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 축복의 땅. 광야에서
펌) 10·18 부마 항쟁 본문
GC02205166 |
十一八釜馬抗爭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역사/근현대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경상남도 창원시 |
현대/현대 |
남재우 |
유신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1979년 10월 부산,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
1961년 5·16 쿠데타로 시작된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영구적인 독재를 위하여 유신 헌법을 만들었다. 유신 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으로서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대통령 선출을 국민에 의한 직선이 아니라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뽑는 간선제로 바뀌었고, 임기는 6년으로 연장하고 중임 제한을 철폐하여 영구 집권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의 권한은 강화되었지만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때문에 정권 안정은 이루지 못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긴급 조치를 통하여 민주화 투쟁을 탄압하였는데, 긴급 조치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었다. 유언비어와 날조와 유포, 학생들의 집회·시위·정치 간섭 행위, 유신 헌법을 부정하거나, 왜곡·비방·개정 및 폐기를 주장하는 청원·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반민주적인 것이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국민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보릿고개로 표현되던 극단적인 기아를 극복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고도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빈부 격차는 확대되었고, 한국 경제의 대외 의존도는 높아져 갔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 1979년 YH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은 최소한의 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노동자들의 삶을 보여주는 예였다. 부산·마산 지역에서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허덕이는 노동자들과 생활의 터전을 확보하지 못한 도시 빈민층이 확대되고 있었다. 그리고 1979년의 불황은 국민들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경기 침체에 따른 휴업, 폐업, 노동자 감원, 조업 단축, 임금 체불과 이로 인한 노동 쟁의가 급증했다. 이러한 상황들이 1979년 10월에 부마항쟁이 일어난 이유였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 대학교에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었다. 마산 지역은 경남대 학생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부산 대학교의 시위 이전부터 시위가 계획되고 있었으나 부산에서의 시위가 시작되면서 당초 예정되었던 22일의 궐기 계획이 앞당겨졌다. 1979년 10월 18일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경남 대학교 도서관 앞에 모인 1500여 명의 학생들은 ‘민주 회복’, ‘학원 자유’, ‘독재 타도’ 등을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다. 오후 5시 3·15 의거탑 주위로 수백 명의 학생이 모여들었다. 저녁부터 창동, 부림 시장, 오동동, 불종 거리 일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학생보다는 시민참여가 높아졌다. 공화당사가 파괴되고 양덕동·산호동·북마산 파출소가 불탔다. 이날 시위는 19일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19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정부는 20일 정오에 마산시 및 창원 일대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학생과 시민, 노동자들의 반독재 투쟁은 ‘일부 학생과 불순분자의 난동’으로 왜곡되기 시작했고, 투쟁은 멈추었다.
항쟁은 1979년 10월 20일 오전12시 위수령 발동으로 끝났다. 하지만 항쟁의 성과는 적지 않았다. 유신 체제는 내부 분열로 인해 박정희의 죽음을 초래했고, 오랜 군사 독재 정권이 끝나는 계기가 되었다.
항쟁으로 인하여 부산에서 1,058명, 마산에서 505명 등 총 1,563명이 연행되었다. 군법 회의에 회부된 87명[학생 37명, 일반인 50명] 중 단순 가담자 67명은 소가 취하되었고, 20명[학생 7명, 일반인 13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일반 검찰에 송치된 31명[학생 26명, 일반인 5]은 전원이 소가 취하되었고, 651명[이 중 208명은 부산 봉기 학생]은 즉결 심판에 회부되었다.
2013년 5월 ‘부마 민주 항쟁 관련자의 명예 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고, 6월 4일에 국무회의에서 공표됨에 따라 부마 민주 항쟁 진상 규명과 피해자 보상을 위한 후속 조치가 진행되게 되었다.
부마 항쟁은 국가의 물리적 대응에 의해 실패하였다. 그것은 어떠한 사회 운동도 사회의 민주화와 민중의 생존권을 장악하고 있는 지배 집단의 본질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변혁적 전망, 실천적 행위가 통일되지 않을 때 근본문제의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했다. 폭발된 민중의 힘을 지도하고 조직할 수 있는 중심세력이 형성되지 못한 것은 한계였다. 전국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마산·부산 지역에 그쳤다는 것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 항쟁으로 인해 박정희의 죽음, 그로 인한 군사 독재 정권이 막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부마 항쟁은 1970년대 민주화 반독재 투쟁의 정점이었으며, 민중이 사회 변혁의 주체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여주었으며, 1980년 5월의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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