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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Thailand) : 불교(소승불교) 본문

선교 EH국/태국 이야기

태국 (Thailand) : 불교(소승불교)

อารีเอล 아리엘 ariel 2012. 10. 6. 12:15

      태국 (Thailand) : 불교(소승불교)

       

      (태국 불교)  (소승불교)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태국에서 승려와 사원의 사회적위치)

       

      ■ 태국 불교

       

      1. 역 사

      ᄋ 6세기경 스리랑카에서 Theravada 불교가 태국에 전래

      ᄋ 13세기 수코타이 왕국시 스리랑카로부터 Theravada 불교를 재도입하여, 국교화함.

      ᄋ 15세기 아유타야 왕조시에는 크메르 힌두교적 요소가 많이 도입되어 불교와 힌두교가 혼합된 모습을 보임.(왕에 神性이 부여됨.)

      ᄋ 1782년 chakri 왕조건립이후 불교교리 및 sangha(승가)에 대한 국가통제 확립

      ᄋ Rama Ⅳ(1851-68) : 27년간 승려생활, 불교개혁, Thammayut 종단설립(현재까지 소수파이며, 다수파는 Mahanikaya로 약 90% 승려 소속)

      ᄋ Rama Ⅹ(1868-1910, 출라롱콘대왕) : 중앙집권화를 통해 1902년 Sangha 法을 제정, 국가에 복속

      ᄋ 현재 전국민의 약 90%가 테라바비다 불교신도이며, 사찰의 수는 27,000여개, 승려는 18만명 이상이라함.

      2. 태국불교의 특징

      가. Theravada 불교(Doctrine of the Elders, 장로들의 교설)

      ᄋ 남방불교(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등에서 유력)

      ᄋ 소승불교(Hinayana the "Lesser Vehicle" ↔ Mahayanan) : 개인의 해탈, 열반을 강조

      ᄋ 팔리어경전 : 부처의 열반후(B.C 544경) 제자인 아난 존자의 기억을 통해 경전으로 결집되었고, 오랫동안 구송으로 전승되다 BC 100년경 스리랑카에서 최초로 문자로 기록

      ᄋ 직관명상(insight meditation, 비파사나) 수행법 : 예리한 주의력으로 자신을 관찰하여 무상과 고․무아의 진리를 경험하고 자신을 정화하는 과정

      나. 왕실불교

      ᄋ 불교는 왕실 등 지배층의 통치를 정당화 시키는 권위를 부여하고, 국민들을 통합시키는 역할

      - Sangha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대신 권위에 복종

      ᄋ 왕은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적선의 결과로 왕이 됨. 왕국의 번영은 왕이 백성들과 함께 나눌수 있는 ꡐ善ꡑ을 얼마나 가졌나에 달려있다는 믿음이 있음.

      ᄋ 왕권강화시 정치권력에서 배제하고, 왕권과 경쟁할 수 있는 세력화되는 것 방지

      ᄋ 각자의 전생의 업보에 따라 현재 사는 처지가 정해졌다는 믿음. (권위, 위계질서 인정)

      다. merit-making

      ᄋ 일반 신도들은 불행방지, 생일날, 불교축일 등을 기리기 위해 절에 시주

      ᄋ 일반 신도들은 어려운 '열반'의 개념보다는 연기, 업(karma), 환생, 선과 악이란 단순한 개념이 중요하며 일상생활에서 복을 많이 받고 내세에서 보다 좋은 조건으로 태어나기를 바람.

      3. 관 습

      ᄋ 매일 아침 승려들은 탁발. 여성은 승려에게 물건이나 음식을 시주할 때 직접 건네서는 안됨.

      ᄋ 午後 不食 : 남방불교는 12시가 넘은 오후에는 일체 음식을 먹지 않음. 육식을 함(북방불교는 藥石이라하여 저녁을 먹고, 절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기 때문에 육식은 안하며, 마늘, 파, 양파, 부추, 달래 등 오신채를 안함)

      ᄋ 남자들은 일생에 한번 승적을 보유(과거의 전통). 중이됨으로써 큰 善을 쌓게 됨.

      - Buddhist Lent(雨安節), 3개월

      - 가정형편이 어려운 경우 7-8때 행자(apprentice)로 입문․교육을 받음.

      - 출가후 환속이 자유로움

      ᄋ Wat(절)은 특히 시골에서는 결혼, 장례, 화장 등 종교의식 뿐아니라 공회당, 교육기관, 문화센터, 공연장 등 다양한 역할을 하는 공간

      4. 개혁운동

      ᄋ 초자연적인 신비주의 등 미신적인 요소 배격

      ᄋ 내세를 위한 積善 위주의 전통불교 개념 배격

      ᄋ '열반'은 승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할 수 있고, 극락이나 지옥은 인간의 마음에 있으며, 하나의 metaphor이다.

      5. Wat Phra Dhammakaya 종파

      ᄋ 당초의 Luang Phor Sot(1884-1959)의 새로운 명상법(samadhi)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따라 제자인 Phra Chayabuun Dhammachayo 등이 대규모 교단으로 발전시킴

      - 1970. 명상 수련원으로 개설하였다가 1977 정식 사찰로 등록

      - 승려 881명, 전도사 485명 등 규모

      ᄋ Samadhi(Concentration meditation)을 통해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직접적인 경험이 가능하다는 점이 기성 불교종단에 식상을 느낀 중산층 평신도에게 큰 호응을 받음.

      ᄋ 주지 Dhammachayo의 수완

      - Dhammachayo와 부주지 Dattajivo는 Kasetsart 대학출신의 고등학력자로서 포교활동에 mass marketing 신기법 등을 활용하여 도시 중산층에 큰 성과를 얻음.

      - 'door-to-door' 방문하여 헌금 요청(merit accumulation for salvation)

      ᄋ 대학생 훈련 프로그램 계발(약 2개월 기간)

      ᄋ 승려 충원 - 대학졸업자 위주로 엄격한 훈련과정을 거침

      ᄋ 비판

      - Theravada 불교교리를 왜곡하므로 Theravada 종단에서 축출할 것 요구

      - '열반'을 heaven with a "self"로 해석

      - 善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으로 해석 - 불교의 상업화

      - 개인숭배, 신격화(부처의 부활)로 기성교단을 위협

      ᄋ Sangha Council 결론(99.3.22)

      - Dhammakaya는 불교원리와 명상 방법의 불완전한 이해로 대중을 오도하였음.

       

       

      (소승불교)

       

        6.1 불교

        6.1.1 상좌부불교의 도입과정

      기원전 3세기 인도의 마힌다 장로에 의해 세일론에 전해졌으며 태국에는 쑤코타이 왕국 초기였다. 대승불교를 불식시키기 위해 상좌부 불교를 도입하게 되었다.

        6.1.2 태국불교의 특징

      해탈지향성: 승려, 공덕지향성: 재가신도-내세 확보<주술지향: 재가신도-현세문제 해결

      전통적인 정치체제는 법, 승가, 왕 사이의 삼각관계를 기본적인 구조로 삼았다.

        6.1.3 태국 불교상식

      1)승가: 태국의 출가자는 승가로 불리는 집단에 가입하게 된다. 출가자 집단을 승가라고 부르고 있다.

      2)승가의 종파: 승가에는 2가지 종류가 있다. 마하니까이와 탐마윳니까이이다.

      3)계율 :계율이 매우 엄격하다.

      4)승려시험 :낙탐이라불리는 초등시험과 바리엔이라 부르는 중상급시험이 있다.

      5)우바쏨봇 :단기 출가하는 기간

      6)파 찌원 :승려의 황색 가사는 뜨라이 찌원으로 구성된다.

      7)매치 :여성신도를 매치라고 부른다. 상좌부불교엔 비구니가 없다.

      8)싸이 씬 :성스러운 실이라는 의미를 갖는 백색 목면의 실이다.

      9)남몬 :승려가 주문을 외우면서 만드는 특별한 물을 의미한다.

      10)프라 크르엉: 몸에 갖고 다니는 작은 불상 또는 고승의 얼굴 사진등의 일족의 부적이다.

      11)오후불식: 12시 이후엔 음료수외엔 먹지 않고 이 곳 승려들은 걸식에 의존하기 때문에 고기도 먹는다.

      12)절간 같지 않은 사원 :태국의 절은 동적이고 활기찬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6.1.4 태국사원의 구조

      크게 왕실 사원과 일반 사원으로 나뉜다. 왕실사원은 3등급으로 나뉘며 일반 사원은 약 30000개에 이른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히로사치야 지음/강기희 옮김


        요약 제출자:박 경 숙(따완)  제출일:12/02/03


      제1부 소승불교


        소승불교란 대승불교에 대응되는 불교인식이다. 대승불교는 기원 전후 무렵에 인도에서 일어난 새로운 불교로서 재가신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새롭게 일어난 이 대승불교는 기존의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격하시켜 불렀는데 그것은 기존의 불교가 출가자만의 구도를 주장했기 때문에 ‘작은’ ‘열등한’ 불교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소승불교’라는 말은 폄칭이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하다. 현재 동남아시아에서 믿고 있는 불교는 대부분이 이 ‘소승불교’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소승불교’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이유는 이 책이 ‘대승불교’입장에서 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는 기존의 불교를 ‘소승불교’라 낮추었다. 이렇게 폄칭한 까닭은 기존불교의 실천방식이나 견해에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확실하게 반대입장을 취했다. 또한 소승불교를 전적으로 부정했다. 즉 대승불교는 소승불교를 ‘소승’이라고 부르면서 전면 부정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이유를 획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나는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논리의 근거를 찾고 있다. 따라서 소승불교를 ‘소승불교’라 부를 수 밖에 없다. ‘원시불교’니 ‘전통불교’니 ‘부파불교’라 부르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입장이 변하지 않는 한 모두 동일할 것이다.


        석존 입멸의 이유

        소승불교는 석존을 기본적으로 ‘인간’으로 보고 있다. ‘인간=석존’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석존이 육체를 갖고 있고, 그리고 육체가 있다면 그 육체는 육체적인 법칙에 따라 소멸한다. 이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소승불교에서는 석존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소승불교는 석존의 입멸을 그의 시저 아난의 책임으로 돌린다. 아난이 간절하게 입멸을 막지 않았기 때문에, 허약해진 석존은 악마의 꾀임에 넘어가 입멸을 약속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대반열반경>을 검토해 왔지만 석존은 왜 입멸했는가라는 의문에 대해서 소승경전은 답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소승경전은 석존을 기본적으로 ‘인간’으로 간주했고, 인간이라면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석존은 왜 입멸했을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대승불교에서 얻을 수 있다. 대승불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답해야만 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대승불교는 ‘영원한 불타’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불타관에 대해서 차후에 검토하도록 하자.

        석존은 죽었다. 그러므로 먼저 해야 할 일은 그의 장례식이었다. 그러나 석존의 장례는 재가신자들의 일이었다. 석존 스스로 자신의 장례는 재가신자들에게 맡기라고 제자들에게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석존의 장례는 재가신자들의 손으로 치러졌다. 재가신자들은 석존의 유골-불사리-을 봉헌한 불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불탑을 참배하면서 살아 생전의 석존을 그리워하곤 했다.

        사실상 재가신자들은 석존의 죽음을 계기로 불교교단에서 이탈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단과 완전히 절연한 것은 아니였다. 석존의 재세시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지만 정신적인 의미에서 재가신자와 불교교단과의 유대는 매우 소원해졌다. 석존이라고 하는 큰 기둥이 빠져 버렸기 때문에 재가신자들이 뭔가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불교교단에는 석존을 대신할 만한 절대적인 인물이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석존이 죽은 다음 불교교단을 구성하고 있던 출가자들이 자신들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재가신자들의 지도에 대해서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재가신자가 이탈한 것은 당연하였다.


        석존의 가르침에 대한 확인과 정립

        석존이 입멸했을 때 출가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석존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확인하는 일이였다. 석존의 가르침은 상대의 근거에 따라 법을 설하는 대기설법과 상대의 병에 적합하게 약을 처방해준다는 응병여약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해석과 가르침이 달랐다. 그결과 석존은 ‘8만4천 가지의 법문’을 설하였다.

        그 당시 불교교단의 주도권은 제1장로였던 마하가섭이 잡고 있었다. 불교교단의 서열은 ‘법세’로 결정한다. 법세란 출가 이후의 연령을 말한다.

        마하가섭은 저마다 자신이 배운 도만을 주장한다면 심각한 혼란에 빠지게 될까 우려하였다. 그래서 석존의 전통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하가섭의 결집에 참석한 아라한은 5백명이였다. 그중에 참석하지 않고 반역자라고 낙인을 받은 제바달다라는 사람이 있다. 자신은 아란야에서 혼자 수행을 계속 할 것이며, 결집은 필요없다고 제바달다는 주장했다. 이렇게해서 제바달다는 주류계에게 미움을 받아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혔을 것이다.

        경전의 편집이 시작되었다. 석존의 시자로 있던 아난이 책임자로 ‘경’을 요약하기 시작했다.

        여시아문 : 나는 이와같이 들었다.

        일시 : 어느때

        불주 : 부처님은 -에 계셨다.

        아난이 하나씩 ‘경’을 암송한 다음 모두 그 ‘경’을 다같이 소리내어 외운다. 그렇게 세 번 하면 그 ‘경’은 확인된 것으로 인정된다.

        ‘경’의 편집에 이어 ‘율’을 편집할 차례가 되었다. 율이라는 것은 출가수행자의 생활을 규정하는 조합들이다. 일반적으로 ‘계율’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계’와‘율’이 다르다. 불교계는 다음과 같은 ‘5계’가 기본이다.

        첫째, 불살생계 : 모든 생물의 생명을 빼앗지 않는다.

        둘째, 불망어계 :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셋째, 불투도계 : 주지 않는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지 않는다.

        넷째, 불사음계 : 음란한 성교를 하지 않는다.

        다섯째, 불음주계 : 술을 마시지 않는다.

        재가신자들은 석존의 시신을 다비하고, 뒤에 남은 유골을 봉헌하여 불탑을 만들었다. 반면 석존이 설했던 ‘법’을 전승한 이들은 출가자였다. 따라서 그들은 결집을 단행하여 석존의 가르침을 체계화함으로써 불멸의 진리로 삼았다. 그들은 교단조직 상가(Samgha)를 형성하여 합의제로 운영하였다.


        인도의 불교

        인도의 민중은 아라한과 같은 성자를 지지했다. 인도의 민중을 매혹시킨 아라한의 불교의 특색은 무엇일까? 나는 상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상가는 음사하여 ‘승가’라고 하고, 의역하면 ‘화합중’이다. 이는 불교의 출가자교단을 지칭한다. 이 승가의 특색은 대해(큰바다)에 비유되고 있다. 특히 사회적 차별에 대한 폐지에 대해 주목할 만하다. 인도에서 사회적 차별은 카스트라고 불리고 있지만, 교단 내부에서는 전적으로 카스트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 불교의 커다란 특색이다.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성립한 것은 훨씬 후대에 이르러서이다. 석존시대에 있었던 4성제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바라문 - 지식인계급, 특히 사제자를 지칭함.

        둘째, 크샤트리아 - 무인계급

        셋째, 바이샤 - 일반서민층

        넷째, 수드라 - 육체노동계급

        이 네가지의 계급 외에 아웃 카스트라고 불리는 천민도 있었다. 석존 자신은 크샤트리아 출신어었던 것 같지만, 석존은 ‘차별제도’를 반대하여 자신을 ‘차별제도’ 가운데의 그 어디에도 귀속시켜 둔 적이 없었다.

        후대에 불교교단이 크게 발전했던것도, 급격하게 조락했던 원인 가운데 하나는 4성제도를 무시한 것이다.

        인도사람들에게 보시의 공덕은 내세에서 왕생극락을 약속받는 데 있다. 인도사람들은 윤회전생을 믿는 민족이다. 초기불교에서는 다섯 개의 윤회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지옥, 아귀, 축생, 사람, 천 혹은 육도윤회라고 하여 축생과 사람사이에 수라라고 하는 것을 추가하기도 하지만 윤회의 세계를 여섯 개로 보는 것은 대승불교에 와서이다.

        불교의 개조 석존이 설한 가르침은 기본적으로는 윤회세계로부터의 탈각이었다. 인도인들의 바람은 또다시 죽지 않는 것이다. 이 윤회의 세계 그 자체에서 소멸해 버리는 것을 인도사람들은 동경했다. 이것이 해탈이다. 석존은 해탈하지 못하도록 우리들을 이 세상에 잡아두고 있는 힘을 욕망이라고 말했다. 욕망을 끊고, 집착의 끈에서 놓여나면 윤회의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다. 이것을 열반이라고 부른다. 이를 위한 필요조건이 출가이다. 출가를 하지 않으면 해탈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면 출가를 하지 않는 재가신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들에게 생천사상이 있다. 윤회의 세계에서 천계는 비교적 괴로움이 적고, 가장 즐거운 세계이다. 이생의 삶이 끝난 다음 내세에서 천계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이것이 재가신자로서 꿈꿀수 있는 최고의 희망이다.

        그렇다면 천계에 태어나기 위해서 재가신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본적인 두가지 방법이있다. 첫 번째는 사제 바라문에게 의지하여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선행을 쌓아두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덕 중에서 가장 큰 행위가 보시이다.

        그러나 바라문들은 서민의 보시를 받지 않았다. 바라문계급 이외의 사람이 만든 음식은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제 바라문들은 본디 부유하였다. 서민들의 보잘 것 없는 보시가 그들의 안중에 들어올 리 없었다.

        카스트의 차별을 부인했던 불교수행자는 보시하는 사람의 계급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보시를 받았다. 따라서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불교수행자들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보시를 할 수 있었다. 더불어 보시의 공덕도 쌓을 수 있었다. 따라서 서민들 사이에서는 불교수행자의 인기가 단연 높았다. 그러나 카스트제도의 반대한 불도 전체가 계급이 낮은 카스트로 간주되게 된다. 그 결과 인도에서 불교가 급격하게 조락하여 마침내 불교가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불교교단의 분열

        불교승가는 마침내 분열하기에 이른다. 분열의 원인은 ‘계율’이었다. 석존의 일곱가지 훈계중 세 번째 항목이 이유다. 일곱가지 훈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교승가의 수행자들이 자주 회의를 열고, 회의에 많은 승려들이 참석한다면 승가는 번영하여 쇠망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불교승가의 승려들이 협동하여 행동하고, 힘을 모아 교단의 모든일을 처리해 나간다면 승가는 번영하여 쇠망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 불교승가의 수행자들이 후세에 이르기까지 지금 제정하지 않은 것은 정하지 않고, 이미 제정된 것은 깨뜨리지 않으면서 계율을 지키고 실천하면 승가는 번영하여 쇠망하지 않을 것이다.

        넷째, 불교승가의 수행자가 승가의 장로, 선사, 도사를 존경하고 경애하며 그의 말을 잘 듣는다면 승가는 번영하여 쇠망하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 불교승가의 수행자가 욕망이 생기더라도 이것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면...

        여섯째, 불교승가의 수행자가 마을에서 떨어진 산림에 머물기를 좋아하고 국왕이나 대신에 주변에 가지 않는다면...

        일곱째, 불교승가의 수행자 한사람 한사람이 수행에 전념하며, 그것을 보고서 훌륭한 도반이 모여들고, 또 모여든 도반이 안심하고 승가에 머물도록 한다면...

        석존 자신이 아난을 통해 소소계를 없애도록 하라고 유언과 세 번째 항목은 일치하지 않는다. 이 부분이 불교승가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여 후대 교단에 금이 생기는 원인이 된다.

        *근본분열의 실제

        베살리에서 개최된 제2결집을 계기로 승가는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하였다. 그 분열을 지금까지 불교사가들은 ‘근본분열’이라고 일컫는다. 이 근본분열문제는 복잡한 불멸연대론과 관련이 있다. 석존의 생몰연대에 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차이가 심한데, 크게는 세가지 설로 정리된다.

        a. B.C. 624년경 - B.C. 544년경   b. B.C. 566년경 - B.C. 486년경  c. B.C. 463년경 - B.C. 383년경

        불멸 후 1백 년이라고 하는 시점은 이상과 같은 상황이었다. 즉 교단의 화합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금은 차츰 뚜렷해져 갔다.

        그리하여 아쇼카 왕이 출현할 무렵 - 불멸 후 2백 년경- 마침내 단순한 균열 정도를 넘어서 불교교단이 완전히 분열되어 버린 것이다.

        *분열된 승가

        아쇼카 왕 시대에 불교승가에는 사상적 대립이 생김으로써 교단은 분열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쇼카 왕의 치세가 끝나갈 무렵 마침내 교단은 분열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분열은 이른바 ‘근본분열’이 아니다.

        불교사가들은 불멸 후 백 년경에 발생했던 ‘십사’의 논쟁은 ‘상좌부와 대중부’의 근본분열이라고 불러 왔다. 그러나 이것을 분열이라고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율의 세부적인 사항에 대한 의견 대립이었고, 그것으로 불화는 생겼겠지만 분열로 발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불교교단의 분열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불멸 후 백 년경(B.C. 386년경) 베살리 지방에서 ‘십사’의 논쟁이 벌어졌다. 이것을 계기로 교단의 내부에 보수적인 그룹과 진보적인 그룹이 형성되었다. 이 보수적인 그룹이 후의 상좌부이고, 진보적인 그룹이 후의 대중부인데 당시는 뚜렷하게 결사라는 형태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일종의 파벌에 지나지 않았다.

        불멸 후 백 년경부터 아쇼카 왕이 출현할 때까지는 백 년 이상의 기간이 존재한다. 이 백 년 동안에 보수파와 진보파의 불화상태가 점점 심화되엇다. 즉 승가의 분열에 대한 위기가 고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불멸 후 218년경(기원전 268년)에 출현한 하쇼카 왕은 그 조칙에서 엄격하게 승가의 분열을 경고하고 있다. 분열을 경고하고 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분열할 위험이 있엇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쇼카 왕의 치세가 끝나갈 무렵에 이르러 승가는 완전히 분열되고 말았다.


        아비달마불교의 성립

        분열한 각 부파는 그들의 지엽적인 교리해석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부파분열의 가장 큰 원인은 그들이 이상으로 하는 ‘아라한’에 관한 견해의 차이에서였기 때문에 각각의 부파가 독자적인 ‘아라한’상을 모색하려는 것은 필연적인 움직임이다.

        이 부파불교인들에 의한 불교연구를 아비달마라고 부른다. 달마라고 하는 말은 ‘교법’의 뜻이고, 아비는 ‘대한’이라고 하는 의미다. 따라서 아비달마는 ‘교법에 대한 연구, 주석의 뜻이며, 대법’이라고 번연한다.

        석존의 교단이 분열한 결과 교단은 형태로 보면 ‘부파불교’, 내용적으로는 ‘아비달마불교’가 되었다. 물론 묵묵히 수행에 전념하는 수행자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은 각부파로부터 무시를 당했다. 학문연구에 두각을 나타내는 승려가 부파에서는 인재로 떠올랐다. 이것이 부파불교인 아비달마불교의 특색이었다.

        사실 교단분열의 경제적인 배경이 있었다. 이 경제적 배경을 형성한 이가 아쇼카왕이다. 아쇼카왕은 그의 조칙 속에서 승가의 분열을 경고하면서 분열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승가에 토지를 희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승가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분열이 촉진되었다.

        그러나 아쇼카 왕의 불교지원은 소승불교 교단을 분열시켜 아비달마불교로 변질시켰던 것만은 아니다. 반대로 결과적으로 소승불교를 초월한 새로운 불교인 대승불교가 흥기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수 있었다.

        소승불교의 출가자들은 아라한을 목표로 출가하였다. 소승불교는 이러한 졸업이 있는 불교였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아라한도 매우 흔해졌다. 그러나 이 목표에 도달한 사람들은 오만하고 방자한 마음을 품게 된다. 도달 가능한 목표는 소용 없는 것이다. 영원히 도달 할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해야한다. 이렇게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목표 - 이것이 ‘불타’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승불교는 아라한불교였으며, 그 아라한불교는 ‘불타 없는 불교’였다.


        아라한은 불교의 출발점    

        아라한은 불교의 출발점이었다. 불교의 개조인 석존은 35세의 나이에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불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석존이 도달한 것은 ‘아라한’이었다. 그 당시 석존은 대중들에게 포교, 전도를 전적으로 의식하지 않았다. 깨달음을 얻은 이상 빨리 열반에 들고자 했다. 아라한에게는 이타의 의자가 없다. 석존은 아라한이 된 다음에 이타의 마음을 일으켜 사람들에게 전도와 포교를 계속해나갔고, 그리하여 석존은 비로소 ‘불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석존의 불교는 ‘불타’를 목표로 하는 불교였다. 석존의 불교는 결코 아라한불교가 아니었다. 석존의 불교에 있어 아라한은 출발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결코 아라한이 도달점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불타 없는 불교’인 소승불교는 어떻게 해야 불타를 만들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어떤 방법으로도 소승불교에서 불타를 탄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불타 출현의 기반을 마련했던 것은 아쇼카 왕이었다. 아쇼카 왕은 불교승가에 토지를 기진했다. 뿐만 아니라 인도의 각 지방에 많은 불탑을 세워, 그 불탑에 장원을 기진했다. 그곳에는 석존의 모습이 있었다. 민중들은 불탑을 찾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가까운 불탑에 갈 수 있는 민중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불탑을 참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의 민중은 출가수행자에게 공양하는 것으로써만 ‘불교’에 참가 할 수 있었다. 아쇼카 왕이 불교에 민중이 참가할 수 있는 새로운 통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불탑을 참배하는 민중은 그곳에 모신 석존에게 기도했다.

        이렇게 불탑숭배가 하나의 중심이 되어 새로운 불교를 탄생시켰다. 그 새로운 불교는 ‘불타의 불교’이다. 불타없는 아라한불교와는 달리 이 불타의 불교는 다수의 민중을 위한 불교였다. 이 불교를 ‘대승불교’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수레(가르침)라는 의미이다.


      제2부 대승불교


        불상이 없던 시대, 불상을 만들게 된 내력에 대한 전설은 이러하다. 석존이 승천해 계신 3개월동안 지상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석존이 계시지 않음을 슬퍼하였다. 이때 코삼비국의 우전와과 코살라국의 파사익왕이 상심한 나머지 병석에 누웠고, 이를 위로하기 위하여 신하들은 왕에게 불상을 만들 것을 아뢰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서 석존이 자상에 내려오자 우전왕은 석존을 찾아 불상을 만들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석존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불상을 만든 일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 불상을 만든 사람은 사후에 지옥이나 축생, 아귀로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고, 내세에는 반드시 천상계에 태어날 것이며, 그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불탑을 기반으로 한 대승불교

        소승불교는 아쇼카 왕 시대 이후 많은 부파로 분열했지만 각국의 노력으로 아직도 인도에 존속하고 있다. 대승불교는 소승불교 대신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대승불교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심이 된 것은 불탑이었다. 이 불탑은 처음부터 재가신자들이 유지, 관리했다. 석존이 입멸했을 때도 장례식은 재가신자들을 중심으로 치러졌다. 그것은 석존 자신이 자신의 장례식을 재가신자들에게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셨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8개의 불탑이 만들어졌다. 석존의 입멸이후 2백 년경에는 인도의 전역을 아쇼카 왕이 평정하였다. 아쇼카왕은 스스로 평화의 가르침인 불교에 귀의하고 불교를 전 인도에 펴고자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8만4천 개의 불탑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즉 아쇼카 왕은 8개의 불탑이 있는 사리를 다시 나누어 새로운 불탑을  인도 각 지역에 세웠던 것이다. 물론 이 불탑의 관리자는 재가신자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소승불교의 출가수행자들은 이 불탑의 운영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것이다.

        불탑에는 아쇼카왕이 기진한 토지가 있었다. 아쇼카 왕뿐만이 아니라 후대에는 많은 부호들이 토지나 재물을 기진했다. 대체로 이런 점에서 불탑은 비교적 경제적으로 윤택했을 것이고, 이런 윤택한 불탑을 증심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사람들도 증가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참배객들에게 석존에 대해 설명해주며, 석존의 생존시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불탑을 참배하려 오는 사람들은 그들의 ‘법문’을 듣고 석존에 대해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석존은 전설화되기 시작했다.

        불탑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불탑에 부처님의 생애에 대한 유명한 장면들을 조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참배인들에게 석가모니의 사적에 대해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불탑에 부조되어 있는 석가모닝 생애에 대한 중요한 장면 그 어디에도 석가모니의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기 이전 즉 ‘부처가 아닌 석가모니’는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불타로서의 석가모니는 묘사하지 않고 있다. 불타로서의 석가모니가 표현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지금까지 석존은 소승불교적인 성자였다. 불탑을 관리하는 사람들과 인도의 대중들은 그 소승불교적인 성자를 차츰 전설화하여 초인적인 석가모니를 탄생시킴으로써 대승불교가 성립하였고, 불상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보살사상의 대두

        간다라 지역은 예로부터 이민족의 침입과 정복이 잦았던 곳이다. 기원적 5세기경부터 기원전 4세기에는 고대 페르시아제국에 예속되었고, 기원전 4세기에는 앞에서도 서술했던 것처럼 알렉산더 대왕의 군사를 맞이해야만 햇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아우리아왕조가 시작되었다.

        아쇼카 왕 때 간다라지역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아쇼카 왕은 여기에 다수의 불탑을 세움과 동시에 5명으로 한 팀을 조직해 포교사 단체를  파견하기도 했다. 간다라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석존과는 무관한 곳이다. 그러나 간다라는 아쇼카 왕에 의해 불교가 전파된 지역이다. 여기에 많은 불탑과 정사가 세워지면서 서민들이 불탑을 참배하러 왔던 것이다. 간다라니역을 ‘석가모니와 인연이 있는 성지’로 만들고 싶었던 사람들은 석가모니의 전생담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석가모니의 전생담은 불전의 한 장르로서 ‘자타카’라고 한다. 이것을 번역하면 ‘전생담’이라고 한다. 이러한 자타카가 성립됨을써 석존은 초인적이고 신화적인 존재가 됨과 동시에 훨씬 친근한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불교사상적인 측면에서 손꼽을 만한 자타카의 역할이다. 이렇듯 석존은 ‘불타’가 됨으로써 소승불교의 아라한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가 되었다. 아라한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차원의 존재였지만 불타는 이제 초인적인 차원의 존재가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타카로 말미암아 ‘보살’이라고 하는 개념이 생겼다는 점이다. 

        ‘보살’이란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의 역어이다.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본래 성도 하기전의 석존에 대한 칭호였다. 그러나 자타카가 성립함으로써 석존은 일반 제자들과는 다른 존재로 부각되었다. 그러므로 석존의 성도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즉 석존의 경우는 성도함으로써 ‘인간’에서 한 차원 높은 ‘불타’로 승격한 것이다. 이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존재다. 이렇게 되면 ‘불타인 석존’과 ‘불타가 되기 전의 석존’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된다.

        불타가 되기 이전의 석존에 대한 호칭이 필요하다. 바로 여기서 ‘보살’이라고 하는 용어가 만들어진 것이다.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내지는 ‘구도자’라는 뜻이다. 석존은 끊임없는 수행의 길을 걸으면서 석존의 성도 이전 모습에 대한 호칭을 ‘보살’이라고 한 것이다.

        보살의 탄생은 불교 역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보살의 이미지를 매개로 하여 일반 재가신자들도 ‘석가모니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라한밖에 없었다면 재가신자들은 불도수행을 할 수 없다. 아라한이 되려면 집을 버리고,

        세속을 버린 출가자여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보살은 다르다. 보살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보살에게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다. 그것이 바로 보살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도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보살이다. 이러한 논리를 근거로 재가신자들 자신도 보살이라는 자각을 하게되었다. 석가모니도 때로는 재가신자로서 수행을 했듯이 자신들도 재가신자로서 계속 수행을 한다면 언젠가는 불타가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이때 보살이란 아라한을 초월한 존재이다. 아라한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이야기이지 인간을 초월한 불타와 비교한다면 차원이 매우 다른 존재이다. 석가모니가 길고 긴 생사윤회 속에서 보살로서 수행했던 것처럼 자신들 역시 보살로서 끊임없이 수행할 것을 결심함으로써 재가신자들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결국 대승불교가 흥기하는 발판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석가모니불의 출현

        석존의 존재가 공하다면 석존이 입멸했을 때 당황해할 필요가 없다. 육체를 가진 석존은 시간의 법칙에 따라 소멸한다 해도 ‘공’한 석존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로서 절대 소멸하지 않는다. 석존이 우주에 가득찼다고 생각한다.

        석존과 마음으로 나누는 법담은 반드시 석존의 재세시에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석존이 입멸한 다음에도 마찬가지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석존이 입멸한 다음에도 석존과 법담을 계속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산속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이었다. 산림수행자란 산속에 은거하여 명상을 하면서 생활하는 수행자를 말한다. 석존의 입멸 직후 소승불교 교단은 엄격한 계율지상주의의 입장을 표방했기 때문에 수행자들 가운데서 교단을 더나 산속으로 은거한 사람들도 있었다. 또 교단이 분열을 거듭할 무렵 꾜단을 떠나 산림수행자가 된 사람들이 늘게 된 것이다.

        교단의 분열은 일종의 권력 다툼이었고, 이러한 권력 다툼에 실망한 출가 수행자들은 환속을 하거나 산속으로 은거했다.

        그러나 공을 주장하는 산림수행자들은 소승불교도들이 번뇌를 실체시하는 그 자체를 괴로움이라고 생각했다. 석존의 가르침의 진수는 공이다. 그러므로 번뇌도 공이다. 번뇌를 실체시하여 번뇌에 집착하는 소승불교자들을 바보로 취급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석존 정신의 진실한 계승자라고 확신했다.

        불교용어에는 ‘여래’라는 말이 있다. ‘여’라는 것은 ‘진리’ ‘진여’를 의미한다. 따라서 ‘여래’라는 것은 ‘진리의 세계에서 이세상에 출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래’는 ‘불’과 동의어로 사용하기 때문에 ‘석가모니불’을 ‘석가모니여래’라고 칭할 수도 있다. 

        기원전 2세기-기원전1세기경 산림수행자들 사이에서 ‘석가모니불’이 출현하였다. 이 시기에 산림수행자들은 석가모니에게 계속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기도에 감응하여 마침내 석가모니불이 출현한 것이다.

        이와같은 대사건은 석존의 입멸 후 3백 년인가 4백 년이 지난 다음에야 일어났다. 그만큼의 시간을 두고서 산림수행자들에게 석가모니불이 현시하여 법을 설했던 것이다. 산림수행자사이에 현현한 석가모니불은 그들에게 새로운 불교, 아니 참된 의미에서의 불교를 설했다. 석가모니불에 의한 설법의 시작이 ‘대승불교’가 성립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소승불교를 타파한 대승불교가 마침내 인도지방에서 싹을 틔운 것이다.

       

        대승불교의 온상

        푸샤미트라 왕은 바라문교를 신봉했던 듯하다. 즉 바라문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탅압한 것이 푸샤미트라 왕 이후 슝가왕조의 기본 방침이었던 것 같다. 다음의 탄바 왕조는 슝가왕조처럼 바라문교를 숭배했지만 불교를 탄압하지는 않았다.

        불교는 이 두 왕조가 지배하던 시대에도 착실하게 발전을 거듭했다. 마우리아 왕조의 비호아래 탄탄한 기반을 갖추어 놓음으로써 어느 정도 탄압이 가해진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부호들의 재정적 후원으로 불탑신앙과 소승불교 교단은 융성을 누리고 있었다.

        *대승불교를 준비한 사상들

        과거불과 미래불- 석존은 영원한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었지만, 진리가 영원하다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석존만이 아니라 석존 이전에도 그러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노리에 입각하여 ‘과거불’사상이 출현하였고, 석존 이전에 6명의 불타가 이 세상에 출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미래불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미래불은 단 한 명의 부처에게만 이름이 지어져 있다. 석가모니불 다음에 출현할 그 미래불은 ‘미륵불’이라고 한다. 이러한 과거불과 미래불의 사상이 대승불교를 태동시키는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석존이 아닌 다른 불타가 있다고 하는 사상이 없었더라면 대승불교는 성립되지 않았거나 적어도 매우 늦어졌을 것이다.

        시방제불- 시간의 축 위에서 수많은 불타가 출현한다면 공간적으로도 수많은 불타가 존재한다. 불타의 본질은 진리이다. 그리고 진리는 보편적이다. 그러한 보편성에 따라 현재의 진리는 과거에도 진리였고, 미래에도 진리이다. 공간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먼 우주의 저편에 불타가 있다는 것은 우주 이편에도 있다는 것이다.

        공한불타- 육체적인 석존에게 집착해서는 안되며, 석존의 존재는 공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공한석존’이라는 개념이야말로 대승불교를 태동시킨 원동력이다. 석존은 공한 존재가 됨으로써 역사적인 한계성을 뛰어넘어 진리로서의 보편성을 갖게 된 것이다.

        보살사상- 깨달음을 얻은 것을 ‘성도’라고 하는데 성도 이후의 석존은 불타이다. 그래서 성도 이전의 석존을 보살이라고 한 것이다.


        불상의 탄생

        *쿠샤나왕조의 출현

        이 쿠샤나왕조의 출현은 불교역사, 특히 대승불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쿠샤나족은 아란계 민족이였으므로 그 생활양식은 중앙 아시아 계통에 속했고, 그들이 정복한 서북인도에 그리스인이 침입하여 뿌리를 내린 그리스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쿠샤나왕조를 대표하는 왕은 카니시카 왕이다. 카니시카 왕은 불교에 귀의하여 불교를 보호하고 불교교단에 재정적으로 많은 후원을 했다. 불교의 귀의한 이유도 그가 인도인이 아니었기 때문임을 알수 있다. 당시 인도사회의 계급제도인 카스트제도에서 외국인을 비천한 사람으로 차별하였다. 바라문교는 이런 계급제도를 지지했지만, 불교는 반대하였다.

        카시니카 왕은 수많은 불탑을 건립하였다. 그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즉위한 다음 얼마 되지 않아 수도 푸샤푸라 동남족의 외곽시대에 건립한 카니시카대탑이다.

        불상은 쿠샤나왕조 시대에 이르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왜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견불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불탑을 유지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모습을 갖춘 석가모니불이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그들은 불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석가모니불을 뵙기 위해 사람들은 불상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불상의 출현은 불교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입멸함으로써 모습을 감추셨던 석존께서 다시 사람들 앞에 석가모니로서 모습을 나투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념으로 기도한다면 마침내 석가모니의 음성이 들리고 모습을 볼 수 있을거라고 믿는다. 사람들 자신이 석가모니를 친견할 수 있는 불교가 대승불교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 불상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다.


        대승경전의 결집

        전설에 따르면 카니시카 왕 시대에 네 번째의 결집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결집이란 말하자면 경전편찬회의이다.

        제1결집은 이미 석존이 입멸하던 그해에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 외곽에 있는 칠엽굴에서 행해졌다. 석존이 가르치신 것을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 제1결집의 목적이었고, 이렇게 확인된 가르침을 집대성한 것이 곧 ‘경전’이다. 이때 만들어진 경전은 후대에 만들어진 대승경전과 구별하기 위해 소승경전이라고 하자.

        소승경전은 석존이 입멸한 그해에 편집되었지만 문자로 씌어지지는 않았다. 당시 인도에는 문자가 있었지만 구전으로 전하려 했던 것이다.

        제2결집은 불멸후 1백 년경에 베살리지방에서 개최되었다. 제3결집은 불멸 후 2백 년경인 아쇼카 왕 시대에 파탈리푸트라에서 개최되었다고 한다. 제4결집은 카니시카 왕 시대에 캐시미르에서 개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목해야할 것은 유부에서 지송하면서 전한 성전은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석존은 마가다어로 설법하였다. 이 마가다어는 대중의 언어였다.

        석존시대의 불교언어는 마가다어였다. 제1결집에서 석존의 가르침을 집대성했을때도 사용된 언어는 마가다어였다. 그러나 문제는 부파의 분열이었다. 분열의 결과 보수적인 상좌부계 11부와 진보적인 대중부계 9부를 모두 합해 20부파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약간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스무 가지의 경전이 나왔다는 말이다. 즉 교단이 자기 부파만의 교의를 내걸고 각각 독립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립한 교단들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교의를 담은 새로운 경전을 만들어야만 했다.

        인도에서는 경전을 문자로 기록하는 관습이 없었다. 경전을 문자화하기 시작한 것은 불교가 처음이었다. 불교성전이 문자화된 까닭은 언어가 다른 지방에서 석존의 가르침을 전파할 때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경우 경전을 문자화하는 주요 담당자는 재가신자였다. 출가자는 종교 전문가였기 때문에 경전 암기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가신자들은 각자의 직업이 있었기 때문에 경전을 암기하는 일로 하루를 소일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경전을 서사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소승불교도들은 언어의 차이 때문에 경전서사가 필요했다. 즉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암기하는 일은 어려웠기 때문에 처음 불교가 전래된 지역 사람들은 경전을 빠르고 정확하게 배우기 위해 서사할 것을 생각했다. 

        팔리어성전은 소승불교의 한 부파인 분별상좌부가 지송하여 전한 성전이다. 이 팔리어성전은 경. 율. 론의 삼장이 완전하게 보존된 유일한 경전이다. 이처럼 경전이 팔리어로 문자화된 것은 기원전 1세기경이다. 이것은 불멸 후 4백 년이 지난 다음의 일이다.

        대승경전 가운데 최초로 저술된 경전은 <반야경>이다. 이것은 산림수행자가 중심이 되어 저술한 것이다. 그들은 명상체험 속에서 불타를 친견하였다. 반야경은 남인도에서 저술되어 서북인도로 확장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반야경>의 뒤를 이어 많은 대승경전이 출현하게 되었다. 갠지스강 북쪽에 있는 상업도시인 베살리 사람들로서 그들이 만든 경전이 바로 <유마경>이다. 따라서 <유마경>은 <반야경>다음으로 오래된 대승경전이다. <유마경>을 만든 사람들이 베살리 재가신자들이라고 보는 것은 경전 그 자체가 베살리를 주요 무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불교의 발상지 영취산

        영취산은 대승불교도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산이다. 대승불교에서 중시하고 있는 대표적인 경전들이 이 영취산에서 설해졌다. 영취산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선과 관련해서이다. 선이라기보다는 선종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겠다. 선이라는 것은 불교의 수행법이고, 그 선을 근본으로 한 종파가 선종이다. 이 선불교의 발상지가 영취산이다.

        <법화경>은 석존에게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아버지로서의 측면과 양의로서의 측면이다. 아버지로서의 석존은 항상 우리들 가까이에 있다. 그러나 의사로의 석존은 잠시 모습을 감추었다. 입멸한 듯한 방편을 사용하여 환자들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였다.

        <반야경>은 ‘공한 불타’를 밝힌 경전이지만 <법화경>은 ‘불타’를 설한 경전이다. 이런 점에서 두 경전은 매우 다르다.

        대승경전들은 대승불교의 교의와 입장을 천명하기 위해 자주 소승불교를 비판, 공격하였다. 소승불교는 석존의 근본정신을 왜곡한 낮은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주장이며, 소승불교도들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태도에 대해 대승불교인들은 격렬하게 비난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화경>은 소승불교에 대해 그렇게 가혹하지는 않다. 오히려 소승불교의 존재이유를 긍정하고 있는 점에서 <법화경>은 매우 관대한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경>이라는 경전은 불타가 깨달은 내용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이 경의 정확한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이다. 이때 ‘대방광불’이라는 것은 ‘광대한 부처’라는 의미로서 우주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불타, 혹은 우주에 편재하고 있는 불타를 말한다. ‘화엄’이라는 것은 ‘여러가지 아름다운 꽃으로 보기 좋게 꾸미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전은 석존이 35세 때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어 불타가 되엇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들에게 장대한 깨달음의 세계를 현시해 주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석존은 비로사나불과 일체가 된다. 비로사나불은 우주부이다. 즉 석존은 우주불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이러한 석존이 깨달은 내용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화엄경>이다.

        석존의 기본적인 설법태도는 대기설법이였는데, 이것은 확고불변한 진리의 파악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영원한 절대적 진리’를 주력으로 하고 있는 석존이기에 ‘대기설법’으로 중생을 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영원한 진리’를 표명한 경전이 <화염경>이다.

        다시 말하면 <법화경>은 영원한 불타를, <화엄경>은 영원한 진리를 설하는 대표적인 대승불교의 경전이라 할 수 있다.


        정토에 대한 동경

        천상계, 인간계, 축생계, 아귀계, 지옥계라는 이 5계를 수레바퀴가 구르듯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을 윤회라 한다. 인도사람들은 이 윤회를 두려운 것으로 여겼다.

        반면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 동북아 사람들은 인도로부터 불교를 배웠지만 그 배후에 깔린 ‘윤회’에 대한 두려움은 배우지 않았다. 이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윤회라고 하는 것을 축복 비슷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불교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인 결과이다.

        불교의 출발점은 바로 이 윤회에 대한 극복에 있다. 윤회의 극복이라는 것은 곧 해탈이다. 천, 인, 축생, 아귀, 지옥이라고 하는 윤회세계에서 벗어나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한마디로 불교라는 것은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승불교는 출가를 해탈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재가신자들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소승불교는 이렇게 답한다. 윤회세계에서 궁극적으로 해탈할 수 없다면 윤회세계에서 최상의 세계를 희망하는 수밖에 없다. 즉 내세에는 윤회세계 가운데 가장 좋은 곳 천상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도 유한한 세계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해결이 될 수는 없다.

        대승불교가 성립하면서 재가신자들은 ‘도솔천정토’라는 방향성을 띠게 되엇다. 도솔천은 미륵보살이 살아계신 곳이며 석가모니불의 고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솔천계에 다시 태어날 것을 발원했던 것이다.

        도솔천은 불국토이다. 불국토란 불타가 사는 세계를 말한다. 그곳은 번뇌를 떠난 청정한 세계이므로 정토라고 부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도솔천을 ‘불국토’ ‘정토’라고 믿기 시작했다. 정토에는 대표적인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아촉불정토이다. 이곳은 동방에 있다. 또하나는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방의 극락세계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두 정토세계에 왕생할 것을 발원함과 동시에 그 정토에 계시는 불타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염불’이라고 한다.

        후대에 정토신앙으로 정착된 것은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였다. 아미타불은 ‘무량수불’ 또는 ‘무량광불’이다. 그리고 아미타불과 그 정토인 극락세계를 설한 대표적인 경전으로는 <대무량수경>이라고도 하는 <무량수경> 2권과 <관무량수경> 1권 및 <아미타경> 1권 등 세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정토삼부경’이라고 한다.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정토는 당시 불교도들이 상상하던 이상향이었다. 이생에서 출가를 하지 못한 재가신자들은 내생의 정토라고 하는 이상적인 교단의 비구가 되어 아미타불의 설법을 들으면서 수행에 전념하려 했던 것이다. 정토신앙은 이렇게 대승불교의 큰 조류로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공의 철학자 용수

        남인도의 안드라왕조를 무대로 한 전설이 있다. 바라문의 아들로서 천성이 총명하여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모든 학문을 익힌 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나가르주나(용수보살). 그는 소승불교로 출가하여 수계를 받앗다. 그러나 그는 소승불교의 부파교리에 만족하지 않고, 대승경전을 구하기 위해서 인도의 여러 지역을 편력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설산의 불탑에서 수행하는 비구로부터 대승경전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또 남해 용궁에 가서 수많은 대승경전을 얻어 왔다고도 한다.

        용수는 공 철학의 완성자이다. 그는 ‘공의 철학’으로서 대승불교 사상의 기초를 다졌다. 즉 용수는 연기-무자성-공이라는 논리로 공사상을 전개하였다. 모든 사물은 그 존재로서의 본질이 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을 ‘공’이라 한 것이다. 따라서 ‘공’이라는 것은 ‘고정적’ ‘실체적’ 존재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기’와 동일한 의미이다.

        용수는 왜 진제와 속제라는 두 진리를 구별하여 주장했을까? 진리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범부세계의 진리로서 속제라고 부르는 하나는 ‘분별지’로부터 파악된 진리이며 분별지혜에 입각한 인간언어로써 표현된다. 또 이것은 유와 무의 대립을 전제로 하는 차별의 지혜로서 소승불교가 가르치는 지혜이다.

        그러나 참된 지혜는 그것과 다르다. 이것은 승의제라 불리는 부처세계의 진리이자 유와 무의 대립이나 차별, 분별을 초월한 절대적인 진리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승불교에서 추구하는 진리이다. 이러한 진리인 승의제야말로 바로 ‘공’의 철학이다. 용수는 ‘공’의 심오한 도리는 반야지혜로써만 파악될 수 있다고 했다.

        대승불교에는 ‘6바라밀’이라고 하는 여섯가지 실천항목이 있다. 이것을 실천하면 자연스럽게 ‘반야의 지혜’를 얻게 된다. 이 지혜를 얻는 것이야말로 대승불교도들의 궁극적인 바람이기도 하다.


              1. 보시바라밀           2. 지계바라밀           3. 인욕바라밀

              4. 정진바라밀           5. 선정바라밀           6. 지혜바라밀

        첫 번째, 대승불교의 6바라밀에서 보시는 보시를 하는 것이 곧 받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계바라밀이다. ‘지계’라는 것은 말 그대로 ‘계를 지킨다.’는 것이다. 소승불교의 계율관은 한마디로 ‘계율지상주의’이다. 계율의 항목에 집착하여 그것을 하나하나 굳게 지키는 것이 소승불교의 입장이었다.

        대승불교의 견해는 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곧 공사상에 입각한 지계이며, 바로 대승불교의 계율정신이다.

        셋째는 인욕이다. 이것은 타인으로부터 받은 박해나 멸시를 묵묵히 참는 것을 말한다.

        넷째는 정진이다. 정진이란 노력을 말한다. 그러나 정진은 단지 노력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노력을 쉬는 것이 정진이기도 하다. 6바라밀의 정진은 중도를 바탕으로 한 노력이다.

        다섯째는 선정바라밀이다. 이때 선정은 곧 좌선을 의미한다. 정신통일과 집중이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정신해방’이라는 측면이 있다. 자신의 마음이 어딘가에 집착하여 괴로워하는 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도 선정이다.

        불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지혜의 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승불교에서는 ‘출세간적인 지혜’를 추구했다. 그래서 불교인은 출가를 해야만 했다. 출가자는 선민의식을 가지고서 그들 자신만을 위한 지혜를 추구했다. 즉 소승불교는 엘리트주의 불교였던 것이다.

        반면 대승불교는 ‘생활속의 지혜’ ‘사회속의 지혜’를 추구했다. 대승불교는 기본적으로 재가불교이다. 대승불교의 주역은 재가신자들이었다.

        Ei라서 대승불교ㅗ에서 추구하는 지혜는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한 ‘이타정신’이다. 대승불교 입장에서 보면 자신 한 사람을 위해 지혜를 구하는 소승불교적인 태도는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이었다. 대승불교도는 오직 ‘이타의 지혜’를 추구했다.

        6바라밀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이타의 지혜’이다. 이것을 대승불교도들은 ‘반야’라고 불렀다. ‘반야’는 보다 차원 높은 지혜이며 자비의 지혜이다. 그리고 이것은 집착을 떠난 지혜이다.

        따라서 불교는 ‘지혜의 종교’ ‘반야의 종교’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진실한 불교는 바로 대승불교에서 성립했다고 할 수 있겠다. 

       

       태국에서의 승려와 사원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


       

      태국 사회에서 승려는 절대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 국왕을 비롯한 왕실에 있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절하는 사람은 승려밖에 없다. 승려는 국왕 앞에서도 절하지 않는다.

      승려가 엎드려 절해야 하는 대상은 부처님뿐이다. 이러한 승려와 승려가 거처하는 사원은 태국 사회에서 일반 대중에게 다음과 같은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1. 교육기관

        종교에서 경전은 대개 번역하지를 않는다. 일반 다른 언어로 번역하게 되면 가르침의 참뜻이 얼마간은 변하거나 소실되기 때문이다. 한자로 번역된 경전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태국의 불교는 아직까지 팔리(Pali)를 쓰고 있다. 태국어에는 우리말의 한자어 수만큼이나 팔리어와 싼스크릿트어가 섞여 있다. 따라서 글을 잘 아는 사람은 승려였다. 태국에서 승려는 훈장이고 승려가 있는 절은 서당과 같은 곳이었다. 태국어에서 학교라는 의미를 지닌 "롱리얀"이란 말은 근대에 들어와 서구식 학교가 설립되면서 생겨난 신조어이다. 옛날에는 학교라는 단어가 아예 없었다. 절이 곧 학교이고 승려가 선생님이었다. 우리가 이름을 대개는 한자어로 짓듯이 태국사람들도 이름을 대개는 팔리어나 싼스크릿트어로 짓는다. 따라서 글을 모르는 주민들이 작명을 청해오면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승려의 일이기도 했다. 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절에서 공부를 할 수 있다. 주로 승려들이 일반 학문을 하지 않고 정해 놓은 과정에 따라 불교를 공부하는 경우가 있는데 시험에 합격할 경우에 나름대로 속세에서 배우는 일반 학문의 학위에 버금가는 증서를 받고 그 학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


      2. 의료기관

         태국에서 사원은 곧 병원이기도 했다. 오늘날처럼 병원이 많지 않던 시절에 글자를 아는 승려들이 주로 민간요법에 관한 서적을 읽고 의학 지식을 습득한 후에 이를 바탕으로 주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위생과 보건을 돌보기도 했다. 따라서 누가 아프면 먼저 절에 와서 승려를 찾았고 승려에게서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 오늘날까지도 태국의 승려들은 민간요법에 의한 의학지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3. 사회복지기관

         불타의 가르침에 따라 자비를 베푸는 승려와 사원은 그 자체가 사회복지기관이기도 했다.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절에 기거하면서 승려의 심부름을 하거나 절의 잔일을 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태국어로 "데카와트" 또는 "아람버이"라 부르는데 오늘날에도 태국 전역의 사원에 적지않은 아이들이 기거하고 있다. 또 사원은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고 잠자리를 청하는 사람들에게는 잠자리를 제공해 준다. 오늘날까지도 태국을 여행하면서 절에서 밥 한 그릇 얻어먹고 하룻밤 자고 가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밖에도 태국 사회에서 승려와 사원은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교 국가인 까닭에 불교명절을 중심으로 한 태국의 축제나 큰 행사는 대개가 절에서 열려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고 화합과 단결을 이루는 장소이기도 하다. 또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는 곳이기도 하다. 가정문제나 주민들간의 불화가 있을 때에도 주민들이 찾아와 의논하고 이를 중재하여 처리해 주는 곳도 승려가 있는 사원이다.

          이처럼 사원은 태국인들에게 공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이다. 사원은 태국인들에게 없어서는 않될 정신적 구심점이며 마음의 안식처이다. 무슨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바로 사원이다. 또 태국인들은 죽으면 승려를 모셔와 염불을 하고 장례를 치른 뒤에는 절에서 화장을 한다. 그러한 까닭에 사원은 태국인의 생의 종착지이며 승려는 삶의 최후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승려수업

          승려수업이란 일정기간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승려로 불법을 익히고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으로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태국의 불교적 전통이다. 태국의 건장한 남자라면 결혼하기 전에는 누구나 한 번 승려수업을 해야만 하는데 이를 "부엇껀비얏"이라고 한다. 또 승려수업을 하지 않은 사람을 "콘팁"이라 해서 '익지 않은 사람' 즉, 아직 선악이나 사리를 판단할 줄 모르는 미숙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성인 남자라 해서 누구나가 승려수업을 받는 것은 아니며 한쎈씨병, 나병, 간질병, 부채가 있는지, 자유인인지 등등 8가지를 심사해서 통과를 해야만 한다. 또한 태국의 승려들은 227가지의 계율을 지키며 생활하는데 이것을 "파라지카"라 하며 그 중 '살생의 죄', '여자를 범하는 죄', '훔치는 죄', '거짓말의 죄' 등 이 4가지("파티목카"라 칭함)를 범하면 교단에서 추방을 당하고 승적을 박탈 당한다.

          태국에는 비구니들이 없는 것이 특징인데 옛날에는 332가지의 계율을 지켰다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너무 어려워 자동으로 없어졌다고 한다. 일단 승려가 되면 아침에 눈을 뜨면서 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모든 생활이 계율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 아침 6시 전에 일어나게 되면 모두가 침소에서 나와 목욕을 하고 정해진 장소에 모이게 된다. 승려들이 모두 모이게 되면 마을에 탁발을 나가게 되는데 마을 전체를 구역별로 분류하여 거기에 따른 조를 편성하여 나누어 가게 된다. 따라서 어느 한 집도 승려가 다녀가지 않는 집이 없다.


          태국인들의 불교에 대한 믿음은 독실하여 스님에게 공양하기 전에는 아침식사를 하지 않는다. 탁발을 마치고 돌아오면 지정된 장소에서 식사를 하게 되는데 절대로 자신의 밥을 퍼서 먹을 수 없다. 절에서 일하는 소년들이 밥과 반찬을 떠서 바쳐야 비로소 먹을 수 있다. 이를 "빡껜"이라 한다. 이는 승려는 남이 주는 밥만을 먹어야 한다는 불타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불교와 태국인

          부모로 부터 신앙을 물려받은 이른바 모태신앙으로 불교가 태국인들에게 수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 태국인들의 정신적, 물질적 불교문화가 다양하게 형성되었다. 태국에는 현재 2만 9천 여개의 사원이 있으며 이 사원은 태국인들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수시로 찾는 곳으로 정신적인 안식처로 또 하나의 집이라 할 수 있다. 태국인들은 절교하는 것을 "시주그릇을 엎는다"고 한다.

          태국인들은 하루를 시작하기에 앞서 승려에게 시주하며 1년을 시작하는 새해 첫날에도 시주로 한 해를 시작한다. 태국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은 단순한 목걸이가 아니라 스님상이다. 태국인들에게는 어느 스님은 질병을 걸리지 않게 하는 영험이 있으며 어느 스님은 재물을 가져다주는 영험이 있고 어떤 스님은 화를 입지 않게 하는 영험이 있다는 등의 믿음이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이 총에 맞았는데 총알이 옷만을 뚫었을 뿐 살갗 하나 다치지 않았는데 그것이 다 그사람 목에 걸고 있는 스님의 영험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스님들은 사고 팔기도 하는데 스님상 중에 어느 것이 영험이 좋다고 알려지면 그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간다. 일부 절에서는 사진을 곁들여 신문에 판매 광고를 내기도 한다.

          태국인들은 태어날 때는 집에서 태어나지만 죽어서는 모두가 절로 간다. 태국의 절 안에는 화장터가 있어 업을 다한 사람의 육신을 화장하고 영혼을 받아들여 쉬게 한다. 태국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태국의 불교를 이해하지 않으면 않된다.

       

       

      출처: http://www.missionthailand.net/thai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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