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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파' 이은상과 아버지 이승규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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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환목사
2021. 1. 28.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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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파' 를 작사했던 이은상과 아버지 이승규 장로
서울 태생의 이승규 장로(李承奎, 1860~1922)는 독립운동가이며, 육영사업가이기도 하다.
1866년 병인년을 맞이한 조선에서는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이 심했다. 천주교인이었던 이승규 가문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가족 모두 경남 동래까지 피난을 하였다. 이승규는 187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상경하였다. 대원군의 극심한 탄압 때문에 다시는 정치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는 한의사가 되겠다는 뜻을 정하고 유명한 한의사를 찾아 한약방에서 7년간 잔심부름을 하면서 한의사 시험을 준비하였다.
한의사 시험에 합격하고 면허를 얻은 후 제2의 고향인 경남 동래에 내려가 그곳에서 20년간 한의원을 운영하였다. 동래지방에서는 꽤 소문이 나서 성업을 이루었다. 그는 44세가 되던 해에 이제는 남을 위해서 살겠다고 다짐하고는 경남 마산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이승규는 1904년 호주 장로교 선교사인 아담슨(Rev. Adamson, 손안로)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아담슨 선교사는 마산에 문창교회를 설립하였고 이승규는 자연히 아담슨 선교사를 따라다니며 전도에 힘을 쏟게 됐다.
마산 문창교회에는 교인들이 계속 모여들었다. 이승규는 자신이 전도한 아이들을 교육할 필요성을 느껴 1906년 마산사숙(馬山私塾)을 설립하고 운영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모여 들자 1908년에는 마산사숙을 마산시 성남동으로 이전하였다. 또 마산문창교회를 설립했던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마산 창신학교를 설립하였고, 학교는 경남 일대에서 명문학교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설립에 큰 힘을 쏟았던 아담슨 선교사가 초대 교장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매일 아침마다 경건회를 갖고 성경을 정규 과목으로 교육했다. 2대 교장으로는 라이올(D. M. Ryall, 라대벽) 선교사가 부임하였다.
일제가 한국을 점령한 시기에도 마산 창신학교는 민족의식과 더불어 예수의 정신을 가르치는 학교로 성장해갔다. 1919년 마산에서도 3·1 독립운동을 일제의 눈을 피해 가면서 준비하고 있었다. 이승규를 비롯해서 이 학교 교사인 이상소, 임학천, 마산문창교회 교인 김용환 등이 협력하여 마산과 경남 일대에서 계획을 세우고 3·1운동을 주도한 바 있다.
마산 창신학교에서 이은상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은상은 마산 창신학교 설립에 큰 공을 세웠던 이승규 장로의 둘째 아들로, 1903년 마산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설립한 창신학교에 애착을 갖고 있었으며 초등과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1923년 서울에 있는 연희전문학교 3년 과정을 수료하고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였다. 동경 동양문과대학교에 진학하여 국문학을 연구하였으며, 귀국 후 1928년부터 1929년까지 1년간 <조선어사전> 편집위원으로 활동을 했다. 이 기간 동안 종영택, 임영빈, 방인근, 최상현 등 기독교문인들과 함께 기독교문학을 발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승규 장로는 아들 이은상에게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일해 달라 유언을 남기고 1922년 3월 29일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던 마산시민들은 마산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1978년 5월 17일 마산 창신학교 창립 70주년을 맞이해서 이승규 장로 기념동상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승규 장로는 마산 문창교회의 장로로, 교계와 교육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그의 아들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은 기독교문학에 크게 공헌하였다. 1922년 20대의 젊은 나이에 ‘아버님을 여의고’란 시조를 써서 발표하였다. 1931년에는 ‘성불사’란 가사를 작사했으며, 1932년에는 ‘가고파’를 작사하여 많은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 주었다. ‘가고파’의 가사 전편을 소개한다.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 가고파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 지고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
‘가고파’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는 노래다. 이은상은 작사가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교수로도 활동하였으며, 1935년에는 <조선일보사> 편집국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신문사에서 나와 1942년 전남 승주군 백운사에 은거하였지만 1942년 조선어 사건으로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광주에서 발행하는 <호남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으로 재직하였지만 6·25전쟁으로 폐간되었다가 수복 후 복간했다. 말년에는 이충무공기념사업회장, 한국작가협회장 등 많은 일을 했으며, 1982년 서울에서 별세,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을 거행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한국장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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