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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펌)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Joan Baez. 본문

부르심의 축복/처음사랑 in Jumunjin 1972

펌)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Joan Baez.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9. 11. 7. 13:07

그 때는 죠안 바에즈의 얼굴을 몰랐습니다 

그냥 고운 목소리와  멋진 통키타 소리에

작으마한 금성 라디오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음악으로 들었습니다 

우리 시절에 맞는 감성적 노래가 좋았던 모양입니다 .

 

엑스플로 74 여의도 성회에서 많이 불렀던 

우리는 승리하리

승전가 등의 

찬양을 불렀던 가수인지도 몰랐습니다 .

 

이제는 

사춘기의 설렘과 아픔을 고민하던 

그 때 

그 시절에 좋아했던 음악과 

그 분들을 영상으로 볼 수 있어 

더 좋은 것 같아요 .

 

 

 

 

 


 
조안 바에즈
Joan Baez
 
본명
조안 챈도스 바에즈
Joan Chandos Baez
출생
1941년 1월 9일 (82세)
국적
직업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사회운동가
장르
활동
1958년 ~ 현재
배우자
데이비드 해리스 (1968년 ~ 1973년, 이혼)
자녀
가브리엘 (1969년 12월생)
종교
링크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1941년 1월 9일 뉴욕 스태튼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존 브리지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고,

아버지 앨버트 바에즈는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온 이민자다.

뉴욕 이타카의 코넬대학에서 연구물리학자로 있던 아버지는 군사전략과 관련된 방위산업체 일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도덕적 갈등을 느끼면서 어머니와 함께 교적을 장로교회에서 버펄로에 있는 퀘이커교당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여기서 반전론자가 되어 유네스코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런 부모의 태도가 존 바에즈에게 영향을 주었던 모양이다.

 

 

포크 음악의 마돈나, 존 바에즈의 성장기
존 샨도스 바에즈(Joan Chandos Baez)는 1941년 1월 9일 미국 뉴욕의 스태이튼 아일랜드(Staten Island)에서 멕시코 출신의 물리학자인 아버지 알베르트 바에즈(Albert Baez)와 스코틀랜트 출신의 어머니 존 브릿지 바에즈(Joan Bridge Baez) 의 세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희곡 작가이자 교사였고, 아버지는 물리학자이자 유네스코(UNESCO)의 콘설턴트 일도 맡아 미국은 물론 전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연구하는 일을 해야했기 때문에 어린 존 바에즈는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일이 많았고, 한때는 아버지를 따라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살기도 했다. 그녀의 부친은 물리학자로 MIT 등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초빙되는 교수였지만, 멕시코계라는 이유로 존 바에즈는 인종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핵물리학자로 여러 방위산업체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는 유능한 인재였지만 핵무기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런 제의를 거절했다. 존 바에즈가 반전평화운동가이자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런 아버지의 영향과 가정적 환경도 컸다고 할 수 있다.

 

 

 

존 바에즈는 대부분의 시간을 읽고 토론하고 명상에 잠기면서 매우 영적인 상태에 머물렀다.

며칠 동안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기도 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느라 발이 코끼리처럼 붓기도 했다.

당시에는 1년에 스무 번 정도만 콘서트를 열었으며,

<안젤리나여, 안녕>(Farewell, Angelina)와 크리스마스 음반인 <노엘>(Noel)을 녹음했다.

버는 돈은 대부분은 기부했고,

비폭력운동과 관련된 일이라면 수천 달러에 이르는 돈을 기꺼이 기부했다.

콘서트는 협동조합 보육원, 퀘이커 예배, 평화단체 등을 위한 공연이 대부분이었다.

음반수입이 꾸준히 들어왔기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도 크지 않았고,

따라서 기부 액수에도 한계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