 목사
혀 명 섭
서울신대 교회사 박사과정(Ph.D)
따뜻한 사랑의 온정이 필요한 계절이다. 흔히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자아실현이라고 한다.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개인 곧 자아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주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간혹 세파에 따라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모든 세상의 좋은 것들을 포기하고 예수의 마음을 이 세상에 새기고자 했던 사람이 있다. 그분은 성결교회의 사랑의 사도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차창선 목사이다.
차창선 목사는 1903년 12월 함경남도 안변에서 차봉식 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예수님을 먼저 영접했던 어머니는 남편의 반대와 모진 핍박 가운데 신앙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한번은 대문을 잠그고 문간방에서 지키고 있던 남편을 피해 교회에 가기 위해 담장을 넘으려고 했다. 어두운 밤이어서 그만 담장 위에 꽂아놓았던 유리병 깨진 조각에 젖가슴이 절단되는 상처를 입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이 상처로 인해 순절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시고 거룩한 산제물로 받으셨다. 이 순절을 계기로 그녀의 남편은 하나님께 나오게 되었으며, 그 가정은 이후 믿음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다.
비행사의 꿈을 안고 청년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고 있을 무렵, 차창선 목사는 어느날 공원을 산책하고 조용히 생각에 잠겨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갑자기 “창선아! 창선아! 창선아!” 하고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누가 나를 부르는 거야”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하늘에서 “네 민족은 어떻게 하려느냐?” 하는 청천벽력 같은 음성이 들렸다.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즉각 순종하지 못하고, 이 일로 인해 날마다 걱정하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가자니 그의 꿈을 포기해야 할 형편이었다. 더군다나 사장으로부터 “한국에 돌아가지 말고 나와 함께 일을 하자. 그러면 내 딸을 줄 것이며 독일에 유학까지 시켜주겠다”라는 제안까지 받은 상태였다.
이 문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씨름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어느 날 “그것은 다 똥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한번 들렸다. 이 음성을 듣고 그는 모든 좋은 조건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다. 그리고는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다(1929/4-31/3). 성서학원을 졸업한 후, 그는 마산 오동동 성결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서대문성결교회 전도관, 장막전도대, 아현교회, 체부동교회, 김해제일교회 등을 거치면서 사역했으며, 해방 후에는 갈릴리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차창선 목사의 사역에는 흥미진진한 많은 일화가 따라 다닌다. 한번은 집회를 인도하는데 한 여집사의 남편이 술을 먹고 와서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우는 것이었다. 차창선 목사가 참고 여러 번 달래는데도 계속하여 호기를 부리며 훼방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무섭지도 않느냐?”라고 호통을 치자 그 사람의 혀가 한 자나 빠져버렸다. 그래도 집사의 남편이기에 불쌍히 여겨 회개하라고 권하고 기도하였더니 쑥 나왔던 혀가 들어가며 고쳐지는 것이었다. 경건의 모양만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도 갖추었던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대목들이다.
한편 그는 사랑의 능력도 겸비한 목회자였다. 그 사랑은 눈물의 기도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그가 갈릴리교회를 개척할 때의 일이었다. 갈릴리교회는 상이군인들과 고아, 걸인들이 몰려들기로 유명한 교회였다. 그가 사회의 아픔을 가진 자들에 대해 남다른 사랑을 갖게 된 것은 일제 말 옥살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김해제일교회를 시무하던 중,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6개월간 갖은 고생을 하다가 8?15해방으로 사형 하루 전에 석방되었다. 그는 옥중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회적 아픔을 가진 자와 교도소 선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일에 매진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에서 뒤로 젖혀지기가 일 수였다. 한번은 차 목사가 집회에 다녀오면서 쌀을 한 가마 지고 오는 것을 자녀들이 보았다. 부흥회를 했던 교회에서 감사의 징표로 특별히 보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녀들은 오늘 저녁은 쌀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풀어보지도 않고 짐꾼을 시켜 시장에 내다팔고는 대신 고구마, 보리쌀, 감자 등을 사다가 수십 명의 상이군인, 고아, 걸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그 목자에 그 사모였다. 자신의 자녀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 중에 얼마를 떼어 자녀들에게 쌀밥을 먹인들 누가 뭐하고 하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혼자 좋은 것으로 호식(好食)하기보다는 함께한 사람들의 배고픔과 설움을 먼저 아울렀던 것이다.
차창선 목사의 이러한 사역은 병석에서 “주님을 만나십니까?”라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1971년 4월 1일 주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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